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도다 기록하였으니(구약성경 인용)
요한복음 8장 15-18절『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도다 기록하였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
신명기 17장 5-6절에 『너는 그 악을 행한 남자나 여자를 네 성문으로 끌어내고 그 남자나 여자를 돌로 쳐 죽이되, 죽일 자를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으로 죽일 것이요,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죽이지 말 것이며』
민수기35장 30절『사람을 죽인 모든 자 곧 살인한 자는 증인들의 말을 따라서 죽일 것이나 한 증인의 증거만 따라서 죽이지 말 것이요』
두 세사람의 증언은 권한있는 재판의 판결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신명기 19장 15절『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여기 "아무 악"이란 율법에서 이탈된 모든 행위를 통털어 하는 말이다. 그래서 당시의 증인은 오늘의 증인과 그 의미가 좀 다르다. 요즘의 증인은 법정에서 자기가 보고들은 것만을 증언하면 된다. 그러나 당시의 증인은 제 삼자의 입장에서 객관적인 진술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상대에게 처벌을 바라는 고발자의 역할을 겸해서 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의 증인만으로 사건을 해결하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두세 사람의 증인을 세우게 하셨다. 오늘날과는 달리 증인이 고소인과 증인의 이중적 역할을 감당하던 상황에서, 만일 증인 한 사람만의 증언에 의하여 재판을 진행할 것 같으면, 그 결과가 일방적으로 판가름 날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부조리를 막기 위하여선 적어도 두명 이상의 증인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예수님은 율법에서 정한 증인과 연계해서 자신이 말씀하시는 말에 대해서 증언자를 내세우는 것이다.『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거하시느니라.』여기에서 두 증언자는 “예수님과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말하는 예수님 자신이 증언자가 될 수 있는가, 그리고 하나님은 보이지도 않고 말씀이 들리지도 않은데, 어떻게 증언자가 될 수 있는가?
요한복음 8장 12절에서『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예수님이 자신은 세상의 빛이라고 하니, 바리새인들이 볼 때, 황당한 것이다. 심지어 예수를 따르면 생명의 빛을 얻을 수 있다고 하므로, 그들이 그런 증거가 어디있는가 라고 하면서 자기가 자기를 위해 증언하는 식이니 참된 말이 아니라고 반박하는 것이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는 그들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자신이 어디서 오고 가는지 모르고, 또 육체를 따라 판단하므로 두 증인도 바리새인들이 판단하는 것처럼 생각하면 안된다는 말이다. 율법에서 나타난 증인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사건에 대해서 증인이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은 눈으로 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영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너희들은 나에 대해서 모르고, 내 아버지 하나님에 대해서 모르지 않는가 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말하는 증인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증언은 다른 차원인 것이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에게 잃어버린 양을 찾는 이야기를 하셨다. 잃어버린 양은 이방인을 의미한다. 작은 자라도 양을 잃어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아혼아홉 마리의 양은 자기의 의를 내세워 자칭 의인이라고 말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말한다. 그들은 예수님을 핍박하고 예수를 증거하는 자들을 핍박했다. 그리고 다시 예수님은 죄를 짓는 형제에 대해서 두세 증언으로 회개하도록 했다. 죄를 짓는 형제는 다름 아닌 바리새인들이다. 율법에 따라 두 세명의 증인을 내세워 회개하도록 해야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생명의 빛에 대한 증언에 대해서 말씀하신 후, 마태복음 18장 18-20절에서 약간 다른 말씀 하신다.『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아이테손타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토 에몬 오노마)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
하늘은 공중을 의미하며, 사탄이 지배하는 곳을 의미한다. 관사가 없는 하늘은 하나님 나라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땅에서는 풀어져야 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땅에서 메이면 사탄의 지배하에 있는 것이고, 땅에서 풀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다는 것이다. 형제를 실족하게 하면 그들이 메이므로 공중 권세잡은 자들 아래 들어간다는 것이다. 임마누엘의 신앙을 가진 자는 땅에서 풀어주는 사역을 해야만 한다. 마귀 권세로부터 풀어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아이테손타이(αἰτήσωνται)는 물어보는(ask) 것이다. 상대방을 실족하게 하는 것은 잘못된 말 때문이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말을 하기 전에 하나님께 여쭈어 보고 말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혼자 물어보는 것은 위험할 수 있다.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두 사람이 하나님께 여쭈어보고 같은 응답이 오면 진짜라는 것이다. 토 에몬 오노마 (τὸ ἐμὸν ὄνομα)는 말씀이신 그 이름으로서 토는 호 로고스를 의미한다.
두 사람의 증거에서 율법은 죽이는 판결을 위한 증인이지만, 복음은 죄인을 살리기 위한 두 사람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살리기 위한 증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부 하나님이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중보자로서 역할을 하시고, 하나님은 심판자로서 역할을 하신다. 그런데, 성부 하나님은 죄사해주심의 모든 권한을 그리스도에게 위임하신 것이다. 따라서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것에 대해서, 증인이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에서 죄를 지은 자에 대해서, 표면적으로는 목사나 장로가 두 증인으로서 권고할 수 있을 것이나, 근본적으로는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회개를 권고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