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글 본문내용
|
다음검색
5 설날이 가까워지자 어느 집에서나 설 준비에 바빴다. 왕룽도 성안에 있는 가게에서 네모난 붉은 종이를 몇 장 샀다. 종이에는 복을 청하는 뜻깊은 글자가 금박으로 써 있엇다. 그 부적을 농기구에 붙여 놓으면 새해에는 복을 많이 받는다는 풍습이 있었다. 왕룽은 그 붉은 종이를 소 멍에에도 붙이고 거름이나 물을 나르는 통과 가래에도 오려 붙였다. 그리고 대문에는 복이 찾아온다는 글귀를 쓴 긴 종이를 붙이고 대문 위에는 꽃 모양으로 오린 붉은 종이를 붙였다. 사당의 지신을 위해서도 붉은 종이를 사 왔는데 늙은이가 그 떨리는 손으로도 모양 있게 종이 옷을 만들었다. 왕룽은 그것을 사당으로 가져가서 두 지신에게 정성들여 입힌 다음 향을 피워 새해의 복을 빌었다. 그리고 섣달 그믐날 밤에 가운뎃방 벽에 붙인 화상에게 정성을 드리기 위하여 붉은 초를 두 자루 샀다. 음식을 차리는 상이 바로 그 밑에 놓이기 때문에 상 위에 촛불을 켜는 것이다. 왕룽은 다시 성안에 있는 장터에 갔을 때, 돼지 기름과 백설탕을 마저 사 왔다. 오란은 그 돼지 기름을 쌀가루에 섞었다. 그 쌀가루는 그들의 논에서 거둔 쌀로 방아를 찧어 만든 열매였다. 오란은 쌀가루에 설탕을 넣고 개어 설떡을 만들었다. 그것은 황부자 같은 집에서나 만들어 먹는 월병(月餠)이었다. 그런 귀한 떡을 만들어서 탁자 위에 늘어 놓는 것을 본 왕룽은 가슴이 터질 듯이 기뻤다. 부잣집에서만 먹는 그런 떡을 만들 수 있는 여자는 이 마을에서는 오직 자기 아내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오란은 그 떡에다 다시 여러 가지 꽃 모양을 놓았다. "이건 먹기가 아까운데......" 하고 왕룽은 중얼거렸다. 곁에 앉았던 늙은이도 그 훌륭한 모양에 정신이 팔려 자리에서 일어설 줄을 몰랐다. "네 삼촌과 사촌을 불러서 구경시키는 것도 좋을 거야." 그러나 왕룽은 생활에 여유라곤 없는 사람들에게 그런 귀한 것을 보여주면 안될 것만 같았다. "설이 되기 전에 그런 귀한 음식을 남에게 보이면 재수가 달아나요." 하고 왕룽은 아버지의 말을 가로막았다. 오란은 손에 가루를 묻힌 채 "이건 우리들이 먹을 음식이 아녜요. 꽃 무늬가 없는 걸로 손님에게 조금 대접하지요. 우리들은 백설탕이나 돼지 기름을 먹을 처지가 아니에요. 이건 황부자 댁 큰 마님께 드리려고 만든 거예요. 초이튿날 그댁에 아이를 업고 갈 때 가져갈 거예요.' 아내의 말을 듣고 보니 그 떡이 더한층 귀하게 여겨졌다. 왕룽은 지난 날 초라한 모습으로 찾아갔던 그 높은 대청에 이번엔 고운 옷을 입힌 아들을 데리고 또 이렇게 귀중한 떡을 선물로 가지고 간다는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흐뭇해졌다. 이와 같이 완벽한 모습으로 정초에 황부잣집을 방문할 일을 생각하니 설날을 위해 준비해야 할 다른 여러가지 일들은 모두 대수롭지 않게 생각됐다. 아내가 새로 만든 검은 무명옷을 입어 보았을 때에도 '황부잣집에 갈 땐 이 옷을 입고 가야지.' 하는 생각 뿐이었다. 초하룻날 삼촌과 이웃 사람들이 놀러와서 마음껏 먹고 마시고 난 뒤 아버지나 자신에게 온갖 축하의 말을 했으나 왕룽의 귀에는 그런 이야기 따위는 거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꽃무늬를 정성스레 놓은 떡을 그들에게 내놓으면 큰일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그 떡을 미리 다른 광주리에다 잘 보관해 두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꽃무늬를 놓지 않은 떡을 맛보고도 맛이 굉장하다고 떠들어 댔다. "그것보다 훨씬 좋은 떡도 있는데 구경이라도 시켜줄까." 왕룽은 그렇게 소리치며 자랑하고 싶은 것을 참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는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황부잣집의 큰 대문 안으로 활개를 치며 들어갈 일만이 기뻤다. 초하룻날은 남자들이 서로 세배하고 마시며 논다. 이튿날은 여자들이 세배를 다니는 날이다. 이날 아침 오란은 새벽 일찍 일어났다. 오란은 어린 아들에게 그녀가 손수 지은 붉은 옷을 입히고 범을 수놓은 신을 신게 했다. 머리에는 왕룽이 그믐날 깎아 준 금부처를 수놓은 모자를 씌워서 침대에 앉혔다. 그리고 왕룽이 옷을 갈아입는 동안 아내는 검고 긴 머리를 빗겨 내려 낭자를 틀어 올리고 왕룽이 사다 준 은도금이 된 비녀를 꽂고 새 옷을 갈아입었다. 그것은 왕룽이 자기 옷감과 함께 마련한 것으로, 스물넉 자를 포목 가게에서 샀던 것이다. 포목 가게에서는 한꺼번에 그처럼 많이 사면 두 자를 더 붙여 주는 것이 상례였다. 차림을 마치자 왕룽은 아들을 안고 아내는 광주리를 들고 성문으로 향했다. 그들은 황량한 겨울 들판을 걸어 갔다. 이윽고 왕룽은 황부잣집 대문 앞에 다다랐다. 그리고 그가 상상했던 대로 기쁜 일이 일어났다. 오란이 부르는 소리에 황급히 뛰어 나온 문지기는 그들의 차림새에 눈이 휘둥그래지며 언제나 하는 버릇으로 사마귀에 난 긴 수염을 만지작거리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아니 왕 서방 아니오. 이번엔 세 사람이 오셨군." 그는 그들이 모두 새 옷을 차려입고 어린 아이까지 안고 있는 것을 보자 다시 말을 이었다. "지난해는 운수가 좋았는가 보구려. 새해에도 많은 복을 받으시오." 왕룽은 손아래 사람에게 대하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농사가 제법 잘 돼서 그래. 풍작이라서......" 하고 말하고는 의기양양하게 문안으로 들어섰다. 문지기는 그만 기가 꺾인 듯이 말했다. "누추하지만 잠시 제 방에서 기다려 주시오. 아주머니를 안으로 인도하고 오리다." 왕룽은 굉장히 큰 집의 안방 마님에게 선물을 가지고 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멀리 사라질 때까지 만족한 듯이 바라보았다. 그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기뻤다. 아내가 안으로 깊이 들어가서 보이지 않자 비로소 문지기 집으로 들어가서 그 곰보 마누라가 인도하는 대로 가운데의 탁자 왼편인 윗자리에 당연한 것처럼 당당한 태도로 앉았다. 그리고 곰보 마누라가 조심스럽게 날라온 찻잔을 보고서도 이따위 차는 먹지 않는다는 듯이 입도 대지 않았다. 문지기가 오란 모자를 안으로 인도하여 다시 돌아나올 때까지의 시간이 왕룽에겐 무척 지루하게 느껴졌다. 왕룽은 아내의 얼굴을 대하는 순간 아내가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그것이 제일 먼저 궁금했다. 그러나 그것은 아내의 표정만으로도 곧 알 수 있었다. 그는 요즈음에야 좀처럼 표정이 없는 아내의 얼굴에서도 쉽게 그 감정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아내는 지극히 만족한 모양이었다. 명절이라 아무 일도 없는 아낙네들만이 모여 있는 뒷방에서의 일이 몹시 궁금했다. 그래서 왕룽은 문지기와 곰보 마누라에게는 눈인사만 하고 아내를 재촉해서 대문 밖으로 나와 아이를 받았다. 아이는 푹신한 새 옷에 싸여서 살포시 잠자고 있었다. "그래, 어땠소?" 그는 뒤따라 오는 아내에게 말을 건넸다. 왕룽은 얼른 아내의 대답을 듣고 싶어 좀이 쑤실 지경이었다. 아내는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와서 나지막이 속삭였다. "그 댁이 금년엔 좀 궁색한 모양이에요." 아내는 마치 신(神)이 굶주리고 있더라는 말을 하듯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왕룽은 그녀의 대답을 재촉했다. 그러나 아내는 아무리 재촉해도 곧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평소 한마디씩 띄엄띄엄 힘들여 말하는 답답한 버릇이 있었다. "큰 마님은 헌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어요. 이런 일은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는데 종들도 새 옷 입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어요." 그러고는 약간 사이를 두고 말했다. "우리 애처럼 고운 옷을 입은 애는 주인댁 안방에도 없었어요." 아내의 얼굴에는 매우 조용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왕룽은 소리를 내서 유쾌한 듯이 큰 소리로 웃었다. 그리고 아들을 다시 한 번 힘차게 껴안았다. 만사가 잘 되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한 가닥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탐스러운 아들을 안고 넓은 하늘 밑을 뽐내며 걷다가 우연히 지나가는 잡귀를 만나면 어떻게 하지. 그는 갑자기 두려운 생각이 나서 황급히 앞섶을 벌려 아들의 머리를 품안으로 집어넣고 큰 소리로 외쳤다. "못난 계집 같으니. 게다가 곰보가 되었으니 누가 너를 달라고 하겠니. 차라리 죽어 버리기나 해라." 아내도 어렴풋이 그 뜻을 짐작이나 한 듯이 얼른 맞장구를 쳤다. "그래요, 그래." 이렇게 하고서야 두 사람은 안심을 했다. 왕룽은 다시 먼저 이야기로 돌아갔다. "그래 그 댁이 왜 궁색해졌는지 물었소?" "이전에 음식을 맡아 보던 내 윗사람과 잠시 이야기를 했는데요." 하고 오란은 대답했다. "그이의 말을 들으니까 그 댁의 젊은 서방님들이 돈을 헤프게 써서 그 큰 집도 오래가지 않을 거래요. 젊은 서방님이 다섯 분이나 계시는데 모두들 먼 외국에 가서 돈을 물쓰듯 하고 계집을 자꾸 사가지곤 싫어지면 본집으로 보낸대요. 그리고 영감님도 해마다 한두 명은 꼭 첩을 얻는대요. 또 큰 마님이 피우시는 아편 값만 해도 돈으로 친다면 금화로 두 신짝에 가득 찰 만큼 많대요." "그러니까 그렇지!" 하고 왕룽은 중얼거렸다. 오란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런데 또 올 봄에 셋째 아가씨 혼사가 있대요. 그 혼수감에 든 돈이 자그마치 공주님 몸값만큼이나 많이 들었대요. 그만한 돈이라면 큰 벼슬을 사고도 남는대요. 아가씨의 옷은 소주(蘇州)나 항주(杭州)에서 특별히 짜 맞추어 짠 것 뿐이고 그 옷을 짓는 데도 상해(上海)에서 일류 재봉사를 불러서 했대요. 아가씨는 절대로 다른 나라 여자들의 유행에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무척 애를 쓴대요." "대체 누구한테 시집 가길래 그렇게 많은 돈을 들일까?" 왕룽은 그 막대한 비용에 놀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부럽기도 했다. "상해의 어느 대관(大官)집 둘째 아들이래요." 하고 오란은 잠깐 쉬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댁엔 돈이 대단히 궁색한 모양이에요. 영감님이 땅을 팔겠다고 말씀하세요. 그 댁의 남쪽 바로 성 밖에 있는 땅인데 위치도 좋지만 언제나 해자(垓字)에서 물을 끌어들일 수 있기 때문에 항상 나락만 심었던 땅이래요." "땅을 팔아?" 왕룽은 황부잣집에서 정말로 돈이 궁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정말 어려운 모양이군. 땅은 농사짓는 사람들에겐 살이나 피와 같은 것인데." 그는 잠시 동안 골똘히 생각에 잠긴 듯이 걷다가 어떤 생각이라도 난 듯 손바닥으로 자기 아미를 탁 쳤다. "진작 그 생각을 못하다니." 하고 그는 아내를 돌아 보았다. "그 땅을 우리가 사자." 두 사람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왕룽은 매우 기뻐했으나 오란은 너무나 뜻밖이라 얼떨떨한 모양이었다. "땅을...... 그 땅은......" 오란은 말을 더듬었다. "나는 꼭 사고 말아." 하고 왕룽은 소리를 더욱 높여 가며 말했다. "저 그 황부잣집의 땅을 꼭 내가 사고야 말겠어." "너무 멀잖아요?" 하고 오란은 놀라서 말했다. "거기까지 걸어가서 농사 짓자면 반나절은 그냥 보낼 거예요." "아무튼 나는 사고야 말겠어." 왕룽은 마치 어머니에게 자기 욕심대로 조르는 아이처럼 고집을 부렸다. "땅을 사는 것은 좋은 일이에요. 돈을 벽 속에 묻어 두는 것보다는 몇천 배나 좋은 일이니까요. 그렇지만 왜... 작은집 땅은 어때요? 우리 서편 밭에 잇달아 있는 땅을 판다는데." 하고 오란은 조용히 말했다. "아저씨 땅 말이오?" 왕룽은 다시 소리를 높여 말했다. "그 따위 땅을 누가 사. 아저씨는 20년 동안이나 거름 한 줌 안 주고 콩깻묵 한 덩이도 넣지 않고 지어 먹었기 때문에 흙이 마치 석회 같아 그 땅은 못써. 나는 기름 진 황부잣집 옥토를 살테야." 그는 '황부잣집' 이란 말을 마치 이웃집 칭 서방네 땅이란 말처럼 쉽사리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였다. 그는 거만하고 호사스런 그 황부잣집에 가서 흥정을 해 볼 생각이었다. "돈을 가지고 왔소. 땅값이 얼마요?" 하면서 영감이나 관리인에게, "나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대해 주시오. 시세대로 말씀하시오. 돈은 있으니까." 하고 당당하게 말하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그리고 그 부잣집에서 종 노릇을 하던 그의 아내가 지금까지 몇 대를 내려오면서 그 집의 큰 밑천이었던 그 땅의 일부분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오란도 왕룽의 생각을 알아챈 듯 자기 고집을 굽혔다. "그러시다면 사도록 해요. 아무튼 논은 기름지고 좋을 테니까요. 또 해자가 가까워서 가물어 벼를 못 심는 일도 없으니까요." 다시 만족스런 미소가 오란의 얼굴에 살짝 피어 올랐다. 그러나 그녀의 실낱같이 검은 눈의 우울한 빛까지는 번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한동안 있다가 문득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작년 이맘 때 나는 그 댁의 종이었는데......" 그들은 이런 일들을 생각하면서 묵묵히 걸었다. |
첫댓글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