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카르마의 법칙과 용서의 법칙
사람은 자신이 내어준 것만 받습니다. 인생 게임은 부메랑 게임입니다. 사람의 생각, 행동, 말은 조만간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게 그 사람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이것이 카르마의 법칙으로, 카르마란 산스크리트어로 “되돌아 옴”을 뜻합니다.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예시가 되는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한 친구가 자신에게 있었던, 이 법칙과 관련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 적이 있습니다. 그녀는 “나는 우리 이모를 통해서 카르마를 만들곤 해. 내가 무슨 말이든 이모에게 하면 다른 누군가가 그 말을 똑같이 나에게 한다니까. 집에 있을 때면 종종 짜증날 때가 있어. 어느 날도 저녁 식사 때 이야기를 하던 이모에게 더 이상 말하지 마, 조용히 먹고 싶어.”라고 짜증을 냈어. 그다음 날, 나는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었던 한 여성분과 점심을 먹게 되었는데, 내가 활발하게 말하고 있을 때 그녀가 “더 이상 말하지 마요, 조용히 먹고 싶다고요! 라고 짜증을 내더군.”이라고 했습니다. 내 친구는 의식이 높아서 그녀의 카르마는 정신적인 차원에서 다른 이들보다 훨씬 빨리 돌아옵니다.
사람이 더 많이 알수록, 그는 더 많은 책임을 져야 하며, 영적인 법칙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결과적으로 큰 고통을 겪습니다.
“주님(삶이라는 게임의 영적인 법칙)을 경외(두려워)하는 것이 지혜의 시작입니다.”
법칙이라는 단어를 읽으면 성경의 많은 구절이 훨씬 더 명확해질 것입니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법칙)
복수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영적인 법칙입니다. 신은 인간이 완벽하고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상상)되었으며 “권능과 통치권”을 받았다고 봅니다.
이것은 신성한 마음(초의식)에 등록된 인간의 완벽한 생각(상)이며, 인간이 인식해주길 기다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신이 보는 대로만 될 수 있고, 자신이 본 자신이 얻는 모습 대로만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관찰자가 없이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고대 속담이 있습니다. 인간은 그것이 현실이 되기 전에, 자신의 상상 속에 설정된 장면 속에서 먼저 자신의 실패나 성공, 기쁨이나 슬픔을 봅니다. 우리는 어머니가 자녀의 질병을 상상하거나, 여성이 남편의 성공을 상상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불행한 상황에서의) 자유가 앞을 통해 온다는 것을 봅니다. 이는 영적 법칙에 대한 앎입니다.
순종은 권위보다 앞서고, 법칙은 인간이 그 법칙을 따를 때 복종합니다. 전기의 법칙은 인간이 전기를 그의 하인으로 다루기 전에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무지하게 다루면 전기는 인간의 치명적인 적이 됩니다. 마음의 법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가 되는 사건을 들어 보겠습니다. 강한 개인적 의지를 가진 한 여성이 지인이 소유한 집을 소유하고 싶어했고, 종종 자신이 그 집에서 사는 모습을 정신적으로 그렸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남자가 죽고 그녀는 그 집으로 이사했습니다. 몇 년 후, 영적 법칙에 대한 지식을 얻은 그녀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 남자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래요, 당신의 욕망은 너무나 강해서 모든 것이 그 욕망을 위해 길을 열었지만, 당신은 카르마적인 빚을 갚아야 했습니다. 당신이 헌신적으로 사랑했던 당신의 남편도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고, 그 집은 수년간 당신 손에 있는 애물단지였습니다.”
그러나 어쨌건 간에 원래의 집주인이 영적인 진리에 대해 알고 있었다면 그녀의 생각에 영향을 받지 못했을 것이고, 그녀의 남편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영적인 진리가 아닌) 카르마적 법칙에 따라 살았습니다. 그 여자는 (집에 대한 큰 욕망을 느끼면서) “무한한 지성이시여, 나에게 이 집과 똑같이 매력적인 올바른 집을 주세요. 신성한 권리에 의해 내 것이 된 집을요.”라고 말했어야 했습니다.
신성한 선택은 완벽한 만족을 주는, 모든 사람에게 좋은 것을 가져왔을 것입니다.
신성한 패턴은 일하기에 유일하게 안전한 패턴입니다.
욕망은 엄청난 힘이며, 올바른 경로로 향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혼돈이 뒤따릅니다.
인생이란 게임의 영적인 법칙을 증거하고 증명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단계는 첫 번째 단계인 “올바르게 요청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항상 신성한 권리에 의해 자신에게 적합한 것만을 요청해야 합니다.
다시 설명으로 돌아가서, 만약 여자가 “내가 원하는 이 집이 내 것이라면, 나는 이를 잃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이 집에 상응하는 것이 내게 올 것입니다”라는 태도를 취했다면 남자는 조화롭게 이사를 결정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그녀를 위한 신의 선택이었다면 말입니다. 그것이 아니면 다른 집으로 대체되었을 것입니다. 개인적 의지로 강제로 실현된 것은 언제나 “부당하게 얻은 것”이며, “항상 나쁜 성공”을 거듭니다.
여기서 인간은 “내(올바른 법칙) 뜻대로 되어야지 네 뜻대로 되어서는 안 된다”는 영적 교훈을 얻게 될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인간은 개인적 의지를 포기할 때 언제나 원하는 것을 정확히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무한한 지성이 그를 통해 일할 수 있게 됩니다.
“가만히 서서 여호와(법칙 혹은 순리)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여기 예시가 될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 여성이 큰 고통 속에서 저를 찾아왔습니다. 여성의 딸이 매우 위험한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고, 여성은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그녀는 딸과 언쟁을 벌이고, 마주치게 될 위험을 지적하고, 딸이 가는 것을 금지했지만 딸은 점점 더 반항적이고 단호해졌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어머니에게 “당신은 그럴 권리가 없는데도 당신의 개인적인 의지를 딸에게 강요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그가 두려워하는 것을 끌어들이게 되어 있기 때문에 여행에 대한 당신의 두려움은 그런 상황을 끌어당길 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이 상황으로부터 정신적으로 손을 떼고 신성의 손에 맡긴 상태로 이 문장을 활용하세요.”라고 덧붙였습니다.
“이 여행이 신의 계획이라면 더 이상 저항하지 않고 무한한 사랑과 지혜의 손에 맡기겠습니다. 이 여행이 신의 계획이라면 축복하고 신의 계획이 아니라면 이미 무산되었음에 감사를 표합니다.”
그 후 하루나 이틀 후 딸이 “어머니, 여행가지 않을게요.”라고 말했고 상황은 “본래의 무(無)”로 돌아갔습니다.
이것은 인간에게는 너무 어려워 보이는 ‘가만히 있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무저항의 법칙에 관한 장에서 이 법칙을 더 자세히 다룹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것의 또 다른 흥미로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한 여성이 은행에서 위조된 20달러 지폐를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은행 직원들은 절대 실수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며 매우 불안해했습니다.
나는 “상황을 분석해서 왜 이 상황이 끌어당겨진 건지 알아냅시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한 후 외쳤습니다.
“알겠어요. 농담할 때마다 친구에게 가짜로 만들어진 모조 돈을 많이 보냈어요. 공수표 날리듯이요.”
그래서 법칙도 똑같이 그녀에게 모조 돈을 보냈는데, 그건 이 법칙이 농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제 용서의 법칙을 호소하고 상황을 중립화해 봅시다.”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용서의 법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카르마 법칙의 저주에서 구원했고, 각 사람 안에 있는 그리스도는 모든 불화한 상황에서 구세주이자 구원입니다.
그래서 나는 말했습니다. “무한한 영이여, 우리는 용서의 법칙을 호소하고 그녀가 법칙 아래가 아니라 은혜 아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신성한 권리에 의해 그녀의 소유인 이 20달러를 잃지 않게 되었음에 감사합니다.”
“이제,” 내가 말했습니다. “은행으로 돌아가서 두려움 없이 이 수표가 실수로 당신에게 주어졌다고 말하세요.”
그녀는 그렇게 했고, 놀랍게도 그들은 사과하고 그녀에게 또 다른 지폐를 주며 그녀를 매우 정중하게 대했습니다.
이처럼 법칙에 대한 지식은 인간에게 “자신의 실수를 지워버리는” 힘을 줍니다. 인간은 외부를 자신의 안에 속한 것이 아닌 무언가로 강제할 수 없습니다.
만약 그가 부를 원한다면, 그는 먼저 의식적으로 부유해야 합니다.
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한 여성이 풍요를 위한 치유를 요청하며 나에게 왔습니다. 그녀는 집안일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그래서 그녀의 집은 매우 어수선했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부자가 되고 싶다면, 당신은 정돈되어 있어야 합니다. 큰 부를 가진 모든 이에겐 정돈된 질서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질서는 천국의 첫 번째 법칙입니다.”
나는 “바늘꽂이에 꽂혀있는 불타버린 성냥으로는 결코 부자가 될 수 없습니다.”라고 덧붙였습니다.
그녀는 유머 감각이 좋은 사람이었고, 즉시 집안을 정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가구를 재배치하고, 서랍장을 정리하고, 양탄자를 닦았습니다. 그러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친척으로부터 큰 재정적 선물을 받았습니다.
이 여성은 스스로 변신했고, 항상 외부를 살피고 번영을 기대함으로써 재정적으로 긴장을 유지했습니다. 또 신이 그녀의 공급원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든 선물과 물자들이 투자와 다름 없다는 사실과, 모든 걸 쌓아만 두고 아끼기만 하면 언제나 손실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모릅니다.
“(가진 것을)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여기 그 예시가 있습니다. 나는 모피 안감이 있는 외투를 사고 싶어 하는 남자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와 그의 아내는 여러 상점에 갔지만, 원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그것들이 모두 너무 싸구려처럼 보인다고 말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하나를 보았고, 판매원은 천 달러의 가치가 있다고 말했지만, 관리자가 계절이 늦었기 때문에 500달러에 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가진 재산은 약 700달러였습니다. 논리적인 생각에만 의존하는, 재고 따지고 비판하는 마음이라면 “당신은 코트에 거의 모든 것을 쓸 여유가 없을 거야”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매우 직감적이었고 결코 따지고 들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돌아서서 “이 코트를 사면 엄청난 돈을 벌 수 있을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내는 마지못해 동의했습니다.
약 한 달 후, 그는 1만 달러어치의 의뢰를 받았습니다. 그 코트는 그에게 부유함의 느낌을 주었고, 그를 성공과 번영으로 연결했습니다. 코트가 없었다면 그는 그 1만 달러를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큰 배당금을 주는 투자였습니다!
인간이 지출하거나 누군가에게 주어야 한다는 이러한 인도를 무시한다면, 같은 양의 돈이 재미없거나 불행한 방식으로 쓰일 것입니다.
여기 그 예시가 있습니다. 한 여성이 추수감사절에 가족에게 추수감사절 저녁 식사를 할 여유가 없다고 말했다고 저에게 말했습니다. 그녀는 돈이 있었지만 그것을 아껴놓기로 했습니다.
며칠 후, 누군가가 그녀의 방에 들어와서 옷장 서랍에서 저녁 식사 비용과 정확히 같은 금액을 꺼냈습니다.
이처럼 법칙은 항상 두려움 없이 지혜롭게 지출하는 사람을 지지합니다.
이것은 또 다른 예시입니다. 나의 학생 중 한 명이 어린 조카와 함께 쇼핑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가 장난감을 요구하자 그녀는 장난감을 살 여유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녀는 갑자기 자신이 부족함을 찾고 있었고, 하느님을 자신의 공급원으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장난감을 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거리에서 정확히 그 장난감을 사려고 지불한 만큼의 돈을 주웠습니다.
이러한 공급은 온전히 신뢰할 때 고갈되지 않고 변함이 없지만, 믿음이나 신뢰가 증명에 앞서야 합니다.
“너희 믿음대로 되라.”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환상을 견고하게 유지하고, 부정적인 그림들은 사라지고 사라지며,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예수 그리스도는 카르마의 법칙보다 더 높은 법이 있다는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 법칙은 카르마의 법칙을 초월합니다. 그것은 은혜의 법칙, 즉 용서의 법칙입니다.
그것은 인간을 원인과 결과의 법칙, 즉 인과의 법칙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법입니다.
“이는 너희가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이러한 차원에서 인간은 자신이 뿌리지 않은 곳에서 거둔다는 것을 우리는 들었습니다. 신의 선물은 그저 그에게 부어집니다.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이러한 지속적인 행복 상태는 인간이라는 종족에 한정된[또는 세인(世人)들의 기준에 한정된] 생각을 이긴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세인(世人)들의 생각 속에는 환난이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하였습니다.
세인들의 생각은 죄, 질병, 죽음에 대한 것입니다. 허나 그리스도는 그것들이 완전히 비현실적임을 보고 질병과 슬픔이 지나가고 마지막 원수인 죽음 자체가 이겨질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이제 과학적 관점에서 영원한 젊음과 영원한 삶에 대한 확신으로 잠재의식에 각인을 찍음으로써 죽음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방향성 없는 단순한 힘인 잠재의식은 질문 없이 명령을 수행합니다. 초의식(인간 안에 있는 그리스도 또는 신)의 지시에 따라 일하면 “육체의 부활”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인간은 더 이상 죽음과 함께 자신의 육체를 벗어던지지 않을 것이며, 월트 휘트먼이 자신의 시 속에서 노래한 “전기적인 육체”로 변형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성, 특히 기독교는 죄의 용서와 “텅 빈 무덤” 위에 세워졌기 때문입니다.
(플로렌스 스코블 쉰 『인생 게임과 그 법칙』 신우빈 옮김. 유페이퍼,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