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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극대도] 1권 제4장 첫 살인의 이름은 복수(復讐)였다 ① 팽후는 토끼를 잡지 못했고 굽지도 못했다. 그 모든 것을 단호삼 이 해냈고 그는 먹기만 했다. "어서 들게, 응? 이거 맛있구먼." 저 혼자 다 먹어치운 그는 나무둥치에 몸을 비스듬히 기대 토끼 갈비뼈로 이를 쑤시며 물었다. "쩝쩝! 그래, 그 사 아저씨라는 사람한테 무공을 배웠단 말이지?" 단호삼은 뼈를 묻을 요량으로 구덩이를 파며 대답했다. "그렇소." 문득 팽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름도 모르고 그냥 사 아저씨로 통한다? 거 참! 이상한 사람이 군. 무공을 가르쳐 주면서도 이름을 알려주지 않다니." 그러다 무슨 생각이 났는지 그는 눈빛을 빛내며 은근한 어조로 물 었다. "혹, 자네 보기에 그 사람이 무슨 큰 죄를 짓고 쫓기는 사람 같지 는 않던가? 예를 들면 말이야……." 하는데 단호삼이 고개를 들었다. 맑고 그윽한 눈에는 분노가 가득 했다. "그만두시오! 더 이상 그분을 욕되게 하는 말을 하면 가만있지 않 겠소!" 팽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을 내저었다. "알았네. 안하면 될 것 아닌가. 그만한 일로 사람을 그리 뭐라 하 다니, 내가 쑥스럽지 않나?" 너스레를 떠는 모습에 단호삼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만둡시다. 그런데 왜 나를 산적으로 만들려고 하는지 그 이유 나 압시다." "자네 갈 때나 있나?" 그 말에 단호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렇군. 이 넓은 천하에 이 한몸 붙일 곳이 없어.' 벌써 두 번째다. 처음 고향을 떠나올 때도 쫓겨나듯 도망쳤다. 그 런데 이번에도 그렇다. 단호삼은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없소." "그럴 줄 알았네." 일단 승기를 잡은 팽후는 느긋해졌다. 그는 상체를 바로 하며 입 을 열었다. "나도 애초부터 산적이 아니었네. 천하를 떠돌던 낭인(浪人)이었 지. 참! 낭인이 뭔지 아는가?" 그걸 모를 사람이 어디 있겠나? 그러나 팽후의 말속에 다른 의미 가 들어 있음을 안 단호삼은 고개를 끄덕여 안다고 표현한 다음 말했다. 자신이 모르는 새로운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솟구쳤기 때 문이다. "계속해 보시오." "그러지." 가볍게 대답한 팽후는 시선을 허공으로 돌렸다. 어두워져 가는 하 늘처럼 그의 얼굴도 그리 밝은 빛이 아니었다. 말없이 그렇게 하 늘만 쳐다보던 그는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입을 열었다. "낭인들이란 말 그대로 이리 같은 자들이지. 한곳에 머물지도, 매 달리지도 못해. 그래서 낭인이라 부르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잠시 말을 끊은 팽후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얹혔다. "그래도 낭인에게는 나름대로의 멋은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지. 하 나 나는 알고 있네. 그것은 초라해지지 않으려는 몸부림이라는 것 을! 기실 그들 마음 깊은 곳에는 정착을 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그러나 그들에게는 정착할 곳이 없지. 그래서 떠도는 것이고, 나 도 마찬가지였지. 정(情) 붙일 곳이 있다면 미쳤다고 떠돌아다니 겠는가." 무거운 이야기 탓인가? 듣고 있던 단호삼의 얼굴이 굳어졌고, 팽 후는 여전히 허공 어딘가를 더듬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다 나는 우연히 곡서령을 지나다 산적을 만나 두령인 황영을 죽이게 되었지. 그러다… 아!" 말을 하던 팽후는 불현듯 어떤 생각이 떠올라 말을 멈추고 단호삼 을 쳐다보았다. "그 다음 이야기는 자네도 소문을 들어 알겠지?" 단호삼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알고 있습니다." "좋아. 그렇다면 이후의 이야기는 필요 없고……." 이어 그는 은근한 눈빛을 보내며 물었다. "산적 생활이라는 게 보기보다는 썩 나쁘지는 않다네. 나름대로… 자네가 보다시피 의리도 있고, 정도 있다네. 물론 힘없는 약자를 털어먹고 산다는 것이 나쁜 일이기는 하지만 처음 태어날 때부터 산적이 되려고 태어난 것도 아니고. 어차피 세상은 약육강식인 터 … 자네에게 갈 곳이 생기면 미련 없이 보내 주겠네. 그 동안만이 라도 같이 생활을 하고 싶은 것이 내 솔직한 심정일세. 어떤가? 그래도 생각 없나?" 단호삼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이제부터는 혼자서 모든 것을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팽후 의 말처럼 갈 곳도 없고 할 일도 정해져 있지 않다. 한데 왜 하필 처음으로 할 일이 산적이란 말인가?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러다 문득, '강호(江湖)…….' 산적도 강호인이라는 생각이 들자 왠지 피가 뜨거워졌다. 깊은 내 면 속에서 자신도 깜짝 놀랄 만치 뜨거운 그 무엇이 솟구쳐 오르 고 있었다. 사 아저씨가 있는 강호! '그래, 이것이 내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이제 피하지 않겠다!' 단호삼은 백혼검을 부서져라 움켜잡으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대신 어두워지려면 시간이 남았으니 강호무림에 대해 서나 이야기해 주시오." 기다리고 있던 대답이었다. 팽후는 극히 만족스러웠다. "좋아! 내 이야기해 주지."모 ② 낭인은 떠돌이 생활이라 많은 것을 보고들을 수 있었다. 그래서 팽후는 성심성의껏 강호에 대해, 그리고 당금 강호를 주름잡는 고 수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작금의 강호에는 천하제일인은 없지만 천하제일검이라 불리 는 사람은 있다네. 그의 이름은 사하립으로 무면탈혼검이라 부르 지. 그 이유는……." "잠깐! 그 사하립이라는 분은 어떻게 생겼습니까?" 부지간 단호삼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팽후는 싱긋 웃었다. "나도 본 적은 없네. 하지만 동성(同性)이라고 같은 사람일 수는 없지. 오! 그리고 보니 그 아저씨라는 사람에게서 십 년 간 무공 을 배웠다고 했나?" "그렇소." 속마음을 들켜서인지 단호삼의 대답이 불퉁했지만 팽후는 개의치 않고 다시 물었다. "어떤 무공을 배웠는지 알려 줄 수가 있겠나?" 하고 물은 그는 손을 저으며 이유를 설명했다. "오해는 말게. 배운 무공이 뭔지 알면 사 아저씨라는 사람에 대해 알 수가 있을 것 같아 그러네." 원래 자신이 연마한 무공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이 강호인의 속마음이다. 설혹 그것이 강호에 널리 알려져 있는 무공이라 할지 라도 스스로 말하지도, 상대에게 묻지도 않는다는 것이 철칙이었 다. 단호삼은 잠시 머뭇거렸다. 말해 주기가 싫어서가 아니라 자신이 배운 무공이 어떤 것인지 알기 때문이었다. '비밀스런 무공도 아닌데, 뭐.' 그것에 위안을 삼으면서도 단호삼은 약간 쑥스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육합검법이오." 순간 팽후의 입이 쩍 벌어졌다. 띵해진 골은 '어이없지, 응?' 하 고 묻고 있었다. 그의 표정을 힐끗 살피던 단호삼은 슬며시 고개를 숙이며 중얼거 렸다. "육합권(六合拳)도 배웠는데……." 더 이상 참는다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배반하는 행위이다. "뭐? 푸하하핫!" 포복졸도할 일이다. 감방에서 보았던 그럴 듯한 몸놀림은 말짱 꽝 이었다. 부하들은 손이 묶여 있었고, 단호삼은 자유로웠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눈부시게 보였던 것이 분명했다. 결정 났다. 사 아저씨인지 하는 작자는 삼류무사도 못되는 사람으 로 착한 단호삼 앞에서 개폼을 잡은 것이 분명했다. 얼마나 웃었는지 멈추기도 힘들었다. "꺼이… 커끅!" 꼭 숨넘어가는 사람처럼 기이한 웃음 끝에야 겨우 멈출 수 있었 다. "나라도 제대로 된 무공을 가르쳐 줘야겠어." 입속으로 읊조린 팽후는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불쑥 손을 내밀었 다. "검을 이리 줘봐." 한참 무안해 있던 단호삼은 뜻밖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 다. "예? 검은 왜요?" 문득 팽후는 엄숙한 표정을 지었다. "이류무사인 내가 보기에도 자네는 무예를 익히기에 아주 좋은 체 격과 근골을 가지고 있네. 그런 자네가 겨우 육합검법 따위의 나 부랭이라니. 끌끌! 이는 진실로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 말을 하던 도중 비유가 이상함을 느낀 그는 황급히 손을 저으며 수정 작업을 하였다. "돼지는 육합검법이고, 자네는 진주 목걸이라는 말이니, 곡해하지 말게." 단호삼은 쓴웃음을 지었다. "알았소." 글줄이 짧은 팽후는 말을 길게 끌어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 을 재차 인식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내 친구 중에… 뭐, 굳이 친구라고 할 수도 없지만… 아무튼 낙 일검객(落日劍客) 영호초(永虎礎)라는 자가 있는데, 그 자는 과거 공동파( 派)에서 무예를 닦은 자로 낭인 세계에서 제법 알려진 친구지." 말을 하다 보니 또 길어진다. 팽후는 내심 '짧게! 짧게 말하자!' 라고 다짐하며 입을 열었다. "간단히 말해서 그 친구에게 은자 열 냥을 주고 낙일검법을 배웠 네. 그것을 자네에게 가르쳐 주겠다는 걸세. 어때? 이해가 되나?"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단호삼은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사부라 부르라고 하면 배우지 않겠습니다." 무슨 말이 나오려나 하고 기다리고 있던 팽후의 입가에 슬며시 웃 음이 맺혔다. "하하, 난 또 무슨 말이라고. 우리와 함께 있는 동안 그냥 두령이 라 부르게. 그러면 되겠나?" 단호삼은 벙긋 웃었다. "좋습니다." "자, 그럼 검을 이리 주게나." "여기." 단호삼은 몸을 일으켜 백혼검을 건넸다. 한데 백혼검을 받은 팽후 가 돌연 미간을 찌푸리며 한심스럽다는 투로 물었다. "자네 검법을 배우려는 것인가? 아니면 도법(刀法)을 배우려는 것 인가?" 단호삼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백혼검이 무게 때문 에 이상하게 보일 것이나 자신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딱 맞다고 굳이 설명할 필요가 있겠는가. ③ 그가 대답을 않자 쑥스러워 그러리라 생각하면서도 팽후는 한소리 를 했다. "쯔쯔! 그 아저씨란 사람 정말 검법의 기본도 모르는 사람이군. 제아무리 천하제일의 보검을 지니고 있으면 뭘해? 가진 사람이 엉 망인데." 주절거리던 그는 다시 백혼검을 단호삼에게 주며 일장 연설에 들 어갔다. "도로 받게. 이걸로는 검법을 연마할 수가 없네. 모름지기 검법은 이유를 막론하고 빨라야 하고, 도법은 중후(重厚)해야 하는 법! 그러기 위해서는 검은 가볍고 날카로울수록 좋은 게야. 그러나 그 검은 날카로우나 가볍지 않으니 검은 검이되,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검이야. 아! 쓰임새가 딱 한군데 있기는 하군."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두 번이다. 하물며 존경하는 사람에 대해 비꼬는데 좋아할 사람은 없다. 단호삼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하나 팽후는 그것도 모르고 옆에 있는 나뭇가지를 꺾어 잔가지를 분지르며 히죽 웃어 보였다. "아까처럼 쇠사슬이나 자르면 되겠군그래." 그 순간이었다. 쉬익―! 칼날 같은, 아니 칼날보다 더 날카로운 바람이 팽후의 턱 밑을 스 쳤다. "어헉! 뭐, 뭐야?!" 대경실색한 팽후의 눈에 하늘거리며 떨어지는 작은 터럭이 보였 다. 손톱 길이보다 작은 털이 무수히 날리고 있었다. '설마?' 팽후는 손을 들어 자신의 턱을 만졌다. 없었다. 감옥에 갇힌 뒤로 면도를 하지 못해 까칠해져 있던 턱수염이 몽땅 달아난 것이다. 부릅떠진 눈이 단호삼의 손으로 향했다. 그대로였다. 그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고, 백혼검도 곱게 검집에 꽂혀 있었다. 달라진 것 이 있다면 무섭게 쏘아보는 단호삼의 눈뿐이었다. 꼭 귀신에게 홀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핏기가 싹 가신 팽후의 턱이 떨렸다. "자, 자네가 방금 칼질… 을 했는가?" 단호삼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일전에 내가 분명 경고하지 않았소? 사 아저씨를 욕되게 하는 말을 하지 말라고!" 이제 확실해졌다. 귀신놀음이 아니라 단호삼의 짓인 것이다. 하나 팽후는 믿을 수 없었다. 자신은 비록 이류무사이나 천하를 주류하 면서 많은 고수들을 보았다. 그러나 이렇게 빠른 칼질을 본 적은 없었다. 더욱이 검 같지도 않은 검으로 말이다. 팽후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단호삼을 가리키며 띄엄띄엄 입을 열었 다. "자네 분명 육합검법밖에 익히지 않았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그게 육합검법이란 말인가?" "육합검법의 횡단천지요." "그래. 그렇단 말이지……." 완전히 넋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던 팽후는 제정신을 찾으려는 듯 머리를 좌우로 세차게 흔든 후에 말했다. "다시 한 번 더 보여줄 수가 있겠나?" 단 한 번도 사람을 상대로 검을 휘두른 적이 없는 단호삼은 팽후 가 왜 저리 놀라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싫소. 정 보고 싶다면 다시 사 아저씨를 욕되게 하시오. 그럼 볼 수가 있겠지요. 하지만 이번에는 수염이 아니라 목을 겨눌 것이 오." "목!!" 주춤 뒷걸음치던 팽후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자신도 모르게 목 으로 손을 가져갔다. 다행히 붙어 있었다. 앞으로 다시는 사 아저 씨인지 하는 사람을 욕되게 하지 않으리라고 다짐하며 슬그머니 나뭇가지를 늘어뜨리며 중얼거렸다. "이건 필요가 없겠어." "아니 왜요?" 단호삼의 물음에 팽후는 씁쓸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자네에게 검법을 가르친다는 것은 번데기 앞에서 주름을 잡 는 것과 같은 이치. 하지만 무척 섭섭하네. 자네는 날 속이고 있 어." 뚱딴지같은 말에 단호삼을 멍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고. "속이다니요? 내가 뭘 속였단 말이오?" 팽후는 눈알을 부라리며 언성을 높였다. "조금 전에 펼친 것이 정말 육합검법의 횡단천지인가? 난 별 볼일 없는 육합검… 제기랄! 검법 축에도 들지 못하는 것이 어떻게 그 리 빠를 수가 있나! 그럴 것 같으면 절세무공 따위가 무슨 필요가 있나? 차라리 죽을 때까지 육합검법이나 익히지." 이제야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깨달은 단호삼은 진지한 얼굴로 입 을 열었다. "맞는 말이오. 나는 이 육합검법을 십 년이나 익혔지요." "뭐야!!" 팽후의 눈이 퉁방울만 해졌다. 이 눈을 보고 누가 새우눈이라 놀 리겠는가? 한참 후에야 다시 새우눈으로 돌아온 그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푸우, 십 년이라 말이지. 그래, 십 년을 익혔더니 그렇게 되었다 고? 가만……." 팽후는 손가락으로 이마를 톡톡 치며 주절거렸다. "육합검법의 검식(劍式)이 어떻더라. 이거야 원, 너무 오래돼놔서 기억이 잘… 오! 맞아. 이제 기억이 났다." 이어 그는 첫 초식인 일도양단을 시전하기 위해 나뭇가지를 머리 위로 쳐들었다. 이어서 밑으로 내리긋고 다시 쳐 올렸다. 휙! 하고 바람 소리가 나는 것을 보니 딴에는 보지는 못했지만 단 호삼만큼 빠르고 날카롭게 하려고 무진 애를 쓰는 모습이 역력했 다. 하나 그의 자세를 유심히 살피던 단호삼은 한숨을 내쉬며 고 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모양새는 같다. 단호삼이 처음 육합검법을 배울 때처럼. 하지만 같은 육합검법이라도 자신이 시전할 때와는 천양지차가 있 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이 나지 않는지 검식에 따라 보법이 변해야 하건만 팽후의 발 움직임은 마치 술 취한 사람처럼 흐느적 거리고 있는 것이다. '제기랄! 창피스럽군.' 곁눈질로 단호삼의 눈치를 살피고 있던 팽후는 그가 적이 실망한 표정이자 우뚝 몸을 멈춘 채 무서운 눈으로 쏘아보며 입을 열었 다. "잘 보게." 이어 그의 몸과 팔이 빠르게 움직였다. 핑! 핑! 허공을 찢는 날카로운 바람 소리가 들리며 움직임에 따라 나뭇가 지에서 싸늘한 검화가 피어나기 시작했다. ④ 어디 그뿐인가? 츄릿―! 칼 그림자까지 생겼다. 난생처음 보는 변화에 단호삼은 부지간 탄 성을 발했다. "엇! 그게 무슨 검법이오?" '흐흐, 저 놀라는 것 좀 봐. 흐흐, 그럼 그렇지. 어디 육합검법 따위가 낙일검법과 비교가 되려고.' 팽후는 좀 전의 창피가 말끔히 씻기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입을 열어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자신은 절세고수처럼 운공 도중에 말까 지 할 재간이 없었기에. 잠시 후, 낙일검법 전단식(前段式)의 마지막 초식인 낙일추월(洛 日追月)을 마친 후에야 몸을 세운 그는 약간 거칠어진 호흡을 가 다듬었다. 기실 아무리 이류무사지만 이 정도에 호흡이 거칠어질 정도는 아니었다. 기억 속에 사라진 육합검법을 시전한답시고 창 피를 당해 그것을 만회하느라 십이성 내공으로 낙일검법을 펼친 까닭이었다. 호흡을 가다듬은 팽후는 만면에 흐뭇한 웃음을 띠고 말했다. "이게 바로 낙일검법의 전단식이지. 어떤가? 육합검법과는 차원이 다르지 않나?" 단호삼은 부인할 수가 없었다. 육합검법보다 서너 단계 높은 변화 의 검[變劍]이었기에.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어색했고, 빈틈도 많았다. 저 정도면 육합 검법의 삼초식인 사선좌단(斜線左斷)으로 충분히 파훼시킬 수 있 을 것 같았다. 또한 자신이 펼치면 좀더 완벽해질 것도 같다는 당 찬 생각을 하며 대답했다. "확실히 다르오. 한데… 뭔가 빠진 것 같군요." 팽후는 대수롭지 않게 받아 넘겼다. "그야 당연하지. 낙일검법은 원래 전단과 후단으로 나뉘어져 있는 데 내가 방금 시전한 것은 전단삼초거든. 후단식은 공동파에서도 장로급 이상이 되어야만 연마할 수 있는 절세검공이니 어찌 영호 초 같은 일반 제자가 연성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 순간 팽후가 간과한 사실이 있었다. 영호초에게 낙일검 법을 배운 후, 많은 노력을 하였다. 그래서 구성 정도의 성취를 이룬 지금에야 전단식에 허점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 는 중이었다. 그런데 단호삼은 단 한 번에 그 허점을 간파한 것이 다. "그랬군요." 고개를 끄덕이고는 있지만 지금 단호삼은 썩 명쾌한 대답을 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팽후가 시전한 낙일검법을 기억하며 잠깐 생 각에 잠겼다. '사 아저씨 말씀이 맞아. 기초가 부실한 사람은 천하제일의 무공 을 연마해도 그 위력이 반감된다는 것이. 그리고 또 사람의 재질 과 노력에 따라 성취도의 차이가 있다는 말씀도 옳아. 그럼 난 과 연 사 아저씨의 말씀대로 검(劍)의 끝을 볼 수가…….' 그때, "자네 뭘 그렇게 깊이 생각하나?" 단호삼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생각하기를 멈춘 그는 가만히 고개 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말? 흐흐흐." 음흉한 웃음을 머금고 되묻는 팽후의 모습에 영문을 알지 못하는 단호삼은 커다란 눈을 끔벅이며 대답했다. "그렇다니까요." 팽후의 얼굴이 더 음흉하게 변했다. "흐흐, 낙일검법을 생각하고 있었지 않은가?" "그걸 어떻게?" 움찔하는 단호삼을 보는 팽후는 자신의 짐작이 맞아떨어지자 더욱 기분이 좋아졌다. "이래봬도 내가 강호 밥을 먹은 지 벌써 이십 년이 넘네. 그 정도 면… 그래, 자네가 외갓집에 있을 때부터겠군." 단호삼은 어리둥절했다. 그 당시면 태어나지도 않았을 뿐더러 돌 아가신 모친은 고아(孤兒)라 외갓집이 없지 않은가? 그래서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외갓집이라니요?" 팽후는 단호삼 덕분에 깨끗하게 면도가 된 턱을 쓰다듬으며 희미 하게 웃었다. "생긴 것은 그렇지 않은데 맹한 구석이 있군. 외갓집이란 바로 자 네가 모친 뱃속에 있을 때를 말하는 걸세. 그러니 자네 속마음을 모를 리가 있겠나?" '윽! 그런 뜻인가.' 졸지에 태아로 전락한 단호삼이 괜한 걸 물었다고 후회할 때, 팽 후는 나뭇가지를 들어올려 낙일검법의 기수식을 취했다. "아무리 낙일검법의 전단식이지만 한 번으로 다 보지 못했을 터이 니, 이번에는 천천히 시전해 보이겠네." 단호삼이 말릴 시간도 없이 그는 내공을 주입하지 않고 느릿하게 움직이며 초식에 따라 동작의 의미와 호흡법, 그리고 발의 움직임 을 설명해 주었다. 팽후에게 솔직함 말고 또 다른 장점이 있다면 이왕 주기로 작정한 거는 '발가벗고 주자.' 하는 것이다. 물론 그런 일은 거의 없지만 팽후는 처음 볼 때부터 단호삼에게 은근히 마음이 끌렸다. 그 이 유가 뭔지는 몰라도 아마 험한 세파에 시달리면서도 중후한 마음 씨를 잃지 않아서인지 모른다고 지레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무 려 다섯 번이나 낙일검법을 시전한 뒤에 손을 멈추고 행여나 하는 심정에서 물었다. "기억하겠는가?" 단호삼은 '처음에 이미 기억했소.' 하지 않고 가볍게 웃음을 머금 었다. "예." "정말인가?" 의심스럽다는 표정으로 재차 묻는 팽후를 보며 단호삼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때 문득 팽후의 눈에 감탄이 떠올랐다. "대단하이. 나는 무려 일곱 번이나 보고서야 겨우 기억했는데." 이어 그는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럼 어디 시전해 보게. 잘못된 것이 있으면 내가 지적해 주겠 네." 단호삼은 쓴웃음을 지으며 조용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날도 어두워졌는데… 다음에 하지요."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낙일검법을 시전할 경우 팽후가 실망할까봐 서였다. 그러나 팽후는 달랐다. "그렇군. 어두워졌어." 하늘을 응시한 팽후는 여전히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열심히 낙일검법을 익히게. 비록 천하에서 으뜸가는 검학(劍學) 은 아니나 육합검법보다는 훨씬 낫다네." 그러면서 슬쩍 미끼를 던졌다. "내, 자네가 하는 양을 봐서 다른 무공도 가르쳐 주지." ⑤ 다음날 아침은, "캬악―!" 비단 폭 찢어지는 듯한 여인의 비명으로 시작되었다. 그녀의 비명 은 모든 하인들의 단잠을 깨우기에 충분할 만큼 컸다. 옷을 제대로 입는 둥 마는 둥하며 달려간 그들은 서문영호의 침실 앞에서 입을 가리고 벌벌 떨고 있는 여인을 보았다. 그녀는 서문 영호의 유일한 혈육이 된 서문영아(西門英阿)였다. 하얗게 질린 그녀 어깨 너머로 고개를 내민 몇몇은 마치 못 볼 것 을 본 것처럼 벼락처럼 고개를 돌렸다. 욕지기를 하지 않은 것이 신기하게 여겨질 정도로 방안은 목불인 견의 대참상이 벌어져 있었다. 어젯밤까지 분명히 멀쩡했던 서문 영호가 침실 중앙에서 목이 덜컹 잘린 흉측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 고, 그 옆에는 저택에서 가장 충실한 하인 둘이 역시 같은 모습으 로 죽어 있었다. 그 둘은 서문황의 죽음을 지켜본 사내들이었다. 그리고 또한 서문 영호를 따라 강노인의 집에 가기도 하였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빨리 관아에 알려!" 뾰족한 소성을 발하는 서문영아의 두 눈에는 시퍼런 독기(毒氣)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한달음에 뛰어간 진복(陳福)은 관아에 들어가지 못했다. 터덜터덜 되돌아 온 그는 서슬이 퍼런 서문영아의 모습에 기어 들어가는 음 성으로 말했다. 진짜 금부도사가 도착했고, 현감은 직무유기로 관직을 박탈당한 채 관아의 마당에서 취조를 받고 있다고. 보고를 받은 서문영아는 이빨을 오도독 갈아붙였다. 푸른 하늘에 흰 구름이 두둥실 흐르고, 그 아래에는 커다란 연못 이 펼쳐져 있었다. 연못 위로는 사람 둘이 앉아도 될 듯한 커다란 연꽃으로 가득했고, 연꽃 사이사이로 가끔씩 물고기들이 고개를 내밀었다. 아마 숨을 쉬기 위함이리라. 그리고 햇살을 받아 찬란하게 피어난 일곱 색깔의 무지개 너머로 수상정자를 잇는 다리가 있었다. 자연의 무늬를 그대로 내보이는 구름다리는 주위의 풍경과 어우러져 조화로웠다. 구름다리를 건너 수상정자에 오른, 사방평정건을 머리에 쓴 노문 사(老文士)는 등을 돌리고 앉아 시흥(詩興)에 빠져 있는 사부의 흥취를 깨뜨려야 하는 자신을 매우 송구스럽게 생각하며 공손히 허리를 꺾었다. "하립이가 왔습니다, 사부님." 좌우로 부드럽게 흔들리던 마의노인의 상체가 멈추었다. 하지만 대답이 없었다. 그러다, "하립이가 왔단 말이지." 한숨과 함께 혼자말처럼 중얼거린 마의노인은 조용한 음성으로 물 었다. "어떻던가, 그 아이? 그리고 제 어미는?" 연속되는 질문이었다. 노문사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사매는 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하립은 마성(魔性)에는 젖지 않 은 듯했습니다만 살검지도(殺劍之刀)는 완성된 듯합니다." 순간 마의노인의 몸이 움찔했다. "살검지도? 그게 사실이냐?" 묻고 나서 그는 곧 후회했다. 제자의 눈은 자신 못지않게 뛰어나 기 때문이다. 그래서 먼저 말을 흘렸다. "제 에미가 엉뚱한 길을 걷게 했구나. 안타까운 일인지고! 이 아 비가 대업(大業)을 시작만 해놓고 조영(祚榮)에게 떠맡기고 타국 (他國)에 있는데 기껏 한다는 짓이 무극대도(無極大道)가 아니라 살검이라고……." 한탄 어린 음성이었다. 무극대도란 우주의 본체인 무극(無極)으로 가는 근본이자, 마지막 의 길이다. 이는 불도에서는 해탈이라 하며, 도교(道敎)에서는 우 화등선이라 함과 같이 무도(無道)의 끝을 일컫는 말이었다. 만약 누가 이 경지에 이른 사람이 있다면 그는 바로 무소불위(無 所不爲)의 초인일 것이다. 하나 무림사에 있어 이런 경지에 오른 사람은 단 둘뿐이었다. 소림의 달마(達麻)와 무당의 장삼풍(張三豊)이 그들이었다. 잠시 말이 없던 마의노인은 문득 허허로운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 그런 아이를 노부에게 보냈다는 것은 그만큼 노부에 대 한 원한이 사무쳤다는 거겠지. 어리석은 것. 그렇게 일렀건만 결 국 아비의 발목을 잡는구나." 노문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역시도 마음이 편치 않았기 때문이 었다. 그러나 사부의 마음은 더욱 불편하리라 생각한 그는 진심으 로 걱정하며 물었다. "사부님, 제자가 하립을 상대할까요?" 마의노인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결자해지(結者解之)라… 그 아이가 등을 돌린 것은 다 노부의 탓! 어쨌거나 노부가 해결해야지." "허오나 하립은 사부님의……." 마의노인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됐다. 가서 그 아이를 이리 데려오너라." 봄바람같이 따뜻한 음성에는 거역할 수 없는 위엄이 들어 있었다. 노문사는 사부를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사부의 마음을 헤 아린다 하더라도 이미 지나간 길은 결코 되돌아보지 않는 사부가 아니던가. 노문사는 내심 한숨을 몰아쉬며 더욱 깊이 허리를 굽혔다. "알겠습니다." |
첫댓글 잼 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