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미나리에는 맑고 시원한 향기가 있다. 숲속에서 숨을 들이쉴 때 느끼는 피톤치드와 같은 상쾌한 향기가 있다. 찬 서리를 맞으며 살 떨린 겨울을 이겨낸 파릇파릇한 봄 미나리에는 겨우내 묵혀놓았던 그리움을 녹여내는 향기가 있다.
봄 미나리 향기에는 추억이 묻어 있다. 어릴 적 살던 초가삼간 텃밭의 끝자락에는 미나리꽝이 있었다. 고향 마을은 용천이 여러 개 있어 물이 흔하고 맑아 미나리를 재배하기에는 괜찮은 환경이었다. 연촌댁, 화동댁, 우리집, 연산댁 순으로 미나리꽝이 있었고 우리 것이 제일 규모가 작았다.
봄이 오면 아버지는 아침 일찍 미나리를 베어 단을 만들고 누나와 내가 미나리를 다듬어 손질하면 어머니는 흐르는 용천물에 씻었다. 아침을 먹고 나면 어머니는 미나리 수십 단이 든 보따리를 이고 오리가 넘는 길을 걸어 입실역에서 기차를 타고 울산역전시장으로 갔다. 깨끗한 물에서 자란 우리 동래 미나리는 울산에서 인기가 많았다. 점심때가 지나고 배가 출출해지면 과자가 들어 있는 보따리를 상상하며 사립문에 기대어 어머니를 기다렸다. 서산의 노을에도 어머니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어린 마음은 해보다 더 깊이 내려앉았다.
봄 미나리를 수확하고 나면 미나리의 묵은 줄기를 다듬어 적당한 길이로 잘라 평평하게 고른 미나리꽝에 뿌려 놓으면 마디마디에서 뿌리가 내려 새로운 줄기가 나왔다.
여름이 오면 미나리꽝은 하얀 미나리꽃으로 덮였다. 혼자는 외로워 올망졸망 모여있는 꽃송이에도 미나리 향이 솔솔 났다. 가을이 오더라도 미나리의 색깔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겨울이 되면 미나리의 잎이 잠길 정도로 물을 가득 채웠다. 얼음이 얼면 썰매를 타거나 고무공과 함께 뒹굴며 놀았고 투명하게 보이는 얼음 밑의 가녀린 잎은 실험실의 표본 같았다.
어머니가 만든 반찬 중에는 미나리로 만든 음식이 많았다. 그중에서 미나리 물김치는 오감이 살아있어 더 좋았다. 흰 사기그릇에 동동 떠 있는 녹색 미나리 줄기, 빨간 당근과 하얀 무 조각이 눈을 즐겁게 한다. 시원하고 상쾌한 미나리 향은 군침을 돌게하고 씹을 때 들리는 아삭아삭한 소리는 입맛을 돋운다. 흙과 물의 맛이 오묘하게 뒤섞인 듯한 미나리의 쓴맛은 혀끝을 자극하고 물김치가 담긴 그릇을 들고 훌훌 마실 때는 미나리의 시원한 느낌이 살아나서 좋았다.
미나리는 여러해살이로 특별하게 신경 쓰지 않아도 논이나 습지 등에서 잘 자라 강인한 생명력에 비유하기도 한다. ‘미나리’라는 영화로 아카데미 조연상을 받은 윤여정은 “미나리는 어디서든 잘 자라”라고 한다. 미나리보다 더 강인한 부모님의 생활력 덕분에 건강한 사회인으로 살고있다.
미나리는 초고추장을 듬뿍 사용한 무침에도 밀리지 않을 정도로 강한 향을 가지고 있다. 이런 향기로 인해 호불호가 갈리기도 하지만 척박한 환경에서 자신을 공격하는 균과 싸우기 위해 상당한 양의 방어 물질을 만들고 그 덕분에 우리는 미나리의 강한 향을 즐길 수 있다. 미나리꽝에서 나는 논미나리보다 돌미나리라고 하는 밭미나리의 향이 더 강하다.
작년에 이어 올해도 삼월 첫날에 울산 외곽에 있는 미나리 삼겹살집에서 초등학교 동기들이 모였다. 날씨가 흐려 쌀쌀했지만 가고 오는 세월처럼 동쪽에서 불어오는 비릿한 바닷바람에는 훈훈한 온기가 실려 있었다. 세월의 흔적을 간직한 우리들이지만 화창한 봄날에 한껏 부풀어 손잡고 소풍 가던 어릴 적 모습으로 되돌아갔다.
술을 마시지 않는 대신 고기를 구웠다. 불판에 삼겹살과 미나리 한 줌을 올려놓고 굽다가 삼겹살이 노릇노릇해지면 미나리를 먹기 좋게 잘랐다. 함께 올린 버섯과 양파가 적당하게 익어갈 때면 돼지고기의 고소함과 미나리 특유의 향기가 만나 침샘을 자극한다. 숨이 살짝 죽은 미나리와 삼겹살을 함께 집어 먹으면 부드럽고 향긋한 맛이 최고다. 고기를 굽느라 고생한다며 옆에 앉은 친구가 먹여주는 미나리 삼겹살 쌈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꽃피는 춘삼월 첫날에 동기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봄 향기 가득 담은 미나리 삼겹살에 웃음꽃이 만발한 하루였다.
봄바람이 새출발을 전하고 집 앞 역사공원에는 매화향이 가득하다. 봄기운에 못 이겨 화이트데이를 핑계로 아내에게 꽃다발도 진상했다. 이제 남은 것은 가족과 함께 한재 미나리나 팔공산 미나리를 먹으러 가는 일이다.
2025.3.15.(49)
첫댓글 미나리를 먹게 되면 봄이 저만큼 지나갑니다. 미나리에 읽힌 이야기 잘 풀었습니다.
미나리향을 더한 삼겹살과 친구들의 웃음소리로 행복한 봄날을 보냈네요
미나리와 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봄은 좋은 계절입니다
글을 읽고나니 미니리 향기가 나는것 같습니다. 잘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