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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第五章 백기표사
①
금모호 이규대를 꺽은 표풍일수(飄風逸秀) 하지철(河志哲)의 우승으로 비무대
회가 끝난 지 이틀이 지났건만 세권표국의 표사들은 아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대망의 껍질로 만들어 절세의 신병이기가 아니면 흠집도 낼 수 없다던 노장우
의 묵린편을 썩은 새끼줄로 만들어 버린 사군명.
그의 내공이 심오한 검법에 어울리게 정심했으면 더욱 흥미진진한 구경거리가
이어졌을 텐데 그만 멀쩡히 서 있던 사군명이 쓰러지고 만 것이다.
열광하는 중인의 함성이 채 그치기도 전에…….
하나 일개 마구간지기에서 표사가 됐고 표사가 된지 두 달여 만에 일약 대세
권표국의 표두 중에도 강하기로 소문난 노장우를 이긴, 아니 이길 뻔한 사군
명의 놀라운 무공은 아무리 얘기해도 싫증나지 않는 화제였다.
기인이사(奇人異士)가 수두룩하고 태산처럼 이름높은 명문거파가 즐비한 드넓
은 중원천지에서 일개 표국의 표사라는 위치는 미미하기 그지없었으나 최소한
세권표국에 있어서 사군명은 혜성처럼 나타난 기린아였다.
특히, 그에게 적지 않은 배려를 베풀었으며 표국의 존망이 걸린 사태를 맞아
고민에 휩싸여 있는 석백송에게는 작은 희망의 불빛이었다.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푹신한 양탄자가 깔린 방안에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오, 어서 오게!"
음성은 반가웠고 말투는 정중했다.
사군명은 이미 마구간지기가 아닌 당당한 표사였고, 사람을 대할 때는 그에
걸맞은 예의를 차리는 석백송이었다.
한 쪽 벽면을 가리고 걸려있는 중화강역도(中華疆域圖)에서 고개를 돌린 석백
송이 표국의 기린아로 떠오른 사군명을 반갑게 맞으며 자리를 권했다.
"이리로 앉게."
"아닙니다. 이게 편합니다."
감히 국주와 마주앉는다는 것이 불편한 사군명의 사양은 통하지 않았다.
"자네는 사실 표두가 되었어야 할 사람이니 나와 함께 앉는 것이 마땅한 일이
네."
정중하면서도 단호한 국주의 말에 사군명은 더 이상 사양하지 못했다.
아직도 자신이 표사가 됐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고 표사들이 누리는 당연
한 혜택과 권리가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 영 어색하고 불편했지만 그렇다고
마냥 사양만 하는 것도 능사가 아니었다.
옻칠을 한 탓인지 은은한 광택이 흐르는 팔선탁(八仙卓) 건너편 자리에 앉는
사군명을 바라보는 석백송의 눈길이 묘하게 빛났다.
"나한테 불만이 있을 텐데?"
석백송이 무얼 묻는 것인지 짐작이 갔으나 사군명은 고개를 저었다. 불만을
갖기에는 보환신단과 태극무허검보를 하사하고 그를 표사로 만든 국주의 은혜
가 너무 컸고, 무엇보다 그는 은혜를 잊지 않는 사람이었다.
표두라는 지위가 갖는 혜택과 대우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나 미련은 없었다.
"국주님의 남다른 배려에 늘 감사하고 있을 뿐 불만은 있을수 없습니다."
젊은 사내답게 힘이 느껴지는 굵은 음성에서 거짓은 찾을 수 없었다.
"궁금한 일도 없는가?"
곤혹스러운 듯 잠시 머뭇거리던 사군명은 이내 자신있게 대답했다.
"명령대로 따를 뿐입니다."
일신에 지닌 무공만으로 도산검림(刀山劍林)을 헤치며 살아가는 무림인과 한
푼의 이익을 위해 아무런 거리낌없이 아침저녁으로 말을 바꾸는 장사꾼들을
무수히 겪어왔으며 그 속에서 오늘날의 세권표국을 일군 석백송이었지만 사군
명의 태도에서 한 점의 가식도 찾아 볼 수 없었다.
"푸하하핫!"
석백송이 밝은 얼굴로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누구라도 의문을 가질만한 일이었다.
생각 없이 맹목(盲目)적인 충성을 바치는 자거나 신임을 얻으려는 목적으로
계산에 따라 행동하는 자라면 주저 없이 대답했을 것이고 충성보다 자신을 앞
세우는 자라면 어떤 식으로든 의문을 드러냈을 것이다.
하나 사군명은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망설임은 솔직함을, 뒤이은 힘찬 대답은 맹목이 아닌 의지에 따른 충성을 나
타낸다는 것을 충분히 헤아릴만한 능력이 석백송에게는 있었다.
"능히 우승도 할 수 있는 사람에게 쓰러지라고 했거늘 불만도 의문도 없다?
정녕 내가 복이 많은 사람이로군."
석백송의 기분 좋은 음성이 방안을 메울 때 사군명은 비무대회가 있던 날 밤
의 일을 떠올렸다.
태극위진 일초로 영사신편 노장우의 묵린편을 토막냈다는 사실이 스스로도 믿
어지지 않아 멍하게 서 있던 그에게 노장우가 패배를 인정하는 소리가 꿈결처
럼 들려왔다.
그 순간, 하늘이 떠나갈 듯 이백여 사내들이 외치는 우렁찬 함성소리가 울려
퍼졌고 그는 환호에 답할 생각도 못하고 눈앞에 벌어진 엄청난 사실에 당황할
뿐이었다.
'내가, 내가 영사신편 노장우 표두를 이기다니……!'
국주의 음성이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여름날 쏟아지는 장쾌한 소나기처럼 요란하게 허공에 울려 퍼지는 중인의 함
성 속에서도 그 소리는 또렷하게 그의 귓가에 울렸다.
말로만 듣던 전음성(傳音聲)이었다.
"공력이 달린 것처럼 쓰러져라!"
틀림없는 국주의 음성이었고 남모르게 슬쩍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을 때 마주
친 국주의 깊게 빛나는 눈빛은 전음성의 주인이 자신임을 확인해 주었다.
사군명은 망설이지 않았다.
예상치 못한 승리의 감격이 아니더라도 전신의 혈맥은 힘차게 고동쳤고 사지
백해에 흐르는 공력은 태산이라도 무너뜨릴 듯 넘쳐 났지만 국주가 쓰러지라
면 쓰러질 뿐이었다.
사군명은 쓰러졌다.
어설픈 연기가 들통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비록 내상을 입고 쓰러지긴 했으나 분투를 가상히 여겨 상금은 내려졌다는 소
식과 다른 표사들이 능히 백 명을 상대할 만한 표사라 하여 자신을 백기표사(
百騎 士)라 부른다는 얘기를 들은 것도 국주의 명으로 옮겨진 표국내 의방(
醫房)의 침상에서였다.
잠시, 이틀 전의 일을 회상하던 사군명이 고개를 들자 석백송의 의미심장한
눈길과 마주쳤다.
충직하기 이를 데 없는 수하를 바라보는 국주의 눈길.
"무리한 공력의 운용으로 기혈이 뒤엉켜 요양하는 것으로 할 터이니 별명이
있을 때까지 의방에서 나오지 말고 이것을 외우게."
국주가 내민 것은 동북로총람(東北路總覽)이라는 붉은 제목이 선명한 책자였
다.
두께는 얄팍했으나 크기는 보통 책의 두 배쯤 되는 책자를 받아든 사군명에게
국주의 나직한 음성이 이어졌다.
"육로(陸路)와 수로(水路), 산중의 작은 오솔길까지 포함해서 항주에서 북경
까지 갈 수 있는 길과 주변에 할거한 모든 세력에 대한 정보를 적은 것일세.
하나도 빠짐없이 암기하게!"
의문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명령을 따르는 게 중요했다.
"명심하겠습니다."
책자를 소중히 갈무리한 후 깊숙이 고개를 숙이고 돌아서는 사군명의 뒷모습
을 바라보며 석백송의 가슴에는 희망과 자신감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자신에게도 요긴하게 쓸 수 있는 숨겨진 패가 생긴 것이다.
쓰기에 따라 운명의 승부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는 숨겨진 패가.
사군명은 방에 들자마자 침상에 걸터앉았다.
아마도 국주의 명이 있는 까닭이었겠지만 그는 의방에 있는 다섯 개의 방중
하나를 독차지하고 있었고 그가 있는 방 주위로는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았다.
그가 실려온 뒤 고승후를 비롯한 몇몇이 문병을 하겠다고 찾아왔을 때 문 앞
에서 그들을 막아선 의원이 기혈이 들끓어 혼절한 환자를 치유하려면 안정이
우선이라며 제지하는 소리를 그도 들었던 것이다.
사군명은 국주가 전해 준 책자를 품속에서 꺼냈다.
책장을 한 장씩 넘기며 사군명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항주에서 북경까지 가는데 이렇게 많은 길이 있었던가.
장강의 범람으로 고향을 떠나 이곳 항주에 이르기까지 수천 리를 떠돈 그였지
만 부모를 잃은 충격과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린 탓인지 어린 시절 헤매고 다
닌 산천은 기억나지도 않았고, 표국에 몸담은 이후에는 심부름을 겸한 성내
나들이가 고작이었다
표사가 되고서도 사정은 그리 달라지지 않아서 일곱 번의 표행을 하며 그나마
절강성 일대를 다닌 것이 그가 경험한 '바깥 세상' 혹은 '천하'의 전부였다.
하나 그야말로 구주팔황(九州八荒)을 누비고 다닌 표사들의 생생한 얘기를 들
으며 마음속으로는 이미 가보지 않은 곳이 없는 그이기도 했다.
약간의 허풍을 감안하더라도 표행에서 돌아온 표사들이 들려주는 세상 이야기
는 얼마나 그의 가슴을 뛰게 했던가.
전설과 역사가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수많은 산과 강, 끝이 보이지 않는 넓은
평원.
그리고, 곳곳에 자리잡은 거대한 도읍들과 그곳에 사는 각양각색의 사람들.
표사들이 녹림도와 마주쳐 예물을 놓고 실랑이했다거나 생사의 일전을 치른
이야기를 할 때면 자기도 모르게 불끈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고, 강호를 주유
하며 협행(俠行)하는 무림인들을 만나 교분을 쌓은 것을 자랑할 때면 기필코
표사가 되리라는 결심을 굳게 다지기도 했었다.
길은 크게 두 갈래였다.
항주가 속해있는 절강성을 출발해 안휘(安徽), 하남(河南)을 거쳐 북경이 있
는 하북성(河北省)으로 들어가는 길과, 강소(江蘇)와 산동(山東)을 가로질러
가는 길.
그나마 두 갈래 길은 사람으로 치면 등줄기였으니 중간에 지로(支路)까지 합
하면 대략 십여 갈래의 길이 있었고 지로를 택할 경우 거리는 더욱 늘어났다.
어느 길로 가든 중간에 거쳐야 하는 도읍이 수십 곳에 달했고, 관도로만 간다
고 해도 칠천 리에 육박하는 거리였다.
관도라 해도 길의 상태가 같지 않고 표행일 경우 빈 몸이 아닐 터이니 평균
잡아 하루에 칠십 리를 간다고 할 때 무려 백여 일, 세 달이 넘게 걸리는 머
나먼 여정이었다.
물론, 산이나 계곡을 두려워하지 않는 경공을 지닌 절세의 고수라면 천하가
내집 안마당이요 북경도 코앞이리라. 아니, 보통 사람이라도 중간중간 말을
갈아타며 전력으로 내달리면 여정은 훨씬 단축되리라.
하나 마차나 수레를 호송해야 하는 표행의 경우 백 일도 넉넉한 시간은 아니
었다.
수로(水路)를 이용하는 것도 가능하긴 했다.
그러나, 항주에서 북경까지 오천 리에 이르는 대운하(大運河)에는 바닥이 높
아 상습적으로 길이 끊기는 산동성 임청(臨淸)에서 제령(濟寧) 구간을 제외하
더라도 오랜 가뭄 탓으로 바닥을 드러내어 물길이 막힌 곳이 적지 않았다.
게다가 녹림패들과 달리 수로를 관장하는 수적(水賊)들과는 교분이 없다는 것
을 감안하면 수로를 택하는 것이 어쩌면 더 위험한 일일지도 몰랐다.
"과연 천하는 넓고도 크구나……."
문제는 비단 칠천 리에 달하는 거리만이 아니었다.
각지에 웅거하여 주인임을 자처하는 녹림당과 토호들이 산이면 산, 고을이면
고을마다 없는 곳이 없었고, 텃세를 자부심으로 아는 속 좁은 무림방파가 도
중에 적지 않았으니 그들을 헤치고 가는 것이 더욱 큰 문제였다.
경험 많은 표사들이 감숙(甘肅)이나 사천(四川), 운남(雲南) 등지로 떠나는
표행에 비하면 북경 행은 유람이나 다름없다고 떠드는 소리를 듣긴 했으나 막
상 상세히 그려진 지도를 앞에 놓고 보니 유람길이라는 북경 행도 그리 수월
한 여정이 아니었다.
하나 사군명은 가슴이 뛰었다.
국주가 그에게 이 책자를 건넨 것은 머지않아 북경으로 표행을 떠난다는 것을
의미했고 그에게 있어 험난한 여정은 차라리 가슴 떨리는 모험인 까닭이었다
"북경이라……."
말로만 듣던 황도의 번화함을 떠올리는지 나직이 뇌까리고 두 눈을 지그시 감
고 있던 사군명은 이내 결연한 표정으로 책자에 고개를 파묻었다.
표행의 성공여부는 출발전의 준비정도에 따라 좌우된다는 표국의 금언(金言)
을 진작부터 가슴에 새기고 있던 그였다.
길을 나서는 순간부터 예측하지 못할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표행길에
서 철저한 계획과 준비는 그나마 위험을 감소시켜주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사람은 물론, 말과 마차를 비롯한 장비를 철저히 살펴 최상의 사태를 유지하
고, 쉬어갈 곳과 지나칠 곳을 점검하여 가능한 대로 치밀한 계획을 세우는 것
이야말로 더 없이 중요한 일이었다.
위험은 의지와 관계없이 닥치지만, 표행을 치밀하게 준비하는 것은 노력에 따
라 얼마든지 가능했고 그런 노력이야말로 위험을 피하게 하는 지름길임에 틀
림없었다.
지금 석백송이 건넨 책자를 꼼꼼히 살피는 사군명은 어쩌면 벌써 표행을 시작
한 것일지도 몰랐다.
②
하늘에 극락(極樂)이 있으면 땅에는 항주와 소주가 있다고 했던가.
예로부터 풍류의 고장으로 이름높은 항주의 번화가 장홍로(長紅路)는 돈으로
극락을 맛보려는 사람들의 발길로 언제나 북적였다.
장홍로에 즐비한 주루 중에서도 오륙 년 전 새로이 문을 연 금연루(錦宴樓)는
풍류객들간에 손꼽히는 주루였다.
물산이 풍부하고 상업이 발달한 교통의 요지답게 철철이 조달되는 다양한 각
지의 특산물을 재료로 쓰기는 어느 집이나 마찬가지였으나, 황실의 주방에서
은퇴한 궁인에게 사사(師事)했다는 숙수의 손을 거친 요리는 무엇이든 입맛을
당겼고, 시골 부호의 자제로 과거에 낙방을 거듭하다 장삿길로 나섰다는 주
인의 안목이 제법 높은 탓인지 벽에 걸린 서화 한 점까지 천박하지 않았다.
후원에 딸린 별채에서 술을 치고 가무를 파는 기녀들 또한 저마다 흔치않은
미모를 뽐내는 미희(美姬)들이었으니, 주문만 하면 즉시 대령하는 중원 각지
의 명주(名酒)를 곁들여 세월 보내기 딱 좋은 곳이었다.
물론, 먹고사는 일로 근심하지 않아도 되는 일부 팔자 좋은 사내들에게 한정
된 일이긴 했지만…….
오늘도 금연루는 손님들로 가득했다.
정성 들여 꾸민 화려한 후원을 건너 아련히 들려오는 풍악소리 사이로 장단을
맞추듯 간간이 끼여드는 기녀들의 간들어지는 교소(嬌笑)는 넓은 객청에 앉
아 술잔을 기울이는 사내들의 술맛을 돋구는 돈 안 드는 안주거리임과 동시에
보다 넉넉하지 못한 주머니를 원망하게 하는 자극이 되었다.
이층 중앙에 자리한 원탁에 둘러앉은 한 무리의 사내들 역시 아쉬운 눈길을
후원으로 던지며 술잔을 기울이기에 바빴다.
성격과 나이는 물론 지닌바 재주도 제 각각인 여섯 명의 사내들은 세권표국의
표사라는 것 외에 한가지 공통점이 더 있었다.
신입이라 소속이 정해지지 않은 사군명이 표행을 함께 했던 표사들이라는 점
이었다. 대개 같은 조에 속한 자들끼리 어울리는데 반해 지금 이들의 소속이
제각각인 이유였다.
"제기랄! 내가 상을 탔으면 오늘 자네들 모두 극락 구경을 시키는 건데……."
길쭉한 턱에 몇 가닥 되지 않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한 사내가 입맛을 다시자
옆자리에 있던 매부리코가 바로 퉁명스럽게 되받았다.
"극락은 고사하고 오늘 술값이나 책임지게."
"내가 왜? 오늘은 고 선배가 산다고 했는데!"
동의를 구하듯 바라보는 주걱턱의 눈길에 고승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아닐세. 군명이가 자네들에게 술 한잔 사라고 맡긴 돈이 있으니 마음껏
마셔도 좋으이."
사군명이 상으로 받은 적지 않은 은자 중 일부를 고승후에게 맡기며 대신 대
접하라는 부탁을 했던 것이다. 표사로서 첫 발을 내딛은 자신이 배울 바가 있
는 선배들이라는 이유로.
고승후의 말에 사내들의 표정이 약속이나 한 듯 일제히 밝아졌다.
뜬금없이 한 잔 사겠다는 말에 뒤따라 나서긴 했으나 구두쇠 고승후의 면모를
익히 알고 있는지라 한 가닥 불안감도 없지 않았던 터였다. 행여 입맛만 다
시고 마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없지 않아 탁자에 놓인 술을 한 잔이라도
더 들이키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고승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주걱턱의 사내, 왕충삼(王忠三)의 얼굴이 밝
아지더니 목청껏 점소이를 불렀다.
"대체 주문도 받지 않고 무얼 하는 게냐! 여기 금존청(金尊淸) 세 근하고 건
소명하(乾燒明蝦) 동파육(東坡肉) 그리고, 당초리어(糖醋鯉魚) 한 접시씩 내
오게!"
"예, 예! 곧 대령하겠습니다!"
호기로운 외침에 점소이는 반색을 했고, 고승후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평소에도 목숨걸고 번 돈을 술과 바꾸고 계집의 치마폭에 쏟아 붓는 동료들의
대책 없는 객기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그로서는 사군명의 호의를 호강할 기
회로 여기는 왕충삼이 못마땅한 것이다.
"왜? 아예 후원으로 가서 기녀들을 끼고 마시지 그러나."
왕충삼은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투덜댔다.
"너무 그러지 맙시다. 아, 군명이가 선배들에게 한턱 쓰겠다는 데 성의를 봐
서라도 이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거 아니오. 대체 몇 년을 일해야 황금 이십
냥을 만져보는 게야……."
황금 이십 냥이면 항주성 인근에 일가족이 먹고 살만한 소출이 나오는 농토가
딸린 집을 사고도 남는 거금이었다.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토를 다는 왕충삼의 말이 아니더라도 사군명의 횡재와
머지 않아 표두가 될 것이 분명한 그의 처지를 부러워하는 마음은 너나없이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그들 중 대다수는 나름대로 고달프고 사연 많은 인생
을 살아온 자들이 아니던가.
하나 남의 횡재를 부러워하는 마음이야 인지상정이었고 그들 모두 젊은 나이
에 앞길이 열린 사군명을 자랑스러워하고 아끼는 마음은 다르지 않았다.
그런 동료들의 마음을 모를 리 없는 고승후가 빈 술잔들을 채울 때 그들에게
다가서는 사람이 있었다.
"허어, 어느 분께서 그런 복을 받으신 겁니까? 황모(黃某)가 축하주라도 한
잔 올려야겠습니다. 허허허!"
사람 좋은 웃음을 터뜨리며 다가선 인물은 금연루의 주인 황대진이었다.
긴장 속에 천하를 떠도는 직업의 특성 탓인지 씀씀이가 남다른 세권표국의 표
두와 표사들을 단골로 잡기 위해 늘 친절하게 대하는 황대진은 화려한 화복에
어울리는 밝은 표정으로 일행에게 인사를 건넸다.
"누구긴 누구요? 표사가 된 지 두 달도 안되어 영사신편을 꺾은 백기표사 얘
기지."
"백기표사라니요……."
황대진이 관심을 보이자 왕충삼 옆에 있던 팽상문(彭尙紋)이 신이 나서 설명
을 했다.
"우리 표국에 마구간지기를 하던 사군명이라는 친구가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국주님의 명으로 표사가 됐단 말이지."
"호오, 국주께서 직접 명령을 내리셨다고요!"
황대진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으며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그럼! 그게 두 달이 좀 넘었던가……."
"오늘이 딱 두 달하고도 이틀째 되는 날일세."
"하여튼, 그 친구가 말이오……."
팽상문이 막히면 왕충삼이 거들고, 왕충삼이 틀리게 말하면 팽상문이 고치고
…….
채 일각이 지나지 않아 황대진은 세권표국에 풍운을 일으킨 주인공에 대해 모
르는 것이 없게 되었다.
속없는 호사가처럼 호기심에 가득한 눈을 빛내며 부러움과 안타까움이 담긴
표사들의 애기에 귀를 기울이던 황대진은 사군명이라는 이름을 머릿속에 새겼
다.
세권표국이 무림 방파는 아니라 해도 항주를 비롯한 절강성 일대에서 위세를
떨치는 창해문(滄海門)을 아래로 보는 실력이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었다.
평소에도 세권표국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대상 중 하나였지만 최근 기산에
다녀온 후로는 항주 일대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결코 무심할 수 없는 그였
다.
세권표국에서 전례 없는 비무대회가 벌어진다는 사실을 알고 관심을 갖고있던
터에 새롭게 등장한 사군명이라는 이름을 예사로 넘기기에는 그의 임무가 너
무도 막중했다.
항주에 거하거나 드나드는 모든 무림인, 무적세가와 봉래도의 인물은 말할 것
도 없고 하다못해 녹슨 식칼이라도 차고 다니는 자는 빠짐없이 점검하여 동향
을 파악하라는 전주의 엄명이 있지 않았던가.
하물며 일류고수가 아니면 꿈도 못 꾸는 세권표국의 표두 중에서도 손꼽히는
무공을 지닌 영사신편 노장우의 묵린편을 토막낸 인물이라면 반드시 주목해야
마땅했다.
"그런 기린아에게 술 한잔 올릴 기회가 있으면 좋으련만 이 황모가 인복이 없
는 모양입니다."
황대진이 순진한 표정으로 아쉬움을 드러내자 왕충삼이 가슴을 내밀고 나섰다
잘만 하면 공짜 술을 마실 수 있는 기회를 놓칠 그가 아니었다.
"검법은 날카로우나 공력이 약해서 그만 쓰러지고 말았으니 아쉬워도 어쩌겠
소, 내 다음에 꼭 함께 오리다!"
하나 술 냄새를 맡은 것은 왕충삼뿐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군명이라면 내가 제일 가깝다고 할 수 있지. 자리에서
일어나는 대로 황대인과 인사시킬 터이니 걱정 마시오!"
팽상문도 질세라 장담했다.
"무슨 소리야? 먼저 표행때 내가 경계를 설 차례인데도 자기가 대신하겠다며
쉬라고 한 게 군명이야. 누가 뭐래도 우리 백기표사는 나를 따른다고."
"이 사람이 뭘 모르는구먼!"
"모르다니 뭘 몰라……."
누가 사군명과 제일 가까운 사람인가를 다투는 사이 금존청 두 근을 올리고
돌아선 황대진은 매일 쓰는 보고서의 한 부분을 차지할 내용을 머릿속으로 정
리했다.
상부에서 기다리는 정보는 아니었지만 그나마 보고할 건수가 생긴 것은 다행
이었다.
< 사군명(史君明).
이십삼세. 세권표국의 표사. 별칭 백기표사.
고아 출신으로 표국의 하인으로 지내다 갑자기 부상한 인물. 표사들간에 성망
이 높음.
아마도 석백송의 배려가 있는 것으로 추정됨.
영사신편 노장우를 꺾었으며 검법에는 상당한 조예가 있으나 내공은 약한 것
으로 추정됨.
출신이나 그간의 행적으로 보아 무적세가나 봉래도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은
없음. >
무적세가의 부상으로 무림의 태산북두라는 위치를 빼앗긴지 백년이 되었고 그
로 인해 무적세가와 그리 원만한 관계가 아닌 소림이 석백송의 사문이라는 사
실과 수하들을 장악하는 석백송의 능력을 감안하면 세권표국의 인물들이 무적
세가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하나 총단의 관심이 집중된 지금 명령대로 온갖 정보를 취합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고 또한, 목숨을 부지하는 길이었다.
다섯 개에 달하는 성문을 지키고 있는 수하들이 두시진 마다 올리는 보고를
듣기 위해 후원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황대진의 여유로운 뒷모습을 바라보는
표사들의 눈에는 극락의 한끝을 잡고 사는 그를 부러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하긴, 늘 미소를 머금고 다니는 부유한 상인 황대진이 흑마방의 이목인 마안
기무전에 소속된 인물이라는 것을 누가 상상이라도 할 것이며, 이즈음 아무런
성과도 없이 하루하루 흐르는 시간이 불안해 가뭄을 만난 논바닥처럼 바싹
타 들어가는 그의 속을 뉘라서 알 것인가.
③
봉래신풍선을 건조(建造)하는 곳은 섬의 남서쪽 영해만(榮海灣)이었다.
양쪽으로 길게 뻗어 나와 둥그렇게 바다를 감싼 암벽은 바람과 파도를 막았고
, 간만(干滿)의 차 없이 언제나 적당한 수심과 섬 쪽으로 평평하게 펼쳐진 단
단한 모래사장은 배를 건조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천혜의 조건을 제공했다.
최상몽은 당당한 웅자를 갖추어가고 있는 열 척의 이장선(二檣船=쌍돛배)을
바라보며 꿈꾸듯 상상에 잠겨들었다.
궁노를 쏘는 궁노수(弓弩手), 장도와 도끼로 무장한 도부수(刀斧手), 사슬 달
린 갈고리를 던지는 비조수(飛爪手)가 뱃머리에 늘어서고, 중앙에는 봉래도의
기치를 쳐든 기수(旗手)를 비롯해 고수(鼓手)와 동라수(銅 手)가 기세를 돋
우며 바람처럼 물살을 가르는 열 척의 봉래신풍선.
그러다가 적을 만나면 두꺼운 철판을 두른 양현(兩舷)의 요형(凹形) 사구(射
口)에 장착된 열 문의 화포로 불을 뿜어내는 장쾌한 모습.
혹, 접근전이라도 벌어지면 또 어떤가.
송곳으로 구멍을 뚫듯 파도 위를 달린다고 해서 낭리찬(浪裡鑽)이라고도 불리
는 의선(蟻船=개미선)을 내려 놀라운 기동력으로 물위를 평지처럼 누비며 적
의 모선(母船)을 무력화시킬 것이었다.
사천오백 해남신풍군의 일부는 수로를 따라 대륙의 심장부로 쳐들어가고 일부
는 육로를 이용해 진군하는 양동작전(陽動作戰)이 계획대로 성공한다면 중원
무림을 봉래도의 발아래 굴복시키는 것은 올해 안에 가능한 일이었다.
천오백 년 봉래도의 역사에서 누구도 이루지 못한 중원정벌의 위대한 꿈을 이
룰 날이 멀지 않았다는 생각에 가슴이 저절로 벅차 올랐다.
"오셨습니까."
아직 바닷바람이 제법 쌀쌀하건만 구릿빛으로 빛나는 건장한 몸통을 드러내고
땀을 흘리던 중년의 거한이 기운찬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염천주(炎天主) 거력패웅(巨力覇雄) 곽자성(郭炙城)이었다.
중앙의 균천(鈞天), 동방의 창천(蒼天), 동북의 변천(變天), 북방의 현천(玄
天), 서북의 유천(幽天), 서방의 효천(曉天), 서남의 주천(朱天), 남방의 염
천(炎天), 동남의 양천(陽天)으로 이루어진 구천(九天)을 본따 오백명씩 편제
한 해남신풍군의 염천을 책임진 고수이자 봉래도 최고의 조선(造船) 기술자인
그는 조선작업의 실질적인 책임을 맡고 있었다.
더운 김을 피워 올리는 곽자성의 몸에서 물씬 풍기는 열기를 느끼며 최상몽은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수고가 많다. 공정에는 차질이 없겠지?"
"손을 놀리기 무료해서 배 밑창에 돼지기름을 덧바르고 있으나 당장이라도 배
를 띄우는데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당당하게 대답하는 곽자성의 기세가 더 없이 믿음직했다.
"어르신은 요즘도 자주 오시는가?"
봉래신장 얘기였다.
근래 들어 노략질이 극심해진 왜구(倭寇)들을 섬멸하기 위해 전선(戰船)을 건
조한다고 둘러댔건만 아무래도 미심쩍은지 수시로 들러 이것저것 캐묻고 다녔
던 것이다.
왜구들의 행패가 극심하긴 해도 봉래도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해남일대는 피해
가는 판에 굳이 왜구를 치기 위해 대대적으로 배를 건조한다는 이유가 선뜻
납득되지 않는 것은 당연했고 봉래신장이 아무런 의혹도 품지 않으리라 기대
한 것도 아니었다.
하나 잠시만 시간을 끌면 됐다.
계획대로 신부에게 변이 생긴다면 아무리 봉래신장이라 해도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을 것이었다.
아니, 손녀들에 대한 남다른 사랑을 생각하면 거스르기는커녕 가장 먼저 검을
빼들고 중원으로 달려갈지도 몰랐다.
곽자성은 고개를 저었다.
"이삼일 전부터는 뵙지 못했습니다."
근래 들어 상부의 움직임이 뭔가 미심쩍긴 했으나 곽자성은 아무래도 좋았다.
마음 같아서는 비겁한 암수를 쓰고도 천하제일가입네 하며 콧대를 높이는 무
적세가를 상대하는 싸움이라면 더욱 통쾌하겠지만 왜구를 때려잡는 것도 마다
할 그가 아니었다.
하루 빨리 배를 띄우고 싸움터로 달려갈 날만 기다리며 괜스레 솟구치는 힘을
주체못하는 것은 해남신풍군 모두가 한결같았으니 그가 특별히 호전적인 성
품이라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배는 걱정 마시고 군사께서는 왜구들을 때려잡을 계획이나 세우십시오!"
불끈 쥔 주먹을 쳐들고 호기롭게 대답하는 곽자성을 향해 빙긋 웃음을 지어
보인 최상몽이 넌지시 한 마디 던졌다.
"왜구가 아니라 천하를 상대하고도 남을 기세로구먼."
"……!"
잠시 멈칫하던 곽자성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성미가 괄괄하고 호방하긴 해도 그 역시 오백 명의 수하를 거느릴만한 지혜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럼, 배는 북쪽으로 가는 겁니까?"
왜구의 출몰지점은 남쪽이었다.
그리고…… 북쪽은 중원!
가타부타 말없이 돌아서 가는 최상몽의 입가에 떠오른 뜻 모를 미소를 읽은
곽자성은 갑자기 큰소리로 외치며 수하들을 독려했다.
"뭣들 하느냐! 먼 항해를 하려면 방수(防水)가 기본임을 모르느냐!"
아무래도 불안했다.
그 자신이 앞장서서 추진한 일이고 내일모레면 신부를 떠나보내야 하는 상황
이었으나 스멀거리며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늙은이의 괜한 걱정으로 치부하기
엔 어쩐지 개운치 않았다.
"으흠……."
깊은 한숨을 몰아쉰 봉래신장의 미간이 좀처럼 펴질 줄을 몰랐다.
돌이켜 보면 화친(和親)의 방법으로 양가의 혼사를 생각해 내었을 때, 조카인
도주는 물론이고 무적세가를 설득시키기가 쉽지 않으리라 예상했건만 의외로
양측 모두 흔쾌하게 동의하지 않았던가.
부친의 죽음으로 무적세가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으련만 선선히 그의 제안을
따른 도주 설태천이 고마웠고, 천하의 평화를 위해 애쓰는 그의 진심을 알아
준 무적세가의 인물들은 더욱 고마웠다.
더욱이 신부가 중원에 발을 딛는 이후부터 무적세가의 며느리이니 자신들이
책임지겠다는 당대 세가주 금천후의 제의는 작지 않은 감격을 주기에 충분했
다.
그 후,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불상사를 피하기 위해 신부를 표국에 맡겨 표물
로 위장하자는 의논이 있을 때는 무적세가를 위협하는 흑마방에 대해 나이에
걸맞지 않게 격렬한 적개심을 느낄 정도였고, 천하제일가라는 자부심보다 신
부의 안전을 우선한 금천후의 결단에 감탄한 그였다.
혼사를 둘러싸고 지난 일 년여 간 진행된 과정에서 굳이 문제가 된 부분을 들
라면 세권표국에서 요구한 과도한 표행료 정도랄까.
시작부터 지금까지 하나하나 최선의 선택으로 이어진 과정이었고, 털끝만큼의
의혹도 개입될 여지가 없었다.
좋은 일에는 마가 낀다고, 어쩌면 모든 일이 너무 수월하게 풀린 것이 오히려
쓸데없는 근심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일지도 모른다며 스스로를 달래려 애썼다
한데, 자꾸만 불안해 지는 것은 무슨 까닭이란 말인가.
도주의 비무를 앞두었던 삼십 년 전의 그 날과 같은 불안감이.
"봉래신풍선 때문인가……."
그 역시 남쪽 섬들과 대륙의 해안일대에서 자행되는 왜구의 만행에 분노하고
있었지만 열 척의 봉래신풍선을 건조하는 것은 아무래도 과도한 대응이라는
생각이었다.
"혹시, 대륙을 향한……?"
삼십년 전의 사고 이후 배전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 지금에 이르러서는 봉래도
역사상 가장 막강한 전력을 갖추었으니 모험을 하고픈 유혹도 있을 법했다.
당장 그가 아끼는 손녀 설운교 조차도 서슴없이 무적세가와의 일전을 입에 올
리지 않았던가.
하나 가능성은 있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무엇보다 명분(名分)이 없었다. 세가를 적으로 돌릴 명분이.
"아암! 시정잡배들의 드잡이질도 아니고, 중원의 패자인 무적세가를 치려면
그만한 명분이 있어야지."
상상하기도 싫은 최악의 경우를 애써 부정하던 봉래신장의 전신이 벼락을 맞
은 것처럼 가늘게 떨리기 시작한 것은 힘주어 내뱉은 자신의 말이 텅 빈 방안
에 일으킨 공기의 파동이 채 멎기도 전이었다.
순간, 봉래신장의 노안(老顔)에 수많은 표정이 스쳤다.
"……."
오로지 천하의 안위만을 생각하는 노영웅의 가라앉은 숨결에 따라 시간마저
조심스럽게 흐르는 듯한 적막의 순간.
마침내 얼어붙은 얼굴로 탁자를 집고 일어선 봉래신장의 입에서 가느다란 음
성이 새어 나왔다.
"명분을 만든다면……?"
설운경이 전에 없이 심각한 표정으로 자신의 거처를 찾은 봉래신장을 맞은 것
은 그날 밤이었다.
고향을 가슴에 담아가려는 생각에 부드러운 잔디가 융단처럼 깔린 바닷가 언
덕에 서서 불덩이를 삼키는 바다의 장관을 홀린 듯 바라보고 돌아온 그날 밤.
무적세가와 봉래도의 해묵은 갈등을 풀고 천하의 화평을 도모하는 평화의 사
절이 되어 멀리 바다건너 중원으로 시집가기 이틀 전인 그날 밤.
혼사를 앞둔 새색시의 설렘보다 자신의 한 몸에 걸린 막중한 사명으로 짓눌려
진 스무 살 처녀의 방심(芳心)이 괜스레 서글퍼지는 그날 밤.
그녀는 봉래신장과 밤 깊도록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첫댓글 잘 보고 갑니다.
잼 납니다
감사합니다
즐독 ㄳ
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