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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 4 章 조사령 구유벽황요령
칠흑같은 어둠 속. 기검하를 가운데에 두고 구유조상혈의 육대공봉(六大公奉)이 둘러앉아 있
었다.
문득 맨 왼쪽에 앉아있던 구유수명사 백리박이 경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혈주!"
"……!"
기검하는 말없이 그에게로 눈길을 돌렸다.
"이제부터 혈주에게 우리 육대공봉의 모든 것을 물려 드리겠습니다."
구유수명사 백리박의 말에 기검하는 다소 의아한 눈빛이 되었다.
"할아범들의 모든 것……?"
백리박은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예……! 우리 전부의 힘(力)을 혈주의 한몸에 모두 지니게 되면 제 아무리 백련대황교라 해
도 결코 혈주를 어쩌지는 못할 것입니다."
"응! 그것은 나도 알고 있어."
기검하는 천진하게 대꾸했다.
상천옹 사부신이 눈에서 푸르스름한 녹광(綠光)을 폭사하며 기괴하게 웃었다.
"키키키…… 혈주의 단 한 마디면 천하는 온통 시체만이 날뛰는 죽음(死)의 천국(天國)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의 음성에는 무한한 자부심이 서려 있었다. 만상천장인 천태서도 맞장구를 쳤다.
"크크크……! 혈주, 백련대황교가 비록 살아있는 생전무림(生前武林)을 지배한다지만, 우리
구유조상혈 또한 사후무림(死後武林)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의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사후무림(死後武林)!
죽은 뒤의 모든 것을 관장해온 구유조상혈의 힘(力)은 곧 일순간에 천하만물의 삶(生)과 죽
음(死)을 결정할 수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구유수명사 백리박은 품 속에서 마치 작은 종(小鐘)처럼 생긴 괴이한 모양의 황금요령(黃金
鈴)을 꺼냈다.
번쩍!
황금요령에서는 눈이 멀어버릴 듯한 휘황찬란한 금광(金光)이 뿜어져 나왔다.
그 형태는 종(鐘)같기도 했고, 또 어찌보면 방울(鈴)처럼 보이기도 했다. 구태여 말한다면
종과 방울을 한데 합쳐놓은 것이라고나 할까?
요령( 鈴)!
그것은 강시인들이 시체를 몰고다닐 때 울리는 방울이 아닌가?
"……."
구유수명사 백리박은 황금요령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쳐들며 엄숙하게 말했다.
"이 황금요령은 구유조상혈의 혈주임을 나타내는 조사령(祖師令)입니다. 사후무림(死後武林)
을 관장하는 구유조상혈의 제자들은 이 황금요령의 명령이면 죽음조차 불사할 것입니다. 받
으십시오."
"……."
기검하는 엉겁결에 황금요령을 받아 아무리 살펴보아도 황금요령에서는 특이한 점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치이! 겨우 이까짓 요령( 鈴)이 구유조상혈의 조사령이야?"
그는 약간 실망의 기색을 떠올렸으나 다음 순간, 기검하는 갑작스럽게 가슴이 진탕되어옴을
느끼고는 기이한 표정이 되었다.
서기(瑞氣)!
신비스러울만치 맑고 깨끗한 칠색(七色)의 서기가 눈부신 금광에 섞여 은은히 흘러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 상한데……?"
기검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황금요령을 보고 있자니…… 마치 전신의 피(血)가 모조리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어……."
그는 손에 든 황금요령을 한동안 뚫어져라 주시했다.
마력(魔力)!
확실히 황금요령에는 사람의 혼백(魂魄)을 사정없이 잡아끄는 어떤 괴이한 마력이 담겨 있
는 것 같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괴이한 것은, 황금요령의 한가운데서 실날같이 가느다란 한 줄기 벽록빛
광채가 끊임없이 뿜어져 나온다는 것이었다.
유심히 살펴보지 않으면 도저히 발견할 수 없는 흡사 벽록빛 눈(眼)이라고나 할까?
벽록광에는 사람의 마음을 여지없이 꿰뚫어 보는 듯한 괴이한 힘이 있었다.
"푸른 눈(眼)같은 이 벽록빛 광채는 무엇이지? 마치 파란 불꽃같기도 하고……."
기검하는 홀린 듯한 눈빛으로 황금요령을 바라보며 중얼거리자 옆에 있던 백리박이 입가에
흐릿한 미소를 떠올렸다.
"혈주! 그 황금요령은 바로 이천 년 전(二千年前), 사후무림의 창시자요, 본 구유조상혈의 조
사(祖師)이신 만시천작(萬屍天爵)께서 남기신 것으로…… 구유벽황요령(九幽碧荒 鈴)이라고
합니다."
"구유벽황요령……? 꽤 괜찮은 이름인걸……."
기검하는 신기한 듯 수중의 황금요령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구유벽황요령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조사의 혼(魂)이 담겨 있습니다."
기검하의 눈빛이 반짝 빛을 뿌렸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조사의 혼이 이 안에 담겨 있다고?"
백리박은 고개를 끄덕이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렇습니다. 이제 혈주께선 구유벽황요령에 담긴 비밀을 풀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진정한
혈주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기검하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아니! 그럼 이천 년 동안이나 그 비밀이 풀리지 않았단 말이야?"
그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고, 구유수명사 백리박은 쓰디쓴 괴소를 머금었다.
"그렇습니다."
"어째서 그랬지?"
"그것은 어느 누구도 그 비밀을 풀 수 있는 자격을 지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비밀은
오직 구청룡제황지재를 타고난 혈주만이 풀 수 있는 자격이 있고, 또 풀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구나! 지금까지의 혈주들은 모두 구청룡제황지재가 아니었기 때문에 그 비밀을 풀 수
없었단 말이지?"
"그렇습니다."
백리박은 허리를 숙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순간 기검하는 천진난만한 웃음을 터뜨렸다
"후후후…… 알았어. 내가 구유벽황요령의 비밀을 풀면 되잖아!"
그의 말은 어린 소년답지 않게 매우 야무졌다.
게다가,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반드시 실현될 것만 같은 강한 확신을 심어주는 것이었다.
육대공봉은 모두 두 눈에 간절한 염원과 기대의 빛을 가득 떠올리며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혈주께서 그 비밀을 푸는 날이 곧 우리 구유조상혈이 이천 년 금제를 풀고 천하로 웅비(雄
飛)하는 날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확신합니다. 혈주라면 능히 구유조상혈을 천하를 질타하고 구주팔왕(九州八荒)을 종
횡하는 무적의 단체로 만들 수 있음을……."
육대공봉의 얼굴에는 한결같이 짙은 갈망의 빛과 아울러 기검하에 대한 자랑스러움, 믿음
(信)등이 뒤범벅되어 있었다.
문득 구유수명사 백리박은 기검하를 바라보았다.
"혈주! 이젠 우리 육대공봉이 이곳에서 기거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왜……?"
기검하는 의혹이 담긴 표정으로 되묻자 구유수명사 백리박의 안색이 침중하게 굳어졌다.
"백련대황고! 그들은 분명 혈주께서 이곳에 오심으로 인하여 잔뜩 경각심을 돋구고 있을 것
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벌써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백련대황교가 나를……?"
"틀림없을 겁니다. 비록 그들이 자신들의 힘을 과신하여 혈주를 살려두긴 했으나…… 속하
가 추측컨대 그들은 암중으로 혈주를 감시하며 그림자처럼 따라다닐 것입니다."
"음……!"
기검하는 그제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혈주! 구유귀상청(九幽鬼喪廳)에 우리 여섯사람이 안배해 놓은 것이 있으니…… 우리가 떠
나는 즉시 그곳으로 드시기 바랍니다."
"알았어!"
기검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구유귀상청으로 들어가는 기관은 상천옹이 앉은 자리에 있습니다."
육대공봉은 공손히 예를 취해보인 후 어디론가 사라졌고, 기검하는 한동안 그들이 사라져
간곳을 바라보았다.
그의 귓전으로 백리박의 음성이 아스라이 들려왔다.
"혈주, 이것 한 가지만은 명심하십시오. 보이지 않는 검은제국(黑帝國) 백련대황교와…… 드
러나지 않은 사후무림(死後武林)의 구유조상혈과는 이미 싸움이 시작되었음을……."
기검하는 그 말에 대답이라도 하듯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것은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어. 여태까지는 타인에 의해서 내 운명(運命)이 결정 되었지
만 앞으로는 영원히 그럴 기회를 주지 않을거야. 그 누구에게도……!"
그는 고사리같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의 두 눈에서 사나이의 투혼(鬪魂)과 가공할 집념(執念)의 불길이 활화산처럼 타올랐다.
뜨겁다! 그것은 결코 일개 나이어린 소동의 눈빛이 아니었다.
천하독존(天下獨存)!
바로 천하를 한 손에 거머쥐고 뒤흔들 작은 거목(巨木)의 눈빛이었다.
우리가 여기서 기억해야 할 것은 단 하나 뿐이다.
---보이지 않는 제국 백련대황교와 사후무림 구유조상혈과는 이미 싸움이 시작되었다!
* * *
거대한 대리석(大理石)으로 이루어진 석전(石殿)이었다. 아니, 차라리 광장(廣場)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을 듯했다.
대전의 편액(扁額)은 칙칙한 어둠의 잿빛으로 쓰여있었다.
<구유귀상청(九幽鬼喪廳).>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으스스한 죽음의 전율을 일으키게 만드는 소름끼치는 필체(筆體)이나
기검하는 서슴없이 구유귀상청 안으로 들어섰다.
"……!"
양옆으로는 흡사 살아있는 지옥(活地獄)을 방불케 하는 온갖 흉상(兇像)들이 세워져 있었다.
염라대왕(閻羅大王)!
최명판관(催命判官)!
모야차(母夜叉)!
호혼악귀(呼魂惡鬼)!
우두사자(牛頭使者)!
마면귀사(馬面鬼使)!
무면나찰(無面羅刹)!
등등…….
지옥에 있다는 온갖 귀신(鬼神)들을 생생히 석상으로 조각해 놓았다.
보기만 해도 모골이 송연하고 머리털이 쭈뼛 곤두설 무시무시한 석상들이었다.
"훗……! 이곳이 바로 구유귀상청인가……?"
기검하는 오히려 야릇한 미소를 머금는 것이 조금도 무섭지 않은 듯했다.
"후후…… 내가 이곳의 모든 것을 익힌다면…… 염라대왕이 나에게 할아버지라 부르지 않을
까?"
구유조상혈!
그들은 바로 사후(死後)를 지배하는 절대자들이 아닌가?
"이 석상들을 모두 살려서 무림에 끌고 나가면 아주 재미있겠는걸……."
기검하는 느긋하게 뒷짐마저 진 채 걷고 있었다. 그의 이런 행동은 어린아이답게 귀엽기 이
를데 없으면서도 선천적인 기품이 자연스럽게 뻗쳐나오는 것이었다.
전설(傳設)의 회옥명음석(灰玉明陰石)으로 만들어진 옥단(玉壇)이었다. 그 위에는 놀랍게도
수많은 기진이보(奇珍異寶)와 여섯 권의 비급(秘 )이 놓여져 있는 것이 아닌가?
일순 기검하의 시야에 비급 사이에 꽂혀있는 한 통의 서찰이 들어왔다. 그는 조심스럽게 서
찰을 집어들고 읽기 시작했다.
<혈주(穴主)의 안전을 위해서는 부득이 이런 방법으로 뜻을 전할 수밖에 없음을 널리 양찰
해 주십시오.
혈주께선 최대한으로 빠른 시간 내에 이곳에 있는 비급들을 극성까지 터득하십시오. 이 비
급들에는 우리 육대공봉의 모든 정화(精華)가 담겨 있으니 하나도 빠짐없이 익히셔야 합니
다.
육대공봉 배상(拜上).>
"체! 별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서찰까지 남기다니…… 역시 늙은이들은 노파심이 지나치단
말이야…… 무조건 자기보다 나이가 적으면 아예 어린애 취급을 하려드니……."
기검하는 피식 실소를 터뜨렸다.
그렇다면 그는 이제 어린애가 아니란 말인가?
그는 맨 왼쪽에 놓여진 비급부터 차례로 읽기 시작했다.
<구유수명단권(九幽守命丹卷).>
천하의 모든 장의사(葬儀社)들을 총괄하는 유상촌의 전주 구유수명사 백리박, 의도(醫道)의
신기원을 이룩한 대륙제일의 신의인 그가 평생의 심혈을 기울여 터득한 모든 의도가 수록된
의학대전(醫學大典)이었다.
<의도(醫道)는 학문(學問)을 익히는 것처럼…… 쓸모없는 휴지조각같은 수십만 권의 의서
(醫書) 나부랭이를 읽는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오직 수많은 인체(人體)를 보고 다루며 무수히 반복되는 생체실험(生體實驗)을 통하여 이룩
되는 것이다. 노부는 시체와 함께 사는 장의사(葬儀社).
수백만 구의 시체를 해부하고 연구하여 이룩한 노부의 의술만이 진정한 의도(醫道)라 할 수
있다.>
"서…… 설마하니…… 이 정도까지나……."
기검하는 자신이 그 안의 내용에 걷잡을 수 없이 빨려 들어감을 느꼈다.
<대자연(大自然)의 신비가 아무리 현묘하다 하나 인체(人體)의 신비를 따를 수는 없다.
단연코, 우주삼라만상(宇宙森羅萬象) 중 인체의 현오(玄奧)함을 능가하는 것은 결코 없다.
손(手). 그 하나만 놓고 보아도 수만 개의 근육(筋肉)과 신경(神經)…… 혈맥(血脈)으로 이루
어 졌고, 그 하나 하나가 각기 하는 일이 다르며…… 그 전체가 모여서야 비로소 하나의 손
(手)이 형성되는 것이다.
손(手) 하나만 놓고 보아도 그럴진대 인체의 신비함을 어찌 다 필설로써 형용할 수 있겠는
가?
의도의 입문(入門)은 인체의 모든 신비로부터 시작된다.>
"화아……! 사람의 인체가 이토록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니…… 정말 신기하구나."
기검하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체가 지닌 잠재력은 끝을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무한대(無限大)이다. 그 잠재력을
격발시키면 불가사의한 힘(力)이 발휘되는 것이다.
마음(心)의 힘(力) 하나로 백리(百里) 밖의 촛불을 끄며, 자식의 위급함에 그 어머니가 자신
도 모르게 만근 거석(萬斤巨石)을 번쩍 떠받치고…… 천리(千里) 밖의 사람에게 자신의 뜻
을 꿈으로 전하는 것 등…… 그 위력은 이루 열거할 수조차 없다.
염력(念力)!
그 불가사의한 초능력(超能力)을 의도에서는 염력이라 일컫는다.>
기검하는 경악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염력(念力)……? 인간이 지닌 힘이 이토록이나 무서울 줄이야……."
<하나 애석하게도 인간은 그 엄청난 염력을 수만 분의 일(一)도 사용치 못하고 있다.
결국 무학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이 염력을 입(口)을 통해 뿌리는 것이고…… 검(劍)의 초
극지경인 심검(心劍)도 검이란 매개체를 통해 염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또한 지법(指法)이라
는 것도, 실상은 전신의 모든 염력을 손가락 끝 한 곳에 모아 뿌려내는 것에 지나지 않는
다…….>
기검하는 염력의 가공할 힘에 매료당하고 말았다.
"하아…… 놀랍구나! 의도가 이토록 신비무쌍할 줄이야…… 난장이 할아범은 정말 대단한
사람인 것 같은데……?"
기검하는 모르리라!
염력(念力)!
그것이 바로 최단시간 내에 무(武)의 최극(最極) 경지에 이르는 가장 빠른 지름길임을 말이
다.
<무(武)! 그것은 곧 의도(醫道)와 대자연(大自然)의 완전한 일치(一致)에서 비롯된다. 인체의
신비를 남김없이 푸는 자(者)……!
그가 곧 전무후무(前無後無)한 무(武)의 최고봉(最高峰)이 되리라.>
그 다음 장부터는 수효가 무려 수천 가지에 이르는 염력을 사용하는 수법이 적혀 있었다.
눈빛 하나로 상대를 즉사시키는 잔백탈혼심안공(殘魄奪魂心眼功)!
아혈이 찍힌 상태에서도 백 리 밖의 사람에게 뜻을 전할 수 있는 공극심어전향술(空極心語
傳響術)!
소리없이 어떤 물체라도 통과하는 만체천투령(萬體天透靈)!
내공이 없이도 순식간에 금강불괴가 될 수 있는 칠채금포삼(七彩金袍衫) 등등…….
기검하는 더 이상 놀랄 기력조차 없었다.
"하아…… 이것이 사실이라면 난장이 할아범의 구유수명단권만 익혀도…… 천하제일고수가
되는 것은 누워서 떡먹기 아냐?"
그는 새삼스럽게 구유수명단권의 앞뒤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그 옆에 놓여진 것은 기이하게도 비급이 아니라 하나의 두루마리와 양피지로 된 서찰이었
다.
"이것은 여섯 할아범 중 누가 써놓은 것일까?"
기검하는 서찰을 집어들었다.
<나 구주풍각괴는 빌어먹을…… 역마살이 끼었는지 태어난 후 무려 이백 사십 년 동안이
나…… 두 발이 퉁퉁 불어 터지도록 천하를 떠돌아 다녔다.>
천하의 모든 지관들을 총괄하는 풍각의 각주 구주풍각괴 유광의 서찰은 푸념으로부터 시작
되고 있었다.
"풋…… 이제보니 그 최소한 삼 년은 빨지 않은 듯한 꾀죄죄하고 더러운 마의를 걸친 할아
범이 쓴 글이었군."
기검하는 구주풍각괴 유광의 우스광스러운 모습이 당장 눈 앞에 보이는 듯 빙그레 웃었다.
<이 하늘 아래 그 어떤 놈이 감히 내 앞에서 천하에 가보지 않은 데가 없다고 나불거리던
가?
한데 웬놈의 팔자가 이렇게 더러운지…… 전생이 풍뎅이 귀신에게 죄라도 졌는지 천하를 수
백 바퀴도 더 뺑뺑 돌았으나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십만대산(十萬大山)에서 육 년 전에 잃어버린 바늘(針)도 찾은 사람이 바로 나니까…….>
기검하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을 길이 없었다.
"후후…… 정말 자기 멋대로 생긴 만큼이나 재미있는 할아버지야……."
<하나…… 그것도 다 팔자소관이 아니겠는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스스로 자신을 땅에 관한한은 천하제일로 자부하게 되었으니…… 삼산
사해오악칠택팔황구주를 위시한 천하를 나만큼 아는 자가 누구며, 땅의 지맥(地脈)…… 수맥
(水脈)…… 광맥(鑛脈)…… 화맥(火脈)에 대해 나보다 더 잘 아는 자 그 누가 있겠는가?
나에게 있어 천하는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처럼 보잘 것 없고 우스운 것이다.>
"풋…… 천하를 가장 많이 아는 사람이라고? 하기야 천하를 떠돌아 다니며 땅의 지세를 살
피는 지관이니 충분히 그럴 수도 있을거야."
<한데 이 세상에는 조금 괴상하다 싶은 지세를 이용하여 신비다 뭐다하며 숨어있는 쥐새끼
들이 많으니…… 정말 배꼽이 다 하품할 지경이다.
백련대황교나…… 융천밀환세나…… 암흑등혈옥 등 그놈들이 아무리 보이지 않는다 해도 결
국 지상과 지하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 어찌 내 영민한 이목을 벗어날 수 있겠느냐?
네 그놈들을 비롯하여 감히 신비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는 놈들이나 세력이 우스꽝스러워
중화풍수지리도(中華風水地理圖)에 자세히 기록한다.>
"중화풍수지리도…… 이 두루마리가 그것인가?"
기검하는 옆에 놓여있는 길다란 두루마리를 풀어보았다.
촤라락!
그곳에는 온통 기이한 도형(圖形)과 점(點), 선(線), 그림(畵)들이 거미줄처럼 빽빽이 그려져
있었다.
한참 동안 중화풍수지리도를 펼쳐놓고 유심히 들여다 보던 기검하는 일순 가느다란 탄성을
내질렀다.
"화…… 정말이야. 이것은 천하를 한눈에 들여다 볼 수 있는 극히 자세한 지세도로구나."
중화풍수지리도!
그것이야말로 천하의 지세는 물론 지맥, 수맥, 화맥, 광맥 등 천하의 모든 맥이 빠짐없이 나
와있었다.
하나 가장 경악한 사실은 백련대황교, 융천밀환세, 암흑등혈옥을 비롯한 수많은 신비집단들
의 소재지가 일목요연하게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이 일은 그 할아범이 아니면 그 누구도 이루지 못했을거야……."
기검하는 혀를 내둘렀다.
"못생긴 할아버지! 정말 대단해. 끝없이 자부해도 아마 누구 하나 뭐라할 사람은 없을거야."
일순 기검하의 눈이 반짝 빛을 뿌려냈다.
"좋아! 이 중화풍수지리도가 있는 이상 천하는 이미 내 손 안에 있는 것이나 다름없어!"
---천하는 내 손 안에 있다!
이 얼마나 광오한 말인가?
중화풍수지리도는 능히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고도 남을 정도였다.
두루마리의 뒤에는 한 가지 초극심법이 적혀 있었다.
<신행대각경(身行大覺經)!
천하제일의 신법으로 한 모금의 진기로 천 리를 날고, 자면서도 천 일을 치달릴 수 있다.>
다음에 있는 것은 만상천장인 천태서가 남긴 것이었다.
그는 이 세상 모든 상례장인들의 집단인 팔황예상전을 관장하는 천하제일장인이 아닌가?
<무공의 극치가 도(道)와 예(藝)이듯이 장인(葬人)의 극치 또한 예(藝)에 있다.
도(道)는 길(路)이요, 혼(魂)이며, 예(藝)는 기(技)요, 형(形)이다.
도와 예 그 두 가지를 이루는 것이 이천 년을 장인으로 이어온 본 천씨세가의 꿈이었다.>
기검하는 알 듯 모를 듯 고개를 갸웃했다.
"도(道)와 예(藝)……? 그것이 뭐가 다르지? 예든, 도든 극치에 이르면 종내에는 똑같아지
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 깊은 뜻을 쉽사리 파악할 수가 없었다.
<한데 하늘의 도우심인가?
어느날 노부는 우연한 기회에…… 영원한 유림(儒林)의 대종사(大宗師)로 숭앙받는 천필(天
筆) 제갈일(諸葛逸)의 유품(遺品)을 얻었다. 그것으로 인해 본가(本家)의 꿈을 달성했을 뿐만
아니라, 무공에 있어서도 일취월장…… 마침내 예(藝)의 경지에 이르렀다.>
한 마디로 무공을 예술(藝術)의 경지까지 승화시킨 무(武)의 최고경지가 아니던가?
문득 기검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천필 제갈일……? 이런 인물도 있었던가?"
그로서는 천필 제갈일이라는 명호는 금시초문이었으나 무림인이 이 이름을 들었다면 수백
번도 더 놀라 까무라쳤으리라.
---유림대종사 천필 제갈일!
오직 단 한 자루의 붓(筆)으로 무려 백 년 동안이나 천하제일인(天下第一人)이란 고독(孤獨)
을 지긋지긋하게 맛보며 여생을 마친 천추고독인(千秋孤獨人)으로 초야(草野)에 묻힌 선비
들의 모임인 유림(儒林)의 대기인이었다.
<필(筆)은 곧 생명(生命)이다.
무릇…… 필을 다루는 자의 마음가짐은 항시 맑은 가운데 청정(靑淨)해야 한다. 여기, 노부
가 생전에 터득한 필의 도(道)와 예(藝)를 기록하노라.
천필 제갈일 절필(絶筆).>
그 밑으로는 삼초(三招)의 필법(筆法)이 적혀 있었다.
일필도(一筆道)!
한 자루의 붓(一筆)이 구만리창천(九萬里蒼天)을 가르매 생사(生死)가 너의 뜻대로 되리라!
그것은 실패란 있을 수 없는 필살(必殺)의 필법(筆法)이었다.
쌍필천극사(雙筆天極死)!
두 자루 붓이 하늘로 솟구치니…… 찰나지간에 태양(太陽)과 달(月)마저 꿰뚫으리라! 피할
수도 없고, 피할 마음조차 먹을 사이도 없는 무적(無敵)의 필법이었다.
기검하는 고개를 내저었다.
"피이…… 유림의 사람이라기에 좀 점잖은 사람인 줄 알았더니 너무 허풍이 심한데……."
그 다음 초식을 읽어가던 그는 갑자기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화! 한꺼번에 어떻게 천개(千個)씩이나 가는 붓을 날릴 수 있지?"
천필만리회풍사(千筆萬里廻風死)!
<일천(一千)의 세필(細筆)이 천지(天地)를 뒤덮으니…… 그 어떤 것도 남아나는 것이란 없
다.
후인(後人)이여!
노부의 말을 의심치 마라. 일천의 세필은 곧 그대의 마음(心)이나…… 그것은 단지 마음으로
만이 날릴 수 있다.>
기검하는 아예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거…… 거짓이 아니다. 결코, 이분의 말이 허풍이 아니라는 것을 믿을 수 있다."
그는 천필만리회풍사의 오의를 깨우치고는 그 위력을 실감한 것이다.
기검하는 새삼 무(武)의 가공할 경지를 절감하며 혀를 내두른 후 주위를 둘러보며 기이한
눈빛을 띠었다.
"이분의 유서(遺書)에 의하면 자신이 사용하던 천자제일필 속에 일천 개의 세필이 감춰져
있다고 하던데…… 천자제일필(天子第一筆)이 어디에 있을까?"
기검하의 눈에 한 자루 커다란 붓(筆)이 보였다.
대금필(大金筆)은 담담한 금광(金光)을 발하는 거의 장검(長劍)만한 금빛 붓이었다.
"아무래도 이게 천자제일필 같은데……?"
기검하는 대금필을 집어들어 유심히 쳐다보았다.
천자제일필(天子第一筆)!
붓의 자루에는 과연 힘찬 필체로 이렇게 양각되어 있었다.
필모(筆毛)는 어떠한 보검으로 끊어지지 않는다는 전설의 천산백리금사(天山白理金絲)였
고…… 붓자루는 한상빙극옥(寒霜氷極玉)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역시 내 추측이 맞았군."
기검하는 배시시 웃었다.
탁!
천자제일필을 거꾸로 뒤집어서 손바닥 위에 털자 와르르! 한 자 크기의 대붓에서부터 바늘
이라 해도 좋을 미세한 붓에 이르기까지 엄청난 종류와 수량의 붓들이 쏟아져 나왔다.
첫댓글 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