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2월 16일 일요일, 뉴욕의 겨울 아침이 밝았다. 브로드웨이 31번가에서 출발하는 한인여행사의 맨하탄 데이투어를 신청했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점심 제공에 70불이란다. 숱한 맨하탄의 명소들을 수험생의 입장에서 "요점정리"해 주는 코스로 단기관광객에게 꽤 인기가 있을 듯하다. 출발지인 W 31St. & Broadway를 오는 동안에 지나친 그 유명한 뉴욕시경(NYPD) 앞에 도열해 있던 1인 탑승의 주차단속용 미니차가 눈길을 끈다.
10시 정각 우리가 탄 버스는 31번가를 우회전해 일단 다운타운으로 남하하기 시작한다. 1시 방향에 마치 다리미같은 3각형의 19층 짜리 건물이 눈길을 끈다. 23번가에 위치한 {Flat Iron}빌딩으로 아직 별다른 고층건물이 없던 시절, 마천루시대를 예고하는 신호탄 역할을 한 유서갚은 건물이다. 계속 남하한 우리는 워싱턴 취임 100주년을 맞아 만든 개선문 모양의 아취가 자리잡은 워싱턴광장과 그 주변의 뉴욕대학(NYC)을 돌아 맨하탄의 대학로, 그리니지 빌리지에 들어섰다.
'마지막 잎새'의 작가 오우헨리의 아지트였다는 하얀색 간판의 "르 피가로"카페가 일요일 오전의 정적 속에 클래식한 자태로 다가온다. 이어 원래 뉴욕항의 창고 건물군이었으나 예술가의 거리로 바끤 소호(SOHO; South of Houston St.)거리를 지나쳤으나 예외없이 일요일 오전의 겨울바람만이 을씨년스럽게 맞아줄 뿐이다. 한국 출신의 천재 아티스트 백남준이 살고 있다는 이 곳 어디에서도 그의 그림자과 향기는 느낄 수 없었다.
계속된 버스 여정은 세계금융의 심장 월가(Wall St.)로 이어진다. 이곳에 처음 정착한 화란인 모피상들이 인디언의 침공을 막기 위해 담을 친데서 유래한 "월가"는 무디스, 모건 등을 비롯한 세계 유수의 금융관계기관들과 증권거래소들이 위치한 곳으로, 트리니티 교회로부터 시작해 차이나타운을 끼고, 뉴욕만에 위치한 배터리공원에까지 걸쳐 있다. 증시의 상승세를 상징하는 황소상(하강세를 상징하는 동물은 곰)이 9.11 테러의 충격을 딛고 우뚝 제 자리에 서 있다. 트리니티 교회 뒤로 맨하탄 최남단의 뉴욕시청을 우리의 버스가 지나친다. 건물들 사이로 9.11 테러 이후 텅빈 공터가 되어버린 쌍둥이 빌딩자리(Ground Zero)의 공허한 아픔이 엿보인다.
"배터리 파크"에서 우리는 자유의 여신상과 뉴욕만을 주유하는 유람선에 올랐다. 유람선에서 바라보는 맨하탄의 겨울 풍경이 귀를 찢어내는 듯한 朔風 속에 얼얼하게 다가온다. 자유의 여신상이 위치한 리버티섬 바로 옆에 개항 초기 이민국이 있었던 엘리스 섬이 있다. 당시 모든 입국자가 여기서 입국심사를 받아야 했는데, 전염병력자, 범죄자, 경제사범 등 각종 결격사유자들이 입국심사가 거절되어 가족과 생이별하게 되었고 따라서 이 섬은 "눈물의 섬"이란 센치한 별명을 얻게 되었단다. 특이한 양식의 멋있는 당시 이민국 건물이 그 비정한 역사를 뒤로 하고 매서운 겨울바람에 시달리고 있었다.
급히 뱃전에 나가 자유의 여신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한 판 박았다. 바닷바람이 더해진 뉴욕만의 강풍에 얼굴 전체가 떨어져 나갈듯한 전율을 느꼈다. 대단한 뉴욕의 겨울이다. 영하 10도라는데 바람에 덧붙인 체감온도는 영하 20도는 됨 직하다. 자유의 여신이 들고 있는 횃불은 자유를, 독립선언문은 평등을, 이마의 7광선은 7대양 7대주(지구)를, 발 밑의 끊긴 쇠사슬은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을 각각 상징한다는데 너무 추워서 과연 그런지 생각할 겨를도 없다. 허드슨강 너머의 뉴저지 지역과 이스트강 너머의 부루클린 지역을 강풍 속에 돌아 보고 유람선은 이제 귀로의 여정에 접어든다. TV에서 본 로마네스크 양식의 부루클린 다리와 맨하탄 다리의 모습을 실제로 보는 감회가 새롭다. 그러나 유람선을 후려치는 뉴욕만의 강풍에 소름이 끼친다.
32번가에 위치한 한식당 "원조"에서 비빔밥을 선택해 맛있게 먹고, 우리 일행은 이제 지척의 "엠파이어 스테이트"빌딩으로 향한다. 입구에서부터 늘어선 관람객의 長蛇陳 행렬을 보면서 온통 시골노인들 행렬로 가득한 서울의 63빌딩 생각이 불현 듯 나는건 웬 일일까? 긴 기다림 끝에 80층까지 엘리베이터로 올라간 후, 다시 엘리베이터를 갈아타고 86층 전망대에 이르러 맨하탄의 시가를 고공 관찰해 보았다.
강풍이 몰아치는 전망대 밖 베란더에서 허드슨강에 걸쳐 있는 조지 워싱턴 다리, 이스트강을 가로지르는 부루클린, 맨하탄, 퀸즈 다리들, 그리고 멀리 할렘강가에 뻗어 있는 다리들을 굽어보며 맨하탄의 도심을 푸른 색으로 가로지르는 센트럴 파크에 눈이 멎었다. 오른 편으론 이스트강가를 바라보는 48층의 유엔빌딩, 그리고 사선으로 뻗어 있는 브로드 웨이가 관통하는 맨하탄의 하이라이트 "타임스퀘어", 고혹적인 흰 색 첨탑으로 우리를 유혹하는 "크라이슬러"빌딩, 순수한 채권공모로 건설했다는 울워스 빌딩, 이 모든 것들이 겨울 강풍에 시달리는 뉴욕의 휴일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엠파이어 빌딩을 나와 다시 버스에 오른 우리는 유엔본부 앞에서 잠시 현장 증명사진을 찍은 후, 맨하탄의 서편 도로를 북상하기 시작한다. 로마네스크 양식을 비롯한 각종 양식이 혼재된 아름다운 성공회 교회인 112번가의 성 존디바인(Saint John The Divine) 교회를 지나니 그 유명한 흑인촌인 할렘가가 시작된다. 이어 116번가에 이르니 콜롬비아대학의 캠퍼스가 펼쳐진다. 56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이 명문대의 정문엔 휴일임에도 학교를 드나드는 많은 학생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MA주의 하버드,MIT, RI주의 브라운, CT주의 예일, NH주의 닷머스트, NJ주의 프린스턴, Pen주의 뉴펜실베니아, NC주의 듀크, 그리고 뉴욕주의 코넬과 함께 아이비리그 10대 명문교를 이루고 있는 이 대학은 뉴욕시에 위치한 유일한 아이비 리그 대학인 셈이다.
이제 버스는 센트럴 파크의 담장을 끼고 5th Ave.를 따라 다시 남하하기 시작한다. 무수한 영화에 등장해 뉴욕의 센치멘탈리즘을 채색해 주었던 센트럴 파크의 전경이 버스 차창을 통해 동공에 들어찬다.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세계최대의 인공공원답게 숲과 호수와 산책로와 각종 조경들이 스케일 크게 펼쳐진다. 부럽기 짝이 없다. 이 공원의 조경 설계자는 훗날 샌프란시스코에 초청되어 서부의 손꼽는 볼거리인 스탠포드대학 캠퍼스를 조경했단다.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에 이르기까지 센트럴파크 맞은편에는 부호들의 고급 빌라가 이어진다. 마이클 잭슨, 케네디 미망인 재클린을 비롯해 많은 저명인사들이 살았거나 살고 있는 이 富의 환각지대를 버스 차창을 통해 바라보면서 미국사회의 최상류층을 겨울바람 속에 貫通하는 묘한 희열을 느꼈다.
이윽고 센트럴 파크가 끝났나 보다. 내 눈엔 [나홀로 집에 2]에 나오던 낯익은 호텔 건물이 들어차는가 싶더니 59번가부터 50번가 쪽으로 내려 갈수록 티파니 보석점, Bergdorf Goodman, FAO Schwarz, Henri Bendel, 등등 세계적 명품점들이 끝없이 펼쳐진다. 록펠러 재단이 출연한 부지에 세워진 거대한 록펠러 센터 빌딩군과 맞은 편의 세인트 패트릭 성당을 지나 42번가의 타임스퀘어에 들어서니 "라이언 킹"의 휘황찬란한 대형 네온사인 보드를 필두로 맨하탄의 밤문화를 대변하는 크고 작은 몸짓들이 나그네의 旅心을 유혹한다.
맨하탄에서 유일하게 네온사인이 허용된다는 타임스퀘어의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이번 여행의 목적이기도 한 뮤지컬 [오페라의 유령] 할인티켓을 구해 나오는 나의 성취감 가득한 어깨 위로 타임스퀘어의 화려한 조명이 포근히 내려 앉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