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는 사람이 태어날 때 다른 사람을 딱하고 불쌍히 여기는 측은지심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측은지심은 맹자가 인간의 본성을 4가지로 요약한 4단(四端) 중의 하나이다. 그는 본성의 사회적 실현 욕구를 강조한 바 있다.
‘公孫丑(공손추)·상’ 제6장은 ‘不忍人之心’장이라고도 하고 ‘四端(사단)’장이라고도 한다. 不忍人之心은 남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 혹은 남의 불행을 덤덤하게 볼 수가 없는 마음을 뜻한다. 맹자는 이상적인 정치란 不忍人之心을 토대로 不忍人之政(불인인지정, 사람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정치)을 행하는 것이며, 不忍人之心이란 인간의 마음에 내재하는 四端이 발로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왕도정치론과 인간 본성론은 매우 긴밀하게 연결된다.
위에서 맹자는 ‘사람들은 모두 남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고 인간 본성의 보편적 특성을 단언했다. 이것은 인간의 본성을 선하다고 여기는 性善說(성선설)의 핵심이다. 맹자는 인간의 본성을 이렇게 말하여, 그 아래에서 논하게 될 왕도정치론의 본질을 摘示(적시)했다.
조선의 朴世堂(박세당)은 이렇게 풀이했다. 맹자는 不忍人之心이 결코 여러 사람에게는 없고 옛 임금만 홀로 이것을 지닌 것이 아니라 옛 임금은 이것을 잘 미루었으나 여러 사람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말했다. 그리고 맹자는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다 같이 이 마음을 지니고 있음을 자각해서 이것을 잘 미루어 넓혀야 한다고 가르치고, 만일 사람들이 자신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해칠 뿐만 아니라 그의 군주도 해치게 된다는 점을 알게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不忍人之心을 주희(주자)는 천지의 生物之心(생물지심, 만물을 태어나게 하는 마음)과 같다고 보아 이렇게 말했다. 천지는 만물을 태어나게 함을 마음으로 지니고,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들은 각각 천지가 만물을 태어나게 하는 그 마음을 얻어 자기 마음으로 삼았으므로, 인간은 모두 남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 백지 상태인가, 그것은 알 수가 없다. 다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남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을 지녔다고 여기는 관념은 인간의 도덕적 자율성을 인정하고 생명의 연대의식을 싹트게 하는 희망 가득한 주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측은지심의 유사어로는 동정심이 있으며, 역지사지(易地思之)나 이심전심(以心傳心)은 측은지심과 연관성이 높은 말이다. 측은지심이 발동되었다고 해서타인에 대한 원조행위가 곧 따라 나오는 것은 아니며, 측은지심에 의한 원조행위가 일상생활에서 자주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감정이나 마음속의 생각 수준에서 머물다가 잊히는 경우도 많은데, 그런 경우에는 제3자가 그 사람의 측은지심을 알아차릴 수 없다.
맹자孟子(BC 372?~289?)
맹자(孟子)가 말한 사단이란 사람에게 4가지 마음이 있다는 단서를 이야기 합니다.
그 4가지 단서는 측은지심, 사양지심, 수오지심, 시비지심인데요.
그 중 첫번째 측은지심(惻隱之心)입니다.
맹자는
惻隱之心 仁之端
측은지심 인지단
이라 하여 측은지심을 느끼는 것으로 보아 사람에겐 인(仁)의 마음의 단서가 된다고 했습니다.
즉 남의 어려움, 위험, 고통, 불행등을 보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맹자는 無惻隱之心 非人間(무측은지심 비인간)이라고 까지 하며,
사람이 측은지심을 느끼지 못한다면 인간이라 할수 없다고 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남의 불행을 가엾게 여겨 도우려는 마음. 그것이 바로 '인(仁)'의 마음 입니다.
우리는 선(善)을 좋아합니다.
맹자는 "아이가 물가에 놀다가 물에 빠지려고 할 때 어떤 사람이 다급히 그 아이를 구하는 것은 아이의 부모에게 잘 보여서 보상을 얻으려 함이 아니라 본성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는데요.
측은히 여겨 동정하는 마음을 측은지심이라고 합니다.
이 단서를 통해 사람의 본성(本性)에는 인의 마음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인은 다시말해 '사랑'입니다. 누구에게나 인의 마음이 있습니다.
아래의 영상은 <신생아 아기울음실험> 영상입니다.
아기가 자기 울음소리에는 따라 울지 않는데 다른아기가 우는 소리에는
그 동정하는 마음에 따라서 같이 운다고 합니다. 우리는 날때부터 인(仁)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인(사랑)을 실천하기 어려운 까닭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무언가를 쓰려면 먼저 그것에 대해 배워야 합니다.
글을 잘 쓰려면 글에 대해 배워야 하고, 컴퓨터를 잘 쓰려면 컴퓨터에 대해 배워야 합니다.
마음도 마찬가지로 인의 마음을 잘 쓰려면 인의 마음이 무엇인지 배워야 합니다.
하지만, 현하의 학교 교육이 사람의 본성을 가르치기보다는 '돈'버는 기술만을 가르치고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본성을 점점 잃어가고 있습니다.
스펙쌓기에 혈안이 되어 점점 사람다운 모습보다는 기계화 되고 있는 것 같아요.
실제로 스펙(specifiation)이라는 단어는 기계한테나 쓰는 용어라고 합니다.
가진 것은 많아지지만 마음 한켠이 공허해지는 요즘
봄처럼 따뜻한 인(仁)의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 살기좋은 세상을 만드는 지름길이라는 생각이 드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