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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성제(四聖諦) :
불교의 기본 세계관은 연기법 즉 모든 것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즉, 이것이 있음으로 해서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음으로 해서 그것이 존재한다는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는 이러한 교리를 사람들이 쉽게 알아듣고 실생활에 적용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이를 간략하게 정리하였으니, 이것이 불교의 가장 기초가 되는 교리인 사성제라고 할 수 있다. 즉, 사성제의 가르침은 연기의 핵심이며 축소이다.
a. 고제(苦諦) :
서구에서 쓰여진 저작물들을 보노라면 종종 '마니교적'이다라는 어휘가 보이며, 이 말은 염세주의적이며 고행자적인 것을 나타낼 때에 주로 쓰인다. 마니교는 불교가 중동으로 유입되어 생긴 종교로서, 불교로부터 고행과 금욕, 출가수행법과 염세주의적인 세계관을 물려받아 생긴 중세의 혼합 종교 중 하나였다. 이처럼 불교의 세계관은 염세주의적은 색체가 짙다. 이슬람에서는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가 천국의 가장 낮은 단계라고 생각되어지고 있지만, 불교에서는 대조적으로 삶을 이처럼 고통 그 자체로 보고 있는 것이다. 고통에 관한 이러한 불교의 가르침을 일컬어 고제(苦諦)라고 한다.
사성제의 첫 번째는 괴로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다. 즉 고성제이다. 현실의 괴로움은 보통 4고ㆍ8고(四苦 八苦)로 분류한다. 생ㆍ노ㆍ병ㆍ사(生 老 病 死)라는 삶의 모든 과정에 대한 4가지 괴로움에 다른 4가지 괴로움, 즉 애별리 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음성고(五陰盛苦)를 합해서 8고라 한다. 삶을 받는 괴로 움, 늙는 괴로움, 병드는 괴로움, 죽는 괴로움은 윤회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누구나 겪어야 하는 보편적인 괴 로움이다. 또한 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지거나 정든 환경을 떠나야 하는 괴로움, 싫은 사람을 만나야 하거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살아야 하는 괴로움, 원하는 것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괴로움, 마지막으로 5온은 나와 나의 것으로 집착하는 데서 오는 괴로움이다. 위와 같은 괴로움에 대한 여실한 인식이 사성제의 첫 번째 진리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런 괴로움을 늘 겪고 있 으면서 인간 존재의 실상을 여실하게 보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이 진리에 대해서 전적으로 공감하지 못한다. 사랑하 는 사람과 헤어지거나 미운 사람을 만나면 당장 괴롭다고 생각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내 망각하고 지낸다. 불교 수 행의 출발점은 괴로움에 대한 정확한 인식인데, 고의 실상을 바로 보는 순간 고통을 여의고 안락함[離苦得樂]을 얻 을 수 있는 것이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굴에 들어가야 한다는 속담도 있고 전쟁 중에 상대를 알면 백전백승이 라는 말이 있듯이 고통을 여의고 안심입명을 얻기 위해서는 괴로움의 실체를 바로 알아야 한다. 괴로움을 두려워하 며 피할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맞서 괴로움을 직시해야 한다. 고통의 무게를 못이겨 삶을 포기하거나 자살하는 사 람들은 정말 헤어나오기 힘든 암흑의 늪으로 빠져드는 것이다. 아무리 괴롭고 힘들더라도 회피하지 않고 적진을 향 해 달리는 용맹스런 장수처럼 고통을 직면해야 한다. 당당하게 괴로움과 맞설 때 그 실체를 정확히 인식하여 원인과 해결책을 마련할 수 있는 것이다.
b. 집제(集諦) :
삶 즉 불교에서 말하는 고통 그 자체의 원인을 불교에서는 업(카르마)과 번뇌(갈애와 무지)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여기서 삶과 윤회는 업(카르마)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여기는 것은 여타의 브라만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무지가 바로 악의 원인이 된다는 통찰은 이슬람의 가르침과도 다소 일치하는 것이며, 번뇌의 일종인 갈애가 인간을 방황하게 만든다는 통찰 역시 이슬람의 가르침과 어느정도는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그대 다우드(다윗)여, 참으로 '우리'는 그대를 지상에서의 ('우리'의) 대리인으로서 보낸 것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를 심판할 때는 진리에 따라 행해야되는 것이니, 네 개인의 욕심을 따라서는 안된다. 이는 네가 알라(하나님)으로의 길로부터 벗어나 방황하게 하리라. (꾸란 38:26)
사성제의 두 번째는 괴로움의 원인에 대한 확실한 인식이다. 즉 집성제이다. 집(集)이란 ‘함께 모여 일어난다[集起]’는 뜻이다. 무엇이 함께 모여 일어나는가? 인간의 근본 미혹으로 인한 욕망과 애착이 모여 괴로운 번뇌가 일어 난다. 이것을 한 마디로 ‘갈애(渴愛)’라 한다. 욕망의 갈증과 존재에 대한 애착이다. 이 갈애가 바로 괴로움의 원인인 것이다. 감각기관을 통해서 보기에 좋은 것, 듣기에 좋은 것, 좋은 향기, 좋은 맛, 감촉이 좋은 것만을 탐한다. 그 욕 망의 정도는 끊임이 없다. 하나를 충족시키면 둘을 요구하고 둘을 들어 주면 셋을 요구한다. 그래서 이것이 괴로움 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욕애(欲愛)’라고 한다. 좋은 것만을 탐닉하는 인간의 성향 이면에는 ‘나’라는 존재가 영원하여 좋은 것을 항상 향유하기를 바란다. 지금 이 목숨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며 생에 대한 강렬한 집착을 버리지 않는다. 바로 이 생에 대한 갈애와 집착이 ‘유애(有愛)’이다. 이처럼 욕애와 유애를 추구하다가 더 이상 나아갈 수 없을 때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허무를 탐닉한다. 이것을 무유애 (無有愛)라 한다. 쾌락주의의 극치는 허무주의와 통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양극단에 치우친 태도는 항상 고통의 원인이 된다. 고통의 원인을 파악하려고 하는 삶의 태도는 매우 적극적이며 역동적이다. 부처님은 최초의 설법 중에서 “최초의 진 리가 괴로움의 인식이고 괴로움의 원인을 여실히 관찰하고 인식한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미 괴로움에서 벗어난 사 람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앞에서 자살에 대해서 잠시 언급했듯이, 이 말을 듣고 어떤 이는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 다. “카드 빚에 쪼들려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동반자살한 가족, 부도를 내고 자살한 중소기업체 사장, 일등에서 이등으로 떨어졌다고 아파트 옥상에서 떨어져 죽은 어느 학생, 이들은 모두 자살을 결행할 정도로 이 세계의 고통을 절감했을 것이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고통을 경험하고 자살함으로써 고통을 벗어난 사람들인가?” 물론 이것은 전제가 잘못된 어리석은 질문이다. 자살한 사람들은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고통을 절감한 것은 사실 이다. 그러나 이들은 그 고통의 원인이 무엇인가를 파악할 생각조차 해보지 못하고 이 어려움을 겪는 것보다는 차라 리 죽는 편이 더 낫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는 괴로움에 직면한 것이 아니라 도피한 것이며, 삶에 대한 태도가 너무 소극적이고 무기력했음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오죽 괴로웠으면 자살까지 했겠냐고 묻겠지만, 사실 그들은 괴로움에 빠져 버려 헤어나오지 못하고 그 속에 함몰되어 버린 것이다. 괴로움에 대한 바른 인식과 괴로움의 원인을 관찰할 생각을 낸다는 것은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고 삶을 진지하고 성실하게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사성제 의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진리를 잘 실천하고 있는 사람이다.
c. 멸제(滅諦)와 도제(道諦) :
멸제는 고통의 소멸에 관한 통찰이며, 도제는 고통의 소멸로 이끄는 바에 대한 통찰이다. 도제와 관련하여 가장 대표적인 가르침은 팔정도이다. 멸제는 열반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도제는 팔정도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더 자세히 다뤄보도록 하겠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신 후에 펴신 최초의 설법은 고ㆍ집ㆍ멸ㆍ도(苦ㆍ集ㆍ滅ㆍ道) 사성제(四聖諦)이다. 사성제는 부 처님의 최초의 설법인 동시에 일생의 설법이다. 부처님은 성도 후 수 주일 동안 선정에 잠기신 후 자신의 법을 듣고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교진여 등 다섯 비구 를 찾아 베나레스의 녹야원으로 갔다. 그리고는 고ㆍ집ㆍ멸ㆍ도 사성제법을 설했다. 다섯 비구들에게 최초로 사성 제를 설했다고 해서 그것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한다. 최초로 깨달음에 이르는 법의 수레바퀴를 굴렸다는 뜻이다. 이 초전법륜에 의해서 불교교단이 성립된다. 불교교단이 성립하려면 불ㆍ법ㆍ승(佛 法 僧)의 3보(三寶)가 있어야 하는데, 사성제를 설한 초전법륜으로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닦고 전할 제 자들이 생긴 것이다. 먼저 경전의 말씀을 읽어보자. 부처님께서 베나레스의 녹야원에 머무르실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설법하셨다. “네 가지의 성스럽고 참다운 진리가 있다. 무엇을 네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모든 것은 괴롭다는 진리요[苦聖諦], 둘째는 괴로움의 원인은 쌓임에 있다는 진리요[苦集聖諦], 셋째는 모든 괴로움이 소멸된 진리요[苦滅聖諦], 넷째는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방법의 진리[苦滅道聖諦]다. 만약 수행자로서 이미 모든 것이 괴롭다는 진리를 알고 이해하며 [知], 괴로움이 원인이 쌓임에 있음을 알고 끊으며[斷], 괴로움이 소멸된 진리를 알고 증득하며[證], 괴로움이 사라 지는 방법의 진리를 알고 닦았다면[修], 그런 사람은 빗장과 자물통이 없고, 구덩이를 편편하게 고르고, 모든 험하 고 어렵고 얽매이는 것으로부터 벗어났다고 하리라. 그는 어질고 성스러운 사람[賢聖]이라 부를 것이며 거룩한 깃 대를 세웠다고 하리라.” 『잡아함경』 제15권 386경 「현성경(賢聖經)」 여기서 부처님은 괴로움의 세계라는 현실과 그 고통의 원인, 괴로움이 멸한 세계, 그리고 괴로움을 멸하는 길을 깨 우쳐 주신다. 이 사성제의 실천구조는 환자의 병을 치료하는 원리와 유사하다. 고, 즉 괴로움은 우리들이 앓고 있는 병의 증상에 해당된다. 그리고 집, 즉 미혹과 집착의 갈애(渴愛)는 발병의 원인이 된다. 멸, 즉 괴로움이 멸해서 평 안한 상태는 병이 없는 건강한 상태이다. 마지막으로 도, 즉 괴로움을 없애고 열반에 이르는 길은 병을 치료하는 방 법이다. 현실의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은 길고 먼 윤회의 길로 추락하는 경로를 나타내고 괴로움의 소멸과 소멸하 는 방도는 영원한 행복과 자유가 있는 열반의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경로를 보여준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 파악한 현실의 괴로움은 어떤 것인가?
* 괴로움의 소멸과 소멸하는 길 - 팔정도
사성제 중에서 멸성제는 괴로움이 소멸된 상태, 즉 괴로움의 원인인 갈애 또는 탐냄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모두 사라 진 평온의 경지를 나타낸다.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소멸되었으니 괴로움도 당연히 사라져야 한다. 괴로움이 없는 인 생, 이는 이미 중생의 삶이 아니라 열반과 해탈을 성취한 성자의 삶이다. 병에 걸렸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그 병의 원 인을 정확히 진단하여 병을 모두 치료했으니 이제 더 이상 환자가 아니다. 다시 말해 고통스러운 병과 그 원인이 소멸되었다는 것은 삼법인에서 언급한 열반적정의 상태이며, 이 장의 마지막 에서 살펴 볼 12연기의 역관(逆觀)의 결과로 해탈의 경지를 말한다. ‘모든 존재현상은 끊임없이 생멸하고[無常], 생 멸, 변화하는 현상들은 갈등과 갈애의 상태를 면치 못하며[苦], 이런 생멸하는 갈등과 갈애의 현상 이면에는 어떤 고정불변의 실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無我]’라는 진리를 확실히 체험하면 바로 그 상태가 열반적정인 것이다. 이렇게 괴로운 존재현상의 시작과 끝을 여실히 관찰하여 체득함으로써 해탈열반의 세계를 성취하게 된다. 즉 괴로 운 존재현상을 떠나 어떤 열반적정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습을 여실하게 바로 보면 열반적정 이며 해탈이고, 잘못 보면 괴로움이고 번뇌이고 무명(無明)이다. 여기에 멸성제의 현실적이고도 실천적인 의미가 있다. 고뇌와 무지로 점철된 삶의 질곡이 따로 있고 해탈열반의 이 상세계는 저 멀리 존재한다면 고통의 삶을 극복하기 위한 수행은 불가능할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이들에게 너그러운 자비심과 공경으로 대하고, 좋은 말, 밝은 얼굴로 내 욕심을 접고 먼저 양보하며 남의 일을 같이 기뻐하고 상처를 안아주며, 감사하고 찬탄하며 모든 공덕을 함께 나누면, 바로 그 순간 괴롭고 힘든 고통의 삶이 지금 여기에 서 신나고 기쁨이 넘치는 수행의 삶으로 전환된다. 멸성제의 현실적 성취를 위한 구체적인 실천방법이 다음에 살펴 볼 도성제(道聖諦) 즉, 8가지 바른 수행의 길이다
사성제 가운데 도성제, 즉 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는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 또는 8가지 수행방법[八正道]을 말한 다.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활(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 른 마음챙김(正念), 바른 선정(正定)이 그것이다. 팔정도는 불교의 종합수행법이며, 불교수행의 요체일 뿐만 아니 라, 유구한 세월을 통해 많은 수행자들에 의해 계발되고 계승된 불교의 각종 수행법의 토대가 된다. 팔정도의 수행 덕목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수행의 핵심 사항들이 종합적으로 집대성되어 있다. 팔정도의 각 덕목들은 정견을 얼마나 깊고 정확하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그 수행 결과가 달라진다. 또한 팔정도 수행의 출발점은 정념이고 그 노력이 정정진이며 이것이 지속적으로 이어져 집중에너지가 형성되면 정정, 행동으로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정 어, 정업, 정명이다.
1. 사성제와 여래소설
아함경 (디지털국제불교연맹, http://kr.buddhism.org/zen/aham2.html)에서 발췌 편집.
'네 가지 성제'(cattari ariyasaccani)는 흔히 줄여서 '사성제' 또는 '사제'라고 일컬어진다.
'제'는 sacca(Pali) 혹은 satua(Skt.)의 역어로 '진리'를 뜻하는데 '엄숙한 단언'을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엄숙하게 진리를 말씀한 단언적 명제'라고 받아들이는 편이 그 뜻에 더 가까울 것으로 생각된다.
[中部經典] 63 摩羅阿小經. 漢譯同本, [中阿含經] 221 箭喩經)에 의하면 붓다는 마룬캬(Malunkya)라는 제자를 상대로 다음과 같이 설한 적도 있다.
"그러므로 마룬캬여, 내가 설하지 않은 일은 설하지 않은 채로 수지(受持 ; 붓다의 가르침을 받아들여 지니는 것. 즉 받드는 것.)함이 좋고, 또 내가 설한 일은 설한 대로 수지함이 좋으니라. 그러면 마룬캬여, 내가 설한 것이란 무엇이던가? '이는 고(苦)이다.'라고 나는 설했다. '이는 고의 발생이다.'라고 나는 설했다. '이는 고의 멸진이다.'라고 나는 설했다. 또 '이는 고의 멸진에 이르는 길이다.'라고 나는 설했다. 마룬캬여, 왜 나는 그것들을 설했던가? 마룬캬여, 그것들은 정말 도움이 되며, 범행(梵行 ; 청정한 행위. 욕망을 끊는 것.)의 기초가 되며, 적정, 증지, 등각, 열반에 이바지 하느니라. 그러기에 설했음을 알라."
붓다가 45년에 걸쳐 행했던 설법은 대체로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고 한다. 사람들의 근기(진리를 받아들이는 중생의 소질)에 맞게, 또 문제에 따라 거기에 어울리는 내용을 설하셨다. 그러나 이와 달리 붓다가 자신의 깨달은 내용을 자진해서 설한 것은 첫 설법뿐이다. 그래서 팔리 경전에서는 '여래소설'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한역 [아함경]에서는 이 경을 '전법륜(轉法輪 ; 불법의 '수레바퀴'를 굴린다는 뜻, 붓다의 설법)이라고 불렀고 후세 사람들은 '초전법륜(初轉法輪, Dhamma-cakka-pavattana Sutta)'이라고 부르게 된다. 이 경전에서는 사성제에 대한 붓다 자신의 최초의 성명이 들어 있다.
2. 초전법륜 <남 율장3 대품, p.13, >
"비구들아, 출가자는 두 가지 극단에 빠져서는 안 된다. 그 두 가지란 무엇인가? 하나는 육체의 요구대로 자신을 맡기는 쾌락의 길이고, 또 하나는 육체를 너무 지나치게 학대하는 고행의 길이다. 비구들아, 나는 이 두 가지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깨달았다. 중도는 눈을 뜨게 하고, 지혜를 생기게 하며, 열반으로 인도한다. 그러면 비구들아, 중도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팔정도(八正道)이다.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 그것이다. 그리고 비구들아, 이것이 괴로움(dukkha)이라는 진리 (苦諦, 고제 살필 '체'나 불가에서는 진리 '제'로 읽음)이다. 태어남은 괴로움이다. 늙음은 괴로움이다. 병듦은 괴로움이다. 죽음은 괴로움이다. 근심·슬픔·불행은 괴로움이다. 미워하는 사람과 만나는 것은 괴로움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다.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것은 괴로움이다. 간단히 말하면, 오온(五蘊)에 잡착하는 것은 괴로움이다. 비구들아,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진리이다. 과보를 일으키고, 기쁨과 탐욕을 수반하며, 모든 것에 집착하는 갈애(渴愛)가 그것이다. 비구들아,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이라는 진리이다. 갈애를 남김없이 멸하고, 버리고, 벗어나, 아무 집착도 없는 것이 그것이다. 비구들아, 이것이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길이라는 진리이다. 성스러운 팔지(八支)의 길이 그것이니,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다."
3. 팔리 용어
고의 성스러운 진리 (Dukkha-ariyasacca)
고 발생의 성스러운 진리 (Dukkha-samudaya-ariyasacca)
고 소멸의 성스러운 진리 (Dukkha-niroda-ariyasacca)
고의 소멸로 가는 길의 성스러운 진리 (Dukkha-niroda-gamini-patipada-ariyasacca)
4. '길을 묻는 이에게' 현대불교신문 1996-01-17 61호
문) 반야심경에 보면 무안이비설신의, 무고집멸도, 무무명 등 12처도 없고 사성제도 없고 연기도 없다는 말이 나옵니다. 무슨 까닭에 사성제도 연기법도 없다고 하는가요?
<최영철·서울 구로구>
답) 반야심경을 거듭 음미해 보세요.
관자재보살이 ‘오온이 모두 공했음을 비춰보시고’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어느 것 하나 고정됨이 없이 찰나로 나투며 돌아가니까 어느 때를 ‘나’라고 말할 수 없어 일체는 공하였노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생활하면서 때로는 아버지가 되었다가 아들이 되었다가 남편 동생 친구가 되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어느 때를 ‘나’라고 고정되게 말할 수 없지요. 그와같이 일체는 이것이다 또는 저것이다 라고 규정지을 게 없습니다. 그냥 공이지요. 따라서 ‘나’가 공했는데 사성제다 12연기다, 12처다 할 게 없지요. 그래서 무!라고 한 것입니다. 깨달은 자리에서 보니 그렇다는 말입니다. 잘 음미해 보세요. 내가 늘 일체를 주인공 자리에 맡기고 살라 함도 고정된 게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고정된 그 무엇이 있다고 하면 어떻게 부증불감이라 말할 수 있겠습니까? ‘나’라고 할 그 무엇이 없고 오직 마음이니 보태도 늘지 않고 빼도 줄지 않고, 또 불구부정-더럽혀지지도 깨끗해지지도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뭐라고 하겠어요? 무!공! 할 밖에요.
관련 베스트 링크
1. 사성제 (클릭) 현대불교신문 1997-06-18 131 .
이제열 법사<유마선원장>가 현대불교신문에 연재했던 내용 .
2. 기독교에서 본 사성제. (<진리로 보는 창>이 기독교적 비판) 원본
③사성제(四聖-言帝-) : 고통의 원인과 해결
‘사성제‘는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라는 뜻으로서 불교의 교리를 고(苦),집(集),멸(滅),도(道) 라는 네 가지 개념으로 요약한 것이다. ‘고‘란 현실세계의 상태에 대한 설명으로서, 생로병사(生老病死), 미운 사람과 만남(怨憎會),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구하여도 얻지 못함(求不得) 등 인생의 모든 것이 고통이라는 뜻이다. ’집‘은 고통스러운 현실 세계의 원인을 설명하는 것으로서, 인식기능과 감각기관의 작용이 결집하여서 집착과 애욕 등을 일으키고 이 때문에 고통이 생긴다는 뜻이다. ’멸‘은 그릇된 인식 주관의 작용과 이로 말미암은 집착, 애욕을 끊어버리면 고통이 없어지고 열반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뜻이다. ’도‘는 열반에 이르는 방법을 말하는데 ’팔정도‘(八正道)가 여기에 속한다. 팔정도는 정견(政見-바른판단), 정사유(正思惟-바른생각), 정어(正語-바른말), 정업(正業-바른행위), 정명(正命-바른생활), 정정진(正精進-바른노력), 정념(正念-바른명상), 정정(正精-바른집중)의 여덟 가지이다.
<진리로 보는 창>
사실 불교는 매우 합리적이고 깊은 논리를 가진 매력적인 사상이다. 불교는 논리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옳아 보이며, 인간의 상식에 호소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한 대로 이길은 옳아 보이지만 필경 사망에 이르는 길이다.(잠14:12) 왜냐하면 불교에서는 ‘죄의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경에 의하면 죄의 댓가는 사망이(롬6;23)이며 따라서 죄의 문제의 해결 없이는 사망을 피할 수 없다.
3. 사성제 (accesstoinsight.org)
팔리 경전을 영역해 놓은 accesstoinsight.org내의 사성제에 대한 페이지. 추천사이트.
4. 붓다의 말씀 (The Word of the Buddha).
냐나틸로카 엮음, 정원 옮김. 영어 원문과 더불어 번역본 수록. 남방 불교 경전을 주제별로 해설과 더불어 잘 나열해 놓음.
5. 프란시스 스토리(Francis Story)의 사성제
내용이 너무 긴 것이 흠이지만 해설과 더불어 경전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음 (번역본).
6. 사성제 (영문 사이트).
Mike Butler라는 사람이 불교를 쉽게 설명한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