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가는 방법 : 집 앞에서 버스를 타고 성신여대에서 내려 지하철로 갈아탄 다음 동대문에서 내려 한번더 갈아탔다.
종로 3가에서 내려 15분 정도 걸으니 창덕궁이 나왔다.
창덕궁의 유래 : 1963년 1월 18일 사적 제122호로 지정되었다. 1405년(태종 5) 완공되었으며, 면적 43만 4877㎡이다. 태종(太宗)이 즉위한 후 1404년(태종 4) 한성(漢城)의 향교동(鄕校洞)에 이궁(離宮)을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공하고 창덕궁이라 명명하였다. 그 후 계속 인정전(仁政殿)·선정전(宣政殿)·소덕전(昭德殿)·빈경당(賓慶堂)·여일전(麗日殿)·정월전(淨月殿)·옥화당(玉華堂) 등 많은 전당을 건립하였는데, 1412년 돈화문(敦化門)을 건립하여 궁궐의 면모를 갖추었다.
이 궁전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는데, 1607년(선조 40)에 그 복구가 시작되어 1610년(광해군 2)에 중건이 거의 끝났으나, 1623년 3월에 인정전을 제외한 대부분의 전각이 실화로 불탔으므로 1647년(인조 25)에야 그 복구가 완료되었다. 그 후에도 크고 작은 화재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 특히 1917년 대조전(大造殿)을 중심으로 내전 일곽이 소실되어 그 복구를 위하여 경복궁 내의 교태전(交泰殿)을 비롯하여 강녕전 동·서 행각 등의 많은 건물이 해체 전용되었다.
창덕궁은 많은 재앙을 입으면서도 여러 건물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왔는데, 1912년부터는 후원인 금원(禁苑)과 아울러 인정전을 관람할 수 있게 하였고, 8·15광복 후에도 창덕궁과 금원을 공개하고 있다. 창덕궁은 금원을 비롯하여 다른 부속건물이 비교적 원형으로 남아 있어 가장 중요한 고궁의 하나이다.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돈화문 :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은 1412년에 건립되었다.
창건 당시 창덕궁 앞에는 종묘가 자리 잡고 있어 궁의 진입로를 궁궐의 서쪽에 세웠다.
돈화문은 왕의 행차와 같은 의례가 있을때 풀입문으로 사용했고, 신하들은 서쪽의 금호문으로 드나들었다.
돈화문은 임진왜란때 전소되었다가 광해군이 즉위한 이듬해인 1609년에 재건, 보물 제 383호로 지정되어 있다.
인정전 : 인정전은 창덕궁의정전으로서 왕의 즉위식, 신하들의 하례, 외국 사신의 접견 등 중요한 국가적 의식을 치르던 곳이다.
앞쪽으로는 의식을 치르는 마당인 조정이 펼쳐져 있고, 뒷산인 응봉으로 이어져 있다.
선정전 : 왕이 고위직 신하들과 함께 일상 업무를 보던 공식 집무실인 편전으로, 지형에 맞추어 정전인 인정전 동쪽에 세워졌다.
아침의 조정회의, 업무보고, 국정 세미나인 경연 등 각종 회의가 이곳에서 매일 열렸다.
창건 당싱에는 조계청이라 불렀는데, 1461년에 '정치는 베풀어야 한다'는 뜻의 선정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등의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647년에 인왕산 기슭에 있던 인경궁을 헐어 그 재목으로 재건하였다.
대조전 : 비극적 역사가 잠겨 있는 침전
대조전은 창덕궁의 정식 침전으로 왕비의 생활공간이다.
원래는 대조전 주변을 수많은 부속건물들이 에워싸고 있었는데, 그가운데 홍복헌은 1910년 마지막 어전회의를 열어
경술국치가 결정되었던 비극의 현장이다. 1917년 불타 없어진 터에 1920년에 경복궁의 침전이 교태전을 옮겨 지어
현재의 대조전이 되었다. 대조전을 중심으로 양옆 날개채와 뒤편의 경훈각 등이 내부에서 잘 보여주는 거의 유일한 부분.
흥복헌
쉬는 타임 !! 귀요미들
규장각 : 규장각은 다른 이름으로 내각 또는 이문원이라고도 했다. 정조 즉위 초에 역대 왕들의시문과 글씨를 보관하는 왕실
자료실로 지었다.규장각의실무자는 문예와 학식이 뛰어난 서얼 출신들을 주로 임명하여 관직의 길을 열어 주었다.
금천교 : 예로부터 궁궐을 조성할 때에는 궐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명당수를 건너게 하였다.
이 물은 궁궐의 안과 밖을 구별해주는 경계 역할 하므로 금천이라고 하며, 창덕궁의 금천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돈화문 동쪽 궐 밖으로 빠져 나간다. 현재 궁궐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돌다리로서 2012년 보물 제 1762호로 지정되었다
낙선재 : 헌종의 검소한 면모가 느껴지는 곳.
조선 24대 임금인 헌종은 김재청의 딸을 경빈으로 맞이하여 1847년에 낙선재를, 이듬해에 석복헌 등을 지어 수강재
와 나란히 두었다. 낙선재는 헌종의 서재 겸 사랑채였고, 석복헌은 경빈의 처소였으며, 수강재는 당시 대왕대비인
순원왕후를 위한 집이었다. 후궁을 위해 궁궐안에 건물을 새로 마련한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낙선재 들어가기 전 !
가운데 보이는게 상량정 !!
낙선재!!
방을 뜨듯하게 !!
느낌점 : 창덕궁에 대해서 많이 알아갔고, 이런 문화재를 소중히 간직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뜻깊은 시간이었고, 나중에 친구들이랑 따로 모여서 과제라서 가는게 아닌..
창덕궁 말고 다른 문화 탐방을 가야겠단 생각이들었다.
첫댓글 수고했어요. 꼼꼼이 열심히 답사를 한 흔적이 보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