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그랬습니다.
바람이 불더니 눈이 내렸습니다. 지금은 겨울이 아니더냐
하고 알려 주는 것 같았습니다. 산다는 것이 별 것도 아니라 생각하면서도
나도 사람인지라 지치고 힘들 때는 그게 싫습니다.
편안해지고 싶다는 거지요. '글은 왜 쓰는가' 하고
강호의 저 명망 있는 작가들에게 묻는다면 '살아있음의 확인' 이라고
서슴없이 답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무슨 황당 개그입니까.
존재의 서슬 퍼런 확인이라는 팻말을 걸었다면 이보다 더하게 자신의 작업을
미화시킬 수 있는 방편이야 없겠지요.
쓰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겠다는, 그래서 글을 쓰는 행위가
무슨 업보나 운명쯤으로 내세우고자 하는 치장으로는 보일 것입니다.
정말 그렇게 거창한 화두를 안고 글을 쓰는 사람이 있기야 하겠지만
내가 이번 겨울에 경험한 바로는 그런 분들의 말들은 아무래도
수식이나 치장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사실과는 거리가 있는.
보름 전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딱 1주일의 휴가가 주어졌습니다.
개미처럼 살지도 못했지만 1주일이나마 베짱이가 되어보라는 것이었는지요.
가족들은 예전부터 계획했던 동해안 일주 여행을 가자고 성화를 부렸고
심지어는 내가 거부하기 어려운 방법을 동원해서 시위마저 벌였습니다.
하지만 한번 가버리면 다시 오지 않는 시간이었던 것을,
기다리고 기다리던 황금의 1주일이었던 것을,
두 눈 딱 감고 모든 걸 참아내기로 했습니다.
일요일 오전 시간을 별 하는 일 없이 보내고 있는데
하늘은 잔뜩 찌푸렸습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는 조급함이 별안간
나를 조여오기 시작했습니다. 간단한 세면 도구와 옷가지를 넣은
배낭 하나, 그리고 노트북을 차 뒷좌석에 싣고 집을 나섰습니다.
눈이 내릴 거라는 예보가 있었기 때문에 해가 저물면 곤란하겠다 싶어
마음은 더욱 급해졌지요. 홀로 운전한 차는
광송간 도로를 지나 송정리로, 월야로, 문장으로,
그리고 영광에 도착했습니다. 영광은 내가 태어난 곳입니다.
짐승의 귀소 본능이었을까요. 정처는 당초부터 없었으며
어딜 가야겠다고 하는 강한 의지를 가졌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틈을 주지 않았어도 발길은 내 고향에 닿아있었던 것입니다.
거기에서 새로 난 법성포까지의 도로를 다시 달렸습니다.
마침내 도착하여 숙소로 잡은 곳은 가마미 쪽 바닷가의 어느
민박집이었습니다.
출발하기 전부터 나를 괴롭힌 의문이었지만
막상 이게 무슨 꼴인가 싶었습니다. 티브이도 욕실도 없이
네모난 온돌방 한가운데 우두커니 앉아 생각했습니다.
편안하게 살고자 했다면 구태여 이 시간에 여기에 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글을 써서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그렇게 될 리도 없겠지만
글만 써도 충분히 먹고 살 무슨 방도를 마련하는 것도 아니며
지구상에서 나 아닌 그 어떤 이가 나의 이러한 행위를 인정해주고
감동할 리도 없는데 말입니다. 무슨 호강을 해보겠다고,
보상도 없는 이따위 짓을 하려 하나 싶은 생각이 드는데
갑자기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노동의 거친 손들이 전능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다면
사치이며 호사라고 꾸짖을 지도 모를 이 짓을 말입니다.
하루 이틀이 지나며 평소 집에 있을 때는 생각나지 않았던 것들이
막무가내로 의식 안으로 달려들었습니다.
피시방이라도 가고 싶어 안달하는 내 모습을 보니 기가 막혔습니다.
일상에서 미처 감지하지 못했던 넷 중독을 어처구니없게도
느끼고 만 거지요. 중독은 그 뿐이 아니었습니다.
동치미 국물에서부터 어린애처럼 먹고싶은 것이 마구 떠오르기도 했고
예상했던 대로 술 마시고 싶은 충동은 한숨이 절로 나올 만큼
심각한 지경이었습니다.
원자력발전소가 있는 홍농으로 나와서 목욕탕을 갔고
하루에 한 번 식당에 가서 백반 하나 시켜먹었으며
농협 하나로마트에 가서 빵과 음료 따위를 사서 다시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인적이 뜸한 겨울 바닷가를 찾은 가족들이나 연인들을 우두커니
바라보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이 짓만 아니라면
가족들과 더불어 동해안 북단 대포항 어느 부근에서 물오징어회에다
소주잔을 털어넣으며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을 터인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같은 바다이면서 왜 이렇게도 다르게 보이는지요.
당장 모든 걸 털어 버리고 돌아가 버리고 싶기도 했습니다.
점점 절절해지는 판단은,
아무래도 이놈의 짓이 남들 말마따나 존재의 확인이라면
이보다 더 어리석은 확인은 없다는 것이었지요.
집을 나설 때부터 핸드폰을 꺼버렸으니 밤인지 낮인지도 모른 채
시간만 흘러갔습니다. 낯선 곳이었지만 며칠 지나며
낯설음도 점차 줄어들었습니다.
밤이 깊어지면 파도 소리가 제법 거칠어졌습니다.
글발은 오르지 않고 새벽은 다가오는데 작업 진척은 흡족하게 이루어지지 않는,
참으로 한심스런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스스로에게 지쳐 이제나 광주에 올라가 버릴까 망설이다가
설핏 잠이 들었는데 깨어나서 밖으로 나와 보니,
세상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그 사이 눈이 내렸나 봅니다.
신천지가 이런 것이었던가요.
파란 바다색깔만 빼고 죄다 흰색이었으니까요.
차를 몰고 엉금엉금 기어서 법성포에 나왔습니다.
공무원들인지 트럭을 몰고 나와서 모래를 뿌리고 있었는데
엄살 같지만 어떻게나 사람이 그리웠던지 눈길에서 만난 그들이 반가웠습니다.
주린 배를 채우고 목욕탕에 갔다 나와보니 눈은 더 펑펑 내리고 있었습니다.
며칠 지나지도 않아 육신도 벌써 지쳐버렸을까요.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습니다.
정말이지 집에 돌아가고 싶어졌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제는 가고싶어도 갈 수가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차를 움직일 수 없었으니까요. 그러다가 이내 약한 모습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아무도 찾지 않는 서해안 오지에 눈 속에 고립되면
어쩌나 걱정이 들기 시작하던 걸요.
지나가는 길가의 나무 가지에 맺힌 하얀 눈꽃 세상을 바라보아도
낭만조차 감정의 끝에 잡히지 않는, 한심한 인식에
스스로 질겁하고 말았지요. 이제 다시 그 망할 놈의 방으로 돌아가면
복사용지 나부랭이와 나의 무기력을 일깨우는 노트북이
지금껏 그래온 것처럼 나를 조롱하고 말 것을.
무엇 때문에 이런 짓을 하고 있나.
집을 나설 때부터 나의 모든 회로를 올망졸망 짓누르고 있던 회의가
울컥 치받고 올라오는데 갑자기 콧날이 시큰해졌습니다.
바다 쪽의 시계는 제로에 가까웠고 무심한 눈발은
자꾸만 시야를 흐리게 하고 있었습니다.
요즈음 신세대들처럼,
하고싶은 일만 하고 하기 싫은 일은 절대 안 하기로 치면,
이 일은 정말 하고싶지 않은 일인데 말이지요.
누가 시킨 일도 아니고 설사 누가 시켰다손 치더라도
멱을 따서 죽인다고 해도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절대 하고싶지 않은 일인데 말입니다.
이 놈의 짓을 그래도 계속 해야 할 것인가, 미친놈도 아니고
이렇게 사서하는 고생을 앞으로도 계속 해야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되물었지만 멍해진 머리는 쉽사리 제 자리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물론 지금은 돌아와 있습니다.
그 시간들이 지났으니까요.
그 사이에 설도 쇠고 보고싶은 사람들 다시 만나서 술잔도 마주쳤습니다.
휴가는 이렇게 모두 끝나고 다시금 가족의 울타리에 들어앉아
안락한 안식도 느꼈습니다.
휴가가 끝나자마자 진정한 휴가를 맞이한 셈인가요.
내 머리 속에 다시금 정신 나간 충동이 들지 않기를 바랄 뿐이지만
올 여름도 있고 겨울도 다시 찾아 올 텐데
또 다시 그 충동이 나를 괴롭힌다면 그 땐 어떡해야 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