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사관] 나는 그들을 본 적이 없습니다. 물론 그들과 얘기한 적도 없습니다. 내가 확인한
것은 그들의 시체뿐입니다. 제가 그들이라고 복수 인칭을 쓰고 있는 것은 그들은 두명이며,
둘이 똑같이 네 사람을 죽인 살인공범이며 언제나 둘이 다정스럽게 붙어서 쫓겨다녔다는 것
입니다. (한쪽에 손짓하면 정복의 여순경이 트레일러에 서류뭉치를 가득 싣고 나온다) 저것
이 두 사람의 사건 기록입니다. 검찰에 송치되지 않은 상태에서 죽었기 때문에 서류는 다시
경찰의 손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저는 수사관입니다. 흔히 형사라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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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 범인들 사이에는 짜부, 잠바, 사냥개, 족제비라는 은어로도 통용됩니다. 대개 소설
이나 영화에서 보면 바바리코트에 씨가를 물었거나 선글라스를 쓰는 것이 상례이지만 실제
로 수사에 임하고 보면 이런 것들이 무척 거추장스럽다는 걸 알게 됩니다. 사실 수사관에
대한 외형적 편견이라고나 할까요. 영국 탐정소설에서는 흔히 외눈 안경에 실크햇을 쓰거나
박쥐 우산을 단장 삼아 들고 다니기도 합니다. 추리와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멋진 존재로 부
각시키기 위한 작가들의 편견이죠. 하여간 나는 오늘 바바리코트를 걸치지 않았습니다. 내
체격에 바바리코트가 맞지 않기 때문이라기 보다 수사관이라는 외형적 고정관념에 여러분들
이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제 수사경력 15년 동안에 가장 끔찍하고 어려운 수사
였기 때문에 이 사건과 그들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한쪽에 돌처럼 서있는 여
순경에게) 미안합니다. 오래 서있게 해서. 강력범 전과자의 기록이니 사건 기록 서류를 보
관하고 있는 자료실의 미스 현입니다.(여순경 냉정하게 객석에 거수경례를 한다.) 범죄 기
록 속에서 생활하다 보면 점차 지극히 객관적으로 임무에만 충실한 기계로 변해갑니다. 아
마 저 제복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연애하고 다방에서 커피마시며 친
구들과 담소를 나눌 나이에 살인사건의 기록을 정리 한다는건 그리 바람직한 일이 못된다고
여러번 얘기했지만 그녀는 이것을 천직으로 알고 있는 모양입니다.
[여순경] (냉정하게) 계장님! 용건을 말씀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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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사관] (객석에게) 보십시오. 우선 사건 번호를 알려 주겠어?
[여순경] 강력바에 A-2673입니다.
[수사관] 이것이 그들의 사건 기록 넘버입니다. 이 숫자와 기호 속에 이미 수사과에서 통용
되는 범죄 양상이 전부 들어있습니다.(되풀이) 강력바에 A-2637이것이 그들 두 사람의 짧고
도 험란했던 인생의 전부입니다.
[여순경] 1972년 7월 27일 오전 10시 40분 상업은행 용산지점에서 첫 번째 범행.
[수사관] 잠깐만! 그건 관객에 대한 실례야. 순서상 두사람의 인적 사항부터 알려줘야지---
[여순경] 이종대 1943년 전라남도 영광에서 출생, 학력은 고등학교 중퇴, 육군 공병 하사
만기제대, 직업은 미군부대 PX에서 초상화를 그림, 문도석 1945년 경기도 용인에서 출생,
학력은 국졸, 육군 교도소에서 하극상으로 일년 복무하고 상병으로 제대, 직업은 운전기사.
[수사관] 수고했어요 미스 현--- (여순경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이종대와 문도식 희대의
살인마, 연쇄 살인범, 악의 씨앗들--- 1947년도 당시의 신문 사회면 머릿기사에 오르내렸던
두 사람의 존칭이였습니다. 이종대 문도식--- 나는 무척 재수가 없는 편이었습니다. 이 악
랄한 지능범들의 사건을 하필이면 내가 맡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나는 맹장 수술을 하
고난 직후여서 두 사람의 꽁무니를 따라 다니느라 무척 고생을 했습니다. 어쨌든 두 사람
모두 지금은 죽고 없습니다. 이년 반 동안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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냥개처럼 그들의 뒤를 쫓아다닌 결과는 시말서 한장에 변두리 경찰서로의 좌천이었으며 결
국 진급이 이년 늦어지는 푸짐한 선물을 받았습니다. 무능 수사관이라는 낙인이 찍힌 것입
니다. 두 녀석의 손목에 수갑 한 번 채워보지 못하고 범인들의 장례식에 조객으로 분향하는
꼴이 됐으니 집사람이나 애들한테는 물론 동료 수사관들에게까지 체면이 말이 아니었습니
다. 그들이 땅 속에 묻혀 살점이 썩어갈 무렵, 그러니까 사건 종결 삼 년 후부터 나는 그들
의 사건 기록인 강력바에 A-2673에 어떤 모순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모순이라고
지적하는 것은 나의 객관적 판단이라는 것을 부연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사건 수사기록은
전형적인 육하원칙에 의한 살인행각만 기록됐기 때문에 내가 지적 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의
인간성이나 범행 동기의 설명을 추가시키고자 하는 개인적 소신이었기 때문입니다. 1970년
서대문 교도소 기결수 제소자 기록에 의하면 그들은 거기서 처음 만나게 되는데, 이것이 빠
져 있는 것입니다. 하여간 그들은 이렇게 만나게 됩니다.(수사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장] 2장
(작은 창살을 통하여 들어오는 빛 그 희미한 빛줄기를 따라 곰팡이가 엉겨 붙은 담벽을 타
고 한 개의 연기가 피어오른다. 조용한 침묵. 이종대 비스듬히 벽에 기대어 짤막한 꽁초를
아끼듯이 빨아 들인다. 문도석이 고무신짝을 들고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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퀴벌레를 조용히 따라간다. 그의 동작은 섬세하고 신중하다. 마땅한 자리에서 고무신을 딱
하고 내리친다. 비퀴벌레는 달아난다.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멀찍히 다른 바퀴벌레를 발견
하고 나직히 휘파람을 불며 그 쪽으로 기어서 다가간다. 그 휘파람 소리는 자제와 체념에서
나오는 차분한 감정의 찌꺼기들이다. 이번에는 더 세차게 벽을 내리친다.)
[종대] 헛일이야
[도석] 두 마린데---
[종대] 놔둬---
[도석] 자꾸 문다구.
[종대] 살자구 나온 놈인데,
[도석] 살어?
[종대] 뭐 할거냐?
[도석] 잘거야
[종대] 나가면 말야 임마--- ?
[도석] 달구지 끌어야지 밑천이 그건데---
[종대] 또 들어온다.
[도석] 재수없는 소리하네
[종대] (꽁초 건네며) 필래? 세모금은 족히 될 것이다.
[도석] (받으며) 암팍지게 빨았네---
[종대] 주변 없으면 타박이나 하덜말어 임마---
[도석] 말끝마다 임마여? 좁쌀 과먹었나---
[종대] 맞을래?
[도석] 글세 아직 때려 본 경험밖에 없어서--- 맞으면 무척 아프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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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대] 느껴서 배워볼래?
[도석] 글세 매맞고 내 성질에 이 주먹이 쉴라는지 모르겠네.
[종대] (손목 만져보며) 보기보담 방아깨나 찧었구나.
[도석] 방아 잘 못찧어서 들어온 놈인데---
[종대] (웃음) 몸 아껴야지 맨살 쓰면 되나--- ? (허리춤에서 잭 나이프 꺼낸다)
[도석] 쇠작대기 믿고 그랬구먼---
[종대] (손 내밀며) 춥고 배고픈데 의리나 맺자.
[도석] 감방 의리 믿을 수가 있어야지
[종대] 나 독기 조금 있다.
[도석] 난 살기 양념으로 가지고 있는데.
[종대] 둘 합치면 뭐 하나 하겠다. 바퀴벌레 잡는 것이 야무지더라.
[도석] 너무 야무져서 지랄이야.
[종대] 야무진 것 똘똘 뭉쳐 놔둬. 나중에 웅담처럼 써먹을 때가 있을 거다.
[도석] 제에미--- 웅담도 안쓰니까 고약되데---
[종대] 내가 녹여 줄께
[도석] 연탄불이여?
[종대] 생김새는 멸치 반 토막 같지만 화근한 데는 있다.
[도석] (손잡으며) 속는 셈치고 의리 맺어 보세---
[종대] 옛날 같으면 혈맥 잘라 피갈라 먹었다.
[도석] 나도 삼국지에서 읽었어. 의리맺고 간 내놓는 놈 아녀---
[종대] 몇 년생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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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석] 지랄같이 닭띠야.
[종대] 새벽눈 밝겠다. 난 용띠다.
[도석] 형님이네---
[종석] 아울쎄.
[도석 삼백이면 딱 떨어진다는데---
[종대] 별이 떨어지냐?
[도석] 개인 택시 말이요.
[종대] (탁 때리며) 연기 아껴 임마---
[도석] 뒤통수에 옹이 박히겠네---
[종대] 한 번이면 끝나는 것이다. 세상 일은 칼자루 한 번 휘두르면 끝나는 것이다.
[도석] 칼이나 있으면서 하는 얘기요?
[종대] 녹슬까봐 금멕기 올려놓고 왔다 임마.
[도석] 임마 소리 익숙치않아 되게 어색하네---
[종대] 나가면 칼 잡고 뺑뺑이 칠기다.
[도석] 칼자루 좀 쥐게 해줄래요?
[종대] (도석의 뒷덜미를 잡아쥐며) 손아귀 힘은 있냐?
[도석] 줄 맘은 있구?
[종대] 의리맺고 코 후빌놈 아니다 알것냐?
[도석] 아이쿠(비명)
[종대] 뭐야 물렸냐?
[도석] 바퀴벌레--- (신발을 벗어들며 냅다 친다)
(두 사람 서로 마주 보다가 묘한 일체감으로 웃기 시작한다. 어깨를 들먹거리며 키들거리던
웃음이 크게 하모니를 이루며 웃음의 합창으로 변하여간다. 감방 어두워 지고 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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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이 떠오른다)
[수사관] 그들의 만남은 아주 평범했으나 떼어 놓을 수가 없는 어떤 동질성을 가지고 굳건
하게 뭉쳤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두 사람 모두 교도소에
수감됐으면서도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느끼지 않았다는 것 보다 차라리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 타당할 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사회와 융화되는 것이 아니라 대적하
고 대치돼 있는 심리 상태였는데, 그것은 사회가 그들을 외진 구석으로 쫓고 있다는 지능적
피해의식을 그들은 느끼고 있었습니다. 서대문 교도소 면회실 기록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쓰여 있었습니다.(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수사관)
[장] 3장
(어둠 속에서 되살아나는 면회실과 이종대, 젖먹이를 안고 있는 그의 아내 황은경. 이종대
와 대조를 이루는 인내와 절제의 차분함이 가득하다.)
[은경] 어때요?
[종대] 뭐가?
[은경] 춥지 않아요?
[종대] 뼛골에 얼음이 박히는 것 같애.
[은경] 사식하고 솜옷 넣었어요.
[종대] 그런 눈빛 하지마 배리가 뒤틀려---
[은경] 여보!
[종대] 거지한테 떡 하나 주는 그런 눈살 찌푸리지마.
[페이지] 027
[은경] 애기가---
[종대] 태양이---
[은경] 일주일 전에 홍역을 끝냈어요.
[종대] 나 닮아서 쉽게 죽지 않을거야.
[은경] 출감하면---
[종대] 출감 출감 하지마--- 나가봐야 알어.
[은경] 왜 그렇게 좌절만 하세요.
[종대] 다음부터 태양이 데리고 오지마. 어린애한테까지 감방냄새 배게 할 필요 없어.
[은경] 미장원에 취직했어요.
[종대] 벅차면 애 시댁에 맡기고 재혼해---
[은경] 여보?
[종대] 도장은 옷장 서랍 밑에 있어. 출감해도 보복하지 않을께---
[은경] 겨우 감방 속에서 생각한게 그거예요!
[종대] 어두운 천정을 쳐다보고 있으면 머리가 맑아져서 나가면 뭘 할 것인가 하는 것이 뚜
렷하게 떠올라.
[은경] 그게 뭐예요?
[종대] 알고 있으면서 왜 물어.
[은경] 감방 생활 이가 갈리지 않으세요?
[종대] 숙달이 돼서 안방처럼 아늑해---
[은경] (크게) 뼛골에 얼음이 박혔다면서요?
[종대] 나가면 심장에 얼음이 박혀--- 숨을 몰아 쉴 수가 없어. 모두들 작대기를 가지고 나
를 쥐덫에 몰아 넣을 거야. 쫓기다 쫓기다 쫓기다 들어오는 것이 내 집 이 쥐덫 속이야.
[페이지] 028
[은경] 왜 쫓긴다고 생각하세요?
[종대] 쫓으니까 쫓기지---
[은경] 누가 쫓아요?
[종대] 세상이---
[은경] (허망한) 피해망상이예요.
[종대] 이불 속이 허전하다고 왜 애기 하지 않는거야?
[은경] 잠자리 허전해서 당신 기다리고 있는 줄 아세요? 그게 당신이 생각하는 나예요?
[종대] 유식한 체 하지마. 아무리 부처상판을 해도 전과자의 여편네야. 좀더 죄수 마누라처
럼 무식해보란 말야. 어쩌다 너같은 추물한테 걸렸냐하고 앙탈을 부려보란 말야. 내 마누라
답게!
[은경] 사랑해요.
[종대] (천정을 쳐다보다가 웃는다) 이 안에서 멋진 놈을 만났어. 의리를 맺고 동업계획서
를 작성했어. 총소리가 날거구, 사람이 죽을거야. 그리구 쥐덫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튈
거야 알겠어? (양손으로 권총을 만들어 은경이가 안고 있는 애기를 향해 연발로 쏘는 시늉
을 한다.) 팡! 팡!(크게 웃으며 일어나 허공에 계속 발사한다. 이종대 어둠 속으로 사라지
고 황은경만 남는다.
은경의 집으로 바뀐다. 한 중년남자가 서 있다.)
[중년] 왜 이혼을 하지 않니?
[은경] 아빠!
[중년] 너를 그토록 그 사람에게 끌리게 하는 힘은 뭐냐!
[은경] 도리예요.
[중년] 지금 도리라고 애기했니?
[페이지] 029
[은경] 책임이구요.
[중년] 넌 지금 범죄자하고 살고 있다.
[은경] 처음부터 그러지는 않았어요.
[중년] 너와 결혼하기 위해서 미술대학 졸업생이라고 속였다.
[은경]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수단이 양보를 한거예요.
[중년] 그 친구 눈빛을 봤니?
[은경] 부부는 눈빛보구 살지 않아요 아빠!
[중년] 네가 그 친구에게 반한 요인은 뭐냐?
[은경] 그 사람 전체예요.
[중년] 죄덩어리와 동침을 하더니 마비가 되었구나.
[은경] 저녁이면 내 화장품과 애기 우유를 사가지고 들어와요. 일요일이면 손수 칼국수를
만들어 나를 기쁘게 해줘요. 감기가 걸렸을 때 밤새도록 머리맡에서 물수건을 짜서 이마에
올려줬어요.
어느 남편과 다름이 없어요.
[중년] 그건 생활이다.
[은경] 전 생활을 확신하고 그것이 즐거움의 전부라고 생각해요.
[중년] 네 남편의 혈관 속에서 악의 독소들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리고 있다. 그걸 봐야 한
다. 네 힘으로 그걸 구충시킬 수 없으면 네가 물러나야 하는 거야. 가정이란 화장품과 우유
와 칼국수로 유지되는게 아니라 사랑을 밑받침할 수 있는 믿음이란다.
[은경] 아버지의 경험이신가요?
[중년] 그리고 네가 경험해야 될 부부의 윤리란거다.
[은경] 내가 싫어서 버린 물건은 아무도 주워가지 않을 거라는 안타까움을 느껴본 적이 있
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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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왜 그것을 안타깝다고 표현하니?
[은경] 사랑 속에는 조바심과 같이 안타까움도 같이 있는 거예요. 배운 사람들은 연민이라
고 말하더군요.
[중년] 너희 부부가 원하는게 유지되리라고 믿고 있니?
[은경] 파멸이나 불행은 상상하지 않는게 사랑이예요.
[중년] 네 분별없는 사랑은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다.
[은경] 예언하는 건가요, 아니면 기원하시는 건가요.
[중년] 물의 흐름을 너에게 깨우쳐 주는거다.
[은경] 그이를 사랑해요. 아빠!---
[중년] 아침에 혈압을 쟀더니 불안한 상태에 있더구나.
[은경] 아빠!
[중년] 나이 먹으면 인내하는 에너지가 혈압으로 올라 간다는구나. 불안전한게 인간이라고
누가 얘기하더라.
[은경] 팔자소관이란 말, 아빠 예전에 자주 쓰셨죠?
[중년] 네 팔자를 그렇게 확신하니?
[은경] 피할 길이 없을 것 같아요.
[중년] 재혼할 수 있다.
[은경] 그 사람은 어떻게 되요. 아빠?
[중년] 한 개의 십자가로 족하다.
[은경] 하나예요.
[중년] 어떻게 그걸 하나라고 생각하니?
[은경] 신혼초에 내복을 꺼내려고 장롱을 여니 깊숙한 곳에서 차고 무거운 쇳덩어리가 나왔
어요.
난생 처음 보는 기묘하게 생긴 물건이었어요. 쇠고리가 달려서 스프린에 연결돼 유난히 큰
쇠붙이 소리가 탄력있게 났어요. 나도 모르게 쇠붙이 밑에 달린 방아쇠를 당겼어요. (탕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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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현장음) 그 소리에 첫 애가 유산되고 그것이 개머리판 없는 카빈총이란걸 알았어요. 저
녁에 남편이 들어와 카빈총에 기름칠을 하며 얘기하더군요. "실탄이 하나 없어졌는데--- "
그게 시작이었어요.
[중년] 개나리가 피었으니까 4월이었지--- 이층 서재에서 바둑을 두고 있는데, 층계가 숨가
쁘게 퉁탕거리더니 땀방울로 상기된 네가 웬 청년을 데리고 들어왔지--- 수줍음에 얼굴이
빨개져서 자지러지는 너다운 목소리로 "아빠 결혼하겠어요" 난 바둑알을 손바닥에 굴리며
그 청년을 쳐다봤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구나. 베지색 바지에 체크 무늬가 있는 구제품
저고리를 입고 문앞에 서서 뒷머리를 긁고 이었다. 난 물었지"사랑하니?"
[은경] (목메임) 전 남편의 얼굴을 쳐다보며 "네"하고 대답했어요. 그때 아빠 서재 모서리
화병에 꽂힌 노란 개나리가 활짝 웃고 있었어요.
[중년] 뜨락의 라일락 나무를 배경으로 서있는 두 사람을 나는 축복 받은 룬은이들 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두 사람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그 어둠 속에서 타자치는 소리가 들려온
다. 밝아지면 여순경 의자에 앉아서 타자를 치고 있다. 잠시후 수사관이 들어온다.)
[수사관] 축복받은 룬은이들--- 네, 누구나 축복 속에 만나서 결혼을 하게되고 그 축복만큼
보상을 받기 위해서 애써 현실 속에서 투쟁을 합니다. 이종대 결혼식의 주례는 당시 인천지
구의 국회의원께서 하셨는데, 그때의 주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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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녹음 테이프가 카셋트로 돼서 이종대의 집 서랍에서 나왔습니다. 물론 미스 현은 그것을
강력바에 A-2673 에 카피해서 기록을 해 놓았습니다. (타자소리, 계속되는 중에 낡은 테이
프가 돌이간다.)
[주례사] 오늘 날씨도 화창하여 두 사람의 앞날을 축복해 주는 듯 합니다. 공사다망하신 중
에도 신랑 이종대군과 신부 황은경 양의 결혼식에 참석하여 만당을 이뤄주신 하객 여러분에
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본인은 두 사람의 주례사에 앞서서 성실근면하게 살
아온 장래가 촉망되는 신랑 이종대군과 알뜰하고 인내심 강하며 규수로서의 조건을 두루 갖
춘 신부 황은경 양의 결합이 인간의 뜻이 아닌 하느님께서 맺어주신 천생연분 인줄로 알고
있습니다, 신랑 이종대군은 일찍이 부모슬하를 떠나서 투철한 자수성가의 뜻을 품고 대처에
나와 독학과 고학으로써 오늘이 있기까지 피나는 노력을 해 온 모범 사회인입니다.--- (주
례사 계속되는 동안 신혼여행의 열차 달리는 소음 스며 들어오고 한쪽에 조명이 들어오면
객차내의 이종대와 황은경 행복하게 차창을 내다보고 있다.)
[은경] (멀리 가리키며) 저게 뭐예요?
[종대] 황새---
[은경] 아니 언덕위에---
[종대] 망부석---
[은경] 우리를 따라오는 것 같아요.
[종대] 남편 기다리다 죽은 귀신이 돌로 변해서 망부석이 됐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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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경] 줄곧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어요?
[종대] 우리---
[은경] 우리?
[종대] 어디로 가는 걸까 하고?
[은경] 해운대 아네요---
[종대] 해운대 지나서---
[은경] 바다
[종대] 바다?
[은경] 우리 촌스럽게 사진찍지 말아요.
[종대] 신혼여행에서 사진 찍는 거 빼면 뭐 있어.
[은경] 당신 시외버스에서 처음 만났을 때 왜 내게 껌을 줬어요?
[종대] 누가 그러더군 껌을 줘야 찰싹 달라 붙는다고.
[은경] 근데 왜 손을 떨었어요?
[종대] 붙지않고 비맞은 포스터처럼 떨어지면 어떻게 하나 하고,
[은경] 내 백 안에도 껌이 있었어요.
[종대] 왜 받았어?
[은경] 오초 동안에 인생을 결정하는 조바심에 무릎이 떨렸어요.
[종대] 첫 눈에 반했어?
[은경] 아뇨.
[종대] 그럼.
[은경] 곁눈질로 보니 왼쪽 귀속에 귓밥이 보였어요.
[종대] 귓밥에 반한거야?
[은경] 이 남자 귓밥을 내가 파줘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페이지] 034
우습게
[종대] 그거 묘한 인연일세---
[은경] 오초 동안에 결정된 전부예요. 수 많은 중매거절하고 도도하게 버틴 내가 옆좌석 남
자 귓밥 때문에 인생의 주사위를 던졌다면 믿겠어요?
[종대] 그날 아침 이상하게 귀 후비고 싶은 생각이 없더라.
[은경] 내 친구중엔 맞선보는 자리에서 남자 양말 빵구난거 보구, 에라 하구 결정한 애도
있어요.
[종대] 시작은 쉽지만---
[은경] 끝이 어려워요?
[종대] 견딜 수 있겠어?
[은경] 여자가 듣는 웨딩마치는 출발이 아닌 고별과 체념의 장송곡이래요>
[종대] 됐어!
[은경] 네?
[종대] 다시 사는 거야.
[은경] 어떻게요?
[종대] 이렇게--- (격정적으로 은경을 껴안고 키스를 한다 기차 소음 커지고 열차내의 종착
역 도착 안내 방송이 들려온다. 암전)
[장] 4장
(멀리서 공사장의 불도저와 덤프트럭에서 자갈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뙤약볕 아래 늙
고 깡마른 노파가 힘겹게 자갈 상자를 뒤에 메고 나와서 받침대 위에 놓고 선다. 한쪽에서
종대가 들어와 선다. 한낮의 지겨운 매미소리)
[노파] 황소가 새끼배고 노루가 밭갈것다. 네놈 밸 때 옥비녀 양손에 쥐고 무지개 타고 방
죽에 떨어져 이씨문중에 동방삭이 나왔는갑다 했더니, 턱주가리 수염 날 때까지
[페이지] 036
양손에 칼들고 풀칠하니 옥황상제 점괘가 얼추 맞기는 맞아 떨어졌다 싶다.
[종대] 아버지는 어떠세요?
[노파] 염병에 구들장 지고 천장 무늬 세고 있으니, 싸게 가서 문안하면 효자왔다고 북치며
광고할 것이다.
[종대] 삼년 있었어요. 어머니--- 감방도 춥고 배고프고 고달팠어요.
[노파] 뭣 땀시 거길 들어갔냐, 광맥따라 노다지 캐러갔냐, 네가 자식이라고 나타나도 어디
서 머리 짤린 수탉 날라 들어온 것 같다. 오장육부 심사 뒤집지 말고 참새처럼 사라지거라.
모자지간 인연끊고 죽사발에 코박은 지 오래다, 볼짱 다 본 허리잘린 절구대여--- (종대 다
가가서 어머니의 손을 가만히 잡는다. 시력 없는 눈빛으로 아들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본
다.)
[종대] 옛날처럼 어머니 젖꼭지 만지며 멍석에 뒹굴며 살고 싶어요. 어머니--- 왜 그게 안
될까요? 하고 싶어서 안달스러워 죽겠는데 가는 곳마다 손길을 뿌리치네요. 제가 태어날 때
죄짓자고 칼자루 품고 나온건 아니잖습니까? 머리가 빙글빙글 돌아요. 사막처럼 삭막하고
상어 껍질처럼 아프게 거치러워요 어머니--- 산다는 게 말예요.
[노파] 살어 봐, 내키는 대로 살어 봐. 끈매서 기둥뿌리에 매놓지 않았으니께. 소나기 맞은
황소처럼 뛰어봐. 네 근력에 지쳐 자빠질 때까지 지랄하고 싶은 지랄 원없이 해보랄 밖에
[페이지] 037
[종대] 어머니 거름지개 지고 보릿고개 깡보리 사발밥 싫어서 떠난것도 아니고, 보리타작,
도리깨질, 배추밭 진딧물 잡는 게 지겨워 떠난 게 아녜요. 대처바람 돈 바람에 암내 맡은
망아지 된것도 아니예요
[노파] 그럼 뭐여! 정자에서 장기 두는 놈 등짝패서 내쫓던 원두막 참외 비고 자는 놈 모기
불 피워 내쫓던? 솔잎 떠난 송충이 제 변명하자고 왔단 말이냐?
[종대] 냄새가 싫었어요. 골방에 곰팡네 뒷곁에 두엄 냄새 흐린 날 돼지우리 냄새 부엌아궁
이 화덕냄새--- 아버지 목침에 밴 땀 냄새가 지겨웠어요.
[노파] 대처냄새 맡아보니 새댁 속것 냄새 나던?
[종대] 이 냄새 저 냄새 분간하기 어렵게 됐어요.
[노파] (자갈통 지며 움직이며) 어서 떠나거라 코막힌 자식 놓고 장타령이 왠 소용인가.
(멀리 사라지며) 자갈 두 짐 지어놓고 김매고 피사리 하고 담배밭에 약뿌리고 물길어서 독
채우고 호박잎에 밥을 얹어 날된장에 한 입 먹고 저녁멍석 벌렁 누워 별똥 불빛 쳐다보다
새벽이슬 젖을때까지 곤드레 잠이나 자야것다.(종대, 어머니가 사라진 쪽을 쳐다보고 있다.
문도석이 들어온다.)
[도석] 형--- (암전)
[장] 5장
(타자기 소리 들리고 조명 들어오면 여순경과 수사관)
[수사관] (타자기에서 종이를 떼서 들고 앞으로 나온다.)
[페이지] 038
1972년 7월 27일 오전 10시 40분 상업은행 용산지점, 출감 후 그들의 첫 번째 범행. 우리는
살인사건을 다루는 중에 피해자와 범인들이 마주치는 숙명적인 일치점에 묘한 흥미를 느끼
곤 합니다. 여러 가지의 숙명적 시간의 일치 때문에 한 사람은 죽고 또 한쪽에서는 죽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건 당일의 날씨, 피해자의 기분상태, 걸음의 속도, 자동차의 지연따위
가 양측을 범행장소에서 만나게 합니다. 만약 구두끈이 풀어져서 일분간의 시간이 숙명의
시간표에서 오차가 생긴다면, 피해자는 지금 이 순간 어느 커피숍에서 따끈한 차를 마시고
있을지 모릅니다. 여기 박영수씨는 숙명의 시간표에 아주 충실했던 피해자 중의 한 사람입
니다. 미스 현 첫번째 범행일의 일기상태를 알려주겠어?
[미스현] (서류를 펴서 읽는다.) 1972년 7월 27일의 일기상태 북동풍 내지 남동풍이 불고
오전에 비가 오다가 오후부터 갬, 기온은 섭씨 21도, 평온에 비해서 삼도가 낮았음. 습도는
92%, 불쾌지수는 81, 동해의 파도는 3내지 4미터.
[수사관] 됐어요 미스 현. 그들은 서로 이렇게 출발하게 됩니다.
(암전되고 반대편에 불이 들어온다. 박영수 의자에 앉아서 구두끈을 매고 있다. 아내가 가
방과 우산을 가지고 서 있다.)
[아내] 왜 일찍 서두르세요? 통근버스시간 아직 멀었는데,
[영수] 회사에 갔다 은행에 가야해.
[아내] 감기가 심한데 뭐하면 하루 더 쉬세요.
[페이지] 039
[영수] 약먹었으니까 낫겠지.
[아내] 비가 오는데 감기 도지겠어요.
[영수] 오늘 은행에 가서 봉급 수령해 와야 된다니까.
[아내] 경리부에 당신밖에 사람없어요?
[영수] 아프다고 일찍 퇴근하니까 부장이 요즘 눈총주는 것 같아.
[아내] 똑같은 월급타면서 유난스럽게 충성할 건 뭐 있어요?
[영수] 앗따 아침부터 녹음기 돌리네.
[아내] 당신 아파서 쓰러지면 세 식구 하늘 바라보고 회심곡 부르게 돼요.
[영수] 재수 없는 소리하고 있네.
[아내] 그럼 비나 그치면 나가세요.
[영수] 은행 아홉시에 연다구---
[아내] 봉급은 오후에 줄꺼 아녜요?
[영수] 당신이 우리 회사 사장이야? 별걱정까지 다하네 그려.
[아내] 기껏 은행심부름이나 하는 주제에
[영수] 뭐야 주제? 이 여자가 눈에 보이는게 없나?
[아내] 우산이나 가지고 나가세요. 새로 다려 입은 옷 버리지 말고.
[영수] 관둬 택시 타고 가겠어.
[아내] 택시값 올랐어요.
[영수] 담배 안 사피면 될거 아냐.
[아내] 나가다가 큰댁에 전화나 하세요. 돐잔치에 못간다고.
[영수] 당신이 걸어. 큰댁에 돐잔치 결석하는거까지 보고하게됐어?
[아내] 왜 실속없는 일엔 열 올리고 집안일엔 쇠귀예요?
[페이지] 040
[영수] 정말 몇대 딱소리 내고 갈까보다.
[아내] 바쁘다면서 딱소리 낼 시간은 있군요.
[영수] 그런건 얼마든지 짬을 낼 수 있어.
[아내] 보기 싫어요. 어서 나가세요.
[영수] 에그 내가 장가는 왜 갔지?
[아내] 그대 없는 세상은 앙꼬없는 찐빵이요, 한건 언제구요?
[영수] 내가 이런 곰보빵인지 알았어. 홀아비로 사는건데.
[아내] 뭐예요?
[영수] 다녀올게(암전되고 반대편에 조명이 들어온다. 이종대와 문도석 자동차 안에 앉아서
껌을 씹으며 달려간다. 이종대 의자 앞의 가상의 라디오 스위치를 넣는다. 째즈 음악이 흘
러나온다. 자동차 달리는 소음. 문도석이 핸들을 잡고 있다. 기아와 핸들을 잡고 있다. 기
아와 핸들을 마임으로 움직여 차체가 언덕과 급커브를 회전하는 것을 암시해준다. 문도석
브레이크를 잡는다. 자동차 급정거한다. 엔진 혼자서 가늘게 돌아가고 있다. 두 사람 인도
에 인접한 은행 정문을 응시하고 있다. 문도석이 시계를 본다. 이종대가 껌을 뱉어서 휴지
통에 버린다. 이종대 가만히 가슴을 폈다 좁혔다. 심호흡을 한다.)
[도석] 떨리우?
[종대] 임마 사냥꾼이 멧돼지 무서워 총 못쏘겠니?
[도석] 형 실패하면?
[종대] 재수 없는 소리하지 말어.
[도석] 옛날부터 초장끝발이 개끝발이였는데.
[종대] 배에서 힘을 빼고 심호흡을 세 번만 해봐.
[도석] 소변이 마려운데.
[페이지] 041
[종대] 성공할 징조다.
[도석] 형님이 뜨겠우?
[종대] 잘봐 시범을 보여줄께.
[도석] 솔직히 오면서 몇 번 되돌아 갈 생각했우.
[종대] 처음엔 누구나 다 그런거야.
[도석] 형님두 그랬우?
[종대] 입 속이 말라서 혓바늘이 돋더라---
[도석] 뭔가 걸려야 할텐데.
[종대] 쉿 떴다.
(은행에서 돈보따리를 든 박영수 나온다. 그리고 택시를 기다리는 듯 주위를 두리번 거린
다. 이종대가 문을 열고 차밖으로 나간다. 문도석 핸들을 꽉잡고 밖의 동정을 예의 주시한
다. 박영수에게 다가간 이종대, 신분증을 제시하고 같이 가자는 몸짓을 한다. 박영수 의아
한 상태에서 엉거주춤 한다. 이종대 심각하게 동행을 강요하여 한 팔을 끌어서 차 쪽으로
같이 앉아 바로 문을 닫는다. 문도석 기어를 넣고 차를 움직이기 시작한다. 달리는 차의 소
음.)
[영수] (공포에 질려) 어디로 가는 겁니까?
[종대] 조사할 게 있다고 했잖아.
[영수] 어느 경찰서예요?
[종대] 어느 경찰서로 가고 싶어?
[영수] 그걸 내가 어떻게 압니까?
[종대] 그럼 그거 이리내놔.
[영수] 뭐라구요?
[도석] 시끄러워서 운전 헷갈리네.
[페이지] 042
[종대] (보따리 뺏으며) 이거 나한테 맡겨.
[영수] 도대체 당신들 누구요?
[도석] 앗따 무슨 재치문답하나. 뭘 자꾸 물어봐? 대충 이 정도면 감잡을 때 됐는데.
[영수] 뭐예요, 당신들.
[도석] 미스터 강.
[영수] 뭐요?
[도석] 말씨되게 못 알아듣네. 강원도에서 가운데 원자 빼면 뭐가 남지? 자 앞으로 시간은
오초.
[영수] 강도?
[도석] 네 맞았습니다. 상금으로 검은콩알 한 개 드리겠습니다.
[종대] 가만히 경치 보고 앉아 있어.
[영수] (보따리 다시 잡아 당기며) 안돼요 이거---
[종대] (신문지에 싼 카빈총을 옆구리에 댄다.) 에헤 다쳐, 그래두 더 살아야 될게 아냐.
젊은 사람이.
[영수] (몸부림치며) 안돼요. 내려줘요. 사람 살려! 사람 살려!(박영수 몸부림을 친다. 문
도석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세사람 앞으로 쏠린다. 박영수 차문을 열고 밖으로 뛰어 나간
다.)
[수사관] 당시의 이 사건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은행 갱사건으로 당시의 목격자들이 전
율할 상황을 시민의 입장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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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목청 높여 진술했습니다.
[행인] 오전 10시 30분쯤에 검은색 승용차가 은행앞에 도착했습니다. 모든 행인들은 공금이
나 기타 현금을 예금하러 온 공공기관의 차량으로 판단하고 전혀 주의하지 않았습니다. 10
시 40분쯤 검은색 잠바를 입은 키가 일미터 칠십쯤 되는 청년이 은행에서 나온 손님을 강제
로 승용차에 태웠습니다. 신분증을 제시하는 것으로 봐서 수사기관에서 용의자를 연행하는
것으로 모두 착각을 했으니까, 핸들을 잡고 있는 사람이나 잠바를 입고 있는 사람이나 그렇
게 태연할 수가 없었으니까요.
[여대생] 학교강의를 받으러 가기 위해서 대방동 로터리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어
요. 갑자기 검은색 승용차가 급정거를 하더니, 차안에서 젊은 사람이 강도야 하고 소리를
지르며 담배가게 앞으로 뛰어 갔어요. 사람들은 어리둥절해서 한 쪽으로 물러섰어요. 그 순
간 차안에서 두방의 총소리가 울렸어요. 젊은 사람이 총탄에 맞아 담배가게 유리문에 얼굴
을 처박고 쓰러졌어요.
불과 10초 동안에 일어난 일이었어요. 정신을 차려보니 검은색 승용차는 시흥쪽으로 질주하
고 있었어요. 백주에 대로상에서 이런 끔찍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는건 도저히 우리들의
상상으로 믿기 어려운 일이예요. 이번 기회에 당국과 수사기관에 강력히 호소하겠어요. 하
루빨리 이런 악질 살인범을 체포하여 모든 시민이 안심하고 생업에 종사할 수 있는 밝고 명
랑한 사회가 됐으면 하는 바램이예요. 회화과 4학년 오경자예요.
[수사관] 시민들의 이러한 투철한 신고정신과 호소에도 불구하
[페이지] 044
고, 시흥 쪽으로 도주했다는 범인들의 행방은 묘연했으며, 주요 일간지 머리기사에는 오리
무중이란 단어와 제자리걸음이라는 야유가 매일 실렸습니다. 이 대담하고 무모한 백주의 은
행갱 사건을 당시의 사회학자는 이렇게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사회학자] 도덕의 타락이며 사회기강의 파괴입니다. 백주에 무모한 시민을 살해한 범인들
은 이 사회에서 배제되야 할 악의 근원입니다. 이러한 강력사건이 생길 때마다 나는 새삼
느낍니다. 토인비의 말을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나와 남이 공존해야 된다는 사회 공동체
연대 의식의 결여이며, 아울러 인간 생명의 멸시풍조이며 남의 것을 쉽게 강취하여 불로소
득 하고자 하는 고도 산업문명시대의 암적 요소입니다. 차제에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물질의 풍요와 황금만능 시대에 인간성 회복과 사회윤리의 확립입니다. 윤리와
타락은 결국 사회 파멸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며,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기성
세대에 대한 불신과 저항감을 불러 일으킬 것입니다. 우리모두 사회정의를 구원해야 하겠습
니다.
[수사관] 그러나 누구의 얘기보다 피해자 박영수씨 부인과의 대담은 나를 무척 당황하게 만
들었습니다. 동정이나 어떤 분노를 느꼈다기 보다 당황했다는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입니
다.
(한쪽에 조명이 들어오면 아내가 링겔을 꽂고 의자에 실신한 상태로 앉아 잇다. 수사관 다
가간다.)
[페이지] 045
[수사관] 시체 부검 결과 두 군데 총알을 맞았습니다.
[아내] (오열을 한다) 무서워요. 무서워요.
[수사관] 충격이 심하셨던 모양입니다.
[아내] 누구에요 범인은?
[수사관] 아직 확실한 윤곽을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내] 왜 우리 그이를 죽였을까요?
[수사관] 현재로선 어떤 원한 관계가 아닌 단순한 살인 강도인 것 같습니다.
[아내] 왜 하고 많은 사람 중에 제 남편을 죽인거예요? 은행엔 하루에도 수백명씩 드나드는
데 왜 제 남편을 쏜 거예요? 제 남편이 무슨 잘못을 했습니까? 말씀해 보세요. 애한테는 인
자한 아버지고 나한테는 언제나 사랑해 주는 둘도 없는 그이예요. 도대체 왜 그이가 희생돼
야 하나요? 말씀해주세요.
[수사관] 운이 나빴다고나 할까 우연한 일치였습니다. 심심한 애도의 뜻을 전해드립니다.
[아내] 난 이해할 수 없어요. 아침에 비닐우산을 들고 나간 그이가 아무 이유도 없이 죽은
시체로 내 앞에 돌아와야 된다니, 이해할 수 없어요. 누가 내 남편의 무고한 죽음과 가정의
파멸을 보상할 거예요? 정직하고 근면하고 순진했어요. 법 없이도 살 사람이 왜 죽어야 되
느냐 말입니다.
[수사관] (크게 부른다.) 미스 현!
[여순경] (어둠 속에서 나타나며) 네 계장님?
[수사관] 지금 기록하고 있나?
[여순경] 네 기록하고 있습니다. (타자기를 두드린다.)
[페이지] 046
[수사관] 피해자 가족의 진술을 빠짐없이 기록하도록 해.
[여순경] 네, 알겠습니다.
[수사관] (아내에게) 완전하다는 복지국가에서도 살인사건은 일어납니다. 인류가 시작되면
서부터 살인은 시작됐습니다. 카인과 아벨로부터 인간 속에 존재해 온 원죄유전이라고 기독
교에서는 얘기합니다.
[아내] 카인은 누구고 아벨은 누군가요?
[수사관] 역사가 흐르면서 카인과 아벨의 역할은 바뀌어 갑니다. 그러나 살육의 형태는 똑
같은 것입니다.
[아내] 내가 원하는 건 역사의 교훈이 아니라 살아있는 내 남편이예요.
[수사관] 남편께서는 죽었습니다.
[아내] (고함) 아녜요 죽지 않았어요.
[수사관] 진정하십시오.
[아내] 신입사원이라 퇴직금도 적고 생명보험에도 들지 않았어요. 범죄살인은 보상금도 없
다고 들었어요. 단칸방 전세방에서 애기와 둘이서 살고 있어요. 우리 가족에 대한 보상은
누가 해 주나요? 차라리 교통사고라도 당했으면 보상금을 받을텐데, 이건 개죽음이예요.
[수사관] 개가 죽는걸 보셨습니까?
[아내] 애가 있어서 재혼할 수 있는 길도 막혔어요. 나는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되는 거예
요? 혼자서 과부로 늙어야 되는 거예요? 세금내고 의무에 충실했던 우리가 사회로부터 받아
야 할 대접인가요?
[수사관] 누구나 사회에 기여하는 사람은 대접받고자 하지 않습니다.
[페이지] 047
[아내] 범인들은 언제나 잡히나요?
[수사관] 수사망을 좁히고 있으니까 금명간 판명이 날겁니다.
[아내] 그들에게도 처자식이 있겠죠. 나와 우리 애기같은---
[수사관] 아직 확실한 신원이 수배되지 않았습니다.
[아내] 체포하면 알려주세요. 짐승의 얼굴을 보고 싶어요 (암전)
[장] 6 장
(밤. 음침한 술집의 구석자리, 희미한 조명속에 술집의 음악이 흐른다. 이종대와 문도석 맥
주잔을 경쾌하게 부딪친다. 그리고는 시원스럽게 마신다.)
[도석] 생각보다 수입이 적었우---
[종대] 초장에 고래 잡을 줄 알았냐?
[도석] 그래도 상어쯤은 될 줄 알았지.
[종대] 이제 손 풀은 거다.
[도석] 첫 사업이라 그런지 갈증이 납디다.
[종대] 마셔---
[도석] 만약에 말이유.
[종대] (가로막으며) 앞으론 만약에란 말 쓰지 말어. 성공 아니면 실패다. 다시 말해서 실
패는 끝장이란 말이다 알겠냐?
[도석] 나도 쇠파이프 있으면 능률이 오르겠는데.
[종대] 뭔 소리냐?
[도석] 딱총말이유.
[페이지] 048
[종석] 거추장스러운데 걸머지것냐?
[도석] 젓갈도 두 짝이 있어야 해삼 집이 올리는 거유.
[종대] 개머리판 뜯어 낸 게 또 하나 있기는 허다.
[도석] 언제 그건 장만했우?
[종대] 과부도 속것 두벌 두고 갈아입는 법이다. 평택 예비군 창고에서 전세 낸 게 하나 있
기는 헌데......
[도석] 문지방 받을 바엔 석까래 받는다고 우리 크게 한번 치고 그만 둡시다!
[종대] 이게 내기 당구 치는거야? 잘못치다 이쪽에서 마빡깨져 임마. 돈 꿀때도 물주 얼굴
보고 손 내미는 건데, 동서남북 바람봐서 치는 것이다 알것냐?
[도석] 형님 입담도 좋으네, 아사무사한 것도 형님 혀바닥에 실리면 쉽게 이해가 싹 가요.
입 빤찌는 돈주고도 못배우는건데......
(술에 취한 호스티스 아영이가 들어온다. )
[아양] 잘못 들어왔나요?
[종대] 뭐야?
[아영] 좌석 없이 맴도는 물방개예요.
[도석] 다리 아프겠다 앉아라.
[아영] 안주 축 안낼께요.
[종대] 허튼소리 하지마.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는다. )
[도석] 내가 상판은 이래도 꽃꽂이는 좀 해요 형님.
[아영] 뭐하는 사람들이에요?
[도석] 보면 몰라 술 먹는 사람이지.
[아영] 술 먹기 전에?
[페이지] 049
[도석] 술 먹기 전에 양치질한다.
[아영] 돈 있어요?
[도석] 비약이 제트기라 좋다.
[아영] 관상 보니까 쫓기는 사람들 같애요.
[도석] 뭐야?
[아영] 숨겨줄까요?
[도석] 어디에다 개구멍 파놨냐?
[아영] 양탄자 깔아 놨어요.
[도석] 등짝에 땀띠날까 무섭다.
[아영] 왜 그렇게 불쌍해 보여요?
[도석] 혼자서 포치고 차치고 다하네.
[아영] 도와줄까요?
[도석] 구제품 나왔냐?
[아영] 답답해서 그래요.
[도석] 술마셔
[아영] 누구든 이 컴컴한 동굴 속에서 데리고 나갔으면 좋겠어요.
[도석] 내 등짝에 업힐래?
[아영] 넓어요?
[도석] 만주벌판이다.
[아영] 벌판 믿고 따라나갔다가 동상 걸려들어 온게 한 두 번 이어야지
[도석] 등신아, 벌판하고 발판하고 구별할 줄 알아야지.
[아영] 등신은 그 쪽인 것 같애요.
[도석] 등신 둘이 합심하면 뭐하나 되겠다.
[아영] 맥주 세 병에 달롱이에요.
[페이지] 050
[도석] 달롱?
[아영] 해롱보다 심한게 달롱이에요.
[도석] 야 이게 낮밤으로 메대기 치네
[아영] 옆구리에 콩알구멍 감춰요.
[도석] 뭐야? (옆구리의 총알 얼른 감춘다.)
[아영] (눈을 뜬다.) 무슨 소리야?
[종대] 신고할까봐 겁나요? 나 데리고 가요. 그럼 입다물고 가만히 있을께요.(벌떡 일어나
손을 쑥 내민다.) 어서요. (종대와 도석 아영이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암전)
[장] 7 장
(들판 우거진 갈대숲. 문도석과 이종대 검은 실루엣으로 호리존트쪽에서 걸어 들어온다. 달
빛과 새의 울음)
[종대] 우리가 끝까지 지켜야 할 것은 의리다. 서로 믿을 수 없으면 동업을 할 수가 없는거
야. 그러나 한가지 약속 할 게 있다. 한밑천 잡아서 손을 땔 때는 똑같이 보조를 맞춰야 한
다. 같은 일도 되풀이하면 꼭 덜미를 잡히게 되는 것이다.
[도석] 젠장 이것을 직업으로 택하는 놈이 어디 있겠우. (두 사람 각각 두 자루의 카빈총을
꺼낸다. 탄창을 끼운다.)
[종대] 방아쇠는 마지막 순간까지 당기지 말어. 그게 철칙이야. 일단 사람이 죽거나 다치면
사업기간이 그만큼 단축돼.
[도석] 그렇다고 지팡이처럼 들고 다닐 수만 없지 않우?
[종대] 불가피한 순간까지 참아.
[페이지] 051
(총구를 하늘로 향한다.) 최후의 순간 안되겠다고 판단이 섰을 때 그때 당겨!(총소리와 불
꽃, 넓은 들판에 메아리쳐 퍼져 나간다. 한쪽 조명권에 있던 이정수 쓰러져 넘어진다.)
[수사관] (어둠 속에서 떠오른다.) 1972년 9월 12일 오전 10시 15분경 국민은행 아현동지점
에서 예금한 돈을 찾아나오던 이정수씨가 관용차에 의해서 납치되고, 그 후 10분 뒤 공덕동
삼거리에서 달리던 승용차 안에서 4발의 총성이나, 그 중 1발이 행인을 다치게 한 세칭 이
정수씨 납치 살해사건. 우리들은 관1-1549라는 번호판을 목격한 증인들의 진술에 의하여 차
량수배에 나섰으나, 시체는 찾을 길이 없었습니다. 시체는 끝내 수사진들에 의해서 발견된
것이 아니라 범인들이 죽기 직전에 제보하여 찾게 되었으므로 편의상 피해자에게 직접 묻는
실례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수사관 손뼉을 두 번 치면 죽어 넘어졌던 이정수 털고서 일어
나 선다.) 당시의 피살 상황을 설명해주시겠습니까?
[이정수] 전 죽었는데요?
[수사관] 편의상이라고 관객에게 양해를 구했습니다.
[이정수] 양해하시겠습니까?
[관객] 좋습니다.
[이정수] 그럼 다시 죽겠습니다.
[수사관] 미스 현!
[이순경] (나오며) 네 계장님!
[수사관] 죽었던 사람이라 기억이 희미할지 모르니까, 당시의 서
[페이지] 052
류를 참고로 갖다 줘.
[이정수] 금방 죽었다 일어났는데 왜 기억을 못하겠어요?
[여순경] 실례했습니다.
[수사관] 그럼 옆에서 확인해 줘요. 미스 현!
[여순경] 네!
[수사관] 그날 아침의 상황을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이정수] 여늬 때나 마찬가지로 사업관계로 은행에 예금한 금액을 인출하기 위해서 집을 나
섰습니다.
[수사관] 은행에 도착한 시각은?
[이정수] 오전 10시 정각이었습니다.
[수사관] 날씨는 어땠습니까.
[이정수] 화창한 전형적인 초가을 날씨었습니다.
[수사관] 은행에서 돈을 찾아가지고 나온게 몇시였나요?
[이정수] 10시 15분이었습니다.
[수사관] 소지한 금액은?
[이정수] 66만원이었습니다.
[여순경] 67만원으로 기록돼 있는데요?
[이정수] 죽은 사람은 납니다. 가만히 계십시오.
[수사관] 계속하시죠.
[이정수] 은행문을 막 나서는데 두 사람의 청년이 다가오더군요. (이종대와 문도석 이정수
에게 다가온다.)
[종대] 실례하겠습니다.
[이정수] 왜 그러시죠?
[종대] 잠깐 차에 타실까요?
[이정수] 차에?
[페이지] 053
[도석] 조사할게 있습니다.
[종대] 간첩신고를 받았습니다.(신분증 제시)
[수사관] 그래서 차를 탔나요?
[이정수] 네 탔습니다. (세 사람 가상의 승용차에 올라탄다. 위치가 바뀌자 이정수가 정정
을 한다.) 위치가 잘못됐습니다. 내가 안 쪽에 탔습니다.
[종대] 시간 없는데 그냥 합시다.
[이정수] (수사관에게) 그냥 할까요?
[수사관] 수고스럽지만 당시를 그대로 재현해 주십시오.
[이정수] (종대에게) 그것봐, 제대로 하라고 그러잖어
[종대] (위치 바꾸며) 되게 까다롭네. 죽은 사람이......
[이정수] 당신은 죽지 않았어? 똑같은 주제에.
[수사관] 계속하시죠. (문도석 기어를 넣고 차를 달리기 시작한다. 승용차를 달리는 소음
들려온다.)
[이정수] 마포경찰서는 지났는데요?
[종대] 안양까지 가야 되겠어.
[이정수] 안양? 난 지금 공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단 회사에 돈을 전하고 안양으로 갑시
다.
[도석] 그 사람 참 답답하네. 돈 없으면 뭐하러 당신을 모셔가겠어?
[이정수] 뭐요?
[종대] (총구로 쿡 찌르며) 가방을 이리 내놔, 빨리.
[이정수] (소리를 지른다.) 차를 세워요. 차를 세우라니까.
[수사관] 됐습니다. 그래서 총을 쏘았나요?
[페이지] 054
[이정수] 옆구리에 한 방 가슴에 한 방 맞았습니다.
[수사관] 그래서 죽었나요?
[이정수] 네. (대답하고 자동차 시트에 깊숙히 죽는다)
[수사관] 그 때가 몇시였습니까?
[여순경] 죽어서 말이 없군요.
[수사관] 당신들?
[종대] 10시 55분이였습니다. (암전되고 수사관과 여순경만 남는다)
[수사관] 이것이 그들의 두번째 범행이었습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그들의 범
죄 분석입니다. 왜 그들은 엄청난 범행을 연쇄적으로 저지르게 되었을까요? 당시 모대학의
범죄심리학 박사는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심리학박사] (어둠 속에서 솟아오른다.) 우리는 이것을 두 가지 이유로 분석하고 싶습니
다. 첫째는 기존 사회질서에 대한 불만입니다. 그들은 피해 받고 박해를 받는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도저히 사회의 냉대로 인해서 생계를 이어갈
수 없다고 오판한 것입니다. 자신들의 생존권리를 사회가 박탈했다는 어처구니없는 망상을
하게 된 것입니다.
두 사람 모두 어려서부터 가출하여 절도부터 시작하여 범죄에 물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들
이 사회로부터 스스로 도피한 것은 생각하지 않고 사회가 그들을 외면했다고 생각했습니
[페이지] 055
다. 둘째는 부에 대한 지대한 욕구입니다.가난에서 헤어나 남과 같이 호의호식하고자 하는
부에 대한 터무니없는 욕망입니다. 그들은 부유한 사람들의 긍정적 노력이나 근면한 정신을
생각치 않고 마치 잘 사는 사람들이 그들의 부를 탈취해 갔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의
범죄 행각이 이것을 되돌려 찾아오는 것이라는 죄와 벌의 라스코르니코프적 아집에 빠졌던
것입니다. 이것은 무서운 사회에 대한 도전이며 부정입니다. (심리학박사 암전되고 이종대
의 집 떠오른다. 황은경 의자에 앉아서 뜨개질을 한다. 이종대가 들어온다.)
[종대] 태양이 어디갔어?
[은경] 자고 있어요. 어디 갔었어요?
[종대] 서울.
[은경] 일주일만에 집에 돌아왔군요.
[종대] (상자를 가리켜며) 열어봐.
[은경] 뭐에요?
[종대] 사업을 시작하기로 했어.
[은경] 사업?
[종대] 왜 놀래?
[은경] (상자 속에서 핸드백을 꺼내며) 어머 당신?
[종대] 내일이 생일이더구먼.
[은경] 알고 있었어요?
[종대] 이제 떠나지 않을게......
[은경] 또 속아 볼까요?
[종대] 속아?
[페이지] 056
[은경] 사는 게 그러려니 하고 참아 가는 거에요.
[종대] 날 의심해?
[은경] 믿는 편이 속이 편해요. (종대 가만히 그녀의 볼에 입술을 대다가 목에 걸려 있는
십자가를 발견하다)
[종대] 뭐야?
[은경] 아빠가 다녀갔어요
[종대] 이혼하래?
[은경] 목걸이를 주셨어요. 기도하래요.
[종대] 기도한다고 부자가 되는 건 아냐.
[은경] 당신보구 부자되라고 성화하지 않았어요.
[종대] 하지만 가난한게 싫은게 아냐? 좀 더 돈 많고 배운 녀석한테 시집가지 못한 걸 후회
하고 있잖아.
[은경] 다시 처녀가 된다해도 다시 당신을 택할거에요.
[종대] 거짓말
[은경] 당신은 다시 시작한다면 날 택하지 않겠어요?
[종대] 한번도 처녀 때처럼 웃어 본 적이 없어.
[은경] 당신 사람을 죽였죠?
[종대] ?
[은경] 장롱 속에 있던 총이 없어졌다가 오늘 당신과 함께 돌아왔어요.
[종대] 그래서?
[종대] 자수하라고 하면 당신은 날 죽일거에요.
[종대] 그건 확실해.
[은경] 하지만 그게 무서운 건 아녜요.
[페이지] 057
[종대] 신고하겠다는 거야?
[은경] 태양이와 뱃 속에 있는 얘기가 날 겁쟁이로 만들었어요.
[종대] 돈이 필요했어.
[은경] 난 당신이 필요했어요.
[종대] 난 전과자야.
[은경] 당신에게 몸을 허락하고 결혼을 승낙했을 때도 전과자란 걸 알고 있었어요.
[종대] 도망치지 왜 결혼을 했어?
[은경] 믿고 싶은 한 구석이 있었어요. 고등학교 중퇴하고 미술대학 졸업생이라고 날 속인
그 약점 속에 나 믿고 싶은 당신의 힘을 봤어요.
[종대] 믿었는데 갈수록 한심하다 이거야?
[은경] 믿음이 뭔지 아세요?
[종대] 웃기는 소리 하지마.
[은경] 누굴 한 번이라도 믿거나 사랑해본 적이 있어요? 당신이 믿는건 기껏 개머리판 없는
저 카빈총이죠?
[종대] (빰을 때린다.) 닥쳐!
[은경] 강도 마누라 행세하는 건 쉬워요. (눈시울) 하지만, 착실한 남편의 아내 귀여운 애
들의 엄마노릇하는 건 더 어려운거에요.
[종대] 그럼 쉬운 걸루 하라구.
[은경] 저보고 매일 라디오 뉴스만 듣고 있으라는 거예요? 자동차의 사이렌 소리에 심장이
찢어지는 고통만 느끼고 있으라는 얘기에요?
[종대] 어떻게 하라는 거야?
[페이지] 058
[은경] 자수하세요.
[종대] 뭐야?
[은경] 편하게 잠을 자고 싶어요
[종대] 이것봐, 나 혼자 잘 살아 보자고 이러는게 아냐.
[은경] 내 핑계대지 마세요.
[종대] 난 이십년전부터 내 출세의 계획을 세워 왔고, 그 계획에 한 치의 차질도 없이 실행
해 왔어.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받은 멸시와 모욕을 꼭 앙갚음하겠다고 이를 악물며 살아왔
어.
[은경] 그게 이거였어요?
[종대] 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어. 뛰는 자가 있으면 잡아내렸고 앞질러가는 자가 있
으면 뒷덜미를 낚아챘어.
[은경] 무서워요.
[종대] 나이를 먹으면서 정당한 방법으로 내 야망을 채울 수 없다는 걸 알았어. 지름길로
달려가기 위해서 있는 놈들의 옷자락을 휘어잡았어. 훔친 놈의 물건을 되찾는 건 죄가 아니
라고 생각했어.
[은경]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 그것으로 난 만족해요.
[종대] 난 만족하지 못해. 어려서부터 수완이 있었어. 모두가 내가 한자리 할 거라고 기대
를 했어. 난 언젠가는 그 기대에 보답을 하리라 생각했어.
[은경] 사람을 죽였어요!
[종대] 날 믿어줘. 처음 당신이 나한테 반했듯이 끝까지 나한테 반해줘.
[은경] 아녜요. 당신은 돈을 위해서 또 사람을 죽일 것이고 나를 버릴거예요.
[페이지] 059
[종대] 배은망덕한 년.
[은경] 날 죽일 생각이죠?
[종대] 총은 아직 내 장롱 속에 있어. 단 한방이면 피차 죽게돼 알겠어?
[은경] (무릎에 매달리며) 당신을 사랑해요.(암전)
[장] 8장
(황은경과 아영 두 사람 미장원에서 만난다. 아영, 머리에 둥글고 큰 건조기를 쓰고 있고
손톱을 다듬고 있다. 은경, 옆에서 아영을 지켜보고 있다.)
[은경] 남편이 이틀간 집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아영] 난 삼일째 기다리고 있어요.
[은경] 두 사람이 어디 있는지 알고 계세요......?
[아영] 모르고 계세요?
[은경] 불안하지 않으세요?
[아영] 인내하는 걸 배우고 있어요.
[은경] 언제까지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아영] 돌아올 때 까지요.
[은경] 제가 유난스러운 건가요?
[아영] 글쎄요. 오히려 내쪽에서 무딘게 아닐까요.
[은경] 만류해 보신 적이 있으세요?
[아영] 돈을 벌어 오고 있어요. 우린 송추에다 땅을 살거예요.
[은경] 두 사람이 온전할 것 같아요?
[아영] 두 사람이 벼랑에서 굴러 떨어지길 기다리고 있는 말투로군요......
[페이지] 060
[은경] 결과는 짐작할 수 있어요.
[아영] 그럼 그렇게 알고 사세요. 자꾸 내게 초조하고 불안하도록 강요하지 마세요. 왜 자
신의 불행스런 신세를 남에게까지 일깨우고 있는 거예요? 난 편안하게 밥 잘먹고 잠 잘자고
있어요.
[은경] 거짓말이에요.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거예요.
[아영] 자신을 속이지 않으면 무슨 뾰족한 수라도 있다는 얘긴가요?
[은경]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아영] 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밖에 없어요. 그 사람이 좋아서 하는 일은 말리고
싶은 생각 없어요.
[은경] 죄 의식을 느껴 본 적이 있으세요?
[아영] 아뇨. 우리의 결혼생활은 재미있고 행복스러워요. 자꾸 찬물 끼얹지 마세요--- 혼자
불행하세요. 남까지 끌고 넘어가지 말고---
[아영] 비결을 가르쳐 드릴까요--- ? 모든 걸 내팽개치세요. 꿈이다 희망이다 하는 것들은
헌신짝처럼 내동댕이치면 되는 거예요. 한 번 태어나서 한 번 죽는 거예요---
[은경] 공포 때문에 깨어 있는 시간에는 소름이 돋아나요---
[아영] 맛사지를 하세요. 피부를 부드럽고 매끈하게 살살 문지르세요. 그럼 소름 같은 건
금방 피부속에서 숨어버려
[페이지] 061
요---
[은경] 사람을 죽였어요--- !
[아영] 또 죽일 거예요---
[은경] 부럽군요---
[아영] 첫 번째 남자가 월남전에서 사지가 찢어져 죽었어요. 결혼 육 개월 만이었어요. 난
자주 말채찍 소리를 들어요. 아시죠? 가죽 회초리. 바람을 일으켜 따가운 소리를 내죠. 보
이지 않는 가죽끈이 내 등짝을 갈겨서 자꾸 어두운 곳으로 몰고 있는 기분이에요.
[은경] 난 화장하는 걸 잊어버렸어요--- 밥솥에 물 붓는 걸 대중할 수가 없어요--- 마룻 걸
레질을 하다가 손목을 삐곤해요. 자잘한 생활을 잃어버렸어요. 남들이 아기자기하게 재미있
다는 생활들이 멀리 도망쳐버리고, 커다란 천막이 바람에 기둥뿌리채 빠져 내게 덮쳐오는
기분 뿐이예요.
[아영] 우린 적금을 들기 시작했어요 일년만기에요. 새집을 장만할 거예요. 그 사람은 한푼
도 낭비하지 않고 번만큼 착실하게 들고 들어와요. 월부 냉장고를 들여놨어요---
[은경] (순간의 고함) 안돼요!
[아영] 왜요--- ?
[은경] (차분히) 불행을 준비하지 마세요. 지금은 잠 못 자고 불안하고 안달해야 마땅한 시
간이예요. 왜 즐거운 거예요? 뭣 때문에 야무지게 생활을 즐기는 거예요. 얼마나 큰 소리를
내고 쓰러질려고 허망한 돌무덤을 쌓아올리고 있냐 말예요.
[페이지] 062
[아영] 그건 내 시간이기 때문이예요--- 짧고 험악하지만 고무줄처럼 늘려 보는 거예요. 한
가닥 내게 준 시간을 기타소리가 날 때까지 늘려서 팽팽하게 살아 보는 거예요. 내 시간이
니까요!
[은경] 끊어질 거예요.
[아영] 그 정도두 상상하지 못하고 땡기는지 아세요.
[은경] 임신하지 마세요!
[아영] 벌써 삼 개월 이예요.
[은경] (호소) 안돼요 애를 갖지 마세요.
[아영] 그 사람이 원해요--- 떳떳하게 살아가는 자기 자식을 보고 싶데요.
[은경] 강도의 자식을--- ?
[아영] (날카롭게 쏘아본다.) 뱃속에 얘가 들어요. 두 얼띤 여편네들의 얘기를--- 돌아가세
요--- 빨래비누를 사두세요 신문에 보니까 다음주부터 소매가격이 오를 것 같대요 제발 고
민다운 걸 고민해 보세요 (은경 아영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찰가닥 조명이 나간다.)
[장] 9장
(어둠 속에서 세 방의 총소리 행인들의 비명소리 들리고 잠시 침묵이 흐른다. 조명이 밝아
지면 수사관과 여순경)
[여순경] (서류를 읽는다) 1973년 8월 25일 세칭 구로공단 사건 시중은행에서 공단봉급을
인출 해오던 전기호씨를 피습하고 현금을 탈취. 경부고속도로로 도주하다 이것이 이들의 세
번째 범행
[페이지] 063
[수사관] 우리들은 서울기점 2km 경부고속도로로 하행선에서 범행에 사용하고 유기시킨 승
용차를 발견하고 수사에 활기를 띠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의 수사를 비웃는 종이
쪽지가 승용차 안에서 나왔습니다. 그것은 회롱이었으며 그들의 자신감이며 아울러 범죄 욕
구에 대한 그들의 단말마적 표현이었습니다.
[여순경] (종이 쪽지 읽는다) 지문 채취 잘해 보슈!
[수사관] 네 지문채취 잘해보슈 야유에 가득찬 종이 쪽지에는 국민학생정도의 유치한 글씨
로 쓰여 있었는데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필적을 숨기기 위하여 이종대가 왼손으로 쓴 볼
펜 글씨였습니다. 이것은 수사관에 대한 회롱이기 전에 이사회에 대한 그들의 원한 깊은 야
유였습니다. 강력바에 A2673에는 다음과 같은 어느 변호사의 의견서가 첨부되어 있었습니
다.
[변호사] (어둠속에서 떠오르며) 범인들은 이번 사건으로 세사람을 죽였습니다. 이제 네 번
째 희생자가 누구일지 아무도 모르는 상태에서 시민들은 공포의 전율속에 사로잡혀 있습니
다. 그들이 승용차 안에 남긴 쪽지는 우리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습니다. 지문채취 잘해
보슈. 그들은 죄책감에 사로잡힌게 아니라 범죄욕구에 쫓기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사회
에 대한 이 무모한 야유는 우리 모두 분개하는 바입니다. 최초의 살인사건이 일이난지 일년
이 지나도록 수사당국에서 뭘 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줄곧 범인들의 뒤꽁무니를 쫓아
다니는 졸열한 수사는 지양하고 좀 더 과
[페이지] 064
학적이고 조직적인 수사를 통해서 경찰의 공신력을 회복해야 할줄 압니다. 살인마들은 하루
빨리 체포되야 하며 그들의 단죄로서 선의의 많은 시민들이 편안하게 그 들의 생활을 영유
할 수 있게 해야 됩니다. 악인에 의해서 선량한 사회가 우롱당할 수는 없습니다. 자라나는
어린아이들에게 좀 더 건전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줘야 합니다.(암전)
[수사관] 그들의 야유대로 우리는 범행 차량에서의 지문채취는 실패를 했습니다. 이것으로
저는 첫 번째 시말서를 상부에 제출하는 곤욕을 치루었습니다. 과학수사--- ? 도대체 과학
수사란 무엇일까요?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우리는 일단 전과자나 우범지대를 상대로 초동수
사를 시작합니다.
자료실에 보관된 전과자의 명단만도 오백만이나 됩니다. 전체 인구의 팔분의 일이죠--- 오
백만중에 둘을 잡아내기란 그렇게 용이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오류를 범하
게도 됩니다.
(한쪽에 조명이 들어오면 용의자 의자에 앉아있다 수사관이 다가간다.)
[수사관] 이름은?
[용의자] 오학수
[수사관] 직업은?
[용의자] 용산에 있는 철공소에 용접공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수사관] 손에난 상처는?
[용의자] 용접하다가 다친겁니다.
[수사관] 8월 25일 오후에 어디 있었어!
[용의자] 극장에서 영화를 구경했습니다.
[페이지] 065
[수사관] 숙소에서 쇠파이프로 조립된 사제 총이 나왔던데
[용의자] 철공소에서 심심풀이로 파이프 토막으로 만든겁니다.
[수사관] 이유는?
[용의자] 여름 휴가때 사냥을 하려고 만들었습니다.]
[수사관] 사격한 흔적이 있던데
[용의자] 지난봄에 용인에서 꿩을 한 마리 잡았습니다.
[수사관] 실탄은?
[용의자] 월남에서 제대할 때 가지고 나온 것입니다.
[수사관] 극장에 갔었다는 데 영화 내용 기억하고 있어?
[용의자] 중국 무술영화였습니다.
[수사관] 극장 소재지는?
[용의자] 미아리에 있는 재 개봉관이었습니다.
[수사관] 영화내용을 얘기해 봐.
[용의자] 처음에 자막이 쫙 나오고, 성룡이가 소림사에서 무술을 배우는데 말입니다. 물론
총천연색 시네마스코프였습니다. 첫 번째는 장풍과 옆차기부터 배우는데--- (일어나서 액
숀)
[수사관] 결국 그날의 수확은 성룡이 주연한 중국무술 영화 한편 극장에 가지 않고 봤다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도대체 수사라는 게 그렇습니다. 태평양에서 낚시질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게 없습니다. 한 마리의 열대어를 잡기 위해서 수많은 잡어 들을 낚아 올려야 합니다.
과학수사라고하면 여러분들은 금방 형사 콜롬보를 연상하실 줄 믿습니다만, 그건 추리작가
들의 농간에 의한 잘 짜여진 각본이란 걸 명심하셔야 합니다.
[페이지] 066
(암전 됐다가 밝아지면 문도석과 아영이. 유모차를 끌고 있는 아영은 익살스럽게 유모차안
의 애기를 얼른다.)
[아영] 당신 경찰에 잡히거나 쫓기다가 죽으면 나중에 내가 결혼했다는 걸 어떻게 증명해
요? 사진 한장이라두 있어야지...... 안그러니 아가야? (웃음)
[도석] 나 죽으면 말야.
[아영] (안들리듯) 뭐라구요?
[도석] 나 죽으면 재혼할래?
[아영] 그때 기분봐서요.
[도석] 반지하고 목걸이 팔면 한 반년은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을거야
[아영] 당신 생명보험에 드는게 어때요?
[페이지] 067
[도석] 강도질하다 죽은 놈은 생명 보험금도 탈 수 없어 등신아.
[아영] 죽는 건 똑같은데, 되게 불공평하다 그렇지 아가야?
[도석] 용인에 선산이 있어.
[아영] 땅이 있단 말예요?
[도석] 묘지
[아영] 평당 얼마나 나가요?
[도석] 아버지 산소 옆에 빈자리가 하나 있던데.
[아영] 몇 평인데요?
[도석] 한식 때 가보니까 풀이 되게 많이 자랐더라.
[아영] 당신 앞으로 명의가 되어 있어요?
[도석] 형님 이름으로 돼 있어.
[아영] 말짱 헛거네요 그럼
[도석] 태우지 말고 묻어. 우리집 내력은 매장이니께.
[아영] 매장은 비용이 꽤 들던데, 차라리 태워서 강물에 띄우는 게 어때요! 죽은 사람이 매
장하는지 띄우는지 알게 뭐예요?
[도석] 그래두 영혼이 있다더라.
[아영] 뭐라구요?
[도석] 영혼!
[아영] 허공으로 막 날라다녀요?
[도석] 그렇다구 하더군.
[아영] 미신이예요. 그렇지 아가?
[도석] 나 죽더라두 술집에 다시 나가지 말어.
[아영] 밑천없이 목돈 만지는거 그것밖에 없어요.
[도석] 이것아 사람답게 살아야지.
[페이지] 068
[아영] 애기가 잠들었어요.
[도석] 사람답게 살어.
[아영] 손가락을 물고 잠들었네. 확실하게 제 새끼는 이쁜가봐요.
[도석] 나 죽으면 말야.
[아영] 기저귀를 갈아 채워야되겠네요. 요즘 애기들 청바지도 예쁘게 나오던데. (유모차를
끌고 나간다. 어디선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린다. 도석 하늘을 우러러 본다. 이상한
복받침에 손가락으로 눈물을 찍어낸다. 이종대가 풍선을 들고 들어와서 문도석 곁으로 가서
탕 하고 풍선을 터뜨린다. 도석 놀라서 일어나 앉는다.)
[종대] 세상이 우리에게 사람을 죽이라고 시킨거야. 사람이 죽여서 먹고 살라고 이 더러운
짓을 시킨 거라구 알겠어? 나도 살려구 애써봤어. 그러나 배우지 못하고 가난한 놈은 언제
나 있는 놈들 밑에서 모욕받으며 얻어먹게 마련이야. 난 그게 더럽고 아니꼬운 거야.
[도석] 시작한 게 잘못이었어.
[종대] 너 후회하고 있냐?
[도석] 잠을 잘 수가 없어.
[종대] 이 새끼야 누군 편하게 잠 자는지 알어?
[도석] 그만두겠우......
[종대] 이런 배은망덕한 놈. 뱃속에서 기름기가 도니까 혼자서 발뺌을 하겠다는 거야! (이
종대 문도석을 때리기 시작한다. 도석 얻어맞고 들판에 넘어진다. 일어나서 종대에게 덤빈
다.) [도석] 자 실컨 때려! 몸뚱아리가 가루가 되도록 두들겨봐. 이 병신 머저리 같은 놈
아!
[페이지] 070
[종대] 의리 배반하는 놈 어떻게 되는지 보여줄께! (그들의 난투는 한없이 게속된다. 치고
맞는 두 사람 기진 맥진하여 풀밭에 넘어져 헐떡거린다. 멀리서 뱃고동이 울린다. 뭐가 허
탈하고 짙은 외로움이 엄습해 온다. 두 사람 멍하니 멀리 바다를 쳐다본다. 문도석 엉 하고
짐승처럼 울기 시작한다. 종대 그를 한참 쳐다본다.) 울어라. 온몸이 물이 돼서 쏟아질 때
까지 속시원하게 울어봐. 내 몫까지 울란말야 비굴한 자식아.
[도석] 형--- ! (도석 일어선 종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운다. 암전.)
[장] 10장
(어둠 속에서 수사관과 여순경이 떠오른다)
[수사관] 우리들은 드디어 두 범인의 신원을 확인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부끄럽게
도 그것이 우리 수사관들에 의하여 밝혀진 것이 아니라 사건 현장의 목격자들 진술에 의하
여 몽타주 사진이 작성되고 전과자 명단에서 그들의 이름을 찾아내는데 성공한 것입니다.
그들의 주거지는 인천---
[여순경] 이종대와 문도석---
[노동자] 저는 인천 제3부두에서 원목하역 작업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어느날 두 사람이
송도 근방 송림 속에서 싸우는 것을 봤습니다. 두 사람의 주고받은 얘기로는 분명히 살인범
인이 틀림없었습니다. 저는 현상금에 대한 수배전단을 본뒤로 즉각 인근 파출소에 신고를
했습니
[페이지] 071
다. 그러나 파출소 순경이 현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두 사람이 행방을 감춘 뒤였습니다.
저는 이 기회에 수사기관에 묻고 싶습니다. 저는 틀림없이 신고를 했습니다. 물론 범인이
체포되지는 않았지만 이런 경우 현상금은 어떻게 되냐는 것입니다. 전 식구가 다섯입니다.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기 매우 궁핍스럽습니다. 이 사회가 제게 약속한 현상금을 유보시킨
다는 것은 솔직히 불괘하기 짝이 없습니다. 전 분명히 두 사람의 인상 착의를 상세하게 진
술하여 수사 당국에서 범인의 몽타지 사진까지 작성하였습니다. 전 시민으로 충실하게 신고
정신을 발휘하여 사회질서 안정에 협력을 한 것입니다. 범인이 체포되지 않았다고 해서 왜
현상금이 유보되야 하는것입니까? 당국이 이 시민을 우롱하는 책임을 누가 져야합니까? 돈
이 아니라 공동의 약속을 파괴한 것 입니다.
(암전되고 다시 밝아지면, 중년신사인 황은경의 아버지와 시장 바구니를 든 황은경 해변에
서 있다. 멀리서 교회당의 종소리가 들려온다.)
[중년] 바람이 차군.
[은경] 추워요.
[중년] 피곤해 보이구나.
[은경] 잠을 자지 못했어요.
[중년] 싸웠니?
[은경] 여늬 때보다 사이가 좋아요.---
[중년] 그런데?
[페이지] 072
[은경] 아빠가 얘기했잖아요. 부부란 숯덩이가 돼야 진국을 알 수 있다구요.
[중년] 숯덩이가 됐니?
[은경] 재가 됐어요.
[중년] 어른이 된 게로구나.
[은경] 아빠 나 시집 잘 갔다고 생각해.
[중년] 나한테 시집 온 네 엄마도 있어.
[은경] 엄마를 사랑해 아빠?
[중년] 네 남편은 너를 사랑하지 않던!
[은경] (조용히) 제가 더 그이를 사랑해요.
[중년] 그럼 됐다.
[은경] 아빠.
[중년] 할 얘기가 있니?
[은경] 수렁에 빠져서 목만 내놓고 있는 기분이야.
[중년] 무슨 얘기냐?
[은경] 아빠, 아빠는 나보다 삼십년을 더 사셨지만 이런 기분 알 수 없을거야.
[중년] 삼십년이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은경] 올가미는 목을 조여 오고 문득 문득 전신에 소름이 끼쳐. 이상해--- 감기 몸살의 초
기증상 같기도 하고. 혓바늘이 돋고 식은땀이 등골에 젖어와. 음식을 보면 헛구역질이 나고
모든 냄새가 역겨워 눈물이 솟도록 비위가 뒤틀려--- 잠자리에선 큰 올가미가 내목을 조여
오는 무서운 꿈에 시달리고, 한 낮에도 걸음을 걸을 때 헛다리를 짚어 몸의 중심을 잃어.
[중년] 신경쇠약 증세로구나. 도대체 무엇에 쫓기고 있니?
[페이지] 073
[은경] 아빠.
[중년] 내가 교회에 나가는 거 이상하니?
[은경] 아니, 하나도 어색하지 않아.
[중년] 사실은 네가 결혼하고부터 쭉 교회에 나갔다.
[은경] 편해 아빠? 기도하면 말야.
[중년] 모든게 눈처럼 밝고 환하게 보인다. 힘이 솟아오르고 쓸쓸하지 않아.
[은경] 용서를 받는 다는게 뭘까?
[중년] 죄를 지었니?
[은경] 숨기는 것 만큼 숨통이 막히고 몸이 뒤틀려.
[중년] 네 남편이니?
[은경] 사람을 죽였어요! (갈매기가 얕게 떠서 운다.)
[중년] 왜 죽였니?
[은경] 짐승이 된 것 같아요. 온몸에 벌레가 스물거리는 것 같아.
[중년] 왜 자수하거나 신고를 하지 않니?
[은경] 두려워요 무서워요.
[중년] 죄의 그림자는 끝까지 따라다닌다. 너희들 몸에서 악마의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
[은경] 아빠 그이가 죽으면 나도 죽을거예요.
[중년] 그것이 차라리 편할지도 모른다. 하루 세끼 밥 알맞게 소화시키면서 발을 편히 뻗고
잠잘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행복한건지 알겠니?
[은경] 그이를 사랑했어요. 짐승처럼 사랑했어요.
[페이지] 074
[중년] 그 댓가를 무섭게 받아야 할게다. 죄책감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은경] 붙잡히면 그 사람도 죽겠죠?
[중년] 너도 마찬가지야.
[은경] 아빠(몸을 떤다) 살고 싶어 아빠, 살고 싶어 아빠.
[중년] 이제부터 네 죄를 네가 감당해야 한다.
[은경] (다급하게) 멀리 혼자서 도망치면 안될까? 산 속에 숨어서 말야. 아니면 아빠하고
둘이서 어디 먼곳으로.
[중년] 붙잡히러 가야된다.
[은경] 싫어! 싫어! 손에 수갑을 차고 그리고 감옥 창살을 수십년 쳐다보며 살란말야? 아빠
나 살고싶어. 살고 싶다니까 아빠, 옛날처럼 그냥 아빠 곁에서 시중들며 살고싶다니까 그
래.
[중년] (단호히) 신고하거라!
[은경] 아빠도 날 버리는 거야?
[중년] 버리는게 아니라 떠날때가 온 것이다.
[은경] (체념 속에서 차분히) 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행 첫 버스를 타기 전날 밤, 새 고등
학교 교복을 엄마가 밤새도록 숯불 다리미로 다리셨어요. 흰 칼라에 빳빳하게 풀을 먹이시
며 엄마는 서울 가는 딸이 대견스러워 그 밤을 꼬박 새우셨어요. 아빠는 내 여행 가방에 곶
감과 찐계란을 몰래 넣어 주셨구요. 서울로 공부 떠나는 딸이 자랑스러워 엄마는 새벽에 일
어나 큰 길까지 나가는 비탈길에 쌓인 눈을 싸리비로 깨끗이 쓰셨어요. 산구비를 돌아서다
문득 돌아다 보니, 아빠는 울타리 너머로 길게 목을 빼시고 조그맣게 사라지는 날 보구 계
셨어요
[페이지] 075
--- (은경 말하는 동안 중년 사리지고 그 자리에 조명의 전환으로 종대가 있다)
[종대] 어디 갔다 오는거야 ?
[은경] 경찰서에 갔었어요.
[종대] 경찰서?
[은경] 왜 놀래요?
[종대] 신고를 했어?
[은경] 못 할 것 같아요?
[종대] 난 당신을 믿어.
[은경] 어떻게 믿어요.
[종대] 죽을 때까지 날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은경] 그렇게 확신하세요?
[종대] 가까이와.
[은경] 무서워요.
[종대] (시장 바구니의 보자기를 제치고 카빈총을 확인한다. 가만히 은경을 껴안는다.) 총
을 다시 당신 손으로 장롱 속에 넣어놔.
[은경] 여보.
[종대] 무서워하지마 내가 있잖아.
[은경] 하루 종일 길거리를 헤맸어요. 총이 그렇게 무서운 건지 몰랐어요. 왜? 왜 그렇게
무서운 멍에를 끌고 다니는 거예요.
[종대] 약속하지 다시 총을 쏘지 않을께.
[은경] (눈시울) 또 믿어야 되나요?
[페이지] 076
[종대] 그래 믿어봐
[은경] 벼랑이 보여요.
[종대] 우리 모두 같이 가면돼--- (암전)
[장] 11장
{수사관과 여순경 어둠 속에서 떠오른다)
[수사관] 우리는 여기서 잠깐 두 사람을 타계의 경계선 이쪽으로 불러야 될 순서가 된 것
같습니다. 죽은 사람의 혼백을 다시 이 무대에 불러낸다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닙니다. 옛
날 같으면 진넋이 굿이나 혼백을 청하는 곡을 했습니다만 과학이 발달한 지금에 와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전과자나 수감자의 기록카드를 컴퓨터에 집어서 불러 낼 수가 있습
니다. 미스 현 부탁해요.
(여순경 서류 뭉치에서 종이 한 장을 끄집어 내어 컴퓨터에 집어 넣는다. 전자음향 들려오
고 두 사람 실루엣으로 후면에 떠오른다)
[종대] 예고 없이 죽은 사람을 부르는 건 실례라고 생각하는데요.
[수사관] 이건 수사기록과 별개로 당신들의 진술을 관객에게 직접 들려주자는 의도에서 그
랬소.
[도석] 우리는 수의를 입은채 땅속에서 나왔습니다.
[종대] 죽은 자에게도 예절은 있는 법입니다. 무덤에서 나오는 것도 외출은 외출이니까요.
[수사관] 미안하오! 하지만 관객들은 이해할 거요.
[종대] 우리에게 연극을 원하는 겁니까?
[페이지] 077
[수사관] 불쾌하면 진술이라고 얘기합시다.
[도석] 우린 벌써 썩었어요. 악취가 날겁니다.
[수사관] 이미 당신들 서류에서도 악취가 나고 있었소
[종대] 우리의 얘기를 많은 사람에게 되세기게 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수사관] 내가 질문을 하기 위해서 당신들을 불렀소.
[종] 죽어서까지 복종을 해야 합니까.
[수사관] 혹시 연극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소.
[도석] 한가지 충고하겠소. 죽은 자에겐 과거의 문형으로 물어야 하는 겁니다.
[수사관] 실례했소. 연극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오. 살았을 때--- ?
[종대] 우리들 인생이 연극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수사관] 혹시 현재 진행형으로 답변하는게 아니오.
[종대] 무덤 속에서 세익스피어의 문귀를 암송했다고 생각하나요?
[수사관] 좋습니다. 그럼 묻겠소. 왜 사람을 죽였소?
[도석] (종대) 형, 산 사람이 죽은 사람 웃기고 있네
[종대] 죽은 사람이 산 사람 웃기지 않는게 다행이다.
[수사관] 연극에도 룰이 있소. 잡담을 금하도록 하시오.
[종대] 좋습니다. 지금은 몇 년인지 알고싶소. 무덤속에서는 달력이 없어서.
[수사관] 1980년대요.
[종대] 육년이 지났군.
[도석] 버스값이 지금은 얼마입니까?
[수사관] 일반 90원, 학생 70원이요.
[페이지] 078
[종대] 많이 올랐구만 우리 때는 일반 30원이었는데.
[수사관] 물가상승률에 시비할 건 없어 세계적인 불황이니까.
[종대] 1974년도의 하루를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수사관] 날짜를 지정하시오.
[종대] 너 생각나는 날짜 없니?
[도석] 이왕이면 형 팽팽했던 날을 골라잡읍시다.
[수사관] 죽어서까지 호형호제요.
[도석] 살았을 때 의리 죽었다고 삶아 먹나요.
[종대] 1974년도 8월 초하루를 부탁드립니다.
[수사관] 미스 현--- 부탁해요.
[여순경] (서류를 뒤져서 한 장을 뽑아낸다) 범인들 행적 오리무중 어디에 잠적했는지 알
수 없다. 그들은 분명히 새로운 범행을 준비하고 있었을 것이다. 오전에 치안본부에서 수사
회의가 있었다.
[종대] 미안합니다. 서류를 정정해 주십시요. 그날은 도석이의 생일날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범행을 준비한게 아니라 휴업을 했던 날이오.
[수사관] 휴업이라니 당신들 그것이 직업이라고 생각했었소.
[종대] 수입이 있으니 직업이 아니겠습니까?
[수사관] 객석에 나오는 웃음소리 듣고 있나요?
[도석] 듣기 싫으면 다시 관속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수사관] 좋습니다. 미스 현 수정하도록 해요.
[종대] 극장을 잘못 선택한 것 같소. 무대가 비좁고 옹졸해서 우리 얘기 하기가 거북스러운
데.
[수사관] 요새 큰 극장은 대관료가 비싸서 대관하기가 힘들어요. 더구나 연극제 참가작품은
이 극장에서 하게 돼 있소.
[페이지] 079
[종대] 좋습니다. 해변을 만들어 주십시오.
[수사관] 조명실 부탁합니다. 팔월의 해변을. (수사관 사라지고 무대는 광활한 해변으로 바
뀐다.)
[도석] 쉽게들 연극 해먹는구먼.
[종대] 쉬! 과거의 시작야. (한 개의 배구공이 굴러 들어온다. 종대 그것을 주어 들고 공이
굴러온 방향을 쳐다본다. 은경과 아영 해변 복장으로 들어와 길게 눕는다)
[도석] 형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게 아닐까.
[종대] 뭘.
[도석] 세상에 살아가는 게.
[종대] 세상은 공이다. 이렇게 둥글고 작은 공이야! 만져봐라 딴딴하고 탄력이 있다. 손에
잡을수 없이 튕겨져 나가고 있어.(던진다)
[도석] (받으며) 매끄럽군.
[종대] 쥐고 있을 동안만 그런거야.
[도석] 송곳으로 찌르고 싶군.
[종대] 그래도 네것은 될 수 없어.
[도석] 제길헐 복받쳐서 못살겠네.
[종대] 걷어차 임마. (도석 공을 한쪽으로 걷어찬다. 멀리 날아간다.)
[도석] 물에 빠졌어.
[종대] 세상은 임자가 없는 것이다. 움켜쥔 놈이 임자야. 그것도 쥐고 있는 동안만 영원히
내것인거 같지만, 누군가
[페이지] 080
에게 뺏기지 않으면, 패스를 해줘야 하는 거야.
[도석] 세상은 딴딴하고 탄력이 있는데 우리만 눈사람같우.
[종대] 움직여야 한다. 구르면 커지고 가만히 있으면 녹는다.
[도석] 인생이란게 말이우---
[종대] 단어 남발하지 마라! 인생이 비웃는다.
[도석] 맨 처음 시작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아영] 여보 모래 찜질 좀 시켜주지 않을래요. 등어리가 따가워요. (모래를 퍼서 아영의 엎
드린 등짝에 올려준다)
[도석] 왜 이렇게 된거지.
[아영] 햇볕에 등어리가 탓어요.
[도석] 이것아 우리 인생이말야.
[종대] 시궁창이야 한 발이 빠지니까 또 한 발이 들어가고(아영 인생은 나그네길 하는 유행
가를 부른다.)
[은경] 여보 해가 넘어가요 막차 놓치겠어요. (피크닉 가방을 챙긴다.)
[도석] 다섯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거든 그게 잼병의 시작이였어. 배가 고파 가게에서 도
나스를 하나 주어 먹었더니 그게 절도 죄래 어머니가 귓싸대기를 때리더군.
[은경] 당신 수영복 갈아 입어야죠. 머리에 모래가 하나 가득 이예요.
[종대] 앗따, 석양이라고 보기좋네.
[도석] 세상사는게 도대체 겁이 안나는건 뭔 까닭일까.
[종대] 옛날에 피아노 소리가 나는 집 담밑에서 새우잠을 잔 일이 있었어. 따뜻한 이층 방
에서 들려오는 피아노 소
[페이지] 081
리가 미치게 좋게 들리더라--- 돈벌면 피아노 사야겠다고 그때부터 생각을 했다.
[아영] 여보 담배 한 대 붙여줄래요. 손에 모래 묻어서 그래요. (도석 담뱃불을 붙여준다)
[종대] 이상해 왜 내 인생이 담 밖에서 들은 피아노 소리에서부터 반전되서 시작됐는지.
[도석] 그래도 맞고 시작한거 보단 훨씬 근사하우.
[아영] 예술적이다 그치? (까르르 웃는다)
[은경] 애들 우유먹을 시간이예요. 당신 모래털고 일어나세요. 껄끄럽지 않아요?
[종대] 젠장 (벌렁 눕는다)
[도석] 염병헐 (벌렁 눕는다)
[종대] 뭐가 잘못된 것일까. 타고난 성질은 거지같다 치고 뭐 묻고 하소연 할 곳이 있어야
지. 우리가 혹시 정신이 돈게 아닐까 그럴리는 없지
[아영] 야 하늘이 피색이다. 완전히 핏빛일세 그치?
[도석] (눈물이 핑) 세계 수십억 중에 고작 우린 하난데 되게 벅차고 쓰리게 살아가네요 형
---
[종대] 걸레라고 치면 깨끗한 물에 빨아서라도 쓸텐데(멀리서 종소리가 들려온다)
[도석] 형 잡히면 사형이겠지--- ? 줄로 모가지 땡기면 되게 아플꺼야.
[종대] 세 번 매서 세 번 전부 살아나면 살려주는 법도 있기는 하다더라.
[도석] 공갈이야 형.
[아영] (벌떡 일어나서) 여보 눈에 모래 들어갔어--- (웃음) 앞
[페이지] 082
이 안보여 눈좀 불어줘(도석 아영의 눈알을 까집고 입으로 불어준다. 은경과 종대 가만히
마주보고 있다.)
[장] 12장
(조용한 미사음악이 흐르며 조명이 들어온다. 성모상 앞에 황은경 앉아있고 신부가 한 쪽에
서 있다.)
[은경] 죄를 지었습니다.
[신부] 속죄 하십시오
[은경] 어떻게 하는 길이 속죄하는 길일까요?
[신부] 하늘에 죄를 고백하고 영원한 삶을 택하십시오.
[은경] 너무나 깊은 수렁 속에 빠져서 내가 뻗치는 속죄의 손길이 하늘에 닿을 것 같지 않
습니다. 신부님
[심부] 천주님의 팔은 길고 강인합니다. 그분은 언제나 우리에게 수천개의 구원의 팔을 내
밀고있으니 하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하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은혜의 청각을 갖기 위
해서 기도하고 참회하십시오. 하늘의 언어는 우리가 사용하는 인간 세상의 언어가 아니라
영원한 우주의 질서며, 태초부터 있었던 변치않는 하늘의 음성입니다.
[은경] 기도 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기도에 서툴고 참회에 어둡습니다. 신부
님.
[신부] 천주님이 계신 것을 믿습니까?
[은경] 믿습니다.
[신부] 그럼 기도는 시작된 것입니다. 천주님은 시간의 시작과 끝이며 공간의 전체입니다.
천주님은 인간의 모습으로
[페이지] 083
파악하지 마십시오. 나와 같은 모습이 아닌 영원의 옷을 입은 우주의 관리자이십니다. 우리
모두 그로부터 나왔고, 다시 그분에게 돌아가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은경] 왜 사람에게 죄지음의 자유를 허락하셨나요?
[신부] 그것은 자유가 아니라 멍에입니다. 아담과 이브에게 약속어김에 대한 형벌로 주신
무거운 멍에입니다.
[은경]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요. 신부님.
[신부] 하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성령의 불씨를 받아야 합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성령의
불씨를 알몸으로 영접하는 자에게 구원이옵니다. 거듭나기를 원하십니까?
[은경]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바라옵니다.
[신부] 속죄하셨습니까?
[은경] 너무나 무거운 속죄의 첫마디가 열리지 않습니다.
[신부] 아직 죄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은경] 형벌이 두렵습니다.
[신부] 왜 자꾸 인간세계에 속하고자 하십니까? 구원받고자 하는 사람은 천주님의 질서에
속해야 하는 것입니다.
[은경] 무섭습니다. 신부님.
[심부] 천주님을 두려워 마십시오. 인간 세계의 형벌은 아주 가벼운 가시 찔림에 불과합니
다. 무거운 짐진자들아 모두 네게 오너라! 내가 너의 멍에를 벗겨주리니--- (미사음악 커지
면서 성모상만 남고 두 사람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성모상 사라지고 조명 다시 밝아지면
이종대와 문도석 수건으로 허리를 감고 알몸의 상체로 김이 무럭무럭
[페이지] 084
피어오르는 지옥의 열기 같은 사우나 한증막 속에 나란히 땀을 흘리며 앉아 있다.)
[도석] 왜 불렀우---
[종대] 기다리지 않았냐?
[도석] (씩 웃으며) 은근히 기다려 집디다.
[종대] 나 마누라 하고 약속했다.
[도석] 무슨 약속이요?
[종대] 딱 한 번하고 손털기로---
[도석] 그게 쉽게 되겠우.
[종대] 이번엔 정말이다. 나도 이젠 애가 둘이다.
[도석] 봐 둔 데는 있우?
[종대] 생각있냐?
[도석] 나도 궁하던 참이우---
[종대] 크게 한번해서 마누라 양장점 차려 주고 집에서 애볼 생각이다.
[도석] 잘 생각하셨우---
[종대] 끝이 중요한거다.
[도석] 바둑을 둬두 끝내기에서 승부거는 놈이우---
[종대] 자식--- (도석의 등짝을 애정있게 딱 대린다. 그 소리에 암전되고 어둠 속에서 총소
리가 두방 들려온다. 수사관이 어둠 속에서 떠오른다)
[수사관] 그들의 마지막 네번째 범행, 서울에서 택시를 전세 낸 그들은 남원에서 운전사를
살해하고 택시를 탈취하나 검문에 쫓기기 시작하게 됩니다. 1974년 10월, 그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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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행각의 마지막 실험이 수포로 돌아가자 그들 스스로 막다른 골목에 와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이렌과 기동 순찰대의 경적소리가 멀리서 들려오고 서치 라이트가 갈대숲을 가
로질러 휘젓고 다닌다. 이종대와 문도석 기어서 숲을 헤치고 앞으로 나온다. 한쪽에서 정답
게 두 남녀가 칸델라를 켜고 밤낚시를 하고 있다. 낚시대 객석 쪽 으로 뻗쳐 있다. 중천에
떠 있는 달.)
[여자] 달---
[남자] 돈---
[여자] 사랑---
[남자] 낚시--- (두사람 박수치며 크게 웃는다.
[여자] 우리는 뭐예요?
[남자] 미완성 아메바---
[여자] 아냐 미생물---
[남자] 껍질 속의 강낭콩
[여자] 쉰 두부
[남자] 떨어지는 참새---
[여자] 고장난 기관차---
[남자] 할머니 젖꼭지
[여자] 천사의 배꼽
[남자] 우리가 할 일은 뭐지?
[여자] 기관차의 피스톤
[남자] 창경원의 회전목마.
[페이지] 086
[여자] 연탄 위에 연탄--- 그 위에 냄비.
[남자] 빈 냄비---
[여자] 밤은 낮의 뒷페이지.
[남자] 쉿--- 물렸어---
[여자] 고기가--- (남녀 가만히 낚시대를 겨냥하여 잡는다. 이종대와 문도석 두 남녀를 가
만히 쳐다본다.)
[수사관] 마자막날 밤의 심경을 기록한 이종대의 메모지가 후에 시체에서 나왔는데, 이것은
강력바에 A-2673 기록 서류에 별첨으로 붙어있습니다.
[여순경] (서류를 읽는다) 우리는 마지막 종착역에 도착한걸 느낄 수 있었다. 우리는 판교
에 있는 낚시터에서 하룻밤을 지내면서 처음으로 무섭게 외로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도석이
는 새벽까지 갈대숲에서 울었다. 밤낚시꾼 들의 칸델라 불빛이 우리가 숨어있는 곳까지 비
쳐왔다. 나는 온 몸에 굵은 소름이 돋아나는걸 보았다. 다 온 것이다. 더 할 일도 없고 더
이상 쫓겨갈 곳도 없었다. 벼랑에 다다른 것이다. 학예회 때 짤막하게 서툰 유희를 끝내고
들어오는 여학생 같이 허전하고 부끄러웠다. 내 나이 32세 도석이 나이 30세--- 짧고도 길
었던 운나빴던 두 녀석의 유희가 끝나게 된 것이다. (수사관과 여순경. 암전)
[도석] 다왔우 형---
[종대] 고생 많았다.
[페이지] 087
[도석] 의리 잊지 않겠우.
[종대] 여편네 만나보고 찌그러져라. 불쌍한 것들이다.
[도석] (주머니에서 돈 꺼내며) 남은 건 이것 뿐이우.
[종대] 나도 이젠 돈 필요없어.
[도식] 들어갈 때 형수님한테 과일이라도 사가지고 들어가우 기다리고 있을텐데---
[종대] 너는?
[도석] 이제 돈 없이도 살게 됐우--- (한숨) 이렇게 편한걸(손을 내밀며) 잘가우 형---
[종대] 자식 울긴--- (손을 잡으며) 억울할 거 하나도 없다. 빚 갚을 시간이 된거야 알겠
냐.
[장] 13장
(수사관 떠오른다.)
[수사관] 그들이 흩어져서 각각 자기집으로 돌아갈 무렵 새벽 네시 나는 한통의 전화를 받
았습니다. 이 전화가 결국 나의 목아지를 지탱시켜주는 결정적 보너스 역할을 한 것입니다.
(수화기를 든다.) 여보세요. (반대편에서 조명이 들어오고 황은경 수화기를 들고 있다.)
[은경] 신고 하겠어요---
[수사관] 신고?
[은경] 제 남편이 사람을 죽인 살인강도 이종대예요. 위치를 말씀 드리겠습니다. 인천시 부
평 서부동 103번지예요. 체포 하세요--- (수화기를 놓는다. 수사관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황은경 수화기를 잠시 쳐다보다가 뒤로 돌아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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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밝아지고 두 아이가 이불을 덥고 자고 있다. 아이들의 이불깃을 여며준다. 이종대가
땀방울에 얼룩진 모습으로 뛰어 들어온다. 두사람 가만히 오래 마주보고 있다.)
[은경] (가만히 종대에게 다가가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처음 시외버스에서 나한테
말을 걸 때 그 모습이군요.
[종대] 뭐라고 그랬지.
[은경] 긴장 될 때 오히려 용기가 난다구요. (멀리서부터 가까워지는 사이렌 소리) 자수하
세요---
[종대] 뭐라고?
[은경] 애들을 위해서예요.
[종대] (돌변) 난 죽지 않아 내가 왜 죽어(크게) 왜 죽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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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서치라이트 방안으로 번쩍이며 비춰 들어온다.)
[은경] 나가세요.
[종대] 당신도 내가 죄인이라고 생각해?
[은경] 사람을 죽였어요---
[종대] (변명) 그게 왜 나혼자의 잘못이야.
[은경] (달래듯) 그럼 죽을 각오도 없이 그런 엄청난 짓을 했어요.
[종대] 날 비웃지마 이 세상은 날 받아주지 않았어.
[은경] 그럼 애들과 제가 나가겠어요.
[종대] 부탁이야 당신 내 곁에 그대로 있어줘---
[은경] 그럼 애들만이라도 밖으로 내보내게 해주세요.
[종대] 그 아이들을 강도의 자식이란 모욕을 받으며 살아가게 하겠다는 거야?
[스피커] (소리) 이종대에게 알린다. 지금 즉시 무기를 버리고 나오기 바란다. 경찰이 이미
집을 포위하고 있다. 다시 알린다. 이종대는 무기를 버리고 즉시 나오라.
[종대] (고함) 난 자수하지 않겠어(불을 끈다.) (어둠으로 뒤덥힌 실내)
[은경] 불을 켜세요.
[종대] 총에 맞고 싶어서 그래.
[은경] 어떻게 하시겠다는 거예요?
[종대] 기다리는 거야---
[은경] 뭘 기다려요.
[종대] 지쳐서 물러 설 때까지.
[은경] 살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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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대] 살아야겠어.
[스피커] (소리) 십분내에 나오지 않으면 습격하겠다.
[종대] 술 있어?
[은경] 책상 위에 있어요. (종대 책상 위의 양주를 병째로 마신다. 그리고 전축을 열고 묵
은 판을 올려 놓는다. 옛날 노래가 흘러나온다)
[종대] 마지막 잔치야---
[은경] (쓴미소) 태양이는 꼭 유치원에 보내리라 생각했어요. 그게 꿈으로 끝나는군요---
[종대] (차분히) 안주머니에 유서를 써놨어 우리가 죽으면 함께 태워서 바다에 뿌려 달라고
---
[은경] 우리라뇨.
[종대] (당연히) 당신과 애들 그리고 나 말야.
[은경] 죽일 생각이세요.
[종대] 살아남겠어?
[은경]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어요.
[종대] 못난 애비를 둔 죄.
[은경] 이 애들이 당신 소유라고 생각하는건 잘못이예요.
[종대] 내 자식이야.
[은경] 천주님이 하실 일이예요.
[스피커] (소리) 시간이 지났다. 접근 하겠다. 애들은 밖으로 내보내기 바란다.
[종대] 누구든지 접근하면 쏴 죽이겠어(창밖으로 두방을 쏜다)
[은경] (체념하듯 아이들 곁으로 가서 앉는다) 어느날 아버지가 말씀 하셨어요. 은경인 커
서 뭐가 되겠냐구요---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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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상여를 타고 시집을 가겠다고 말해 식구들이 허리를 잡고 웃었어요. 아버지가 묻더군요.
왜 예쁜 꽃가마를 두고 상여를 타고 시집을 가니(미소) 전 상여가 타고 싶었어요. 언젠가
고향 장마당에서 예쁜 꽃상여가 만장을 펄럭이며 길게 시골길을 가로질러 가는 것을--- 그
때까지 그렇게 예쁜 꽃상여를 본적이 없었어요. 누군가 얘기했어요. 꽃상여를 탄 사람은 구
름위를 날아 하늘로 올라 간다구요. 국민학교 삼학년 때 일이었어요. (이종대 탄창을 다시
확인하고 가만히 방아쇠에 손을 댄다) 언제나 사는데 여한이 있다고 생각지 않았어요. 고등
학교를 졸업하고 양재 기술을 배우러 인천에서 노량진까지 통학할 때 시외버스 안에서 당신
을 처음 만났어요--- 당신은 제게 껌을 권했고, 나는 답례로 당신을 쳐다보며 웃었어요. 당
신도 따라 웃었고 이내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간청을 했어요. 난 수줍고 뛰는 가슴으로 핸
드백에서 볼펜과 종이를 꺼내 전화번호를 적어 주었고, 당신은 유리로 만든 기린을 선물로
주었어요. 이종대 천천히 총구를 황은경의 가슴에 겨냥한다. 황은경 웃으며 태연히) 그것이
나의 짧고 행복한 결혼의 시작이었어요---
[종대] (목메이며) 여보--- 잘가오.
[은경] (미소) 여보 사랑해요--- (무대 어두워지고 네 식구의 다정한 가족 사진이 호리존트
에 영사된다. 어둠속에서 들려오는 총성의 연속음)
[수사관] (어둠속에서 떠오른다) 이렇게하여 이종대 가족은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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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었고 특종기사가 실린 조간은 날개돋친 듯 팔렸습니다. 그날의 석간신문은 모두가 이 사
건을 사설로서 다루어 심각한 사회문제로서의 관심을 표명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나의 관심
을 끈 것은 다음과 같은 사설의 대목이었습니다.
[여순경] (서류를 보며) 이 사건은 사회윤리와 개인윤리가 팽팽하게 서는 곳에서 생긴 비극
이다. 개인의 윤리가 사회윤리에 미치지 못하는 것과 같이 사회윤리 또한 개인윤리를 통제
하지 못할 심한 모순 속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장이 아닌 변명의 시대에 살고있
는 것이다. 개인윤리의 타락은 결국 사회윤리의 타락에서 불가분의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이
다. 사회정의가 진실성을 가지고 팽창할 때 만이 개인 윤리는 사회 정의를 추종하게 될 것
이다.
[수사관] 이제 정리되지 않은 한 인물이 여러분에게 고별 인사를 드립니다.(불이 밝아지면
유모차 안에서 아영이 애기를 꺼내 안고 익살스럽게 얼르기 시작한다) 루루루 럭구--- 루루
루 럭구 아가야 내 얼굴이 보이니--- 루루루 럭구 잼잼잼 도리 도리 도리 (문도석 조용히
신문지 마른 것을 껴안고 누워있다) 아가야 아빠가 잠드셨다, 루루루 럭구--- 여보 애기 아
랫니가 두 개 나왔어요. 보실래요. 아가야 아빠한테 한 번 웃어 보렴 어서--- 루루루 럭구
--- (문도식이 전혀 반응이 없지 유모차를 끌고 한 쪽 구석으로 간다. 조명 문도석에게 압
축되어 좁혀진다. 한 쪽에서 이종대가 나온다)
[종대] 뭐하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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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석] 생각하고 있는 중이요 형---
[종대] 뭘 망설이고 있니--- 시간이 넘었는데.
[도석] 시간?
[종대] 난 벌써 죽었다. 네 발을 쏘았어--- 이마에 대고---
[도석] 손이 떨려 형---
[종대]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이 어려운거다. 갑자기 뒤로 일센치만 움직이면 되는 거야.
[도석] 어때 형 마지막 순간 총소리가 들립디까?
[종대] 아무 소리도 안들려--- 아프지도 않고 탁하고 설날에 화약딱총이 불발 되는 것 같은
음향 뿐이고, 그 뒤는 아득하게 어두워지는 것 분이야---
[도석] 살 수 없을까 형--- 그래두 살아서 겁두나구--- 서로 얼굴 마주보고 욕도 하던 때가
아쉬워지네---
[종대] 미련 가질수록 손가락이 겁먹고 맥 빠진다. 냅다 땡겨버려---
[도석] 죽고 나니까 어때 형--- 편해---
[종대] 내 여편네 한테 물어봐(어둠 한쪽에서 황은경이 나타난다.)
[도석] 어때요 형수--- 죽고나니까 기분이
[은경] (웃음)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어요--- 긴 어둠의 복도에서 꿈없는 잠을 자는 것 같
애요---
[도석] 그게 영원히 산다는 겁니까?
[은경] 모르겠어요 죽어서 느껴 보세요---
[도석] 형--- 따라가우--- (신문 뭉치 한족 끝을 목에 댄다)
[종대] 그래 따라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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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석] (주위를 둘러보고) 마지막 세상 그림이 너무 초라하네
[종대] 가자 도석아---
[도석] (크게) 형--- 우습네 젠장---
(요란한 총성 문도석이 앉고 있던 신문지 뭉치 끝에서 불꽃이 튕긴다. 아영이 소리지르는데
서 모두가 스톱모션 그리고 각자의 조명을 받는다. 문도식 고개를 떨구고 넘어졌다. 가만히
엉덩이를 털며 일어선다.)
[도석] 이렇게해서 우리는 모두 죽었습니다.---
[종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이 우리는 모두 맨몸으로 강력바에 A-2673에 영원히 잠들어
버렸으며,
[은경] 우리가 살았던 짧은 시간의 토막은 짤려진 쏘세이지 토막처럼 이미 우리의 식탁에서
요리돼서 없어졌습니다.
[도석] 형--- 죽고 나니까 더 추위를 타는 것 같애---
[수사관] 여행이 길텐데 감기 들지 않게 외투를 걸치시지요.(세사람 외투를 걸친다)
[여순경] (서류가 든 트레일러를 끌고 무대를 가로질러 간다.) 자, 모두들 나를 따라 오시
겠습니까---
[수사관] 미스 현을 따라가십시오. (손으로 가리키고 퇴장한다. 세사람 오랫동안 빈 무대에
서있다. 어디선가 경찰 패트롤 카 경적소리가 들려온다)
[종대] 날씨가 흐린게 곧 눈이 올 것 같군---
[은경] 내복 든든히 입으실걸 그랬어요.
[종대] 이대로가 좋아(아영 어둠 속에서 유모차를 끌고 튀어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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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 나는 어떻게 되는 거예요.
[도석] (난처해서) 형---
[종대] 놔줘---
(세 사람 강력바에 A-2673의 서류를 따라서 나간다. 아영 오래도록 혼자서 무대 위에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