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꿈
안 영 희
고즈넉이 어두워지는
겨울의 창을 바라보면
생각난다
만종역萬鐘驛 근처의 허름한 밥집
저 혼자 끓고 있는 찌게냄비와
그 탁자 사이 주고 문득 사내가 하던 말
100일만 주어진다면, 우리가 딱 그만큼만 살고 갈 시한부라면
널 데리고 아프리카로 가겠어,
거길 가면 아직도 원시로 살고있는 그런 데가 있거든
그 기원 전 마을로 가서 우리가 산다면,
우린 말야 무려 2천 년하고도 100일을 더 살 수 있을 게 아냐?
둘이서
소리없이 웃는 여자,
병색의 눈밑을 타고 내리던
눈물
수증기 흐르는 유리창을 보면
생각난다,
그 슬픈 꿈
겨울에 꾸는 꿈은 어떠할까. 수 십 년을 살고 나서, 혹은 봄, 여름, 가을을 치열하게, 또는 허망하게 살고 나서, 지나간 삶을 회억하는 순간에 우리는 과연 아름다웠다,라고 말할까, 쓰라렸다, 라고 할까.
비록 우리가 인지 못하는 생물체의 상태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한 인간이 되려는 무한경쟁에서 승리의 결과로, 나, 라는 개성으로 태어난 게 과학적인 사실이라 해도, 혹독한 생존게임에 내던져 졌음을 점차 인식하게 됨으로써, 이 지구에서의 삶을 다행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은 쉽지가 않다.
어두워지는 동면의 시간에 "겨울의 창"을 내다보며 화자는 슬퍼서 아름다운, 아름다워서 슬픈 추억을 "슬픈 꿈"이라고 단정한다. 시는 길지 않으나, 긴 서사를 내장하고 있는 이 시에는, 한 여자가 병을 앓고 있다. 어쩌면 절망적인 마음상태에 있을 때, 한 사내가 그 곁에 있어줌으로써 많은 위로가 되는 상황. 이름만 들어도 만 개의 종이 음악처럼 연주될 듯한 "만종역 근처의 허름한 밥 집"이라는 배경설정(강릉선에 실재함)은 얼마나 눈물 나게 낭만적인 장소인지! 더욱이 지글지글 끓는 찌게냄비는 저절로 추운 마음을 덥히고, "백 일만 주어진다면, 우리가 딱 그만큼만 살고 갈 시한부라면 널 데리고 아프리카로 가겠어"라는 그 말은 얼마나 깊은 종소리인지!
" 아프리카", 아프리카는 과연 어떤 시간/공간인가. 우리는 언제나 지금이 아닌 어떤 시간, 여기가 아닌 어떤 공간을 꿈꾼다. "아프리카"는 그런 시공간에 대한 대명사일 뿐, 샹그릴라, 무릉도원, "원시", 고향 등등이 모두 우리가 처한 불만족스럽거나 자유롭지 못한 현재로 부터 훨훨 날아가서 닿고 싶은 온전함, 충만함의 다른 이름이다.
고도로 진화한 21세기식 법률, 또 사회적인 인간관계 망을 찢고 "기원 전 마을"로 가서, 아무런 제약 없이 오직 사랑만으로 살아보겠다는 시 속 "사내"의 염원은 실행 불가능을 넘어서 간절함으로 울려온다.
"2천 년하고도 100일"이라는 시간개념 역시 상징적이다. 100이든 100년이든 온전함을 누릴 수만 있다면 다르지 않기 때문. 끝나지 않는 생명, 영원한 사랑 등, 우리가 늘 소원하는 것은 모두 짧으므로 슬프고, 슬프므로 아름답고, 아름다우므로 허망하다.
겨울이다. 곤고한 시절과 생동의 날들은 범벅이 되어서 저 창밖에 있고, 이제 화자는 겨울 창 안에서 혼자 뜨거운 차 한 잔과 함께 옛사랑을 음미하고 있다고 상상해본다. "수증기 흐르는 유리창"은 "병색"도, 한때의 붉은 꽃잎사랑도, 닿을 수 없는 먼 곳으로부터 투명한 경계를 이루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붉은 꽃잎은 시시때때로 유리창 밖에 찾아와서 비로소 잔잔해진 심장을 두드릴 것이다. 태풍처럼, 눈발처럼, 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