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처럼 연예인이 대세인 적은 일찍이 없었던 듯하다. 연예인 하면 7-80년대까지도 ‘딴따라’ 혹은 ‘천한 직업’으로 치부되곤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수억대를 벌어들이는 것이 엔터테인먼트 사업이고 K-pop의 영향과 더불어 가장 유망한 문화산업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러한 역전 현상이 조선 후기에도 일어났다. 18세기 조선사회는 ‘벽(癖)’에 빠져 있었다. 즉 무언가에 미칠 정도로 빠져있는 매니아를 선호했고 지식인들은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그러한 인물을 찾아 기록에 남겼다.
기생은 다재다능한 엔터테이너
조선시대 기생은 천민계급이었지만 양반 사대부들을 상대하다 보니 여성이면서도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을 수 있는 혜택(?)을 누렸다. 한문을 알아야 했고 서예, 그림, 거문고, 가야금, 춤 등 다양한 분야의 기예를 익혀야 했다. 그야말로 다재다능한 엔터테이너였던 것이다. 원래 기생의 임무는 향연에서 춤추고 노래하는 여악(女樂)을 담당하는 것이었기에, 기생들에겐 춤과 노래, 악기연주가 기본이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알려진 기생은 한시를 잘 썼던 황진이나 이매창, 김부용 정도가 전부다. 정작 춤이나 음악으로 알려진 기생은 거의 없다. 춤과 음악은 기록하기 어렵다는 한계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녀들에 관한 글마저도 거의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에 소개하는 운심은 뛰어난 춤꾼으로서, 몇몇 문인들의 글 속에서 발견되었기에 그 존재가 알려졌다.
어느 시대건 유행하는 문화 트렌드가 있기 마련이듯, 조선후기는 기생들의 춤 중에서도 특히 검무가 유행했다. 신윤복의 그림 <쌍검대무>나 김홍도의 <평양감사 향연도> 등에는 검무를 추는 기생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여러 문인들의 문집에서도 검무를 보고 기록한 글들이 자주 발견된다.
▲김홍도 전, <평양감사향연도> 중 <부벽루연회도> 부분
검무는 조선후기 어떤 잔치나 행사에도 빠지지 않는 필수 종목일 정도로 인기가 있었다.
요즘의 검무에서 사용하는 칼은 끝이 약간 뭉뚝하고 목이 돌아가는 칼이지만 조선시대 유행했던 검무는 끝이 뾰족한 진짜 검이었다. 보기에도 살벌한 진검을 양손에 들고 몸이 날아갈 듯 휘돌아 추면, 보는 사람의 간담이 서늘해졌을 것이다. 지금도 게임이나 영화에서 ‘여전사’ 혹은 ‘여성 무사’라고 하면 호기심이 발동하듯, 여자가 추는 검무는 많은 사람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기생 검무의 원조, 밀양의 운심
1712년 김창업이 중국 연행을 따라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평안도에 머물면서 검무를 구경하였는데, 16세의 가학, 13세의 초옥이라는 두 명의 기생이 쌍검무를 추었다고 한다.
“검무는 우리가 어렸을 적에는 별로 보지 못하던 춤인데, 수십년 사이에 점차 유행하더니 현재는 팔도에 두루 퍼져 있다. 기생이 있는 고을에서는 모두 춤 도구를 갖추어 놓고 풍악을 울릴 때는 반드시 먼저 검무를 춘다. 이렇듯 어린아이도 이런 춤을 출 줄 아니 세상의 변고가 아닐 수 없다.”
- 김창업, <노가재연행일기> 중에서
검무는 원래 신라시대 남자 무사들이 추던 춤으로 조선에 와서도 경주 지방을 중심으로 검객들의 무예의 하나로 전승되어 왔다. 그런데 조선후기 들어 갑자기 기생들의 검무로 발전하게 되었으니, 그 배경에는 밀양의 기생 ‘운심’이 있었다.
밀양에서 그녀는 검무를 잘 추기로 유명했다. 국가적인 큰 행사가 있을 때 전국에서 재주가 뛰어난 기생들을 뽑아 한양으로 불러 들였는데, 18세기 초 운심도 한양에 와서 검무를 선보였다. 당시 20세였던 그녀는 그 뒤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자신의 재주를 펼치기에 밀양은 너무 좁았던 것이다.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그녀의 검무는 세상에 알려져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한양의 권세가와 문인, 풍류객들이 그녀의 검무를 보기 위해 찾아왔고 많은 재물을 내놓았다. 운심의 집 청루에는 귀족 자제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연아(운심의 다른 이름)가 스물에 장안에 들어가
가을 연꽃처럼 춤을 추자 일만개의 눈이 서늘했지
들으니 청루에는 말들이 몰려들어
젊은 귀족 자제들 쉴새가 없다지.
- 밀양 선비 신국빈의 <은천교방죽지사> 중에서
같은 고향 출신 신국빈은 서울에서 유명해진 운심을 자랑삼아 시로 읊었다. 양반으로서 천한 기생을 칭송하는 데에 대한 부끄러움은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대가가 되어있는 운심에 대한 존경과 자부심이 묻어난다.
호서 상인의 모시 옷감은 눈처럼 새하얗고
송도 객주의 운라 비단은 값이 그 얼마인가?
술에 취해 화대로 주어도 아깝지 않은 건
운심의 검무와 옥랑의 거문고 뿐이라네.
- 신국빈, <은천교방죽지사> 중에서
많은 제자를 양성
박제가의 <검무기>에는 두 명의 기생이 군복을 입고 검무를 추는 모습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기생 둘이 검무를 춘다. 융복을 입고 전립을 쓰고 잠깐 절하고서 빙 돌아 마주선 채 천천히 일어난다. (중략) 무릇 치는 동작, 던지는 동작, 나아가는 동작, 물러나는 동작, 위치를 바꾸어 서는 동작, 스치는 동작, 떨어지는 동작, 빠른 동작, 느린 동작이 다 음악의 장단에 따라 합치됨으로서 멋을 자아내었다. 이윽고 쟁그렁 소리가 나더니 검을 던지고 넙죽 절하였다. 춤이 끝난 것이다. 온 좌석이 텅 빈 것 같이 고요하여 말이 없었다.”
박진감 넘치는 빠른 음악과 함께 검무를 추던 동작이 갑자기 멈추면 관중석에는 숨이 멎은 것처럼 정적이 흐른다. 무대에 오른 운심은 그렇게 뜸을 들이듯, 공연을 이어갔다. 관객의 감정을 들었다 놓았다 할 정도로 기교가 넘쳤다. 그로부터 검무는 점차 전국적으로 퍼져갔고 운심은 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박제가가 묘향산 절방에서 본 검무도 운심의 제자가 춘 것이었다.
운심이 말년에 여행하면서 평안도 관서지방에 오래 머물러 그쪽에 특히 제자들이 많았다고 한다. 기생들의 검무가 언제, 누구에 의해 창시되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전국적인 확산에는 분명 운심의 역할이 컸다. 지금 그녀의 춤사위를 볼 수는 없지만 신윤복의 그림으로나마 그 모습을 상상해본다.
▲신윤복, <쌍검대무>
박지원의 소설에도 등장
연암 박지원의 소설, <광문자전>에서도 운심이 등장한다. 광문은 의리있는 거지 두목이자 협객이다. 옷은 남루하고 볼품없지만 사람들은 그를 믿고 좋아했다. 기생 운심은 아무 때나 쉽게 춤을 추지 않기로 소문이 나 있었다.
어느날 풍류객들이 운심의 집에 찾아와 춤을 청했지만 운심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때마침 광문이 나타나 콧노래를 부르며 장단을 맞추자 운심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반전이었다. 그때부터 관리들도 광문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고 한다. 박지원은 양반사회를 풍자하기 위해 실존인물인 광문을 주인공으로 하면서 마지막에 운심을 등장시켰다. 운심은 그만큼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사회적 비주류에 속해있던 거지와 기생의 연대의식도 엿볼 수 있다.
나이 들어 그녀는 전국 팔도를 유람하며 세월을 보냈다. 영변 약산동대에 이르자,
“약산은 천하의 명승지요, 운심은 천하의 명기이다. 인생이란 모름지기 한번 죽는 법, 이런 곳에서 죽는다면 더 없이 만족이다”하며 벼랑에 몸을 던지려 했다. 옆에 있던 사람들이 운심을 붙잡았기에 목숨을 건졌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늙었어도 기개가 넘친다.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성대중의 <청성잡기>에 실려 있다. 젊은 시절 그녀는 당대 최고의 명필가인 백하 윤순(1680~1741)의 사랑을 받았고 그녀의 춤은 백하로 하여금 초서의 비결을 깨닫게 하는 영감을 주었다고 한다.
▲백하 윤순의 초서 <흥진첩>
밀양 검무보존회 회원들이 매년 제사 올려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녀의 무덤이 오늘날 밀양시 상동면 안인리 신안마을에 남아있다. 밀양 검무보존회 회원들이 매년 제사를 올린다고 한다.
밀양검무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가, 2005년에서야 복원되었다. 밀양시청 홈페이지 ‘밀양의 인물’코너에도 운심은 빠져있다. 조선후기를 검무 열풍에 빠져들게 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던 운심의 흔적이 이 정도 밖에 안된다니 안타까운 현실이다.
-최선경
첫댓글 밀양검무는 2005년에 복원된게 아니고 1987년에 복원 되어 1988년 부터 공연 하기 시작했고
1992년에 국립국악원 주최 제139회 무형문화재 정기공연에서 서울 무대에 올렸으며
2005년 부터 정기공연을 시작 하였습니다.
저는 밀양검무보존회장 김은희 입니다.
밀양검무에 관심을 가져 주셔서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