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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리와 말씀 원고
‘기도’와 ‘봉헌’, 신앙인가, 주술인가?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을 통해 바라본 원초적 종교 행위의 사회적 본질
송용민 신부
(인천가톨릭대학교)
| 1. 주제 설정 2. 주술의 재도약, 위기인가, 도전인가? 2.1. 한국 사회의 주술의 시장화 2.2. 주술과 신앙의 차이, 무엇이 같고 다른가? 3. 신과 인간 사이의 교환 체계로서 기도와 기복의 사회적 계약 관계 3.1.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을 통해 바라본 총체적 사회현실로서 증여의 사회학적 해석 3.2. 원시적 증여 행위 안에서 발견되는 의무적 계약과 연대 의식 4. 맺는 말: 주술적 신앙인가? 신앙적 주술인가? |
주제 설정
신에게 기도하는 사람과 신에게 복을 빌며 예물을 바치는 사람. 이 둘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기도’(祈禱)는 순수한 신앙 행위이고 예물을 봉헌하는 행위는 ‘기복’(祈福)을 바라는 주술 행위인가? 신앙과 주술은 어떤 차이가 있으며 그 본질은 무엇인가?
종교학적으로 보면 주술과 신앙은 둘 다 ‘초월적인 힘’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다루지만, 접근 방식과 목표는 다르다. 신앙은 초월자 신과의 관계를 중심에 두고, 겸손과 순종, 은총을 강조하지만, 주술은 인간이 신적 혹은 초자연적 힘을 통제하거나 조작하려는 행위로 규정된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긴장 관계에 있으면서도, 역사적으로는 혼합되거나 경계가 모호해진 경우도 많았음은 자명하다.
신앙인의 기도와 주술의 기복도 엄연히 구별되는 기준이 존재한다. 기도는 단순히 신에게 소원을 이루려는 수단이 아니라, 존재론적(being) 차원과 윤리적 차원에서 인간의 존재 자체와 삶의 의미에 대한 근본적인 응답이자 태도이다. 가톨릭교회 교리서에서 기도는 하느님과 인격적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응답이며, 하느님과의 주권과 은총에 전적으로 의탁하는 행위라고 가르친다. 신앙인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믿고 거행하며, 또한 살아 계시는 참 하느님과 맺는 생생하고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이 신비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 관계가 바로 기도이다.”그러나 예물을 봉헌하며 신에게 복을 비는 주술 행위는 인간이 초월적 힘을 ‘조종’해서 자기 목적을 달성하려는 하느님을 수단화하여 인간 욕망을 실현하려는 태도로 비판된다. 이런 점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은 주술적 기복을 신앙의 타락 혹은 비진정성으로 비판하지만, 동시에 그리스도교 신앙 행위의 내면에는 세속적 복을 비는 ‘주술적 신앙’의 흔적들도 적지 않게 발견된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리스도교는 모든 형태의 주술 행위는 십계명의 제1계명,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라.”는 신명(神命)에 대한 중대한 위배행위로 단죄한다. 히브리인의 유일신 신앙의 토대에서 시작된 그리스도교가 삼위일체 신앙으로 새로운 신관을 정립하면서도 ‘하느님’이외의 잡신을 섬기는 일은 신앙 행위에 있어서 가장 큰 죄악으로 치부된다. 그러나 인간의 원초적 종교 의식에는 샤머니즘의 퇴행으로 폄하되는 주술에 대한 무의식적 신뢰가 숨겨져 있다. 만일 샤머니즘의 본질을 기복신앙으로 치부한다면 신을 향한 인간의 기도는 순수한 신앙 행위이고, 주술과 샤머니즘에서 이루어지는 제물 봉헌 등을 통한 청원의 기도는 기복에 불과한 것인가? 그렇다면 신앙에 바탕을 둔 기도와 인간의 현세적 삶의 복을 비는 주술의 차이가 무엇인가? 그리스도인의 기도 행위에서 복을 구하는 주술과 구분되는 새로운 해석학적 기준이 존재하는가?
이를 위해 필자는 이른바 『응용사회학』이라는 범주로 20세기 초 프랑스 사회학과 인류학을 이끈 마르셀 모스(Marcel Mauss, 1872-1950)의 주저 『증여론』(Le Don, 1925)에서 밝힌 인간 사회의 총체적 급부체제, 곧 ‘주기-받기-되갚기’의 선물의 교환 체제가 단순히 자발적이고 순수한 마음에서 나오는 증여행위가 아닌, 특정한 의무를 발생시키는 “총체적 사회적 사실”임에 주목하고자 한다.
모스의 『증여론』에서 밝힌 주장에 따르면, “교환과 계약은 이른바 자발적이지만 실제로는 의무적으로 제공되고 보답되는 선물”이며, 선물(Gift)이 단순한 물질적 교환을 넘어 사회적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라는 점을 밝힌다. 본 논문에서는 모스의 사회학적 연구 결과를 토대로 오늘날 종교적 실천에서 이루어지는 신에게 바치는 기도와 제물 봉헌의 의미가 단순히 신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 관계로만 규명되지 않고, 교회나 신앙 공동체의 유대와 관계를 설정하고 지탱해주는 사회화의 현실임을 규명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기도와 제물봉헌이 흔히 신의 능력이 세속적 삶에 영향을 미치길 기대하는 기복 신앙의 요소와 어떤 점에서 구분되고, 어떤 면에서 교회적 친교의 사회화 과정에서 동질성을 지니는지 해명하고자 한다. 이는 모스의 『증여론』에서 주장하는 ‘증여·교환’의 상징 구조가 종교와 주술 모두에서 발견되며, 기도와 기복 모두 신적, 영적 존재와의 ‘관계 설정’이라는 사회적·상징적 실천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관계가 상호성과 은총에 기초하느냐, 아니면 도구적이고 거래적 속성을 가지느냐에 있다.
이를 위해 필자는 주술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는 현대 사회의 특징을 살피면서 신의 축복을 비는 인간의 기복 행위가 신앙의 기도와 제물 봉헌과 어떤 기준으로 구분될 수 있는지 분석하고, 오늘날 주술 행위에 빠진 현대인의 종교적 삶에 ‘기도’와 ‘제물 봉헌’의 신앙 행위가 어떤 의미에서 인간의 원초적 종교 행위의 본질을 드러내는지 그 비판적 성찰의 기점들을 찾아보고자 한다.
주술의 재도약, 위기인가, 도전인가?
2.1. 한국 사회의 주술의 시장화
21세기는 이른바 상업자본주의와 과학만능주의 시대이다. 자유시장경제를 기본으로 하는 금융자본주의와 경제적 양극화를 부추기는 ‘야수자본주의’가 이끄는 세계화의 흐름은 과학기술과 결합하며 인류의 문명사적 변화를 이끌고 있다. 이른바 제4차 산업혁명은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기술의 결합으로 인간에게 미지의 세상에 대한 지적 욕구와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술혁명의 뒤에는 ‘숫자 사회’를 뒷받침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명암이 도사리고 있다.
자본주의와 과학기술의 결합은 신 없는 인간의 유토피아의 세상을 꿈꾸며 인류를 괴롭혀온 노화와 죽음, 기아와 질병, 전쟁과 폭력으로부터 해방과 자유를 갈구하는 신인류의 희망이 되는 듯하다.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인류는 여전히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 상대적 빈곤과 심리적 좌절을 피하지 못한다. 생태계 파괴에 따른 실질적 종말에 대한 징표들, 정치적 군사적 패권주의를 표방하는 국제 질서의 위기, 왜곡된 정보와 미디어 생태계의 교란에 따른 도덕적 불감증, 더 나아가 종교의 이름으로 인간에게 헛된 희망과 거짓 위로를 상품화하는 종교의 상품화에 이르는 광범위한 문명의 위기를 겪고 있다.
종교의 위기는 문명의 위기와 맞닿아 있다. 기성 종교들로부터 더 이상의 위로와 희망을 찾지 못하는 현대인들은 점술과 주술, 신종교와 신흥영성 등의 대안 종교와 대안 영성을 찾는다. 또한 현대인은 피할 수 없는 인간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심리적 안정과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비과학적 영성의 세계에 몰입하기도 한다.
2019년 통계에 따르면 한국에서 가장 비약적인 성장을 이룬 분야는 온오프 점술시장으로 무려 4조원에 달하는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고 한다. 이는 2017년 기준 한국 전체 영화산업 시장 2조 3천억원을 훨씬 압도하는 수치이다.사람들이 운에 열광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만큼 정신적 위로를 받으려는 현대인의 민낯이다. 최근 인공지능(A.I.)와 결합된 스마트폰 운세앱들은 온라인을 통해 자신의 연예, 결혼 운은 물론 직업, 사업, 재물에 대한 운을 알아보고 싶어하는 점술 시장을 형성한다. 사회적 고립과 개인주의화는 정신적 고민을 풀어낼 공간을 잃은 현대인으로 하여금 정신의학과를 찾는 부끄러운 일보다 ‘운’과 ‘점술’이라는 컨텐츠에 몰입하여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불안을 잠시라도 잊어버리려는 비과학적 주술에 대한 열풍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에 대응하여 한국인의 기층심성을 형성하고 있는 샤머니즘인 무속에 종사하는 이들과 이들로부터 영적 위로를 얻으려는 주술적 신앙에 대한 영역도 커지고 있다. 2018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발표한 한국인의 종교현황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에 무속에 종사하는 종교인의 숫자는 이 약 30만명에 이르고, 심지어 무속인들의 연합체인 (사)대한경신연합회와 (사)한국역술인협회 등을 통해 알려진 무당과 역술인들은 80만명을 넘어섰다고 알려진 바 있다.비과학적, 비종교적 사이비와 유사종교 행위로 치부되는 무속신앙과 역술에 대한 사회학적 비판이 종교계에서 크게 일어나도 적지 않은 신자들이 점술에 몰입하고 미신 행위라고 비난받는 무속의 다양한 주술 행위에 심리적 위로를 얻으려고 한다.
오늘날 과학만능주의 시대에 주술의 재도약은 역설적이다. 과학적 이성주의와 논리적 추론의 절대적 지위를 따르지 않는 인간 본성의 비이성적 감각의 새로운 변용, 곧 불확정성을 가능성으로 보는 과학과는 달리,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극복하기 위한 주술에 대한 집착이 대중적 관심을 이끌고,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술이나 점술에 대한 호감이라는 원초적 종교심의 발로로 환원하려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다. 여기에 덧붙이고 싶은 사실은 오늘날 주술에 대한 호기심과 매력에 빠진 젊은 세대들, 특히 기성 종교에서 즉각적이고 확실한 심리적 효력을 주지 못하는 영적 수행의 다양한 형태들, 가령 명상, 피정, 수행 등의 전통적인 수덕 생활의 가치들을 기피하는 이들이 직면한 현실이 무엇인지 밝혀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바로 사회적 관계 맺기를 거부하는 혹은 관계 맺기 자체에 대한 능력과 기회마저 상실해가는 불완전하고도 비대칭적인 금융자본주의의 폐단이 만들어낸 오늘날의 총체적 사회현실을 대비하여 바라보는 것이다.
2.2. 주술과 신앙의 차이, 무엇이 같고 다른가?
그렇다면 주술은 신앙의 차이는 무엇인가? 과학만능주의 시대에 살아가는 현대인은 왜 여전히 비과학적 주술 행위에 집착하는 것일까? 주술에 대한 전통적인 비판의 근거는 무엇인가? 이를 위해서 먼저 주술 행위와 신앙 행위에 대해 학자들이 규정해온 다양한 입장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1) 주술과 신앙은 인간학적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존재론적 결핍이나 죄와 고통, 죽음의 유한성의 원초적 종교 체험에 근거한다는 점에서 그 동인(動因)의 동질성을 주장할 수 있다. 종교학자 루돌프 오토(Ludolf Otto)가 주장하는 인간을 압도하고 매혹시키는 누미오제(Numiosus), 곧 성스러움 앞에서 인간이 지닌 ‘두렵고 황홀한 체험’의 비합리적인 성스러움의 체험이나, 인간 자신이 “절대자를 향한 인간의 무한한 종속의 느낌”이라는 우주적 감정을 강조한 루드비히 슐라이어마허(Ludwig Schleiermacher). 그리고 성(聖)과 속(俗)의 체험 속에서 성현(Hieropanie)과 현현(Theopanie)의 의미를 인간의 본성 안에서 발견해낸 미르치아 엘라아데(Mircea Eliade)의 종교학적 입장에서 보면 주술과 신앙은 모두 인간이 무한한 신성과 초월적 실재 앞에서 느끼는 인간 존재의 나약함과 유한성의 원초적 한계 체험에서 시작된다. 곧 모든 종교적 행위는 그것이 주술이든 신앙이든 인간이 절대적 신성에 대한 체험의 시작이 인간의 원초적 죄성, 곧 유한자로 겪는 고통과 죄의식, 죽음에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고자 하는 영원성으로의 회귀 혹은 갈망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점이다.
마르셀 모스와 그의 스승 에밀 뒤르켐(David-Émile Durkheim, 1858-1917)의 사상을 이어받아 구조주의 인류학자로 알려진 클로드 레비스트로스(Claude Lévi-Strauss, 1908-2009)는 주술을 단순한 미신이나 비합리적인 행위로 보지 않고, 인간의 경험과 감정을 사회적으로 구조화하고 질서를 부여하는 상징체계로 해석한 바 있다.그는 개인의 주관적 경험을 사회적으로 공유되는 상징 언어로 전환해 의미를 부여하고 해석하는 과정에서 주술 역시 언어처럼 구조화된 체계를 갖고, 세계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인간의 기본적 상징체계라는 점에서 동일하다고 주장했다.그러나 신앙은 인간이 사회적 현실로 경험하는 대립적 구조들을 개인과 공동체의 의미 체계와 초월적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전체 사회 구조에 연결되어 지속적이고 제도적으로 해소하려 하지만, 주술은 이를 신과 인간 사이의 특수한 교환 행위로서 인위적이고 즉각적으로 조정하고 해결하려는 상징적 매커니즘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그러나 중요한 점은 주술과 신앙 모두 갈등과 긴장을 해소하고 사회적 유대를 형성하려는 인간 본성에서 유래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한 종교적 기능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2) 주술 행위에 대한 강한 비판은 주로 계시 종교인 그리스도교로부터 강조되어왔다. 주술 행위가 신앙 행위의 순수성에 대한 위협이자 신앙의 본질을 왜곡하고 신앙의 주술화를 조장하는 종교 혼합주의(syncretism)의 발흥이라는 비판 때문이다. 이는 주술은 인간 욕구 충족을 위해 신을 거래의 대상으로 삼는 비윤리적 태도이며, 주술적 태도는 인간의 윤리적 책임을 약화시키고 도덕적 성숙을 방해한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는 역사 속에서 주술 행위가 세속적 충족을 위해 신을 도구화하는 우상숭배의 위험을 지닌다고 경고해왔다. 유일신에 대한 충복을 요구해온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히브리 신관에 근거하여 한 분이신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 복종을 강조해왔고, 이방신에 대한 숭배나 신의 이름으로 현세적 욕구를 채우려는 도구적 신 신앙을 강력하게 비판해왔다. 그리스도교의 역사도 계시 신앙의 절대성에 위배 되는 이단과 사이비 신앙과 절연하며 사도 계승을 통해 지켜온 계시 진리를 옹호해오면서 신앙고백의 전제로 미신적 주술 행위와의 단절을 전제해왔다.
그리스도교 신학에서도 주술은 언제나 신앙에 위배되는 비난의 대상이었다. 주술은 초대교회의 전통 속에서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참된 경건과 구원의 질서를 훼손하는 영적 배교이자 신앙의 본질을 왜곡하는 행위로 단죄되곤 하였다. 신중심적 세계관을 지배해온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는 미신은 “하느님께 드려야할 종교적 경외가 부적절하게 피조물에게 향하는 것”이며, “마술이나 주술적 기술을 통해 사람에게 해를 가하려는 의도는 악령의 작용 없이는 불가능한 은밀한 힘을 사용하는 것이므로 이는 언제나 불법이며 중죄”라고 규정한다.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 역시 『대교리문답』에서 십계명의 제1계명을 해설하며, “오직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자신을 드러내신 참된 하느님만을 의지하고 그분께만 신뢰”를 두어야 할 신앙에서 벗어나는 주술, 점술, 제비뽑기나 그 밖의 미신적 수단에 의지하여 그 속에서 도움과 위로를 얻으려는 잘못된 행위를 금지한다.근현대 신학자들 가운데 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는 주술적 행위를 하느님의 자유로운 자기 계시를 인간의 기법과 의례로 대체하려는 시도이며, 이는 계시의 본질에 대한 부정이라고 규정하였다.폴 틸리히(Paul Tilich, 1886-1965)는 종교란 인간이 품은 ‘궁극적 관심’(Ultimate Concern)이며, 이에 따르면 신앙은 존재 전체를 걸고 응답하는 궁극적 태도라고 밝히고, 따라서 인간이 궁극적 관심을 잘못된 대상으로 전환할 때 그것은 ‘우상’(idol)이 되고 만다고 비판했다.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Karl Rahner, 1904-1984) 역시 신앙은 하느님의 자유와 초월성을 전제하지만, 주술이 지향하는 무신론의 양태들이 “하느님과의 직접적인 친교를 목표로 하는 인간 실존의 지향성에 대해서 스스로를 가두고 이것을 거부하는”행위라고 비판한다.
가톨릭교회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사목헌장』(Gaudium et Spes) 19항에서도 무신론에 대한 비판에서 주술과 미신을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 거의 무력해질 정도로 인간을 들어” 높이는 행위이며 “신부정보다는 인간 긍정”에 기우려져 있거나 스스로 ”신을 만들어 놓고 그 형상을 부정“하며 하느님에 대한 참된 경외를 흐리는 행위라고 규정한다.『가톨릭교회교리서』에서도 “미신은 종교심과 종교심이 요구하는 실천에서 빗나가는 이탈”이며,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모든 형태의 점(占)을 물리쳐야 한다. 사탄이나 마귀들에게 의뢰하는 것, 죽은 자를 불러내는 것, 미래를 ‘꿰뚫어 본다’고 하는 그릇된 추측 등이 그러한 예이다. 탄생 별자리를 믿는 것, 점성술, 손금, 전조(前兆)와 운명에 대한 해석, 환시 현상, 점쟁이(무당)에게 물어보는 일 등에는 시간과 역사, 나아가서는 인간까지 지배하는 능력을 갖고자 하는 욕망이 감추어져 있으며, 신비로운 능력들을 장악하고자 하는 욕망 또한 숨겨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들은 우리가 당연히 하느님 한 분께만 드려야 하는, 사랑의 경외심이 포함된 영예와 존경을 거스르는 것이다.”
3) 종교 심리학적 관점에서 볼 때, 주술의 기복과 신앙의 기도는 불안을 해소하려는 인간의 심리적 매커니즘에 불과하다고 폄하하기도 한다. 불확실한 상황에서 인간은 주술을 통해 통제감을 느끼려 하는 반면 신앙은 오히려 불확실성을 끌어안고 절대자에게 의탁하는 심리적 태도이기에 결국에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한 통제적 기제로서 주술행위나 불안을 수용하며 초월적 존재에 의탁하려는 신앙행위 둘 다 인간의 심리적 자기방어 기재에 불과하다고 평가되기도 한다. 그러나 주술이 갖는 힘은, “종교의 세계상에서 인간은 근원적 힘의 주인인 신의 섭리를 실현하는 도구의 위치로 전락한다. 이에 반해 주술의 세계상에서는 비록 힘은 인간 바깥의 사물 세계에 있지만, 인간은 기술을 통해 그 힘을 유인, 제어, 조종함으로써 도구로 활용할 수 있는 능동적 실천의 행위자로 격상된다.”는 점이다.
오늘날 과학만능주의 시대에는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유한성의 체험, 곧 고통, 죄의식, 그리고 죽음의 문제가 인간의 종교의식의 뿌리이자 현실임을 부정하려고 한다. 오히려 이 비구원적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해온 종교의 기능을 과학과 심리학으로 대체하려 한다. 현대 과학은 인간이 겪는 물리적 고통을 해소하고, 생명 연장 기술과 약물치료, 뇌과학의 발전은 인간 정신 문제를 뇌의 전기회로의 자극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시대가 되고 있다. 이는 성직자들이나 종교의 선각자들의 고유한 영역이었던 수행과 마음 챙김의 영적 영역조차도 심리학적 치료와 명상 등의 카운슬링을 통해 대체되고 있다고 본다.
타일러(Tylor, 2016)와 프레이저(Frazer, 1988) 같은 선구적인 인류학자들의 연구 이후 일반적으로 주술은 인간의 인지적 합리성의 진보라는 관점에서 종교나 과학에 미치지 못하는 원시적 사고방식이나 미신적 행위로 간주되어왔다.종교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주술과 종교의 차이를 “이성적 합리화”에서 찾으며, 주술적 행위가 극복될 때(탈주술화) 종교는 ‘공동선’을 지향하게 됨을 지적한 바 있다.이점은 주술이 그리스도교 문명에서 철저하게 우상숭배로 치부되거나 신과 인간의 관계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폄하하면서 종교 윤리에 위배되는 행위로 해석되어 왔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로 원초적 종교 행위로서 샤머니즘이 지닌 주술적 행위는 인간이 세상에서 복을 얻고 불안을 해소하거나 재액을 막기 위한 심리적 도구에 불과하다고 평가되어 왔다. 한마디로 주술은 인간이 필요로 하는 ‘무엇을 불러일으키고자(ex opere operantis)’ 하는 반복적인 언어적, 물리적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술과 제도 종교 안에서 탈주술화를 통해 신념화된 신앙 행위는 본질적으로 기복과 불안 해소라는 인간학적 공통기재에 속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주술이 집합적 활동의 산물로서 사회적 사실이며 사회적 사실인 한에서 그것은 신성의 요소를 가진다”는 점은 명확하다. 또한 제도 종교에서 이루어지는 기도와 전례 의식 등에서도 주술이 추구하는 본질이 공공성 실천으로 전환되는 방향성을 제시될 때 주술의 형식은 탈주술화 되어 종교의 순기능을 지니기도 한다.
3. 신과 인간 사이의 교환 체계로서 기도와 기복의 사회적 계약 관계
3.1.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을 통해 바라본 총체적 사회 현실로서 증여의 사회학적 해석
앞 장에서 살펴본 ‘신앙’과 ‘주술’에 대한 종교학적, 종교심리학적, 그리고 그리스도교적 관점에서의 평가와 해석은 이 둘의 종교적 의미를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을 제시해준다. 그러나 현실에서 ‘기도’와 ‘기복’이 과연 이들이 평가해온 신앙과 주술이라는 다소 편향된 시점에서만 바라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도 안에 복을 구하는 청원이 포함되고, 복을 구하면서도 신의 뜻을 따르려는 순종의 의미도 현실 종교인의 내면세계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도와 기복에 대한 이러한 파편화된 해석을 넘어 이 둘을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신과 인간의 관계뿐만 아니라, 공동체적 집단의 행위로서 기도와 기복이 지닌 연대적이고 공동합의적 의미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해석학적 기점을 제공해준 이가 마르셀 모스(Marcel Mauss)이다. 그는 저서 『증여론』(Le Don)에서 인류의 원초적 경제행위로서 ‘증여’가 단순한 ‘무상’이 아니라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의 사회적 의무와 관계를 포함하는 총체적 사회적 현상임을 강조한 바 있다.모스에 따르면, 증여는 주기적으로 주고, 받고, 되갚는 삼중 구조를 갖는 사회적 계약이며, 단순한 ‘무상이타적 나눔’이 아닌, 받는 사람이 반드시 언젠가 보답해야 하는 ‘강제된 자유’의 형태를 지니기에 ‘주는 것’, ‘받는 것’, ‘되돌려주는 것’의 의무가 내재되어 있으며, 이러한 관습이 사회 구성원 간 유대와 연대를 형성한다고 보았다. 이는 증여행위가 원시 사회에서 영적, 주술적 가치가 담긴 행위이며, 물질적 차원뿐 아니라, 정치적·상징적 교환이자, 집단 간 위계와 질서를 재생산하는 기능도 수행한다고 보았다.
그는 자신의 삼촌이자 스승인 뒤르켐과의 공동저서인 『주술의 일반 이론(The General Theory of Magic)』(1904)에서 주술과 종교를 구별하면서도 둘 사이의 연관성을 강조하였다. 곧 종교 행위로서 ‘신앙’은 공적이고 공동체적이며, 집합적 의식을 통해 사회적 연대를 강화하고, 집단적 규범과 가치 체계 위에 서 있으며, 초월적 존재(신, 영혼 등)에 대한 믿음을 포함하지만, 주술은 상대적으로 개인적이고 비공식적이며, 사회적 승인 없이 개인이나 소집단의 필요에 따라 수행되며, 특정한 목적 달성을 위해 특정한 기법을 사용하는 기술적 행위에 가깝다고 규정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술행위가 단순한 비과학적 행위가 이닌 사회의 기술적이고 상징적 실천이기에, 이 상징적이고 의례적인 반복을 통해 그 힘이 사회적으로 발휘되고, 특정한 사회적 규범과 훈련을 거친 주술사들의 기술이 사회의 물화(物化), 곧 정신적, 도덕적 가치들을 물질로 환원하려는 주술의 본질을 드러낸다고 보았다.
이러한 점에서 모스는 종교가 의례와 신앙 행위를 통해 집단 정체성을 강화하고 사회적 규범을 재생산하는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반면, 주술은 주로 개인의 욕구 충족, 문제 해결, 불확실성 해소라는 개인의 욕망성취와 두려움의 극복이라는 개별적 효능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모스는 실제로는 주술과 종교가 뚜렷이 분리되지 않고,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서로 얽혀 있다고 본다. 곧 많은 사회에서 주술은 오늘날 현대 종교에서도 종교 행위의 일부로 포함되거나, 종교적 틀 안에서 허용 또는 금지되는 식으로 자리를 잡기도 한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회적 사실로서 주술과 종교는 사회 구조, 권력 관계, 경제 교환 방식 등에 깊게 관여하며, 사회 구성원의 행동과 가치관을 규정한다. 모스의 『증여론』의 관점에서 볼 때, 신앙과 주술 모두에서 기도 행위나 기복 행위는 일종의 교환으로 볼 수 있다. 곧 신앙에서는 신에게 감사, 속죄, 축복을 바라며 예배를 하고, 주술에서는 특정 효과, 곧 치유, 기복, 해악 회피 등을 위해 의식을 행한다. 이런 점에서 둘 다 일종의 사회적, 초월적 존재와의 교환 관계라는 구조를 공유하며, 모스는 주술과 신앙을 구분하면서도, 사회통합과 개인적 욕망 충족이라는 서로 다른 사회적 관계를 매개하는 상징적 체계로 본다.
3.2. 원시적 증여 행위 안에서 발견되는 의무적 계약과 연대 의식
모든 종교 행위는 그 근원에 샤머니즘적인 토대가 담겨 있다. 이른바 이론적으로 체계화되고 지성적으로 재해석된 종교들 안에서는 원초적인 종교 행위, 곧 미지의 현실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초자연적 감각을 세속의 본능적 감각 속에서 풀어내려는 욕망이 감춰져 있다. 따라서 신에게 바치는 기도와 제물 봉헌 등을 통해 이루어지는 종교 행위에 담겨 있는 증여의 본질적 태도와 사상은 원시 종교들의 형태들에서 뿌리 깊게 남겨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신앙행위는 본질적으로 문화와의 만남과 접변을 통한 토착화 혹은 맥락화와 관련이 깊기 때문이다.
마르셀 모스가 증여론에서 강조하는 중요한 관점은 증여 행위가 신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신에게 청하는 인간의 기도와 제물 봉헌의 행위가 현실적인 문제 해결에 대한 의지를 표현하는 동시에, 같은 종교적 신념으로 묶인 공동체의 구성원들의 집단적인 연대와 협력 의지 역시 발견된다는 것이다. 우선 모스가 이러한 현실의 원리를 고대 사회의 교환 경제에서 찾아낸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은 ‘포틀래치’와 ‘쿨라 교환’이다. 이들의 증여 행위는 사회의 공동체 결속을 위한 핵심적인 장치로 여겨진다.
1) 아메리카 대륙 북서부의 의례인 ‘포틀래치’의 경우 한 부족이 다른 부족에게 선물을 전달하면 이를 파괴하거나 소각한 후 더 많은 선물을 그 부족에게 돌려주는 전통이 있다고 한다. 증여는 경쟁적이고 과시적인 형태로 나타나며, 더 많이 주고 더 많이 파괴함으로써 우월성을 입증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는 증여 행위가 베푸는 자의 부와 권력을 과시하고 사회적 지위를 확립하여 경쟁을 통해 지도자로서의 역량을 인정받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는 점을 밝혀준다. 증여는 단순한 물품의 이동을 넘어, 증여자에게 권위와 명예를 주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귄위는 부의 원천”이며, 이들에게 명예를 잃는 것은 사회적 지위와 존재 자체를 잃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오늘날 제도 종교에서 성직자와 제사장 등의 종교적 리더들은 재화의 소유가 아닌 오히려 재화를 부정함으로써 얻어지는 무소유의 정신과 도덕적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는 공동체적 합의의 기초도 이런 고대의 증여에 대한 관점과 무관하지 않다고 모스는 본다. 필자는 불교의 선승들이 추구하는 무소유의 정신이나 가톨릭 수도자들의 청빈과 금욕 등, 대부분의 종교 지도자들이나 성직자들에게 요구되는 희생적 삶의 봉헌은 세속적 재화의 부정을 통해 신에게 봉헌된 삶에 대한 도덕적 가치와 신적 권위를 위임 받았다는 의미가 공동체적으로 수용되는 것으로 본다. 동시에 인간과 신의 관계에서 신에게 바친 희생 제의에서 신에게 바친 제물이 속죄의 희생 제물이 되거나, 신에게 바쳐진 제물이 다른 용도로 사용되지 않도록 파괴하는 고대의 제의 형태도 이런 측면이 발견된다.이는 모스가 강조하는 증여의 원리, 곧 주고-받고-되돌려주는 관계적 순환에서 신에게 바쳐진 선물이 다시 인간 세계로 환원되지 않도록 철저하게 파괴하여 증여를 신적 차원에서 완전히 이행하여 신에게 순종과 경외를 드러내는 행위로 이해될 수 있다.
2) 모스가 연구한 멜리네시아 제도에서 발견되는 ‘쿨라 교환’은 증여가 사회적 관계를 형성하는 계약 사상의 기초가 된다는 점을 밝혀준다. 이는 선물 순환 관계를 통해 지역 공동체 간의 상징적 물품을 건네는 거대한 고리를 이루어 순환하는 교환 체계를 말하며, 단순한 물품 교환을 넘어 개인과 집단 간의 사회적 유대감을 형성하고, 광범위한 협력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기초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모스는 고대 문명과 법 체계에서도 선물 또는 교환 행위가 단순한 물건의 이동을 넘어 인격적 유대와 구속력, 그리고 미래의 보상과 연결된다고 보았다.이러한 증여의 행위는 종교 안에서 기부와 봉헌의 행위와도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모든 형태의 종교에서는 신에게 바치는 제물 봉헌의 행위나 기부의 행위가 단순히 신에게 바치는 제물의 성격을 너머 봉헌된 제물을 통해 공동체와의 깊은 결속과 사회적 연대를 형성해가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점은 명확하다. 가령 구약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의 12지파 가운데 레위인 사제들이나 레위 지파는 제단에 바쳐진 예물을 자신들의 몫으로 삼는 규정이나, 교회에서 봉헌되는 예물들이 공동체 운영과 관리의 비용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그러하다.
3) 모스가 강조하는 증여 행위에 포함된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물건의 전달에 담긴 영적인 힘에 대한 믿음이다. 그가 연구한 마오리족의 ‘하우(Hau)’개념에는 물건을 전달한 사람의 영혼(hau)이 물건과 함께 건너온다고 믿음이 담겨 있다. 따라서 받은 물건을 거부하거나 갚지 않으면, 그 ‘하우’가 받는 사람에게 해를 끼치므로, 받은 물건과 함께 ‘하우’를 원래 증여자에게 되돌려 보내야 할 의무가 생긴다는 것이다. 되갚지 않거나 선물을 거절하는 것은 전쟁을 선포하는 것과 같으며, 이는 동맹 관계와 공동체를 거부하는 행위로 간주되기도 한다.여기서 증여는단순한 물질적 교환을 넘어 주는 사람의 인격과 영적 속성이 깃들어 있으며, 이 인격적 속성이 받는 사람에게 의무를 부여하여 호혜적 순환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증여는 겉보기에는 비경제적이고 이윤 창출과 무관해 보이는 '선물' 행위도 실제로는 철저한 경제적 이성에 의해 지배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모스에 따르면 “급부와 반대급부의 순환적 운동을 통해 궁극적으로 주고받고 되돌려주는 것은 바로 인격 자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물건의 이전에 따라 만들어지는 법적 유대’는 ‘영(靈)들 사이의 유대’에 다름 아니라면, 그리고 이러한 인격의 순환이 근본적으로 경쟁적으로 행해질 수밖에 없다면, 증여는 인간의 단편적이며 즉흥적인 윤리적 행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인간 사회를 팽팽한 긴장 관계 속에서 직조하는 어떤 구조적 원칙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점들은 모스가 『증여론』을 통해 오늘날 자본주의의 영향 속에서 종교 공동체를 유지해 나가야 하는 교회 역시 추구해야 할 대안적 사회 모습을 엿볼 수 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근간인 계약 관계, 특히 노동과 임금의 교환은 단순한 경제적 거래를 넘어서 기업가가 노동에 대한 임금을 지불하는 것은 노동 그 자체의 대가뿐 아니라, 그 노동으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효과, 즉 노동자의 전반적인 생활에 대한 보장 의무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사회보장 시스템의 기초가 되며, 노동 계약이 단순한 교환을 넘어 더 넓고 깊은 사회보장의 고리를 형성하는 ‘선물’의 현대적 발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현대 사회에서도 지역사회, 국가, 기업 등이 수행하는 각종 환대, 잔치, 축제 등은 과거 ‘선물’이 가졌던 공동체 형성 및 유대 강화의 의무를 계승한다고 본다. 이러한 행위들은 사회 구성원 간의 관계를 창조하고 유지하며, 필요시 사회관계의 단절을 초래하기도 하는 중요한 사회적 기제가 되기 때문이다.그리고 모스가 강조했듯이, 증여에서 발생하는 주체는 “교환하고 계약을 맺으면서 상호 의무를 지는 것은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라는 점이 공동체적 차원을 밝혀준다.
교회 역시 세속적 인간 공동체로 구성된 집단이라는 관점에서 공동체에 헌신하는 순수한 봉사와 기부 행위 등도 단순히 사회적 노동의 가치를 넘어 더 깊은 사회적 증여 행위로 볼 수 있다. 무상의 봉사는 그 댓가를 노동의 가치로 환산하여 받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 간의 상호 호혜적 관계 형성과 공동체 안의 연대 의식을 성장시키는 동력이 된다. 이는 증여가 단순한 무상이 아닌, 받는 자의 반응과 공동체의 응답을 예상하는 상호의례적 관계의 출발점이 되며, 증여 행위가 준 것으로 완결되지 않고, 되돌려 주지 않으면 안된다는 부채의 압박이자 무언의 계약으로 망설이면서도 결국 의무로 부과되는 사회적 계약의 형태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공동체 구성원들 간에 오고가는 선물에 담긴 의미는 그 사람의 마음과 정신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동시에 표현된다는 점에서 물건에 담긴 하우(영혼)에 대한 고대인들의 정신세계가 이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는 증여가 단순히 개인적 선의가 아닌 사회적 규범과 위계, 명예, 연대의 복합적 장치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점은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기도 행위나 예물 봉헌도 신과의 인격적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사회 계약적 요소로 다분히 발견될 수 있다. 곧 기도와 예물 봉헌 행위 안에 내재된 현실적인 복의 기원은 신의 절대성과 복을 구하는 인간의 종속성의 또 다른 해석이 된다. 모스는 말한다: “주는 것은 우월성을 드러내는 행위다, 그것은 자신이 더 크고 높은 존재임을, 주인(magister)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반대로 보답 없이 받기만 하거나 더 많이 보답하지 않는 것은 곧 종속을 의미한다. 그것은 피보호자나 하인이 되는 것, 작아지는 것, 종복(minister)의 지위로 떨어지는 것이다.”신에게 기도하고 제물을 봉헌하며 복을 구하는 인간은 신의 이른바 ‘유예된 교환’, 곧 그 청원에 대해 즉각적으로 되갚아주지 않고 일정한 시간적 유예 속에서 ‘주저하는 증여’의 현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대신 신의 뜻을 알지 못하는 인간은 기도의 청원이 훗날 믿음을 통해 하느님 나라에서 받을 수 있다는 희망의 영역으로 치환할 수 있는 해석학적 기준이 존재한다.이는 신과 인간 관계에서는 인간 상호간의 호혜적 관계와는 달리 신의 절대성과 초월성을 경외하는 종교적 태도를 뜻한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과의 계약으로 맺어져 율법 준수와 우상숭배를 거부함으로써 자신들과 하느님 사이의 불가역적인 계약 사상이 담겨 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론적으로 모스는 현대 사회의 계약 관계와 사회보장 시스템 또한 ‘선물’의 관념, 곧 ‘주어야 할, 받아야 할, 갚아야 할’ 의무의 반석 위에 놓여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인간이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끊임없이 주고받는 관계 속에서 의무를 이행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스의 『증여론』은 이기적 개인 중심의 근대 사회 이해 패러다임을 넘어, ‘선물’과 ‘교환’이라는 총체적 사회적 사실을 통해 사회관계의 본질을 파악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그는 선물이 단순히 자발적 호의의 표현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에게 ‘주어야 할 의무’, ‘받아야 할 의무’, ‘갚아야 할 의무’라는 강력한 구속력을 부과하며, 이러한 의무의 순환 속에서 사회가 유지되고 재생산됨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이는 종교의 영역에서도 신과의 관계에서 이어지는 사회 계약적 요소의 연장으로 여겨지며, 종교 행위인 기도와 예물 봉헌 등의 행위에서도 신의 보답을 기다리는 영적인 인내의 가치와 지연된 미래로의 희망의 표현으로 해석될 수 있다. 동시에 공동체에서 증여 행위가 보여주는 사회적 리듬은 집단의 '일치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부과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주저하는 증여’를 통하여 “모순된 감정을 그대로 실어 나르기 위해 창조된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곧, 증여 행위 안에 인간은 보답을 요구하지 않는 순수함에서 이기적 계산에 연루되고, 소비와 탕진의 귀족적 에토스(ethos)에서 정감 어린 윤리적 나눔의 행위가 되기도 한다. 또한 자발적인 상호 헌신의 규칙이라는 사회적 신뢰가 사회적 의무에 따라 강요된 자기희생으로 경험된다는 것이다.결국 증여는 개인적 삶의 일과적인 관심사나 사회적 실천의 특수 영역으로 귀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항구적인 도덕률’을 지니고 있으며, 이 도덕률은 다양한 인간 감정의 생생한 리듬으로 발현되면서 인간과 사물, 인간과 인간 사이의 인격적인 의미의 망을 구조화하는 원리로서 끊임없이 재생한다”.
4. 맺는 말: 주술적 신앙인가? 신앙적 주술인가?
신앙은 다층적이고 다의적인 개념이다. 인류의 역사 속에 종교가 지닌 기복의 원리는 고대의 샤머니즘의 원형들에 대한 연구에서부터 현대 인류학자나 종교학자들의 밝혀낸 인간의 본성에 대한 연구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연구 성과들 안에서 발견된다. 오늘날 과학주의와 기술만능시대에 인간이 이뤄낸 문명의 성과들은 고대인들이 해결하지 못한 미지의 현실과 미래의 불확실성을 극복하려는 합리적 이성에 대한 강한 확신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그래서 신앙이란 단어에 담겨 있는 종교적 가치들은 과거 인간 이성이 닿지 않는 초월의 영역에 대한 숭배와 경외감, 인간의 유한한 한계 체험에서 수용해낸 무한한 상상력과 신에게 유보된 무한에로의 도약이 교리적으로 체계화되고 신앙 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공통 감각(common sense)을 통해 사회적 계약과 연대 의식의 근간이 되었다.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은 대한 수많은 사회학자들의 비판과 성찰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일상적인 증여의 행위들 속에 깊이 있는 사회적, 문화적 의미가 내재되어 있음을 보여주었다. “우리의 도덕과 삶의 상당 부분은 여전히 증여, 의무, 자유가 뒤섞인 분위기 속에 머물러”있기 때문이다. 선물을 주고받는 행위는 단순한 물질적 교환을 넘어서 복잡한 사회적 관계와 의무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이를 통해 사회의 구조와 질서가 유지되고 재생산된다는 점이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며, 인간 사회의 호혜성의 작동 원리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이러한 점은 인간과 신의 인격적 관계를 중시하는 다양한 종교 전통 속에서도 발견된다. 특히 신에게 바치는 기도와 희생 제의가 인간이 기대하는 재액과 기복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흔히 기복을 위한 주술 행위들이 개인적 필요에 따라 시행되는 기술적 행위로 치부되지만, 사회적 맥락에서 특정 기대인 치유, 행운, 복을 얻기 위해 신과 일종의 교환 행위를 한다. 그것은 종교의 의례와 헌금, 봉헌 행위 등에서 이루어지는 신을 향한 증여의 구조에 속하며, 신과의 상징적 교환을 통해 사회적 유대와 정체성을 유지하는 원리이기도 하다.
물론 이 논문의 서두에서 제기한 기도와 기복의 문제가 단순히 신앙과 주술의 이분법적 문제로 치환될 수 없음은 자명하다. 기도하는 인간은 신과 맺은 인격적 계약의 관계, 그것이 하느님에 대한 무언의 신뢰이든, 세례를 통한 명시적인 서약이든 상호 호혜적 관계에 들어서는 인간의 태도 선택이며, 그 관계를 지속하는 중요한 원리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기도가 단순히 감사와 찬양, 하느님에 대한 경외를 드러내는 종교 행위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현실 세계에서 살아가며 현세적 욕구와 행복 추구의 기원이라는 기복의 요소와 결합되어 있다는 점 역시 분명하다. 그러나 기도가 기복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하더라도, 신앙인의 기도가 주술적 기복 행위와 구분되는 분명한 기준은, 이 둘이 모두 인간의 현실적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신과의 관계에 들어서는 것이지만, 주술이 신을 욕망 실현의 도구로 삼는 태도와는 달리 신앙은 신의 응답을 기다리는, 때로 인간의 현실적 욕구와 부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신의 주저함을 신의 뜻으로 해석하고, 신 앞에 인간의 나약함과 무지함을 고백하는 영적 태도라는 점에서 큰 차이가 있다. 따라서 기도하는 신앙인은 신으로부터 즉각적인 물리적 보상을 기대하지 않으며, 오히려 ‘언젠가 돌아올 긍정적 에너지’를 지향하는 ‘유예된 교환’의 형태를 취하기 때문이다. 이는 모스의 ‘유예된 교환’ 혹은 ‘주저하는 증여’(hesitant gift) 개념을 종교 체험 안에서 승화시킨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유예성은 단순히 개인의 내적 심리 상태를 넘어, 신앙 공동체인 교회 안에서 같은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 사이에서 믿음과 희망이라는 종교적 가치에 근거하는 신앙 공동체로서의 교회의 사회적 구조와 집단 내 구성원 상호 간의 호혜적 관계를 재생산하는 중요한 장치로 작용한다.
대부분의 종교에서도 신에게 바친 기도의 응답을 기다리거나, 신의 뜻을 찾아가는 유예된 교환의 행위를 강조하며 공동체 중심의 의례와 집합적 신앙을 강조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기도와 기복의 반복된 의례 행위는 단순히 개인적 종교 행위로 그치지 않고, 사회적 의미와 상징체계를 재생산하는 종교적 기능을 가진다는 점이다. 기도와 예물 봉헌 등의 증여 행위는 고유한 종교의 형식 아래 이루어지는 사물의 이전을 전제하며, 이는 공동체 구성원들 사이에, 그것이 교회에서 본다면 사제와 평신도 사이이든, 평신도 상호 간이든, 사람들을 증여자 혹은 수증자로 특정화하고 그들 각자의 인격을 주술적으로 순환시킴으로써 사회를 주조화하는 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하나의 메커니즘을 생산해낸다는 점은 자명하다.
오늘날 신앙의 왜곡된 형태인 신앙적 주술이나, 주술을 신앙으로 독립시키려는 주술적 신앙은 모두 현대 사회가 품고 있는 ‘사회적 물화 현상’의 결과로 볼 수 있다. 곧 모든 종교적, 정신적 가치들을 물질로 풀어내려는 현상이야말로 신앙 행위가 담은 정신적이고 도덕적 가치들 마저 주술적 도구로 만들려는 유혹에 휘말리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인에게 샤머니즘적 관습, 점술, 마술은 종종 불확실성과 스트레스의 시기에 심리적 위안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개인이 복잡하고 현대적인 삶에 직면하여 무력감을 느낄 때 통제력과 예측 가능성을 필요로 하는데, 이는 초자연적 현상에 대한 의식과 믿음을 통해 역경에 대처할 수 있는 체계적인 방법을 제공해주는 주술의 역할이 커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러한 현상은 개인이 제도종교와 느슨하게 연결되거나, 아예 독립된 신앙 체계를 만들어내는 신유형의 영성 소비 문화를 보여주기도 한다. 오늘날 적지 않은 현대인들이 제도 종교가 제공하지 못하는 개인적 치유, 정체성 탐색, 영적 경험을 위해 사적 신앙이나 신흥 영성 운동으로 눈을 돌리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기존 종교는 이러한 변화를 수용하거나, 자신들의 교리를 새롭게 해석하며 경쟁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게 되고, 그 결과, 기성 종교의 신심 행위에는 주술적·개인적 영성이 공존하며, 때로는 혼합되는 현상이 발견되는 것이다. 가령 그리스도교와 불교와 같은 제도 종교는 역사적으로 공동체 중심의 의례와 교리를 통해 사회 통합을 도모해왔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개인의 요구와 정서적 만족을 우선시하는 영성 실천이 점차 확산되면서, 이들 제도 종교는 정체성의 위기를 경험할 수 밖에 없다. 많은 사람들이 기존 종교의 경직된 교리나 집단 규범을 벗어나, 보다 유연하고 개인화된 영적 경험을 찾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제도 종교는 신자들의 이탈을 방지하고 새로운 신자층을 확보하기 위해 영성 마케팅 전략을 개발하거나, 기존 교리를 재구성하는 시도를 한기도 한다. 그러나 제도 종교 내부에서도 무속적 요소나 개인적 신비 체험을 포함하는 혼합적 신앙 형태가 나타날 수 있으며, 이는 전통과 현대가 충돌하고 혼합되는 공간 속에서, 영적 권위와 정체성이 새롭게 구성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현대 신흥 영성 운동과 사적 계시에 몰입하는 이들이 개인적인 신앙의 관심이나 일탈로 보일 수 있으나, 실제로는 사회적 불안과 불확실성에 대한 사회의 집단적 반응으로 해석될 수 있다. 곧 개인화된 주술적 행위조차 사회적 맥락 속에서 의미화되고, 공유되는 가치와 규범을 반영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포스트모던 사회에서는 개인화와 다원화가 극대화되면서 주술과 종교, 신앙과 영성의 경계가 점점 모호해지고 있다. 현대 사회는 포스트모던화, 탈전통화, 그리고 극단적인 개인화의 흐름 속에서 종교와 영성의 경계가 급격히 해체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변화는 전통적 제도 종교의 권위 약화와 함께 개인화된 신앙 실천의 확산을 가져왔다. 동시에, 신흥 영성 운동과 다양한 형태의 주술적 실천은 점차 대중 속에 자리 잡으며, 개인의 정체성과 사회적 의미를 동시에 구성하는 중요한 문화 현상으로 부상하고 있다.
최근 대중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명상이나 치유 중심 영성, 자기 계발 프로그램, 명상과 요가, 뉴에이지 운동, 온라인 무속 상담 등의 의례 행위도 사람들이 이러한 의례를 통해 무의식적으로 사회적 긴장과 불확실성에 대응하며, 개인적 차원의 치유와 동시에 새로운 사회적 정체성을 구축하는 원리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포스트모던 사회에서 주술과 신앙, 신흥 영성 운동은 더 이상 명확히 구분되지 않으며, 개인적이고 비제도적인 영성 실천 속에 모스의 증여 이론과 의례 교환의 개념이 재구성될 수 있다는 점은 오늘날 제도 종교들이 새로운 영적 정체성과 사회적 의미를 창출해낼 수 있는지에 대한 심각한 물음에 직면하게 한다.
오늘날 주술적 신앙과 신앙적 주술을 극복해야 하는 과제는 그리스도교 신앙에게도 큰 도전이 된다. 점점 더 개인화되고 파편화되는 사회에서 인간은 소속감과 공동체 의식을 필요로 하고, 그들 간의 사회적 유대를 강화하고 공동체 정체성을 키우는 집단적 경험과 공유 의식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 내는데 기존 종교의 체계들이 지닌 한계가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21세기 미디어와 대중문화의 급격한 변화는 언론과 대중문화에서 마술과 점술, 무속의 환생과 재생의 의미가 그리스도교의 부활의 불편한 희망을 대체하는 역할까지 맡고 있다. 영화, TV 쇼, 책, 온라인 플랫폼은 종종 이러한 흐름을 낭만적으로 묘사하고 대중화하여 더 많은 청중이 더 쉽게 접근하고 매력적으로 만들고 있으며, 이러한 문화적 표현은 신자들과 비신자들 모두에게 호기심과 관심을 불러일으켜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주술적 신앙의 관행을 탐색하고 수용하도록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현대의 샤머니즘의 부활은 과학적 무신론과 실증주의의 한계에 대한 현대인의 다각적인 대응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과학은 물질 세계를 설명하는 데 탁월하지만 인간 존재의 더 깊고 주관적인 측면을 다루지 않는 경우가 많다. 샤머니즘의 부활은 과학적 이해와 영적, 실존적 차원을 통합하는 보다 포괄적인 세계관에 대한 탐구로 이어지고 있고, 이는 경험적 지식과 영적 지혜 사이의 균형을 추구하면서 지배적인 과학적 패러다임에 의해 소외된 인간 경험의 측면을 되찾고자 하는 열망을 반영하기도 한다.
오늘날 그리스도교 신학이 직면한 이와 같은 문제들은 신앙의 위기로 바라볼 수 있지만, 동시에 세상 속에 파견된 교회가 복음 선포의 중요한 가치들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는 새로운 각성을 요구하기도 한다. 분명 신앙은 하느님에 대한 인격적 신뢰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동시에 그 신뢰가 인간이 품은 ‘궁극적인 관심’(폴 틸리히)이나 무한함 혹은 영원함에 대한 확고한 신뢰로 이어질 수 있는 궁극의 희망으로 제시될 수 있는 복음의 길로 드러내야 하는 교회의 과제 역시 주어진다. 신학은 결국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동시에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하는 인간에 대한 깊은 성찰과 해석을 필요로 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왜 기도하는가? 분명히 유한한 인간에게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가 존재한다. 우리의 운명, 미래에 대한 열린 불확실성을 하느님의 신비 안에서 받아들이는 영적인 삶의 초대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뜻이 하느님의 뜻과 같아지도록 요구하는 주술의 유혹을 벗어나. 하느님의 뜻과 섭리에 자신을 맡기는 믿음, 곧, 정해진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이 함께 이루어 가는 미래에 대한 열린 이야기를 신학이 풀어내야 할 과제가 남은 것이다. 그것은 마르셀 모스가 강조한 것처럼 “새로운 인간상의 구현, 곧 사람들 앞에서 베푸는 기쁨, 예술을 위해 아낌없이 지출하는 즐거움, 손님을 환대하고 사적이거나 공적인 잔치를 여는 즐거움 등, 여전히 많은 사회와 계층의 사람들을 움직이고 있는 삶과 행위의 동기들을 다시 발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기쁨을 회복하는 그리스도인의 이웃 사랑의 실천과도 맞닿아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참고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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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초록
본 논문은 기도와 봉헌을 둘러싼 종교 행위가 신앙인가, 주술인가라는 물음을 중심으로, 그리스도교 전통과 종교학적·사회학적 시각을 통해 주술과 신앙의 본질을 탐구한다. 주술은 인간의 욕망 충족과 불안 해소를 위해 신적 힘을 도구화하는 행위로 비판되어 왔으나, 역사적으로 신앙과 주술은 긴장 속에서도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경계를 모호하게 해왔다.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은 이러한 문제를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해석의 틀을 제공한다. 모스에 따르면 증여는 단순한 호의적 나눔이 아니라 ‘주고-받고-되돌려주는’ 의무적 교환 체계이며, 사회적 관계와 연대를 형성하는 총체적 사실이다. 이 관점에서 기도와 봉헌은 단순히 신과 인간의 인격적 교류를 넘어, 공동체적 연대와 계약의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 곧 신앙인의 기도는 기복적 요소를 내포하면서도, 신을 수단화하는 주술과 달리 하느님의 자유로운 응답과 은총을 기다리는 ‘주저하는 증여’의 성격을 지닌다. 이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 반복되는 기도와 봉헌 의례가 사회적 상징 체계와 공동체적 유대를 재생산하는 원리임을 보여준다.
또한 본 논문은 현대 사회에서 주술의 재등장이 과학주의와 자본주의가 낳은 불안과 불확실성의 반영임을 지적하며, 주술과 신앙의 경계가 흐려지는 현상을 분석한다. 나아가 기도와 봉헌이 단순히 개인적 욕망 실현을 위한 주술적 기제가 아니라, 공동체적 연대와 사회적 증여의 차원에서 해석될 수 있음을 밝힌다.
결론적으로 기도와 봉헌은 주술과 신앙의 이분법적 구분을 넘어, 증여의 사회학적 구조와 신학적 성찰 속에서 인간의 원초적 종교 행위의 본질을 드러낸다. 따라서 본 연구는 신앙적 기도가 어떻게 주술적 기복과 구별되며, 동시에 사회적·상징적 실천으로서 종교 공동체를 지탱하는 힘을 발휘하는지를 규명하고자 한다.
주제어: 기도, 봉헌, 주술, 신앙, 마르셀 모스, 증여론, 사회적 교환

첫댓글 기도생활이 중요한지 알려주신 논문이었습니다.
기도와 봉헌-- 신앙과 주술에는 큰 차이가 있군요.신앙의 본질을 왜곡하는 행위는 하지 말아야 함을 일깨워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