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친구들,
지난 연말과 연초에 애들이 어렸을 때 살던 충남 홍성에 다녀왔네.
현범 산타크로스가 우리 결혼 30주년에 제 누나의 30회 생일을 기념하여 2박3일의 추억여행을 크리스마스 선물로 마련해서 모처럼 호강했네. (결혼 2월 25일, 현선 생일 12월17일)
83년 9월부터 85년 3월까지 홍성에서 살면서 크리스마스를 두번 보냈는데 운 좋게도 두번 모두 눈이 풍성한 화이트 크리스마스.
눈이 하얗게 쌓인 인적 없는 밤길을 헤들라이트를 끄고 천천히 운전하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크리스마스 캐럴을 듣는 기분 이해하겠나?
그날 밤, 빨간 외투를 입은 할아버지를 태우고 이따마한 사슴 여덟마리가 끄는 썰매가 앞을 가로질러가는 모습을 분명히 보았는데 아마 환상은 아니었을걸.
애들은 도회지 큰 교회에서 보낸 크리스마스보다 훨씬 더 기억에 남는 모양이야.
주말이면 즐겨 찾던, 그래서 은우의 주부습진을 퇴치했던 덕산온천에 베이스 캠프 설치.
우리가 살던 집과 일구던 밭,
현범이 연보돈 까먹던 구멍가게(하나님은 부자라서 그 돈 안받아도 된대나?),
다니던 교회(주차장이 널따랗고 전자 오르간이 웅장한 대형 교회가 되었어),
현선이 다니던 학교,
남자아이가 너무 세게 돌려 나가 떨어져 현선이 피를 철철 흘리던 회전틀,
현범이 다니던 유치원,
현범이 빠졌던 시궁창(지금은 그 자리에 집이 들어 섰더군),
현범이 난로에 손을 데던 칼국수집(그 자리는 KT의 주차장이 되었어),
예산의 갈비집,
빼뽀 어죽집(언젠가 반드시 한그릇 대접하고 싶은 집인데 원조 할머니는 돌아가셨다더군),
수덕사의 산채나물집(예전 장소에서 확장이전 했는데 주인 아주머니가 우릴 알아보고 동동주를 공짜로),
귀신 나오던 구항침례교회, 지금은 신식 벽돌집으로 우뚝, 귀신이 울던 우물은 메워지고 우물가에 서있던 고목나무는 여전히 그 자리에. 그 교회에는 사철 양복 한 벌을 우물물로 빨아 집에서 다려 입으며 밤새 기도로 귀신과 싸우시던 울릉도가 고향이라던 목사님이 계셨다네. 그분은 부산으로 가셨는데 지금 계시는 목사님께 들은 바에 의하면 큰딸 신애는 연대 법대 나온 훌륭한 신랑을 만났고, 큰아들 신정은 의사가 되고, 둘째(이름 잊었음)는 KAIST에서 박사가 되었다는 소식에 가슴이 뿌듯. 큰아들 신정은 어렸을 때 지나다가 우연히 알게 된 어떤 젊은 의사로부터 성찬기를 선물받고 밤새 어루만지며 기뻐하시던 부모님을 보고 의사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얘기도 듣고…
“바르게 살면 반드시 잘 된다”는 진리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기대하지 않았던 기쁨.
덕산온천 (1)
수백년전에 날개를 다친(다리였었나?) 학이 내려 앉아 물을 찍어 바르더니 기운을 차리고 날아 가는 걸 보고 그 자리에 가봤더니 더운 물이 솟고 있었다나?
일제 초기에 일본사람이 개발해서 地球乳라는 글을 돌비에 새겨 지금도 마당에 그 돌비가 남아 있는 곳.
1976년 시커먼 처마 아래로 기다란 쪽마루에 창호지 미닫이가 나란히 늘어서 있고 미닫이 안에선 온돌이 설설 끓고,
가득 차린 교자상을 장정 두 사람이 겨우 맞들던 곳.
자가용은 드물고 택시나 대절해야 갈 만큼 불편한 곳이어서 조그만 목욕탕에 손님은 우리뿐.
땅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물이 욕조 밖으로 계속 넘치고 있어 아깝고 미안하던 곳.
덕산온천 (2)
1984년. 이층 양옥에 크고 깨끗한 목욕탕에는 사우나도 있고, 맞들고 나르는 교자상대신 아담하고 정갈한 식당.
이층 특실에 기거하시던 주인할머니의 비법으로 띄운 메주로 담근 된장찌개가 맛있던 집.
주인할아버지 상에만 올린다는 장졸임 간장으로 삭힌 오이 장아찌를 몰래 주던 집.
자가용과 관광버스로 실어 나르는 손님들이 왁자지껄.
가끔 벌거벗고 싸우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던 곳.
어느 날 식당에서 스포츠 재킷을 입은 60세 안팎의 노신사 서너분을 만났네. 그들은 메뉴에도 없는 왕새우를 커다란 양푼에 받아놓고 껍질을 까며 담소를 즐기고 있었다네. 새우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현선이가 거기서 눈을 떼지 못 하는 건 당연.
미리 주문한 것이라는 말에, 애꿎은 아이만 꾹꾹 찌를 밖에.
우리 쪽엔 눈길 한번 주지 않던 그들 중 한 사람이 냉면그릇을 달래더니 그리로 한가득 새우를 담아 한다발 미소와 함께 우리 테이블로 넘겨주지 않겠나? 난 그날 속으로 빌었네.
“나도 저렇게 품위있고 넉넉하게 늙어가기를 바랍니다.”
덕산온천 (3)
2005년 1월 1일
층수를 세어보지 않았지만 하여간 고층의 관광호텔.
식당은 휑덩그레 크고 썰렁. 추억여행이므로 정월 초하루 아침은 추억을 먹기로 함.
부모들은 5,000원짜리 순두부와 해장국, 젊은이들은 9,000원짜리 Continental Breakfast.
Continental… 그 무엇이냐에 경악.
삼각형으로 자른 반쪽짜리 식빵 4쪽에 비행기에서 주는 일회용 잼과 버터 그리고 달랑 오렌지 쥬스 한컵.
그 흔한 달걀 한쪽 없는 것은 닭띠 해에 닭에 대한 예우라고 치더라도 햄, 소시지는 물론 베이컨 한조각도 없는 초라함.
“어찌 이럴 수가 있남? 어느 대륙에 이런 걸 10불씩이나 내라는 식당이 있나?
관광 호텔쯤 되면 음료는 몇가지 준비해야지. 겨울 아침에 찬 오렌지쥬스를 마시라고?
돈을 많이 받는 호텔 메뉴라면 당연히 음식 내용을 소스 재료까지 상세히 메뉴에 기재하는 법이거늘 그러지 않았으므로 계약은 일반 상식에 준한다.
너희 음식은 상식 이하이다.
정월 초하루 아침부터 손님 기분을 상하게 한 당신들은 바보다” 등등…
그렇게 말하고는 내 마음대로 4,000원씩 깎고 나왔다네.
나 아직 품위있고 넉넉하긴 글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