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 하면 휴가가 생각난다. 나는 태국에 간 적이 있고 방콕에도 들
린 적이 있지만 그래도 방콕, 하면 킥복싱의 나라인 태국의 수도이
고 또 세계에서 가장 잔인한 킬러들이 뒷골목에 득실거린다는 태국의
방콕이 아니라, 휴가 때 어디 가지 않고 방에만 콕, 박혀 있는 것을 일
컫는 그 방콕이 생각나는 것이다.
그러나 [방콕 데인저러스]를 본 후 이제 방콕, 하면 방콕의 뒷골목을
거닐고 있을 지도 모를 콩과 같은 킬러들이 떠오를 것 같다. 말 못하
는 농아인 그를 사랑했던 순수한 얼굴의 폰도 아직 태국의 어느 거리
에서 약국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만큼 이 영화는 강렬하다. 우리들
의 머리 속을 오랫동안 지배해 온 어떤 이미지를 흔적도 없이 몰아낼
만큼 [방콕 데인저러스]의 거칠고 속도감 있는 이미지들은, 데인저러스
하다.
지난해 토론토 영화제 국제비평가상을 받으면서 국제 무대에 화려하
게 데뷔한 태국 영화 [방콕 데인저러스]는 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주
도하고 있는 팽 브러더스의 감독 작품이다. 형인 옥시드 팽과 동생인
대니 팽 두 형제가 함께 만든 이 영화는 지난해 태국 영화제에서 최우
수 작품상, 감독상, 각본상, 촬영상, 편집상, 남우주연상 등 6개 부문을
수상하면서 태국인들을 열광케 했고, 올해 부천 국제영화제에도 초청
되어 국내 관객들과 만난 바 있다.
[방콕 데인저러스]의 소재는 사실 홍콩 영화나 할리우드 영화 같은
데서 이미 접한 낯익은 것이다. 그러나 [첩혈쌍웅]이나 [천장지구]에
등장한 킬러와 순수한 소녀의 사랑 이야기가 태국 버전으로 업그레이
드된 것이라고 간단하게 폄하할 수 없는 매력이 [방콕 데인저러스]에
는 존재한다.
스타일의 과잉이라고 비판받을 우려가 다분히 있는 지나친 영상미학
에의 경도가 눈길을 거슬리게 하기도 하지만, 롱 테이크를 쓰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빠른 쇼트로 연결된 편집, 최소한의 구축 쇼트를 제
외하고는 클로즈업으로 인물 가까이 다가간 프레임, 핸드 헬드로 도시
의 폭력적 뒷골목 영상을 감각적으로 잡은 감각적인 카메라 워크가 맞
물리면서 [벙콕 데인저러스]는 우리의 영혼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
긴다.
뛰어난 사격 실력으로 방콕 뒷골목에서 킬러로 살아가는 콩(파와릿
몽코피싯 Pawalit Monkopisit 분), 그는 사격장에서 일하다가 손님으
로 들린 조(피색 인트라칸싯 Pisek Intrakanchit 분)와 아움(파타라와
린 팀쿨 Patharawarin Timkul 분) 커플의 눈에 발탁되면서 킬러로 성
장한다. 조는 킬러들과의 전쟁 도중 손에 부상을 입어 더 이상 민첩한
킬러로서 활동을 못하게 되자, 아움 곁을 떠나려고 한다. 그러나 아움
은 변함없이 조를 사랑한다. 폭력 조직의 보스로부터 프로포즈를 거절
한 아움은 보스에게 강간당하고, 조는 그런 아움을 보고 혼자 적진으
로 뛰어들어 복수를 하다가 죽는다.
한편 콩은 우연히 약을 사기 위해 들린 약국에서 폰(프렘시니 라파
나소파 Premsinee Ratanasopha 분)과 만난다. 폰은 농아인 콩을 따뜻
한 미소로 대해준다. 처음으로 여자에게서 사랑을 느낀 콩은 폰과 데
이트를 한다. 늦은 밤 교외를 걷던 두 사람에게 폭력조직들이 칼을 겨
누고 달려들어 금품을 빼앗으려고 하자, 콩은 킬러로서의 본능적 행동
으로 그들을 처치한다. 이제 비로소 콩의 실체를 알게 된 폰은 집으로
찾아오는 콩을 피한다. 콩은 조의 죽음을 뒤늦게 알게 되고 마지막으
로 폰에게 사랑의 편지를 남긴 채 친구의 복수를 위해 혼자 적진으로
뛰어든다.
이런 플롯 자체는 새로울 것이 없다. 너무나 낯익은 서사구조이지만
팽 브러더스는 놀랍도록 감각적인 영상과 속도감 있는 편집으로 이 상
투적인 이야기를 전혀 새롭게 포장하는데 성공했다. 특히 킬러들끼리
서로의 가슴을 겨누는 거칠고 격렬한 총격전과 콩-팬의 러브스토리는
완급조절이 탁월하게 되어 있어서, 오우삼 영화의 비장미를 능가할 정
도이다. 긴장과 이완의 효과적인 리듬 속에서 어두운 밤거리를 배경으
로 촬영된 감각적인 영상은 우리들의 세포 속으로 낱낱이 흡수된다.
왕가위나 오우삼 같은 극단적 스타일리스트의 영상기법이 돋보이는
홍콩 영화류의 서정성과 비장미, 타란티노 영화의 폭력미학, [트레인스
포팅]이나 [증오]에서 볼 수 있는 폭풍 같은 젊음의 질주가 혼재된 영
화가 느와르 필름 [방콕 데인저러스]이지만, 단순히 걸작의 짜깁기가
아닌, 방콕의 현실 속에 뿌리를 박고 창조된 또 하나의 영상 혁명이다.
특히 콩의 과거로 플래시백 되는 부분은 흑백이나 세피아 톤으로 처
리되어 있고, 현재는 대부분 강렬한 색감이 교차되는 도시의 밤거리로
구성되어 있어서 영상의 시각적 쾌락도 훌륭하게 배합이 되어 있다.
다만 지나치게 새로운 스타일을 의식해서 주제나 서사적 전개가 표현
주의적 형식미학에 끌려가고 있는 것은 흠이라고 볼 수 있다.
쌍동이 형제 감독인 팽 브러더스 중, 형인 옥시드 팽은 1985년부터
홍콩의 센트로 디지털 픽쳐스에서 컬러리스트로 일을 시작했고, 1992
년부터는 방콕의 칸다나 필름에서 활동했다. 그는 이미 Ta Fa Likit
(Who's Running)라는 영화를 만들어 감독으로서 인정받았다. 동생인
대니 팽은 편집 전문가로 일을 하고 있었다. 이 형제가 함께 의기투합
해서 만든 첫 번째 영화가 바로 Bangkok Dangerous(2000년)이다.
국내 처음 개봉하는 태국 영화 [방콕 데인저러스]는 어쩌면 시작일
지도 모른다. 현재 태국 영화는 지난해에 비해 관객이 5배나 극장으로
몰릴 정도로 르네상스를 맞고 있다. 98년도에 11편의 영화제작에 불과
했던 태국은 지난해 17편, 그리고 올해는 20편을 훨씬 넘는 영화들이
제작 개봉될 전망이다.
팽 브러더스 감독 이외에도 태국에서 [타이타닉]을 누르고 최고의
관객동원에 성공한 [닝낙]의 논지 니미부트르 감독과 올해 칸느 영화
제의 [주목할만한 부문]에 올라 호평을 받은 [티어스 오브 더 블랙타
이거]의 위지트 사사나티엥 감독 등이 태국 영화의 르네상스를 이끌고
있는 주인공이다. 특히 논지 니미부트르 감독은 [방콕 데인저러스]의
제작을 맡기도 했다.
특히 태국 왕실에서 제작 협찬을 한 [수리요타이]는 우리 돈으로 140억원
이 넘는 거대한 제작비가 투입되어 화제를 모았다. 또 스텔라 말루치
와 수파콤 키추원이 주연한 [티어스 오브 더 블랙타이거]는 태국식 서
부영화이다. 태평양전쟁 발발과 함께 시골로 피신한 상류층 가족, 도시
소녀와 시골 소년의 애틋한 사랑, 그리고 9년 뒤 그 소년은 갱스터가
된다. 이런 이야기를 마카로니 웨스턴이 아닌 태국식 웨스턴 갱스터
영화로 만든 위지트 사사나티엥 감독 역시 또 하나의 스타일리스트이
다.
[방콕 데인저러스]는 시종일관 비장미 넘치는 화면으로 우리를 사로
잡는다. 삶에 밀착되지 않는 서사구조는 아무리 감각적 영상을 동반한
다고 해도 관객들의 외면을 받는다. [방콕 데인저러스]의 뒤틀린 화면
이 우리의 내면을 점령한다는 것은 이야기와 그것을 표현하는 캐릭터
자체가 살아있다는 뜻이다. 섬세하게 다듬어지고 잘 계산된 기교 속에
서 내러티브는 효과적으로 살아나 우리들의 가슴을 움직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