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웅의 최후-노량해전 | |
서로군과 수로군의 합동작전은 서로군의 무능력과 무의지로 실패하였지만, 고니시 유키나카는 여전히 속이 탔다. 일본으로의 철군 명령은 떨어졌고, 이를 위해 일단은 부산포로 집결을 해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서로군을 비롯한 조명연합육군이 일본군에 비해 전투력이 떨어진다지만 수많은 병력이 육지로 이동한다는 것은 이리저리 무리한 일이었다. 방법은 당연히 배타고 바다는 건너는 것이다. 그러나 바다에는 무시무시한 조명연합함대가 버티고 있다. 조선 수군은 이순신이 지휘할 때는 한번도 패한 적이 없고, 명 수군은 조선 수군에 방해만 되어 보이지만 적어도 그 숫자는 일본군을 압박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이런 바다로 무턱대고 나간다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그래도 고니시에게 한 가지 희망적인 일은 명군은 싸울 의지가 없다는 점이었다. 싸움도 잘 못 하는데다가 애당초 전장을 조선으로 한정 시킨다는 계획은 이루어졌으니, 적극적으로 싸울 만한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군은 명군과 화의를 추진해가면서 철군을 준비하고, 고니시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고니시는 이를 위해 서로군의 유정과 협상을 꾀한다. 이러한 결과 유정은 고니시의 철수를 묵인하는 대신 예교성을 넘겨받기로 약속하며, 고니시 진영에 인질 40여명을 보내기까지 한다. 그러나 문제는 육군이 아니라 수군이었다. 조명연합수군은 순천 예교성 전투 후 전열을 재정비하여 고니시군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고니시와 협상을 한 유정은 진린에게 “행장이 군사를 거두어 본국으로 돌아가고자 하니, 풀어 보냄이 좋겠소.”라고 전하지만, 이미 순천 예교성 전투에서 서로군의 소극적은 대응으로 많은 피해를 경험한 진린은 “수군과 육군은 각각 책임이 다르니 각자 행동하는 것이 옳겠소.”라고 말하면서 유정의 제안을 거부한다. 진린은 유정에 대한 이전의 전투에서의 불만에 전공 다툼, 그리고 이순신이란 걸출한 장군의 영향으로 명나라 장수답지 않게 전투에 적극 나설 의사를 보인 것이다. 심지어 11월 8일에는 이순신에게 적이 11월 10일 전후로 철수하려한다는 정보가 왔으니 이를 막자는 제안까지 하게 된다. 결국 조명연합함대는 출동하여 순천 앞의 유도에 정박한다. 11월 12일, 고니시는 선발대 10척을 내보내지만 조명연합함대에 의해 여지없이 궤멸당하고 만다. 그러자 고니시는 분노하여 자신의 진영에 있던 명군 인질 40명을 구속하고, 그 중 두 명의 팔을 잘라 유정에게 보내면서 “제독이 나를 속이기를 전후에 이와 같이 하니 나는 가지 아니하겠소.”라고 전한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 해도 순천에 영원히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결국 수군의 위협을 어떻게든 처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고니시는 유정에게 사람을 보내서 “수병이 화해하지 아니하니 마땅히 급히 약속을 정합시다.”라고 전한다. 이는 유정이 수군을 설득시켜주길 원한 것이지만 진린과의 사이가 껄끄러운 유정은 “화해를 빌면 진린 장군을 이해시킬 수 있을 것이오.”라며 진린에게 알아서 뇌물을 바칠 것을 시사한다. 고니시는 이에 따라 진린에게 은 백냥과 보검 50구를 바치면서 “전쟁에는 피를 보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길을 빌려 주어 환국하게 해 주기를 원합니다.”라고 청한다. 이와 함게 고니시는 유정에게는 수급 2천을, 진린에게는 수급 1천을 주겠다는 제안을 하였는데 진린은 다른 명나라 장수들의 나쁜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에게도 2천을 주면 길을 열어주겠다 말한다. 그러자 고니시는 연일 뇌물을 바치면서 “남해(南海)에 사위가 있는데 그와 만나 의논해야 하므로 사람을 보내어 불러오려고 하니 이곳의 배를 내보내주기 바란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를 전해들은 이순신은 “속임수의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 사위를 불러 온다는 것은 구원병을 청하려는 것이니 결코 허락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고니시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걸 반대하였으나, 진린은 듣지 않고 끝내 14일 일본군 8명이 탄 배의 통과를 허용하고 만다. 이에 대한 보답인지 고니시는 14일 저녁에는 돼지 2마리와 술 2통을 바치고 15일과 16일에도 꾸준히 진린 진영을 오가며 뇌물을 바친다. 그리고 고니시는 16일에 다시 군량을 가득 실은 중선을 출항시켰으나 소비포만호 소계남과 당진포 만호 조효열의 추격을 받아 결국 한산도 앞바다에 이르러 배를 버리고 도망간다. 조선 수군이 노획한 배와 군량은 명군에게 뺏기고, 소계남과 조효열은 빈손으로 이 사실을 이순신에게 보고 한다. 고니시는 진린에게 왜 강화하기로 해 놓고 공격하는 것이냐며 항의하지만, 진린은 그 공격은 자신이 아니라 이순신이 한 것이기에 자신은 알 바 아니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이미 14일에 순천 예교성을 빠져나간 배가 있다. 이는 일본군 구원 병력을 불러올 게 분명하니, 4일 정도의 시간이면 구원군이 당도할 시간이었다. 이에 대해 이순신은 휘하 장수들과의 논의 끝에 고니시를 구원하러 올 일본군을 먼저 공격하기로 결정한다. 순천 앞바다에서 머물 경우 순천의 고니시군과 후방에서 오는 구원군을 상대로 앞뒤의 적에게 포위당할 우려가 있기에, 수군은 노량 해협 인근으로 함대를 이동시키기로 한다. 그리고 이 사실은 진린에게도 통보된다. 진린은 고니시에게 소소한 뇌물을 받은 외에는 타협에서 별 진전도 없거니와, 이순신이 출전하는데 자신은 가만있으면 상국의 장수로서의 위신이 떨어질 것, 그리고 이순신이 명나라 정1품 품계인 도독 벼슬을 받았다는 사실을 생각하여 이순신을 따라 출전을 결정하게 된다. 전투를 앞두고 진린은 불길한 징조를 느끼고, 그 우려를 담은 편지를 이순신에게 보낸다. 「내가 밤이면 천문을 보고 낮이면 인사를 살피는바, 동방에 대장별이 희미해 가니 머지않아 공에게 화가 미치리이다. 공이 어찌 이를 모르리요. 어찌하여 무후(=제갈량)의 기도로 예방하는 법을 쓰지 않습니까?」 진린은 삼국지에서 제갈량이 자신의 수명이 다 했음을 알고 하늘에 기도를 하여 이를 연장했다는 고사를 들어 이순신도 이를 따를 것을 제안하였지만, 이순신은 답장을 보내면서 이를 정중히 거절한다. 「나는 충성이 무후만 못하고, 덕망이 무후만 못하고, 재주가 무후만 못하여 세 가지가 모두다 무후만 못하매, 비록 무후의 기도법(祈禱法)을 쓴다 한들 하늘이 어찌 들어줄 리가 있으리까?」 이순신의 능력과 덕망이 제갈량에게 못 미칠 리 없지만, 이순신은 자신을 겸허히 낮추면서 전투를 대비한다. 고니시의 구원 요청을 받은 일본군은 사천성에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 고니시의 사위인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와 그와 함께 남해에 있던 다치바나 무네시게, 그리고 부산에 있던 데리자와 마사나리와 다카하시 무네마스 등의 무장들이 고니시 구하기에 나선다. 그 병력은 배 500 여척에 이르렀다. 조명연합수군은 조선의 판옥선 80여척에 9월말 합류한 유격 왕원주의 배 100여척을 포함한 명나라 수군 300여척이었다. 하지만 크기가 작은 명나라 군선은 사실상 수적인 압박을 가하는 게 전부였고, 주력은 조선의 판옥선인 게 당연했다. 이 때 진린과 그의 부장 등자룡은 조선 수군으로부터 판옥선을 각각 한 척씩 받아서 이것을 타고 전투에 참가하였다. 이들의 출발은 경상우수사 입부 이순신에 의하여 보고 되어 조명연합수군은 전투체제로 들어간다. 구원군이 순천으로 향하자면 반드시 노량해협을 지나야만 했다. 이순신은 바로 이 곳을 전투의 적지로 보고, 조선 수군은 남해 관음포에 주둔하고 명군은 곤양 죽도에서 매복한다. 조명연합군인 어둠 속에서 작은 소리도 새어 나가지 않도록 입에는 방어래를 물고 조용히 이동하였다. 11월 19일 새벽 2시경, 양측 함대가 노량해구에서 만나면서 전투는 시작되었다. 이른 새벽인데다가 달빛도 없었기에 전투는 어둠 속에서 혼전의 양상을 띄었다. 조선 수군은 어둠 속에서 시야 확보를 위해 화포 사거리보다 더 가까이 적군에게 접근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수군은 화포 사격은 물론 불붙은 섶을 마구 적선에 던져가며 맹공을 가하였다. 바람도 조명연합수군에 유리한 북서풍으로 불어서 이 화공은 더욱 효과적이었다. 고니시 목숨 구하러 왔다가 자기들 목숨 부지하기도 어렵게 된 일본 수군은 형세를 지탱할 수가 없는 와중에 조명연합수군의 포위망 너머의 넓은 바다를 발견하고 그 방향으로 필사적으로 탈출한다. 그러나 그 곳은 구원의 길이 아니라 지옥이었다. 일본 수군은 넓은 바다가 아닌 남해도 관음포 안으로 들어간 것이었다. 관음포는 지금은 간척사업의 영향으로 바다가 깊지 않으나 과거에는 포구 입구에서 안쪽까지 거리가 멀어서 잘못 보면 수평선과 지평선을 혼동할 지경이었다. 일본군은 어둠 속에서 이를 혼동하고 스스로 포구 안에 갇히고 만 것이었다. 뒤늦게야 자신들이 지옥으로 들어온 걸 안 일본군은 일부는 남해도로 상륙하여 도주하였지만 그렇지 않은 병력들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다. 안 그래도 어둠 속의 전투에 이런 필사적인 싸움으로 전투는 이전의 해전에서 보기 어려운 혼전으로 전개되었다. 그래서 전투 중에 한 때는 진린의 배가 포위당하여 일본군이 배 위에 까지 올라와 진린을 노렸지만 아들 진구경이 몸으로 막고 부상을 당하였다. 진린은 당장의 위기는 면하였지만 배는 여전히 위험하였다. 이런 전투 중에 진린의 부장 등자룡이 탄 배는 일본군의 공격에 의하여 결국 등자룡은 전사하고 그 배는 완전히 불태워졌다. 이전에 육지 가까이 접근한 판옥선에 일본군이 불을 던진 적이야 있었지만, 이순신이 참전한 해전에서 적군의 공격으로 판옥선이 완전히 불타 버린 건 이것이 처음이었다. 포위된 진린의 배를 구하려 나선 이순신은 적선 중에 다른 배보다 높고 위에는 붉은 천이 있으며, 금 갑옷을 입은 무장이 전투를 감독하는 배를 발견하고, 그 배를 공격하여, 장대 위에 있던 적장수 세 명 중 한 명이 쓰려졌다.. 그러자 진린의 배를 포위한 적선들이 포위를 풀고 이순신이 공격하는 배를 구원하러 나서니, 덕분에 진린은 무사할 수 있었다. 반대로 이순신의 배가 포위당하는 상황이 오면 진린의 배가 구해주었는데, 이는 진린이 이순신에게 감복한 면도 있지만 이순신과 진린이 각각 품계상 상급자와 지휘권상 상급자라는 미묘한 관계였기에 더욱 그럴 수밖에 없는 면도 있었다. 전투가 계속되는 중에 날이 밝았다. 이순신은 혼전 중이었다지만 조선 수군의 최고위 장수임에도 직접 북채를 들고 독려하면서 앞에서 전투를 지휘하였다. 당연히 이순신의 좌선도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배 위로 탄환이 날아오면서 군관 송희립이 이에 맞아 부상을 당하고 쓰러졌다. 탄환이 노린 건 송희립만이 아니었다. 적 조총수가 쏜 탄환에 이순신이 맞아 쓰러지고 말았다. 그러나 이순신은 그 와중에도 침착함을 잃지 않았다. 이순신은 즉시 주위에 방패로 신체를 가리게 명령하였다. 그리고 그 유명한 마지막 한마디를 남긴다.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 이 유언을 끝으로 위대한 영운은 눈을 감는다. 하지만 이순신의 유언을 받은 큰아들 이회와 조카 이완이 전투를 독려하고, 쓰려졌던 송희립이 부상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나서 전투에 임하였다. 전투는 여전히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결국 11월 19일 정오경, 간신히 살아남은 일본 군선들이 물러나고 전투는 조명연합함대의 대승으로 끝났다. 순천 예교성의 고니시는 자신을 구하러 온 구원군이 몰살당하는 중에 묘도 서쪽 수로를 통과하여 남해도 남쪽으로 우회하여 부산으로 탈출하였다. 고니시는 자신이 살아남는데 크게 기여한 유정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순천 예교성 전투에서 서로군이 잘 싸웠으면 고니시는 전사나 할복 혹은 항복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을 테니. 고니시의 생명의 은인 유정은 텅 빈 예교성을 접수하고 큰소리치지만, 서로군에 종군 중이던 이덕형을 통해 모든 사실을 파악하던 선조와 조정에서 보자면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웃기는 일이었다. 고니시를 구하러 온 시마즈 요시히로와 소 요시토시 등은 수많은 부하와 배들을 잃은 채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달아났다. 이순신이 금 갑옷을 입은 적장이 있는 큰 배를 공격하려 했다는 점을 보면 시마즈 요시히로나 적어도 그에 버금가는 무장이 이순신에 의해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 입장에서는 천만다행히도, 조선 입장에서는 아쉽게도 살아 돌아갔지만. 일본의 피해는 <선조실록>에 실린 좌의정 이덕형의 보고로는 적선 200척 격침에 전사자 수천 명, 명나라 군문이 통보한 내용은 100척 포획에 200척 분멸, 수급 500여급 참수에 물에 빠져 죽은 자는 수를 알 수 없다 하였고, 조경남의 <난중잡록>에는 적선 50여척만이 살아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기록이 엇갈리는 면이 있지만, 이덕형은 서로군에 종군 중이었기에 자세한 전과를 확인할 수 있는 위치이며 조경남은 의병장으로 순천 예교성 전투에 참전하였기에 역시 단순히 소문만 듣고 노량해전에 대한 기록을 남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확인된 전과 200척 격침에 피해 없이 온전히 살아 돌아간 배가 50척이라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조명연합군의 피해는 명나라는 등자룡 등 세 명의 장수의 전사가 확인되고, 이 외에 등자룡과 동승한 군사들이 전사하였을 것이다. 조선군은 30여명이 전사하였는데 그 중 10여명이 가리포첨사 이영남, 낙안군수 방덕룡 등 장수급 인물이었으며, 송희립과 유형 등의 군관 중에서 부상자도 있었다. 배의 피해는 등자룡의 판옥선 소실을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지만, 가장 큰 손실은 통제사 이순신의 전사였다. 전투가 끝난 후 진린은 이순신에게 구해준 것에 대하여 사례를 하려 하였으나, 전사소식을 전해 듣고는 세 번이나 쓰러지면서 “나는 노야(老爺 이순신을 지칭)가 살아와서 나를 구원한 것으로 생각했는데, 어찌하여 죽었는가?”라 말하면서 통곡하였다. 군사들도 이순신의 전사사실을 알고 바다가 떠나가도록 통곡하였고, 백성들도 이순신의 전사소식에 노인에서 어린 아이에 이르기까지 골목을 메우고 통곡하였다. 시장에 나간 자들은 이순신을 기리기 위해 술자리를 피하였으며, 명나라 병사들까지도 고기를 물리고 먹지 않았다. 이순신의 상여가 들어오자 호남의 선비들은 글을 지어 제사를 지냈으며 관을 운반하려 하면 백성들이 수레를 잡으면서 “공이 실로 우리를 살렸는데, 이제 공이 우리를 버리고 어디로 가시오.”라며 말하면서 우니, 관을 실은 수레가 나갈 수가 없었다. 명나라 군문 형개는 “바다 위에 사당을 세워 충혼을 표창하여야 할 것이다.”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자, 바닷가 백성들이 스스로 사당을 지으니 이것이 현재 전남 여수에 있는 충민사이다. 백성들이 죽음에 통곡하고 백성들이 사당을 지은 영웅, 이순신은 요즘 일부에서 우기고 있는 것처럼 지배층의 정치적 필요에 의하여 ‘위에서 만들어진 영웅’이 아니라, 백성들의 공감과 존경을 바탕으로 ‘아래에서 이루어진 영웅’이었던 것이다. 아니 정확히는 ‘ 위아래 모두에 의해 인정된 영웅’이었다. 명량대첩 이후로는 서인이나 북인들도 이순신을 공격하는 일이 없었으며, 조선을 지배하는 사대부들도 이순신을 비판할 수 없었다. 명나라 장수들도 종전 후 선조가 찾아가서 명군 덕분에 위기를 넘겼다고 하니, 그 오만한 명나라 장수들이 자신들을 낮추고 이순신을 더 칭송하였다. 선조는 이런 명나라 장수들의 말에도 이순신을 인정하는 말은 하지 않고 명군만 높이거나 화제를 돌렸지만, 사실 선조가 그토록 이순신을 시기하고 괴롭힌 것도 이순신의 능력과 업적, 그리고 백성들의 존경이 자신이 따라갈 수 없는 경지임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전투 종료 후 경상우수사 입부 이순신이 임시로 함대를 지휘하여 귀환하였고 충청병사로 있던 이시언이 일단 통제사로 임명되었다. 아직 경상도 해안에는 수많은 적이 남아 있었지만 이순신이 없는 이상 더 이상의 전투는 이어지지 않았고, 일본군이 자국으로 모두 철수하면서 7년간의 전란은 막을 내렸다. 최근에는 노량해전을 이순신이 도망가는 적을 공 좀 세우려고 쫓으려다 죽은 것으로 폄하하는 이들도 있는데, 아무것도 모르고 하는 헛소리이다. 이 전투는 엄연히 고니시 구원군을 맞아 불가피하게 이루어진 전투였다. 이순신이 일본군을 끝까지 위협한 것은 복수의 의미도 있지만, 언제 재침할지 모르니 조금이라도 적 전력을 감소시킬 필요가 있은 것이다. 실제로 전후에도 몇 년간 명군이 조선에 주둔하였으며, 강항 같은 귀환포로들의 보고를 보면 일본 내에 조선재침을 주장하는 무리도 있었음이 확인된다. 물론 포로들은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내분을 빚는 일본 내의 정치상황으로 보아 재침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했으며 실제 역사도 그렇게 이어졌지만, 종전 직전 시점에서는 일본의 재침가능성은 무시할 수 없는 위협이었다. 결국 마지막 전투에서 승리를 거둠으로 이순신과 조선수군은 끝까지 일본군의 악몽으로 남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