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반도 형태의 지형 - 선암마을 >

< 단종의 애사를 간직한 단종왕릉 - 장릉
>

< 신선이
내려와서 노닐정도로 아름다운 요선암 >

< 굽이쳐 흐르는 모습이 가히 예술적인 동강의
어라연 계곡중의 한곳 >

< 억겁의 세월을 묻고있는 고씨동굴
>


< 별로마 천문대
>

<
아득히 내려다 보이는 선돌에 꿈결같은 물안개가 감돌아 가고 있다 >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와 사약을 받고 승하한 관풍헌,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시를 남겼던 자규루, 그리고 주검이 묻힌 장릉 등에서 생생한
단종의 한과 넋을 느끼어 본다


정조 15년(1791)에 건립된 곳으로 단종을 위하여 목숨을 받친 충신위(忠臣位) 32인, 조사위(朝士位)
198인, 환관군노위(宦官軍奴位) 28인, 여인위(女人位) 6인을 합하여 264인의 위폐(位牌)를 모셔놓은 곳이다.
매년 한식날
단종제향후 제사를 지낸다.


정조때 박팽년의 후손인 영월 부사 박기정이 수축한 우물로, 단종제를 올리는 한식때
제정(祭井)으로 사용했다.
일설에 의하면 보통때는 조금씩 샘이 솟았으나 매년 한식날 제사 지낼 때에는 물이 많이 솟아 올랐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정려각은 1726년(영조 2년)에 어명으로 세운 비각으로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는 정여문이다.
비석은 1833년(순조 33년)에 가필하여 같은 해에 또 다시 증축하였으며, 1876년 (고종 13년)에 고종이 증시하기를 '충의'라
하여 1879년 (고종 16년) 비석에 있는 것을 다시 고쳤다.


한식날인 단종제향때 제물을 올리는 곳으로 정자각 또는 배위청(拜位廳)이라 한다.


1698(숙종24년)노산묘를 장릉으로 추봉하고 영조 9년에 비각과 수복실, 정자각을 세웠다.
비석전면에는 "조선국 단종대왕 장릉"이라 쓰여있다.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장릉에 있는이 배견정은 장릉(莊陵)에서 능선을 타고 남쪽으로 남하하던
거북이가 머리를 번쩍 들고 맑은 하늘을 바라 보는 것같은 형상을 한 언덕위에 네모진 아담한 정자가 있으니 배견정이라 한다.
배견정은 낙화암에서 순절한 시녀들의 넋이 단종묘소를 찾아와 죽어서 두견이 되었다는 단종대왕 영혼 앞에서 울며 절하던 곳이라 하여
배견정이라 이름 지은 것으로서 이 정자는 1792년 사육신의 유일한 혈손인 박팽년의 현손인 박기정 부사(朴基正 府使)가 창건하였다.
단종을 두견새에 견주어 말하 것은 여기서 연유된다.
옛적에 중국 촉나라의 망제가 그 신하인 “요령”에게 임금의 자리를
빼앗기고 궁궐을 쫒겨나서 서선에 숨어 살면서 복권되기를 기원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끝내 객사하였다.
이에 촉나라에 돌아가지 못한 그
원귀가 새가 되어 “촉혼귀” “촉혼귀”하며 울었으므로 그 새를 두견새라 하였다고 한다.
이 새의 이름은 여러 가지로 불리워지는데 두우,
두혼, 촉혼, 촉백, 자규 등이다. 왕위를 빼앗기고 객지에서 죽은 왕의 영혼을 비유하는 말이다.


영월 장릉 경내 입구에 낙촌기적비각이 있으니 영월군수이던 낙촌 박충원이 노산묘를 찾은 일에 대한
사연을 기록한 기적비각이다.
이 비각은 1974년 5월 5일 그 후손들에 의해 건립된 것으로 1973년 성균관장 창산 성낙서가 쓴
비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단종이 폐위되어 영월로 유배되고 사육신의 참화가 일어나고 종친, 구신 등 삼족멸문의 화가 계속되니
세정은 극도로 음험할 때 단종마저 사사당하시니 엄흥도는 충성으로써 단종시신을 업어다가 황량한 산골에 암장하였다.
어제의 군왕이 오늘과 같이
참변을 당하셨으니 어찌 천도가 무심하며 금지옥엽의 영혼인들 어찌 철천의 한이 없겠느냐. 엄호장 마저 세상을 떠나니 그 묘소조차 알길이 없어
풍설속에 버려지게 되었다.
이 후로는 이 고을 군수가 도임하면 원인 모르게 죽기를 7인에 이르렀다.
중종 36년에 박충원이
군수로 부임한 즉 군리(郡吏)가 피신할 것을 권하였으나 박충원은 죽는 것은 명이라 하고 의관을 정제하고 등촉을 밝히고 단정히 앉아 있었는데
비몽사몽간에 임금의 명을 받들어 온 세사람에게 끌려가 본 즉 숲속에 어린 임금을 여섯신하가 둘러서 모시고 있었다.
임금을 꾸짖어 내다
처형할 것을 명하였으나 세 번째 있던 이가 살려두자고 임금께 아뢰어서 처형을 모면하였다.
깨어보니 꿈속의 일이 단종대왕의 일이라 짐작하고
날이 밝기를 기다려 단종묘소를 수소문함에 엄호장의 후손의 안내로 찾아가 보니 꿈 속에서 본 바와 같으므로 묘소를 수축하고 정중하게 제사를 올리니
그 후부터는 군수가 부임초에 죽어가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단종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단종역사관
잊혀지고 왜곡된 단종의 역사를 바로 잡고
이를 널리 알리고자 건립된 단종 역사관은 단종의 즉위식에서부터 사약을 받는 모습 등 단종의 일대기를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연대기식으로
모형전시되어 있다.

수려한 절경으로 인해 관광객의 발길이 끊기지 않는 청령포에 얽힌 단종의 비화를 아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영월군 남면 광천리 남한강 상류에 위치한 단종의 유배지로, 1971년 강원도 기념물제5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제6대 왕인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상왕으로 있다가,그 다음해인 1446년 성삼문 등 사육신들의 상왕복위의 움직임이 사전에 누설됨으로써 상왕은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중추부사 노득해가 거느리는 군졸 50인의 호위를 받으며 원주, 주천을 거쳐 이곳 청령포에 유배되었다.
청령포는
동, 남, 북 삼면이 물로 둘러싸이고 서쪽으로는 육육봉이라 불리는 험준한 암벽이 솟아있어 나룻배를 이용하지 않고는 밖으로 출입할 수없는 마치
섬과도 같은 곳이다.
단종은 이 적막한 곳에서 외부와 두절된 유배생활을 했으며, 당시에는 이곳에 거처할 수 있는 집이 있어 호장
엄흥도는 남몰래 밤이면 이곳을찾아 문안을 드렸다고 전한다.
그 해 뜻밖의 큰 홍수로 강물이 범람하여 청령포가 물에 잠기게 되니 단종은 영월
동헌의 객사로 처소를 옮겼다.
지금 청령포에는 단종 유배시에 세운 금표비(禁標碑)와 영조때 세운 단묘유지비(端廟遺址碑)가 서있어
옛일을 전하고 있다. 또한 망향탑, 노산대, 관음송이 있다.


2000년 4월5일 단종문화제와 때를 맞춰 건립된 단종어가는 승정원일지의 기록에 따라 기와집으로
그 당시의 모습을 나름대로 재연했다.
어가에는 당시 단종이 머물던 본 채와 궁녀 및 관노들이 기거하던 사랑채가 있으며 밀납인형으로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어가 담장 안에 유지비각이 위치해 있다.
이 어가는 어가 또는 적소라는 명칭에 대한 논란과 주거형태, 어가의
위치 등 여러 가지 문제로 한동안 논란을 겪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그러나 승정원일지의 기록에 따라 기와집으로 재현했다.


이비는 총 높이 162cm로 밑으로 1단의 화강석 비좌 위에 오석으로 된 비신을
세우고
전면에는 「端廟在本府時遺址」(단묘재본부시유지)라 새기고
후면에는 「皇命崇禎戊辰紀元後三癸未季秋泣涕敬書
令原營 石」(황명숭정무진기원후삼계미계추읍체경서 영원영수석)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 비석은 전면 측면 각 1간의 비각안에 보존되어
있다.
이 비각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금표비가 있다.


이 비석에는 「東西三百尺 南北四百九十尺 此後泥生亦在當禁」(동서삼백척
남북사백구십척차후니생역재당금)이라 기록되어 있다.
청령포에서 동서로는 삼백 척을, 남북으로는 사백 구십 척 안에서 금표나 금송에
대한 채취 금지항목으로 일반인이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도록 하는 의미로 세워진 것이다.


청령포 뒷산 층암절벽 위에 있는 탑으로 단종대왕이 유배생활을 할 때 자신의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근심속에서도 한양에 두고 온 왕비 송씨를 생각하며 여기저기 흘어져 있는 막돌을 주워 쌓아 올렸다는 탑으로 단종이 남긴 유일한
유적이다.


청령포수림지에 위치하고 있는 소나무로 단종 유배시의 설화를 간직하고
있다.
1988년 천연기념물 제349호로 지정되어 있다. 단종 遺址碑閣(유지비각)서편에서있다.
단종이 유배생활을
할 때는 두 갈래로 갈라진 이 소나무에 걸터앉아 쉬었다는 전설이 있다.
또한 단종의 유배 당시 모습을 보았으며(觀),
때로는
오열하는 소리를 들었다(音)는 뜻에서 관음송(觀音松)이라 불리어 왔다.
소나무 크기는 높이 30m, 가슴높이의 둘레 5m로
지상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동,서로 비스듬히 자랐다.
갈라진 줄기의 밑둘레는 3.3m, 남북 20m로 가지를 펼치고 있다.
수령은
600년으로 보고 있는데, 이는 단종 유배시의 수령을 80년으로 하여 계산된 것이다.
청령포는 남한강 상류에 3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섬과 같은 곳으로 주변에는 우거진소나무의 숲이 있고, 관음송은 그 소나무 숲 중앙에 자리잡고 있다.


영월군 남면 광천리 청령포에 위치한 이 수림지는 수십 년에서 수백 년생의 거송들이 들어 찬
수림지로 단종의 유배처를 중심으로 주위에 울창한 송림을 이루고 있다.
이 수림중에는 남송이라 불리우는 가장 큰 노송이 있는데 그 높이가
30여m나 되어 다른 노송보다 두배나 더 크며, 또 여송이라 불리우는 거송이 있는데 마치 裸女(나여)가 거꾸로 서 있는 형상인데 나무의 북쪽은
엉덩이 모양을 하였고 남쪽은 흡사 음부처럼 생겼을 뿐만아니라 음문까지 자연적으로 생겨 있어 여송임을 입증하고 있다.


청령포 바로 뒷산으로 일명 刀山이라고도 하는데 청령포에서 솟아오른 암벽으로 된 이 산은 6개의
작은 봉을이루고 있어 육륙봉이라고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육륙봉은 어찌 보면 톱날과 흡사하다.
선돌
날골과 남애마을 사이에 높이 70m 정도의 큰바위가 서있는데 이 바위를 선돌이라 한다.
선돌은 일명 신선암이라고도
하는데 선돌은 푸른 강과 층암절벽이 어우러져 마치 한폭의 그림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선돌은 영월읍 방절리 서강 안에 절벽을
이룬 곳에 위치해 있는데 마치 큰 칼로 절벽을 쪼개 내리다 그친 듯한 형상을 이룬 입석을 말한다.
이 입석의 바로 앞에 우뚝선 거암은 신비로울 뿐만 아니라 절벽과 입석사이로
내려다 보이는 강물은 마치 한폭의 수묵화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단풍이 들면 마치 금강산의 일부를 보는 듯한
절경을 이루는데 더욱이 이곳 선돌은 영월관문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많은 관광객들이 이곳에 와서 선돌의 절경을 구경한다.
전망시설 아래로 펼쳐진 장엄한 두갈래의 우뚝솟아있는 바위(높이70m)를 선돌(立石)이라 불리어 오고 있으며 서강의
푸른물과 층암절벽이 어우러져 마치 한국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하여 신선암(神仙岩)이라고도 한다.
[연계관광지]
ㅇ 선돌 →
장릉(3Km) → 보덕사(05Km) → 관풍헌(2.5Km) → 금강정(500m) → 청령포(3Km) → 고씨동굴(13Km) →
김삿갓유적지(16Km) → 내리계곡(14Km) (4시간소요)
< 고씨동굴 >
영월군 하동면 진별리에 소재하고 있는 석회동굴 주굴(主窟)의 길이 1,800m에 이르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동굴의
하나로 1969년 6월 4일 천연기념물 제219호로 지정되어있다.
영월읍에서 동남쪽 12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영월화력발전소에서 동남쪽으로 6km떨어진 남한강 상류 하식단애(河蝕斷崖)에 위치하고 있다.
고씨굴이란 임진왜란 당시 고씨가족이 피난하였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그 밖에도 이곳은 수도장 등으로도 이용되어 왔다고 전한다.
1966년 4월 한국동굴학회가 이끄는
한일합동조사단에 의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그 후 건국대학의 홍시환(洪始煥) 교수팀의 본격적인 개발조사와 당시 유은재(兪銀在)군수,
박영국(朴泳國) 관광협회장의 헌신적인 노력에 의해서 관광돌굴로 개발 공개되었다.
이 동굴이 형성된 지질년대는 고생대(古生代)의
대석회암통(大石灰岩統)에 속하는 지층으로 약 4~5억년전에 형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굴이 1,800m, 지굴(支窟)을 합하면
총연장 3km에 달하는 동굴이다. 해발고도 210m의 강변에 위치하고 있는 고씨굴의 기상환경에 대한 학계보고에 따르면 동굴내부의 기온은 연교차는
비교적 적은 편이며, 일교차는 약 10도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1986년 11월 16일 14시에 실시한 동굴 안쪽의 기온이
4.5℃일때 바깥쪽은 그보다 약간 낮은 3.2℃였다. 동굴내의 기온은 입구에서 멀어짐에 따라 점차 상승하여 중간지점인 구름다리 앞에서는
10.2℃였고, 가장 안쪽인 광장의 기온은 16.2℃였다. 즉 외부보다 13℃정도 높다.
동굴 내부의 습도는 동굴에서 300m
지점까지는 상대습도 50% 미만이나 깊어짐에 따라 습도는 높아지고 특히 주변에 물이 있는 곳에서는 60%를 상회하였다.
수온은
12℃이고 계절적 변화는 0.6℃ 내외이며 외기변화의 영향은 적은 편으로 나타나 있다.
동굴을 형성하는 지형지물의 분포 특징은 상층
지각(地殼)의 구조암석인 석회암질의 구조성분과 지표에서의 침투 수량 미치 기간, 집중도 등과 깊은 관련이 있다.
이 동굴에서 싹트고 있는
2차 생성물로 대표적인 것은 종유석(鐘乳石)과 석순(石筍), 석주(石柱), 유석(流石), 석회화단구(石灰華段丘)등의 석순경관(石筍景觀)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이 동굴의 대표지역이라 할 수 있는 제3지역에서는 현수상 종유석군(懸垂狀 鐘乳石群), 석회화폭(石灰華瀑),
석막석순(石幕石筍) 그 밖에 섬세한 형성물체들이 있으며,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절묘한 형상을 하고 있다.
그 밖에 경승지로는
십이선경(十二仙境) 일대와 무량탑(無量搭)등의 거대한 종유석군, 석주열(石柱列), 천궁(天宮) 일대의 대형 선순군 등을 들 수
있고,
기형형성물(奇形形成物)로는 극락전(極樂殿) 일대의 유석군, 신농지(神農池), 꿈의 궁전, 천불대(天佛臺) 등이 있으며, 이들은 모두
보존가치가 높은 것으로 주목되고 있다.
동굴생물로는 1965년 분포조사 때 동굴내부의 호수에 많이 서식하고 있는 백색의 엽새우를
비롯한 20종의 동굴생물이 보고된 바 있고, 1971년도 조사에서는 소과 2종, 게새우 5종, 지네 4종, 곤충류 17종, 포유동물 3종, 거미
10종 등 41종을 확인하였다.
이들의 생태적 분포는 진동굴성(眞洞屈性)이 14%, 호동굴성(好洞屈性)이 35%,
외래동굴성(外來洞窟成) 50%로 나타나 있다.
이중에는 지구상에서 4~5억년 전에만 볼 수 있었던 화석곤충인 갈로와 충(蟲)이 서식하고
있음이 밝혀져 학술적으로 큰 관심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이 동굴은 현재 내부 1km까지 관광용동굴로 개발 공개되고 있어 훼손 또는
오염의 우려가 있다.
관리자는 물론 출입 관람객의 세심한 주의가 요망되고 있다.

< 한반도 지형 형태의 선암 마을 >
맑고 청명한 서강의 물줄기는 서면 선암마을변에 우리땅을 그대로 복원하듯 한반도 지형을 만들어 놓았다.
마을
사람들이 옛날부터 한반도를 닮았다 하여 찾아간 선암마을의 한반도지형은 삼면이 바다인 우리땅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풍경으로 서강변에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다.
서해바다 와 남해바다 그리고 동해바다까지 온통 작고 이름없는 아담한 선암마을에 모여든게 신기하다.
남북한간에 평화와 공존을 이야기하는 시점에서 선암마을의 한반도지형처럼 하루빨리 통일이되어 아름다운 금수 강산 곳곳을 자유롭게
구경할 날을 기대해 본다.
영월군 서면 옹정리 선암마을 앞에 위치한 옹정리 산 180번지는 한반도의 모형과 흡사하여 이 곳을 찾는
관광객이 해마다 늘고 있다.
동해안과 서해, 남해안에는 서강물이 감싸고 돌아 한반도의 형상과 똑같다는 평을 받고 있다

동강의 많은 비경 중에서도 가장 잘 알려진 곳으로 , "고기가 비단결 같이 떠오르는 연못"이라는 뜻 선인들이
전하기를 "사람은 절경에 흘리고 비경에 몸을 던진다. "고 하듯이, 천하절경을 본 사 람은 많아도 천하비경을 본 사람은 많지 않다.
비경은 숨어 있어 속세인에게는 그 모습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어라연은 동강의 상류인 거운리에 위치하고 있다.
어라연은
일명 삼선암이라고도 하는데 옛날 선인들이 내려와 놀던 곳이라 하여 정자암이라 부르기도 하였다고 한다.
강의 상부, 중부, 하부에
3개의 소가 형성되어 있고 그 소의 중앙에 암반이 물속으로부터 솟아있고 옥순봉과 기암괴석들이 총총히 서 있는 모습이 마치 사람같기도 하고 또
불상같기도 하며 또 짐승같기도 하여 볼 때마다 그 모양들이 천태만상으로 보인다.
또 금리월척이 벽담에 미만하고 이상스런 풀잎들이 바위틈에
솟아 금강산의 일부를 가져다 놓은 듯 하기도 하다.
1431년(세종 13년)에 큰 뱀이 바위 맨 위에 가끔 나타났다.
당시
그것을 본 사람들의 전언에 의하면 그 길이가 수십척이며 비늘은 동전만 하고 머리에는 두귀가 나 있고 복부에는 발이 네 개 있었다고 한다.
그 때 그 소문이 퍼지자 조정에서는 권극화(權克和 )를 보내어 알아보게 하였다.
극화가 연못 가운데 배를 띄우니 갑자기 폭풍이
일고 파도가 험악하여 지더니 그 자취를 찾을 수 없었다.
그 후 큰 뱀의 모습도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영월 땅이름의 뿌리를
찾아서)
당시는 어라연 동편에 어라사라는 절이 있어 풍치를 더욱 돋우었다고 하나 지금은 그 사지(寺址)만 남아있다.
(차량은 자연보존 차원에서 전면 통제하므로 다리 건너기전에 주차)

< 신선이 노닐던
요서정, 요선암 >
요선정은 수주면 무릉리에 위치하고 있는 정자로, 앞에는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고, 강 기슭 큰 반석 위에는 요선암이라 새긴
刻字(각자)가 있다.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74호로지정 되어 있다.
요선정은 불교 전성기인 통일 신라시대 철감국사 도윤과 징효대사가 이 곳에서 그리 멀지않은 사자산 기슭에 흥령선원을 개원하고 자주
이 곳에 와서 포교를 하던 곳으로 그 당시 작은 암자가 있던 곳이라 한다.
또한 징효대사가 이 곳에서 열반했을 때에는 1천여개의 사리가
나왔다는 불교와 인연이 깊은 곳이다.
지금도 정자 주변에는 마애여래좌상과 작은 석탑 1기가 남아있다.
요선정 앞에는 치악산에서
흐른 물이 옛 흥녕선원지 앞을 지나는 법흥천과 합류하여 맑은 계곡을 형성하고, 깊은 물이 흐르는 강바닥에는 물에 씻긴 큰 바위들이 넓게 깔려있어
아름다운 계곡을 이루고 있다.
강기슭 반석 위에는 요선암이란 글씨가 새겨져 있어, 이곳을 요선암이라 부르고 있다.
이 글씨는 조선시대 시인이며 서예가인
楊蓬來(양봉래)가 평창군수 시절 선녀들과 함께 이곳에와 일대의 경관을 즐기다가 새겨놓은 글씨라 전해오고 있다.
邀僊(요선) 또는
邀仙(요선)이라 쓴 글씨의 뜻은 신선을 맞이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요선정은 대대로 이 지방에 살고 있는 원세하, 곽태응,
이응호를 중심으로 하는 주민들이 힘을 모아 숙종, 영조, 정조 세 임금이 써준 御製詩(어제시)를 봉안하기 위하여 1913년에 세운
정자이다.
영월 땅에 세분 군왕의 御製御筆詩文(어제어필시문)이 내려진 것은 숙종 말년인 172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숙종대왕께서는 1446년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영월에 유배된후 사약을 받고 승하하신 선대왕을 단종으로
복위하고 종묘에 모시는 한편 노산묘를 장능으로 추봉하는 등 조선초기의 왕조애사를 바로 잡기 위해 힘쓰신 분으로, 영월 유배길의 소상한 일들을
물어 살피시다가 1698년(숙종24) 정월에 憑虛,晴虛兩樓詩(빙허,청허양루시) 한수를 써서 당시 강원감사 심정보에게 내리니 어제어필
시문이 주천현루인 청허루에 간직되었다.
그러나 청허루에 화재가 있어 어제시는 누대와 함께 소실되고 말았다.
그후
청허루를 중건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영조대왕께서는 선왕의 시문을 먼저와 같이 그 자리에 보존하기 위해 숙종대왕의 어제시를 손수 쓰고, 그 뒤에
다시 시 한편을 더 보태어 당시의 강원감사인 林鏶(임집)에게 내리니 새로 중건된 청허루에는 두 임금의 어제시를 봉안하게 되었고, 그 후 다시
정조대왕께서는 청허루에 봉안된 두 분 선왕의 어제시를 소중히 간직할 수 있도록 "敬吹酒泉縣樓所奉 序"(경취주천현루소봉 서)를 지어 두분 선왕의
어제시옆에 걸게 하니 그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있다.
주천은 옛 고을로서 지금은 원주에 속해 있으며 청허와 빙허의 두 누각이
있는 경치좋은 곳으로 옛날 심정보목사가 있던 고을이다.
숙종대왕께서 지으신 시의 현판은 그간 화재를 입었는데 무인년
고을을 지키던 신하가 중건하였음을 영조대왕께서 들으시고 原篇(원편)을 찾아 손수 쓰시고 서문을 지으시여 근신에게 명하여 달게하니 한 누각이
이루어지고 훼손되는데 따라 무겁고 가벼움이 있는게 아니라. 좋은 글과 글씨가 황홀하기만 하니 이 누는 이것으로 빛나고 그 고을의 산천 또한 이
누로 인해 빛나니 이누각이 이 고을의 자랑이 아니겠는가.
기와를 잇고 수리하는 일은 가히 힘쓸줄 믿으니 공경해서 시를 짓고 대략을 적어
그 곁에 달게 하노라>
하는 내용의 서문과 함께 정조대왕은 어제시 한편을 내려주셨다.
그러나 이 자랑스러운 두 누각은 오랜
세월속에 퇴락하여 마침내 무너졌고, 세 임금의 寶墨(보묵)은 민가에서 보존되니 이를 봉안하고자 무룽리에 요선정을 짓고 어제어필시문을 봉안하게
되었다.
요선정에 봉안되어 있는 어제시는 두 틀 板額(판액)에 보존되어 있으며,그 중 하나에는 <숙종대왕어제시
designtimesp=23299 designtimesp=15862 designtimesp=17214 designtimesp=20856>와
<영조대왕어제어필시 designtimesp=23300 designtimesp=15863 designtimesp=17215
designtimesp=20857>를 담았고, 다른 한쪽에는 정조대왕의 친필서문과 어제시를 담고 있다.
무릉리 마애불좌상
요선정 옆 바위 한면에 음각으로 새겨 놓은 마애불좌상은 1982년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74호로 지정되었다.
강원도 내 마애불상은 많지 않다. 철원군 동송면에 있는 마애석불과 함께 문화재로 지정된 예는 2구에
불과하다.
이 곳에 있는 마애불은 그 중의 하나로 얼굴은 양각으로 되어 있으나 그 밖의 부분은 선각으로 음각한 좌상이다.
얼굴은
타원형으로 양감이 풍부하며 머리는 소발로 육계가 있다.
상체는 길고 원만하지만 결가부좌를 하고 있는 하체는 상체에 비해 크게 조각이 되어
조금은 균형을 잃고 있다.
두 손은 가슴에 표현하였는데 오른 손은 자연스럽게 펴서 손등을 보이고 있고, 왼손은 오른 손에 평행이 되게 들고
있다.
광배는 두신광을 표현하였으며, 그 중 두광은 연꽃무늬를 돋을 새김하였고, 신광은 두줄로 선각해 놓았다.
밑으로 연꽃 문양의
대좌가 있어 그 위에 부처가 앉아 있는 모습으로 높이는 3.5m이다.
전체적으로 상하의 균형을 잃고 있으나 힘찬 기상이 잘 표현되어 있는
마애불상으로 옆에 있는 청석탑과 함께 고려 시대에 제작된 불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금강정(錦江亭)
영월읍 영흥리 남한강의 상류 연안에 자리하고 있는 조선시대에 세운 정자로 강원도문화재자료
제24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정자는 1428년(세종10)에 김복항이 건립한 정자라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그와는 달리
寧越題詠(영월제영)에는 군수 이자삼이 금강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리로 정자를 짓고 금강정이라는 이름을 달았다고도 한다.
금강정 아래로는
푸른 동강이 흐르고 있으며, 앞으로 보이는 계족산과 태화산이 절경을 이루고 있어 , 1684년(숙종10)에 우암 송시렬이 그 절경을 바라보며
금강정기를 썼다고 전해온다.
정면 3간, 측면 3간익공계 양식의 건물로 바닥에는 마루를 깔았으며, 처마는 겯처마에 팔작지붕이고 모로단청 을
하였다.
낙화암(落花巖)
금강정 윗쪽 동강의 높은 절벽위에 있는데 1457년 10월 24일 단종이 관풍헌에서 승하하자 단종을 모시던
1궁노 10궁녀 그리고 시종들이 모두 이 곳 절벽에서 투신 순사하였다.
이들이 투신 순사할 때의 모습이 마치 꽃이 떨어지는 것 같다하여
낙화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단종의 시신까지 강물에 버렸다고 한다.
이곳 투신 순절한 자리에는 "낙화암"이라고 비문을
새긴 작은 비석이 서 있어 발길을 멈추게 하고 있으며 낙화암비 바로 옆에는 "순절비"라 새겨진 비석(약 2m)이 서 있어 그 당시의 슬픈일들을
말해주고 있다.
여기서 강물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은 영월호장 엄흥도가 몰래 건져서 동을지산에 암장하였고 이곳에서 투신 순절한 시종들에
대해서는 후일 민충사를 세우고 그 영혼을 제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는 두 곳의 낙화암이 있는데 그 하나는 백제의 수많은
궁녀가 몸을 던진 부여의 백마강에 있고, 나머지 하나가 이곳 영월의 낙화암입니다.
단종이 승하한 관풍헌에서 동쪽으로 600m 떨어진
금강정 절벽에서 동쪽으로 있는 마지막 절벽이 바로 낙화암입니다.
민충사(愍忠祠)
금강공원내에 위치하고 있는 사당으로 단종 승하후 낙화암에서 강물에 몸을 던져 단종의 뒤를 따른 시녀와 시종들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27호로 지정되어 있다.
민충사 앞에 자리잡고 있는 금강정에서 동쪽으로 암벽을 이루고 있는
낙화암이 있다.
1457년 관풍헌 처소에서 사약을 받고 단종께서 승하하시니 단종을 모시던 시녀와 시종들이 이 낙화암에서 몸을 강물에 던져
순절하니 당시 순절한 사람이 10인 또는 99인이라 전하기도 하고, 또는 현 장릉 경내 배식단에 모신 위패가 6위인 점으로 보아 낙화암에서
순절한 시종은 6인으로 보기도 한다.
민충사는 이 일과 관련하여 순절한 여인들을 모신 사당으로 1742년(영조18)에 홍영보가 창건하고
1791년에 영월부사 박기정이 개축하였다. 사당내에 "英廟 壬戌命建詞 戊寅特賜額重修令 上十五年 辛亥改建 觀察使尹師國 "(영묘 임술명건사
무인특사액중수령 상십오년 신해개건 관찰사윤사국)이란 기록으로 보아 이 사당은 조정의 명을 받아 건축하고 사액을 받은 사당임을 알 수 있다.
건물은 자연석 기단위에 전면 3간 측면 2간의 규모로 전면은 반간을 물려 각 간마다 2분합 띠살문을 달았다. 기둥은 자연석 주초위에 둥근
원주를 세웠다. 건물구조는 익공 계통의 양식을 따랐으며 지붕은 흩처마 맛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월기경춘순절비(越妓 瓊春殉節碑)
금강공원내에 "월기 경춘순절지처"라고 쓰여진
비석이 있는 바, 이 비는 강원도 순찰사 巽菴(손암) 李公이 비용을 내고 평창군수 南羲老(남희로)가 비문을 짓고, 영월부사 한정운이 글씨를 써서
세운 것으로 경춘이 죽은지 24년만인 을묘(1795) 8월이었다.
비문의 요지를 보면 다음과 같다.
「영월기 경춘은 이시랑이 영월에 왔을 때 처음 몸을 허락한 터이기에
깨끗이 수절하려 하였더니 후임관원이 온 뒤 자주 불러 볼기를 때리니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하루는 몸단장을 잘하고 들어가서 웃는 낯으로
몸을 조섭할 것이니 수일후에 불러주면 한번 욕정을 들어 주겠노라고 하고 그 이튼날 아침 부친산소를 성묘하직하고 돌아와 동생의 머리를 최후로
빗겨준 다음 바로 금강 벼랑에 앉아 몇가락의 노래를 부르니 눈물은 옷 자락을 적시었고 비통함은 참기 어려웠다.
이 때 어린 동생이 따라와
있었으므로 속여서 집으로 보내 놓고 분연히 벼랑에서 몸을 던져 물에 빠져 죽으니 때는 임진년(1772)10월이었고 그 때 나이
16세였다.
집안 사람들이 달려와 보니 옷 속에 감춰져 있는 것이 있어 옷을 헤치고 보니 이시랑의 필적이었다.
오호라 그의 죽음이여,
의로움을 좇음이 아니리오.
이번에 도순찰사 손암 이공이 관동지방을 살피던 길에 영월을 지나다가 이 이야기를 듣고 말하기를 "미천한
신분인데도 이는 진실된 열녀라 할 것이니 옳은 풍속을 세우는데 도리가 아니겠는가" 하고 봉급을 내어 영월부사에게 비석을 세워 주도록 이르니 나
또한 그 전말을 적게 되었는지라 생각컨대 경춘이 죽은지 24년이라 우리 이공이 이를 처음 표창함이니 경춘의 절개는 장차 지워지지
않으리라」
금강공원수림지
이 수림은 수십년에서 수백년생의 거송들이 드문드문 들어서 있다.
이 송림 중앙에는 야외 특별무대가
설치되어 있고 그 남쪽으로는 충혼탑이 우뚝 서 있으며, 또 정조대왕태실비·금강정·민충사·낙화암 그리고 비석군이 위치해 있고, 북쪽에는 어린이
놀이터와 궁도장인 금호정이 있다.
또 서쪽에는 영월향교가 위치하고 있어 자연적인 공원을 이루고 있다.
난고 김삿갓의 문학 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다.
백일장에서 조부를 욕되게 하는 시를 썼다는 자책감으로 평생 방랑 시인을 지낸
방랑시인 김삿갓의 업적을 기리고, 그의 문학적 위상을 재조명하기 위해 조성되었다.
이곳에는 시비와 문학의 거리가 조성되어 있으며,
김삿갓의 묘와 생가가 있다.
김삿갓 유적지는 하동면 와석리 노루목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곳은 차령산맥과 소백산맥 준령의 북단과
남단에 위치하며, 경북 영주시와 충북 단양군과 경계를 이루는 3도 접경지역으로 산맥의 형상이 노루가 엎드려 있는 듯한 모습이라 하여 노루목이라
불려오고 있다.
또한 김삿갓 유적지내에 흐르는 '곡동천'은 여름철에는 유리알처럼 맑고 풍부한 수량이 기암괴석 사이로
넘쳐 흐르고 가을에는 형언각색 단풍으로 인하여 보는 이의 가슴을 평온하게 만들어 주는 신비로운 곳이다.
이처럼 산자수려한
고산준령 풍운속에 청운의 푸른 꿈을 접고 해학과 재치와 풍류로 한 세상을 살다간 조선 후기 방랑시인이자 천재시인인 김삿갓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난고 김병연 묘소와 주거지가 있다.
난고 김병연 선생은 원래 전라도 동복(지금의 전라도 화순군)에서 돌아가셨지만
아버지를 찾아 전국을 떠돌던 둘째 아들 익균이 주거지인 하동면 노루목 바로 이 곳 골짜기에 묻어 주었으며, 그의 묘소는 1982년
영월의 향토사학자 정암 박영국선생의 노력으로 처음으로 발견되었다.
김삿갓의 시대 정신과 "문화예술
魂"을 추모하고 문화적 가치를 재조명 하고,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김삿갓 계곡을 자연문화의 중심지, 문예인의 순례지, 김삿갓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하는 시선(時仙)으로 승화시켜 문화관광자원을 널리 알리기 위해 지난 `98년도부터 매년 10월초에는 "난고
김삿갓문화큰잔치"가 개최된다.
또한 강원도 시책사업인 『강원의 얼 선양사업』이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추진되어 유적지내 조경 및 도로포장 등 기반시설이 조성되어 쾌적한 관광지로 탈바꿈 하였으며 특히, 2003년 10월 "난고 김삿갓 문학관"이
개관되어 선생의 문학세계를 한 곳에 연구적으로 전시해 관광객들에게 교육 효과를 거양하고 있다.


[ 난고김삿갓]
선생은 안동김씨의 시조인 고려 개국공신 선평의 후예로
조는 선천부사 익순이고 부 안근과 모 함평이씨 사이의 이남이다.
순조 7년 정묘(1807년) 3월 3일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회암리에서
출생하였고 휘(諱)는 병연 자는 성심 호는 난고(蘭皐)이다.
순조 12년 임신(1812)선생 육세때 조부 익순이 홍경래란에 관련되어 3월
9일 복주(覆誅)되자 연루(連累)를 피하여 황해도 곡산에서 숨어 자랐다. (익순은 고종 정유년에 신원(伸寃)되고 순종 무신에 복작(復爵)되다)
그후 익순에 대한 문죄는 본인에 국한하기로한 조정 결정이 알려져서 선생은 모친과 함께 곡산을 떠나 광주, 이천, 가평을 전전하다가
평창을 거쳐 영월 삼옥에 정착하였다.
조부의 행적을 모르고 자랐던 선생은 20세때 영월도호부 동헌 백일장에서 조부를 지탄한 죄책으로
번민끝에 궁벽(窮僻)한 산협(山峽)인 이곳 어둔으로 이주하였다.
선생은 자책과 통한을 이기지 못하여 22세에 삿갓을 쓰고 방랑길에
나섰으며 김삿갓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선생은 57세로 운명할 때까지 전국을 두루 유랑하였으며 인간사 모든 것을 시제로
락운성시(落韻成詩)하였다.
또한 선생의 과시는 후세 과거 지망자들의 교범으로 쓰여졌을 뿐더러 특히 평민들의 생활상을 시로 읊어 빛나는
서민문학을 남기었다.
철종 14년 계해(1863) 3월 29일 전라도 동복에서 작고한 것을 3년후 둘째 아들 익균이 현재의 묘소로
이장하였다.
1982년 10월 17일 세상에서 잊혀졌던 선생의 묘소를 박영국은 김영배, 이상기등의 증언으로 이곳에서 찾아 내었다.
※ 자료 『김삿갓의 유산』중 시선 난고선생사적 기문
[ 난고 김삿갓 문학관
]
난고 김삿갓 문학관에서는 난고 김병연의 생애와 발자취를 쫓아 일생을 바친 정암 박영국선생의 김삿갓 연구자료가
전시되어 있고, 멀티미디어를 활용한 다양한 김삿갓 관련 자료를 상영하고 있다.
난고김삿갓문학관은 강원도 시책 사업인 "강원의 얼
선양사업"의 하나로 2003년 10월 개관했다.
김삿갓 선생의 생애와 문학 세게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으로, 매년 수많은 관광객이 찾아
그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출처 : 영월여행정보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