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정치-경제학이다!-gilles님의 '어떤 미적지근함에 대하여:자본주의의 소비자-모더니즘'에 대한 답변

[쌍수대인]

문제는 정치-경제학이다!-gilles님의 '어떤 미적지근함에 대하여:자본주의의 소비자-모더니즘'에 대한 답변

gilles님의 글을 보면서 제가 느꼈던 것은 어떤 착잡함이었나 봅니다. 사실 마르크스, 보들레르, 벤야민이 갖고 있던 최초의 가능성들을 되살리려는 버만의 노력은 그들의 섬세한 '차이'를 부각시키는데 초점을 두었다기 보다는, 일종의 '상상적 동일시'를 통해 과거로의 도약을 감행하려 했던 낭만적 정치주의자의 몸짓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gilles님의 글은, 그런 버만의 노력에 전혀 이의를 달지 않고 추수하기에 급급했던 제 글(물론 버만의 글에 대해 제가 쓴 네 번째 글은 좀 다르지만)에 대한 명확한 비판으로 보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gilles님의 글에 대한 제 반론이 아니라, 제 견해의 심화 내지는 확대로 이어질 것 같습니다(이 점은 전적으로 제 공부의 부족탓이니, 직접적인 답변이 되지 않더라도 이해해주세요). 생각해보니, 저에겐 좌파는 좌파대로 묶일 수 있다는 일종의 연합전선에 대한 믿음이 있나 봅니다. 그것은 요즘처럼 계급적 적대와 성적 차이를 은폐하며 때론 자본주의의 현상형태를 때론 지나치게 긍정하는 좌파이론과 문화주의에 대한 제 자신의 경도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으며, 비생산자라는 제 위치를 프롤레타리아트 계급과의 '상상적 동일시'로 은근히 규정하려드는 쁘띠-부르조아(이 말이 낡았나요?)적 계급 '무의식'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지금도 알 수 없는 그 무의식이 언젠가 '증상'으로 회귀할 날이 있을지어다!^^). 서구 맑스주의의 역사에 대해 고찰했던 어떤 맑스주의자가 말했듯이, 적어도 1960년 이후의 맑시즘은 문화와 철학으로 방향을 전회했고, 그러면서 맑스주의 정치, 경제학의 영역은 계급 적대와 갈등, 당파성을 강조하기보다는 차이와 연대의 포용 가능성으로 전환되었겠지요. 이는 gilles님의 말처럼, '생산'에서 '유통, 또는 소비'로 자본주의 경제의 패러다임이 이동한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일 수도 있고, 그만큼 정치-경제영역에서의 적대와 갈등이 전면적이라기보다는 국지적, 총체적이라기보다는 파편적이라는 데에 많은 이들이 동의했기 때문일 것입니다(물론 남한의 많은 맑스주의자들도 기본적인 생각은 이와 비슷합니다). 하지만 이는 제 관점은 아니고, 버만이나 68혁명 이후의 유럽 신좌파와 그들의 추종자들의 일정한 지향점일 겁니다(저도 물론 이 패러다임 내부에 있습니다). 파산한 미국 하층 계급 출신임을 강조하고 60년대 히피문화와 반전운동을 통해 맑스주의와의 최초의 만남을 갖고 지금도 히피처럼 청바지와 긴머리를 즐겨하면서 흑인들과 하층계급이 살고 있는 브롱스 거리를 배회하는 낭만적 천사^^ 버만은 물론 이들과도 변별되지만, 그가 <현대성의 경험>에서 내세우는 정치학인 "진정성의 정치학"에 전 이의를 갖고 있습니다. 그의 '진정성의 정치학'은 기본적으론 타인에 대한 동정과 연민이라는 감수성을 통한 자아의 확대와 타자와의 연대 가능성을 점치는 낭만주의자 루소의 자아관에 뿌리를 박고 있습니다(영어책이라서^^ 제가 읽지는 못했지만, 그의 첫 저서 제목은 <진정성의 정치>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프랑스 혁명의 정치이념-자유, 평등, 형제애-을 통해 발현되었고, 역사적 변천을 통해 미국으로 흘러들었을 때엔 공동체 윤리학으로 전환되었습니다. 버만의 컬럼비아 대학 스승이자 문학비평가인 라이오넬 트릴링이 공식화하고, 이후 캐나다의 헤겔 철학자 찰스 테일러나 성향은 좀 다르지만, 미국의 리처드 로티와 같은 신실용주의 철학자들이 강조하는 '연대성'의 뿌리엔 이런 자아의 확대를 통한 타자 혹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연민을 체험하는 정치적 감수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진정성의 정치'엔 대단히 자기중심적인 자아 혹은 공동체, 그리고 그런 자아나 공동체를 가능하게 한 문화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과 자부심이 깔려 있습니다. 급하게 말하자면, <욕망에서 연대성으로>의 저자인 이종영이 비판한 것처럼, 이런 연대성, 혹은 진정성에 뿌리를 둔 정치학엔 '나는 잠시 그들이 될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론 그들은 내가 되어야 한다'는 자기중심적인 사고가 깔려 있습니다. 이런 정치학은 가령 나는 멕시코 사빠띠스타 반군의 고통과 핍박에 동정하고 연대해서 그들을 도울 수 있다는 데까진 나아가지만, 만약 사빠띠스타 반군이 이에 대해 다른 견해를 취한다면, 다가갈 이유가 없는 정치학이 되는 셈입니다. 이에 대해 사빠띠스타 반군의 한 원주민 여성은 "당신이 우리의 고통에 연민을 느끼고 도우러 온다면, 난 당신들에게 떠나라고 명할 것이며, 만일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의 해방과 나의 해방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그렇다면, 그러면 함께 일해 보자"라고 말한 적이 있지요. 저는 이 원주민 여성의 말이 미국의 백인 중산계급 남성의 '진정성의 정치학'이나 한때 유행했던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의 '금욕주의적' 정신에 대한 매우 정당한 비판이라고 봅니다. 전 지금 k님께서 소중하게도 <음악카페& 미니극장>에 올려놓은 미국의 좌파 뮤지션 rage against the machine의 [THE BATTLE OF THE MEXICO]라는 음반을 들으면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전 본래 이런 사람입니다.^^ rage against the machine의 killing in the name을 들으면서 들뢰즈/가타리의 <천개의 고원>의 음악에 관한 장인 <리트로넬로>를 읽어야 정치-문화적으로 마음이 편한 사람입니다.^^; k님의 의도 혹은 노고와는 전혀 상관없이, 전 이런 비판적인 문화자본의 재생산을 통해 정치와 해방의 가능성을 꿈꾼다는 철없는 공상을 하고 있는 철부지 학생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전 이런 입장의 협소함을 강조함으로써 제 자신의 보편성을 은밀하게 드러내려는 욕망을 품고 있을 지도 모릅니다. 다시 버만으로 돌아가자면, 미국은 참 자유주의적인 나라라서 그런지, 그의 진정성의 정치학이 어떻게 맑스주의적 세계관과 그리도 잘 결합하는지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확실히 저 유럽의 신좌파의 정치적 상상력을 받아들일 때, <현대성의 경험>의 저자는 미국인 특유의 협소함과 두려움으로 들뢰즈/가타리의 분열증적 정치학이나 푸코의 허무주의적 미시 정치학이 갖고 있는 전혀 다른 자아=주체관과 그 연장인 정치학에 대해서는 거의 알레르기적 거부반응을 보입니다(물론 저 자신도 들뢰즈/가타리나 푸코의 정치학에 '이론적으로'^^ 별 신뢰감을 갖지 않지만). 그리고 맑스의 '녹는 비전(Melting Vision)'이 갖고 있는 역동적 변증법의 추종자인 영구혁명주의자 버만에겐 <공산주의당 선언>이 아닌 대공황을 예언했다가 실패하고 <자본>을 쓰던 시대의 맑스, 파리의 소비와 풍속에 매혹당하던 젊고 부자였던 보들레르가 아닌 제 2제정기의 독재정치 시대의 가난한 보들레르, 1930년대 나치치하의 벤야민이 살았던 시대가 갖는 응고되고도 고립된 정체의 시대에 대한 이야기들은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사실 그것들(녹는 비젼과 응고된 비젼의 후퇴)은 '자본'이 열어놓은 두 가지 현상형태입니다. 녹는 비젼의 활력과 정체, 말을 바꿔 그럴듯 하지만 더 애매모호하기만 한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란 결국 자본의 두 가지 순환형태에 대한 현상적 반응이 아닐른지요? 한번도 독재(?)를 경험하지 않고 레이건 시대가 열어놓은 안정감과 풍요함, 사치와 매혹의 이면인 뉴욕의 뒷골목의 대안문화의 황홀경에 빠져들며 거리를 걷는 버만에게 정치적 자아란 어찌 그리 요지부동의 정체성을 획득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그에게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에 대한 사고의 요청은 없고 자본주의 경제가 열어놓은 자본의 현상형태인 생성과 동요의 변증법에서 뭔가 정치적-미학적 가능성만을 점치고 있습니다. 사실 그것은 버만 자신이 의식적으로 노력하지 않아도 자본이 거저 주는 선물인데도 불구하고. 그에게 물어봐야죠. 당신의 이런 비젼이 당신네 나라의 신자유주의에 의해 침탈당하는 멕시코의 사빠띠스타 원주민에겐 어떻게 들리겠냐고. 기본적으로 당신의 이런 '진정성의 정치학'은 미국이나 캐나다와 같은 복지국가를 벗어나면, 타자에 대한 착취와 무관심으로 변질해버릴 수도 있지 않냐고(미국의 텍사스 주 출신의 카우보이 대통령 조지 부시가 공동체주의를 철학적으로 수용했다고 하던데, 믿거나 말거나). 저는 제가 살고 있는 '현재'를 자본이 만들어놓은 '차이'의 세기에 오히려 화해와 연대보다도 계급적, 성적, 인종적, 문화적, 국가적 '적대'가 전면에 분출되고 있는 시기로 보고 있습니다. 탐구해야 할 것은 자본과 임노동의 갈등이며, 성적 정체성간의 적대이며, 국가와 민족간의 대립입니다. 문제는 정치-경제학이다! 입니다. --------------------- [원본 메세지] --------------------- "살아 있는 문화는 모두 불온하다"라는 김수영의 말을 빌자면, 버만은 불온합니다. 이 때 "불온"이란 말에 대해 우리는 두 가지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김수영이 "불온不穩"이라고 적었다면 오늘날 우리는 동시에 "불온不溫"이란 말을 그 곁에 동의어로 적어넣어야 할 것입니다. 기성 가치와 질서에 대한 일체의 반란, 도전으로서의 문화가 김수영이 불온하다고 일컬은 살아 있는 문화라면, 이는 보들레르를 비롯한 최초의 모더니스트들에 한해서만 유의미합니다. 현대 사회는 이미 그런 불온함쯤은 너끈히 품어안을 수 있을 만큼 노련해졌으니까요. 오늘날 그런 불온함을 외치는 것은 너무나 불온不溫해보입니다. 그러므로 제가 간단하게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버만의 미적지근함에 대해서입니다. 마르크스가 [공산주의당 선언]에서 녹는 비젼을 제시했을 때 이는 산업자본주의 사회의 "용광로"라는 관점에 입각해서였습니다. 즉 자본주의 사회의 현상들은 생산 영역에 입각해서만 올바로 분석될 수 있으며, 생산 영역에서만 계급투쟁이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것이죠. 또, 생산 영역에 입각한다는 것은 계급투쟁이 근본적이라는 정치적 입장이기도 합니다. 반면 버만의 모더니즘은 "용광로"의 관점 없이 현상 분석(그 깊이는 제쳐두고)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제가 보기에, 그리하여 몇몇 지점들에서 그는(그러니까 그의 저작에 등장한 그의 캐릭터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부르조아적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가령 댄디즘이 "정신주의 또는 스토이즘"의 자세라면, 이는 어디까지나 상품경제의 현상적 수준에서 도출되는 저항 윤리입니다. 굳이 유혹하되 유혹당하지 않는다란, 혹은 유혹하되 만족하지 않는다란 댄디즘의 전략에서 히스테리전략과 자본주의 사이의 정신분석적 연관성을 읽어내지 않더라도, 이것이 근대자본주의 상품 경제가 만들어내는 무한한 유혹과 관련된 소비자 윤리(의 확장)라는 것은 분명해보입니다.(낭만주의의 산물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산물이라는 빠스의 말을 염두에 두자면, 댄디즘 또한 일반적 금욕-미학주의의 산물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산물인 것이죠.) 버만의 미적지근한 마르크스 모더니즘은 이렇게 소비자의 관점에 입각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비슷한 방식으로 한 가지 더 생각해보자면 다음의 구절을 문제삼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노동자는 이미 상품시장 사이를 배회하는 만보객의 또 다른 얼굴과 겹쳐지고 만다." 그러나 이상과 박태원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노동자가 지워질 때에야 비로소 만보객이 등장할 수 있습니다. 한 인간이 노동자일 때 그는 철저하게 노예적 상태에 처하지만 소비자가 될 때 그는 자신을 노예적 예속 상태에 가두는 자본주의적 자유 소유권을 만끽하고 절대적으로 긍정하기 때문입니다.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자본가와 노동자가 구분되지 않습니다. 자본가와 노동자가 대립하는 것은 오로지 생산의 영역에서뿐이기 때문이죠. 보들레르의 목가적 비전에 대한 애매함(버만과 욀러의 해석 차이를 낳는, 부르조아 문화에 대한 찬양과 조롱의 공존)은 이처럼 보들레르 스스로 노동자가 아니라 소비자로서만 존재했기 때문에 기인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보들레르의 문제란 노동자와 소비자의 문제가 아니라 노동자도 소비자도 아닌 구경꾼의 문제인 것이죠. "시를 파는 프롤레타리아"란 표현이 제 눈에는 매우 기이하게 보입니다. 시를 창작한다는 것은 근대 노동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시를 팔아야 하는 시인에게 근본적인 문제는 매춘부의 문제입니다. 즉 자신의 작품을 어떻게 포장할 것인가에 대한 상술, 비굴함이 시 창작의 정신적 귀족주의와 일으키는 모순이 문제입니다. 이와 계급적 "착취"는 상당한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비슷한 문제가 벤야민에게도 있습니다. 언젠가 저는 벤야민의 아우라란 자본주의 상품 물신과 동일하다고 쓴 적이 있습니다. 둘 다 인간과 사물, 자연의 관계를 인간과 인간의 관계로 바꾸어놓는 현상을 가리키기 때문이죠. 벤야민이 근대 예술을 논하기 위해 아우라, 그리고 아우라의 상실에서부터 시작할 때 여기에는 어쩔 수 없는 향수가 있습니다. 근대 예술을 하나의 차이로서, 새로운 시작으로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의 결여, 결핍으로서 사고하기 때문이죠. 그것이 비록 근대 예술에게 새로운 과제, 새로운 몫을 주기 위해서라 할지라도. 여기에는 암암리에 예술의 자율적 영역이라는 관념이 깔려 있습니다. 예술은 정치적이지 않기 때문에 정치에 이용되거나 이용할 수 있는 것이지요.(정치의 예술화, 예술의 정치화라는 두 가지 방식으로) 예술이 이렇게 자율적인 영역을 가질 때 예술로 하여금 변화하게 만드는 것은 예술 내부에 있습니다. 달리 말해 예술이 정치 영역에 개입한다면, 이는 정치의 문제가 예술 영역에 어떤 문제를 파생시키기 때문입니다. 앞서 보들레르에게서 보았듯이 자본주의의 문제가 시인에게는 자신의 정신적 존엄과 생계 유지를 위한 상술 사이의 갈등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이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그 저항도 예술 영역의 내부에서만 제시됩니다. 자신의 시집에 붙인 아이러니한 서문. 벤야민이 아우라의 상실을 기계복제의 산물로만 파악하면서 아우라와 관련된 사물화의 일반화를 포착하지 못하는 것도 사물화의 일반화는 예술의 자율적 영역에서는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벤야민이 계급투쟁적 관점에 서 있지 않았다는 것은 "빈둥거리며 소일하는 룸펜은 그 나름대로 뽐내는 태연한 침착함으로 생산과정에 대항하고 있다"라는 언급에서도 드러납니다. 사실 룸펜이 대항하는 것은 자신과 똑같은 처지인 다른 룸펜들과 노동자들입니다. 자본주의는 오히려 실업자를 요구합니다. 산업예비군의 존재가 자본가가 노동자를 마음껏 착취할 수 있는 조건이니까요. 게다가 보들레르, 이상, 벤야민과 같은 지식자 룸펜들은 사실 자신의 가족들의 착취에 의존해서만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즉 룸펜들의 노동에 대한 저항은 다른 이들의 노동에 기반해 있었다는 점에서 기만적인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기만은 이상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자신의 작품 속에 조롱조로 묘사되어 반영됩니다. 작품과 현실은 거울처럼 서로를 되비추는데 그럼에도 작가는 여전히 자신의 작품을 팔러 나서겠지요. 그러니까 소비자의 관점은 역사 전망을 닫아 폐곡선을 만드는 것입니다. 벤야민의 새로운 천사는 대인님께서 인용하신 보들레르의 말과 마찬가지로 전망 부재의 다른 표현에 불과한 것 같습니다. "새로운 것은 전혀 싣고 오지 않는 폭풍"이라면 이것은 차라리 영겁회귀 속에서 소멸하는 허무주의와 가깝지 않을까요? "보들레르와 맑스는, (...) "역사가 나쁜 편에 의해 진보한다"는 데에 대한 불길한 믿음을 공유한다." 그런 믿음이 카타스트로피에 대한 믿음이라면, 우리는 무작정 믿기 전에 카타스트로피는 어떻게 발생하는가를 물어야 합니다. 마르크스 자신도 사실 일종의 구원주의, 종말의 날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지만 보들레르와는 달리 구원의 믿음과 구원의 필연적 도래 메카니즘에 대한 분석은 늘 함께였습니다. 게다가 "역사가 나쁜 편에 의해 진보한다"는 믿음은 매우 불길한데, 이는 대인님께서 말씀하시는 것과는 달리 역사는 언제나 진보한다는 말과 같기 때문에, 그래서 역사에 대한 "뒤돌아볼 줄 모르는 진보와 뻔뻔스런 낙관주의"적 관점이기 때문입니다. 벤야민은 바로 여기에서 마르크스의 "역사는 나쁜 편에 의해 진보한다"란 테제를 "역사는 나쁜 방향으로 전진한다"란 테제로 고쳐쓰면서([역사 개념에 대하여]) 마르크스를 바로잡고 있습니다. 역사가 반드시 진보하지는 않는다는 것, 메시아 도래는 필연적이지 않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마르크스와 벤야민에게서 우리가 읽어야 할 것은 동일성이라기 보다는 상호보완성입니다(이 때문에 벤야민의 새로운 천사는 오직 마르크스에 대한 일정한 정정으로서만 유효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벤야민이 [역사철학테제]를 쓰면서 대화상대자로 상정한 것은 부르조아 이데올로그라기 보다는 역사유물론자들입니다). 여기에서 마르크스나 벤야민에 비해 뒤쳐지는 것은 보들레르입니다. 그에게는 마르크스의 냉철한 분석도 없으면서 벤야민의 묵시적 역사관을 가졌기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적 환상에 대한 면밀한 관찰에 머물고 맙니다. 그런 한에서 그에게 자본주의의 파국이란 돌연한 사건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사실 버만의 가면들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비판들은 결국 버만의 몫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맑스주의의 향연]에서 버만이 모종의 향수를 표현하고 있다면, 이는 버만의 소비자적 관점이 보들레르에서와 마찬가지로 닫힌 폐곡선을 그리기 때문일 것입니다. 미안한 일이지만, 예술가와 평론가는 다르다는 것을 지적해야 할 것 같군요. 그 때문에 보들레르는 불온不穩하지만 버만은 불온不溫할 따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