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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요논평 ** 화요논평 (2007년 4월 10일) <오래된 정원>, 혹은 오래된 아이러니
ahjabie 추천 0 조회 825 07.04.11 08:54 댓글 71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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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7.04.15 03:28

    늘 그렇지만, 긴장감을 주는 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사실 원리적으로 말해 '후일담'이지 않은 생각, 글, 소설, 영화 등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인가를 '경험'하고 있는 지금이 아니라 기억에 의거해 불러내어지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들은 필연적으로 늘 '후일담'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것이 이 세계로부터 우리의 자아를 보호해주는 '기억'에 의해 이루어지는 한 이 모든 후일담들은 과거와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그로부터 '면피를 택'하는 결과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면피를 하지않고 과거와 대면하는 길이 있다면, 그건 '그때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라는 처절한 후회

  • 07.04.15 03:33

    와 그로부터 생겨나는 자기파괴이겠지요. 영화는 이런 후회와 자기파괴적 자괴감을,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던" 현실적 결핍을 상상적으로 실현시킨 가상을 만들어냄으로써 극복하게 하는, 그 다른 어떤 매체보다 긴요한, 효과가 큰 매체인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그만큼 이데올로기적이기도 쉽고 말이지요.

  • 작성자 07.04.16 14:06

    잘 읽어주셨다니 제가 감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후일담'론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드리면^^, 위에서 사자님과 아이온님께 드린 짧은 답변 속에서도 확인하셨겠지만, (약간) 다른데, 제 생각에 그 차이는 중요한 것입니다. 김남시님께서 보다 분명하게 적어주셨듯이 결국 모든 것이 후일담이라면 '후일담'이라는 표현에 따라다닌 부정적인 뉘앙스는 말할 것도 없이, 그 표현 자체가- "역전앞"에서와 같이- 불필요해집니다. (그저, 카프카의 소설들을 후일담이라는 범주에 우겨넣는 상황의 안타까움을 생각해보십시오) 영화의 이데올로기적 경향에 대한 언급 역시 맥락은 약간 다르지만 굳빠이님의 것과 유사한 본질론이라는 의문이 듭니다...

  • 07.05.01 02:17

    이 영화를 보고 울었다는 남자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여주인공에 대한 찬사가 따르고, 그때 그 시절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 중엔 원작을 읽은 이도 있고 영화를 보고서 서점에 가서 책을 샀다는 이도 있었습니다. 예매를 해놓고도 보지 못한 영화, 그래서인지 찾아서 볼 기회가 더 요연해졌는데 아자비님의 글을 몇 번이고 읽다보니 다시 마음이 일렁이네요. 원작은 어땠더라, 기억도 가물가물합니다만...

  • 작성자 07.05.03 21:46

    뜬금없이 들리실수도 있겠습니다만 전 이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보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참으로 도덕적이고 교훈적인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한 번 뿐인 인생인데, 참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으니까요. (그 날부터 묵혀두었던 오거나이저를 꼼꼼히 적기 시작했습니다 ^^) 그렇지만 "쿨"하게 말해, 그런 생각과 교훈은 조갑제씨나 김홍업씨 같은 분들을 보면서도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영화를 다시 한 번 곰삭여 본 것입니다. 이 영화의 패착은, 잊고 있었던 친숙한 것들 혹은 과거가 당대로 섬뜩하게 복귀하는 지점을 절묘하게 형상화해내던 조덕현의 작품이 가지고 있던 이빨을 모조리 뽑아버린 데에서도 찾을

  • 작성자 07.05.04 07:22

    수 있습니다. 조덕현에게서는 과거가 현재를 "도적처럼" 방문하지만 임상수에게서 이 벡터는 뒤집혀, 현재가 "쿨"하게 박제된 과거를 "관조"하지요. (아, 90년대 말에 보았던 조덕현의 작품들은 얼마나 섬뜩했던지요!)

  • 07.05.04 02:57

    ‘남자의 눈물’을 직접적으로 본 기억이 없어서 그런지 이 영화를 보고 울었다는 ‘남자’들의 이야기에 더 가슴이 시렸습니다. 아마도 친구들은 386마지막 세대가 느끼는 비애를 각자의 분야에서 억누르고 있다가 이 영화를 통해 분출했는지도 모릅니다. ‘박제된 과거’, 또는 ‘박제한 과거’가 영화 사이사이에서 되살아나는 경험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누군가 먼저, 이 영화에 덧붙여 약간은 멋쩍어하면서 울었노라고 고백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머지 친구들도 자신도 그랬노라, 그야말로 꺼이꺼이 목 놓아 울었노라, 그러더군요. 이상하게도 남자 친구들은 이 영화를 거의 다 봤는데 여자 친구들은 그러지 않았더군요. 제 감상을 묻는

  • 07.05.04 03:04

    친구들에게 예매를 해놓고도 보지 못했다고 했더니 지네들이 더 아쉬워했습니다. 그들이 제게 어떤 감상을 기대했는지 모르겠지만 자신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사실 원작을 읽으면서는 별 감흥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눈물’의 임상수와 조덕현의 작품이 어떻게 어우러졌을까, 라는 기대감에 개봉을 기다렸는데 이상하게 못보고 말았습니다. (개봉일에 월차휴가를 내서 조조영화를 봤다는 친구까지 있어 놀라웠습니다.) 남자 친구들의 ‘핫’한 과잉 추천이 주춤 뒤로 물러서게 하기도 했는데 어쨌든 아자비님의 ‘쿨’한 글에 이끌리게 됐네요. ‘쿨’했어야 하는 시대를 ‘핫’하지도 않게

  • 07.05.04 03:11

    그야말로 ‘뜨뜻미지근하게’ 살아낸 사람은 이 영화를 보고 어떤 감흥을 느낄지 궁금해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조덕현의 작품이 가지고 있던 이빨’을 어떤 식으로 모조리 뽑아버렸는지에 대한 확인도 해야겠습니다. ^^ / 참, 아자비님! 아이는 잘 크고 있지요? 간간이 올라오는 아이사진들이 미소를 머금게 합니다. 조만간 아이 사진 한번 올려주시지요. ^^

  • 작성자 07.05.04 13:35

    모모님께서 전해 주신 정황은, 제 생각에 모모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들을 수 없었을 종류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 머리 속에서 일종의 상상의 지위에 머물러 있던 어떤 근본적인, 그러나 모호했던 문제를 매우 명확하게 해주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위에서 지적한 이 영화의 "쿨"한,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이러니"한 시선이 그 근본적인 의미에서 성차(gender difference)에 의해 작동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영화가 제시하는 어떤 결여가 그 때 "우리"는 "쿨"하지 못했다는 것이라고 썼습니다. 이 "쿨함"에 대한 욕망이 일종의 노스탤지어라면 그것은 매우 기이한 노스텔지어입니다. 왜냐하면 그 "쿨함"이란 그 때 거기

  • 작성자 07.05.04 22:16

    에 없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임상수는 그러나 그 때 그런 건 그 자리에 없었다고 얘기하는 대신에 그것을 잃어버렸다고 얘기합니다. 부재(absence/void)가 결여(loss)로 대치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마술(?!)은 거의 전적으로 염정아라는,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시대착오적인(anachronistic)인 탁월한/미스 캐스팅에 의존합니다. 자신을 "쓰레기"라고 부르게 된 현우(지진희)가 21세기에 "쿨"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윤희가 "쿨"했(다는 환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와 자신의 딸과 양가의 어머니들)에게 미안하긴 하지만, 그녀(못지 않게 쿨한 딸과 장모와 이젠 변절(?!)한 친모) 덕분에 "그렇게" 미안해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 작성자 07.05.04 13:14

    그는 그들에게 더 이상 죄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 이를 통해 위로받는 것은 현우, 즉 남성(386)일 뿐입니다. 거기에 모모님의 말씀처럼 "'쿨'했어야 하는 시대를 '핫'하지도 않게 그야말로 '뜨뜻미지근하게' 살아낸 사람"이나 "형"이라는 호명기제와 걸걸한 말투를 통해 남성들과 "호형호제"함으로써 살아남았던 남성화된 여성을 위한 자리는 없습니다. 전자는 이러한 위로를 얻는 데에 별 쓸모가 없고 후자는 여전히 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증상(symptom)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윤희(염정아)는 <박하사탕>에서 문소리가 연기한, 한없이 착하고 순종적이기만 했던 순임의 짝패입니다. 전자는 원래 "쿨"하고 후자는 원

  • 작성자 07.05.04 13:27

    래 "착"(해 결국, "우리"를 용서)하니까요. 이러한 여성의 유형학은 그러나 궁극적으로 완결된 것이 아닌데, 그 잠정적인 완결을 위해서는 위의 꼬리말에서 잠시 언급했던 장정일/장선우의 <너에게 나를 보낸다>의 "바지입은 여자"(정선경)를 넣어야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윤희처럼 쿨하지도, 순임처럼 용서하지도 않는 여자이면서 나의 죄의식을 사해줄 여자라면- 복수하는 여자밖에 없죠. (1. 장정일/장선우 콤비의 매저키즘이 갖는 정치적 함의는 여기에 있습니다 (제 석사논문은 장정일/장선우(의 죄의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2. 박찬욱의 복수 삼부작이 금자씨의 복수로 끝나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지 소포클레스의 삼부작이 안티

  • 작성자 07.05.04 22:17

    고네로 끝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가지고 있던 의혹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임상수의 페미니스트"적"인 시선이란 그 근본적인 의미에서 여전히 그 시대의 남성들을 (위로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라는 것입니다. /모모님. 모모님 덕분에 조각나 있던 의혹과 가설들을 단단하게 붙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대로라면 조만간 재정리된 글을 어딘 가에 보내봐도 될 것 같네요. ^^// 벌써 10여년 가까이 되어가는, 조덕현씨의 전시회 팜플렛을 가져온 게 하나 있었는데 다시 찾아봐야 겠습니다. /// 조금만 기다리십쇼. 곧 올려드리죠. ^^

  • 07.05.07 02:42

    ‘조용히 가로막았던 어머니의 눈물’과 ‘속속들이 들여다보셨던 그 슬픈 눈’을 거역할 수 없었던 아이온님의 얘기에 공감하는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힘은 그런 것입니다. 특히나 어머니의 조용한 눈물은 단호하기까지 합니다. 어머니의 눈물 앞에 무너지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극악무도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어머니의 눈물에는 한없이 약해져 스르르 마음을 녹일 것이며 어머니의 눈에는 그 자식이 ‘언 날개를 파닥이는 산새’로 보일 것입니다. 뜬금없이 이청준의 아름다운 단편 <눈길>이 떠오르는군요. 어머니의 눈물이 참 아름답게 표현된 단편이지요. 그 어머니의 말씀에 또 얼마나 뜨거운 눈물을

  • 07.05.07 02:26

    흘렸던지요. // “눈길을 혼자 돌아가다 보니 그 길엔 아직도 우리 둘 말고는 아무도 지나간 사람이 없지 않았겄냐. 눈발이 그친 신작로 눈 위에 저하고 나하고 둘이 걸어온 발자국만 나란히 이어져 있구나.”// “간절하다뿐이었겄냐. 신작로를 지나고 산길을 들어서도 굽이굽이 돌아온 그 몹쓸 발자국들에 아직도 도란도란 저 아그의 목소리나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듯만 싶었제. 산비둘기만 푸르륵 날아올라도 저 아그 넋이 새가 되어 다시 되돌아오는 듯 놀라지고, 나무들이 눈을 쓰고 서 있는 것만 보아도 뒤에서 금세 저 아그 모습이 뛰어나올 것만 싶었지야. 하다 보니 나는 굽이굽이 외지기만 한 그 산길을 저 아그 발자국만 따라

  • 07.05.07 02:34

    밟고 왔더니라.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너하고 둘이 온 길을 이제는 이 몹쓸 늙은 것 혼자서 너를 보내고 돌아가고 있구나!”// “울기만 했겄냐. 오목오목 디뎌 논 그 아그 발자국마다 한도 없는 눈물을 뿌리며 돌아왔제.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부디 몸이나 성히 지내거라. 부디부디 너라도 좋은 운 타서 복 받고 살거라… 눈앞이 가리도록 눈물을 떨구면서 눈물로 저 아그 앞길만 빌고 왔제….” // “그런디 이것만은 네가 잘못 안 것 같구나. 그 때 내가 뒷산 잿등에서 동네를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던 일 말이다. 그건 내가 갈 데가 없어 그랬던 건 아니란다. 산 사람 목숨인데 설마 그때라고 누구네 문간방 한 칸이라도 산 몸뚱이

  • 07.05.07 02:41

    깃들일 데 마련이 안됐겄냐. 갈 데가 없어서가 아니라 아침 햇살이 활짝 퍼져 들어 있는디, 눈에 덮인 그 우리집 지붕까지도 햇살 때문에 볼 수가 없더구나. 더구나 동네에선 아침 짓는 연기가 한참인디 그렇게 시린 눈을 해 갖고는 그 햇살이 부끄러워 차마 어떻게 동네 골목을 들어설 수가 있더냐. 그놈의 말간 햇살이 부끄러워서 그럴 엄두가 안 생겨나더구나. 시린 눈이라도 좀 가라앉히고자 그래 그러고 앉아 있었더니라….” // 의뭉스럽게 자고 있는 척하며 어머니와 아내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주인공의 마음이 곧 우리 모두의 마음일 겁니다.

  • 07.05.08 07:40

    모모님, 어머니도 안해보셨으면서 그 마음을 속속들이 꿰시는군요.^^ 사실은 아버지 마음도 그런 구석이 없지 않지요. 저의 경우 말씀하신 상징성으로서 어머니뿐 아니라 또 다른 깊은 구석이 있습지요. 그 부분은 제 가슴에 평생 묻어두고 가야겠지요? 에이, 모른 채하고 지나가실 일이지 민망하게스리 밖으로 드러내시기는....

  • 07.05.08 09:02

    그렇지요? 어머니 얘기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요. 괜히, 송구스럽습니다. ^^ 어머니와 딸, 어머니와 아들, 아버지와 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모두들 애틋한 관계이지만 나름의 특별한 추억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식에게 모든 희망을 거는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움을 동반한 짜증이 치밀어 오릅니다. 그런 사랑을 받고 자란 친구들이 제 아이들에게 똑 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저 같은 사람은 평생 이해하지 못할 무언가가 있는 듯합니다. 참, 아이온님! 오늘은 ‘어버이날’입니다. 알고 계시는지요? 예전에는 ‘어머니날’이라고 했지요. 카네이션이 하나만 필요하다는 것을

  • 07.05.08 09:07

    알면서도 굳이 두 송이씩을 사고 있네요. 두 송이를 사는 친구들이 그 얼마나 부러웠던 지요! 꽃값이 아깝다는 어머니의 잔소리를 귓등으로 흘려들으면서 해마다 꾸역꾸역 두 송이를 사들고 오는 것을 보면 그 옛날 어머니의 온갖 타박을 들으면서도 꽃신을 사다 나르셨던 아버지의 고집을 쏙 빼닮았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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