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정원 The Old Garden (Im Sang-Soo, 2006)>
<오래된 정원>의 후반부에는 15년간의 형기를 마치고 출소해 이제는 회색 빛 머리의 중년이 된 현우(지진희)가 갑자기 외마디 고함을 내지르는 장면이 나온다. 기억력이 좋은 관객이라면, 그의 고함이 “난 쓰레기야”라는, 씁쓸하면서도 단호한 독백 뒤에 이어진 것이고, 다시 그 독백은 자신의 손바닥에서 홀연히 타오르는, 윤희(염정아)가 80년대에 자신의 등에 놓아주곤 했던 자신의 일종의 부항을 관조하는 현우의 모습 이후에 등장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고함을 지르고 마당의 평상에 누운 현우를 잡던 카메라는 그러나 곧바로 줌 아웃 트래킹, 쉽게 말해 뒤로 쭈욱 물러나는데, 현실적으로 더 이상 물러날 수 없는 지점을 넘어서까지 뒷걸음질치는 카메라를 통해 우리는 현우가 칠흙 같은 어둠에 뒤덮인 어두운 산 중턱에 담겨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커트.
이번에는 이보다는 약간 앞 쪽, 그러니까 영화 중간쯤, 이제 혼자서 동화책을 읽을 정도로 큰 딸 아이와 함께 살고 있는 윤희에게 말 그대로 ‘뜬금없이’ 현우가 찾아오는 것으로 시작하는 시퀀스이다. 물론 여기서 잠시나마 이어지는 단란한 가족의 모습은 꿈이다. 그렇게 꿈에서 깬 윤희는 불 꺼진 작업실 거실로 나가 냉장고를 열고는 물을 마신다. 그리고 울기 시작한다. 기다림은 힘든 것이므로. 게다가 이처럼 기약이 없는 경우라면 더욱 더. 그러나 그녀의 얼굴은 비스듬히 열려있는 냉장고에서 흘러나오는 빛에 노출되지 않는다. 오른쪽 측면쯤, 약 7-8미터의 거리를 두고 멀찍이 서 있는 우리로서는 따라서 그녀의 표정을 알 길이 없다. 물론 그녀는 운다. 어깨까지 들썩이면서. 축 쳐진 팔과 머리카락이 이루는 일종의 대칭을 통해 이루어지는 그 울음은 격정적이라기보다는 안쓰러운 쪽에 가까운 것이다. 그렇게 강인하고 “쿨”하며 도도한 그녀도 우는 것이다, 라는 생각이 어깨라도 다독여주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전이될 때쯤, 카메라는 다시 조금씩 뒤로 발을 빼기 시작한다. 두 번째 트래킹 샷. 그 동안 윤희는 계속해서 울고, 화면은 점점 어둠에 잠식된다.
이 영화를 포함해 임상수의 영화에 대해 쓰여진 글들은 그의 영화가 “쿨(cool)”하다고 입을 모아 얘기하면서도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영화 속에서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는지에 대해서는 대개 모호한, 혹은- “쿨”하게 말하자면- “쿨”한 태도를 보이는데 나는 이 두 개의 줌 아웃 트래킹 샷이 그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쪽이다. 보다 명확하게 말하자면 그것은 이 영화뿐 아니라 임상수 영화의 톤과 그것이 다루는 대상에 대한 태도를 관통하는 형식적 모태(matrix)이며, 그것은- 일반적으로 얘기하는 것처럼 냉소(cynicism)가 아니라- 아이러니라는 정서적 기조를 만들어낸다.
현우는 자신이 “쓰레기”라고 말했다. 이는 그러나 단순히 그가 “쓰레기”라는 것이 아니라-즉 그는 어떤 의미에서-안타깝지만- 쓰레기인 것이다-, 그가 그러한 결과를 의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포함하는 말이다. 그런 “쓰레기”가 되려고 그가 17년의 수형생활을 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자신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현우는 그러한 압도적 현실을 부인하지 못한다. 그렇게 어긋나는 의도와 현실, 원인과 결과 사이의 거리, 괴리, 혹은 불편한 공존에 붙는 이름이 아이러니이다. 10여 년 전 자신이 고문했던, 그러나 이제는 자신의 가정을 꾸려 가족과 함께 고깃집을 찾은 남자에게, 역시 그 자신 또한 가장이 된 설경구가 화장실에서 되새겨주는 “삶은 아름답다”는 <박하사탕> 속 구절이 가장 잘 알려진 예 중 하나일 것이다. 자신의 의도와 끊임없이 엇나가는 기계적인, 아니- 영화가 차용했던 다소 고루한 상징을 빌면- ‘기차’적인 것으로서의 역사, 그리고 그 앞에서 한없이 무력한 주인공의 처지가 그 문장 안에 들어 있다. 이런 “꼴”을 보려고, 그것을 “아름답다”라는 형용사로 치장하기 위해 그 대학생이 그런 표현을 끄적였던 것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임상수의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형식적 특징은 이전 작품들에 비해 최근작에 들어서면서 보다 명확해진 것인데 <그 때 그 사람들>을 결정짓는 샷 역시 크게 두 종류이다. ‘거사’(치고는 그러나 좀 ‘소사’스럽게 벌어지는 대통령 ‘시해’)가 일어나기 직전과 직후의 현장을 한 편으로는 바깥에서 수평으로, 다른 한 편으로는 수직으로, 즉 하늘에서 새/신의 시점으로 훑는 트래킹 샷이 그 하나라면, 다른 하나는 일이 틀어진 후 텅 빈 광화문 앞 대로변에서 정신 없이 움직여대는 한석규의 자동차를 근처의 빌딩 꼭대기에서 잡은 익스트림 롱 샷이다. 같은 시간대, 같은 눈높이에서 보아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일들, 혹은 너무나 중요해 보이는 일들은 시간차와 약간의 고도차를 통해 그 부질없음을, 때론 허탈한 웃음을 동반해 명확하게 드러낸다. 5초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말 그대로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면서 ‘거사’와 ‘민주주의’를 논하는, 실은 발버둥치는 인간들의 악다구니는 이러한 형식적 선택을 통해 선명하게 발라내어 지는 것이다.
이는 물론 보다 직접적인 방식인 대사를 통해서도 드러나는데 대표적인 것이 “인생 길어, 역사는 더 길어. 우리 좀 겸손하자. 너 그거 하지 마. 조직인지 지랄인지”라는 대사다. 잡혀 들어갈 것이 뻔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태도를 보이는 후배 영작에게 윤희가 하는 말인데 이 영화와의 불화는 여기에서 생긴다. 옳은 말이고, 또 시원한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그 때 ‘오갔으면 좋았을’ 혹은 ‘오갔어야 하는’ 말이지 그 때 ‘오갔음직한’ 표현은 아니다. 그것은 당시, 이제는 386이라는 '상표'로 넘어가버린 시대의 젊은이들이 차마 나누지 못했던, 아니 나눌 수 없었던 표현이다. 그 누구도 그 당시에 윤희가 얘기한 의미에서 인생이 정말 (이렇게) 길(어도 되는 것인)지, 나아가 역사가 (이대로, 아니 이보다 더) 길(어져도 되는 것인)지 장담하기는 힘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그만한 악몽도 없었을 것이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구문은 있을 수 없다고 역사가들이 말하고, 메타 언어는 없다고 언어학자들이 쓸 때 그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같은 것이다. 인생은 길고, 역사는 더 길다고? 겸손하자고? 지금? 아니면 그 때??
다시 말하지만 "쿨"함이란 결국 시간차와 각도차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쿨"함이, 주어진 “그” 공간과 “그” 시간 속에서도 생겨날 수 있는 종류의 것이냐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오래된 정원>에서, 혹은 임상수의 소위 "현대사 3부작" 속에서 제시되는 시간차와 각도차는- 아마도 <바람난 가족>을 제외한다면- 당대의 “그” 시간대 내부에서 생겨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 안에서 당대와 우리의 시간대는 결코 겹치지 않는다. 자신이 관심 있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라고 그가 올바르게 이야기할 때, 우리가 간파해야 할 것은 그 올바름 속에 자리잡은 어떤 속임수, 아니 보다 중립적으로 말해 어떤 변형에 대한 욕망이다. <오래된 정원>이 이야기하는 것은 좋게 말하면 그 "핫"했던 시대가 "쿨"했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것이고,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쿨"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윤희의 대사를 통해 우리가 듣는 것, 그것은 한 마디로 이러한 결여에 대한 (뒤늦은) 사후 처방인 것이다.
그러면 지금은? 이 시대에 결여된 것에 대해서는 어떤 처방이 필요한 것일까? 혹시 우리는 과거에 대한 처방이 현재와의 대면을 대신해줄 수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미 우리가 살고 있기는 하지만) 21세기의 사이버 소녀처럼 생긴 멋진 딸과 현우가 "쿨"한 방식으로 이루는 마지막 장면의 화해가, 예를 들어 조갑제에 의해 노대통령의 최대 업적으로까지 치하되는 FTA 정국에 주는 함의란 무엇인가? 그것은 혹, 비슷한 시기, 죽기는 커녕 황당하게 살아계시는 전두환 전 대통령"께" 한 전도유망한 386정치인이 올린 "대화합"의 큰 절로 실현되었던 것은 아닐까? 쇄도하는 비판에 곧바로 발표된, 자신의 의도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는 그의 성명이 암시했던 아이러니란 혹, 임상수의 안이한 화해와 치유의 제스츄어가 피할 수 없었던, 필수적인 부산물(essential by-product)은 아니었을까? (여기서 카메라, 줌 아웃 트래킹한다...)
박찬욱의 수평 트래킹 샷과 더불어 현단계 한국영화의 X축과 Y축을 이루는 임상수의 수직(혹은 전/후진) 트래킹 샷이 갖는 쿨함, 특히 <오래된 정원>이 갖는 깔끔함, 말 그대로의 쿨함이 갖는 기이한 불편함은 상당부분 이러한 측면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자신의 시대가 아니라 과거를 이야기함으로써 자신의 현재를 채우고 있다는 의미에서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시대가 아니라 “후일담”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일런지도 모른다.
cf. 잘 알려져 있듯이 <오래된 정원>은 황석영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삼은 작품이다. 많은 경우가 그렇듯 이번에도 역시 영화를 먼저 보고 원작을 읽을 계획으로 책을 미리 구해놓았는데 영화 자체의 매무새도 매무새려니와, 책보다 영화가 더 좋더라는 주변 지인들의 소감에, 시나리오를 먼저 읽고서 읽은 원작 소설은 “3분의 2까지 읽다가 지루해서 던져 버렸다”는 지진희의 믿음직스런 고백이 정점을 이룬 덕분에 잠시 미루어 두기로 했다.
늘 그렇지만, 긴장감을 주는 님의 글 잘 읽었습니다. 사실 원리적으로 말해 '후일담'이지 않은 생각, 글, 소설, 영화 등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인가를 '경험'하고 있는 지금이 아니라 기억에 의거해 불러내어지는 '과거'에 대한 이야기들은 필연적으로 늘 '후일담'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그것이 이 세계로부터 우리의 자아를 보호해주는 '기억'에 의해 이루어지는 한 이 모든 후일담들은 과거와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든 그로부터 '면피를 택'하는 결과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면피를 하지않고 과거와 대면하는 길이 있다면, 그건 '그때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라는 처절한 후회
와 그로부터 생겨나는 자기파괴이겠지요. 영화는 이런 후회와 자기파괴적 자괴감을, "그렇게 하지 말았어야 했던" 현실적 결핍을 상상적으로 실현시킨 가상을 만들어냄으로써 극복하게 하는, 그 다른 어떤 매체보다 긴요한, 효과가 큰 매체인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영화는 그만큼 이데올로기적이기도 쉽고 말이지요.
잘 읽어주셨다니 제가 감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후일담'론에 대한 제 생각을 말씀드리면^^, 위에서 사자님과 아이온님께 드린 짧은 답변 속에서도 확인하셨겠지만, (약간) 다른데, 제 생각에 그 차이는 중요한 것입니다. 김남시님께서 보다 분명하게 적어주셨듯이 결국 모든 것이 후일담이라면 '후일담'이라는 표현에 따라다닌 부정적인 뉘앙스는 말할 것도 없이, 그 표현 자체가- "역전앞"에서와 같이- 불필요해집니다. (그저, 카프카의 소설들을 후일담이라는 범주에 우겨넣는 상황의 안타까움을 생각해보십시오) 영화의 이데올로기적 경향에 대한 언급 역시 맥락은 약간 다르지만 굳빠이님의 것과 유사한 본질론이라는 의문이 듭니다...
이 영화를 보고 울었다는 남자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습니다. 여주인공에 대한 찬사가 따르고, 그때 그 시절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그 중엔 원작을 읽은 이도 있고 영화를 보고서 서점에 가서 책을 샀다는 이도 있었습니다. 예매를 해놓고도 보지 못한 영화, 그래서인지 찾아서 볼 기회가 더 요연해졌는데 아자비님의 글을 몇 번이고 읽다보니 다시 마음이 일렁이네요. 원작은 어땠더라, 기억도 가물가물합니다만...
뜬금없이 들리실수도 있겠습니다만 전 이 영화가 좋은 영화라고, 보다 정확하게 얘기하면 참으로 도덕적이고 교훈적인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한 번 뿐인 인생인데, 참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으니까요. (그 날부터 묵혀두었던 오거나이저를 꼼꼼히 적기 시작했습니다 ^^) 그렇지만 "쿨"하게 말해, 그런 생각과 교훈은 조갑제씨나 김홍업씨 같은 분들을 보면서도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영화를 다시 한 번 곰삭여 본 것입니다. 이 영화의 패착은, 잊고 있었던 친숙한 것들 혹은 과거가 당대로 섬뜩하게 복귀하는 지점을 절묘하게 형상화해내던 조덕현의 작품이 가지고 있던 이빨을 모조리 뽑아버린 데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조덕현에게서는 과거가 현재를 "도적처럼" 방문하지만 임상수에게서 이 벡터는 뒤집혀, 현재가 "쿨"하게 박제된 과거를 "관조"하지요. (아, 90년대 말에 보았던 조덕현의 작품들은 얼마나 섬뜩했던지요!)
‘남자의 눈물’을 직접적으로 본 기억이 없어서 그런지 이 영화를 보고 울었다는 ‘남자’들의 이야기에 더 가슴이 시렸습니다. 아마도 친구들은 386마지막 세대가 느끼는 비애를 각자의 분야에서 억누르고 있다가 이 영화를 통해 분출했는지도 모릅니다. ‘박제된 과거’, 또는 ‘박제한 과거’가 영화 사이사이에서 되살아나는 경험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누군가 먼저, 이 영화에 덧붙여 약간은 멋쩍어하면서 울었노라고 고백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머지 친구들도 자신도 그랬노라, 그야말로 꺼이꺼이 목 놓아 울었노라, 그러더군요. 이상하게도 남자 친구들은 이 영화를 거의 다 봤는데 여자 친구들은 그러지 않았더군요. 제 감상을 묻는
친구들에게 예매를 해놓고도 보지 못했다고 했더니 지네들이 더 아쉬워했습니다. 그들이 제게 어떤 감상을 기대했는지 모르겠지만 자신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해 보였습니다. 사실 원작을 읽으면서는 별 감흥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눈물’의 임상수와 조덕현의 작품이 어떻게 어우러졌을까, 라는 기대감에 개봉을 기다렸는데 이상하게 못보고 말았습니다. (개봉일에 월차휴가를 내서 조조영화를 봤다는 친구까지 있어 놀라웠습니다.) 남자 친구들의 ‘핫’한 과잉 추천이 주춤 뒤로 물러서게 하기도 했는데 어쨌든 아자비님의 ‘쿨’한 글에 이끌리게 됐네요. ‘쿨’했어야 하는 시대를 ‘핫’하지도 않게
그야말로 ‘뜨뜻미지근하게’ 살아낸 사람은 이 영화를 보고 어떤 감흥을 느낄지 궁금해졌기 때문입니다. 또한 ‘조덕현의 작품이 가지고 있던 이빨’을 어떤 식으로 모조리 뽑아버렸는지에 대한 확인도 해야겠습니다. ^^ / 참, 아자비님! 아이는 잘 크고 있지요? 간간이 올라오는 아이사진들이 미소를 머금게 합니다. 조만간 아이 사진 한번 올려주시지요. ^^
모모님께서 전해 주신 정황은, 제 생각에 모모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결코 들을 수 없었을 종류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제 머리 속에서 일종의 상상의 지위에 머물러 있던 어떤 근본적인, 그러나 모호했던 문제를 매우 명확하게 해주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위에서 지적한 이 영화의 "쿨"한,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아이러니"한 시선이 그 근본적인 의미에서 성차(gender difference)에 의해 작동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영화가 제시하는 어떤 결여가 그 때 "우리"는 "쿨"하지 못했다는 것이라고 썼습니다. 이 "쿨함"에 대한 욕망이 일종의 노스탤지어라면 그것은 매우 기이한 노스텔지어입니다. 왜냐하면 그 "쿨함"이란 그 때 거기
에 없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임상수는 그러나 그 때 그런 건 그 자리에 없었다고 얘기하는 대신에 그것을 잃어버렸다고 얘기합니다. 부재(absence/void)가 결여(loss)로 대치되는 것이지요. 이러한 마술(?!)은 거의 전적으로 염정아라는, 말 그대로의 의미에서 시대착오적인(anachronistic)인 탁월한/미스 캐스팅에 의존합니다. 자신을 "쓰레기"라고 부르게 된 현우(지진희)가 21세기에 "쿨"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윤희가 "쿨"했(다는 환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녀(와 자신의 딸과 양가의 어머니들)에게 미안하긴 하지만, 그녀(못지 않게 쿨한 딸과 장모와 이젠 변절(?!)한 친모) 덕분에 "그렇게" 미안해 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는 그들에게 더 이상 죄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 이를 통해 위로받는 것은 현우, 즉 남성(386)일 뿐입니다. 거기에 모모님의 말씀처럼 "'쿨'했어야 하는 시대를 '핫'하지도 않게 그야말로 '뜨뜻미지근하게' 살아낸 사람"이나 "형"이라는 호명기제와 걸걸한 말투를 통해 남성들과 "호형호제"함으로써 살아남았던 남성화된 여성을 위한 자리는 없습니다. 전자는 이러한 위로를 얻는 데에 별 쓸모가 없고 후자는 여전히 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증상(symptom)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윤희(염정아)는 <박하사탕>에서 문소리가 연기한, 한없이 착하고 순종적이기만 했던 순임의 짝패입니다. 전자는 원래 "쿨"하고 후자는 원
래 "착"(해 결국, "우리"를 용서)하니까요. 이러한 여성의 유형학은 그러나 궁극적으로 완결된 것이 아닌데, 그 잠정적인 완결을 위해서는 위의 꼬리말에서 잠시 언급했던 장정일/장선우의 <너에게 나를 보낸다>의 "바지입은 여자"(정선경)를 넣어야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윤희처럼 쿨하지도, 순임처럼 용서하지도 않는 여자이면서 나의 죄의식을 사해줄 여자라면- 복수하는 여자밖에 없죠. (1. 장정일/장선우 콤비의 매저키즘이 갖는 정치적 함의는 여기에 있습니다 (제 석사논문은 장정일/장선우(의 죄의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2. 박찬욱의 복수 삼부작이 금자씨의 복수로 끝나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지 소포클레스의 삼부작이 안티
고네로 끝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가지고 있던 의혹을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임상수의 페미니스트"적"인 시선이란 그 근본적인 의미에서 여전히 그 시대의 남성들을 (위로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라는 것입니다. /모모님. 모모님 덕분에 조각나 있던 의혹과 가설들을 단단하게 붙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대로라면 조만간 재정리된 글을 어딘 가에 보내봐도 될 것 같네요. ^^// 벌써 10여년 가까이 되어가는, 조덕현씨의 전시회 팜플렛을 가져온 게 하나 있었는데 다시 찾아봐야 겠습니다. /// 조금만 기다리십쇼. 곧 올려드리죠. ^^
‘조용히 가로막았던 어머니의 눈물’과 ‘속속들이 들여다보셨던 그 슬픈 눈’을 거역할 수 없었던 아이온님의 얘기에 공감하는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힘은 그런 것입니다. 특히나 어머니의 조용한 눈물은 단호하기까지 합니다. 어머니의 눈물 앞에 무너지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극악무도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어머니의 눈물에는 한없이 약해져 스르르 마음을 녹일 것이며 어머니의 눈에는 그 자식이 ‘언 날개를 파닥이는 산새’로 보일 것입니다. 뜬금없이 이청준의 아름다운 단편 <눈길>이 떠오르는군요. 어머니의 눈물이 참 아름답게 표현된 단편이지요. 그 어머니의 말씀에 또 얼마나 뜨거운 눈물을
흘렸던지요. // “눈길을 혼자 돌아가다 보니 그 길엔 아직도 우리 둘 말고는 아무도 지나간 사람이 없지 않았겄냐. 눈발이 그친 신작로 눈 위에 저하고 나하고 둘이 걸어온 발자국만 나란히 이어져 있구나.”// “간절하다뿐이었겄냐. 신작로를 지나고 산길을 들어서도 굽이굽이 돌아온 그 몹쓸 발자국들에 아직도 도란도란 저 아그의 목소리나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듯만 싶었제. 산비둘기만 푸르륵 날아올라도 저 아그 넋이 새가 되어 다시 되돌아오는 듯 놀라지고, 나무들이 눈을 쓰고 서 있는 것만 보아도 뒤에서 금세 저 아그 모습이 뛰어나올 것만 싶었지야. 하다 보니 나는 굽이굽이 외지기만 한 그 산길을 저 아그 발자국만 따라
밟고 왔더니라.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너하고 둘이 온 길을 이제는 이 몹쓸 늙은 것 혼자서 너를 보내고 돌아가고 있구나!”// “울기만 했겄냐. 오목오목 디뎌 논 그 아그 발자국마다 한도 없는 눈물을 뿌리며 돌아왔제.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부디 몸이나 성히 지내거라. 부디부디 너라도 좋은 운 타서 복 받고 살거라… 눈앞이 가리도록 눈물을 떨구면서 눈물로 저 아그 앞길만 빌고 왔제….” // “그런디 이것만은 네가 잘못 안 것 같구나. 그 때 내가 뒷산 잿등에서 동네를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던 일 말이다. 그건 내가 갈 데가 없어 그랬던 건 아니란다. 산 사람 목숨인데 설마 그때라고 누구네 문간방 한 칸이라도 산 몸뚱이
깃들일 데 마련이 안됐겄냐. 갈 데가 없어서가 아니라 아침 햇살이 활짝 퍼져 들어 있는디, 눈에 덮인 그 우리집 지붕까지도 햇살 때문에 볼 수가 없더구나. 더구나 동네에선 아침 짓는 연기가 한참인디 그렇게 시린 눈을 해 갖고는 그 햇살이 부끄러워 차마 어떻게 동네 골목을 들어설 수가 있더냐. 그놈의 말간 햇살이 부끄러워서 그럴 엄두가 안 생겨나더구나. 시린 눈이라도 좀 가라앉히고자 그래 그러고 앉아 있었더니라….” // 의뭉스럽게 자고 있는 척하며 어머니와 아내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주인공의 마음이 곧 우리 모두의 마음일 겁니다.
모모님, 어머니도 안해보셨으면서 그 마음을 속속들이 꿰시는군요.^^ 사실은 아버지 마음도 그런 구석이 없지 않지요. 저의 경우 말씀하신 상징성으로서 어머니뿐 아니라 또 다른 깊은 구석이 있습지요. 그 부분은 제 가슴에 평생 묻어두고 가야겠지요? 에이, 모른 채하고 지나가실 일이지 민망하게스리 밖으로 드러내시기는....
그렇지요? 어머니 얘기에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요. 괜히, 송구스럽습니다. ^^ 어머니와 딸, 어머니와 아들, 아버지와 딸,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모두들 애틋한 관계이지만 나름의 특별한 추억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식에게 모든 희망을 거는 우리네 아버지, 어머니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안타까움을 동반한 짜증이 치밀어 오릅니다. 그런 사랑을 받고 자란 친구들이 제 아이들에게 똑 같이 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저 같은 사람은 평생 이해하지 못할 무언가가 있는 듯합니다. 참, 아이온님! 오늘은 ‘어버이날’입니다. 알고 계시는지요? 예전에는 ‘어머니날’이라고 했지요. 카네이션이 하나만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굳이 두 송이씩을 사고 있네요. 두 송이를 사는 친구들이 그 얼마나 부러웠던 지요! 꽃값이 아깝다는 어머니의 잔소리를 귓등으로 흘려들으면서 해마다 꾸역꾸역 두 송이를 사들고 오는 것을 보면 그 옛날 어머니의 온갖 타박을 들으면서도 꽃신을 사다 나르셨던 아버지의 고집을 쏙 빼닮았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