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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앎에의 의지
반 경 환
안다는 건 슬픈 일, 많이 아는 자들은
그 운명적 진리를 깊이 깊이 애도해야 하니
인식의 나무는 생명의 나무가 아니니
---- 바이런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듯이, 고대 그리스의 대 철학자였던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유명한 교훈을 통해서 그의 이름을 남겼다고 할 수가 있다. 그의 이름이, 어느 날 하루 아침에 유명해진 것이 아닌 것처럼, ‘너 자신을 알라’라는 유명한 교훈 역시도 어느 사랑방의 한담이나 재담처럼, 저절로 우연하게 형성된 것이 아님은 너무나도 자명하다고 할 수가 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너 자신을 알라’라는 유명한 교훈----‘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그리스의 현인인 큘론의 말이며, 소크라테스는 큘론의 말을 받아들여 그 명제를 극단적으로 밀고 나간 것이다----은 소크라테스 철학의 핵심적인 명제이며, 붉디 붉은 피로써 씌어진 경구이기도 한데, 왜냐하면 그는 그 명제를 통하여 자기 자신의 철학을 완성시켰고, 최고의 형벌인 사형선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철학은 애지(愛知)로서의 철학이며, 앎과 행동을 극단적으로 일치시킨 철학이다. 또한 그의 철학은 우리 인간들의 마비된 의식을 한 마리의 등에처럼, 일깨워주고 있는 철학이며, 궁극적으로는 진리와 지혜의 이름으로 어떤 불의와도 타협을 하지 않고 있는 정의의 철학이라고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최고급의 지혜와 앎에의 의지로서 충만되어 있는 소크라테스는 “크건 작건 知者가 아님을 알고 있는 데, 내가 제일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고 하니, 도대체 신은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걸까?”라는 회의와 의심을 지닌 채, 자기 자신보다도 더 훌륭하다고 생각되는 아테네의 대정치가, 연설가, 장인, 시인, 예술가 등을 하나하나 찾아나선다(1:46). 하지만,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는 평범한 자기 이해로 무장한 소크라테스에 의해서 아테네의 대정치가, 연설가, 장인, 시인, 예술가들이 그만큼 날카롭고 무자비하게 베어져 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크라테스는 그들과의 비판적인 대화를 통하여 대 정치가들의 어떠한 명예와 명성도 인정하기를 거부했고, 또한 수많은 시인이나 예술가들의 진리에의 통찰과 장인 정신도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따라서 소크라테스는
“이 사람보다는 내가 더 지혜가 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나, 나나, 좋고 아름다운 것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는 것 같은 데, 이 사람은 자기가 모르면서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모르고 또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조그마한 일, 즉 내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생각한 점 때문에 내가 이 사람보다도 더 지혜가 있는 것 같다”(1: 47)
라고, 다소 지나치고 오만하기는 하지만, 그만큼 무서운 통찰의 결과를 내놓게 된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최고급의 지혜와 앎에의 의지로서 충만되어 있는 소크라테스가 사용한 칼날은 무자비하고 그만큼 날카로운 삼단논법의 칼날이기도 하고, 그는 그 삼단논법의 칼날을 사용하기 위해서 상대방의 모순된 논리를 더욱 더 강화시켜 준 뒤, 항상 치명적인 역공을 펼쳤던 것처럼도 보인다. 소크라테스가 진리와 지혜의 이름으로 사용한 삼단논법의 칼날에 의해서 아테네 사회의 제일급의 인사들이 하나하나 베어질 때마다 그를 추종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생긴 것도 사실이지만, 정반대 방향에서, 그만큼의 원한 맺힌 저주의 감정들도 증폭되어 갔던 것처럼도 보인다. 더군다나 원한 맺힌 저주 감정의 주체자들이 사회적인 하층민들이 아니라, 아테네 사회의 제일급의 인사들이라는 사실을 감안하게 되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댓가를 치루게 되어 있었던 것일는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의 공식죄명은 “수많은 청년들을 부패시키고, 국가가 신봉하는 신들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것이지만, 실제로 그가 사형선고와 함께 무서운 毒杯를 받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은 ‘너 자신을 알라’라는 그의 철학적인 명제를 극단적으로 밀고 나갔기 때문이다(1:52). 유명한 정치가이든, 연설가이든, 시인이나 예술가이든 간에, 어느 누구든지 지혜가 있다고 알려진 사람이 있기만 하면, 서슴없이 찾아가 그들의 인식적 오류와 무지를 지적해내는 소크라테스가 어떻게 제일급의 인사들에게 환영을 받을 수가 있었겠으며, 또한 어떻게 그가 누구의 선생이 되었든, 아니었든 간에 수많은 젊은이들의 우상이 되어가고 있는 사실이 수많은 질투와 중상모략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지혜의 칼끝은 반드시 지혜로운 자에게로 되돌아 오게 되어 있다. 따라서, 그 원한 맺힌 자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소크라테스가 청년들을 부패시키고, 국가가 신봉하는 신들을 믿지 않고, 다이몬이라는 색다른 신을 신봉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는지도 모른다. 우리 인간들이 모든 정열이나 감정을 제거하고 이성을 따르게 될 때, 아름답고 풍요로운 신화와 예술이 질식하게 되고, 이성이 미덕이 되고 행복이 될 때, 기독교적인 유일신과 기계론적인 철학만이 득세를 하게 된다. 매우 역설적이기는 하지만, 無知를 가장하여 無知를 죄악시하고 이성과 비이성, 혹은 선과 악의 이분법을 도식적으로 이해한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의 사형선고와 독배는 그리스 사회의 지배 체제의 근간을 흔들었기 때문이며, 새로운 것에 대한 앎에의 의지가 극단화될 때, 어떤 결과가 발생하고 있는가를 역으로 증명해주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물론, 플라톤이 기술한 「소크라테스의 변명」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없고, 수많은 시인들과 예술가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평가절하 역시도 사실 그대로 받아들일 수도 없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시와 예술이 우리 인간들의 이상 사회를 건설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며, 그것은 그들의 사상 중에서도 가장 커다란 오류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지(愛知)로서의 철학, 혹은 앎과 행동을 일치시키는 것이 모든 지식인들의 궁극적인 목표라면 소크라테스는 최고급의 지식인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는 아뉘토스, 멜라토스, 뤼콘 등, 아테네 사회의 제일급의 인사들과 맞서서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하거나 아첨을 하기는 커녕, “죽음”보다도 “비열함을 면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렵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그렇고(1:80), “신은 저를 마치 등에처럼, 이 나라에 달라붙게 하여 여러분을 설득하고 비난하기를 그치지 않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그렇다(1:65). 그는 고소인들과 재판관들에게 비굴하게 묵숨을 구걸하거나 아첨을 하지 않은 인물이며, 비밀리에 ‘국외로 망명’을 권유하는 크리톤의 제의마저도 거절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너 자신을 알라’라는 말은 진실되고 아름답게 살아야 된다는 말인 것이고, 소크라테스에게는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잘 사는 것이 가장 소중했기” 때문이다(1:98).
피히테는 독일의 철학자이며, 그의 ꡔ독일국민에게 고함ꡕ은 실천 이성에 중심을 둔 力作이라고 할 수가 있다. 19세기 초, 독일은 “우리들의 군대 사용은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고 있으며, 法典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들에게 빌려준 것이고, 그리고, 재판과 판결과 그 집행조차도 때때로 다른 사람들이 우리들로부터 빼앗아간다”(피히테, ꡔ독일국민에게 고함ꡕ, 범우사, 183면)라는 말에서처럼, 나폴레옹 치하에서 신음을 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피히테는 행동하는 양심으로서 자기 자신의 목숨을 걸고 그의 사상을 역설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ꡔ독일국민에게 고함ꡕ은 피히테의 교육론이자 그의 조국애가 깊이 있게 각인된 책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인간은 결코 언어의 주체자가 아니며, 언어가 그 인간을 변모시킨다. 외국어는 죽은 언어이며, 모국어는 살아 있는 언어이다. 외국어가 죽은 언어인 것은 한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파괴시키는 물론, 바로 그 언어에는 피정복자들을 유혹하여 도덕적으로 타락시키는 교묘한 술책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모국어가 살아 있는 언어인 것은 자기 민족의 역사와 전통을 보존해주는 것은 물론, 수많은 외세들의 거센 도전을 물리치고 그 민족구성원들을 더욱 더 결집시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히테는 비록, 이민족의 압제 속에서 신음을 하고 있을지라도 모국어를 통하여 위대한 독일정신을 창출해내자고 역설하게 되었던 것이다. “사상은 행위를 위해” 존재하고 “행위는 사상을 위해” 존재한다. 피히테는 인류의 발달을 다섯 단계로 나누어 설명한 바가 있다. 첫 번째는 자연 상태에서의 죄가 없는 시대이며, 두 번째는 죄가 시작되는 시대이다. 세 번째는 완전한 죄의 시대이며, 네 번째는 이성을 시인하는 시대, 그리고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는 이성이 완전히 시인되고 정화되는 시대이다. 그는 너무나도 완벽한 죄의 시대에 서서, 그 시대를 앞지르고 미래로 거슬러 올라가, 위대한 독일정신(이성이 완전히 시인되고 정화되는 시대)을 창출해내고자 했던 것이다. 피히테가 ꡔ독일국민에게 고함ꡕ을 강연하는 동안 그가 체포되었다는 소문이 무성하게 나돌기도 했지만, 그는 프랑스와의 전쟁 중, 수많은 부상병들을 치료하다가, 끝끝내 그의 조국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1814년 1월 27일, 향년 52세로 죽어---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갔다고 한다. 피히테의 철학은 지극히 평범하고 새로울 것도 없지만, 그러나 그의 ꡔ독일국민에게 고함ꡕ은 그의 피와 땀의 결정체이자, 실천 이성의 살아 있는 전범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지식을 얻고 지식을 넓히는 일에도 용기가 필요하고, 앎과 행동을 자연스럽게 일치시키는 데에도 순교자적인 용기가 필요하다.
가스통 바슐라르의 ‘인식론적 단절’도 모든 가치를 전복시킨 것이며, 부르디외의 ‘이교도적 단절’도 모든 가치를 전복시킨 것이다. 나는 낙천주의 사상의 주창자로서, 새로운 지식이란 자연에 거역하는 만행이며, 언제, 어느 때나 악마와도 손을 잡는 범죄자의 산물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제일급의 지식인이란 “낡은 경계석과 낡은 숭배심을 정복한”(2:70) 자이며, 전투적인 정신과 그 용기로써 무자비하다고 싶을 정도로의 잔인한 파괴자이기도 한 것이다. 이 세상의 어중이 떠중이들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그는 사악하고 파렴치한 신성모독자에 지나지 않지만, 최고급의 지혜와 앎에의 의지로서 충만되어 있는 인간의 입장에서 바라보면, 그는 고귀하고 위대한 인간의 전형이기도 한 것이다.
파우스트: 아아 나는 이제 철학도
법학도 의학도
심지어 神學까지도
열심히 노력해서 연구를 끝마쳤다.
그 결과가 이처럼 불쌍한 바보가 되었어.
예전보다 조금도 현명해지지는 않았고,
석사니 박사니 이름만 근사하게
벌써 그럭저럭 10년 동안이나
아래 위로 이리저리
학생들의 코나 쥐어 흔들고 있었다.
(......)
그대신 나는 모든 기쁨을 빼앗겨 버렸어.
어떤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도 없으며
인간을 보다 훌륭하게 만들고, 개종시키기 위해서
무엇인가 가르칠 수 있다고 자부하지도 않는다.
재산도 돈도 없고
세상의 명예나 영화(榮華)도 갖지를 못했다.
이런 식으로 더 이상 산다는 것은 개라도 싫어 하겠지!
그래서 나는 영혼의 힘과 말로써
그 어떤 비밀을 알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마술에 몸을 맡겼다.
그렇게 하면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일을
비지땀을 흘려가며 지껄이지 않아도 되겠지.
----ꡔ파우스트ꡕ, 비극 제1부, 「밤」 중에서(3:33)
셰익스피어는 유럽적 사건이 아니라 세계적인 사건이었고, 괴테 역시도 유럽적 사건이 아니라 세계적인 사건이었다. 그들의 장중하고 울림이 큰 문학적 세계는 영어와 독일어의 영역을 넘어서서 모든 인류의 자산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그들의 대작가의 신화는 진정한 의미에서 ‘문화적 영웅’의 그것으로 자라나고 있다고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고전 중의 하나인 ꡔ파우스트ꡕ는 그러나 성경을 빼어놓고는 생각할 수조차도 없는 작품이다. 콜롬부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했던 것도 동시대의 “문화적 지시와 선택”이었고, 괴테가 ꡔ파우스트ꡕ를 집대성했던 것도 동시대의 “문화적 지시와 선택”이었다(4:105). ‘문화적 지시와 선택’이란 그 주체자들의 신화적인 열망과 꿈을 추구했다는 것을 뜻하고, 다른 한편, 콜롬부스와 괴테가 아니더라도 아메리카의 신대륙이 발견되고, ꡔ파우스트ꡕ가 출간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뜻한다. 모든 문화란 최고급의 격세유전이며, 그것은 결코 논리적인 비약을 허용하지 않는다. ꡔ파우스트ꡕ는 15-6세기의 독일의 연금술사에 대한 전설이 아니더라도, 구약성경의 「욥기」의 창조적인 패러디이며, 비록, 착한 인간이 일시적으로 어두운 충동에 휩쓸릴지라도 결코 올바른 길을 잃지 않는다는 神正論을 옹호한 작품에 지나지 않는다. 욥과 파우스트는 다같이 하나님의 총애를 받고 있는 자들이며, 그들의 좌절과 시련은 하나의 통과제의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괴테의 파우스트는 속죄양이 될뻔했던 욥과도 같은 인물이며, 그들의 통과제의는 하나님의 은총을 받기 위한 댓가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나님과 악마와의 약속이든, 동서고금의 모든 책을 다 섭렵한 파우스트 박사와 악마와의 계약이든 간에, 파우스트 박사의 지적 회의가 메피스토펠레스라는 악마를 불러들이고, 파우스트 박사는 그 악마와의 계약을 통해서, 이제까지 이성으로 알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를 찾아 나서게 된다. 비록, “불쌍한 바보가” 되는 과정에 불과하긴 했지만, 파우스트 박사가 철학, 법학, 의학, 신학을 통해서 추구했던 세계는 찬란한 태양이 빛나는 이성과 합리성의 세계이고, 그가 메피스토펠레스라는 악마와의 계약을 통해서 추구했던 세계는 비이성과 비합리성으로 지칭되는 어두운 밤의 세계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찬란한 태양이 빛나는 낮의 세계에서 어두운 밤의 세계로의 이행은 다만, 좌절하고 패배한 자의 그것을 뜻하지 않고, 형이하학의 세계에서 형이상학의 세계로의 이행을 뜻한다. 형이하학의 세계는 기계론적인 인과법칙이 지배하는 세계이며, 형이상학의 세계는 기계론적인 인과법칙이 아닌, 절대적인 관념이 지배하는 세계이다. 인공위성이나 비행기가 하늘을 날아오르고, 특정한 온도와 조건 아래서 어떤 생명체가 자라나고 쇠퇴하는 것을 다루는 것은 형이하학의 일이지만, 우리 인간 존재의 본질이나 죽음, 영혼불멸, 신, 종교, 도덕 등은 형이하학의 일이 될 수가 없다. 제 아무리 과학혁명과 첨단 산업문명이 발달한 20세기 말에도 형이상학적인 요구는 결코 줄어들지 않고 있는 데, 왜냐하면 이 세계의 근원 자체가 알 수 없는 혼돈이며, 어둠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어떤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도 없으며/ 인간을 보다 훌륭하게 만들고, 개종시키기 위해서/ 무엇인가 가르칠 수 있다고 자부하지도 않는다”는 말에서처럼, 파우스트 박사의 지적 회의는 형이하학의 한계를 뜻하고, 그의 악마와의 계약은 형이하학을 넘어선 새로운 형이상학의 세계로의 이행을 뜻한다. 하지만 ꡔ파우스트ꡕ는 선과 악, 이성과 비이성, 합리성과 비합리성 등의 이분법에 의해서 지배되지 않고 있으며,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거나 땅에서 지옥으로 추락하기도 하는 형이상학에 의해서 지배되지도 않고 있다. 괴테가 메피스토펠레스라는 악마의 입을 통해서, “항상 악을 원면서도 언제나 선을 행사하는” 악마라고 말하고 있듯이, 선악의 문제는 진리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시간과 공간의 문제일는지도 모른다(3:69). 피레네 산맥 이쪽에서의 선이 피레네 산맥 저쪽에서는 결코 선일 수가 없으며, 어제의 선이 오늘의 선이 되고 내일의 선이 될 수는 없다. 파우스트 박사가 없어도 비합리성과 비이성(악과 허위)이 가능하지가 않고, 메피스토펠레스가 없어도 합리성과 이성(선과 진리)이 가능하지가 않다. 영원한 생명의 적이며 회춘의 적인 악마가 오히려 그것의 자극제가 되고 있는 것과도 같고, 다른 한편, 영원한 생명의 상징이자 회춘의 상징인 파우스트가 오히려 악마의 생명을 도와주고 촉진시켜 주고 있는 것과도 같다. 파우스트 박사와 악마와의 계약은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의 모순점을 변증법으로 지양하는 것을 뜻하고, 이러한 변증법적인 지양은 파우스트 박사를 통한 괴테의 찬란한 인식의 제전을 뜻한다.
괴테의 앎에의 의지는 끊임없는 인식욕에 사로잡혀서 새로운 지식에의 갈증을 느꼈던 것이며, 그 갈증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도전----비록, 그것이 성경에서처럼 神正論 속에 수렴되어 있을지라도----의 형태로서 메피스토펠레스라는 악마와도 손을 잡았던 것이다. 아담과 이브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괴테가 자기 자신을 구원하기 위하여 위대한 악마와 함께 살았듯이, 유한한 존재자인 인간은 그 불멸의 인간을 위하여 아주 가혹하고 혹독한 댓가를 치루지 않으면 안 된다. 요컨대 소크라테스가 한 사발의 毒杯를 마시고 피히테가 너무나도 때 이르게 요절해갔던 것처럼, 모든 낙천주의자는 자기 스스로, 적극적으로 유한성을 밀고 나갈 때만이 하나의 이적이나 기적처럼, 영원불멸의 존재가 되어갈 수가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얗게 눈이 덮이었고
전신주가 잉잉 울어
하나님 말씀이 들려온다.
무슨 啓示일까
빨리
봄이 오면
죄를 짓고
눈이
밝어
이브가 해산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과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 겠다
----윤동주, 「또 太初의 아침」 전문
담배 붙이고 난 성냥개비불이 꺼지지 않는다 불어도 흔들어도 꺼지지 않 는다 손가락에서 떨어지지도 않는다.
새벽이 되어서 꺼졌다.
이 時刻까지 무엇을 하며 살아왔느냐다 무엇 하나 변변히 한 것도 없다.
오늘은 찾아가보리라
死海로 향한
아담橋를 지나
거기서 몇 줄의 글을 감지하리라
遼然한 유카리 나무 하나. ----김종삼, 「詩作노우트」 전문
롤로 메이가 ꡔ창조와 용기ꡕ에서 역설하고 있듯이,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성자와 반항자”는 언제나 동일 인물들이었고, 후세의 역사가들이 집중 조명을 하고 있는 인물들은 오랫동안 박해받고 추방된 사람들, 그러나 행운의 결말을 지닌 범죄자(반항자)들이었다고 할 수가 있다(5:47). 소크라테스의 사형선고와 무서운 毒杯가 그의 앎이 극단화된 결과라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야만 했던 파우스트의 행위 역시도 그의 앎이 극단화된 결과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윤동주의 「序詩」의 부끄러움은 삶의 오점으로서의 부끄러움이며, 「또 太初의 아침」의 부끄러움은 우리 인간들의 삶의 원동력으로서의 부끄러움이다. 「또 太初의 아침」에서의 부끄러움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는 부끄러움이며, “죄를 짓고/ 눈이/ 밝어//이브가 해산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과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라는 得罪神話의 부끄러움이다. 득죄신화란 문화의 수호신인 프로메테우스에 의해서 문명과 문화의 성취가 이루어진 것을 말하고, 아담과 이브를 통해서 선악의 가치판단을 할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윤동주는 “빨리/ 봄이 오면/ 죄를 짓고” 싶다고 말하지, 그것에 대한 용서를 구하거나 우리 인간들을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지는 않는다. 또한 윤동주는 “이브가 해산하는 수고를 다하면/ 무화과 잎사귀로 부끄런 데를 가리고/ 나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겠다”고 말하지, 헤라클레스의 노역이 배제된 지상낙원에 대해서는 결코 말하지 않는다. 「또 太初의 아침」은 성자와 범죄자가 동일 인물이었다는 사실에도 맞닿아 있고, 人神으로서의 더없이 순결한 범죄의 생산성에도 맞닿아 있다. 모든 진리는 시간과 공간이라는 한계 속에 갇혀 있는 잠정적인 오류에 불과하며, 죄를 짓고 죄악을 정당화할 수 있는 득죄신화야말로 영원불멸의 진리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윤동주가 앎에의 의지의 정점에서 헤라클레스의 노역과도 같은 삶의 행복을 더없이 진솔하게 노래하고 있다면, 김종삼 역시도 앎에의 의지의 정점에서 “死海로 향한/ 아담橋를 지나// 거기서 몇 줄의 글을 감지하리라”고 최고급의 지혜를 노래해놓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死海로 향한/ 아담橋를 지나”라는 시구는 「또 태초의 아침」이 예고했던 후속편이기도 하고, 또한 그것은 “遼然한 유카리 나무 하나”가 시사해주고 있듯이, 제이의 약속의 땅을 은밀하게 가르쳐 주기도 한다. “거기서 몇 줄의 글을 감지하리라”는 시구는 새로운 삶의 지혜를 뜻하고 “遼然한 유카리 나무 하나”는 마치, 운명의 여신의 神木처럼, 무한히 신성한 생명의 나무를 뜻한다. 지식의 나무가 서 있는 곳은 멀고 험하고, 거대한 산맥과도 같은 파도 속에 파묻혀서 보이지는 않지만, 소크라테스나 파우스트와도 같은 예언자적인 지성과 총명한 두뇌를 통해서 바라보면, 언제나 젖과 꿀이 넘쳐 흐르고 있는 가운데, 푸르고 푸른 소나무 숲처럼 웅장하고 장엄하게 펼쳐져 있는 곳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세상에는 앎처럼 기쁘고 즐거운 것도 없고, 앎처럼 슬프고 고통이 따르고 무용한 것도 없다. 또한 앎처럼 너그럽고 인자하고 관용적인 미덕도 없고, 앎처럼 무자비하고 배타적이며 온갖 특전과 특혜로 포장되어 있는 것도 없다. 앎은 지상 최대의 명예이고 재산이며 권력이고, 앎은 천변만화하는 요술장이이다. 어떻게 앎을 소유한 자가 有罪가 되고 행복하지 않을 리가 있겠으며, 어떻게 앎을 소유하지 못한 자가 無罪가 되고 행복할 수가 있겠는가! 앎에 의해서 선과 악, 진리와 허위, 주인과 노예, 성과 속, 행복과 불행, 남근중심주의와 여성차별, 유색인과 무색인, 지식인과 비지식인, 만물의 영장과 짐승, 스승과 제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전문가와 비전문가 등이 구별되고, 앎에 의해서 온갖 계급적인 질서와 다양한 삶의 투쟁과, 또한 그만큼의 다종 다양한 이기주의들이 출현하고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우리 인간들이 새로운 앎의 영역을 개척하고 앎에 의해서 신과도 같은 인물이 되어온 것도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인간들이 그 앎을 위해서 모든 인간적인 삶을 희생하고, 그토록 오랫동안 노예적인 복종태도를 취해왔다고 해도 틀림이 없다.
인류의 역사는 계급 투쟁의 역사이기 이전에 앎의 투쟁의 역사이고,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혹은 맹자의 말씀처럼, 최고급의 지혜로서의 앎만이 고귀하고 유용하고 선량한 것일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가난하고 비천하고 사악한 것은 앎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인간이 부유하고 고귀하고 선량한 것은 그토록 소중한 앎을 소유했기 때문일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아는 자만이 유덕하다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말이 거짓일 수가 있겠으며, 또한 어떻게 性善說을 주창했으면서도 제일의 천성을, 제이의 천성으로 바꾸려고 그토록 노력했던 맹자의 의지를 부정할 수가 있겠는가? 대부분의 인간들은 제일의 천성이 소중하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제일의 천성은 제이의 천성(교육)에 의해서 소멸되고 만다. 앎에의 의지는 자기 이웃과 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압도적인 투쟁의 의지이며, 수많은 이민족들의 백만 두뇌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세계정복운동에 지나지 않는다. 앙리 베르그송은 그의 저서, ꡔ사유와 운동ꡕ을 통해서,
“교사가 고학년은 물론 저학년까지도 학생들의 창의성을 촉발시키는 일이프랑스에서보다 더 잘 되어 있는 곳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많은 할 일이 남아 있다.(......) 처음부터 교과서에 의존하는 학습은 오직 저 높이 비상(飛翔)해야만 하는 행위를 억누르고 제거한다. 그러므로 아이에게 工作 연습을 실기시키도록 하되 이런 교육을 막일꾼에게 맡기지 말자. 오직 참된 명인(名人)에게 사숙(私淑)하도록 하자. (......) 왜냐하면 아이들은 탐구자요 발명가로서, 언제나 새로움을 추구하면서 규칙에서 뛰쳐나가기 때문이다. (.....) 물론 인류가 획득해온 이 결과들 각각은 값진 것들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른들의 지식이며, 그들은 이 지식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만 알고 있으면 필요한 때는 언제든지 그것을 찾아낸다. 그보다는 아이의 가슴 속에 아이의 지식을 가꾸자. 그리고 오직 성장할 필요가 있는 이 새싹들을 이전의 경작(耕作)으로 수확해놓은 마른잎과 가지더미 속에서 질식시키지 않도록 조심하자”(6: 101)
라고, 프랑스 교육제도의 최대의 장점을 역설하고 있으면서도---- 하나의 고정관념처럼, 경직되고 박제화된 교육이 아닌---- 학생들의 창의성에 의한 참 교육을 역설하고 있고, 쇼펜하우어는 자기 자신의 철학을 말하는 자리에서,
“철학자가 공적인 입장이나 혹은 사적인 처지에서 완전히 도구로 사용되어온 지가 꽤 오래되었지만, 나는 그러한 장해를 입지 않고 30년 이상이나 나의 사상의 길을 걸어왔다. (......) 나의 저작은 정직과 공명을 이마에 써붙이고 쓴 것이라 칸트 이후 유명해진 세 사람의 궤변가의 저작과는 크게 다르다. 나의 입장은 언제나 사려, 즉 이성에 따르고 정직한 말로 일관되어 있으며, 지적 직관이니 절대 사유니 하는 바른대로 말해서 허풍이나 사기와 같은 잘못된 영감을 주는 입장에는 서 있지 않다. 나는 언제나 그러한 정신으로 탐구했으며, 한편으로는 거짓과 사악이 널리 퍼지고 허풍(피히테와 셸링)이나 사기(헤겔)가 크게 존경을 받는 것을 보고 현대인의 갈채를 단념하였다. 현대는 이 20년 동안 그 정신적 괴물 헤겔을 최대의 철학자로 떠들어대어 그 소리는 전유럽에 울려퍼지고 있다. 아마도 현대에는 사람에게 줄 월계관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찬미를 매음한 시대의 비난은 조금도 두려울 것이 없다.”(7:397)
라고, 철학자로서의 “현대인의 갈채를 단념”한 배경을 설명하고 있으면서도, “정직과 공명을 이마에 써붙이고” 모든 “인류에게 가장 훌륭한 책을 물려준다”라는 도저한 지적 우월감을 피력하고 있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또는 베르그송과 쇼펜하우어와도 같은 대 철학자들은 절대로 우연의 산물일 수가 없으며, 또한 하나님의 민족과도 같은 선천적인 천재성과 은총의 산물일 수가 없다. 그들은 있는 것을 토대로 하여 새로운 것을 창조했다는 의미에서 지난 시대의 문화와 전통의 계승자이면서도, 동시에, 기존의 모든 것을 부정함으로써 새로운 것을 창조했다는 의미에서 극단적인 문화와 전통의 단절론자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들은 니체의 말대로, 과거의 문화와 전통이 뜻하지 않게 피워낸 새싹들이고, 최고급의 격세유전으로서의 인간의 문화와 전통에 기여하고 있는 위대한 인물들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아름다움이 우연의 산물이 아닌 것처럼, 고귀한 인간의 고귀한 사상역시도 절대로 우연의 산물일 수가 없으며, 그것은 여러 세대에 걸친 앎에의 의지가 축적된 결과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과연 한국 사회는 학생들의 창의성을 촉발시키는 교육제도를 간직하고 있으며, 교과서에 의존하는 박제화된 교육을 지양하고 참으로 살아 있는 교육을 가르치고 있는 것일까? 또한 한국 사회는 교육자가 교육을 먼저 받아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말대로, 수십 년 동안이나 현대인의 갈채를 단념한 위대한 철학자들을 생산하고 있으며, 쇼펜하우어가 독일 철학계의 황제였던 헤겔을 정면으로 공격했던 것과도 같이, 가장 무자비하고 잔인한 앎에의 의지로서 충만되어 있는 제자들을 길러내고 있는 것일까? 한국 사회는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도 같은 철학자도 나오지 않고 있고, 베르그송과 쇼펜하우어와도 같은 철학자도 나오지 않고 있다. 한국 사회의 교육제도는 살아 있는 참 교육은 커녕, ‘비평의 만장일치 제도’가 양성화되어 있고, 수많은 천재와 미래의 주인공들의 백만 두뇌를 가장 확실하게 무력화시키는 어중이 떠중들의 생산에 여념이 없는 것처럼도 보인다. 한국 사회는 앎이 육화되지 않은 사회이며, 타인의 두뇌와 심장으로 움직이는 학교의 이성에 의해서 박제화된 사상과 이념만을 가르치고 있는 사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콩꽃 떨기마다 이상한 나방이 射精을 하고 다녔다. 그때 나는 국어선생이었다. 깊이 사랑했던 이념의 말이 교과서 구석에 쓰여 있었다. 지면을 응시하자 낱말은 괴성을 지르며 교실을 울리고 멀리 운동장 미류나무 이파리에 머물었다. 구름은 정말 한가롭게 지나가고 학생들의 한 떼는 교련 시간이었다. 엎드려 쏴! 찔러, 길게 찔러. 이파리는 사살되어 무참히 찢기우고, 고개를 돌렸을 때 교과서의 활자는 뻔뻔하게 그대로 박힌 채였다. 그해 농부들이 수확한 콩은, 껍질은 탱탱하고 의연했지만 모두 가투였다. 나는 가투의 의미를 가르칠 뿐이었다. ---- 최두석, 「가투」 전문
내가 기회 있을 때마다 되풀이 강조하고 있는 득죄신화와 가장 찬란한 인식의 제전을 더 이상 남의 나라의 이야기로만 간주하거나,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자랑스러운 명예에 반하여, 무례함을 예법이라고 우기고 있는 것과도 같은 횡설수설의 이야기로만 치부해두지 않기를 바란다. 또한 프로메테우스의 콤플렉스에 반하여, 백만 두뇌를 가장 확실하게 못쓰게 만드는 제3세계의 문화적 풍토병을 더 이상 은폐하지 않기를 바라고, 비평하기보다는 기꺼이 찬양하는 비평의 만장일치제도의 폐해에 대해서도 더 이상 얼버무리거나 은폐하지 않기를 바란다. 제3세계의 문화적 풍토병과 비평의 만장일치제도가 자라나고 있는 사회에서는, “콩꽃 떨기마다 이상한 나방이 射精을 하고” 다닐 때, “깊이 사랑했던 이념의 말”들이 괴성을 지르게 되고, 단 하나의 이데올로기만을 강요받고 있는 학생들이 “엎드려 쏴! 찔러, 깊게 찔러”를 배울 때, 농부들이 수확한 콩은 쭉정이와도 같은 “가투”가 되기 마련이다. 최두석의 「가투」는 한국 사회의 교육제도와 농촌의 구조적 모순을 다같이 비판하고 있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득죄신화와 가장 찬란한 인식의 제전이 무엇인지를 알지도 못하는 사회에서의 학교 교육이 제대로 될 리가 없고, 제3세계의 문화적 풍토병과 비평의 만장일치제도가 자라나고 있는 사회에서의 ‘콩농사’가 제대로 될 리가 없다.
김명수 시인은 「하급반 교과서」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해놓고 있다.
아이들이 큰소리로 책을 읽는다
나는 물끄러미 그 소리를 듣고 있다
한 아이가 소리내어 책을 읽으면
딴 아이도 따라서 책을 읽는다
청아한 목소리로 꾸밈없는 목소리로
“아니다 아니다!” 하고 읽으니
“아니다 아니다!” 따라서 읽는다
“그렇다 그렇다!” 하고 읽으니
“그렇다 그렇다!” 따라서 읽는다
외우기도 좋아라 하급반 교과서
활자도 커다랗고 읽기에도 좋아라
목소리 하나도 흐트러지지 않고
한 아이가 읽는 대로 따라 읽는다
이 봄날 쓸쓸한 우리들의 책읽기여
우리 나라 아이들의 목청들이여
한국 사회는 프로메테우스 콤플렉스가 없어도 행복한 사회이며, 베르그송이 역설한 참된 名人이 없어도 행복한 사회이고, 진정한 탐구자와 발명가가 나오지 않아도 행복한 사회이다. 소크라테스와 플라톤과 맹자가 그토록 역설했던 앎에의 의지가 육화되지 않아도 행복한 사회이며, 진정한 학문을 위해 살아가는 학자가 없어도 행복한 사회이고, 이민족의 백만 두뇌를 무력화시키기 위한 세계정복운동이 없어도 행복한 사회이다. 한국 사회의 교육은 모든 회의와 의심이 사라진 채, 단 하나의 해답만이 있는 교육이며, 「하급반 교과서」처럼 “활자도 커다랗고” 읽기도 좋은 동어반복만이 있는 교육이라고 할 수가 있다. 또한, 한국 사회의 교육은 한 아이가 “아니다 아니다! 하고 읽으니/ 아니다 아니다하고 따라서 읽는다”에서처럼, 그 울림의 파장이 퍼져 나가고 있는 즐거운 교육이며, 똑같은 사고방식과 똑같은 행동만이 있어도 언제나 자랑스러운 교육이라고 할 수가 있다. 한국 사회는 지식의 나무가 있는 곳이 왜, 우유부단함과 비겁함과 두려움과 공포가 따르고 있는지를 알지도 못하고, 또한, 한국 사회는 지식의 나무가 있는 곳이 왜, 더없이 착하고 선량한 사람들보다는 더욱 더 가증스러운 범죄자들만이 우글거리고 있는 곳인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는 왜, 지식의 나무가 있는 곳이 멀고 험하고, 거대한 산맥과도 같은 파도에 파묻혀 있는지도 알지 못하고, 또한, 한국 사회는 지식의 나무가 있는 곳이, 왜 사시사철 젖과 꿀이 흐르고 있는 곳인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는 제3세계의 문화적 풍토병과 비평의 만장일치제도가 자라나고 있는 사회이며, 앎에의 의지와 세계정복운동이 무엇인가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회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 한 불세출의 비평가가 있다. 그는 4, 19와 5, 16 사이에서, 다시 말해 ‘가능성과 좌절’ 사이에서 20년간 방황하였다. 그는 수인이었다. 동굴의 쇠사슬에 묶여 동굴 안쪽만 바라보게끔 운명지어진 수인이었다. 우리는 그로 말미암아 이데아의 세계를 비로소 알아 차릴 수가 있었다. 이상(李箱) 다음의 근대인인 까닭이다.
형이상학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의미찾기에서 비롯된다. 우리가 의미를 찾고자 하면, 자기 내부에서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외부에 의미가 없다는 전제하에서 철학이 시작된다. 철학이란, 그러니까 내성(introspection)이다. 자기 반성이란 주관, 곧 의식에다 묻는 것에서 비롯된다. 의식에 있어서는 모든 것이 서열(중심, 주변, 본질, 현상, 먼 것과 가까운 것)적인 체계화(중심, 본질이 주변, 현상에 우선한다는 원칙)로 시작된다. 의식에 있어서는 그러니까 단일체계만이 존재한다. 이 하나만의 체계, 가치관으로 정서화(整序化)된 단일체계를 끝까지 추구해 들어가면 그것은 폐쇄된 지점에 도달한다. 이성 중심의 플라톤적 형이상학의 파산이 여기에 있다.
이 이성중심주의에 바탕을 둔 서양 형이상학을 돌파하는 길은 두 가지로 알려져 있다. 하나는 단일체계(주관) 속에서 이를 해체하는 일. 이른바 형식주의의 함정을 그속에서 돌파하는 것으로, 수학자 로바치예프스키 및 데리다의 방식도 이런 범주에 든다. 다른 하나는 니체의 방식. “주관을 하나만이라 생각하는 그런 필연성은 없다”고 하고 “주관을 다수라고 보는 것이 나의 가설”(ꡔ권력에의 의지ꡕ)이라 니체가 말할 때 이는 내성, 곧 서양 형이상학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다.”
----김윤식, 「어떤 4,19 세대의 내면 풍경ꡕ(8:78)
실증주의 비평과 정신분석(심리주의) 비평을 상호 교차시켜 가면서 수십 권의 문학연구서와 압도적인 비평집을 저술해온 김윤식, 대한민국 최고의 국문학자이자 제일급의 비평가인 김윤식 교수, 하지만 김윤식은 그에 대한 세속적인 정평과 문학적인 소양이 의심스러울만큼, 형이상학과 철학을 몰이해하고 있어도 이만 저만 몰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외부에 의미가 없다는 전제하에서 철학이 시작”되고, “철학이란, 그러니까 내성이다”라는 말이 가능한 것일까? 어떻게 우리 인간 존재의 본질, 죽음, 영혼불멸, 신, 종교, 도덕 등이 한 개인의 “자기 반성”, 혹은 “주관”의 문제로만 해결이 가능하고, 또한 어떻게 형이상학이 플라톤적인 이성중심주의와 일치할 수가 있단 말인가? 적어도 철학이란 외부에 의미가 없다는 전제하에서 시작되지도 않고, 주관적인 자기 반성이나 내면 성찰을 통해서 시작되지도 않는다. 철학이란 지혜 사랑을 통하여 진리를 탐구하는 학문이며,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풍요로운 지상낙원을 창조하는 학문이다. 고전주의, 낭만주의, 현실주의, 초현실주의, 구조주의, 탈구조주의, 자본주의, 공산주의, 염세주의, 실존주의 등이 바로 그러한 예들이며, 오늘도 그 사상들은 저마다, 제 각각이 온갖 젖과 꿀이 넘쳐 흐르는 유혹의 손길들로 우리 인간들을 부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모든 사상(진리)은 행복에의 약속이며, 낙천주의를 양식화시킨 것이다. 이처럼 철학과 형이상학이란 우리 인간들의 외부와 내부에 폭넓게 걸쳐 있는 것이고, 아리스토텔레스와 쇼펜하우어의 말대로, 이 세계와 모든 것에 대한 놀라움에서 비롯된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때의 놀라움은 두려움과 공포이며, 그리고, 또한 그것은 불행한 어떤 삶을 지시하게 된다. 행복은 점점 더 멀리 달아나고 그토록 아름답고 풍요로운 지상낙원은 끝끝내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모든 것이 혼돈이고, 어둠이며, 또한 그 모든 것이 의혹이고, 의문이며, 신비이고, 그리고 놀라움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러한 철학과 형이상학적 놀라움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불가사의한 수수께끼와도 같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지, 형이하학자나 자연과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단 하나의 실체, 또는 절대적인 실체가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형이상학은 단일한 체계가 아니며, 소피스트들의 반대방향에서, 플라톤적인 이성중심주의로 설명이 가능한 것도 아니다. 김윤식이 아주 어렵고 힘들게 설명하고 있는 “단일체계”는 계몽주의와 실증주의로 설명이 가능한 이성중심주의이며, 그가 강조하고 있는 “의식”조차도 형이상학이 아닌 이성중심주의라고 해야 그 논리적인 타당성을 갖게 된다. 어떻게 형이상학을 계몽주의와 실증주의로 설명이 가능한 이성중심주의와 혼동할 수가 있으며, 플라톤적인 이성중심주의의 파산을 “형이상학의 파산”이라고 설명하는 오류를 범할 수가 있단 말인가? 또한 어떻게 플라톤적인 형이상학의 파산이라는 극단적인 오류에 힘 입어 단일체계를 비판하고, 로바치예프스키, 데리다, 니체 등을 끌어들여 박학다식한 자의 놀라운 종합력을 과시할 수가 있단 말인가? 니체가 서양의 형이상학을 비판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플라톤적인 이성중심주의에 대한 비판과는 다르게,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기독교적 사변 철학을 염두에 둔 비판이었던 것이다. 니체는 신의 죽음을 과감하고 용기 있게 선언하면서, 하늘 나라의 천국이나 이상이 아닌, 이 땅에 두 발을 튼튼히 내린 짜라투스트라, 즉, 고귀하고 위대한 ‘초인의 상’을 제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니체는 이성이 광기가 되고 회의가 죄였던 시대----소크라테스와 플라톤적인 시대----를 비판하기도 했지만,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형이상학, 혹은 기독교적 사변 철학을 매우 날카롭게 비판했던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형이상학이 없으면 형이하학도 없고, 형이하학이 없으면 형이상학도 없다. 이성이 없으면 비이성도 없고, 비이성이 없으면 이성도 없다.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가 동일한 인물의 두 얼굴이듯이, 그 음양의 조화는 결코 깨뜨려지지도 않을 것이다. 이 20세기 말의 첨단문명의 도시 속에서도 우뚝우뚝 솟아 있는 신성한 사원들이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고, 제법 인자하고 너그러운 문화인의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도, 날이면 날마다 외로움과 쓸쓸함을 어쩌지 못해 울고 있는 인간들이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데리다식의 ‘이성중심주의와 형이상학의 파산’이라는 극단적인 선언은 매우 선명하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결코 오래가지도 못하며, 그 수명이 짧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형이상학과 철학도 모르고, 의식과 무의식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다양한 가치체계와 단일한 가치체계도 모르는 김윤식이 이처럼 미묘하고 복잡하기 짝이 없는 현대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언급했을 리가 없다.
김윤식의 비평선집 속의 「어떤 4, 19 세대의 내면 풍경」은 대한민국 최고의 국문학자이자 제일급의 비평가라는 지적 덕목을 벗어나서 외화내빈의 수사학이 소리쳐 부르면, 전기적 자료나 신변잡기----김현의 교우 관계를 절대적인 경쟁관계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에 치우친 공허한 관념의 체조가 마중을 나와 대답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외화내빈의 수사학이라는 점에서는 ‘4, 19 세대의 선두주자’, ‘순한글 세대’, ‘우리 시대가 가졌던 대형비평가’, ‘불세출의 비평가’, ‘김현 문학의 산맥’, ‘근대 비평의 기수’ 등이라는 말들의 성찬이 돋보이고, 공허환 관념의 체조라는 점에서는 실존주의와 자유주의 차원에서 김현의 문학비평을 비판하지 못하고, ‘4, 19 세대’라는 ‘세대론적 관점’에서 실증주의자의 오류와 심리주의자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이 돋보인다. 김윤식의 「미백(未白)의 사상 또는 이청준의 글쓰기의 기원에 대하여」(ꡔ작가세계ꡕ, 1992, 가을호)라는 글이 그러한 것처럼, 어떤 사상이나 이념의 맥락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전기적 자료와 신변잡기에 치우친 인상비평(정실비평)을 하기가 십상이고, 하찮은 영혼에게는 칭찬의 말조차도 허락되지 않는다라는 말의 참뜻을 이해하지 못하면, 해외로는, 더군다나 문화선진국을 향해서는 감히 입 밖에도 내지 못할 ‘불세출의 비평가’라는 어처구니없는 食言을 일삼게 된다.
“이렇게 볼 때 김윤식과 김현의 만남이야 말로 그야말로 우리 현대비평사를 풍성하게 했던 그 어떤 만남보다도 빛나는 만남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 만남의 궤적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나는 그 만남을 하나의 비평사적 장관(壯觀)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들 서로는 서로의 정신끼리의 고압적인 긴장과 사유의 상호 교류를 동반하면서 우리 비평 문학의 성좌와 달무리를 함께 만들어 나갔던 것이다. 우리는 그 증거를 곳곳에서 찾아볼 수가 있다. 김윤식과 김현이 약 20여년 전에 함께 쓴 ꡔ한국문학사ꡕ가 이 땅에서 씌어진 가장 개성적인 문학사로서 그 뒷세대에게 아직도 극복의 대상으로 남아 있다는사실, 그들의 왕성한 비평적 활동과는 별도로 그들 모두 자신의 전공분야의 학문 연구에서도 중요한 업적을 축적했다는 사실, 한 사람은 국문학도로서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외국 문학도로서 ꡔ한국문학사ꡕ를 함께 집필하면서 서로의 글쓰기의 자양분을 최대한 교류했다는 사실, 한 사람은 ‘산문 시대’라는우리 현대문학사에서 기념비적인 문학 동인과 ꡔ문학과지성ꡕ이라는 돋보이는 계간지를 이끌면서 활발한 인간 관계를 통해 우리 문단의 기수로 군림했으며, 다른 한 사람은 ‘노예선의 벤허’처럼 고독한 정신의 움직임을 견지하면서 또한 어떠한 문학적 유파에도 관여하지 않은 채, 자신의 성채를 지속적으로 높이 쌓아갔다는 사실, (......) 우리 나라 비평가로서는 드물게 각기 ꡔ김윤식 평론 문학선ꡕ ꡔ전체에 대한 통찰ꡕ이라는 제목의 비평 선집을 발간했다는 사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둘 다 비평과 문학에 대한 섬세한 자의식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 결과 한 사람은 ꡔ한국 근대문예 비평사 연구ꡕ를 통해 우리 근대 문학비평을 최초로 본격적으로 정리하였으며,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전공인 프랑스 비평 연구의 분야에서 ꡔ프랑스 비평사: 현대편ꡕ, ꡔ프랑스 비평사: 근대편ꡕ을 통하여 외국문학 연구가로는 드물게 해당 외국문학의 비평사를 개성적으로 정리했다는 사실 등등에서 김윤식과 김현이 맺고 있는 특수한 관계를 유추해볼 수가 있다. 그들은 이질동형이었고 일종의 쌍생아였던것이다.”
----권성우, 「비평이란 무엇인가」(9:47)
나는 비평의 기능을 ‘정화기능’과 ‘강화기능’, 그리고 ‘성화기능’으로 설명을 한 바가 있다. 정화기능이란 그 주체자의 인식적 오류의 때를 씻어주는 것을 말하고, 강화기능이란 그 주체자가 자기 자신의 오류의 때를 씻어버리고 새로운 인식의 힘으로 무장했다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화기능이란 그 주체자가 최고급의 인식의 제전의 전사로서 타인의 말과 사유가 아닌, 가장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자기 자신만의 사상의 신전을 지었다는 것을 말한다. 비판(비평)이란 모든 학문의 예비학이며, 그 모든 것은 비판받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스승은 자기 자신의 권위를 위해 비판받지 않으려고 하고, 제자는 자기 자신의 입신출세를 위해 비평하기보다는 기꺼이 찬양을 하게 된다. 제3세계의 문화적 풍토병이란 아무런 명명의 힘도 없이 타인의 사상과 이론을 무자비하게 베껴먹는 병(범죄)을 말하며, 그 병이 만연하고 있는 한 비평의 만장일치제도는 그 주체자들의 이성적인 사유의 능력을 완전히 거세시키게 된다. 무차별적인 표절과 인위적인 조작이 만연하고 있는 우리 한국인들의 대학 사회가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고, 이문열, 황석영, 유종호, 김현, 김윤식, 백낙청, 김우창, 정과리, 신경숙, 이인화, 장정일, 구효서 등의, 이 표절의 대가들이 바로 그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 한국인들은 학문적으로 불임의 동물들에 불과하며, 제3세계의 문화적 풍토병과 비평의 만장일치제도 속에서 신음을 하고 있는 야만인들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비평가는 “의심하려는 경향과 부정하고 판단을 유보하려는 경향”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되고, “분석하고 조사하고 탐구하고 감행하려는 경향과 중립성과 객관적인 덕성”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14:121). 왜냐하면 비평한다는 것은 이해하고 분석하고 가치평가한다는 것이기 때문이고, 새로운 사물이나 새로운 현상에 이름을 부여하고 명명할 줄 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권성우는 그의 스승들로부터 모든 학문의 예비학으로서의 비판철학----비평가의 중립성과 객관적인 덕성----을 배우지 못하고, 외화내빈의 수사학과 공허한 관념의 체조만을 배운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는 ‘스승은 진리이며 진리는 신성하다’라는 노예의 사슬을 벗어 던지지도 못하고, 비평의 만장일치제도 속에서 스승들의 나쁜 악습과 병폐만을 배운 것처럼 보인다. 어떻게 해서 권성우는 김현과 김윤식의 만남을 ‘비평사적 장관’이라고 부를 수가 있게 되었고, ‘커다란 비평적 두 봉우리’, ‘화려한 논리의 축제’, ‘창조적이며 광범한 업적을 소유한 비평가’, ‘단순 수용단계를 넘어서 주체적으로 수용한 비평가’, ‘우리 비평문학의 성좌’, ‘한국문단의 기수’, ‘외국문학의 비평사를 개성적으로 정리한 비평가’, ‘난해한 형이상학적 비평과 주관적인 인상비평을 모두 비판, 전복시킨 비평가’라는 외화내빈의 수사학을 배우고, 이처럼 조잡하고 야심만만한 글(「비평이란 무엇인가」)에서 화려하게 그 꽃을 피울 수가 있었단 말인가?
한국 사회에서 제3세계의 문화적 풍토병과 비평의 만장일치제도가 만연하고 있는 한, 독창적인 문학 이론의 정립은 커녕, 영원히 문화선진국으로의 진입은 가능하지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형이상학과 철학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플라톤과 니체와의 대립 갈등도 모르는 비평가가 대한민국 최고의 국문학자이자 제일급의 문학비평가가 되고 있는 사회, 자유와 비극에 대한 역사 철학적인 개념도 모르고, 주제비평과 문학 이론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비평가가 세계적인 ꡔ프랑스 비평사ꡕ(김현)를 저술하고 불세출의 대형비평가가 되고 있는 사회, ‘아니다’와 ‘그렇지 않다’라는 비판 의식은 커녕, ‘스승은 진리이고, 진리는 신성하다’라는 불문률이 정식화되어 있는 사회,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듯이, 똑같이 닮은 꼴로 스승과 제자의 얼굴이 구분되지 않고 있는 사회, 문학 이론의 뿌리가 되어주고 있는 철학적 사유와 주제비평을 이해하지도 못한 채, ‘본문이 없는 주석비평’(인상비평)으로 정실비평이나 하고 있는 사회----. 정과리---- 김현의 문학비평을 “문학의 전부면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하고, “독특한 이론 체계”를 정립한 비평가로 찬양했다는 점에서(10:1380)----와 권성우는 김현과 김윤식을 찬양하고 성화시키기 이전에, 어떻게 해서 김현이 독특한 이론 체계를 정립하고, 왜 그들의 만남이 ‘비평사적 장관’인가를 따져 보아야만 했다. 김현의 독특한 이론은 어떠한 가설을 통하여 정립되었고, 그것은 과연 루카치나 골드만의 문학 이론과 견줄만한 것인가? 김현과 김윤식의 만남은 아도르노와 마르쿠제와의 만남과도 비교할만 하고, 그들은 과연 프랑크프루트 학파와도 같은 엘리트 집단을 구성하고, 세계적인 수준에서 자랑할 만한 업적을 쌓았던 것일까? 이러한 질문들과 그 질문들에 대한 명료한 답변을 제시하지 못하는 한, 그들은 그들의 문학비평을 외화내빈의 수사학과 공허한 관념의 체조로서 장식해왔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만일, 한국 사회가 진정한 지적 양심과 학문의 즐거움을 알지도 못한 채, 마치, 하나의 필요악처럼 학문을 출세의 도구로 간주해버리는 사회로 나아갔다면, 서구의 사회는 출세의 도구가 아닌, 진정한 지적 양심과 학문의 즐거움을 극대화시킬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할 수가 있다. 또한 서구의 학자들이 그들의 이름으로 등록된 신전을 짓지 않고 독창적인 사상과 독창적인 이론을 생산해낼 수 있는 비판적인 사유의 길로 나아갔다면, 한국의 학자들은 비판적인 사유는 커녕, 아직도 “진리와 허위를 구분하지 못하는” 매우 어리석고 우매할 수밖에 없는 학문 이전의 길로 나아갔다고 할 수가 있다.(11:178). 서구 사회에서의 스승의 사회적 지위는 모진 비바람과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더욱 더 밝은 빛을 발하는 금자탑과도 같지만, 한국 사회에서의 스승의 사회적 지위는 마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고 있는 것처럼, 대학 사회, 출판사, ㅇㅇ문학상, 학회, 예술원 등을 통해서, 오직 제자의 생사여탈권만을 움켜쥐고 있는 사상누각의 집과도 같다. 스승에게 있어서 제법 영리하고 쓸모 있는 제자는 시건방지고, 불쾌하고, 불구대천의 원수와도 같고, 못난 제자에게 있어서 못난 스승은----송장이 구더기에게 멋진 상념의 벌통이듯이---- 또한 그만큼 달콤하고, 안락하며, 잠시 잠깐 동안, 평화롭게 머물다가 갈 수 있는 잠정적인 휴양지와도 같다. 한국 사회는 앎이 육화되지 않은 사회이며, 타인의 두뇌와 심장으로 움직이는 학교의 이성에 의해서 박제화된 사상과 이념만을 가르치고 있는 사회라고 해도 틀림이 없다.
한국 사회는 서구의 사상과 이론에 저항할 수 있는 강력한 전투적인 정신과 앎에의 의지도 없고, 쇼펜하우어나 니체처럼, 인생 七十은 길지 않다며 한 평생 여자를 멀리하고 금욕주의를 실천한 철학자도 없다. 한국 사회는 애써 타인과 이웃들에게 강요하거나 독창성을 외치지 않아도 좋을만큼의 독창적인 문화도 없고, 똑같은 사고방식과 똑같은 행동만을 좋아하는 풍습의 미덕을 단 칼에 베어버리려는 미풍양속의 살해범도 갖고 있지 못하다. 소위 최고급의 민족문화와 풍습의 격세유전을 지니지 못하고 있는 곳이 한국 사회이며, 헤라클레스와 아킬레스----헤라클레스와 아킬레스의 스승은 히론이다----처럼, 스승의 크나 큰 은혜를 배은망덕으로 되갚아 주려는 제자가 나오지 않고 있는 사회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철학자라는 이름의 인간육성자, 위대한 지혜의 친구라기보다는 위험스러운 물음표, 그리하여 마침내, 모든 가치전복을 시도했던 니체는 ꡔ이 사람을 보라ꡕ에서 그 금과옥조와도 같은 스승과 제자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부르짖고 있다.
“너희가 언제나 제자인 채로 있다면 너희는 스승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다. 너희들은 나의 월계관을 빼앗고 싶지 않으냐?
너희들은 나를 공경한다. 그러나 어느 날 너희들의 공경심이 무너진다면 어찌하겠는가? 조심하라, 넘어지는 조상(彫像)에 깔려 목숨을 잃을 염려가 있느니.
너희는 짜라투스트라를 믿는다고 말하느냐? 그러나 짜라투스트라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너희는 나의 신자이다. 그러나 신자가 되어본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너희는 아직 너희 자신을 찾지 못하였을 때 나를 발견하였다. 그리고는 나를 믿는 모든 신자가 그렇게 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믿음이라는 것은 공허한 것이다.
이제 나는 너희에게 명한다. 나를 잃어버리고 너 스스로를 찾으라, 너희가 나를 완전히 부정하였을 때 나는 너희에게 다시 돌아가리니.” (12:192)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 한국인들에게 앎에의 의지를 육화시키고, 또한, 어떻게 우리 한국인들을 소크라테스, 플라톤, 니체, 쇼펜하우어와도 같은 세계적인 대사상가들로 육성시킬 수가 있는 것인가?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세계적인 교육제도를 창출해내는 것이며, 그리고, 또한 그 교육제도를 통하여 천재생산의 교수법과 학문연구의 탐구법을 창출해내는 일일 것이다. 하나의 연구 주제를 정하고, 그 연구 주제에 대한 끊임없는 이의 제기와 비판 능력을 함양시키고, 또, 그리고, 스승과 제자들 간의 상호토론과 상호논쟁을 통하여 사상과 이론을 정립하는 것이 모든 학문의 목표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사상과 이론이란 돈과 명예와 권력이며, 모든 학문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명문대학교인 하버드대학교에서는 독서중심의 글쓰기 훈련을 통하여, 그 구성원들의 천재성과 창의성을 개발시켜 나가고 있다고 한다. 그 결과, 하버드대학교의 출신들은 독창적인 사상과 이론을 정립하게 되었고, 하버드대학교의 교수법과 학문연구의 탐구법에 대한 무한한 자긍심과 긍지를 갖게 되었다고 한다. 파리고등사범학교는 세계적인 명문대학교이며, 그 학교의 교과 과정은 하나의 코스가 아니라, 천재생산을 위한 최선의 과정으로 짜여져 있다고 한다. 언제, 어느 때나 ‘일대 일’의 지도가 가능하며, 일년내내 단 한 시간의 강의를 듣지 않아도 된다. 철학이든, 문학이든, 그리고 또한, 역사학이든, 사회학이든 간에, 요컨대 제일급 수준의 논문만을 제출하면 되는 것이고, 그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의 수많은 어려움과 난제들을 만났을 때에는 언제, 어느 때나 스승들의 도움을 요청할 수가 있다는 것이다. 사르트르, 미셸 푸코, 부르디외, 데리다 등의 세계적인 석학들이 그곳 출신이며, 따라서 파리고등사범학교 출신들은 오늘날 전세계의 인문과학을 사로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다. 일년 내내 단 한 시간의 강의를 듣지 않아도 제일급 수준의 논문만을 제출하면 되는 곳이 파리고등사범학교이고, 그 제일급 수준의 논문을 쓰기 위해서는 오히려, 거꾸로, 하루에 열 두 시간씩, 열 네 시간씩 공부를 해야만 하는 곳도 파리고등사범학교이다. 스승은 그의 제자들에게 1년 내내 읽어야 할 도서목록을 제시해주고, 그들의 논문지도 요청에는 언제, 어느 때나 기꺼이 동참----상호토론과 상호논쟁을 통하여----을 해주어야 하는 곳도 파리고등사범학교이고, 매 학기마다 자기 자신의 사상과 이론으로 새로운 강의를 해야만 하는 곳도 파리고등사범학교이다. 그들의 교육과정은 절약의 법칙에 의하여 최단의 행로를 선호하고, 그리고 변화가 필요할 때조차도 수많은 다양성들을 종합하여 논리적인 비약을 시도하지는 않는다. 이때에 논리적인 비약을 시도하지 않는다는 말은 연속의 법칙을 뜻하는 것이고, 절약의 법칙과 연속의 법칙은 세계적인 교육제도의 핵심적인 두 축이라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하버드대학교와 파리고등사범학교, 그리고 옥스퍼드대학교와 베를린대학교 등----, 이 모든 세계적인 명문대학교들의 공통점은 사지선다형의 암기법을 전적으로 무시하고 독서중심의 글쓰기 훈련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최선의 독서법은 세계적인 고전을 읽고, 그렇지 못한 책들은 읽지 않는 데 있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 독서교육마저도 글쓰기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 교육의 효과는 전적으로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게 될 것이다. 글쓰기는 암기법보다도 두, 세 배 이상의 정신력의 집중과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고, 모든 것을 자기 자신의 관점으로 재구성하고 변형시키는 창의성을 필요로 한다. 장중하고 울림이 큰 문체에는 독창적인 사상과 독창적인 이론이 들어 있고, 그 문체의 주인공은 세계적인 대사상가로서의 人神의 경지로까지 자기 자신의 존재를 승화시켜 나갈 수가 있다. 만일, 세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에트」를 세 번 읽고 사지선다형의 주입식 문제를 낸다면, 중학교 2, 3학년 학생들도 대부분이 100점을 맞을 수가 있겠지만, 그러나 「로미오와 줄리에트」를 열 번 읽고 3--40매 정도의 글을 쓰라고 한다면, 하버드대학교의 학생들마저도 대부분이 100점을 맞을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주입식 암기교육은 단 하나의 정답이 있는 교육이지만, 독서중심의 글쓰기 교육은 하나의 정답은 커녕, 그 주체자들의 창의성이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로미오와 줄리에트」에 대한 논문은 이미 수없이 많이 씌어져 있고, 따라서, 새로운 논문을 쓴다는 것은 불모의 땅인 극북지방에다가 야자수 나무를 심는 것보다도 더욱 더 어려운 일일는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는 초, 중, 고등학교의 교과과정마저도 독서중심의 글쓰기 과정으로 대체하지 않으면 안 되고, 하루바삐 학문 꽃인 철학을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된다. 국어, 영어, 사회, 도덕, 철학, 그리고 심지어는 자연과학마저도 최고의 논문을 쓸 수 있는 예비단계로서의 독서중심의 글쓰기 과정으로 대체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리고 대학교에서는 석, 박사 학위 과정마저도 하나의 코스가 아닌, 진정한 천재생산의 양성소로서 그 면모를 일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석, 박사의 과정과 또, 그리고, 박사학위 논문을 쓰기까지의 그 오랜 기간 동안의 시간 낭비는 오직 천재생산 과정의 암적인 종양일 뿐이며, 단 한 시간의 강의를 듣지 않거나, 또는 대학 밖의 인사들에게마저도, 요컨대 최고 수준의 논문만을 제출한다면 모든 박사 학위와 대학교수자격증까지도 수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대학사회가 천재생산의 최대의 걸림돌이 될 것이며, 소크라테스, 플라톤, 니체, 쇼펜하우어와도 같은 세계적인 석학들의 논문마저도----끝끝내는 그 형식주의의 함정 때문에----사장시켜 버리는 우를 범하게 될 것이다. 모든 학문은 논문을 통해서 빛을 보게 되어 있고, 그 논문의 결정체가 사상과 이론인 것이다. 대한민국은 하루바삐 제 집만을 지키는 犬公의 수준을 벗어나서 어서 빨리 교육시장을 개방해야만 하고, 세계적인 석학들을 모셔 오지 않으면 안 된다. 서울대학교를 비롯한 이 땅의 명문대학교들마저도 외국의 명문대학교들에게 아주 값싸게 팔아 버리고, 세계적인 석학들 밑에서 독서중심의 글쓰기 교육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 한국의 학자들의 실력으로는 도저히 세계적인 대사상가들을 배출해내기는 커녕, 어떤 교육개혁마저도 이루어 내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우리 한국인들이 세계적인 대사상가가 될 수 있느냐/ 아니냐’가 문제이지, 우리 한국인들의 정체성의 문제는 그 다음의 문제에 지나지 않는다. 요컨대 학문의 세계에는 민족도 없고, 국경도 없고, 오로지 인간 전체와 진리 자체만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사형선고와 무서운 毒杯를 통해서 ‘너 자신을 알라’라는 교훈을 남겼고, 피히테는 그의 모국어에 대한 사랑을 통하여 ‘독일국민에게 고함’을 남겼고, 괴테(파우스트)는 너무나도 엄청난 인식욕에 불타서 자기 자신을 악마에게 팔아버리는 파격적인 행동 양식을 보여주었다. 앙리 베르그송은 새로운 프랑스 교육제도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열어 주었고, 쇼펜하우어는 ‘현대인의 갈채’를 단념한 대신, 염세주의의 진수를 보여 주었고, 니체는 그의 비판철학을 통하여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 대한 가장 이상적인 교훈을 던져 주었다. 제자는 스승에게 더없이 날카롭고 예리한 질문을 던져야만 하고, 스승은 제자에게 자기 자신의 사상과 이론의 진수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사상과 이론은 ‘무적의 왕홀’이며, 그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질문과 비판이 제거된 곳에서 사상의 신전이 세워지고, 그에 대한 찬양과 찬송이 울려 퍼지게 되는 것이지만, 그러나 바로 그때에 진정한 스승은 그의 제자들을 향하여 가장 날카롭고 예리한 채찍을 휘두르지 않으면 안 된다. “너희가 언제나 제자인 채로 있다면 너희는 스승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다”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고, “이제 나는 너희에게 명한다. 나를 잃어버리고 너 스스로를 찾으라, 너희가 나를 완전히 부정하였을 때 나는 너희에게 다시 돌아가리니”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나는 나의 스승이며, 모든 인류의 스승이다. 아니, 나는 나의 스승이며, 모든 신들의 스승이기도 한 것이다.
오늘날까지 수많은 철학자들이 수천 년 동안 만지작거려 온 것이 죄다 개념의 미이라였다는 말도 있지만,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새로운 사건과 사물과, 심지어는 낯선 인간들에게까지도 그것에 걸맞는 이름을 부여하고 명명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가 없다. 새로운 것은 낯선 것이며, 알 수 없는 것이고, 그 현상들을 보편적이면서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면, 우리 인간들은 엄청난 가치의 혼란과 무질서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새로운 것은 반드시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현상이어야 하지, 정반대 방향에서, 영속적이고 항구적인 현상이어서는 안 된다. 또한 새로운 사건과 사물은 체제 유지적인 질서 속에 수렴되어야 하지, 해체기적, 혹은 말기적인 문화적 현상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명명의 힘이란 새로운 사건과 사물에 이름을 부여할 수 있는 힘을 말하고, 하나의 개념이란 그 명명의 힘에 의해서 새로운 사건과 사물에 대한 이해를 담지하고 있는 어떤 것을 말한다. 하나의 개념은 그것이 설명하고 있는 최초의 대상에 대한 이해를 담지하고 있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더 큰 사회 역사적인 문맥, 또는 가장 찬란한 인식의 제전으로서의 정교한 이론 속에 수렴되어 있다고 할 수가 있다. 개념은 이론적인 문맥 속에서 다양한 의미를 지니고 있고, 때때로 “생명력이 없는 교훈”이나 “활동력을 쇠잔케 하는 지식”처럼, 그 대상들을 박제화하거나 질식시킬 때도 있지만, 우리 인간들은 이러한 개념이나 이론에 의해서 문명과 문화를 형성할 수 있는 역사적 인간이 되었다고 할 수가 있다(13:107). 새로운 것, 낯선 것, 알 수 없는 것에는 두려움과 공포와 불안이 따르게 되어 있고, 이러한 두려움과 공포와 불안과 정비례하여 수많은 걱정과 근심이 따르게 되어 있다. 우리는 개념을 통해서 수많은 두려움과 공포와 불안을 제거하는 것이고, 예언자적 지성과 총명한 지혜를 얻게 된다고 해도 틀림이 없다. 패배한 전쟁에는 전쟁의 장본인을 처벌하고 승리로 끝난 전쟁에는 전쟁의 장본인을 성화시키듯이, 명명의 힘은 “언어 자체의 기원”을 향유할 수 있는 힘이며, 하나의 개념이나 이론 체계는 종족창시자와도 같은 “지배자의 권력 표시”로 간주되기도 한다(14:33).
“心慮가 어떤 江을 건너가다가 진흙을 보았다. 그는 한참 동안이나 골똘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가 이윽고 한 조각을 떼어서 어떤 형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그 형상을 바라보고 있으려니까 쥬피터가 나타났다. 心慮는 쥬피터에게 魂을 불어 넣어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자 쥬피터는 그의 요청을 아주 달갑게 받아주었다.
그러나 心慮가 그 형상에게 자기 이름을 붙여주고자 했을 때 쥬피터는 맹렬히 대들면서 자기 이름을 쓸 것을 요구했다. 心慮와 쥬피터가 그 이름을 가지고 서로 다투고 있을 때, 이번에는 地神이 머리를 들고 일어나더니 자기 이름을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서로 다투던 그들은 할 수 없이 農神 새턴에게 그들의 분쟁을 해결해 달라고 요청했다. 農神 새턴은 공정한 심판관이 되어 다음과도 같은 결정을 내려 주었다.
그대 쥬피터는 魂을 제공했으니 그것이 죽을 때는 魂을 가져가면 될 것이고, 그대 大地는 육신을 제공했으니 그것이 죽을 때는 그 육신을 받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대 心慮는 이 형상을 처음으로 빚어 놓았으니까 그것이 살아 있는 한 그것을 소유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그 이름에 관해서 논쟁을 한 것이니, 그것은 땅으로부터 만들어졌다고 보아 ‘사람’이라고 부르면 된다.” (15:342)
하이데거가 즐겨 인용한 이 로마 신화는 프로메테우스의 인간 창조에도 맞닿아 있고, 구약 성경 속에서의 하나님의 인간 창조에도 맞닿아 있다. ‘心慮’는 프로메테우스와 하나님과도 같은 인물이지만, 그러나 이 신화 속에서는 우리 인간들이 진흙으로 빚어졌다는 사실이나, 그가 우리 인간들을 창조했다는 사실 역시도 그렇게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진흙’으로 한 사람의 인간을 창조할 때는 서로 서로 협력하던 신들이 ‘인간’이라는 개념을 둘러싸고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매우 격렬하게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心慮’와 ‘쥬피터’와 ‘地神’들 간의 싸움은 상호 간에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싸움이고, 바로 이때부터 우리 인간들의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고, ‘지배자의 권력 표시’와도 같은 지적 소유권의 싸움이 일어났던 것처럼도 보인다. 비록, 솔로몬의 元祖와도 같은 農神에 의해서 진정되기는 했지만, 우리 인간들의 유한성이 결정될 수밖에 없었던 웃지 못할 에피소우드를 생각해볼 때마다,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즐거워하는 사람들
이름을 붙여야 마음이 놓이는 사람들
이름으로 말하고 이름으로 듣는 사람들
이름을 두세 개씩 갖고 이름에 매여 사는 사람들
이라는, 신대철의 「추운 山」이라는 시가 떠오르기도 한다.
신대철의 「추운 山」은 문명비판적인 시각에서, 명명을 위한 명명이나 혹은 개념의 미이라에 발목이 잡혀 있는 현실을 비판하고 있는 시이기는 하지만, 우리 인간들은 “이름으로 말하고 이름으로 듣고” “이름에 매여” 살지 않을 수가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해주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건과 사물들을 한 마디의 말로써 봉한다는 것은 그 ‘앎을 자기의 보호’ 밑에다가 둔다는 것을 뜻한다. 새로운 지식, 혹은 앎은 그 주체자의 소유물이 되며, 그것이 보편적이고 합리적일수록 영생불사의 명성까지도 부여해준다. 心慮와 쥬피터와 地神들 간의 싸움이 그렇듯이, 이 세상에는 공짜가 없고, 따라서 개념의 세계에는 가장 잔혹하고 엄청난 피와 고문의 냄새가 짙게 배어 있을 수밖에 없다. 종교 재판소를 걸어나오면서까지도 地動說을 의심하지 않았던 갈릴레오, ‘너 자신을 알라’라고 합리적인 이성을 부르짖었던 소크라테스, 헤겔의 절대정신과 낙천주의에 반대하여 염세주의를 옹호했던 쇼펜하우어, 기독교적인 사상과 전통 속에서도 ‘신의 죽음’을 부르짖었던 니체를 생각해보고, 문화의 수호신이 되기 위하여 원시 야만인들을 발견해야만 했던 프로메테우스, 로마제국의 지배적인 가치들을 모조리 전복시키면서 가난하고 착하고 힘없는 민중들의 삶을 재발견해야만 했던 예수 그리스도, 찬다라는 간통, 근친상간, 범죄의 결과라는 마누의 가치관을 전복시키면서, 惡衣惡食과 치명적인 無知와 전염병 등에 시달리고 있는 민중들의 삶을 재발견해야만 했던 부처의 일생 등을 생각해보라! 地動說, 합리적인 이성, 염세주의, 신의 죽음 등, 어느 것 하나 피와 고문의 냄새가 배어 있지 않은 것이 없고, 불의 발명, 기독교, 불교 등, 어느 것 하나 그 주체자에게, 가장 잔인한 복수를 가하지 않은 것이 없다. 갈릴레오, 소크라테스, 쇼펜하우어, 니체, 프로메테우스, 예수, 부처 등, 그들은 모두가 언어 자체의 기원---- 종족창시자와도 같은 지배자의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서 그들의 목숨까지도 걸었던 것이고, 어떠한 고문과 압력 밑에서도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던 지적 양심의 소유자들이기도 했던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香氣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김춘수, 「꽃」 전문
이 강아지는 얼마나 말썽을 피우는지 미운 짓만 골라 한다. 신발을 물어뜯거나 마당의 꽃 모가지를 씹고 있거나 아니면 어디서 들춰냈는지 걸레를 입에 물고 좋아라 마당을 뛰어다니는 것이다.
미운 놈, 미운 놈에 자꾸 시달리면 내 마음씨도 곱지만은 않다. 그래서 처음의 이름을 버리고 다른 이름, 다올이로 이름을 바꿔버렸다. 네가 하는 짓은 다 옳다, 다 옳다, 그래서 ‘다올이’라고 새로 이름을 붙이고 다올아! 다올아! 불러보니, 미운짓도 다 옳은 것 같다.
다올이가 하는 짓은 다 옳다. 절대긍정의 세계에서 다올이가 짖고, 해는 둥글게 떠오른다.
----최승호, 「다올이」 전문
김춘수의 「꽃」이 명명의 힘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는 엄청난 가치의 혼란과 무질서----“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가 그것이다----를 겪게 된다는 사실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라면, 최승호의 「다올이」는 “미운 짓만 골라”하는 한 마리의 강아지에 대한 고정관념을 비틀어 보거나 뒤집어 본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김춘수의 명명의 힘은 새로운 가치와 질서를 부여해주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고, 최승호의 명명의 힘은 모든 가치전복의 힘으로 작용하면서도, 다른 한편, 절대긍정의 세계, 혹은 우주론적 행복론의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 제임스 조이스는 ꡔ젊은 예술가의 초상ꡕ에서 “나는 신의 대장간에서 아직 창조되지 않은 인류의 양심을 단련하고 있다”라고 말한 바가 있지만, ‘꽃’이 ‘꽃’인 것은 우리 인간들이 그것에 이름을 붙여주었기 때문이고, ‘다올이’가 ‘다올이’인 것은 우리 인간들이 그것에 이름을 붙여주었기 때문이다. 명명의 힘은 모든 가치의 혼란과 무질서를 잠재우듯이, 체제 유지적인 힘으로도 작용하고, 또한 명명의 힘은 모든 가치체계를 전복시키듯이, 체제 전복적인 힘으로도 작용한다.
철학한다는 것은 “사유 작용의 습관적인 방향을 역전시키는 것”이라는 말도 있고, 모든 이론의 창시자는 자기 자신 이외에는 모든 사람들을 노예로 취급한다는 말도 있다(6:222).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개념이나 이론은 자기 자신의 것이거나, 아니면, 대부분이 받아들여진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전자는 종족창시자와도 같은 위대한 인간이라고 할 수가 있고, 후자는 판단의 어릿광대와도 같은 어중이 떠중이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우리가 타인들의 개념이나 이론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을 반박할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이고, 그 공포심 때문에 “저 재빠른 이해의 교사”가 되었다고 할 수가 있다(16:113). 자유 정신, 기독교, 불교, 소크라테스, 쇼펜하우어, 니체, 마르크스, 계몽주의, 공산주의 등의 최고급의 이념과 사상이 수없이 부정되고 반박되었다고 해서 그것에 대한 매력이 줄어드는 법은 결코 없다. 앎을 소유하고 있으면 행복해지고 無罪가 되고, 앎을 소유하지 못하면 불행해지고 有罪가 된다. 가장 찬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