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안부 ‘자랑스런 이웃을 찾습니다’에 추천된 서재필 목사
“효행·혜안·정의·인내를 통해 바라본 그의 삶을 들여다본다”
동서남북 교회 담임목사인 서재필 목사가 행정안전부가 주최하는 ‘제7회 자랑스런 이웃을 찾습니다’에 추천됐다.
추천인은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한국시민사회단체연합 고종욱 총재다. 많은 봉사자들및 유명 인사들과 교류하며 미래를 위해 힘쓰고 있는 고 총재의 추천을 받기란 그리 녹녹치는 않다. 하지만 일평생을 봉사의 삶이 배어 있는 서재필 목사이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추천사>
한국시민사회단체연합 고종욱 총재
본인은 한국시민사회단체연합(재단법인, 사단법인 포함 350개 건전한 시민사회단체 / 고문 : 정홍원 전 국무총리, 김창준 전 미연방하원의원, 이선구 사단법인 사랑의 쌀나누기운동본부 이사장, 이배용 전 이화여대총장, 김평일 가나안농군학교교장 외 다수)을 결성하여 이끌어오면서 많은 지도자 분들을 만나왔습니다. 그 중에 정말 일생에 잊을 수 없는, 한국사회에 귀감의 삶으로 평생을 바친 서재필 목사님을 2017년도 <자랑스런 이웃을 찾습니다>에 국민의 영웅, 국민훈장을 받을 자격이 있는 유일한 분으로 특별히 추천 했습니다. 우리민족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누군가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남들이 돈을 벌려고 할 때, 자신의 가정 돌보기에 급급해 할 때 서재필 목사님은 20대부터 봉사의 투철한 정신을 가지고 희생적인 헌신의 삶을 바쳐 이웃과 조국을 위해서 바친 삶의 여정 한 올 한 올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기 어려운 놀라운 희생과 봉사의 길로 걸어오셨습니다. 서 목사님은 1991년 8월에 청소년 선도로 대통령 표창을 수상한 후로도 지금까지 수십 년간 사회정화와 청소년 선도에 앞장섰으며, 그가 불의 앞에서 굴복하지 않고 온 몸을 바쳐온 땀방울 한 올 한 올은 가히 청소년들을 살리고 이웃을 살리고 조국을 살리는 밑거름이 되어왔습니다. 서재필 목사님은 2016년 12월 19일부터 23일까지 성탄특집 <인간극장> 5부작으로 행복한 가정의 모델로 선정되어 지상파 방송 KBS1에서 온 국민을 감동케 했고, 대기업 LGU+ CF광고모델로 글로벌장인으로 1000만이 주목한 CF촬영 후 촬영광고비 전액을 어려운 이웃을 위하여 기부했습니다. 이 외에도 사회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이런 모습은 대한민국 봉사자들에게 그리고 자라나는 세대를 넘어 온 국민에게 고무적인 일이 될 것으로 기대하며 간곡히 추천을 드리는 바입니다. |
68년 그림을 그리며 어머니 최덕례 여사와 찍은 사진
-. 효행: 어머니의 뜻을 따르는 착한 아들 서재필
서 목사는 처음부터 목회자의 길을 걸었던 인물은 아니다. 어머니 한 분을 제대로 모시겠다는 일념으로 홀연 단신으로 1965년 16살 나이에 상경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만 졸업한 그에게 서울은 도전 그 자체였다. 그러나 자신의 안위만을 챙기지 않고 10대 후반부터 우산공장에 보증을 서고 부랑 청소년들에게 우산 장사를 할 수 있는 길을 터준다. 당시 우산공장 대표였던 박정숙 여사는 “태어나서 이런 사람은 처음 봤다”며 그의 행적을 또렷이 기억했다. 또한 자신의 방, 두 칸을 터서 당시 5만원 상당의 호마이카 전축을 구비해 어머니와 동네 어르신들의 노인정을 마련해 즐거운 시간을 보내게 하기도 했다. 어머니의 뜻을 따라 어렵게 마련한 집도 형편이 어려운 형에게 물려 줬다. 어머니에 대한 효성은 그가 바른 길로 가도록 했던 원동력이었다.
정부 정책 보다 앞선 서재필 식 복지 정책
-. 혜안: 시대를 앞선 서재필 방식의 복지정책
부랑 청소년들이 우산 장사를 할 수 있도록 보증을 서기도 했던 그는 좀 더 발전된 형태의 지원을 생각해 낸다. 바로 직접 자립할 수 있는 기술을 가르치는 일이었다. 20대에는 집 한 채 값을 주고 구둣방을 사들여 3개월 코스로 구두 닦는 법을 무상으로 가르치고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의 행적은 복지정책에 있어 수십 년을 앞선 방식이었다. 단순히 주는 복지에서 일할 수 있는 복지를 그는 약관의 나이에 실천한 것이다. 서 목사는 당시 기이하고도 불가사의한 인물로 지역 사회에 알려진 인물이다. 이러한 배경에는 가풍과 집안의 내력이 지금의 서 목사를 있게 한 것은 아닌지 짐작해 본다. 무과급제 후 통정대부 겸 오위장을 지낸 3대조 할아버지인 서창종과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전사한 큰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이준 전 국방장관의 사단을 방문해 위문공연 후 찍은 기념사진
-. 정의: 서재필 방식의 정의-“복수가 아닌 사랑으로...”
성실히 살아가던 그에게 약관의 나이에 들어서는 69년 7월은 인생에 있어 커다란 전환점을 맞게 했다. 세운상가에서 불량배들이 거래처 상인의 돈을 뺏는 현장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그들의 소행을 목격한 이후 청계천 일대를 ‘정화대상지역’으로 정하고 틈이 날 때마다 불량배 명단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불량배들에게 붙들려 맞기도 하였고 여러 명과 홀몸으로 맞서기도 여러 차례. 그러나 굽힘없이 꾸준하게 그들을 설득해 나갔다.
서 목사와 뜻을 같이 하는 이들도 생겨나 74년 12월 24일 ‘세운청소년선도회’를 아마존 살롱에서 창설하고 “우리는 먼저 걸어왔으니 한 알의 썩은 밀알이 되어 정의로운 인간이 되겠다.”는 내용으로 8명의 동료와 함께 서약한다. 어머니와 지인들의 만류와 그를 음해하는 사람들로부터 “깡패 두목, 건달 우두머리”라는 비아냥거림에도 불구하고 ‘서재필’식 선도 사업은 계속 되었다. 그런 그가 76년 5월 30일 밤10시 구속되는 일이 발생한다. 사사건건 제지당하던 불량배들이 서 목사를 거짓 목격자를 내세워 폭력 및 갈취로 경찰에 고발한 것이다. 세운상가 상인들의 탄원으로 1개월의 구치소 생활을 마치고 풀려났다. 고난은 아직 시작도 된 것이 아니다. 그는 여기서 물러서지 않았다. 77년 12월 29일 ‘건전한 정신과 건강한 육체로 사회 정화와 청소년 선도에 앞장선다’라는 관훈을 현관 입구에 걸고 ‘세운헬스크럽’을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청소년 선도 사업에 몰두했다. 세운상가를 줄음잡던 불량배들에게는 서 목사가 눈에 가시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서목사가 개관한 체육관 건물은 세운상가 일대에서도 요지에 속했다. 대로변에 인접하여 접근성도 좋았다. 78년 어느 날 ‘청계천상가 전자오락기’ 회장 박수일 씨가 체육관을 찾아온다.
박 회장으로부터 “4~5년 후에는 컴퓨터가 유행하게 될 것”이라며 컴퓨터 관련 사업을 해보라는 권유를 받게 된다. 컴퓨터 전시관을 마련하기 위해 당시 박 회장이 제시한 권리금이 무려 5,000만원이었다. 지금의 10억대 압구정동 아파트 32평을 77년도에 700만 원 정도에 분양했으니 가히 큰돈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큰돈은 불행의 화근이 되었다. 마침 윤 모 씨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든 것이다. 석유배달을 온 윤 모 씨가 이 모든 얘기를 엿듣게 된 것이다. 윤 모 씨는 2000년도에 정재계를 넘나들던 유명한 법조 브로커였다. 얼음, 석유를 팔던 그런 그를 서 목사는 주변 상인들에게 소개해 주며 살길을 터 주었었다.
이러한 금전적인 이익 앞에서도 서 목사는 돈의 유혹을 떨쳐 버리고 청소년사업을 위한 일편단심으로 박 회장의 제안을 거절한다. 시간이 지나 체육관 자리를 욕심낸 정체불명의 세력이 사람들을 시켜 계획적으로 체육관 안에서 난동을 부리게 하여 체육관 운영을 어렵게 했다.
83년 인천 간석동 집을 팔아 서울 오류동에서 월세를 살게 되었다. 그러나 이사한지 5일 만에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한다. 77년 결혼한 부인과의 사이에 당시 셋 딸을 두고 있었던 서 목사에게 연탄가스중독이라는 불청객이 찾아왔다. 총명했던 첫째, 둘째 딸은 죽고 서 목사와 부인은 살아도 식물인간이 될 처지가 되었다. 이때 서 목사에게 도움을 받았던 조점제 씨의 간곡한 부탁으로 가망이 없다던 의사를 설득해 고압산소치료를 받고 기적적으로 의식을 회복했다. 그렇게 그들은 영안실에 싸늘히 누워있는 두 딸과 유명을 달리할 수밖에 없었다. 서 목사는 사랑했던 두 딸을 잃은 고통을 감내하기 위해 방바닥에 데어 화상을 입은 상처를 마취 없이 도려냈다. 이후로도 끈질긴 모함과 음모에 휘말려 서 목사는 구속되었고 결국 체육관은 문을 닫게 되었다.
부인 권명순 여사의 헌신으로 출소하게 된 서 목사는 희대의 법조 브로커 윤 씨 무리를 처단하기 위해 방화 도구와 흉기를 가방에 챙기고 약속 장소로 찾아간 서 관장의 결연한 모습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었다. 이때 부인이 기지를 발휘하여 가방에 든 흉기를 몰래 빼돌렸다. 한편 철천지원수인 그들을 죽이기 위해 가방을 연 서 관장은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비록 아내이지만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아내를 죽이려고 차를 몰아 집으로 향했습니다. 정신없이 차를 몰다 멈춰 선 곳이 연세대학교 대로변 신호등 앞이었어요."
"그 때에 문뜩 연세대에서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대학을 나와 교사직도 버리고 나로 인해 고생하는 아내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어요." 모든 것을 정리하고 증산동 지하 방 2칸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87년 어느 날, 건강하기만 했던 그가 극심한 패혈증으로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안암동 한석 의원에서 치료 불가 확진을 받고 경희의료원 2782호실에 입원하고 있었던 서 관장은 놀라운 경험을 한다.
"같은 병실에 신창동 교회 신도가 있었습니다. 신도들과 함께 심재식 목사님이 찾아왔어요. 그 당시 나는 신앙심이 깊지 않았지만 물에 빠진 심정으로 목사님의 안수기도를 받았습니다."
당시의 서 관장은 "마치 집채만 한 바위가 내 머리를 누르는 것 같았고 기도소리는 천둥소리 같았다"고 회상했다. 이때 자만했던 자신을 뉘우치며 하나님의 도구로 살겠다고 결심한다. 안수 기도를 받은 다음 날 36,500이었던 백혈구 수치가 정상치인 5,500으로 떨어지는 기적이 일어났다.
그 후 복수를 뒤로하고 목회자의 길로 접어들었다.
서재필 목사와 권명순 여사의 행복한 가족 모습
-. 인내: 사랑으로 일궈낸 소중한 가정
서 목사의 가정사는 신비 자체다. 독립운동가 집안의 가풍이 이어져 가난과 불의함에 맞서 강인함과 인내함으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죽을 고비에서 건진 두 딸은 외국인과 결혼하여 믿음의 결실이 무엇인지를 증거하고 있다. 나와 가족을 뛰어 넘는 사랑 실천으로 숱한 이웃의 벗으로 살아온 서재필 목사의 삶은 고단한 현대인에게 살아갈 바를 제시해 주고 있다.
서재필 목사는 지난 6월 18일 국민권익위원회 소관 ‘사단법인 부패방지국민운동총연합’으로부터 ‘부패방지청렴인’으로 선정됐다. 1991년 8월 ‘대한민국 청소년 선도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으며 평생 사회정화와 청소년 선도에 최선을 다해왔다. 또한 93년엔 동서남북선린회를 설립해 청소년선교와 지역사회봉사활동을 했다. 이렇듯 청소년 사업은 서 목사의 최대 과업이었다. 청소년 문제는 이 사회의 가장 큰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많은 이들이 청소년 관련 사업에 종사하지만 현실적인 어려움에 부딪히면서 좌절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한 세대를 뛰어 넘어 50여년을 청소년 선도사업에 매진한 인물이 서 목사다. 그는 고통과 좌절 속에서도 대한민국의 미래가 청소년에게 달려 있음을 직시하고 한 평생을 바쳤다.
그이 열정과 안목이 결실을 맺는 모습 속에서 삶의 신비를 느낀다.
김태형 기자
첫댓글 제가 아는 서재필목사님은 기사에서도 나와있지만 앞뒤가 항상 동일하고 변함없으신 분이십니다. 항상 최선의 방법으로 의로운 것을 택하시며 사셨기에 이분처럼 산다면 세상이 살고 좋고 행복해질거라 생각합니다.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