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에게 조차 잘 알려지지 않은 광주 출신의 김악(1917~1973, 본명 김흥수)시인이 세상에 떠난 지 30여 년 만에 빛을 보게 됐다.
그의 딸 김경희씨(56.시인)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와 권양숙 여사의 집안얘기가 나오는 상황을 보고 아버지의 존재를 세상에 알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며 김악 시인의 시집 두권과 일생을 <뉴스메이커>에 공개했다. 김악은 1950년대 광주에서 시작 활동을 하면서 <영토>(1956), <키르쿡크의 석유>(1959) 등 2권의 시집을 출간했다.
그는 1951년 신문학 동인으로 활동하고 53년에는 이병기.김해강.신석정.백양촌.박흡.이석봉.김현승.박정온.서정주.이동주 등과 함께 <시와 산문-호남11인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공식적인 시작활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김악 시인과 교분을 가졌던 <문학21>발행인 안도섭씨(71.시인)의 회고처럼 "정의감이 강하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으로 이승만 독재.박정희 독재에 저항적"이었기 때문이다.
-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에 저항적
딸 김경희 씨에 따르면 그는 술만 먹으면 '야인'이 됐다. '통일'이라는 혈서를 쓰기 위해 칼로 손을 베는 것을 발견하고 김씨가 소리쳐 울며 말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항상 "미국도 소련도 물러가라. 우리는 자주적 통일을 해야 한다"고 외쳤으며 "나는 문인이기에 사명감을 같고 저항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그의 이러한 성향은 1967년 서울로 이주하면서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 안씨에 따르면 그는 출판사에서 교정일을 하며 용돈을 얻어 썼는데, 그 회사 부근에 항상 가는 술집이 있었다고 한다. 거기에 중앙정보부(중정, 현 국가 정보원 전신) 요원이 드나들었다. 중정요원이 그와 술친구가 될 정도로 친하게 되자 "당신 시를 좀 더 알고 싶다"고 했다. 그는 중정요원을 집으로 데려갔다. 중정요원은 집에서 북한 관련 시 한편을 발견하고 그 자리에서 그를 체포.구금했다. 1970년 일이었다.
김악 시인이 당시 무슨 죄명으로 기소가 됐고 재판을 받았는지, 어느 정도의 형이 선고됐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않기 때문이다. 법원과 대전교도소측은 "당시 재판 및 수감 기록이 이미 정부기록보관소로 보내졌다"고 밝혔다. 정부기록보관소에서는 "김악 시인의 기록이 보관돼 있지 않다"며 "교도소나 법원에 문의하라"고 답변했다.
- 50년대 시인으로 독특한 시세계 가져
그의 딸 김씨는 "아버지는 2년형을 선고받고 대전교도소에 수감된 후 출감 한달을 앞두고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것으로 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투옥 후에도 "너희들이 총칼로 우리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무슨 말을 하라는가"라며 진술을 거부했다고 한다. 김씨는 "아버지가 교도소에서 주검으로 나올 때 모든 수형자가 '김악 시인이 돌아가셨다'며 울었다"고 말했다. 김 시인의 사망 일자는 1973년 4월 5일, 유족들은 대전 교도소에서 시신을 인수해 화장한 뒤 금강에 뿌렸다.
김경희씨 등 유족은 그 뒤 아버지의 삶에 대해 말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살아가는 데 아버지의 영향이 미칠까 두렵기도 했지만 아버지의 지인에게 혹시라도 닥칠 불행을 막자는 의도였다.
이런 사정 때문에 1950년대 왕성한 활동에도 불구하고 김악 시인은 50년대 문학사에 올라 있지도 않다. 다만 2001년 간행한 전남문학대표작선집(전남문학백년사업추진위원회)에 <아우에게>라는 시한 편이 실렸을 뿐이다. 이것도 추진위원회에서 원고를 모으다 나온 작품이다.
권영민 서울대 교수(국문학)는 "문학 100년사를 정리하다 보니 김악 시인의 두 권의 시집 제목을 찾았는데 책을 접할수 없었다"며 "시집을 보니 독특한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권교수는 "김악 시인은 현실비판적인 시를 쓰면서도 전통 서정성에 근거해 시를 창작한 시인"이라며 "이러한 시 경향은 1960년대 후반 참여.순수 논쟁이 일어난 이후에 나타나는 것"이라고 김악 시의 문학적 의의를 부여했다. 시대를 앞선 개성적 시인이었기에 당대에는 인정받지 못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1950년대 시는 크게 세 가지 경향으로 나뉘어진다. 실험적인 시 경향을 강조한 언어파 계열이 있었고 또 하나는 참여시를 쓰는 현실파 계열이 있었다. 나머지 하나는 순수파로 전통적 서정성을 근거로 시를 창작하는 계열이었다. 이 세 계열이 아니면 거의 인정받지 못하던 시절이었다는 것이다.
김악 시인과 함께 시 활동했던 안도섭씨는 "1950년대 이후 '현대문학' 계열이 문단의 주류를 이뤘다"고 전제하고 "이와 동떨어진 김악 시는 제대로 조명받거나 평가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경희씨도 "아버지는 주위에서 문인협회 가입을 권해도 듣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이처럼 생전에 인정받지 못하고 사후에도 조명받지 못한 김악 시인을 권 교수는 '비운의 문학 인생을 살다간 인물'로 표현했다.
김악 시인의 삶은 특이했다. 광주의 번성한 부잣집에서 태어 났지만 형제가 모두 죽고 그만이 유일하게 살아남아 외아들이 됐다. 광주 서석초등학교와 광주고등보통학교(현 광주일고 13회)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미대에 유학했다. 미대에 다니면서는 야구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광복 이후 조선 국가대표로 선발돼 하와이 원정 경기에 참가하기도 했지만 필리핀 경기를 앞두고 한국전쟁이 발발해 야구선수 생활을 접었다.
- 60년대 광주일고 야구부 코치 활동
일본에 유학 중 일본 여자와 만나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해 4남매를 낳았다. 하지만 광복 후 일본인에 대한 냉대가 심해 아내는 일본으로 건너갔고, 일본과 국교가 단절되면서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 이후 그는 다시 결혼해 아들 하나를 더 낳았다.
1956년께부터 한국전력(당시 남선전기)에 근무하다 60년대 초 광주일고에 야구부가 창설되자 코치 활동을 하기로 했다.
그의 성품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한전 근무 당시 사무직과 현장 근로자는 대우 면에서 차이가 많았다. 시설이 미비한 상태에서 전봇대에 올라가 일하는 전공은 감전 사고가 많이 나던 시절이었다. 김 시인은 "고생하는 그들이 안 됐다"며 아랫방을 전공들이 쓰도록 했다. 가난한 친척 아이가 오면 "부모가 부족해서 고생하니 우리라도 잘해줘야 한다"며 속옷 빨래조차 시키지 않고 김경희씨 등 딸들에게 발도록 시켰다. 식사를 하기 전에 가족에게 "농부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하고 나서야 밥을 먹었다.
그의 작품에는 자연을 소재로 하는 시는 거의 없다. 자연은 현실을 담아내는 수단이었다. 9세 때부터 아버지의 시를 대필했다는 김경희씨는 김 시인이 "우리나라가 지금 비통에 젖어 있는데 왜 자연 그대로를 말하는가. 그런 것은 시가 되지 못한다"며 "대상을 사람에게 둬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고 전한다. "사람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하늘을 노래하고 새를 묘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화를 냈다는 것이다.
<<전통성에 근거해 현실비판>>
어두운 하늘에 이는 불꽃처럼...
槍 든
로-마의 兵卒들은
제 故國의
땅을 잃었는가.
불빛夜又마다
저 宮殿에 잔치는?
어지러진 故土의 모래바닥에서
엎드려 쳐다보는
數萬百姓들의 눈빛을 보자.
오늘
不夜成의 酒宴이 한참,
에루살렘의 밤인가.
謝肉祭의 祭物은
村색시의 젖가슴을,
불칼 위에..
여기 모래바람이 날으는
쓴도라와 같은 沙漠
점점 깊어가는 쇠북소리는...
<에루살렘의 밤>
김악의 시집 <領土>에 실린 시이다. 점령군에게 땅을 빼앗긴 백성은 감사의 뜻으로 시골 색시의 젖가슴을 바친다. 수많은 백성은 불칼 위에 두려움으로 엎드려 있다. 백성의 심정은 모래바람 나는 사막이 되는 상황을 묘사했다. 우리가 광복 이후 미국과 소련의 점령으로 자주 국권이 침해당하던 상황을 묘사한 듯하다. 그것을 에루살렘(예루살렘)이 로마에게 점령 당한 상황으로 비유해 표현하고 있다.
<領土>와 <키르쿡크의 石油>에는 이런 기법의 시가 많다. 광복 이후 이런 동구권등에 관심을 가진 시는 있으나 이란 등 중동에 초점을 맞춘 시는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김악 시의 개성을 엿볼 수 있다. 권영민 교수는 "시집 제목인 '키르쿠크'는 이란의 도시"라며 "시집 곳곳에 중동 지역 명칭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중동에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당대의 지식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자연 자체를 노래한 시가 없다. 모두가 당시의 상황을 묘사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어디에 샘이 있는가.
어디에 프른 숲이 있는가
사람이 사람이 말을 잃었을까
사람이 사람이 웃음을 잃었을까
꽃봉오리를 꺽듯이
낭자하게
十字架에 매달을 수 있었던가.
暴力을보자.
빌라도의 폭력을......
이 天地間에
아아
어서 밤이라도 나려라...
<無題>에서 보듯 꽃봉오리는 폭력에 죽어간 피지배자의 목숨으로 치환된다.
燈을 표현할 때도 '사막과 같은 메마른 곳-/목매어 부르는 어진 양들-'이 '눈을 켜고/피를 쏟고' '마지막 황골을 태우며/고이 켜 있는 불'<燈>이고 꽃도 '山과 들/사랏 같은 것에/흐르는 피'<祖國>이 된다.
그의 시는 현실비판적 경향을 띠면서도 당대에 유행하던 직설적인 시가 아니다. 모두 서정에 바탕을 둔 진술로 인관된다. 김악의 시는 은유를 통해 표출하고 있다. 이는 21세기에도 모범적인 시 창작방법이 될 수 있다.
시인은 갔지만 시는 남았다. 김악의 시는 당대를 살다간 지식인의 고뇌와 함께 문학사적으로 1950년대 시사에 한몫을 차지하고 있음을 평가 받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뉴스메이커(2003.2.20)]-황인원기자
아버지, 저도 시인이 됐어요
나는 요사이 사람이 달라져 있는 것 같다.
내가 아닌 또 다른 누군가가 내 안에 살아서 움직임을 느낀다.
그 다른 사람은 아버지가 아닐까?
- 김경희
올해 초 봄이었다. 남편은 출근 전 늘 그러하듯 신문을 보고 나서 내게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했다. "광주일보에 『전남문학대표작선집』이 출판되었다는 단신이 있는데 혹시 장인어른의 시가 실렸는지 알아 보는 게 어때?"
오래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시인이셨다. 살아 생전에 시집을 세 권 발표하셨지만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근 30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시를 가족 외엔 그 누구도 기억할 리 없다고 믿어온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면서도 대화 자체를 무심히 흘려 넘길 뻔했다. 그러나 '지난 100년에 걸친 전남 출신 문학인들의 발자취를 보존하고 기리기 위해 4년여의 작업 끝에 출판하게 되었다'는 광주일보 기사를 보자 왠지 모르게 마음이 설레고 바빠졌다. 아버지 시집 『영토』의 복사본을 늘 소중히 간직해 오던터라 아버지의 시가 실렸을지도 모른다는 조그마한 가능성에 매달리고 싶었다.
나는 전남문인협회로 전화를 걸어 황하택 회장님과 통화를 했다. 아버님 성함 김흥수를 대고 혹시나 해서 전화드렸다 했더니 처음에는 잘 모르는 듯하다가 호를 대니까 "아, 김악씨!" 하면서 "아우에게" 라는 시가 선정되어 실렸다고 하셨다. 그러더니 그 자리에서 그 시를 읽어주셨다.
들에는
마을 너머 길이 있고
하늘에는
별처럼 네가 있다.
내 나이는 벌써 서른이 넘고
갓 스물 젊은 너는 이미 세상을 떠났는데
이렇게 나의 피부는 메말라
카멜레온처럼 살고 있는 것이냐.
너는 노래 부르고
하늘에서 영원히 별이 되었는데...
수화기 너머로 낭랑하게 울려오는 아버님의 시! 정말 믿을 수 없이 반갑고 놀라웠다. 온몸에 전율이 느껴지며 뜨거운 슬픔의 덩어리가 거센 파도가 되어 눈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분은 시를 다 읊으신 다음 '가족을 찾다 포기했는데 시인의 딸을 찾았다' 하며 반기셨다.
나는 뜬눈으로 한밤을 새고 다음날 무조건 서을을 출발해 광주로 향했다. 출판기념회는 3월 24일이었는데 나는 그날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호남고속도로를 타고 3시간을 갔을까. 장성을 지나며 멀리 바라보이는 산 굽이굽이에서 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내가 너에서 '시'의 힘은 위대한 것이라고 하지 않았냐. 시라는 것은 바로 이렇게 생명이 있는거란다." 예전에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들이 떠올랐다.
아버지께서는 전라남도 광주 출신으로 부잣집 외아들로 부유하게 자라나 광주일고와 동경미대를 다니셨다. 그 시절에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여인인 어머니와 연애결혼을 해 슬하에 4남매를 두고 철도청에 근무하시면서 잠시나마 행복하게 사셨다.
그런데 어머니는 막내인 내가 3살이 되던 해 친정이 있는 일본으로 떠나셨다. 해방 후 일본인에 대한 주위의 냉대가 너무나 커서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침 주위의 일본사람들도 어머니에게 자기네와 함께 돌아갈 것을 적극적으로 권했고, 친척 한 분은 당시 시의원에 출마하려고 했는데 집안에 일본인이 있는 것이 장애가 되었던지 어머니에게 일본으로 돌아가면 아이들을 잘 돌봐 주겠다는 약속까지 하셨다고 한다. 어머니께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버지는 철도청에 다니시다가 남선전기(지금의 한국전력)로 직장을 옮기셨다. 내가 중학교에 입학하자 아버지는 남전을 그만두시고 광주일고 야구부감독으로 4년동안 활동하셨고 6.25전쟁 전까지는 약 3년간 국가대표 야구선수로 뛰기도 하셨다. 아버지의 포지션은 포수였는데 야구복을 입으신 모습은 정말 멋있었다. 아버지는 늘 야구를 하시니까 손가락이 아파 내가 아버지의 손가락을 자주 주물러 드리곤 했는데 어려서 그랬는지 어떤 때는 졸면서 시중을 들기도 했다.
그밖에 아버지는 취미도 다양하셔서 검도가 2단에 말까지 타고 다니셨고 게다가 수채화도 잘 그리셔서 호남지방의 유명한 서양화가 오지호 선생님(1905-1982)과 활발한 사제관계를 유지해 나가시기도 하셨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시,음악,책 속에서 자랐다. 예술은 나에게 자연스런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다.
10살 때부터 나는 아버지가 술을 잡수신 날에는 시를 대필하기도 했다. 아버지는 나더러 커서 꼭 시인이 되라고 일부러 대필을 시키는 것이라며 항상 이 대목은 왜 이렇게 썩고 저 대목은 그렇게 썼는지 설명을 덧붙여 주셨다.
하루는 아버지가 광주집 마당에서 놀고 있던 나를 부르시더니 종이와 붓을 가져 오라 하셨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잠시 허공을 바라보던 아버지가 입을 떼셨다. 나는 당신이 불러주시는 단어 하나 하나를 놓치지 않고 받아 적으려고 정신을 집중했다.
전차(電車)
밀리고
매달리고
매달리면
밀리고
십오환 지불증 시민들이
목적지를 향해 흔들리고 있다
무엇을 생각하는
일일이 표정들이
비지땀을흘리면서
시원한 바람 한 점 없는
염천(炎天)의 폭력지대를
모대기며
떼밀리며
짓밞히며
억눌리우며
녹슬은 전차 속
커브를 꺽으며 막 흔들리고 있다.
"전차"라는 시는 아버지가 서울에 시인협회 일로 자주 가시면서 보신 서울의 모습이다. 어린 나도 아버지를 따라 종종 서울에 갔는데 전차를 타고 다녔던 기억이 난다. 서울에 친척이 있어서 나를 그 집에 아버지는 명동에 당시 시인들이 잘 가던 막걸리집을 들러 서울 시인들과 만나며 교분을 쌓기도 하셨다.
시 불러주기를 마치신 아버지는 내게 말씀하셨다. "경희야, 이 세상 무엇도 시 쓰기의 대상이 될 수 있는거란다. 그러나 시는 자신의 생각을 직접 표현해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울릴 수 없지. 그래서 은유적인 표현을 쓰는거란다." 하지만 나는 이때 어려서 아무 것도 모른 채 불러주시는 시를 받아 적기만 했고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는 못했다.
나중에 내가 커서 들은 이야기는 어머니가 시를 좋아해서 아버지가 시를쓰면 어머니가 조언을 해 수정하기도 하셨다고 한다. 아마도 그 습관 때문에 늘 나한테 그렇게 하신게 안닌가 싶다.
이렇게 아버지와 함께 한 순간은 짧지만 행복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떠나버린 뒤부터 사실 우리 가족에게는 불행한 날이 더 많았다. 그뒤 아버지의 여자들이 서너번 바뀌었지만 아무리 돈을 벌어도 안주인이 없으니 살림은 늘 말이 아니었다. 사실 아버지는 어머니 외에 어느 여자에게도 진심으로 마음을 붙이지 못하셨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살림을 하던 여자는 아버지 퇴직금도 다 빼돌렸고 우리는 빈털터리가 되어 거리로 내몰렸다. 그때부터의 고생은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말년에 아버지는 외롭고 가난하게 살다가 내가 25살이 되던 1972년 4얼, 54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광주도청 앞 문인협회 사무실까지 어떻게 갔을까? 그저 바쁘게 정신없이 갔다는 기억뿐이다. 우선 황하택 회장님을 뵙는순간 나는 마음속으로 깜짝 놀랐다. 당당한 그분의 모습은 자존심 강한 아버지를 뵙는 것 같았고 하시는 말씀 한마디 한마디도 아버지께서 평소에 내게 하시던 말씀과 어쩌면 그리 똑같은지! 특히 "시는 문학과 모든 예술의 꽃"이 라는 대목은 귀에 못이 박일 정도로 자주 듣던 말씀이었다.
나는 가지고 간 아버지의 시집『영토』를 보여 드렸다. 시집『영토』는 내가 언제고 살아 있ㄴ는 동안에 다시 세상에 알리고 싶은, 아버지의 나라 사랑이 담긴 시집이다. 그리고 그 책을 출판할 당시 아버지께서는 남전을 다니시면서 전남일보 문화부장으로 활동하시던 터라 어린 내가 전남일보사 강당에서 출판기념식 날 축시를 읽는 소중한 추억도 간직하고 있는 시집이다.
서울을 향해 올라오면서 내 눈에서 소리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아버지의 시집을 책상 위에 소중하게 올려놓고 살아계신 아버지에게 하듯이 혼자서 절을 올렸다.
나는 삶이 고단할 때마다 시를 썼다. 그럴 때 시는 유일한 나의 위안이 되어주었다. 그러나 여태까지 한번도 내 시를 세상에 공개할 엄두는 못 내고 소극적으로 숨기만 해왔다.
자식 4남매 중 유난히 막내인 나에게만 자신의 뒤를 따라 시인이 되라고 하시던 아버지. 그 말씀을 지키지 못해 죄송한 마음을 안고 있던 나는 아버지의 시가 빛을 보는 것과 때를 같이 해 용기를 내어 그 동안의 습작을 『문예사조』지에 보내게 되었다. 그리고 지난 4월에 "시" 부문 신인상을 받았다.
정확히 아버지가 돌아가신 나이 쉰넷이된 나는 세상에 다시 태어난 기분이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진정한 인생을 시작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아닌 또 다른 누군가가 내 안에 살아서 움직임을 느낀다. 그 다른 사람은 아버지가 아닐까?
[리더스 다이제스트]
“독재권력에 맞서다 옥중에서 죽음을 맞은 저항시인 김악(본명 김흥수·1917~1973)을 아시나요.”
유신독재의 희생양으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어야 했던 김악 시인의 딸 김경희(56·서울시 구로구 구로동)씨가 최근 아버지를 그리는 애절한 시를 발표해 그의 삶이 조명되고 있다.
2001년 `문예사조'로 등단한 김경희씨는 같은 문예지 2003년 1월호에 시 `영혼 스케치'를 실어 아버지의 외로운 넋을 추스리고 있다.
`…반신불구 병신 시인 가둔 것이 혁명이다요/ 시퍼렇게 얼어 죽은 개로 교도소 나와/ 태우고 빠사져 고기 밥 된 것 억울하지라우/ 그담부터 지라고 미친 맘, 밟힌 적 없었어라우/ 손끝을 가슴 핏물로 쓰고 또 썼어라우/ 또 쓰고 쓸랑께 걱정말고 편히 가쇼/ 인자 참말로 떠들지좀 마쇼 잉! 아부지…'
인생 60을 바라보는 딸이 이처럼 찢어지는 가슴으로 기리는 아버지 김악 시인은 누구인가.
광주 학동에서 태어난 김악 시인은 동경미술대학에 유학했던 지식인이었다. 쾌활한 성격을 가진 그가 광주 서중 시절 야구부 주장을 지냈던 것으로 지인들은 기억하고 있다.
김악 시인은 1960년대 광주지역에서 발행되었던 잡지 `호남평론'의 기자를 지내면서 문학적인 재능을 발휘했다. 예술성을 바탕으로 하는 창작과 함께 그는 작가로서 현실에 대한 비판도 잊지 않았다.
박정희정권의 유신이 단행되기 이전부터 그의 작품에는 강한 저항정신이 깔려 있었다.
`…八·一五는/ 언제나 언제나 우리의 것이다./ 힛트러-의 것도 帝國主義의 것도/ 더군다나 獨裁主義의 것은/ 아닌 너도 너도 아닌/ 아득한 날부터 부르짖었던…'(1959년 작 `그날이 오면-8·15에 부치는 노래' 일부)
비뚤어진 것을 보고 참지 못하는 올곧은 정신때문에 그는 끝내 `불행'을 겪어야 했다.
딸 김경희씨는 아버지를 회상하면서 울음을 참지 못했다. “아버지는 정권을 비판하는 시를 썼다는 이유로 당국에 체포되었습니다. 붙들려 가기 전 건강이 나빠져 거동이 어려운 상태였지만 언론법위반이라는 올가미를 쓰고 2년형을 선고받아 대전교도소에서 복역 중 1973년 4월 다시 바깥세상에 나오지 못한 채 한많은 일생을 마치셨습니다”
취재진은 김악 시인의 정확한 수형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수차례 대전교도소에 문의했으나 이미 30여년이 지나는 바람에 구체적인 근거를 찾지 못했다. 그러나 김악 시인의 호적초본에는 그가 1973년 4월 5일 오후 1시 5분 대전교도소에서 사망했다는 사실이 기록돼 있어 수감생활을 뒷받침하고 있다.
또 당시 김악 시인을 알고 지냈던 이들도 그가 펜으로 부당한 권력에 항거했던 기억을 갖고 있다.
김악 시인과 사귀었던 전 조선대 국문학과 교수 김봉영씨(83)는 “그의 작품에는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레지스탕스 정신'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유신 직후 그가 당국에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워낙 사회분위기가 얼어 붙어있던 때라 모두 쉬쉬했습니다. 김 시인이 교도소에서 눈을 감았다는 이야기도 뒤늦게야 들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딸 김씨는 아홉살이던 지난 1956년 아버지의 시집 출판기념회에서 축시를 낭독했던 기억을 아직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시를 통해 아버지의 억울한 삶을 벗겨내겠다는 각오다.
“아버지를떠올릴때마다가슴이메어집니다.굴절된삶을살다 간아버지가제시로조금이나마위로받을수있다면더이상바랄게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