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여섯 시 반, 카메라 가방을 들고 종로 행 버스를 탔다. 촛불집회 사회자가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였다. 불안한 마음과 함께 ‘오랜만에 시작이구나.’ 생각이 들었다. 길은 별로 막히지 않았다. 도착할 때쯤 사회자가 석방되었다는 소식도 들었다. 무엇이 겁나서 사회자를 잡아들이고, 또 시늉만 한 다음 풀어주는 것일까.

4년 만에 광우병 촛불이 다시 켜지는 날이었다. 무대는 청계광장 가운데에서 약간 비켜난 곳에 설치되었다. 그 앞으로 인도와 차도를 따라 수많은 사람들이 앉거나 서 있었다. 주최측 추산 5천 명, 경찰 추산 1500명. 스스로 돌아다니며 계산해본 바로는 3천 명에서 4천 명 정도. 평일이라 중간에 나가고 들어온 인원이 많았던 것을 생각하면 총 참가 인원은 5천 명 가까이 된 것으로 짐작된다.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때는, 일명 백만 민중이라 부르는 6월 10일을 기점으로 각종 노동 단체들의 깃발이 아주 많이 보이는 양상이었다. 하지만 오늘 집회는 단체 깃발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 입에서 입으로 퍼져 자유롭게 모였다는 인상이 강했다. 몇 안 되는 깃발 중 눈에 들어오는 것은 정봉주와 미래권력들(미권스)의 깃발 두 개, 진보신당과 창조한국당 등의 군소 정당들, MBC 노동조합 등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깃발을 흔들거나 하는 행위 없이 조용히 발언을 경청하는 모습을 보였다.

바람이 불었지만 밤은 더웠다. 5월 초인데 열대야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리고 경찰 측 스피커도 바빠지기 시작했다.
경찰이 강제진압 의도가 있는 날은 정해져 있다. 그것을 알고 싶다면 해산명령을 방송하는 간격이 짧은지 긴지를 살펴보면 된다. 오늘은 짧은 편이었다. 8시 17분 1차 해산명령이 떨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3시 32분에 바로 2차 해산명령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것을 비웃기라도 하듯, 2차 해산명령 직후에 민주통합당 문성근 대표대행이 발언대에 섰다.
문 대표대행은 이명박 정부가 4년 전 미국소 수입 당시 했던 거짓말을 지적했다. “미국에서 광우병이 발견되면 즉시 수입 중단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버시바우 당시 주한 미 대사는 박근혜 대표에게 수입은 중단할 수 없다고 말했다”면서, 정부가 이미 그 사실을 안 상태로 국민에게 새빨간 거짓말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야권이 총선에서 새누리당을 심판하지 못한 것에 대해 국민에게 사죄하기도 했다.

8시 51분, 3차 해산명령 방송이 들렸다. 인파는 더 늘어나고 있었다. 무대 옆쪽에 있는 청계광장 나머지 공터도 사람으로 가득 찼다. 양초는 동난 지 오래였다. 무대에는 다방면의 사람들이 올라가 자유롭게 발언하고 있었다. 한우 관계자부터 시작해서 어린 꼬마 손님까지 누구라도 마이크를 잡을 기회가 주어졌다. 그중에 어떤 고등학생은 박근혜 위원장의 말투로 “병 걸리셨어요?”를 성대모사하면서 군중을 웃음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사람들의 외침은 비단 광우병에 머무르지 않았다. 한미 FTA 폐기, 강정마을 해군기지 반대, 반값 등록금, 언론 장악 반대, 노후 원전 폐쇄, 측근 비리 척결 등 이명박 정부 아래에서 벌어진 일에 대한 이야기가 멈추지 않고 흘러나왔다. 사회 문제점을 서로 확인하면서, 이 정부가 이룩한(?) 일이 이렇게 많았나 놀라워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분위기가 올라올 때마다, 군중들은 함께 구호를 외쳤다.
‘국민이 옳았다, 촛불이 옳았다, 이명박이 틀렸다!’



밤 10시가 되기 조금 전, 집회 일정은 끝이 났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쓰레기를 치우며 질서정연하게 빠져나갔다. 시민 숫자만큼 모여서 에워싸고 있던 경찰 병력을 무안하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모범에 남을 만한 깔끔한 마무리였다.
촛불집회는 날로 변화하고 있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제 어지간한 촛불 시민들은 집시법을 줄줄이 꿰고 있다. 인터뷰를 청해도 자기 논리를 막히지 않고 말할 줄 안다. 시위를 잘못된 방향으로 이끄는 소수의 ‘낚시’에 속지 않는다. 유명인의 발언이 줄지어 이어지던 2008년 ‘광우병 광풍’과는 달랐다. 하지만 그만큼 순수한 시민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4년이란 시간을 거쳐 돌아온 광우병 촛불은 조금 더 성숙해지고, 조금 더 깨끗해졌다.
5월 2일 불기 시작한 바람이 스스로 길을 막는 역풍이 될지, 아니면 모든 이의 갈증을 씻겨주는 순풍이 될지는 지켜볼 일이다.
개인 블로그 : http://jerryf.tistory.com/
첫댓글 꺼지지 않는 촛불은 반만년 우리민족의 역사와도 같습니다.
딴나라 MB가 이해 할 수 없겠죠. 성숙된 시위문화와 열린생각 지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