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해 아침에 ***// 유은귀(소담)
동지가 지났다. 해질 무렵 하늘과 맞닿아 있는 세상의 어스름한 윤곽을 바라보다가
'밤 깊으면 새벽도 멀지 않다.'는 말이 떠올랐다. 밤의 길이가 가장 길다는 그 하루를
지나왔을 뿐인데 벌써 겨울을 다 보내고 봄의 문턱에 와있는 느낌이다.
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해가 조금씩 길어지고 있을거라는, 그래서 꽝꽝 얼어붙은
땅속의 뿌리들도 한낮의 다사로운 햇살을 받으며 곤한 봄꿈을 꾸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자꾸 꽃나무들과 저녁하늘에 눈길을 주게된다. 새봄이라.....
새 봄, 새 날, 새 학년, 새 옷, 새 해, 새롭다는 것은 이미 있던 것이 아니라 처음의 것이기에
설레고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를 돌이키는 것인지 모르겠다.(어떤 사람의 생각를 빌자면
인간은 사는 동안 비슷한 경험을 축적할 수 있지만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낯선 첫 시간만을 대면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생각에 동의한다.) 예전의 학명선사라는
분은 몽중유(夢中遊)라는 게송을 남기셨다.
묵은해니 새해니 분별하지말게
겨울 가고 봄이 오니 해 바뀐 듯하지만
보게나, 저 하늘이 달라졌는가
우리가 어리석어 꿈속에 사네
옳으신 말씀이다. 달라져야 할 것은 혹은 달라질 수 있는 것의 첫 번째에 우리 자신을 두라는
가르침 같다.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뿐이라지 않은가? 그렇다 하더라도 묵은
달력을 거두고 특별히 기억해야 할 날에 동그라미를 그려 넣은 새 달력을 걸어놓는 일은 다가올
내일들이 우리 자신과 함께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와 희망을 갖게 한다.
어떤 광고처럼 '좋은 일만 가득'한 것이라면 더욱 좋겠지만 그 말을 뒤집어 보면 누군가는
'힘들고 아픈 일만 가득'할 수도 있다는 터이니 '좋은 일이 많은' '좋은 것을 좋는 것으로 누릴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보면서 말이다.
2009년 우리가 맞이하는 기축, 소의 해는 1949년에 지나갔고 2069년에 다시 돌아온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았지만 동족끼리 적이 되어 서로가 가진 것을 빼앗으며 살았던 지난날이 있었다.
전쟁이 있었고 배고픔이 있었고 무너진 삶의 터전을 재건하며 오로지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는 길만이
역사적 사명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사상최악이라고도 표현되는 경기침체 속에서
2009년을 맞는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최선을 다하다보면 길이 보이는 법이라고
믿어왔지만 성실과 신념만으로 넘어설 수 없는 벽 앞에 서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느 시절이고 생활을 책임져야 하는 어른들의 삶은 힘겨웠을 것이다. 한 선생님께서 밀기울로 허기를
채우던 가난했던 시절을 이야기하며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느냐고 눈시울을 붉히시던 모습을 나는 잊지
못한다. 먹을 것이 지천이고 음식물쓰레기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이즈음과는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겠지만 나의 경우 삶의 짐이 버겁다고 느껴질 때 이 생각을 하면 마음 밑바닥으로부터 밥값은 하며
살아야겠다는 반성이 생기곤 한다. 물론 나는 소처럼 우직하고 순박하고 근면한 스타일이 아니므로 소의
탈을 쓰고는 마냥 먹고 놀았으면 하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이것은 게으른 주인을 만난다면 가능한 일이겠는데
문제는 내 삶의 주인이 나라는 것이다. 아무리 듬직하고 힘센 소일지라도 농부가 일하지 않는데 혼자 밭에
나가 부지런을 떠는 소가 어디 있으랴? 내게 주어진 시간이나 힘, 열정, 기회를 이용하여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것은 주인인 나의 몫이다. 과거 속으로 사라진 어떤 위대한 인물도 현재를 사는 우리의 어려움을 대신 해결해
줄 수 없다. 우리는 오늘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
새해다. 가족들이 건강하게 지내는 것 말고는 별다른 소망을 가져본 적 없는 나이지만 이해엔 정신을 바싹 차리고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더한다. 말을 아끼되 해야 할 말이라면 좋은 말, 힘을 보태는 말, 마음을 읽어주고 만져주는 말
을 해야겠다. 소는 말이 없어도 열두 가지 덕이 있다지 않은가? 연초에 스승님께서 당부하셨던 '새해에는 스스로
복주머니가 되어서 다른 이들에게 많이 나눠주라' 는 말씀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하였으니 소 잡은 데 같이 후더분한
마음의 복주머니도 하나 마련해야겠다.
소한, 대한의 추위가 지나고 입춘, 우수, 경칩 그러면서 봄소식이 들려올 것이다. 남녘으로부터 시속 30Km로 북상
한다는 꽃들의 화사한 잔치가 벌어질 즈음에는 나라 안팎으로 좋은 소식이 많이 들려왔으면 한다. 힘겨운 현실 속에
서도 아름다운 향기를 피워내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들려왔으면 한다. 그리하여 60년 후의 기축년에는 돌아보는
우리의 역사는 우리 자신이나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그날의 기억으로 남게 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