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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사상>, 2014년 여름호
【김현경 선생님을 찾아서․1】
김수영 시인과 사람들
일시 : 2014년 4월 17일(목요일)
장소 : 경기도 용인 자택
맹문재 : 안녕하세요. 건강하게 퇴원하셨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김현경 : 주위에서 많이 도와줬어요. 모든 분들께 감사해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이 교류했던 분들에 대한 말씀을 들을까 해요. 김현경 선생님께서 만난 분도 좋고요.
김현경 : 김수영 시인은 친구가 많지 않았어요. 집에서 일을 하다가 답답하면 명동에 나갔어요. 최불암 씨 어머니가 하던 ‘은성’에 주로 갔지요. 이봉구, 이진섭, 박인환, 김규동 등을 만났어요. 그때 이봉구 씨는 일정한 수입이 있어 많은 문인들이 찾았어요. 김 시인은 그곳의 분위기가 좋아서가 아니라 답답할 때 술을 마시러 간 것이지요. 김 시인은 술만 마시면 이야기하기 좋아하고 정열적이고 참신하고 연극을 했기 때문에 연기력도 있어 사람들이 재미있어 했어요. 김 시인은 집에서는 일체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어요. 술도 마시지 않았어요. 집과 서재를 엄숙한 직장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에요. 김 시인은 열흘 이상 두문불출한 채 일에 매달렸어요. 주로 밥벌이를 하는 번역 일을 했지요. 그러다가 답답하면 명동으로 나간 것이에요.
한 번은 내가 외출했을 때 유정 씨가 찾아왔어요. 한 보름 정도 나타나지 않자 궁금했기 때문이지요. 그때 김 시인은 안방에서 글을 쓰고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 다섯 살 된 아들이 아버지가 계시냐고 물으니 안 계신다고 해서 유정 씨를 돌려보낸 것이에요. 유정 씨와 우리는 친하게 지내 식사도 하고 꽃구경도 간 적이 있는데, 작은아들이 능숙하게 따돌린 거예요. 유정 씨가 돌아간 뒤 작은아들이 아버지 나 잘했지, 라고 묻더래요.
또 한 번은 소설가 전병순 씨가 찾아왔어요. 「국가」라는 작품이 있는데 잘 썼어요. 전병순이 박순녀 씨와 정종 한 병 하고 북어 10마리 정도 들고 만나러 온 거예요. 김 시인은 손님이 찾아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다가 그날은 번역 일에 매달리고 있었어요. 그래서 안방과 서재를 오고가면서 김 시인의 눈치를 살피다가 때를 맞추어 조용히 알렸어요. 김 시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다가 안방으로 건너와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하더니 전병순 씨 보고 당신 소설 쓰는 사람이야, 술과 북어를 사가지고 유명 인사를 찾아다니는 게 문학하는 사람의 태도야, 등으로 야단을 쳤어요. 모두들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어요. 그 정도로 김 시인은 진지했어요. 물론 그 후 전병순 씨와는 친해졌지요. 김 시인은 집에 있을 때 한복을 즐겨 입었어요. 여름에는 베옷을, 겨울에는 솜바지를 입었어요. 수수한 무명옷을 좋아했어요. 참으로 깨끗한 사람이었고 마음이 늘 소박했어요.
맹문재 : 김병욱 시인에 대해서 아시는지요. 김수영의 시 「거대한 뿌리」에서 “8․15후에 김병욱이란 시인은 두 발을 뒤로 꼬고/언제나 일본 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그는 일본대학에 다니면서 4년 동안을 제철회사에서/노동을 한 강자다”라고 소개했지요. 산문인 「저 하늘 열릴 때-김병욱 형에게」에서도 월북한 지 십년이 지났는데 그리워하고 있지요. 「연극을 하다가 시로 전향-나의 처녀작」에서도 김수영 시인은 자신의 시를 격려해주었다고 김병욱 시인에게 고마워하고 있지요.
김현경 : 럭비 선수처럼 체격이 우람했어요. 대구 사람인데 해방 후에 만났어요. 일본대학을 나왔고, 신시 운동을 해서 인정을 받았어요.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와 모더니스트 시인을 찾아 박인환, 김경린 등을 만났지요. 김병욱 씨는 사회주의 운동을 적극적으로 하려고 했어요. 김 시인이 나하고 데이트할 때까지 만났어요. 나에게 관심(?)도 보였지요. 연세대학 강사로 나갔어요. 정식 교수는 아니었고요. 그때 연세대학에 무슨 사건이 있었는데, 아무 관계도 없는데 붙잡혀 들어갔어요. 그 후 나와서 친구도 없고 하니까 월북해버렸어요. 그러다가 6ㆍ25때 잠깐 서울에 나왔더라구요(나왔더라고요). 나하고 혜화동 로터리에서 한 번 만났어요. 부인은 대구 여자예요. 아이가 하나 있고, 부인도 문학을 좋아했어요. 그 후로는 소식이 없어요. 그러다가 4ㆍ19가 터지고 언론 자유도 조금 있고 해서 김 시인이 김병욱 씨에게 편지를 썼지요. 그 편지가 동아일보인가 어딘가에 나왔던 것인데 김 시인의 전집에 나와 있어요.
맹문재 : 잘 들었습니다. 제가 「김병욱의 시에 나타난 세계 인식 고찰」이라는 논문을 쓴 적이 있는데, 언제 보여드릴게요. 다음으로 박일영 화가와의 관계에 대해서 궁금해요. 박인환 시인이 ‘마리서사’를 낼 때 많은 도움을 준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김현경 : 김 시인과 진짜 가깝게 지냈어요. 좋은 사람이에요. 본명이 박준경이에요. 나는 두어 번 만났는데, 짜장면을 먹은 기억이 있어요. 초현실주의 화가예요. 극장의 간판을 그리고 무대 장치를 했어요. 중앙극장의 무대 장치를 하는데 김 시인이 조수같이 따라다녔어요. 사람들이 박준경을 복상 복상 하고 불렀어요. 일본 말로 복상이란 박 씨란 뜻이에요. 박일영이라고도 불렀어요. 몸이 약했고, 장가를 안 갔어요. 종로3가 쪽 와룡동에서 살았지요. 우리가 구수동 41번지에서 살 때 소공동 쪽에 버려져 있는 벽돌을 가져다가 제법 양옥답게 꾸몄는데, 박준경 씨가 보러 놀러왔어요. 문패를 해가지고 왔어요. 그때 아이들 사진이 있는데, 작은아들이 5살이고 큰아들이 초등학교 6학년이었을 거예요.
맹문재 : 같은 시대의 여러 문인들에게 도움을 주신 분이네요. 다음으로 정지용 시인과의 인연을 들을 수 있는지요?
김현경 : 내가 이화여대에 다닐 때 정지용 선생님이 예뻐해주셨어요. 『시경』을 가르쳤는데, 내가 칠판에 판서를 했어요. 글씨를 잘 쓴다며 선생님이 쓰라고 해서 쉬는 시간에 판서를 해놓곤 했어요. 정지용 선생님은 교실 앞으로 안 들어오고 꼭 뒷문으로 들어왔어요. 체구가 자그마했어요. 칭찬도 잘 안 해요. 그렇지만 잡지들에 학생시단이라는 것이 있어 한두 명씩 뽑아 실어주셨는데, 나의 작품을 실어주셨지요. 정지용 선생님은 학식이 높았어요. 언어 구사에 대해 굉장히 엄격했구요(엄격했고요). 정지용 선생님이 나를 꽤나 이뻐(예뻐)하신 건 확실해요. (웃음)
맹문재 : 선생님의 작품이 어느 잡지에 게재되어 있나요?
김현경 : 『민성』 등에 실려 있어요. 다른 잡지에도 있는데, 찾아봐야지요.
맹문재 : 선생님의 존함으로 된 작품들을 기회가 되면 찾아볼게요. 유정 시인과도 친했다고 들었는데요.
김현경 : 유정 시인과는 인간적으로 친했어요. 함경남도 분이었지요. 유정 시인과의 일화 중에 아주 웃기는 것이 있어요. 한 번은 김 시인이 술을 먹다가 아무 신이나 신고 화장실에 다녀오니까 사람들이 다 갔더래요. 그래서 맞지도 않는 신을 신고 집으로 왔지요. 유정 시인 또한 자기 신발이 없으니 남은 신발을 그냥 신고 갔대요. 유정 시인은 발이 작고 김 시인은 발이 크니 주인을 알 수 있었지요. 그래서 그 이튿날 나보고 신발을 바꿔 오라고 해서 보자기에 싸가지고 경향신문사에 갔지요. 조선호텔 맞은편에 있었어요. 그때 여름이어서 덥고 바람도 안 통하고 해서 가로수 밑에 가 서 있었어요. 그런데 30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너무한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전화로 여쭤보니깐 세 번이나 나왔다 가셨다는 거예요. 알고 보니 내 생각을 잘못하신 거예요. 왜냐하면 내가 원피스에 소대나시(소매가 없는 옷)를 입고 머리를 하나로 딱 묶고 샌들을 신고 해서 모던 걸 패션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유정 시인은 나를 닭 키우는 여자로 생각했기 때문에 한바탕 연기를 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서로 친해졌어요. 가족들과 함께 도시락을 싸가지고 꽃구경도 갔어요. 어느 날 김 시인이 유정 시인의 집에 가서 술을 먹었나봐요. 부인이 매운탕을 참 잘 끓이더래요. 부인은 얌전하고 버선 신는 여자였어요. 김 시인은 버선 신고 찌개 잘 끓이는 여자하고 한 번 살고 싶다고 했고, 유정 시인은 모던 걸 하고 살고 싶다고 했대요. (웃음)
맹문재 : 그러면 배인철 시인과의 얘기를 들을까요? 아마 하실 말씀이 많을 것 같은데요.
김현경 : 내가 제일 좋아했던 남자예요. 사촌인 김순남의 집에 가면 김남천, 임화, 오장환, 안회남, 함세덕 등이 와 있었어요. 모여서 정담들을 나누었지요. 김순남은 뛰어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지요. 월북했어요. 한번은 김순남의 집에 갔는데 임화가 자기 집으로 놀러 오라고 했어요. 임화는 집에 사람을 초대하는 분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나 혼자 가기가 뭐해 김순남하고 갔지요. 임화 시인이 연지동인가에서 살고 있었는데, 평범한 저녁상을 차려놓았더군요. 초등학교 1학년 정도 됐을까 하는 아들이 있었는데, 아버지를 닮아 아주 미남이었어요. 그의 부인이 지하련이었는데, 미인은 아니었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도 남편을 물어뜯을 정도로 사랑했어요.
그런데 거기에 배인철이 앉아 있는 거예요. 회색 체크 슈트를 입고 있는 모던 보이였어요. 인사를 나누고 얘기를 들어보니까 그의 형이 일본 중앙대학을 다니다가 전쟁이 너무 심해 상해에 가서 영국계 대학을 다녔대요. 그래서인지 영어를 기가 막히게 하더라고요. 권투를 해서 몸도 좋고 차림새도 내 맘에 쏙 들고 인물도 좋고 해서 한순간에 빨려 들어간 거예요. 그 사람도 그랬고요. 자기네 집이 인천이래요. 그래서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가야 하니 데려다 달라고 해요. 그래서 서울역까지 가서 헤어지려고 했는데, 그렇게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노량진 갔다가, 오류동을 거쳐 인천까지 걸어갔어요. 그때가 4월 초 달밤이어서 춥지도 않고 호흡도 잘 맞아 밤새도록 걸어간 것예요. 인천의 그의 집에 도착하자 나 보고 여관에 가서 좀 있으래요. 돈을 마련해가지고 나오겠다고요. 그래 가지고 시작된 거예요. 그날부터 매일 만났어요. 그 당시 나는 수표동 언니 집에서 학교를 다녔는데 그이는 영자 신문을 들고 종각에서 기다렸어요. 매일 만났는데도 재미있었어요. 그러다보니 학교를 안 나간 거예요. 그이는 해양대학의 영문과 교수였는데, 학교도 결석하고 오로지 나만 만난 거예요. 나도 학교는 안 가고 데이트를 했지요. 종일 돌아다녔어요. 그러니 학교에서 난리가 났지요. 그렇게 열렬히 사랑했어요. 그러다가 남산의 큰 바위 밑에 앉아서 데이트를 하고 있는데, 총소리가 두 방이 났어요. 그이가 머리에 맞아 즉사했어요. 나도 옆구리를 맞았지요. 그런데 그 사건이 치정관계로 몰려 내 주변의 남자들이 다 붙들려 왔어요. 그러니 내 꼴이 뭐가 되겠어요. 이종구, 박인환, 김수영 등등. 고초를 제일 많이 겪은 사람이 김수영이에요. 왜냐하면 그 사람이 어벙벙하거든요. 미군들이 장난으로 쏜 것으로 판명이 났어요. 그래서 내 죄목이 뭐인지 아세요. 풍기문란죄. (웃음)
맹문재 : 배인철 시인이 남로당의 중앙위원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김현경 : 그러니깐 남로당에서 또 난리가 난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중요 인물이기 때문이었지요. 남로당에서 테러라고 들고 일어나 시끄러웠지요. 그 와중에 나는 어떻게 되었겠어요. 남자들이란 남자는 다 도망을 간 거예요. 우리 아버지도 화가 많이 났어요. 그래서 잠잠해지면 미국이나 불란서로 유학을 보낼 작정이었어요. 그런데 김 시인이 나타났어요. 문학을 하라고 했어요. 우리는 데이트도 당당하게 못하고 뒷골목을 다녔어요.
맹문재 : 김기림 선생님을 뵌 적이 있으세요?
김현경 : 내가 이화여대에 다닐 때 도둑 강의를 들었어요. 김기림 선생님은 그때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서 영문학 강의를 하셨지요. 그 당시 대단히 훌륭한 선생이라고 여겼어요.
맹문재 : 신동문 시인과의 관계도 깊다고 들었는데요.
김현경 : 신동문 시인이 신구문화사에 근무했어요. 그때 신구문화사에 많은 문인들이 몰렸어요. 김 시인도 세상을 뜨기 전까지 신구문화사의 일을 많이 했어요. 주로 번역 일이었지요. 세상을 뜬 전날도 번역을 해 가져가 원고료를 10만원 받았대요. 그래서 이병주 소설가, 신동문 시인, 정달영 한국일보 기자와 함께 1차로 술을 마셨는데, 이병주 소설가가 2차를 가자고 하더래요. 그런데 2차는 김현옥 서울시장과 마시자고 하더래요. 김현옥 시장이 문학을 좋아했는데, 그래서 김 시인을 만나고 싶다고 했대요. 이병주 소설가가 김현옥 시장이 진주중학의 종지기(사환)를 할 때 도움을 준 일이 있었대요. 그래서 두 사람이 아주 친했어요. 이병주 소설가의 제의를 받은 김 시인은 그 따위 인간하고 만날 필요가 뭐가 있냐고 하면서 나왔대요. 그래서 할 수 없이 그 사람들은 2차를 가고 김 시인은 집으로 걸어오다가 인도로 뛰어든 버스에 받힌 거예요.
맹문재 : 이야기의 방향을 조금 돌려볼게요. 김수영 시인의 시와 산문에 ‘만용’이란 인물이 나오는데, 지금 왕래가 있는지요? 제가 「김수영의 시에 나타난 ‘여편네’ 인식 고찰」이란 논문에서 「만용에게」를 다룬 적도 있어요.
김현경 : 없어요. 우리 집에서 중학교를 넣었지요. 고등학교를 거쳐 국민대학교에 보냈어요. 우리가 양계 일을 그만두는 바람에 시댁으로 보냈어요. 그 뒤 집을 나가 지금까지 연락이 없어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의 성격을 알 수 있는 일화를 좀 들려주실 수 있는지요.
김현경 : 한 번은 외출했다가 돌아오는데 눈이 부슬부슬 내렸어요. 버스도 드물고 정체되고 그랬어요. 그래서 저녁 준비가 늦은 거예요. 그런데 집에 도착해 대문을 여는데 잘 안 열리는 거예요. 김 시인이 마당에 책을 한 권씩 던져 쌓여서 그랬어요. 그래서 억지로 밀고 들어가 다락에 가서 돗자리를 가져와 씌워놓고 얼른 저녁상을 차렸어요. 그리고 저녁을 끝내고 책을 주워 꽂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김 시인은 소파에 누워 책을 읽고 있는 거예요. 밤이 이슥해졌는데도 쳐다보지 않아요. 그래서 책을 다 치우고 생각했어요. 내가 저런 남자하고 살다가는 정말 뼈도 못 건지겠다, 나도 살아야겠다, 내일이면 이혼이다 등으로 결심한 거예요. 이 꼴이 뭔가, 닭똥이나 치고, 삯바느질이나 하고, 이것밖에 안되나 싶기도 했지요. 그러면서도 저 정도의 잔인성이 있어야 문학을 하지, 정말 지독한 이기주의자가 아니면 문학을 못한다는 걸 느꼈어요. 그래서 내가 문학을 포기한 거예요.
맹문재 : 김수영 시인의 성격을 잘 보여주는 일화네요. 또 다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김현경 : 구수동에 있을 때인데, 한 번은 집에 들어와 나한테 외설소설을 쓸 수 있겠느냐고 물어요. 그때는 환도 직후여서 작품을 발표할 지면이 없었어요. 모두들 가난했지요. 그래서 나는 신바람이 났지요. 쌀 한 가마니를 사 놓을 수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 이튿날부터 자료를 모으고 준비를 했어요. 광화문에 가면 일본 잡지들이 수두룩해요. 거기에 가서 자료를 찾아 준비를 했지요. 그리고 기한이 되기 전에 팔십 매 정도를 썼어요. 윤이상 이름으로 했지요. 김 시인도 신났어요. 그래서 원고를 출판사에 가지고 나갈 때 뭐 사와라, 뭐 사와라 하고 적어줬지요. 김 시인의 약만도 네 가지나 되었어요. 그런데 안 들어오는 거예요. 밤 12시가 되어도 안 들어와요. 그래서 틀렸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나쁜 년, 무슨 년 하면서 온갖 욕을 하고 들어오더라고요. 그러더니 걷어차고, 네가 무슨 문학을 하겠느냐고 하면서 난리였어요. 비애의 극치였지요. 그래서 다음날 아침 미음을 갖다 주면서 말도 안했어요. 그런데 방에서 나오려고 하니까 팔목을 붙잡고 앉아보라고 해요. 어제 내가 심했지, 그래요.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우리 그런 더러운 거 써서 밥 먹지 말자, 라고 해요. 그 순간 맞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 이상 좋은 말이 어디 있겠어요.
맹문재 : 두 아드님은 어떻게 지내는지요?
김현경 : 큰아들은 1984년 세상을 떴어요. 결혼하고 나서 세 달 뒤였어요. 자식이 없어요. 작은아들은 1958년생이에요. 미국에서 무역 일을 한다고 왔다갔다 그래요. 손녀가 둘 있어요. 큰손녀는 미국에서 약대를 다니고 있어요. 작은손녀는 지금 고등학교 2학년이에요. 그림을 잘 그려 천재라고 난리예요. 김 시인과 내가 여섯 살 차이에요. 김 시인이 1921년생이고, 내가 1927년생이에요.
맹문재 : 퇴원하신지(퇴원하신 지) 얼마 안 되는데 긴 시간 동안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오늘은 이 정도로 듣고 다음 기회에 또 다른 얘기를 부탁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