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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호킨스
이 책에 보고된 진실은 과학적으로 도출되고 객관적으로 조직되었지만 모든 진실이 다 그렇듯 맨 먼저 사적으로 경험되었습니다. 어린 나이에 시작된 앎의 강렬한 상태의 평생에 걸친 연쇄는, 처음에는 이 책에서 마침내 형태를 취한 주관적 각성 과정을 향한 영감을 불러일으켰고, 그 다음에는 그 과정을 안내했습니다.
세 살 적에, 존재에 대한 갑작스러운 충만한 의식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나는 있다'의 의미에 대한 비언어적이지만 완전한 이해였지요. 연달아 '나'는 아예 존재 속으로 들어오지 않았을 수도 있다는 공포스러운 각성이 일어났는데, 그것은 망각에서 존재 자체에 대한 의식적 앎으로의 찰나적 깨어남이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사적인 자기가 태어났으며 '있다'와 '있지 않다'의 이원성이 나의 주관적 앎으로 들어왔습니다.
어린 시절과 사춘기를 통틀어, 존재의 모순과 자기의 실상에 대한 의문은 계속 되풀이 된 관심사였습니다. 때로 사적인 자기가 더욱 크고 비개인적인 나로 빠져들기 시작하면, 애초에 비존재에 대한 두려움, 무에 대한 근본적 두려움이 다시 치밀어 오르곤 했습니다.
1939년, 나는 27킬로미터의 배달 구역을 담당하는 위스콘신 농촌의 신문 배달 소년이었습니다. 어느 어두운 겨울밤, 나는 집에서 몇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눈보라를 만났습니다. 영하 30도의 기온에서 얼어붙은 눈 덮인 들판 위로 자전거가 넘어졌습니다. 거센 바람에 바구니 속에 든 신문은 들판으로 산산이 날아가 버렸고 나는 좌절감과 피로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옷은 뻣뻣하게 얼어붙었고, 집은 멀었습니다. 나는 바람을 피하기 위해 높이 쌓인 눈더미의 얼어붙은 표면을 깨고 굴을 판다음 그 속으로 기어들었습니다. 오한이 멎고 기분 좋은 온기가 느껴지더니.... 그 다음에 어떤 말로도 형용할 수 없는 평화로운 상태가 찾아왔습니다. 거기 함께한 것은 넘쳐흐르는 빛과 무한한 사랑의 현존이었습니다. 그것은 시작과 끝이 없었고 나 자신의 본질과 구별되지 않았지요. 앎이 온전히 지금뿐인 그 밝아진 상태와 융합되면서 육체와 주변 환경은 흔적없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마음은 점차 침묵에 들었고, 생각은 완전히 그쳤습니다. 무한한 현존이 있었거나 있을 수 있는 전부였는데, 그것은 시간 너머에 있었으며 묘사하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영겁과도 같은 시간이 흐른 뒤, 누군가 무릎을 흔드는 바람에 나는 어떤 앎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뒤이어 아버지의 걱정스러운 얼굴이 나타났습니다. 육체와 그에 따른 모든 것으로 되돌아 가는게 영 내키지 않았으나....그러나 나는 아버지를 지극히 사랑했으므로 그분의 고통으로 인해 나는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어떤 초연한 방식으로 나는 나의 죽음에 대한 아버지의 두려움에 동감했지만, 동시에 죽음이라는 개념이 우스꽝스럽게 비쳤습니다.
그 주관적 경험에 대해선 어느 누구와도 토론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이해하는 데 이용할 수 있는 맥락이 없었지요. 나는 그전에 성인들의 삶에서 보고한 것 외에는 영적 체험에 관한 얘기를 들어 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 뒤에 받아들여진 여러 세계의 실상이 그저 임시적인 것으로 비치기 시작했습니다. 전통적 종교의 가르침은 의미를 상실했고, 역설적으로 나는 불가지론자가 되었지요. 전 존재를 적시는 듯이 느껴졌던 신성의 빛에 비하면 전통적 종교의 신은 정말이지 둔한 빛을 발했습니다. 나는 종교를 잃어 버렸습니다....하지만 나는 영성을 발견했습니다.
2차 대전 기간, 나는 해군 소해정에 배치되어 위험한 임무를 수행했는데 죽을 뻔한 적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동료 수병들과는 달리, 내게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마치 죽음이 그 확실성을 상실한 것 같았지요. 종전이 된 다음에는 의대에 진학하여 학비를 벌며 공부했는데, 나는 마음의 복잡성에 매료되었고 정신의학을 공부하고 싶었습니다. 정신분석의 과정을 밟을 때 콜롬비아대 교수였던 내 지도교수 또한 불가지론자였는데, 우린 둘다 종교를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정신분석은 잘 되었고, 의사로서의 이력 또한 잘 풀렸으며, 나는 크게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직업 생활에 조용히 안주하지 못 했습니다. 나는 그 어떤 치료법에도 반응하지 않는 치명적인 진행성 질환에 걸렸지요. 서른 여덟이 되었을 때 나는 죽게 되리라는 걸 알았습니다. 나는 육체에 대해선 상관하지 않았으나 영은 극심한 고통과 절망상태에 놓여 있었습니다. 최후의 순간이 다가왔을 때, 불현듯 어떤 생각이 마음을 스쳤습니다.
"혹시 신이 있다면?"
그래서 나는 큰 소리로 기도했습니다.
"만약 신이 계시다면, 지금 저를 도와주십시오!"
나는 거기 있을지 모르는 어떤 신에게든 자신을 내맡기고 무의식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깨어나 보니 엄청난 변형이 일어나 있었고, 나는 경외심으로 말문이 막혔습니다.
전에 있었던 그 사람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사적인 자기나 에고는 남아 있지 않았고, 그저 무제한의 힘을 가진 무한한 현존뿐이었습니다. 무한한 현존, 그것이 있는 전부였습니다. 그 현존이 '나'였던 것을 대체했고, 이제 육체와 육체의 움직임을 통제하는 것은 오직 현존의 무한한 의지뿐이었습니다. 세계는 무한한 하나임의 명료함으로 환히 밝혀졌고, 측량할 길 없는 아름다움과 완벽함 속에 일체로서 그 자체를 표현했습니다.
아홉달 동안 그 멎어있음은 지속되었습니다. 내게는 자신만의 의지가 없었습니다. 육체적 실체는 명령받지 않아도 무한히 강하지만 절묘하게 부드러운 현존의 의지의 안내에 따라 제 할일을 해 나갔습니다. 그 상태에서는 어느 것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모든 진실은 자명했지요. 개념화는 필요하지도 않았거니와 가능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와 동시에 신경계는 그 회로가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의 에너지를 나르고 있는 것처럼 극도로 과부하가 걸린 느낌이었습니다.
세상에서 효율적으로 기능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두려움, 불안과 더불어 평상시의 모든 동기부여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구할 것이 없었는데 그것은 전부가 완벽했기 때문입니다. 명성, 성공, 돈은 무의미했습니다. 친구들은 나더러 실용적으로 진료를 재개하라고 촉구했지만, 그렇게 하고자 하는 유인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성격 밑에 있는 실상을 지각할 수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나는 감정 질환의 기원은 자신이 곧 성격이라는 사람들의 신념에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절로 그렇게 된 것처럼 진료를 재개했고, 결과적으로 그것은 엄청나게 커졌습니다.
미국 전역에서 사람들이 찾아왔습니다. 나는 1년에 1000명의 신규환자를 치료했습니다. 결국에는 50명의 치료사와 기타 직원들을 두게 되었지요. 외래환자는 2000명에 달했고 25개의 진료실, 연구실, 뇌파실험실이 생겼습니다. 라디오 방송과 TV에서 출연요청을 받았는데, 그중에는 맥닐/레러 뉴스아워, 투데이쇼, 바바라 월터스 쇼가 있었지요. 1973년 나는 분자교정 정신의학(라이너스 폴링과 공저)이라는 책을 통해 내가 하던 연구에 대해 보고했습니다. 그 책은 수많은 이들에게 자극이 된 듯 했습니다.
신경계의 전체적 상태는 서서히 개선되었고 그 다음에 또 다른 현상이 시작되었습니다. 감미롭고 기분 좋은 에너지 띠가 쉴새없이 척추를 따라 올라가 머릿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거기서 강렬하고 지속적인 쾌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삶의 모든 것이 공시성으로 일어나 완벽히 조화롭게 진화했으며, 기적적인 일이 일상사가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기적이라고 부를 일들은 사적인 자기가 아닌 현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사적인 '나'에서 남은 것은 그런 현상에 대한 어떤 목격자뿐이었지요. 나 자신보다 혹은 그것이 전에 했던 생각들보다 더욱 깊은 곳에 있는 더욱 큰 '나'가 벌어지는 모든 것을 결정했습니다.
그 상태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이 전한 바 있으므로, 나는 붓다, 황벽선사, 다른 깨달은 현인들을 포함하여 라마나 마하리시와 나사르가다타 마하라지 같은 근래의 스승들의 영적 가르침을 탐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런 경험은 특이한 것이 아니라는 게 확증되었지요. 불현듯 바가바드 기타가 완전히 이해되었습니다. 결국에는 스리 라마크리슈나와 기독교 성인들이 전한 것 같은 영적 황홀경이 일어났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 모든 사람이 다 환했고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웠습니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은 빛을 뿜게 되었으며, 그 광휘를 멎어있음과 장려함 속에서 표현했습니다. 전 인류가 사실상 내면의 사랑을 동기로 하지만 그저 그것을 알지 못하게 되었을 뿐이라는 것이 명백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정말 누구인지에 대한 자각이 깨어나지 않은, 잠자는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모든 이들이 마치 잠든 것처럼 보였으나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습니다. 나는 모든 사람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아침에 한 시간, 그리고 저녁식사 전에 한 시간씩 명상하는 습관을 버릴 필요가 있었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활동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지복을 강화시키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렸을 적 눈더미 속에서 일어난 것과 비슷한 경험이 되풀이 되곤 했고, 그런 상태를 떠나 보통의 삶으로 복귀하는 일이 점점 더 어려워졌습니다. 모든 것의 믿기 힘든 아름다움이 완성된 상태에서 빛을 발했고, 세상이 추함을 보는 곳에서 나는 오직 무시간적 아름다움을 볼 뿐이었습니다. 영적인 사랑이 나의 모든 지각에 스며들었습니다. 여기와 저기, 그때와 지금, 나와 너 사이의 모든 경계는 사라졌습니다.
그 세월은 내면의 침묵 속에서 흘러갔습니다. 그 사이에 현존의 강도는 더해졌지요. 내게 사적인 삶은 없었으며, 사적 의지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무한한 현존의 도구였고, 그 현존의 의지대로 돌아다니고 행했습니다. 사람들은 현존의 오라 속에서 예사롭지 않은 평화를 느꼈습니다. 구도자들은 내게서 답을 구했지만 '데이비드'와 같은 그런 개인은 더 이상 없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하고 있었던 것은 나의 것과 다르지 않은 그들 자신의 자기에서 답을 찾아내는 일이었습니다. 어느 사람을 바라보건, 나 자신이 그의 눈을 통해 빛을 발하는 게 보였습니다. 어떻게 내가 저 모든 육체 속에 들어간 걸까? 나는 의아했습니다.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기적적인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여러 해 동안 앓아 온 많은 고질병이 사라졌습니다. 시력은 저절로 정상으로 돌아왔고, 오랫동안 써 왔던 이중 초점 안경은 더 이상 필요 없었습니다. 이따금씩, 형언할 수 없는 지복의 에너지, 무한한 사랑이 불현듯 가슴에서 솟구쳐 어떤 재난 현장을 향해 뿜어지곤 합니다. 한번은 고속도로에서 운전하고 있는데 그 경이로운 에너지가 가슴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했습니다. 모퉁이를 돌아가니 막 자동차 사고가 나 있는게 보였습니다. 사실 전복된 차량의 바퀴들이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지요. 그 에너지는 맹렬한 기세로 나한테서 차에 타고 있는 이들에게 전해졌고, 그러다가 저절로 멈췄습니다. 또 한번은 어느 낯선 도시의 거리를 걷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에너지가 앞쪽 블록을 향해 흘러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깡패들이 막 싸움을 벌이기 시작한 현장에 닿았습니다. 싸움꾼들은 물러서서 웃음을 터뜨렸지요. 그러자 그 에너지는 다시 한번 그쳤습니다.
그럴 수 있을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 지각의 심원한 변화가 예고 없이 일어났습니다. 롱아일랜드의 어느 식당에서 혼자 식사하고 있는데 현존이 갑자기 강렬해지더니 보통의 지각에서는 분리된 것처럼 보이던 모든 사람, 모든 것이 무시간적 보편성과 하나임 안으로 녹아들었습니다. 움직임 없는 침묵속에서, 나는 아무런 '사건'도 '일'도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리고 실제로는 아무 일도 '생기지'않는다는 걸 알았슨데, 왜냐하면 과거, 현재, 미래는 태어나고 죽는 분리된 '나'라는 환상이 그런 것처럼, 지각의 가공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었습니다. 유한한 거짓 자기가 그것의 참된 기원인 보편적 참나 속으로 녹아들면서, 온갖 괴로움에서 벗어나 절대적 평화와 안도의 상태로 귀향한 것 같은 형언할 수 없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괴로움의 기원은 오직 개별성의 환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곧 우주이고, 완전하며, 있는 전부와 하나이고, 끝없이 영원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 더이상의 괴로움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환자들이 세계 전역에서 찾아왔습니다. 일부는 가망 없는 이들 중에서도 가장 가망 없는 이들이었지요. 이송용 방수푸로 몸을 감싼 채 꿈틀거리는 괴기한 형상의 환자들이 먼 곳의 병원에서 실려왔습니다. 그들은 진행된 정신분열증과 치유 불가능한 중증 정신질환의 치료에 희망을 걸고 있었습니다. 일부는 긴장증(정신분열증의 일종으로 극심한 운동능력의 상실이나 지속적인 활동의 항진상태를 경험한다. 때로는 몇 시간씩 강직된 자세를 취한 채 외부의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는다)환자 였습니다. 많은 이들이 수년간 무언증(말하지 못하는 병)을 나타내고 있었지요. 그러나 나는 어느 환자든, 불구가 된 겉모습 뒤에서 사랑과 아름다움의 빛나는 본질을 분명히 보았습니다. 아마도 그것은 보통사람의 눈에는 너무도 희미해서, 그 또는 그녀는 이 세상에서 전혀 사랑받지 못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어느날, 말문을 닫은 긴장증 환자가 구속복에 몸이 묶인 채 병원으로 실려왔습니다. 그녀는 중증 신경질환을 앓고 있었고 똑바로 일어서지 못했습니다. 바닥에서 꿈틀거리던 환자는 경련을 일으키더니 두 눈이 뒤로 돌아갔습니다. 헝클어진 머리에 옷은 갈가리 찢긴 채, 그녀는 그저 목쉰 소리만을 토해낼 수 있을 뿐이었지요. 그녀의 가족은 대단히 부유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여러 해동안, 세계 곳곳의 유명한 전문의를 비롯한 의사들을 숱하게 찾아 다녔지요. 온갖 치료법을 시도했지만, 의료진은 결국 그녀의 상황에 대해 '가망없다'고 말하고는 포기하곤 했습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말없이 물었습니다.
'신이여, 이 여인이 어떤 일을 겪기를 원하십니까?'
나는 그때 내가 할 일은 그저 그녀를 사랑하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녀의 내면의 자기가 두 눈을 통해 빛을 발했고, 나는 그 사랑하는 본질과 연결되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정말 누구인지를 스스로 인정함으로써 치유되었습니다. 마음이나 몸에 일어난 일은 더 이상 그녀에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본질적으로 그와 같은 일이 무수히 많은 환자들에게 일어났습니다. 일부는 세상의 눈으로 볼 때 회복되었고 일부는 그렇지 않았지만, 임상적 회복이 일어났는지 여부는 환자에게 더이상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내면의 고뇌는 끝났습니다. 자신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며 내면이 평화로워질 때 고통은 그쳤습니다. 그러한 현상은 현존의 연민이 환자 개개인의 실상을 재맥락화 하여 이 세상과 세상의 외관을 초월한 어떤 수준에서 치유를 경험했다는 얘기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내가 그 안에 존재했던 내적 평화는 시간과 정체 너머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나는 온갖 고통과 괴로움은 신이 아니라 오직 에고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것은 내가 환자들의 마음으로 말없이 전해준 진실이었지요. 여러 해 동안 말문을 닫고 있던 또다른 긴장증 환자에게서 그런 정신적 차단을 직관했을 때, 나는 마음을 통해 그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에고가 자신에게 한 일에 대해 신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환자는 벌떡 일어나서 말하기 시작했고, 현장을 목격한 간호사는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러나 일은 점차 과중한 것이 되었고 결국에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습니다. 내가 관계했던 병원에서는 환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병동을 하나 더 늘렸지만, 환자들은 줄지어 병상이 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번에 한 환자밖에 만날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인간고통의 밀물 앞에서 엄청난 좌절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마치 작은 컵으로 바닷물을 퍼내려고 시도하는 것과 같았지요. 왠지 모를 권태감의 원인, 그리고 영적 번민과 인간고통의 끝없는 흐름의 원인을 다루는 방법이 반드시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신체운동학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그 잠재력 앞에서 곧장 경이로움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두 우주, 즉 물질 우주 및 마음과 영적 우주 사이의 '웜홀'이었고, 차원들 간의 접점이었습니다. 자신의 근원을 잃어버린 채 잠자는 이들로 가득한 세계에서, 높은 실상과의 잃어버린 연결을 회복시켜주고 그것을 모두가 알 수 있도록 입증해주는 도구가 여기에 있었지요. 나는 생각해 낼 수 있는 온갖 물질, 생각, 개념을 테스트하기 시작했고, 제자들과 연구 조수들도 같은 작업을 하도록 했습니다. 그때 나는 어떤 이상한 일에 주목했습니다. 모든 피험자들이 부정적 자극(형광등, 살충제, 인공감미료 같은)에 약한 반응을 보인 반면, 자신의 앎의 수준을 발전시킨 영적 훈련생들은 보통 사람들처럼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피험자의 의식속에서 뭔가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이 바뀌었습니다. 명백히 그들은 자신이 세상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이 믿는 바에 의해서만 영향받는 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은 깨달음을 향한 진보 과정 바로 그 자체가 존재의 무상함에 저항하는 인간 능력을 높여준다는 걸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단순히 상상하는 것만으로 세상사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으로 하여나는 점점 더 강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랑이 사랑 인 것을 대체할 때마다 그것이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지가 보였습니다. 그 사랑의 힘을 특정 지점에 집중하면 문명의 전 체계가 현저히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런 일이 생길 때마다, 역사는 새로운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이제는 그런 중대한 통찰이 세상에 전달될 수 있을 뿐 아니라, 가시적으로 반박의 여지 없이 입증될 수 있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인간 삶의 큰 비극은 항상 심령이 너무도 쉽게 속아넘어간다는데 있었던 것 같았습니다. 불화와 반목은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지 못하는 인류의 무능함의 불가피한 귀결이었지요. 하지만 그 근본적 딜레마에 대한 답이 여기 있었습니다. 그것은 의식의 본성 자체를 재맥락화해주는, 그리고 다른 방법으로는 그저 추론할 수 있을 뿐인 것을 설명할 수 있게 해 주는 어떤 방식이었습니다.
5번가에는 아파트가, 롱아일랜드에는 큰 집이 있었던 뉴욕에서의 삶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결국 나는 보다 중요한 어떤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나는 세상과 그 속의 모든 것을 떠나 어느 작은 마을에서 은둔생활을 시작했고, 그 후 7년간 명상과 연구를 하며 그곳에서 보냈습니다. 내 아이디어를 구체화시킬 수 있으려면, 그러한 의식 상태를 하나의 도구로 완성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구하지 않았는데도 압도적인 지복 상태가 되돌아오곤 했고, 결국 나는 신성한 현존 속에 있으면서 사회에서 여전히 기능하려면 스스로 배워야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나는 세상 돌아가는 형편에 어두워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연구와 저술을 위해 모든 수행을 중단하고 형상 세계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었지요. 나는 세상사를 따라잡기 위해, 즉 누가 누구이고 요즘 사회적 대화의 본성이 어떤지를 알기 위해 신문을 읽고 TV를 시청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누가 공직에 출마했는지, 누가 다이애나 비인지 몰랐습니다. 하지만 요즘 뉴스를 다시 알게 되는 것이 하나의 즐거움이라는 걸 발견했습니다.
진실의 예외적이고 주관적인 경험(이는 신비가의 영역인데, 신비가는 자신의 수준이 갖는 에너지를 집단의식으로 보냄으로써 전 인류에게 영향을 미칩니다.)은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단순히 이해 불능이며 따라서 구도자 이외의 사람들에게는 한정된 의미를 갖습니다. 나는 이제 평범해지고자 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냥 평범하다는 것은 그 자체가 저절로 신성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자신에 관한 진실은 일상생활의 도를 통해 찾아낼 수 있습니다. 평범함과 신은 다르지 않습니다. 필요한 것은 오직 관심과 친절로 살아가는 일 뿐입니다. 나머지는 적당한 시기에 저절로 드러납니다.
그래서 멀찍이 돌아온 영의 여행 끝에, 나는 가능한 한 많은 동료 존재들이 내 삶을 바꾼 현존에 대한 이해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갈 수 있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일로 복귀했습니다.
현존은 침묵하며 평화로운 상태를 전달합니다. 그것은 무한히 부드럽지만 바위와 같습니다. 그것과 더불어 모든 두려움은 사라지고, 영적 기쁨이 설명하기 힘든 황홀경의 고요한 수준에서 일어납니다. 시간 경험이 그치므로 걱정, 후회, 고통이나 기대는 없습니다. 기쁨의 근원은 끝이 없으며 항상 존재합니다. 시작도 끝도 없고, 상실이나 슬픔, 욕망도 없습니다.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는데, 왜냐하면 일체가 이미 완전무결하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멎을 때 모든 문제는 사라집니다. 문제란 지각의 한 지점이 빚어낸 가공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존이 지배할 때 몸이나 마음과의 동일시는 더이상 일어나지 않습니다. 마음이 점차로 침묵할 때 "나는 있다"는 생각 또한 사라지고, 순수한 앎이 빛을 발하여 사람이 무엇이고, 무엇이었으며, 항상 무엇일 것인지를, 모든 세계와 모든 우주(무한한, 그리고 시간 너머에 있는)너머에서 환히 밝혀 줍니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앎의 상태에 도달하는지를 묻습니다. 나는 나 자신의 경험을 사람들과 나눌 수 있을 뿐인데, 그 단계를 따를는 이들이 극히 드물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그 단계를 따르는 이들이 드문 것은 그것이 아주 단순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그 상태에 이르고자 하는 욕구가 강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예외를 두지 않고 일관되고 차별없는 용서와 부드러움으로 행동하는 연습을 했습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생각을 포함하는 모든 것에 연민을 가져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기꺼이 욕망을 정지시키고 매순간 사적 의지를 내맡기고자 했습니다. 모든 생각, 느낌, 갈망 혹은 행위를 신에게 내맡기자 마음은 점점 더 침묵에 들었습니다.
처음에는 마음속의 모든 이야기와 논평을, 그 다음에는 관념과 개념을 신에게 넘겼습니다. 생각을 소유하려는 욕구를 놓아버리면 생각은 더 이상 그런 정교함에 이르지 못하고 겨우 반쯤 형성되었을때 조각나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생각이 되기도 전에 생각 자체의 배후에 있는 에너지를 넘기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단 한순간도 명상 상태에서의 흐트러짐을 허용하지 않고 지속적이고 확고부동하게 초점을 고정시키는 일을 일상 활동 중에도 계속했습니다. 처음에 그것은 매우 어려운 것 같았으나, 시간이 흐를 수록 습관적이고 자동적이며 힘들지 않은 것이 되었지요. 그 과정은 마치 로켓이 지구를 떠나는 것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엄청난 힘이 요구되지만, 로켓이 지구의 중력장을 벗어나면서 힘이 점점 덜 듭니다. 마침내 그것은 그 자체의 관성으로 우주공간을 나아가지요.
아무런 징후 없이, 앎에서 문득 어떤 전환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현존이 거기 있었지요. 그것은 명료했으며 전부를 아우르고 있었습니다. 자기가 죽는 동안 잠시 불안의 순간이 있었고, 그 다음에 현존의 절대성이 순간적으로 경외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 돌연한 비약은 장관이었으며, 이전에 경험한 어느 것보다 더 강렬했지요. 일상적 경험에는 그에 비견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뒤이어 일어난 격심한 충격을 완화해 준 것은 현존의 사랑이었습니다. 그 사랑의 지지와 보호가 없으면 사람은 소멸할 것입니다.
에고가 무가 되는 것을 두려워하며 자신의 존재에 매달릴 때 공포의 순간이 뒤따랐습니다. 하지만 에고가 죽자, 무가 되는 대신 그 자리에는 일체임, 전부로서의 참나가 들어섰습니다. 그 속에서 일체는 자신의 본질의 완벽한 표현으로 알려져있고 자명합니다. 비국소성과 더불어, 사람은 항상 존재해 왔고 혹은 존재할 수 있는 전부라는 앎이 왔습니다. 사람은 모든 정체와 성별을 넘어서, 심지어는 인간 존재 자체를 넘어서 전체적이고 완전합니다. 다시는 괴로움과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시점에서 육체에서 벌어지는 일은 비물질적입니다. 영적 앎의 일정 수준에서, 육체의 질환은 치유되거나 저절로 사라집니다. 하지만 절대적 상태에서 그러한 고려는 무관한 것입니다. 육체는 예정된 경로를 밟을 것이고 그 다음에 그것이 온 곳으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그것은 하등 중요하지 않은 문제입니다. 사람은 그것에 영향받지 않습니다. 육체는 '나'라기 보다는 '그것'으로, 방안의 가구 같은 또다른 물체로 보입니다. 사람들이 육체가 개별적 인간인 것처럼 여전히 그것에 말을 거는 모습이 우스워 보일 수도 있지만, 자각하지 못한 이들에게 그런 앎의 상태를 설명할 길은 없습니다. 그냥 자신의 일을 해 나가고 섭리가 사회적 적응을 맡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최선입니다. 하지만 지복에 이를 때, 그렇듯 강렬한 황홀경을 감추는 것은 지극히 어려워집니다. 그 지점에서는 그 상태를 타인과 공유하고 그것을 모두에게 이롭도록 이용하고자 하는 일반적 욕구가 있습니다. 세상 역시 경탄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동반되는 오라 속에 있기 위해 사람들이 멀리서 널리 찾아옵니다. 형이상학적 구도자들과 영적 호기심이 있는 이들이 기적을 찾아 이끌릴 수 있으며, 중환자들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사람은 그들에게 자석이자 기쁨의 원천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상태에 동반되는 황홀경은 절대로 안정적이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또한 큰 고뇌의 순간들도 있드는 걸 유념하십시오. 그 상태가 요동하다가 명확한 이유 없이 갑자기 그칠 때 가장 격렬한 순간이 벌어집니다. 그런 때는 깊은 절망의 시기, 현존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두려움을 불러일으킵니다. 그런 추락은 길을 힘겹게 만드는데 반전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강한 의지가 요구됩니다. 이 수준을 초월해야 한다는 것, 안 그러면 견디기 힘든 '은총에서의 추락'으로 끊임없이 고통을 겪는다는 것이 마침내 자명해집니다. 그 다음에 이원성을 초월하는 힘겨운 과업에 들어설 때 황홀경의 영광은 포기해야 합니다. 이는 사람이 모든 대립물과 그러한 대립물의 상충하는 잡아당김을 넘어설 때까지의 일입니다.
그런데 황홀한 기쁨의 황금사슬을 버리는 것은 에고의 쇠사슬을 기꺼이 즐겁게 포기하는 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미치 신을 포기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그리고 전혀 예상치 못한 새로운 수준의 두려움이 일어납니다. 그것은 절대 고독에 대한 최후의 공포입니다.
나의 경우에 비존재에 대한 두려움은 무시무시했고, 나는 그것으로부터 되풀이해서 뒷걸음칠 쳤습니다. 그제야 고뇌의 목적, 영혼의 어두운 밤의 목적이 명확해졌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견디기 힘들고 그 격렬한 고통은 그것을 넘어서는 데 필요한 극한의 노력을 다하도록 사람을 몰아붙입니다. 천국과 지옥을 번갈아 오가는 것이 견딜 수 없어질 때, 존재 자체에 대한 욕망은 내맡겨져야 합니다. 오직 그렇게 할 때에애 사람은 마침내 전부임이냐 무냐, 존재냐 비존재냐를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 내적 수행의 정점이 가장 어려운 국면이자 궁극적 분수령입니다. 사람은 여기서 초월하는 존재의 환상은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을 똑똑히 압니다. 그 단계에서는 되돌아오는 것이 불가능한데, 그 돌이킬 수 없음의 유령이 마지막
장벽의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선택으로 보이게 만듭니다.
하지만 사실 자기의 그 최종적 종말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이원성(존재와 비존재의 이원성, 즉 정체 자체)은 보편적 신성속에서 녹아버리고, 선택한 개별 의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 다음에 마지막 걸음은 신께서 홀로 옮겨 놓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