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베소서 제 22강 (이 근호목사, 2008년 10월 10일-b, 서울의존교회)
두 번째 시간 시작합니다. 세상 사람들 살아가는 것을 다시 정리합니다.
(1) 내가 여기 있다. … (나는 목사다.)
(2) 그 내가 뭔가 한다. … (나는 개척교회 한다.)
(3) 그래서 어떤 실적을 세웠다. … (교인들이 이 만큼 생겼다.)
이게 바로 세상 보통사람들, 모든 사람들의 세상살이이고 여기서 안 벗어납니다. 그런데 여기서 내가 여기 있다, …… 그 내가 뭔가 한다, …… 그런데 여기서 내가 아무리 해도 실적이 안 오른다든지 혹은 내가 남긴 실적을 누군가 가져가버렸다든지 할 때는 ‘나 죽을래.’ 하고 자살해 버리지요. 자기 원대로 안 되니까요.
이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의 사고방식이고 삶입니다. 여기서는 뭐가 없습니까? 선물의식, 나 자신이 선물로 살아간다는 것이 전혀 없고, 그릇의식, 나는 주님이 만든 그릇에 불과하다는 그릇의식이 여기서는 전혀 나올 수가 없어요. 오늘 에베소서 4장을 설명하는데 여기서 반드시 뭐가 나와야 되느냐 하면, 선물의식이 나오는 식으로 해석이 되어야 하고, 그리고 우리는 그 선물을 담는 그릇이라는 것이 반드시 나와 줘야 합니다.
나와 주려면 우리는 옛날 구약 이스라엘이 어떤 구조로서 열두지파가 형성되어 있는가를 알아야 됩니다. 제가 그림을 그렸지요. 여기 열두지파가 있어요. 여기 이 중심에 무슨 지파가 있다고 했습니까? 레위지파가 있는데 레위지파가 지키는 신은 상자입니다. 세상의 모든 신들은 사람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 그리스 신화에 보면 그 신들은 인간적인 모습과 성질, 더럽거나 좋은 성질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다투고, 사랑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사랑하는, 애인을 빼앗고, 울고 술 마시고 추태부리고, 부자지간에 싸우고, 부부간에 싸우고, 형제간에 싸우는 신들입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말고 다른 신들을 보면 곡물의 신, 땅의 신, 비의 신, 바람의 신, 폭풍의 신도 있어요. 폭풍의 신, 유명한 신이 있는데 아십니까? 그걸 ‘바알’이라고 합니다.
폭풍의 신, 달의 신, 폭풍과 달이 결혼해서 대지가 나왔다는 식으로 이야기 합니다. 죽음의 신, 영생의 신, 이렇게 신들이 많습니다. 이것은 어렵게 이야기해서 사람은 육체를 가지고 정신을 설명하려고 드니까 여기에 신들이 동원될 수밖에 없어요. 육체 속에서 이런 정신이 나온다고 해서 그 정신이 나올 때마다 신의 이름을 붙이다 보니 신이 그렇게 많아졌습니다.
어떤 신은 그 신의 자식이 70명입니다. 신이 70명의 새끼를 낳았어요. 신이 그래서 수백 가지도 더 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은 그런 형상이 아니고 그냥 상자입니다. 그 상자의 구조는 뚜껑과 그 안의 내용물로 되어있어요. 안에 있는 내용물을 뚜껑이 꽉 누르는 식으로 되어 있어요.
만약에 뚜껑을 안 누르고 그 뚜껑이 열렸다 하면 그 안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저주가 나와서 열어 본 사람도 죽고 그 주변 사람 다 죽습니다. 해리슨 포드라는 미국 할리우드 배우가 주연한 『레이더스』시리즈에 <잃어버린 성궤를 찾아서>라는 것이 있어요. 그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보면 독일군이 법궤의 문을 열다가 졸지에 다 해골로 변해버립니다.
와, 그 영화보고 얼마나 무서웠는지! 구약 때 웃사가 법궤를 붙들었다가 죽었다는 이야기가 나오지요.
사무엘하 6:6-7
“저희가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의 잘못함을 인하여 진노하사 저를 그곳에서 치시니 저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를 뚜껑이 덮어 누를 수가 있는데 그 뚜껑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그 뚜껑에 거룩한 희생의 피가 있습니다. 뚜껑에 발려 있는 그 희생의 피가 그 안의 저주받아 마땅한 백성들의 진노를 덮어 주는 거예요. 이게 사랑입니다. 그 안에 있는 진노가 하나님의 공의인데 그 하나님의 공의, 진노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덮어주는 혜택으로서 이스라엘 속에 함께 있는 거예요.
다른 민족은 안 됩니다. 오직 이스라엘만이 그 상자의 뚜껑에 있는 피로 말미암아 그 진노를 덮어서 그 열두지파에게 자비를 베풀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인도합니다. 그런데 그 피를 생산하기 위해서 뭐가 필요합니까? 제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아까 이야기했듯이 다른 지파에게는 땅을 줬는데 레위지파에게는 땅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땅이 없어요. 그러면 레위지파는 무엇을 상속받습니까? 아까 읽었지요? 여호수아 13장 33절에서 봤지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기업이 되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기업이란 상속이란 말입니다. 하나님 자체가 상속이 된다는 뜻입니다. 큰 아들한테는 땅 주고 둘째 아들에게는 빌딩주고 셋째 아들에게는 외제차를 주고, 넷째 아들에게는 아버지 자체를 줍니다.
아버지가 지금 죽잖아요. 그러면 시체가 된 아버지가 상속이 됩니다. 그럴 때 넷째 아들이 기가 막힐 것이 아닙니까? 아버지 시체가지고 뭘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희생제물, 제물을 잡아서 제사를 드릴 때 양이나 소나 염소가 죽으면 거기서 피가 나옵니다. 그 피가 있어야 영생을 얻습니다. 레위지파는 ‘하나님의 피 흘리심이 그들의 상속이 되어야 한다.’ 그 말입니다.
지파들 중에서 레위지파만이 거룩한 지파가 되고 신약에 와서 그 거룩한 지파만이 거룩한 성도가 돼요. ‘너희는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벧전 2:9) 도대체 교인들이 교회 와서 기도하는 제목, 목적 이런 것이 다 틀렸어요. 뭐가 잘못되었어요. 성경을 모르니까 무엇을 위해서 기도해야 되는지를 몰라요. 하나님이 뭘 원하는지를 몰라요.
주님께서 이야기 하는 바, 성도가 교회 와서 기도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그러면 그 전까지는 무엇을 위해서 살았다? 다시 정리합시다. ‘내가 여기 있다.’ 내가 여기 있는 이상 누구의 영광입니까? 나의 영광이죠. 어떻게? ‘내가 무엇을 행한다.’ 무엇을 위해서? 나의 영광을 위해서.
‘실적을 얻었다.’ 누구를 위해서? 그 행동을 한 나의 영광을 위해서 실적을 얻었죠. ‘그런데 실적이 없다.’ 자살하죠. 왜 자살합니까? 처음부터 무엇을 노렸기 때문입니까? 나의 영광을 노렸는데 그게 뜻대로 안되고 부도가 나서 내 영광이 없으니까 ‘죽는 게 낫다’는 겁니다. 누구를 원망하고? 나를 낳아준 하나님을 원망하고. ‘에라,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열심히 섬겼는데 기껏 나에게 해 준 것이 부도냐.’ 그래서 자살하죠.
이런 인간들이 여기 어디 있습니까? 하나부터 열둘까지 배치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여기 있다. 나는 행동한다. 나는 이런 실적 얻었다, 혹은 못 얻었다.’ 이런 것이 레위지파에게 해당 되겠어요, 안되겠어요? 안됩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겠습니다. 여기 그림 중앙은 가운데가 푹 꺼졌어요. 블랙홀 같아요. 주변에 열두지파가 둘러서 있는데 중앙의 레위지파가 있는 장소는 푹 꺼졌습니다.
꺼지고 뻥, 하면서 불꽃놀이 하듯이 여기서 뭐가 위로 올라가요. 이게 에베소서 4장 9절, 10절에 나옵니다.
에베소서 4:9-10
“올라가셨다 하였은즉 땅 아랫곳으로 내리셨던 것이 아니면 무엇이냐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오르신 자니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
‘…내리셨던 그가 곧 모든 하늘 위에’ 뭐하신 자니? ‘…오르신 자니.’ 이 장소, 거룩한 장소, 다른 열두지파가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이 거룩한 자리, 성소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하나님의 죄 없는, 흠 없는 희생제물이 어디까지 내려갑니까? 사람들이 차마 가기 싫어하는 죽음의 밑바닥 까지 내려가요. 희생제물이 죽습니다.
희생제물이 죽었을 때 뭐가 만들어지지요? 피가 만들어지지요. 그 피를 근거로서 하나님과 이 희생양은 하나님의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서 계약을 체결합니다. 계약을 체결할 때 아무리 내용을 잘 적어 놓아도 마지막에 사인이나 도장이 들어가지 않으면 무효잖아요. 그러면 하나님께 그 도장, 사인을 저보고 하라고 했습니까? 그 사인을 누가 해야 합니까?
에베소서 4장 8절에서 누가 그것을 합니까? 누가 내려갔다가 누가 올라갑니까? 여러분이 폴짝 뛰면 올라갑니까? 올라갔다는 말은 하나님께 그분을 인정해서 하늘로 올라갔잖아요. 그러면 하늘로 올라가신 그분이 곧 뭐라는 말입니까? 유일하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계약체결자가 되는 거예요. 어디에 근거해서? 구약의 모세언약에 근거해서, 제사장 언약인 약속에 근거해서.
하나님은 계약서대로 일하고 계약서대로 구원합니다. 열심 낸다고 구원해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약서를 만들고 하나님이 제시한 계약서대로 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갑니다. 그런데 그 계약서 도장 찍는 란에 뭐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우리 피는 안돼요. 왜? 우리는 더러운 죄인이기 때문에.
세례요한이 예수님 보고 뭐라고 했습니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요 1:29) 어린양이란 옛날에 제사지낼 때 희생제물이 어린양입니다. 하나님의 흠 없는 어린양의 피만이 그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서 그래서 구원받는 겁니다. 왜 석가모니가 아니고 공자가 아닌가? 석가모니나 공자는 주님께서 불러내지를 않았어요. 하늘로 올라가지를 않았습니다.
따라서 그 인간들은 다 가짜입니다. 그들은 구세주도 구원자도 아닙니다. 참선해도 소용없고 염불해 봐도 소용없습니다. 왜? 하늘로 부활 승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4장 8절에서 ‘주께서 불러냈다’는 말은 주께서 불러낸 것으로 시작해서 역추적을 해 보세요. 도대체 누가 구름을 타고 올라갔습니까? 누가 사흘 만에 부활했습니까? 그분이 누구십니까? 나사렛 예수잖아요.
사도바울이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죽였습니다. 왜? 가짜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부활했다는 것을 안 믿었습니다. 그런데 다메섹으로 내려갈 때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난 뒤에 그때부터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인정하신 ‘세상 죄를 지고 가신 어린양’은 누구밖에 없다? 오직 주 예수 뿐이다.
오직 예수님만을 보내셔서 구원하는 거예요. 그 예수님이 상자뚜껑위에 발린 피를 생산해 내고 그것을 유지해야 됩니다. 이것을 위에서 보면 그렇고 옆에서 보면 여기에 구멍이 나 있다는 말입니다. 그 구멍은 죽음으로 내려갑니다. 죽음으로 내려가는데 ‘목사님, 죽음은 끝은 무엇입니까?’ 라고 하신다면 죽음의 끝은 저주, 영원한 저주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사 무엇을 받으셨다? ‘저주를 받으셨다’(갈 3:13)고 합니다. 불교신자는 뭐 하면 됩니까? 착한 일 하루에 열 가지씩 하면 되지요. 염불하면 되지요. 참선하면 되지요. 여러분, 그게 더 낫습니까? 아니면 우리가 뭘 하는 것 대신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에서 저주를 받으셨다’ 가 낫습니까? 여러분이 보시기에 어떤 것이 더 인간적입니까?
어느 것이 더 인간적으로 가슴에 와 닿습니까? 아까 인간을 어떻게 정리했습니까? ‘내가 여기 있다. 내가 뭔가 한다. 실적 얻었다.’ ‘나 여기 있다. 하루에 열 가지 착한 일을 한다. 그랬더니 나는 복을 받았다.’ 이것이 인간적으로 훨씬 와 닿지요. 그래서 오늘날 한국교회 전체가 이런 방식으로 나가는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으면 이제부터 뭔가 하세요. 하시면 하신 만큼 여러분이 복을 받습니다.’ 전부 다 마찬가지 아닙니까? 이게 가슴에 와 닿는 거예요. 이런 방식이 납득이 되고 이해가 되고 소통이 된다는 말입니다. 착한 일을 해서 복 받는 사례를 이야기 하면 교인들이 다 넘어갑니다. ‘나도 저렇게 착한 일을 해서 복을 받아야지. 그래서 남에게 나의 착함을 과시해야지.’ 안되면 자살하면 되고 실적 없으면 자살하면 되니까.
이게 얼마나 중요한 이야기입니까? 한국교회와 정반대되는 곳에 천국이 있습니다. 그 한국교회 누가 만들었습니까? 목사가 만들었습니까? 아니면 한국교회 민중들이 만들었습니까? 한국민들의 정서, 전에 절에 다니던 한국민들의 정서가 그대로 교회를 만든 거예요. 제 강의를 듣는 사람들이 강의를 다 좋게 들으면서 마지막에 삐지는 이유가 있는데 ‘한국교회가 이단이다.’ 라는 소리를 듣고 삐지는 거예요.
당신 말에도 일리는 있는데 ‘다른 교회보고 이단이다’라는 소리는 하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너만 잘났냐?’ 이러고 있습니다. 여기에 ‘너만 잘났나?’ 그런 소리가 어디 있습니까? 이 강의는 누구만 잘났습니까? 예수님만 잘났습니다. 왜? 계약서 날인란에 예수님의 피만 들어갑니다. ‘내 살과 내 피로 새 계약서를 작성하오니.’(마 26:28) 끝난 이야기 아닙니까? 뭐가 복잡합니까?
그러면 우리는 뭐가 됩니까? 우리는 그릇입니다. 선물의식을 듬뿍 담은 그릇입니다. 한국민들의 절간에 다니던 정서가 왜 한국교회를 이런 모양으로 만들어놓았는가 하면 사람들이 교회에 가는 것도 하나의 노동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내가 오늘 집에 그냥 있지 않고 교회에 갔다. 뭔가 했다. 그러니 교회에 간 보람, 실적을 얻었다.’ 이런 공식에서 안 벗어나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여기 있다. 뭔가 했다. 뭔가 얻었다. 안되면 또 기도하자’ 이런 식 밖에는 없습니다. 주께서 저주받아 죽으시는데 거기서 퓽, 하고 하늘로 승천하셨다는 이 코스만이 구원의 길이 됩니다. 그 십자가를 가져와서 ‘내가 여기 있다’는 이 밑에다가 집어 넣어버립니다.
십자가는 이사야 53장에 보면 결국은 무엇입니까? 이미 우리가 죽은 것입니다. 아까 골로새서 3장에서 봤지요? 십자가가 오기 전까지는 ‘나는 여기 있다’입니다. 십자가가 오고 나니까 ‘나는 죽은 채로 있네.’ 라고 됩니다. 있기는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있다? 죽은 자로 있습니다. 어렵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단순히 죽은 것이 아니라 저주받아 죽었잖아요.
이 저주받은 십자가를 그냥 가져오는데 그 저주받은 십자가를 우리에게 딱 들이대면 우리는 그냥 죽은 것이 아니고 저주받아 죽은 자입니다. 그런데 누가 합류합니까? 예수님이 합류할 때 우리는 나 혼자 있지 않고 어디 안에 들어 있다? 예수 안에, 같은 말로 십자가 안에 들어 있는 겁니다.
골로새서 3장 4절에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리라’고 합니다. 우리가 십자가 안에 들어 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해서 고함을 질러도 됩니다. 사도바울이 이야기 했고 사도바울의 이야기는 주님의 뜻입니다. 이게 성경이고 이게 복음입니다.
‘내가 여기 있다….’ 이런 의식 밑에다가 십자가를 받쳐 넣어야 할 것을 가지고, ‘나는 여기 있다….’ 그 다음에 십자가를 집어넣으니까 어떤 짓을 하느냐 하면 ‘나는 여기 있다. 십자가를 믿고 복 받아야지.’ 라고 나온다는 말입니다. 이게 엉터리가 아니고 뭡니까? 이게 개혁주의 아닙니까? 이게 개혁주의라고요. 개혁주의를 못 버려요. 왜? 개혁주의를 버리면 자기가 죽으니까.
죽으라니까요! 개혁주의를 버리고 죽으면 되는 거예요. 왜? 그것이 그동안의 자기 실적이고 자기 업적이니까. 한국교회 전체가 개혁주의입니다. 그것을 버려야 돼요. 불교를 공부 안 해보고 유교나 이슬람등의 다른 종교를 제대로 안보니까, 개혁주의가 성경만으로 성경을 해석한다고 하지만 스스로 속는 꼴이 됩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 ‘나는 여기 있다. 성경을 해석한다.’ 아무리 성경을 보면서 은혜롭게 소위 테레사 수녀마냥 해석을 한다고 해도, ‘내가 여기 살아 있다’고 한 이상은 거기서는 성경 해석이 제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거기서는 우상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결국에는 자기 실적 외에 나오는 것이 없습니다. 꼭 신학교 교수 같은 꼴입니다. 사도바울이 신학교 교수입니까?
사도바울은 그냥 선물 받은 사람입니다.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그는 그릇입니다. 그런 그릇으로 모자람이 없어요. 그릇됨 자체로 끝나는 거예요. 상자 이야기 다시 해봅시다. 세상의 우상들은 인간의 모습을 해서 내가 되고 싶어 하는 최종점을 신이라고 본 것입니다. ‘나는 저 모습처럼 되어야지.’ 라고 모델로 여기고 상상의 나래를 펴는데 그 최고 정점에 있는 것을 신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마 신이라면 이렇게 자비롭고 공의로울 거야.’ 라고 일방적으로 생각합니다. 자기가 저주받아야 될 인간인줄은 모릅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오게 되면 ‘나는 저주받아야 마땅한 인간’이고 더 이상 그때부터는 ‘나의 것, 내 인생’이라는 것이 여기서는 의미가 없고 주님의 그릇으로서 살아갑니다.
결국 그리되면 예수님이 우리 안에 계시니까 예수님께서 오셔서 죽어서 부활하고 승천하는 이 과정 전체를 나의 인생, 성도의 인생에 그대로 되풀이(반복)해 버립니다. 성도의 전 인생 속에서 ‘왜 우리는 죄인이며 그 죄가 어떻게 사라졌는지 어떻게 해서 주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는지’를 반복하는 작용을 하는 겁니다.
울산 등대교회에서 강의를 할 때 두 번째 시간에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주님의 영광을 이야기하는 대목이었는데 그 대목이 맘에 들어서 그 대목을 다시 한 번 설명하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좋은 설명이 누가복음 2장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2장에 들판에 있던 양치는 목자가 나옵니다.
문제 나갑니다. 그 목자들에게 주의 영광이 임할 때 어떠했습니까? 1) 좋아했다. 2) 무서워했다. 몇 번입니까? 무서워했잖아요. 현재 주님의 영광이 성도에게 들이닥치면 우리가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무서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여기 있다. 나는 뭔가 한다. 실적을 향하여.’ 이러한 구조에 해당되지 않는 외부에서 뭔가가 쳐들어오는 거예요.
여러분, 경제가 어려울 때 무섭지요? 주의 영광입니다. 이 구조는 철저하게 내 영광을 위해서 다져놓은 겁니다. ‘손대지 마세요. 하나님도 손대지 마세요. 이것은 내 영광입니다. 나는 이것 밖에는 몰라. 나는 여기에 목숨 걸었어.’ ‘나는 여기 있다. 나는 한다. 실적 얻었다. 나를 알아다오.’ 이것이 나의 영광의 공식입니다.
그런데 주의 영광의 특징은 그 나의 영광의 공식을 부수어 버리는 공격적인 겁니다. 주의 영광이 나의 영광을 폭격하는 식으로 와버려요. 그러면 우리는 뭐냐? ‘나는 어쩌라고!’ 그러면 주께서 하시는 말씀이 ‘또 나! 또 나!’ 그러면 우리는 ‘아하, 나는 없구나. 나는 죽은 자지.’ 사람은 근원적으로 ‘내가 뭐할까’ 라고 하면서 자꾸 나에게 의미를 줘요.
‘내가 착하게 살까? 바르게 살까?’ 자꾸 나를 잊지 못해요. 주의 영광이 임하면 놀라게 됩니다. 울산에서 한 강의 그대로 해 볼게요. 왜 놀라게 되느냐 하면 나 같이 비천한 자에게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눅 2:14) 라는 어떤 사명이 주어집니다. 사명이 주어지고 그 다음에 지시와 명령이 떨어집니다.
누가복음 2:15-20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까지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고하니 듣는 자가 다 목자의 말하는 일을 기이히 여기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하니라 목자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그러니까 그 목자는 무서운 가운데서 듣기는 들었지, 갑자기 주변이 환해지면서 조명발이 비췄지, 벌벌 떨었지, 지금 양이 어떻게 되느냐, 그것을 생각할 겨를이 없어요. 시키는 대로 움직이면서 약속하신 어린양을 봤잖아요.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의 공식이 뭡니까? 첫째, 무섭다. 두 번째, 시키는 대로 한다. 세 번째, 하나님의 약속을 보았다.
그 약속이 뭡니까? 성경전체입니다. 이 성경전체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느냐 하면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라는 것이 디모데전서에 나옵니다. 우리는 무시하고 삽니다. 그런데 갑자기 사업이 안 됩니다. 무섭습니다. 성경 보니까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라고 나옵니다. 약속을 접촉하게 됩니다.
그 전에는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다.” 라는 말씀을 천 번을 봐도 소용이 없어요. 무서움 가운데서 성령의 지시 가운데서 성경을 보니까 ‘야, 과연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을 절대로 우리에게 양보한 적이 없구나.’ 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성경에 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우리는 다 외워 놓고도 평소에 무시합니다.
‘나는 돈 벌 궁리에 충만하지 범사에 감사하라, 그런 일은 안하겠습니다.’ 라고 했는데 갑자기 무서운 일이 벌어지면서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서 뭔가 일을 하게 되었는데 속에서 느낌에 ‘모든 일에 감사하라, 이것이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다.’ 라는 것이 그 날 만큼은 새롭게 다가옵니다. ‘아, 진짜 하나님은 나에게 약속을 믿도록 이렇게 조치하시는구나!’
또 예를 들면 가정에서 애가 공부를 못할 때 낙담을 하게 됩니다. ‘얘가 커서 무엇을 할것이며 무엇을 먹고 살꼬’ 라고 하는데 성경을 보니까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가 있습니다. 이것은 다 아는 이야기였잖아요. 그리고 ‘넓은 길은 멸망의 길이니 좁은 길을 가거라.’ 목사님은 똑같은 말씀을 여럿에게 설교했는데 이것이 옆 사람 말고 다른 사람 말고 왠지 그날따라 나에게 주는 나의 말씀으로 다가올 때 그게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는구나. 우리는 하나님의 그릇이구나.’ 어떤 사람은 그렇게 말합니다. ‘목사님, 이 성경 다 아는데 왜 또 봅니까?’ 여러분, 밥 안 먹어 봤습니까? 먹어 봤는데 왜 또 먹습니까? 살기 위해서 먹잖아요. 하나님의 약속, 이 생명의 말씀이 만나요, 생명의 양식입니다. 약속대로 되는 것이 우리의 미래상입니다.
요한계시록 20장 보면 나오지요.
요한계시록 20:11-15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마지막 심판할 때 무엇으로 합니까?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가는 사람은 오직 어느 책에? 생명책에 기록된 사람에 한해서만 천국에 가지요. 이것을 우리가 평소에 느낄 수 있습니까? 살기 바쁜데 언제 그것을 느낍니까? 우리 힘으로 이 성경 구절을 외우면 느낍니까? 외운다고 해서 은혜가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생명책에 기록된 대로 구원 받는다.’ 하는 그 은혜는 언제 옵니까? 그것은 그때그때 달라요. 그것은 주님께서 그의 영광을 줄때 ‘야, 생명책에 기록된 대로만 구원받는다.’ 하는 것을, 그 창세전에 예정된 기쁨을 다시 한 번 깨닫게 하는 겁니다. QT를 백날 해도 소용없습니다. QT는 하나님이 해서 우리에게 매일 매일 적용시킵니다.
우리는 뭘 하느냐 하면, 하루 일과를 통해서 얼마나 성경말씀대로 하루 24시간이 지나갔는가를 죽 살펴보라는 말이죠. 죽 살펴보면 마지막 대목이 이겁니다. ‘잠을 주신 자에게 감사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뭘 주신다? ‘잠을 주신다.’
시편 127:1-5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라도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그 다음에 식사 할 때는 뭘 느끼면 됩니까?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알라.”(딤전 6:8) 그리고 마지막에 잠을 자면서 주기도문을 외워 봅니다. 그러면 오늘도 우리에게 뭘 주셨습니까? “…오늘도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보세요. 다 하나님의 약속이 맞잖아요. 일용할 양식을 받았잖아요. 이틀분이 아닙니다.
보세요. 하나님의 약속은 위배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약속을 무엇으로 당기려고 합니까? 그 약속에 무엇을 덧칠해요. ‘나는 여기 있다. 일용할 양식은 내가 수고해서 내가 얻었다.’ 그런 식으로 다들 나옵니다. 어느 신문 칼럼에 보니 이런 말이 나와요. ‘어떤 나이 많은 친구가 자전거를 타고 산책을 나갔습니다. 그 친구가 당연히 다시 돌아올 줄 알았습니다. 그 친구는 그 길로 나가서 죽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여기 있다. 나는 자전거 탄다.’ 그러면 자연스레 그 다음에 어떤 순서입니까? ‘나는 돌아와서 씻고 잠을 잘 것이다.’ 이거잖아요. 누구 맘대로 씻고 잠을 잡니까?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참새도 하늘에서 떨어지는 법이 없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누구 맘에 달렸습니까? 하나님 소관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기본적인 창조의 은혜조차도 평소의 습관인 ‘모든 것을 내가 알아서 한다’는 그것 때문에 완전히 땜질을 해서 하나님의 선물로서의 자아, 선물로서의 ‘나’를 아예 망쳐놓았어요. 얼마나 망쳐놓았는지 자기 뜻대로 안되면 원망하고 대들고 교회 안 나오고 헌금도 안합니다. 왜 갑자기 헌금이야기가? 얼마나 헌금에 한이 맺혔으면….
우리교회도 ○○○만원 적자입니다. 얼마까지 재정이 적자가 날지 지켜보고 있습니다. 우리교회 교인들이 그만큼 믿음이 좋아요. ‘과연 얼마까지 재정이 적자로 가야 헌금을 할지 지켜보자.’ 그렇게들 하시는 것 같아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참, 재미있다.’ 교회 안 되기로 작정을 했어요.
마치 자기가 애써서 살아가는 것처럼, 하루하루 주님의 피를 밟고 있으면서 그 밟은 피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 땀을 밟고 그 힘으로 산다고 그렇게들 우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 말씀하시기를 네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 하는데 참새도 들풀도 내가 오늘날까지 키웠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내가 너희들을 키워준다.”
문제는 키워주시는 그 분을 믿지 않고 있는 거예요. 무엇으로 땜질되었다? ‘나는 여기 있다. 내 인생 내가 알아서 한다’는 이것으로 땜질되었기 때문입니다. 4천 8백만 전체, 아니 62억의 인류 전체가 모두 다 이 방향으로 갑니다. 요즘 브라질 펀드에 투자한 사람들 다 반토막 나게 되었습니다. 브라질 펀드, 베트남 펀드 대박난다는 소리 듣고 투자했다가 반토막도 못 건지고 다 날리게 생겼습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기도하기 바빠요. ‘주여, 주식 값이 오르게 하옵소서.’ 이 기도하기 바빠졌어요. 기도하려면 주기도문을 기도해야지요. 뭡니까? ‘주여,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라고 기도해야지요. ‘오늘도 내 죄를 용서해 주신 것이 감사합니다.’ 그럴 때 뭡니까? 하나님의 영광. 그럴 때 ‘하늘에서 이룬 것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입니다.
자기영광을 딱 챙겨놓고 그 뒤에 많은 종교적인 용어들로 덕지덕지 발라놔도 그것은 전부 다 가짜입니다. 십자가로부터 출발해야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이것이 블랙홀 같은 구멍입니다. 이 십자가로부터 터져 나와서 불꽃놀이가 되거든요. 위에서 터지면서 불꽃놀이 하듯이 위에서 마구 떨어지는데 이것이 바로 선물입니다.
‘여기 있다. 먹어라’ 하고 열두지파에게 선물이 주어집니다. 아무리 땅을 많이 가져도 저주받고, 땅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아도 복을 받는 것은 어디서 결정하는 겁니까? 그들의 노동력에 의해서 농사가 잘되고, 안되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레위지파가 제사를 제대로 드리면 그들의 땅이 결실을 얻어서 복을 받지만 레위지파가 제사를 제대로 못 드리면 그들은 아무리 애써도 결실을 못 얻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농사짓든 양을 치든 제일 좋은 맏물을 레위지파에게 내라는 것이 십일조였습니다. ‘주님 덕분에 살았습니다. 내가 열심히 땅을 파서 산 것이 아닙니다. 땅을 파도 땅 팔 힘은 주께서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거룩을 유지해 주니까 우리가 이렇게 용서받았습니다.’ 레위지파가 십일조를 받아서 그들의 생계를 유지할 때, 그 때 레위지파는 ‘당신들이 나에게 주었습니다.’ 이렇게 할까요?
레위지파의 상속은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님 그 자체입니다. 그러면 레위지파가 십일조를 받아 놓고는 ‘당신이 나에게 줬군요. 김 집사가 십일조를 나에게 주었군요.’ 이렇게 이야기 합니까? ‘하나님께서 저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 보면 ‘일하는 자에게 일할 수 있도록 밥은 먹게 해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고전 9:11)라는 취지의 말씀이 나옵니다.
문제는 일할 수 있는 그 이상으로 달라고 하니까 문제입니다. 결국 돌아가는 모든 것이 다 선물중심입니다. 숨어 있는 하나님께서 선물을 주시고 그 선물을 나눠주는데 그 선물이 얻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중간에 저주받으시고 승천하신 분이 계시다는 것을 지금까지 이야기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십자가가 어떻게 전쟁이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전쟁이란 총 들고 칼을 들고 해야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 어떻게 전쟁이냐, 하는 그 문제입니다. 선물의 노선을 잊지 말라고 했지요? 창세기부터 어디까지? 주님의 재림 때까지입니다. 주님의 재림도 십자가 안에 들어 있습니다.
여호수아에 보면 전쟁을 합니다. 에베소서에서 십자가가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의 이야기가 사사기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 당시 블레셋이라는 지중해 연안의 해적들이 이스라엘을 공격했는데 이스라엘의 힘이 미약해서 평지에는 못살고 산지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산지까지 쳐들어와서 공격을 해대니 이스라엘이 곤경에 처하곤 했습니다. 물론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에게 징계를 받는 모습들입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이라는 나라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안도와주시면 자력으로 블레셋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입다, 에훗, 삼갈, 삼손등 사사들이 그냥 사사입니까? 아니면 뭔가 사로잡혀 있는 상태에서 구원하는 사사입니까? 사사가 등장하기 이전에 반드시 이스라엘이 어떤 상태에 놓여져 있습니까?
그들이 사로잡혀 있고 갇혀 있습니다. 자력으로 구원이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의미란 , 거기서 총이나 칼이 나오고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라는 것들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서 네 가지가 나옵니다. 죽음을 이기고, 율법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저주를 이기는 이 네 가지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죽음, 저주, 율법, 죄 이런 것이 블레셋이고 우리는 바로 거기에서 매여서 못벗어 나는 거예요. 물론 율법은 거룩하지만 죄지은 인간이 율법을 저주스럽게 해석할 수 밖에 없기에 사로잡힐 수 밖에 없습니다. 주께서는 손수 율법에 속하지 않지만 율법아래 거하시고, 저주아래 거하시고, 죄 아래 거하시고, 악마아래 거하셔서 ‘내 백성 나와라.’ 한 것이 아니고 손수 우리 속에 들어 왔어요.
손수 우리 안에 들어왔다는 말은 우리가 기도하고 애쓴다고 구원 받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의 인생가운데서 ‘너는 죄인이야. 너는 저주받아야 돼. 너는 지옥가야 돼.’ 라는 음성으로 손수 우리에게 침투하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인생 가운데서 ‘네가 목사야? 너는 목사 될 자격도 없어. 너는 지옥가야 마땅해.’ 라는 그런 느낌, 그런 체험으로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해야 됩니다.
마치 사도바울처럼. 사도바울이 뭐라고 했습니까?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딤전 1:15) 이런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나는 잘났다. 나는 뭔가 할 수 있다. 내가 너만 못하지 않다.’ 이런 식으로 살다가 갑자기 뭔가 ‘이것은 아니잖아. 이것은 아니다. 성경에 보니까 이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성도가 아니다. 이것은 자기 과시다. 목사가 되어봐야 소용없다. 목사 되었다 해도 지옥가기는 매한가지다.’
지옥가고 천국 가는 것은 내 행동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도장이 결정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뭡니까? 내가 못하는 것, 나를 사로잡히게 한 이 저주와 악마의 목을 비틀어서 ‘그 사람을 그만 지배하라’고 목을 꺾는 더 센 승자가 있어야 합니다. 어느 교주도 ‘내가 승리했다.’ 그런 소리는 할 수 있습니다.
진짜 승리했으면 승리 값을 보여줘야 할 텐데 그 승리 값이 뭡니까?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구름타고 승천하신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안 믿었죠. 하지만 사도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믿고 그것으로 모든 것을 알았습니다. 십자가부터 부활까지 한꺼번에 다 아는 겁니다. ‘야, 이것이구나. 이게 바로 복음이고 이게 바로 주께서 원했던 모든 약속의 완성이구나.’ 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고 승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부활하고 승천하신 예수를 믿는 자는 마지막 날 주님 다시 올 때 영광중에 함께 있으리라.’ 그걸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침투한 그것인데 그것이 바로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우리에게 선물을 주신 것’입니다.
‘자, 여기 선물이다. 받아라.’ 하고 ‘나를 사로잡았다는 증거로서 너희들이 벗어날 수 없었던 그 구조와 세력을 내가 사로잡았으니 그 승리로 너희는 영생을 얻고 자유를 얻어라.’ 하고 선물을 주는 겁니다. 예수님의 은혜의 분량대로 성도들에게 주시는 겁니다. 그 받은 선물을 외칠 때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엡 4:11)다고 하는 겁니다.
이 모든 것은 누구 영광을 위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한 몸이라는 것입니다. 열두지파이지만 사실은 그 중심지파인 거룩한 레위지파 때문에 거룩한 백성이 된 거죠. 1, 2, 3 … 열두지파가 있지만 그 중앙에 있는 레위지파가 거룩하면 다 같이 거룩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목사가 되었든 교사가 되었든, 1, 2, 3이 되든, 혹은 5가 되었든지 간에 그들은 무엇을 증거 합니까?
‘나는 이렇다.’ 가 아니라 ‘우리를 이렇게 만들어 주신 거룩하신 주님을 증거 한다.’ 는 그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여러 사람, 여러 몸이 아니고 한 몸인데 각자 하는 일이 다를 뿐이다.’ 라고 합니다. ‘우리는 각자 직장이 달라서 일이 다를 뿐, 의사가 되었든 판사가 되었든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는 그리스도덕분에 구원받았다는 것을 공통적으로 고백하는 한 몸이 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11-13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그것을 에베소서 4장에서 ‘교회’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충만한 곳’ 그게 교회라고 합니다. 이것은 에스겔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에스겔에 보면 성전에서 물이 흘러서 온천지가 생명의 물바다가 됩니다. 천국의 모습입니다.
계속해서 14절에는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어린아이가 뭐냐하면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쉽게 빠지는 것이 어린아이입니다. 사람이 어떠하다고요? ‘나는 여기 있다. 하면 된다. 나도 너처럼 될 수 있다.’ 이런 사람의 유혹에 쉽게 빠집니다.
‘나도 저 인간처럼 할 수 있는데 왜 내가 저걸 안하겠어?’ 펀드 하고 주식투자 하는 사람들의 심리가 ‘지금 주식시세가 2천까지 올라가는데 남들 돈 벌 때 너도 지금 투자 안하면 바보 병신이다.’ 라고 자꾸 놀려대니까 거기에 넘어갑니다. ‘지금 강남 아파트에 투자 안하면 가만히 앉아서 손해 보는 거야.’ 이런 식으로 분위기가 흘러요.
문방구 앞에 잔뜩 몰려서 기웃 기웃 하는 아이들은 과자에 멜라민이 들었는지 뭐가 들었는지 관심도 없습니다. ‘어린이 친구, 멜라민 알아요? 캐러멜 말고 멜라민.’ 아이들은 달고 맛있으면 그만입니다. 얼마나 불량식품이 유혹적입니까? 현대인들은 달고 맛있으면 그것이 진리인줄 알고 있어요.
불교신자 같으면 또 뭐라고 합니까? ‘나는 달고 맛있는 것을 피하련다.’ 하고 머리 깎고 산으로 들어가는데 그것은 또 뭡니까? 십자가가 없고 자아가 살아 있는 이상 절에 들어가서 중이 되든지 목사가 되든지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아무 소용도 없습니다. 선물이고 그릇입니다. 선물의식과 그릇의식이 창세전부터 계속 흘러 내려온 겁니다.
이제 결론을 맺겠습니다. 여러분, 맘대로 하시고 멋대로 사세요.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선물을 받아서 병원에서 암 투병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선물? 암이라는 선물. 죽을 때까지 암 투병하는 그것이 자기의 할 일입니다. 그러다가 죽겠지요. 그것이 자기가 받은 선물입니다.
왜? 자기 그릇 속에 암이 들어온 것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돌리는 겁니다. 상당히 잔인해 보이지요? 하지만 그 계약서 마지막 도장 자리에는 그 사람이 암 투병 한 것으로 도장을 찍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피가 그 계약서에 도장으로 찍음으로서 새 언약 계약서는 완성이 되고 그 새 언약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는 암 투병 보다 더 무서운 저주까지 받았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인생은 저주까지 올라갔다가 십자가 부활을 통해서 승천과 주와 함께 영광중에 나타나는 그 경로, 주님 가신 그 길, 그 본을 좆아 성령을 통해서 이제는 우리가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미 구원받은 자로서.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린아이 같이 잘도 남의 유혹에 빠지고 선악과 따먹은 그 심정으로 달고 맛있고 봄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것에 잘도 빠집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은 멀리하고 외면하고 무시해버리고 모멸하고 모독하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희들 선물 받고 난 뒤에 세상을 넓게 보고 하늘과 땅 끝 까지 다 보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다 봐서 우리가 이미 죽었지만 사실은 살아 있는 사람인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http://blog.daum.net/yyyhp/이근호 목사 강해/오용익 목사 녹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