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가 내게 준 선물
문 남선
한 20일 정도 하루에 두 번씩 버스를 타면서 좋은 시간들을 많이 가졌다.
생일 선물로 둘째 아들이 사준 수필집을 미안하게도 몇 달째 읽지 못했었는데 그 책과 또 몇 권의 책을 더 읽었다. 거기다 차 안과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보고 즐거운 상상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생활의 활력소였다. 일부러 한 정거장 전에 내려서 걷는 일도 흥미로웠으며 어쩌다 길거리에서 싸우는 사람들을 볼 때면 그것 역시 사람 사는 모습만 같아 흥미롭기 조차했었다.
오늘도 집 앞 대로에서 파란색의 506번 버스를 타고 남대문 근방까지 갔다가 교육이 끝난 후 역시 파란색 버스를 타고 집으로 왔다. 집에 도착한지 4시간이 지났는데도 가슴 가득 잔잔한 기쁨이 번지고, 핸드폰을 열었다 닫으면 입가에 웃음이 저절로 맴 돈다. 버스 안에서 생긴 작은 행복 바이러스에 감염된 탓이다.
민망한 얘기지만 난 10여년 넘게 대중교통보다는 거의 승용차를 이용하고 또 선호해 온 편이다. 물론 여기엔 많은 기동성을 요구하는 나의 일이 원인인 탓도 있지만. 그런 이유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버스 요금이 얼마인지도 몰랐고, 버스를 탈 때와 내릴 때 두 번 단말기에 체크해야하는 교통카드 사용법 또한 몰랐다. 더구나 작년 여름부터 바뀐 서울시의 버스 체제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었기에 내게는 버스 타는 일이 마치 서울 나들이를 처음 한 시골 아낙네처럼 생소하기만 했다.
그래서 이틀은 교육장이 있는 남대문까지 승용차를 이용했다. 그런데 아침 의 교통체증은 말 할 것도 없고 시내 한 복판의 주차난 또한 심각했다. 고민 끝에 교통카드란 걸 산 후 인터넷으로 서울시의 버스에 대해 조회하기 시작했다. 그 동안 교통수단으로 승용차만 고집했기에 나와는 상관없는 일인 줄 알고 확 바뀐 버스체제에 대해 신경조차 쓰지 않았었다.
그런데 버스의 색깔과, 버스 번호의 숫자만으로 승객이 버스의 출발지와 도착지등을 쉽게 알아볼 수 있다는 사실을 이번에야 확실히 알았다. 버스 색깔에서 시간 절약의 효율성을 판단을 할 수 있다는 점과 버스의 번호 앞자리가 출발점을 의미하기에 숫자 5가 있는 버스를 타면 반드시 우리 동네를 거친다는 사실도 알았다.
내가 타는 파란색 버스는 도시 외곽과 도심의 주요 축을 연결하며 신속성이 있다는 간선버스다. 둘째 아들은 주로 초록색 버스를 많이 탄다고 했다. 간선버스와 지하철의 연계 환승하는 버스다. 흥미롭던 차에 김포에 사는 조카에게 어떤 색깔의 버스를 타냐고 전화해봤다. 주로 광역버스인 빨간색 버스와 지하철을 이용 한다고 했다. 나머지 노란색 버스는 도심과 부도심 내에서만 움직이는 순환버스란다. 이러한 기본적인 윤곽을 알고 나니 버스 타는 일이 편하게 마음에 와 닿으며 주유비 절감이라는 이중의 효과도 있기에 왠지 마음이 뿌듯해졌다.
예전엔 우리 집에서 남대문까지 가는 시간이 아무리 못 걸려도 35분이상은 걸렸던 것 같은데 지금은 많이 걸려도 25분을 넘지 않는다. 그동안 차가 줄었을리는 만무하고 달라진 노선 개편이 교통체증을 어느 정도는 원활하게 하고는 있는 모양이다.
오늘은 교육 마지막 날이라 오후에 주변의 남대문 시장을 한번 들러보기로 했다. 주차의 불편함을 이유로 몇 년간 가보지 못했던 남대문 시장은 그야말로 생동감 넘치는 삶의 현장이었다. 여기저기서 손님을 부르는 상인의 소리, 상품 선전하는 소리, 흥정하는 소리…시장은 왁자지껄한 소란함 속에서 강한 생동감으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배도 고프지 않았는데 왠지 시골 장터의 맛을 느끼고 싶었다. 식사 후 돈 계산을 할 땐 인사 한 마디 없었지만 문 밖에까지 나와서 과한 친절로 호객행위를 하던 음식점에서 장터국수 한 그릇을 시켰다. 어린 시절 시골의 5일장이 서는 날이면 어김없이 아버지는 나를 소바(일본식 면 요리)집이란 곳을 데리고 갔다. 커다란 가마솥에서 연신 퍼 올리던 노란색의 긴 면발! 늘어진 수양버들 밑에 놓인 평상에서 아버지는 늘 그 소바집 음식을 칭찬하셨다. 시장통의 국수 한 그릇이 잊고 살던 아버지와의 추억을 새롭게 한다. 점심을 먹은 후 신발가게에서 만 원짜리 여름샌들 한 켤레를 사고 그 외 몇 가지 생필품을 더 샀더니 양손 가득 짐이 한 보따리씩이다.
정류장에서 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중 반대편으로 가던 버스의 몸통에 선명하게 써진 광고 문구가 눈길을 끈다. 대한민국에는 OO은행이 있습니다 하는 글귀와 그 은행의 로고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이곳은 대한민국이고 또 이 땅엔 다른 은행들도 많은데 왜 굳이 대한민국이라는 단어를 붙였을까하는 의문이 생겼다. 곰곰 생각해보니 그건 곧 소중하고 친한 친구 같다는 뜻을 전달 하려함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즉시 남편의 핸드폰에 그 이색적인 선전 문구를 쳐서 날려 보냈다. 잠시 후 벨이 울리고 남편이 말했다. 큰 아이에게 <우리 집에는 태경이가 있습니다>라는 문자를 보내란다. 태경이는 무척 총명했던 녀석이었지만 현재는 우리 부부나 자기 자신마저도 수용하기 힘든 현실에 놓인 큰 아들 이름이다. 모든 기대치를 깨트리고 가족들을 힘들게 한 이유야 구구절절이 밝힐 수는 없지만 오랜 시간 큰 애 때문에 참 가슴앓이를 많이 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되돌릴 수도 없는 과거인 것을. 그리고 인생은 42.195 KM의 긴 마라톤이 아닌가? 이제 겨우 10KM 남짓 뛴 아이를 붙들고 잘 달리니 못 달리니 할 이유도 없을 것 같다. 완주 시까진 아직 3/4이상이 남았는데 말이다. 그저 남은 길을 잘 달릴 수 있게 아들의 입장이 되어 늘 같이 달리는 기분으로 격려 해주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그리고 주변의 상황을 잘 설명하여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인도 해주는 것이 아들의 훌륭한 인생 완주를 도우는 길이 아니겠는가?
남편 말을 듣고 큰 애에게 문자를 보냈다. 엄마는 이 세상에서 처음 너를 만났던 날보다 행복 했었던 적은 아직 한 번도 없었단다 하는 문자와 우리 집에는 태경이가 있습니다. 태경이는 이름자의 뜻처럼 크게 빛날 아들입니다 라고 문자를 보냈다.
핸드폰으로 온 아들의 답이다 엉? 엄마! 혹 카네기의 인간관계론 읽었어? 감동시키는 솜씨가 너무 능숙해! 공부 열심히 할게라고. 순간 눈물이 피잉 돌았다. 그래 넌 내 목숨보다도 귀중한 보배야. 본의 아니게 너를 팽개치다시피 방치했던 많은 시간들보다 몇 배나 더 많은 신뢰와 사랑을 쉼 없이 줄게. 사랑을 듬뿍 받고 또 온 몸으로 느끼며 자란 자식이 행여나 엄마 마음을 아프게 할리는 없지…
오늘은 찬란한 기쁨을 얻은 날이다. 버스를 타지 않았다면 얻을 수도 없는 소중한 에너지를 얻은 날이다. 이제 나는 자주 버스를 탈 것이다. 나만의 공간인 승용차 보다는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공유하는 즐거움을 자주 누릴 것이다. 그리고는 순간의 좋은 느낌들을 친근한 내 주변 사람들에게 자주 문자로 보내기도 할 것이다. 작은 사랑의 바이러스가 멀리멀리 모두에게 전염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2005년 6월 15일
첫댓글 고슴도치 엄마 눈에 세상에서 제일 잘난 듯한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느새 그들은 세상에서 젤루 속을 썩이는 듯한 아이로 변해 있었습니다. 두 녀석을 제 자리로 옮겨놓기 위한 그 엄마의필사적인 노력이 한 5년 정도 된 듯합니다. 한 녀석은 거의 원 위치를 찾은 듯하지만 또 한 녀석은 마라톤의 중간 대열에서 아직도 열심히 달리고 있는 중입니다. 다음 세상이 있다해도 저는 아직은 저 아이들의 엄마는 되고 싶은 생각이 아직은 없습니다. 또 다시 남편을 만나야 할 것 같아서....
삶의 새로움을 찾아 항 상 보여주시는 서비스를 닮고 싶습니다. 봄날에는 새로운 것들 찾아 볼 것이 많을 것 같습니다. 신선함에 감사합니다
우리 삶에도 사계절이 있습디다. 너무나 바람이 많이 불고 추웠던 겨울! 여러해 동안의 길고 길었던 겨울을 지나기가 정말 힘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겨울이 다 지나고 나니 또 다른 봄이 옵디다. 남극이나 북극처럼 내 인생의 봄날은 끝이 나고 봄이란 건 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긴 겨울의 터널 끝에는 그렇게 햇살고운 봄이 있었어요. 지금은 모든 것이 감사합니다. 그 혹독한 겨울탓에 타인의 겨울 추위도 이해하게 되고 저의 봄을 타인에게 나눠 줄 수도 있고... 그 겨울 지나고 나니 정말 고맙게도 필력이 무쟈게 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겠더라구요.
두 아들을 보니 밥을 먹지 않아도 배부름 같이 든든해 보입니다. 혹독한 겨울을 지낼수록 봄 꽃은 더욱 아름답게 핀답니다. 님의 사랑 바이러스가 제게도 전염되기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그날 시청족으로 나오실거죠? 그대 팍팍 전염시켜 드릴께용. 그라고 보이께 지가 얼음을 뚫고 나온 복수초같네유. ㅋㅋㅋㅋㅋ
한별님의 말에 많이 공감. 사랑 바이러스란 말이 참 곱군요.
지가 그럼 오늘부터 요 까페에 바이러스를 많이 전염시키도록 노력하겠심니더.
사랑 바이러스, 어성전에도 전염되면 좋겠네. 우리 풍실이에게도.ㅎㅎㅎ
어머! 풍실이. 사랑스런 풍실이 이름만 들어도 금방 제 얼굴에 함박꽃이 피어요. 폼잡고 잇던 그 의젓한 모습!!!! 그리워. 우리 풍실이! 들미소님 보다도 난 풍실이가 더 좋아요.ㅎㅎㅎㅎㅎ 이건 참말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