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월 28일)
춘천 서면 박사마을 소개
춘천시 서면 현암리에는 박사마을 선양탑이 있습니다.
선양탑에 새겨진 이 마을 출신 박사들의 명단을 보면 이 작은 마을에서 무려 138명의 박사가 탄생했습니다. 그리고 명단을 새겨넣은 대리석의 옆면은 비어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나올 박사들의 명단을 채워 넣기위해서 비워둔 것입니다. 명단을 살펴보면 낯익은 한승수 전 국무총리의 이름도 보이는데, 이 마을에서 3번째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선양탑에는 박사마을답게 박사 모자를 올려놓았고, 또 탑 하단의 대리석면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있습니다.
박사마을 서면
춘천에서는 아침햇살을 가장 먼저 받는 곳
바로 눈앞에ㅡ 시가지가 펼쳐져있지만 북한강이 가로막아 도도히 흐르고, 뒤로는 고산 준령이 솟아 교통이 늘 불편하기만했던 곳, 그래서 다른 지역 사람들보다 더 부지런했고, 참을성과 진취성이 강했던 주민들, 자신들만은 보다 살기 좋은 곳, 더 큰 꿈을 펼칠 수 있는 넓은 세상으로 내보내기 위해 힘겨워도 더 많이 가르치고 또 배워야 했기에 어느 곳 보다도 교육열이 높았던 마을,
학사금 마련을 위해 어머니들은 산나물과 채소를 광주리에 이고 내다 파느라 하루해사 짧았고, 아버지들은 원예작물 재배에 힘써 뒷바라지하기를 낙으로 삼으니, 앞집, 뒷집, 이 동네 저 마을에서 각 분야의 우수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으며 그 전통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렇습니다.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 큰 인물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런 박사마을이기에 <박사마을 회보>도 발행하고 또 후손들에게 계속 박사가 나올 수 있도록 장학사업도 펼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때 이곳 박사마을이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탈 때에는 신혼여행지로 인기가 많았습니다. 박사마을의 좋은 기운을 받아서 2세도 박사가 되기를 기원하는 바램이 커서이겠지요.
선양탑 뒤에슨 독립투사 이준용, 한용섭 선생 기념비도 있습니다.
기념비에는 이준용 선생이 옥중에서 한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땅은 내 땅이로되 나라를 잃었으니 주인은 나그네 되고 나그네는 주인이 되었네.
내 모든 것 혼을 부어 자주 독립 밑거름하니 광복의 그날이 오면 춤을 추세 춤을 추세.
이준용 선생은 이곳 서면 출신이지만 한용섭 선생은 사북면 출신으로 이곳 서면 방동리에 정착하여 배일사상을 펼쳤습니다. 이준용 선생은 동학 농민의병군에 참여하여 의병활동을 펼쳤을 뿐만 아니라, 토지 2만여평을 팔아 독립운동의 자금으로 헌납했다고합니다. 그리고 삼일만세운동 때에선 1919년 3월 28일 천도교 춘천교구장으로 만세를 불렀는데, 이를 진압해야 할 헌병보조원 하현도 이에 감동하여 총을 버리고 같이 만세를 불렀답니다.
선생의 인품을 알수 있는 이야기지요. 이준용 선생의 활약상에 비해 한용섭 선생에 대해서는 홍천읍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고 간단하게만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이준용 선생이 토지 2만여평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댈 정도면 거부였을텐데, 선생도 민초들이 들고 일어난 동학혁명에 참여하였습니다. 그런분이기에 천도교 춘천교구장까지 역임했습니다. 춘천에는 이곳 말고도 두분 선생을 기리는 망제탑이 퇴계동에 있는 국사봉(204m) 정상에 있습니다. 고종이 승하하였을 때 두 분이 주도하여 춘천의 선비들이 국사봉에 올라, 고종의 승하를 애도하는 망제를 올렸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