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영애가 일제시대와 1950년대까지의 옛 대중가요를 리메이크한 음반을 내겠다고 상의를 해왔을 때,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을 지었다, 한영애가 누군가. 우리나라 가수 중 가장 이국적 분위기의 가수 아닌가. 주류 대중가요가 적당히 한국의 일반 대중들의 취향에 맞추어져야 함으로써 어떤 장르든 어쩔 수 없이 한국사람의 질감을 많이 묻힐 수밖에 없는 것에 비해, 한영애 같은 언더그라운드 가수는 자신이 바탕으로 삼는 양식을 고집스럽게 고수할 수 있다. 그가 가장 블루스적인 가수라고 불린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한국인들은 잘 소화하지 못하는 외래 양식을 한국인답지 않게 잘 소화한다는 의미이다. 그의 지속적인 인기는 놀라운 가창력과 작품 해석력이 기인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지만, 다른 한편 그의 독특한 이국성에 빚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한영애가, 낡고 촌스럽기 그지없다고 느껴지는 일제시대 대중가요를 부르고 싶다니! 천하에 한영애도 나이가 드니 별 수 없군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요즘 10, 20대들은 전혀 믿지 않겠지만, 한영애와 내가 속해 있는 40대야말로 어찌 보면 가장 반(反)트로트적인 태도를 지녔던 세대이다. 1970년대 청년문화, 포크송 세대는 일제시대의 감수성과의 깨끗한 절연이 아이덴티티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트로트나 신민요만 나오면 무시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버리던 세대, 트로트를 희화화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었던 세대가 이들이었다. 그러나 이들도 30대 후반을 넘어서면서, 어느 순간 일제시대의 옛 대중가요가 가슴을 치고 들어오는 경험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아마 한영애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지나치게 단순하고 일본 냄새가 풀풀 나며 청승스럽기 이를 데 없다는 것 이외에 다른 어떤 감흥도 일으키지 못했던 노래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대중가요에서는 도저히 만들어내지 못하는 어떤 삶의 느낌을 정확하게 포착해내어 정갈하게 다듬어낸 노래라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 단순함과 청승스러움의 심연을 감지하고, 그것들이 무시할 수 없는 공력의 산물임을 알게 되는데에까지 참으로 긴 시간이 필요했다.
이 음반은 수십 년 이국적인 양식에 몸을 담갔던 한 가수가, 오랫동안 무시하고 있었던 옛 선배들의 대중가요와 적극적인 대화를 시도한 귀중한 노력의 산물이다. 선곡에서부터 소프라노 윤심덕과 극작가 김우진의 동반투신자살로 유명한 1926년 <사의 찬미>부터 <목포의 눈물>, <애수의 소야곡>에 이르기까지 일제시대 대중가요의 대표곡들이 망라되고, 상업적 대중가요는 아니지만 일제시대와 해방 직후에 애창되었던 두 편의 노래까지 포함되었다. 우리나라 대중가요는 외래적인 음악언어를 채 소화하지 못해 외국곡에 한국인의 창작 가사를 붙인 이른바 유행창가 <희망가>, <사의 찬미> 등으로부터 시작하여, 1920년대 말 <강남달>(원제 <낙화유수>) 등에서부터 한국인의 손으로 작사, 작곡된 대중가요가 등장하기 시작함으로써 역사가 열리게 된다. 지금 트로트라고 부르고 있는 일본에서 유입된 양식의 노래는 1930년대 초반부터 시작되는데 이애리수의 <황성 옛터(원제 <황성의 적>)가 그 대표적인 곡이라 할 수 있다. 고복수의 타향살이(원제 <타향>), <짝사랑> 등을 거쳐 1935년 즈음에 이르러 4박자의 단조 트로트라는 일제시대 대표적인 양식은 안정된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일제시대 최고의 가수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은 이를 대표하는 작품이며, 1930년대 말에 이르러 이난영과 쌍벽을 이루는 남자 가수 남인수가 <애수의 소야곡>으로 화려하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한편 낯선 외래 양식이었던 트로트와 달리 낯익은 어법을 구사하는 신민요는 초기 강석연의 <오동나무>, 이애리수의 <에라 좋구나> 등으로부터 시작하여 왕수복, 선우일선, 이화자, 이은파, 박부용 등 기생 출신 가수들의 활약과 함께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되어 <노들강변>, <관서천리> 등의 인기곡이 생겨나게 되는데, 특히 평양 기생 출신 선우일선을 스타로 만든 <꽃을 잡고>는 시인 김안서(김억)의 가사에 일본 유학파 작곡가 이면상(<울산 아가씨> 작곡자로 월북)이라는 두 엘리트 예술인들의 야심찬 기획의 산물로 주목할 만하다. 이렇게 보면 이 음반은 초기 대중가요사를 충실히 공부한 결과물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러한 초기 대중가요, 특히 트로트 가요는 지금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대도시의 신교육 받은 젊은 층들이 좋아하는 새롭고 참신한 노래였고, 창작자들 역시 최고의 엘리트들로 가곡, 동요 등을 만드는 사람들과 많은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일제시대 동요로 아직까지 애창되는 <따오기>와, 음악교사가 창작한 가곡이었으나 후에 지리산 빨치산들에 의해 애창되어 오랫동안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져오던 <부용산>의 선곡은 그런 기준에서였다고 보이는데, 특히 <부용산>은 악보에 근거해 정확하게 불러 기록한 최초의 음반이라는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렇게 학구적이고 진지한 태도로 옛 가요에 접근했기 때문에, 이 음반은 향수를 자극하는 리메이크들과는 달리 과거의 노래와 현재가 적극적으로 대화하고 충돌하는 양상을 보인다. 그다지 대중적이지 않았던 <꽃을 잡고>의 매력적인 선율을 강렬하게 돋보이게 하며, 익숙한 <애수의 소야곡>을 착잡한 분위기의 화성과 목소리로 감싸안았다. <따오기>의 정감어린 분위기도 아름답거니와, 원곡의 나른한 낭만성을 제거하고 극적으로 죽음에 다가가는 절망의 비장함으로 정리해낸 <사의 찬미>는 전율을 느끼게 한다. 곡마단 음악 분위기로 편곡된 다른 곡과 함께 무반주로 부른 <타향살이>에서는 시대를 뛰어넘어 호소력을 발휘하는 가사를 생생하게 만날 수 있다.
이 음반에서 한영애는 옛 선배와의 대화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음을 고백한다. 입으로 불러보고서야 이렇게 정갈하고 격조 있는 노래인 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음반에 참가한 젊은 음악인들이 옛 가요와의 대화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은 흔적도 역력하다. 일제시대 노래 중 가장 화려하고 대중적인 두 곡 <애수의 소야곡>과 <목포의 눈물>을, 한 곡은 과감한 편곡으로, 다른 한 곡은 아예 원곡의 편곡 스타일을 고스란히 따르는 방식으로 정리한 것도, 원곡이 쉽사리 건드릴 수 없는 수준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한 것이라 보인다. 또 아무래도 블루스 양식을 쓴 황금심의 <외로운 가로등>이나 이바노비치의 곡인 <사의 찬미> 등 서양적인 악곡을 다루어내는 것이 능란한 것에 비해, 국악적이거나 트로트적인 단순한 선율 속에 들어 있는 독특한 느낌들을 포착하여 새롭게 만드는 것은 힘에 부쳐 보이는 면도 있다. 선배들과 한판 겨루기를 하면서 우리 세대의 공력이 어느 정도인지, 우리가 잘 하는 것과 못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가늠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한두 곡의 성패를 따지는 일은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 성과는 다시 오늘날 수많은 대중들이 옛 노래와 어떤 대화를 나누느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므로. 하지만, 역사의 완강함을 새삼 느끼는 이 시대에, 과거의 빛나는 작품들과의 진지한 대화란 그 자체가 의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