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말씀: 마태복음 15장 21절부터 28절까지(마가 7: 24~30)
일 시: 2002년 10월 27일 오전예배
장 소: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신성교회
주제 및 작성동기: 칭찬받는 믿음에 대한 5번째 설교이다. 한 가나안 여자, 유대인들로부터 천대 받고 있는 한 이방여자의 믿음에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최선이 안 되면 차선이라도 선택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매우 매혹적인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최선이 아니더라도 차선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을 선택하고 만족하게 살아가는 가 보다.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 현실성이라고 하는 요소는 선택의 가장 중요한 가치관으로 작용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맞는다거나 혹은 맞지 않는다거나 하는 것이 결단의 가장 중요한 잣대로 작용하고 있다는 말이다. 한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러한 잣대는 늘 적용되어 왔다. 이 사람이 이상적으로는 맞지만 그러나 현실적으로 당선 가능성이 높지 않기 때문에 이왕이면 당선될 수 있는 사람에게 힘을 몰아주어서 일을 하도록 차선을 택하는 풍토가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과연 차선이 선이 될 수 있을까? 혹시 최선이 아니더라도 차선을 택할 수 있다는 현실성을 바탕으로 하는 선택이 우리로 하여금 최선을 스스로 버리게 만들거나 혹은 최선이 현실화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차선의 선택은 옳은 것인가? 이런 질문을 갖고 본문에 나타난 가나안 여인의 칭찬받은 믿음을 살펴본다. 최선이 아닌 차선의 선택이 믿음의 세계에서도 통용되어지는 것일까?
한국에 유시민이라고 하는 한 시사평론가가 있습니다. 전 MBC 100분 토론의 진행자 이며 인터넷 신문인 오마이뉴스(www.ohmynews.com), 프레시안(www.pressian.com) 등은 물론 경향신문, 한국일보 등 일간신문지에 인기리에 칼럼을 게재 하던 분입니다. 그 분이 지난 7월 갑자기 절필 선언을 하면서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천명하고 그는 노후보의 대통령 당선을 위해 일하기 위해서 당분간 글을 언론매체에 글을 게재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와 가진 인터뷰에서 한 기자가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여론 조사에서 노무현 후보는 이회창 후보에 비해서 당선 가능성이 현저히 낮게 나옵니다. 유시민 씨가 노 후보를 지지하지만 현실적으로 당선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괜한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까?” 그가 대답합니다. “당선 가능성만을 보고 표를 주는 것은 성숙한 정치를 바라는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잘못된 행동입니다. 당선 혹은 낙선이라는 현실적 기준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미래한국을 건설한다는 희망이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지금까지 한국의 유권자들은 될 사람(당선 가능성 높은 사람) 밀어주자 라는 사고방식을 많이 가졌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많이 변했습니다. 나는 비록 당선 가능성이 없다고 하더라고 노 후보를 지지합니다. 그것은 미래의 희망, 성숙한 한국정치를 향한 지지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또 시사칼럼을 그만두면서 쓴 마지막 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12월 19일 밤을 이회창씨의 대통령 당선을 전하는 텔레비전 뉴스를 보면서 화풀이 소주나 마시면서 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설사 그런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공화국 시민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면 후회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시사카페'의 문을 닫습니다. 해설자의 자리를 버리고 관중석으로 들어가 페어플레이를 격려하고 반칙을 응징하는 함성을 조직하는 데 힘을 보태겠습니다. 너그러운 이해를 바랍니다.”
제가 장황하게 유시민 씨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유시민 씨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가치관을 제시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 현실성이라고 하는 요소는 선택의 가장 중요한 가치관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맞는다거나 혹은 맞지 않는다거나 하는 것이 결단의 가장 중요한 잣대로 작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가치관을 가장 잘 대변해 주고 있는 말이 바로 “최선이 아니면 차선이라도” 입니다. 우리들은 곧잘 ‘최선이 아니면 차선이라도’ 라는 생각을 가져 왔습니다. 사실 최선이 안 되면 그보다 조금 나쁘지만 차선이라도 선택해야 한다는 이야기 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최선이 아니더라도 차선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을 선택하고 만족하게 살아가는 가 봅니다.
한국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러한 잣대는 늘 적용되어 왔습니다. 이 사람이 이상적으로는 맞지만 그러나 현실적으로 당선 가능성이 높지 않기 때문에 이왕이면 당선될 수 있는 사람에게 힘을 몰아주어서 일을 하도록 차선을 택하는 풍토가 주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연 차선이 선이 될 수 있을까요? 혹시 최선이 아니더라도 차선을 택할 수 있다는 현실성을 바탕으로 하는 선택이 우리로 하여금 최선을 스스로 버리게 만들거나 혹은 최선이 현실화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 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런 의미에서 유시민 씨의 결단은(그것이 우리들에게 옳지 않다고 생각되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현실적인 차선을 포기하고 나름대로의 최선을 선택하고 있기에 우리에게 타협하지 않는 또 다른 가치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차선의 선택은 옳은 것인가? 이런 질문을 갖고 본문에 나타난 가나안 여인의 칭찬받은 믿음을 살펴본다. 최선이 아닌 차선의 선택이 믿음의 세계에서도 통용되어지는 것일까?
오늘의 본문은 가나안 여자라고 하는 한 이방여자와 예수님과의 만남의 이야기입니다. 딸이 병을 앓고 있는 이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 딸의 병을 고쳐 줄 것을 간청하나 그러나 예상외로 예수님으로부터 냉대를 받습니다.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수모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여인은 그런 것에 아랑곳 하지 않고 집요하게 예수님에게 매달립니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수모와 모욕을 넘어서서 딸의 치유사건을 이루어 내고 맙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여인을 향하여 ‘믿음이 크다’라는 칭찬합니다. 도대체 이 여인의 믿음은 어떤 모습이었기에 ‘큰 믿음’ 일수가 있었습니까? 과연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서 무엇을 보셨기에 ‘큰 믿음’ 이라고 칭찬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의 본문에 나타나는 여인은 그 여인을 둘러싸고 있는 현실적인 문제, 이방인과 유대인의 만남 혹은 그가 당하고 있는 수모와 모욕적인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이 여인에게서는 고집스러운 모습이 보여지기도 합니다. 다른 어떤 것과 타협하지 않는 현실을 무시하는 모습이 보여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 이 여인은 척박한 현실과 수모를 견디며 흔들림 없이 예수님에게 매달릴 수 있었습니까? ‘아이들이 먹는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라는 모욕을 주는 예수님, 어쩌면 그녀를 실망 시켜 줄 수 있는 환경임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그녀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모습을 보여 줄 수 있었을까요? 그녀는 흔들림 없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어떠한 어려운 환경 앞에서도 그리고 포기하기에 충분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다시 말하면 최선을 포기하고 현실과 타협함으로서 차선 혹은 다른 방도를 찾기에 충분한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흔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발견한 큰 믿음은 바로 이러한 흔들림 없이 최선을 향하여 꿋꿋하게 나아가는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그녀는 예수님으로부터 두 번의 모욕을 당합니다. 첫 번째는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다”라는 말을 통해서 입니다. 두 번째 당한 수모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개들에게 먹을 것을 줄 수는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관심은 왜 예수님이 그녀에게 이러한 혹독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가가 아닙니다. 우리는 가나안 여자가 자신의 생각을 포기할 수 있을 만큼 상황이 어려워 졌다는 것에 주목합니다.
그녀는 이러한 상황에서 말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어쩌면 비굴하게 들리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정황을 보면 이 말이 결코 비굴하게 들리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굽히지 않는 그녀의 의지, 흔들리지 않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엿보이는 말입니다. 그녀의 이 같은 흔들림 없는 믿음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믿음의 진지성입니다.
사람은 자신이 무엇을 믿는가에 대하여 진지해야 합니다. 믿음은 단순한 지식이나 이성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믿는 것에 자신의 삶을 걸 수 있을 때 비로소 올바른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에 대한 진지성과 연결되는 부분입니다. 믿음은 자신이 바라는 것에 대하여 얼마만큼의 진실성을 가지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자신의 믿음을 형상화 시키는 것이 바로 진지성입니다.
히브리서는 믿음에 대하여 말하면서 이렇게 정의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바탕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히 11;1) 스페인어 번역: Ahora bien, la fe es la garantia de lo que se espera, la certeza de lo que no se ve.
영어 NIV: Now faith is being sure of what we hope for and certain of what we do not see.
다시 말하면 믿음이라는 것은 바라는 것들이 확실히(certeza, certain. be sure) 이루어질 것을 보증해(garantia, guarantee) 주는 담보물(garantia, guarantee)과 같은 것입니다. 보증이나 담보라고 하는 것은 경제적 용어입니다. 특히 돈과 관련된 것으로서 돈을 빌려 간 사람이 반드시 돈을 갚을 것이라는 확신을 줄 수 있는 것이라야 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담보물이나 보증은 동산 보다는 부동산을 선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움직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흔들림이 없는 진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담보물이 진지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돈을 빌려 주지 않으려고 합니다. 믿음은 바로 우리가 바라는 것들에 대한 담보입니다. 그래서 믿는 바에 대하여 진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믿는다고 하면서 속으로는 반신반의하는 사람들은 사실상 믿음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에 대하여 진지하지 않는 사람들은 조그마한 어려움 앞에서 금방 흔들리고 맙니다. 작은 위기가 닥쳐와도 동요하고 자신이 믿고 있는 바에 대하여 의심합니다. 그리고 금방 세상과 타협하고 차선을 택합니다. 그러나 차선을 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은 애초부터 그가 자신이 믿고 있는 바에 대하여 진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 민주당의 김민석 전 의원이 민주당을 탈당하고 정몽준 의원의 당으로 가고 말았습니다. 그 일은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특히 80년대 학생운동을 함께 하던 386 출신 개혁성향의 정치인들에게 허탈함을 주었습니다. 이 사건을 보고 서울 명동의 향린 교회 교인 한분이 이런 글을 올렸습니다.
김민석군이 학생운동을 하고 감옥에 있을 때 그의 어머니는 향린교회에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신 적이 있어요. 민석이가 앞으로 이철같은 정치인쯤 되지 않겠느냐는 말에 매우 불쾌해 하고 있다고 순수하고 의롭게 민주화운동을 하는 자신을 제도권에 들어간 기성정치인인 이철같은 사람에 비유하는 것이 못 마땅 하다는 거였지요. 같이 민주화운동을 했어도 이철과는 다른 깨끗하고 타협하지 않는 길을 걷겠다던 김민석, 이제 이철은 돈 많은 여인과 재혼을 하고 돈 많은 정몽준과 함께하는 돈에 둘러쌓인 정치인이 되었고, 이철을 비웃던 김민석이는 배신자니 철새니 하는 소리를 들으며 선배 이철과 같은 길을 걷는 정치인이 되었습니다 386운동권이니 정치사형수니하는 아련한 추억을 뒤로하고 www.hyanglin.org 게시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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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허탈해 하고 실망을 감추지 못하고 있을 때 김민석 씨는 다음과 같은 탈당의 변을 남겼습니다.
3김 시대를 극복할 새로운 정치질서의 형성과 민주평화 개혁세력의 대선 승리, 민주 정통성의 보존과 계승을 위해 신당에 참여키로했다. 이 길이 민주평화개혁세력의 후보단일화를 통해 대선 승리를 이루기 위한 현실적인 마지막 대안이라고 확신한다. 잠시 헤어져 크게 하나가 된다는 각오로 민주당을 떠나며 후보 단일화는 대선 막바지까지 계속 추진돼야 한다. 민주평화개혁세력과 신당, 정몽준 후보는 새로운 시대의 흐름을 타고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그의 표현 그대로 현실적인 대안을 찾아 떠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왜 그는 이런 일을 하게 되었을까요?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는 것은 그가 386 정치세대로서 개혁적인 인물의 선두주자로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그가 이런 행동을 하게 된 것은 그가 자신의 믿음에 대하여 애초부터 진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호박에다 줄만 친다고 수박이 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을 합니다. ‘젊었을 때는 정의롭게 살려고 하지만 그러나 점차 나이가 먹어가고 현실을 알게 되면 다 변하게 마련이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삶을 살아갑니다. 나이가 들면서 현실과 타협하고 최선보다는 차선을 택하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믿음에 대하여 진지하자 않았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가 믿음에 있어서 진지하였다면 그렇게 흔들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는 여인은 자신의 믿음에 대하여 진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예수님의 치유의 능력과 온 세상 사람들을 향한 그의 넓은 사랑에 대하여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그녀의 믿음은 누가 보아도 진지한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5그 믿음에 자신의 삶을 걸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의 믿음이 진지하였기에 그녀는 예수님의 이해할 수 없는 차가운 태도 혹은 그녀를 향한 수모와 모욕에 대하여 실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어려움 앞에서 그녀는 현실적인 대안을 찾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잠시 헤어져 후일 크게 하나 된다는 차선을 택하지 않았습니다. 그녀에게 유일한 것은 예수님을 향한 믿음의 진지성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녀에게 흔들림이 보여지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이러한 진지성이 있습니까? 과연 우리는 가나안 여인처럼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 있어서 진지합니까? 어떠한 수모와 모욕 앞에서도 그리고 앞이 안 보이는 캄캄한 현실 속에서도 우직하게 최선을 고집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믿음이 진지하면 할수록 우리의 믿음은 흔들림이 없을 것입니다. 그녀가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것은 이 같은 믿음의 진지성으로부터 비롯되는 흔들임 없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한국교회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에서 흔들림이 없습니까? 예수님의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섬김을 받으려고 하면 먼저 섬기는 자가 되라 라고 하신 예수임의 가르침에 진지합니까? 그 가르침은 현실과는 많이 차이가 있으니까 실천하기 힘들다고 생각하면서 차선을 택하는 것은 아닙니까?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고 한 가르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r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네 눈 속에는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남에게 네 눈에서 티를 빼내 줄 터이니 가만히 있거라 하고 말할 수 있겠느냐. 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래야 그 때에 눈이 잘 보여서 남의 눈에서 티를 빼 줄 수 있을 것이다”라는 주님의 가르침이 우리의 삶에서 어떤 무게를 가지고 있습니까? 진지함 보다는 현실성이 중요시 되는 요즘과 같은 사회에서 그리고 최선보다는 차선을 택하는 것이 옳다고 믿어지는 현실을 보면서 2000년 전 예수님 앞에 꿇어 엎드려 흔들림 없이 예수임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는 한 가련한 가나안 여인의 모습이 새삼스럽게 그리워지는 것은 우리 모두가 현실과 차선이라는 유혹에 빠져서 믿음에 대한 진지성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을 반증해 주는 것은 아니겠습니까? 오늘 예수님은 가나안 여자의 믿음에서 흔들림 없는 일관성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큰 믿음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흔들림 없이 일관성 있는 믿음과 삶을 살 수는 없을까요?
일관성 있는 인생 www.hyanglin.org 게시판에 올려진 글이다.
홍근수
모든 인생은 불과 1세기 미만 현상이다. 어떤 이들은 '짧게 살았다,' 또는 어떤 이들은 '긴 인생을 살았다'고 말하겠지만, 거의가 모두 불과 100년 이내 현상이다. 그런데 그 짧은 생을 살면서 해바라기 같이 권력을 지향하여 지조고 체면이고 인격이고 모두를 접어둔 채 사는 모습을 볼 때 심히 안 되었다는 생각과 함께 유감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생을 일관성 있게 살 수 없을까? 무엇이 인생을 그렇게 살게 만들까? 갈 때는 빈손으로 간다는 사실을 모를까? 알면서도 왜 그럴까? 자식에게 물려주기 위해서? 꼭 한 번 사는 인생, 제발 좀 일관성 있게 살다가 가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