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을 빛낸 군주를 예를 들라고 하면 우리가 흔히 아는 엘리자베스1세나 빅토리아 여왕을 든다(아님 헨리8세?). 워낙 이 여군주들의 활동만이 눈에 띄는 것은 아마도 알려진 영국사 관련 책들이 너무나도 복사판처럼 똑같이 소개되어 왔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른바 일방통행적인 교육에서의 세뇌(?) 완결판과도 같은 대답들...
그러나 막상 깊숙하게 영국사를 살펴보면 이 군주들의 활약상 이면에는 영국(여기서는 잉글랜드를 지칭)을 세계적인 나라로 만들어준 잘 알려지지 않은 기초자가 숨어있다. 남몰래 뒤에서 기초를 닦아주어서 후일의 자손들이 잉글랜드(그냥 영국이라 보면 됨)의 정치적 안정과 강력한 왕권을 이용해 훌륭한 내치의 효과를 밖으로 드러나게 하여 나라 밖으로 세계의 바다를 제패하도록 도와준 이른바 음덕(蔭德)을 가졌던, 흔히 명군으로 알려진 여군주들의 조상 바로 헨리7세(Henry VII)이다.
헨리7세(Henry VII, 1457.1.28~1509.4.21)는 원래 왕자로서 국왕이 된 사람이 아니고 결혼에 의해 왕관을 차지했다. 즉 부인 덕에 군주가 된 이른바 여복(女福) 많은 남자다. 헨리7세의 가문인 튜더(Tudor)가문은 잉글랜드 출신이 아닌 브리튼 섬 서부의 에드워드1세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병합된 웨일즈 출신의 귀족가문이었다.
이 웨일즈의 부족장 가문의 하나였던 튜더 집안이 잉글랜드의 왕관을 갖게 된 근거를 만들어 준 사람은 바로 헨리7세의 조부였던 오웬 튜더(Sir Owen Tudor, ?~1461)로 결혼 한번 잘한 덕분이었다. 이 오웬은 기사 작위 밖에 가지고 있지 않은 엄밀히 말하면 귀족이 아닌 사람이었으나 헨리5세의 미망인이자 헨리6세의 어머니였던 프랑스 왕 샤를6세의 공주였던 캐더린(Catherine de Valois, 1401~1437)과 결혼하면서 일약 귀족사회의 스타로 부상한 것이다.
1422년 헨리5세는 14살 차이가 나던 왕비 캐더린을 남긴 채 죽어버리고 어린 헨리6세를 남기는데 왕비였던 캐더린은 남편이 죽자 젊은 자신이 아까워서 결국 자신 나름대로의 인생을 즐기기 위해 이른바 정부(情夫)였던 오웬 튜더와 정식으로 결혼해버린다. 1430년 두 사람 사이에 아들 하나가 출생하는데 바로 헨리7세의 부친인 에드먼드(Edmund Tudor, 1430~1456)로 그는 1452년 어머니는 같지만 아버지가 다른 형인 헨리6세에 의해 리치먼드 백작(Earl of Richmond)으로 승격된다.
헨리6세는 마지막 랭카스터 가문의 군주였다. 장미전쟁의 치열한 왕권다툼 속에서 그는 요크 가문의 에드워드4세에게 밀려 비참한 최후를 마친다. 그리하여 랭카스터 가문은 왕관을 상실하고 장미전쟁의 승리자는 요크 가문이 되는 것처럼 일이 진행되어 간다. 그러나 요크 가문도 조카와 숙부 간의 왕관 쟁탈전에 의해 가문의 많은 남자들이 살해되는데 이 사건들의 주모자는, 셰익스피어가 자신의 작품에서 그토록 비극적인 인물로서 누구나 증오하도록 그려 놓았던 리처드3세(Richard Ⅲ, 1452.10.2~1485.8.22)로서 조카 에드워드5세 형제를 런던 탑에서 비참하게 살해한 장본인이다.
리처드3세는 형 에드워드4세가 죽자 어린 조카의 섭정이 되었지만 스스로 왕관을 쓰기를 원했고 한국판 수양대군으로서 조카 형제를 런던 탑에서 제거해버린다. 그러자 에드워드4세의 미망인이었던 前왕비 엘리자베스는 두 아들의 죽음을 보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어떻게 해서든 하나 밖에 안 남은 딸 엘리자베스를 안전하게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왜냐하면 그녀가 유일한 정통 요크 가문의 후계권을 가진 공주였기 때문이었다.
잉글랜드인들은 이 조카 살해와 왕관찬탈에 모두 경악하였고 또한 100여년 넘게 진행되어오는 왕관다툼 즉 랭카스터 가문과 요크 가문 간의 장미전쟁이 종결되길 희망하게 된다. 너무나도 오래 끄는 내전은 국민들을 피폐하게 만들었고 이 부질없는 소모전은 영국을 유럽에서 완전히 후진국으로 전락시켰기 때문이었다.
영국이 장미전쟁을 한창 하고 있을 무렵 이미 대륙에서는 강력한 합스부르크 가문과 프랑스가 서로 강자가 되어 유럽의 패권을 둘러싸고 일전을 벌리고 있었지만 영국은 여전히 내부의 왕권싸움으로 집안싸움밖에 안 되는 소모전만 진창 해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이 장미전쟁의 종결을 원했고 결국 랭카스터 가문의 혈통을 가지는 리치먼드 백작 헨리에게 구원의 희망을 걸게된다. 즉 두 장미간의 결합을 요구하는 것이다.
헨리7세의 아버지는 리치먼드 백작 에드먼드였고 어머니는 랭카스터 가문의 마지막 남은 가문이라 할 수 있는 보우퍼드 가문의 서머세트 백작(Earl of Somerset) 헨리의 딸 마가레트( Margaret of Beaufort, 1443~1509)였다. 즉 헨리7세는 어머니를 통해서 랭카스터 가문의 상속권을 청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당시는 비록 요크 가문이 왕관을 차지했지만 리처드3세의 패륜으로 이미 국민들은 리처드3세를 외면했고 불쌍한 미망인과 동생들을 잃은 비운의 공주 엘리자베스를 동정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알아챈 리처드3세는 비정하게 아내를 독살하고 자신이 직접 조카와 결혼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래야 자신의 왕관이 안전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눈치챈 그의 형수는 딸을 대륙으로 도망가있던 리치먼드 백작 헨리를 불러 결혼시킨 후 리처드3세와 대항하도록 한다.
1485년 결국 리처드3세와 헨리는 부딫혔고 결과는 헨리의 완승이었다. 리처드는 전쟁터에서 전사해버렸고 들판에 굴러다니던 왕관은 바로 새주인을 찾았고 헨리7세는 장미전쟁을 종식시키고 플랜타지네트 왕조를 대신할 새로운 잉글랜드의 왕조를 창시하게 된다.
헨리7세의 즉위는 영국사에서 전제왕권의 출현을 예고하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이 꼼꼼하고 세밀하고도 침착한 군주는 이미 자신의 왕국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내부의 분열을 마감하고 새로운 국가의 체계를 정비하고자 귀족들을 모았는데 부름에 달려온 세속귀족은 겨우 29명뿐이었다. 얼마나 많은 귀족들이 이 장미전쟁에서 사라져버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헨리7세는 약해져버린 귀족들을 대신해서 그 자리를 왕권으로 채웠고 그 작업은 관료제의 정비로 귀결된다.
헨리7세는 더 이상의 분열을 원치 않았다. 어떻게 해서든 왕권의 강화로 내부를 안정시키는 것이 주된 의무라 생각하여 먼저 귀족들에게 사병(私兵)을 혁파할 것을 강요한다. 이를 지키지 못하는 귀족에게는 가차없이 벌금을 물리던가 아님 죽음을 각오하도록 엄포를 넣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은 효과적이어서 누구도 헨리7세의 정책에 반대하지 못했다.
헨리7세는 중앙으로의 왕의 권력이 집중하도록 관료제를 손보는데 이것이 바로 튜더식 전제왕권이 된다. 그리고 이 튜더왕조로부터 영국에서 유명한 귀족가문들이 대검귀족(帶劍貴族)이 아닌 관료귀족(官僚貴族)에서 탄생하게 되는데 이것은 이미 영국이 더 이상 봉건귀족들이 칼과 창을 들고 활개치던 중세에 머물지 않고 관료제를 가지는 새로운 근세 국가로의 진입을 뜻하는 것이었다.
헨리7세의 즉위는 내부의 분열을 종결하고 전제왕권으로의 출발과 함께 영국이 내부에서 외부로의 눈을 돌릴 수 있도록 기초공사를 해준 시발점이었다. 랭카스터 가문의 헨리7세와 요크 가문의 엘리자베스의 결합으로 태어난 헨리8세는 아버지의 이러한 훌륭한 도로포장 공사 덕분에 전제적 왕권을 가질 수 있어 결국 그 거대한 로마가톨릭과의 종교싸움에서 최후의 승리자가 될 수 있었고 영국성공회를 만들 수 있었으며 영국국왕의 독자적인 위치를 굳힐 수 있었다. 이러한 헨리8세가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헨리7세의 음덕이 아닐 수 없다.
헨리8세가 무자비한 이혼과 아내의 목을 도끼로 내리치고도 그토록 아들을 원했던 것도 모두 후계권의 불안에서 오는 왕권의 불안정은 곧 장미전쟁과 같은 내부분열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고 싶어서였다. 헨리8세 치하의 영국인들은 그 비참했던 장미전쟁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았을 것이다. 그래서 왕의 패륜을 지지하였고 종교의 분리도 감수한 것도 모두 이 분열의 고통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결국 튜더왕조는 헨리7세의 기초작업 덕에 아들 헨리8세의 그 강력한 왕권 행사가 가능하여 대륙으로부터의 명예로운 고립과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한 손녀 엘리자베스1세의 바다로의 진출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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