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시 일산구 마을이름 유래 >>>>>>>>>>>>>>
고양(高陽)
지금의 '고양(高陽)'이라는 이름은 고려시대에는 '고봉'과 '억양'으로 불리웠으나, 조선 태종 13년(1413) '고봉현'과 '억양현'을 통합하여 '고양'으로 고치고 현감을 두면서부터 유래되었다. 성종 2년(1471)에는 군으로 승격하여 고양군이 되었고, 1992년 2월에 고양군이 시로 승격되었으며, 1996년 3월 일산구와 덕양구가 설치되었다. |
|
일산동(一山洞) 일산동은 일산역 주변의 옛 일산과 일산 신시가지 일부를 포함하고 있는 광대한 면적의 법정동 명칭으로 일산 1∼4동 총4개의 행정동이 있는 곳이다. 마을 중앙에는 경의선을 비롯해 310번. 398번 도로가 지나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신시가지개발 전까지는 논과 밭, 산 등이 많았으나 현재는 대부분 아파트. 주택, 상가 등이 차지하고 있다. 일산의 명칭에 대한 유래설을 몇 가지가 있는데 첫째, 일제가 19047∼1905년경에 경의선을 부설할 당시 중면의 면사무소를 옛 일산읍 백석 4리에서 일산역 부근으로 옮김에 따라 이 지역을 하나의 행정 구역으로 개편하였는데, 새로운 행정 구역의 명칭을 옛 송포면 덕이리 한산 마을의 고유 명칭인 한뫼를 따 일산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둘째, 일산은 곧 고봉산을 가리키는데 이것을 순수한 우리말로 바꾸면 '한산'이 된다. 이 한산의 의미는 큰 산, 높은 산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일제 식민지 시대에 일본인 관리들이 우리 민족 고유 지명 비하책의 하나로 한산의 높고 큰 의미를 일산으로 뜻을 낮추어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셋째, 일산은 본래 고유의 지명으로서 한산 마을의 옛 이름인 일산을 따 붙여진 것이라는 설이다.
|
|
중산(中山)마을(일산2동) 신시가지 건설 이전에는 중산말, 안악곡, 왜골, 더부골 등의 자연촌락 마을이 있었다. 중산이란 고양지역의 주봉이면 중심산인 고봉산 인근에 마을이 위치하고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도 다른 설로는 고양의 역사에 중심적 역할을 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
후곡(後谷)마을(일산3동) 북동쪽으로 옛 일산(원 일산)을 두고 있으면 후곡은 원 일산 뒤쪽에 위치하고 있어 뒷골짜기라는 뜻을 한문으로 옮긴 것이다. |
|
밤가시 마을(일산4동) 일산 밤가시 초가집으로 유명한 마을이다. 밤가시란 이름은 신시가지 개발 이전의 이 마을 자연 촌락 이름으로 예부터 밤나무가 많아 가을에 산에 오르면 온통 밤가시가 널려 있다고 해서 붙여진 아름이다. |
|
양지(陽地)마을(일산4동) 양지란 이름은 주변에 높고 큰 산이 없어 항상 햇빛이 잘 든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
식사동(食社洞) 일산동의 동쪽에 위치한 곳으로 본래 원당읍 지역이었으나 분구시 일산구에 포함되었다. 식사라는 명칭은 고려시대에 생긴 지명으로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과 깊은 연관이 있다. 즉 공양왕이 식사동의 대궐고개 부근에서 태조 이성계의 군사들에게 쫓겨 숨어있을 당시에 고개 아래에 있는 절(寺)에서 밥(食)을 해서 날라다 주었다는데서 이러한 명칭이 생겼다 한다. |
|
풍동(楓洞) 풍동은 마두동과 식사동 사이에 위치한 마을로 일산 신시가지의 동쪽에 소재하고 있다. 풍동은 옛날부터 이곳에 큰 산이 없고 벌판이 많아 바람이 심하게 불자, 이 바람을 막기 위한 방풍림으로 단풍나무를 많이 심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
|
사리현동(沙里峴洞) 일명 사리재라 불리우는 마을로 식사동의 동쪽에 위치한 곳이다. 고봉동 내에 포함된 법정동으로 본래는 벽제읍에 포함되었다가 일산구에 편입되었다. 사리현이란 이름은 이 마을 앞으로 흐르는 곡릉천이 많은 모래를 운송해 마을 뒷편의 사리재 고개를 만들었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라 한다. |
|
산황동(山黃洞) 산황동은 풍동의 동남쪽에 위치한 마을로 대부분 농촌지역으로 남아있는 지역이다. 이곳을 산황동이라 부르는 것은 마을 주변의 산흙들이 유난히 곱고 붉은 황토흙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
|
지영동(芝英洞) 지영동은 사리현동의 북쪽에 위치한 곳으로 고봉동 내의 법종동이다. 지영이란 이름은 본래 지영(芝靈)이라 하였으나 일제 시대 때 지금의 지영(芝英)동으로 바뀌었다고 하고, 옛부터 이 마을의 큰 연못에 난초와 연꽃 등이 많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
|
설문동(雪門洞) 설문동은 지영동의 북쪽과 서북쪽에 위치한 곳으로 고봉동내의 법정동 명칭이다. 설문동의 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옛날 이곳에 설씨 성을 가진 사람들의 집성촌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
|
문봉동(文峰洞) 문봉동은 지영동의 서남쪽 그리고 설문동의 남서쪽에 위치한 마을의 법정동 명칭이다. 문봉의 유래에 대해서는 크게 세가지 설이 있는데 그중의 하나는 이곳에 문봉서원이 있었기 때문에 생겼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옛부터 글을 숭상하고 받들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는 것이다. 끝으로는 이 마을 앞쪽의 견달산의 봉우리의 생긴 모양새가 마치 붓과 같아 큰 문장가가 많이 나올것 이라는 뜻에서 문봉이라 했다는 것이다. |
|
성석동(城石洞) 성석동은 문봉동의 서쪽에 위치한 마을의 법정동 명칭이다. 이곳에는 일산동과의 경계에 일산구의 주산인 고봉산이 위치해 있다. 이곳을 성석이라 부르는 것은 곧 이 고봉산과 깊은 연관이 있다. 즉 고봉산에는 삼국시대 이래로성(城)이 쌓여서 지금까지도 남아있는데 산성을 토성과 석성으로 나누어 쌓았다. 이에 돌로 성을 쌓았다는 데서 성석이란 이름이 생겼다 한다. |
|
대화동(大化洞) 대화동은 일산 신시가지의 가장 끝쪽 한강 주변에 위치한 마을의 법정동 명칭으로 일면 뱀개로 불린다. 행정구역으로는 송포동에 해당하며 신시가와 농촌지역이 공존해 있다. 대화동은 1914년 당시 성저, 백암, 김서장촌 등의 여러 개 마을이 하나로 합쳐져 크게 변화된 마을이라 하여 대화(大化)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한다.
|
|
성저(城低)마을(대화동) 성저마을은 신시가지 개발 이전 이 마을에 고구려 시대에 쌓여진 것으로 보이는 토성이 있어 투성 밑에 있는 마을이란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
장성(長成)마을(대화동) 정성은 북녘의 장단 사람들이 새로이 이룬 마을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
법곶동(法串洞) 법곶동은 대화동의 서쪽인 한강과 인접해 있는 마을의 법정동 이름으로 행정구역상으로는 송포동에 포함된 곳이다. 법곶이라는 명칭은 곶 포구, 또는 땅이름 곶에서 유래하는데 마을 가운데에 위치한 법수산과 이산포의 곶에서 법곶이란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한다. |
|
가좌동(加佐洞) 가좌동은 대화동의 서북쪽에 위치한 마을의 법정동 이름으로 행정구역으로는 송산동에 포함된다. 가좌동은 옛부터 한강으로 유입되는 샛강에 가재가 많이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
|
구산동(九山洞) 구산동은 가좌동의 서쪽과 북쪽에 위치한 마을의 법정동 이름으로 행정구역은 송산동에 포함된다. 구산동은 일명 거그뫼로 불린다. 구산이란 명칭은 본래 거북구(龜)자를 사용하였으나 일제시대부터 아홉구(九)자를 써 구산으로 쓰이고 있다. 구산의 본래 명칭에 의하면 이 마을에 위치한 산의 모양새가 마치 거북과 유사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하기도 하고 또 달리 마을 전체의 생김새가 거북이의 형상을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
|
덕이동(德耳洞) 덕이동은 대화동의 북쪽과 동북쪽에 위치한 마을의 법정동의 이름으로 행정구역상으로는 송산동에 포함된다. 덕이라는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송포의 백송이 위치한 마을, 덕위 마을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
|
탄현동(炭峴洞) 탄현동은 마을 안에 SBS탄현제작소, 일산홀트학교 등이 있다. 탄현동을 한글로 풀어 쓰면 '숯고개'가 되는데 「고양군지」에 따르면 이곳 탄현동에는 예전부터 참나무가 많았는데 이것을 제어 숯을 구웠다하여 숯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
|
마두동(馬頭洞) 마두동은 현재 마두 1,2동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마을의 동쪽으로 경의선이 길게 이어져 있고 백마마을 부근에 백마역이 위치해 있다. 신시가지 개발 전에는 낙민. 강촌, 설촌, 냉천, 모범마을이 있었으나 현재는 강촌마을, 백마마을로 나뉘어져 있다. 마두동은 정발산에서 불 때 마을 전체의 형상이 마치 말의 머리와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
백마(白馬)마을(마두1동) 옛부터 백마초등학교, 백마역 등에서 사용되어 왔던 이름이다. 백마는 백석리에서 '백'자를 마무리에서 '마'자를 따 생긴 이름이다. |
|
정발(鼎鉢)마을(마두2동) 정발이란 이름은 정발산 기슭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
강촌(姜村)마을 (마두2동) 옛부터 이 마을에 진주 강씨(姜氏) 자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
주엽동(注葉洞) 주엽동은 일산신시가지내 문촌·강선마을 등이 위치한 곳이며 신시가지 개발 이전에 이곳은 새말, 오마리, 문촌, 강선, 하주, 상주, 등의 마을이 있었다. 주엽이란 이름은 옛 주엽3리의 문촌마을에 있는 골동산(곡동산)꼭대기에서 볼 때 마을 전체의 지형이 잎사귀 모양으로 보여 주엽이라 했다 하며, 또 달리 가을만 되면 마을 중앙으로 흐르는 샛강에 큰나무의 잎사귀가 떨어져 흘러내려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
|
강선(絳仙)마을(주엽1동) 강선이란 이름은 신선이 내려온 마을이란 뜻, 신시가지 개발 전 이곳의 경치가 뛰어나 신선이 내려올 만큼 아름다운 마을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
문촌(文村)마을(주엽2동) 문촌이란 이름은 글마을을 한문으로 옮긴 것. 이 명칭은 예전 신시가지 개발 전에 서당(글방)이 이곳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
장항동(獐項洞) 장항동은 마을의 생김새가 노루의 목처럼 길다하여 '노루 장'자와 '목항'자를 써서 장항이라 했다고 한다. 또는 정발산에 옛부터 노루가 많이 살아 자주 마을에 나타났기 때문에 생긴 이름이라고 하기도 한다. |
|
호수 마을(장항2동) 동양 최대의 인공 호수인 일산 호수공원 부근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
백석동(白石洞) 백석동은 신시가지 개발 이전에는 방기, 샘플이, 알미, 백석, 동굴매 등의 자연촌락 명칭으로 불리워졌으나 현재는 백송마을, 흰돌마을로 부르고 있다. 백석이란 이름은 옛 백석4리 흰돌마을 도당산에 가로 약 2m, 세로 1m크기의 흰돌이 놓여져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
|
백송(白松)마을(백석동) 고양시 덕이동에 위치한 천연기념물 제 60호 송포 백송의 이름을 딴 것이다. 특히 이 백송은 고양시의 상징 나무로 다른 지역에 널리 알려진 나무이다. |
|
흰돌 마을(백석동) 흰돌은 백석(白石)을 한글로 풀이한 이름이다. 백석, 흰돌의 유래는 백석동의 동쪽 끝인 백석공원 내의 흰돌에서 연유한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이 돌을 신성시하여 3년에 한 번씩 도당제를 열었다. |
|
일산의 전설 >>>>>>>>>>>>>>>>>>>>>
|
고봉산과 한씨미녀
고구려,백제, 신라 삼국이 서로 대치하던 삼국시대, 일산은 백제의 영토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일산의 중심에 있는 고봉산 일대는 매우 중요한 요새 겸 요충지로 고구려가 늘 이곳을 점령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당시 이곳에는 한주라는 아름다운 미녀가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어느날, 백제를 정탐하기 위해 잠입한 고구려의 태자와 사랑에 빠지게 된다. 청춘남녀는 처음 만난 이후 급속도로 가까워져 헤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시간이 흘러 백제 땅에선 모든 임무를 마친 고구려 태자는 후일 만날 것을 기약하고는 고구려로 돌아갔다. 고구려로 돌아온 태자는 곧 왕위에 오르니 이가 바로 고구려의 안장왕이다. 한편, 백제 땅에 남겨진 한주는 그 아름다움이 널리 소문나 백제의 태수로부터 청혼을 승낙 할 수 없다고 거절한다. 장래를 약속한 사람이 누구냐는 태수의 물음에 한주가 대답을 못하자 "제가 장래를 약속한 사람을 밝히지 않는 것을 보니 적의 첩자와 내통한 것이 틀림없다."며 한주를 옥에 가두었다. 이 소식을 들은 고구려의 안장왕은 을밀로 하여금 용감한 병사 20명과 함께 한주를 구하라고 명한다. 을밀 일행은 신분을 숨기고 백제에 잠입한다, 그리고 백제태수가 생일을 맞아 큰 잔치를 벌이고 있을 때 이를 기습 백제 태수를 죽이고 한주를 구출한다. 대군과 함께 국경에 주둔하고 있다가 이 속을 들은 안장왕은 크게 기뻐하며 한시바삐 한주를 만나고자 하였다,. 구출된 한주도 빨리 안장왕을 만나고 싶은 마음에 높은 산에 올라 봉화를 밝혔다. 마침내 안장왕과 한주는 감격적인 재회를 하게 되고 결혼을 한다. |
고봉산의 고려 안장왕과 한씨 미녀에 얽힌 이야기
|
|
신라,고구려,백제 세 나라가 서로 한강유역에 있는 고양땅(당시 개백현, 달을성현)을 차지하기 위해 첨예하고 대치하고 있을 때였다. 처음 이곳은 백제땅이었으나, 훗날 고구려의 장수왕이 남하하면서 백제 세력을 몰아내고 고구려 땅으로 만들었다. 한강유역을 빼앗긴 백제는 신라와 나제동맹을 맺어 다시 이 땅을 되찾았다. 고구려는 다시 고양 땅을 탈환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뢰를 엿보고 있었고 백제는 철저한 방어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이때 고양 땅의 한 마을에 한씨 성을 가진 부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미색이 출중하여 인근에 소문이 자자한 '한주'라는 딸이 있었다. 어느 화창한 봄날 한주는 밖의 날이 너무도 좋아 집밖으로 산책을 나가게 되었다. 이때 한 젊은이가 그녀의 아름다운 자태에 넋을 잃어 한동안 한주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용기를 내어 한주에게 접근하였다. 처음에 깜짝 놀란 한주는 허름하지만 품위있는 그 젊은이의 준수한 용모와 늠름한 자세에서 풍기는 위엄에 마음이 끌렸다. 젊은이는 "낭자의 아름다운 자태에 마음이 끌려 무례를 무릅쓰고 낭자 앞에 섰오." 라고 말하며 호젓한 곳으로 한주를 이끌어 자기의 신분을 밝히고 사랑을 고백하였다. 그는 고구려의 태자로서 한강유역을 탈환하기 위해 이곳을 정탐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후 한주와 태자는 남몰래 만나며 사랑을 나누었다. 그러던 어느날 태자는 "낭자, 내 임무는 이제 다 끝났으니 고구려로 돌아가야겠오. 내가 돌아가는 즉시 군사를 일으켜 이곳으로 올터이니 낭자는 나를 기다려 주오." 라고 말하며 고구려로 돌아갔다. 태자는 얼마 후 고구려의 왕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고구려의 안장왕이다. 안장왕은 약속대로 여러번 군사를 일으켜 고양 땅을 공격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그러던 중 한주의 아름다움이 인근 태수에게까지 알려지고 태수는 사람을 보내 한주에게 청혼을 하였다. 그러나 한주는 이미 장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음을 이유로 청혼을 거절하였다. 태수는 잔뜩 화가 나서 한주를 강제로 끌어와 "너에게 장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다 햇는데, 그게 누구인지 밝혀라" 하고 소리쳤다. 이에 대답을 하지 못하자 태수는 "정녕 대답하지 못하는 것을 보니 그자는 적의 첩자임이 틀림없고, 너는 그자와 내통을 하였으니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며 한주를 옥에 가두었다. 이 소식을 들은 안장왕은 크게 낙심하여 부하들에게 큰 상을 걸고 고양 땅 개백현을 점령하고 한주를 구해오도록 하였다. 당시 안장왕에게는 안학이라는 여동생이 있었는데, 을밀이라는 장수가 안학을 사모하고 있었다. 을밀은 안장왕 앞에 나서서 "제가 개벽현을 정복하고, 한주낭자를 구해 오겠나이다. 대신 저에게 상을 내리시기 보다 안학낭자와 혼인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청하였다. 이에 안장왕은 크게 기뻐하며, 이를 허락하였다.
을밀은 스무명의 날랜 병사를 뽑아 무기를 옷속에 감추고는 광대놀이를 하는 무객으로 변장시킨 후 개백현에 잠입하였다. 한편 옥에 갇혀 있던 한주는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태수의 청혼을 계속 거절하고 있었다. 태수는 한주의 굳은 결심을 알고는 한주에게 마지막으로 청혼을 하기로 하였다. 마당에 끌려나온 한주에게 태수는 "마지막으로 묻겠노니, 만약 네가 나의 청혼을 거절한다면 나는 적의 첩자와 내통한 혐의로 널 참형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한주는 "이 몸이 이미 정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사온데, 어찌 다시 혼례를 하오리오"라며 청혼을 거절하였다. 태수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당장 참형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무객으로 가장한 채 잠입해 있던 을밀과 그의 부하들이 몸속에 감추어 두었던 무기를 일제히 꺼내 들고 "고구려 대군이 쳐 들어왔다.!"라고 소리치며 백제 군졸들을 쳐 죽이니 백제의 장졸들이 혼비백산하여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이 틈을 타 을밀은 한주낭자를 구해 내었고, 외곽에서 대기하고 있던 고구려의 정예병들이 개백현을 점령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안장왕은 국경에서 친히 한주낭자를 맞았고, 안장왕의 왕비가 되었다. 을밀도 약속대로 안장왕의 여동생 안학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한다. |
|
|
백석동 흰돌 이야기
옛날 고양시의 각 마을들이 처음으로 이름을 짓기 시작할 때의 이야기다. 다른 마을들은 모두 어엿한 이름을 지어 쓰고 있었는데 유독 일산의 남쪽 끝에 위치한 한 마을은 이름을 짓지 못해 애를 먹고 있었다. 이 마을의 앞으로는 한강으로 흘러가는 시냇물이 있고 또 넓은 들판이 있어 살기는 아주 좋은 곳이었으나 마을의 이름이 없어 늘 다른 마을 사람들로부터 비웃음거리가 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 여름, 큰 홍수로 한강의 물이 갑자기 불어나더니 한강 상류 쪽에서 하얀 돌 하나가 떠내려와 이 마을의 한쪽 산귀퉁이에 걸려 멈추었다. 이 하얀 돌 위에는 갓난아이 하나가 타고 있었는데, 갓난아이의 눈빛이나 기개가 여늬 아이와는 확연히 틀렸다. 마을 사람들은 아이와 흰돌이 하늘에서 내려준 신령한 것이라 믿고 정성껏 아이와 돌을 돌보았고, 마을 이름도 백석(白石)이라 정하였다. 이런 일이 있은 후 백석 마을은 날로 크게 번성하고 좋은 일만이 생겼다. 그리고 이런 하얀 돌과 아이에 얽힌 소문은 이웃 마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소문을 들은 옆 마을의 혹부리 영감은 이를 시기해 백석 마을 사람들 몰래 아이를 자루에 담아 한강에 버리고 바위마저 깨뜨려 버렸다. 그 순간 하늘에서 갑자기 번개와 벼락이 치더니 혹부리 영감을 한 줌의 재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이후로 백석 마을도 점차 쇠락해져 가고 예전의 부귀영화는 사라지고 말았다. |
|
|
풍동과 산황동의 부자 이야기
옛날 도촌천을 사이에 두고 풍동마을 쪽에는 황씨 성을 가진 큰 부자가 살고 있었다. 그리고 산황동 쪽에는 노씨 성을 가진 큰 부자가 살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워낙 부자여서 대부분의 논과 밭이 서로 논둑을 사이에 두고 맞붙어 있었다. 두 부자는 만나기만하면 늘 서로 자신이 부자라고 다투기 일쑤였다. 그러던 어느해 비가 많이 내려 그 홍수물로 인해 도촌천에 놓여진 나무다리가 떠내려갔다. 마을 사람들은 산황동의 노씨 부자와 풍동의 황씨 부자를 찾아가 다리를 놓아줄 것을 간청하였다. 자신들의 재력을 마음껏 뽐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 두 부자는 서로 비싸고 좋은 다리를 만들어 주겠다고 약속을 한 후 비싼다리를 만든 사람이 부자내기에서 이기는 것으로 하였다. 한 달이 지난 후 도촌천에는 두 개의 다리가 완성되었다. 먼저 황씨 부자는 그 귀하고 비싼 놋쇠를 이용한 놋다리를 만들었다. 온 동네 사람들은 황씨 부자가 만든 놋쇠 다리를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런데 노씨 부자가 만든 다리는 닭의 똥집으로 만든 닭똥집 다리였다. 마을 사람들은 두 다리를 본 후 누가 더 부자인지를 판정하기 위해 며칠 동안 고심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심 끝에 마을 사람들은 노씨가 더 부자라는 판정을 내렸다. 이유인 즉슨 놋쇠다리는 수십년동안 고치지 않고 사용하여도 되지만 닭똥집다리는 매년 다시 만들어야만 다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만큼 노씨 부자가 더 많은 돈을 쓰는 것이니 결과적으로 그가 더 부자라는 것이었다. |
|
|
주엽동 문촌 마을의 다섯마리 말과 아기장수 이야기
옛날 주엽동의 문촌 마을에, 겨드랑이에 날개가 달린 심상치 않은 아기가 태어났다. 아기가 태어나던 날, 마을 앞 오백 년 묵은 느티나무가 아기의 울음 소리에 놀라 사리나무 떨 듯 떨었고, 그 큰 울음 소리에 동네 사람들은 며칠 동안 귀가 멍멍할 정도였다. 이 아기가 다섯 살되던 해 마을 뒷동산에 올라 바위에 오줌을 누니, 바위에 오줌자국이 그대로 파였고 이를 창피하게 여겨 발가락으로 누르니 그대로 바위에 발자국이 남았다. 그 후로 이 아기를 마을 사람들은 "아기장수"라 부르곤 했다. 아기장수는 골동산에 자주 올라 이곳에 살고 있는 다섯 마리의 말과 놀곤했다. 이 말들은 아기장수가 성장한 뒤 타고 다닐 경마로서 늘 아기장수를 지켜주곤 했다. 그러던 어느날 조선을 침략하기 위하여 염탐을 온 왜군첩자에 의하여 아기장수의 정체가 알려졌다. 장차 자신들을 크게 위협할 것에 겁을 먹은 왜놈들은 아기장수를 유인하여 잠들게 한 후 힘의 원천인 양쪽 날개를 인두로 지져 버렸다. 그러자 아기장수는 눈에서 총기가 사라지고 입가에 침을 질질 흘리는 바보가 되었다. 바보가 되어버린 아기장수는 늘 주위의 놀림감이 되었고 어느날 갑자기 사려져 버린다. 그리고 아기장수가 떠난 후 마을 뒷편의 다섯 마리의 백마는 골동산 바위위에 머리를 박고 죽어버리고 말았다. 그 후 이곳에는 임진왜란 당시 한 바보장수가 나타나 마을 사람들을 구하고 자신은 비참히 전사했다는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
|
|
식사동과 공양왕 이야기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이 태조 이성계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그의 칼을 피해 쫓겨다니던 때의 일이다. 공양왕은 개성을 빠져나와 고양땅으로 도망오게 되었다, 이곳에 바로 고려의 명장이며 충신인 최영 장군이 묻혀 있기 때문이었다. 파주를 지나 이곳 고양땅 식사동에 숨은 공양왕과 왕비, 그리고 왕이 사랑한 삽살개는 며칠을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헤매다가 어두침침한 저녁 무렵에 식사동의 한 절에 머물게 되었다. 그러나 이곳 절에서는 왕을 숨겨주었다가 후일 큰 화를 당할 것을 우려해 부근의 대궐고개에 왕의 일행을 숨겨 주었다. 그리고 매일 끼니때마다 밥을 날라다 주었다. 식사(食寺)동이란 이름은 이렇게 하여 생겨난 것이다. 그 후 왕의 일행은 추격군의 말발굽을 피해 원당동 왕릉골로 숨어들었다. 왕의 일행은 이곳에서 반나절을 보낸 뒤 은신처 앞에 있는 연못에 그만 스스로 몸을 던져 자살하고 말았다. 추격해온 이성계의 군사들은 연못을 향해 짖고 있는 삽살개가 수상하여 연못의 물을 모두 퍼낸다. 그리고 공양왕과 왕비의 시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에 이곳엔 장사를 치러 주니 그때부터 이곳을 일명 "반나절 릉"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
|
|
성석동 두테비 마을의 두꺼비 이야기
옛날부터 황룡산이 바라다 보이는 이곳 두테비 마을은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에 의해 매년 피해를 보았다. 이무기가 유독 이 마을의 사람들을 괴롭힌 것은 황룡산에서 이무기가 용이 되려는 순간, 두테비 마을 사람의 부정한 모습이 목격되어 용으로 승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후부터 이무기는 두테비 마을 사람들을 해쳤다. 이무기가 나타날 때가 되면 마을 사람들은 걱정이 태산과 같았다. 그러던 어느날 이 부근을 지나던 한 장수가 이무기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 큰 두꺼비이니 마을 사람이 모두 힘을 합쳐 황룡산이 바라다 보이는 산 꼭대기에 이무기를 물리칠 두꺼비를 만들라고 일러 주었다. 이에 온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커다란 두꺼비 모양의 바위를 만드니 과연 이 두꺼비를 무서워한 이무기는 나타나지 못하고 그 후론 해꼬지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 | |
첫댓글 참좋은 글이네요...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