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최락영 선생을 만났다.
87년 9월 동강초등학교에서 만남을 시작하여
10여년을 두번 같은 학교에서 근무하고
댁으로 다니며 많은 이야기도 하고 좋아하기도 했다.
노동산에서 스카우트 놀이하다
입술이 파랗게 질려 숨이 넘어가던 아들 한섶이가
공중보건소 소장이 되어 결혼을 한다고 연락이 왔다.
11시에 집을 나서 비가 뿌리는 고속도로를 과속하며 순천으로 간다.
나의 여행이란 얼마나 하잘것 없는 것인지.
송창욱이나 체 게바라가 본 기층 민중들의 삶은 보이지도 않은
나의 떠돔이란 얼마나 이기적인가? 과속하면서 개스차의 스피드를 역설로 즐기는 것은 아닌지 나는 천상 어긋내는 소인임을 씁쓸해 한다.
차 두대가 서로 비켜가기 어려운 시골길을 한참 오르니
궁전인 예식장이 나타난다.
그와 인연을 맺었던 많은 사람들이 왔다.
다 컴퓨터를 같이 배웠던 사람들이 많다.
아, 그 분은 사람이 아니었다.
당신의 말처럼 입은 살아 있었다.
허수아비는 반듯한 대나무에 옷을 걸치지만
그 분은 어깨끝이 목 닿은 부분보다 더 올라
묘한 곡선을 그린다. 겨울 방한 잠바에 모자를 스고 소파에 묻혀있는 허수아비보다 더 가늘게 옷을 걸치고 있었다.
한섶이는 키도 크고 여전히 미소가 좋은데
아리따운 신부와 찍어놓은 사진들이 저렇게 행복한데
그를 낳은 아버지는 옷을 걸치고 있기조차 힘들다.
그분의 시니컬한 웃음과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던 두려움 없음과
시를 쓰지는 않았지만 어느 시인 못지 않은 예지가 있었는데.
사모님과 시로미를 보니
미워진다. 미워할 자격이나 있나? 너는?
정화 형 부부 한모 형 부부 그리고 가까운 선배들과 같이 점심을
먹으며, 다들 안 마시는 술을 호탕한 척 하며
운전 않은 양 소주 두 잔을 마시는데
그리고, 밥 달라며 저기 한 쪽 테이블로 가는 그 분의
뒷모습을 보며 내려오는 길은
왜 이리 서럽고 화가 나는지.
자신에 충실하게 관리하지 못한 죄인가?
스스로 버린 것인가?
누가 그를 불화하게 했을까?
누가 그를 아프게 했을까?
의사 선생이 된 아들은 환한 며느리한테 가고
독거 노인이 되어 주인이 안내하여 점심을 먹어야 하는
그는---
고흥반도나 여수 반도 어디 바다에 가서 좀 울기나 할까 하다가
구례 화엄사나 연곡사나 보고 가자고 하고 솔재를 넘는다.
구례에 이르러 사성암 이정표를 보자, 차를 그리 돌린다.
포장길 오르는데, 걸어 올라가는 이 있어
차를 세우고 옷을 갈아 입는다.
세멘트길 급경사를 오르니 금방 땀은 쏟아지고
짙은 안개 속에 사위는 보이지 않아도
나무 그늘 주지 않은 길 차라리 잘 됐다.
비도 걱정없다.
사성암은 바위에 의지하여 집을 세운 집이 먼저 보인다.
올라가니 선으로 그어놓은 마애불에 금칠을 둘러놓았고
작은 집을 앞세웠다.
염원을 담은 기왓장 사이를 내려와
다시 오르는데 참 기왓장 많다.
건강과 가족의 화목을 비는 수많은 글들이 정성스럽다.
작은 건물들 뒤로 바위가 서 있다.
내려오다 나무 아래 돌을 둘러 놓은 곳에 앉는다.
저 아래서는 기차 소리가 들리고 찻소리가 들린다.
흙탕물인 강은 형태만 보이고--
나도 기왓장에 무엇을 쓸까 고민해 본다.
'나와 세계의 평화'
'자유 평등 평화' 만원을 들일 참인데
누군가 전화하여 내 차 열쇠를 주워 놓았단다.
핑계삼아 서둘러 내려오고 만다.
열쇠가 얌전히 꽂혀있다.
세수하고 시동걸어 아스팔트에 내리니
4시다. 2시 30분에 올랐었는데.
집에 오니 한결이 짐 갖다주고 오라는 심부름이 있다.
주월동 간 김에 박기홍에게 전화하여
같이 제석산을 땀 흘리며 달리고
봉선동 가서 국밥 먹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