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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전은 냉전시대의 프랑스, 미국 등이 주도했던 전쟁이었다.
미국 대통령이 베트남에 사과하드냐?
전쟁주도국도 아닌 한국이 이와같이 전쟁후 깔끔하게 사과하고 투자하는 나라 있으면 나와라.
한국군은 동티모르,아프간,이라크에서 평화지향군으로 .. 현지국에 대대적인 칭송을 받고
있다. 여타 국가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월남엔 전략촌이 많습니다. 마을과 마을의 지하는 땅굴로 이어졌고 그 속은 베트콩 들의 주둔지입니다. 한국군이 마을로 들어 서면 주민들이 나와 땅 속에 아무것도 없다며 안심시킵니다. |
『전쟁을 모르는 識者라면 「모른다」고 해야지 「아는척」 하고 나오니 세상이 어지러운 겁니다. 한국군은 8년 동안 연병력 32만여 명이 월남전선에 투입되었습니다. |
「한겨레 21」은 지난해 9월초부터 최근까지 월남인들의 주장을 보도하면서 한국군이 학살한 양민들의 수가 9000여 명이 넘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목격자라고 소개된 월남인들의 주장은 |
당시 한국군의 양민학살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기까지 한다.
이 책을 몇번 보았다는 蔡命新 예비역 장군은 이런말을 했다.
『월맹이 통일한 지금, 현지인들이 월맹군에게 당했다고 할 것 같습니까?
한국이 만만하게 보이니까 우리더러 학살했다고 하는거죠.
게다가 당시에도 피아구분이 힘들었는데
지금와서 진상조사를 한다는 게 거의 불가능할 줄 알고서 이런 수작을 부리는 겁니다.
최근 우리나라의 일부 언론과 방송들은 월남전 당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양민학살은
일체 거론하지 않고 「한국군」이 양민학살을 했다고 강조합니다.
그게 9000여명 이라고 했지요?
1968년 2월 「후에」 전투에서 월맹군은 공무원, 군인, 경찰, 교사, 종교인, 외국인등
그야말로 「진짜 양민」 5800여 명을 단 한번에 처형했어요.
우린 그런 아수라장을 막으러 간 겁니다』
―당시 駐越 한국군의 작전개념은 어떤 것 이었습니까?
『제가 근무하는 동안 한국군은 미군과 달리 양민 보호 개념으로
「단절 및 섬멸 작전(cut & destroy operation)」을 펼쳤습니다.
6·25 당시 非정규전에 익숙했던 저는 월남전이야 말로 非정규전의 전쟁이라 판단하고
물과 고기를 분리하듯 인민들과 게릴라들을 분리하는 작전을 밀고 나갔던 겁니다.
월남전에 참전한 한국군들은 누구나 사령관이 강조한
「100명의 베트콩을 포기하더라도 한 명의 양민을 보호하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겁니다.
이 때문에 미군과 마찰도 있었지만 월남 주민들로부터 가장 신뢰받았습니다.
지금 월남에서 한국군에 대한 원성이 잦다고들 하는데
이건 대한민국이 망하기를 원하는 일부 사람들의 거짓말입니다.
월남에서 한국 군에 대한 원성이 1%라면 한국군에 대한 칭찬이 99%일 겁니다.
1973년에 우리 군대에 철수 명령이 내려졌을 때 자유 월남인들은
「다른나라 군대는 다 떠나도 따이한만은 계속 남아달라」며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 까지 벌였어요. 그런 우리더러 「양민학살을 한 傭兵」이라는 건
명예훼손 정도가 아니라 매국적 언동입니다.』
황해도 곡산 출신의 蔡장군은 6·25 당시 중령으로
유격부대 「백골단」을 조직하고 적진에 침투, 1000여명의 적사살 전과를 올렸고
인민군 對南유격대 총사령관 길원 팔과 참모들을 포로로 잡는 등
非정규전에 탁월한 군인이었다.
1965년 8월 金聖恩(김성은) 당시 국방장관은 朴正熙 대통령에게 蔡命新 장군을
초대 駐越 사령관으로 강력히 추천했다.
이 배경에 대해 金聖恩 전 장관은
『蔡장군의 非 정규전 능력과 경험이 아주 우수했기 때문 』이라고 회고했다.
육사 5기생으로 1947년 4월8일 소위로 임관하여 부임한 곳이 제주도 9연대였다. 이미 남로당 지하조직에 의해 4·3 사태가 터져 제주도 전역이 월남처럼 피아구분이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한다. |
소대원들도 좌익들로 가득찬 곳이어서 蔡命新 소위는 주야불문하고 그들과 친숙해지려
노력하며 마음을 돌리도록 애썼다.
이것이 주효하여 남로당 으로부터 암살 대상에 올랐지만
蔡소위로부터 감화받은 부하들이 그의 목숨을 구해 주었다고 한다.
蔡命新은 6·25를 맞아 수많은 非정규전을 수행하면서 양민의 편에 서는 것만이
양민의 그늘에 숨어드는 게릴라들을 소탕할 수 있는 방법임을 체득한다.
그의 체험적 전투기술은 駐越 한국군 사령관으로 재임하면서
「친절한 따이한」이란 명성을 세워 한 ·월간 우호적 관계를 강화시킬 수 있었고,
월맹에 의한 통일 이후에도 현지로부터
「따이한」에 대한 좋은 인상이 지속되는 배경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당시 駐越 한국군 사령관 蔡命新은 월남인들이 유교문화권에 오랫동안 젖어 있음을
간파하고 對民지원을 나가는 한국군에게 몇 가지 세부지침을 하달하기도 했다.
그중 쌀과 식량을 전달할 때엔 한꺼번에 전달하지 말고, 조금씩 갖다 주되
가능한 고급 장교나 고급 하사관이 직접 갖다주도록 지시 했다.
받는 입장에서 고마움이 지속되도록 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한국군의 전투력 중 對民지원에 7, 현지 전투에 3을 안배하는 전략을 고수했어요.
부패한 월남정부, 이방인인 미군, 전투만 하는 월맹군과 베트콩 등살에 고통받던
월남주민들에게 한국군은 천사였던 겁니다. 그런데 우리더러 양민학살이라니…』
전쟁은 天災地變(천재지변)과 동격이다.
지진이나 홍수가 개개인의 기막힌 사연을 가리지 않듯, 전쟁도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잔혹하게 치러지기 때문에 우리가 평화를 지키려 애써 온 것이다.
蔡장군의 주장을 요약하면, 월남전은 대한 민국의 안보가 위기에 몰리지 않도록 미군을 대신해 참전한「조국 안보 수호 전쟁」이었고, 적군 앞에서 용감하게 싸운 勝戰( 승전)의 기록이 축적된 「승리의 전쟁」이 었으며, |
참전 8년 동안 대한민국의 경제가 기아선상에서 탈출하여
조국 근대화를 이룩하게 만든 「가난으로부터의 탈출 전쟁」이었다는 것이다.
1960년대 경제 후진국의 대한민국 국민들은
정글을 누비는 형제들의 노고를 기억하며 그들의 희생에 감사할 줄 알았다.
2000년 경제 선진국을 넘보는 대한민국 국민들은
고엽제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형제들의 고통에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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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사과 요구하기 전에 베트남에게 사과하자...라고 주장하시는 분들...보세요.
잊을만 하면 나오는 군요. 이문제...당시 베트남전은 전선이 따로 없는 게릴라전이죠..
한국군은 대민지원같은 사업을 많이 했습니다. 첨에는 사람들이 막환영하다가, 갑자기 돌변해서 슈류탄던지고, 죽이는 일이 빈번했죠.. 그런데 이들이 다시 마을사람들 속으로 숨어들면 색출해내기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마을사람들도 이들과 거의 한패였다고 보시면되죠.. 그러니.. 필수불가결하게도 민간인들까지 죽일 수 밖에 없었던거죠. 한국군을 비판하기전에, 민간지역까지 전장터로 만든 북베트남(월맹)의 더러운 전술을 먼저 비판해야 합니다.
다시 전쟁이 일어나도, 아마 상황은 마찬가지 일것이며, 베트남군이 만약에 한국에와서 저런상황이면 같은 일을 저지를 것입니다..
모든건 다 자기 위주로 해석하는겁니다. 증오비에는 마치 한국군만 잘못했다고 나오지만, 그 원인은 월맹측에서 먼저 제공했던거죠.. 물론 이런 양민학살을 잘했다는게 아닙니다. 분명히 백번사죄해야 하지만, 그 잘못이 100% 한국군에게만 있다는게 아니라는 거죠..
아녀자들이 뒤에서 총을 갈기고, 아이들이 수류탄을 안겨주는 전선이 없는 전쟁에서, 한국군역시 극도의 스트레스와 공포에 떨었을것을 알아야합니다. 명분없는 전쟁이었지만, 그 전쟁으로 한국이 경제발전하는데 원동력이 되었다는것도 알아야하구요. 양민이라고 불리는 베트남인들에게 살해된 우리네 아버지들도 그들만큼 있다는것도 알아야 합니다..
당시 한국군을 비난하기전에, 제대로 당시상황을 알고 비난해야 합니다. 월남전의 한국군을 일제시대때 일본군들과 비교하는 사람들은 또 뭡니까....?
명분은 분명하게 있었습니다. 월맹이 승리해서 그렇지 미국이나 우리나 월남정부의 요청 하에 파병된 전쟁이었습니다. 저런 양민에게의 피해는 어느전쟁이나 발생하지만 분명 베트남전은 민간/군인 구분이 모호했죠. 여튼 우리의 사과를 현 베트남 정부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본인들이 승리한 전쟁에 왠 사과냐 했죠
전 아시아인 수십만명을 학살한 일본 VS 100여명의 베트남인들을 사살한 한국군
더구나 베트콩들의 전형적인 수법이 민간인 복장을 하고 파병군들에게 대항하는 것 한국군 역시 베트콩과 구별이 안되서 민간인 사살 하지만 사과의 뜻으로 민간인 한명한명 명단 다 적어서 추모비 세워주고
베트남에 대한 한국의 사죄와 보상
한국인 당신들의 용기를 사랑한다”그리고
“한국인들이 그렇게 아름다운 사람들인 줄 몰랐다.” “한국이 왜 경제발전을 이룩했는지 이제야 알겠다.”
한국 베트남 평화음악회 일부 한국군의 베트남 학살에 대한 사죄 교육용 교재와 반성 CD 베트남전에 관한 교육용CD가 나왔다 “베트남전에서의 민간인학살 진상규명을 통해 평화를 세기를 다져보고자 하는 바람으로 CD작업을 시작했다”며 “전쟁과 인권, 평화의 의미를 되돌아보고 고찰해볼 수 있는 교육자료로 활용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참고논문들의 원본파일도 첨부돼 있다. 텍스트 사이사이엔 토론거리 주제를 제공해 교육현장에서 교재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베트남 평화 의료 연대, 나와 우리,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작가들의 모임과 함께 ‘전쟁의 기억으로 쓰는 평화이야기-베트남전 교육용 CD와 매뉴얼북을 제작해 7월부터 각 교육기간에 무료로 배포하고 일반에게도 판매하고 있다. 이뤄진 30여분 분량의 동영상과 텍스트 자료로 구성돼 있다. 동영상에선 베트남전 참전군인들과 학살 피해자들의 증언, 베트남전 평화운동에 참여한 활동가들의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다. 나레이션은 영화배우 오지혜씨가 맡았다. 베트남 학살 양민 사죄 위령비! 전면에 ‘1968년 학살당한 동포에게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그들의 아픔을 기립니다..라는 큰 글씨와 아래 희생자 명단이 적혀 있다. 청룡부대원들에 의해 민간인이 학살됐다고 한다. 월남참전전우복지회(이사장 김문구) 회원 30여명은 지난해 5월2일 이곳을 방문해 현지주민들과 함께 ‘위령비 기공식’을 가진 바 있다. 종전 뒤 처음 있었던 일이었다. 더구나 위령비 건립장소는 바로 집단학살이 실제 이뤄진 장소이기도 했다. 월남참전전우복지회는 위령비 건립금액 2만5천달러를 전달했고, 주민들은 진심어린 감사의 마음으로 화답했다 주민들의 휴식공간과 산책로로 이용될 나무그늘과 잔디밭, 인공호수가 조성된다.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학교 기공식을 열었다. 푸옌(8개)·빈딘(10개)·칸호아(2개) 등 3개성에 동시에 지어지는 20개 학교의 기공식과 푸옌성은 종합병원 건립 했다. 공원 안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조형물 평화공원은 한국 국민 성금으로 건설했다. 아니라 ” 베트남전의 진실을 호소하는 한장의 음반을 통해 전쟁이라는 인류 공통의 문제를 이끌어내고 전쟁희생자에 대한 미국과 한국 등 가해국가의 사과운동을 위한 연대의 끈을 만들겠다는 것이 참가음악인들과 ‘베트남전 진실위원회의 CD이다. 진혼곡이자 <아시나요>가 범한 ‘무심한 결례’에 대해 베트남의 동시대인들에게 전하는 사과의 메시지이기도 하다.
나와우리 3단체는 모두 1천장의 동영상 음반을 만들어 베트남을 포함한 세계 평화단체 100곳에 보내고, 나머지는 전화로 주문 판매한다고 밝혔다.
베트남인에 대한 한국인의‘진실의 사과의 결과’ 이룬 결실과 ‘한-베 평화공원’(Han-Viet Peace Park)기공식을 상세히 보도 최 사장은 “베트남에서의 과거를 해결하려는 진보적 개인들의 노력이 하나로 모여 한국사회의 모순과 갈등을 해결하는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양국간의 관계에 악 영향없을 것” 판 투이 탄 베트남 외무부 대변인은 4월21일 와의 회견에서 “한국인 정부와 단체, 개인들이 베트남전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벌인 반성 사죄 활동과 물질적 지원에 대단히 감사한다” 고 화답했다. 200만달러 이상 무상지원과 함께 대외경제협력기금(ODA) 2,846만달러 관한 약정 2000년 9월 29일 하노이에서 서명했다. 백낙환 주베트남 대사 “과거사 부담 더는 게 첫째 관심 늘 부담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무상원조를 포함한 지원과 양국간 교류촉진을 통해 ‘과거사’라는 단어가 더이상 큰 걸림돌처럼 떠올려지는 일이 없어지도록 재임중 기여할 것”이라며 이 문제가 주베트남 대사로서 으뜸 가는 관심사항이라고 설명했다. 프로젝트 사업과 연수생 초청을 포함해 총 400만달러 초과하는 규모다. 또한 한국 외교통상부가 한국국제협력단(KOICA)을 통해 세계 130개국에 지원하는 ODA자금(Official Development Assitant·개발원조자금) 규모 중 가장 많은 액수다.
------------------------------------------------------------------------------------------------------- 베트남을 침략 지배하려다 개관광 당하고 후퇴한 중공.
베트남의 화교 추방과 중 월 전쟁
원본 : http://blog.daum.net/mul-baram/7250436 중국인들 들어와서 한번 화교 문화권 형성하고 타운이 건설되면 통제하기 힘듭니다.당장에 중국의 외교적 군사적 위협도 감수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베트남은 그런면에서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일단 중국과 접경해 있어서 국경분쟁을 많이 겪었으며 남사군도 문제와 화교 문제로군사적인 충돌까지 있었습니다.베트남이 역내에 거주하는 중국계와 화교를 대거 추방하자..당시 중국정부는 많은 화교들이거주하고 있는 캄보디아에 대한 베트남의 국경분쟁을 문제로 베트남을 비난하다가 베트남내의 화교 중국계 추방을 구실로 삼아서 결국 베트남을 침공했습니다.. 인해전술로...당시 미국과의 힘겨운 전투를 승리로 끝내고 전후 복구중이었던 베트남에게역내 미국과 중국 스파이 노릇 하면서 설치는 많은 중국계와 화교들에 대한 통제와 추방은 필요했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건 베트남이 화교와 중국계를 통제하자 바로 중국이 침공을 했다는 것입니다.그리고 이 전쟁 뒤에도 중국과 베트남은 남사군도 영유권 문제로 또다시 군사적인 충돌을 합니다.
베트남은 화교 문제로 인해 발발된 79년 중.월 전쟁에서도 승리(사실상의 승리)했으며 이후에 현대화 되었다는 중공군의 베트남에 대한 남사군도 영유권 문제로 도발된 무력 충돌에서도 승리(사실상 승리) 함으로써 자신들의 자주권과 영토를 모두 보전하는데 성공합니다.
무조건 영토가 넓다고 지레 겁부터 먹고 굴복하지 않고 전쟁을 통하여 주권과 영토를 지킨 베트남의 사례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더불어 중국계 불체자들과 최근 일고 있는 화교 타운 건설.. 이어도 문제와 동북공정 등에 대한 좋은 반면 교사가 될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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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군사력 항상 의문 부호를 달다.. 중국 베트남 전쟁
일명 중,월 전쟁이라 불리우는 중국 베트남전, 이 전쟁은 1978년부터 시작해서 1979년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져 온 전투입니다. 물론 대규모전과 국지전이 함께 병행된 전투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중국과 베트남은 1989년까지 군사적으로 계속 충돌합니다. 중국이 핵을 가지고 있어도 함부로 쓸 수 없다는 걸 확실히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죠
사실 주위에 보면 생각보다 막연히 중국이 아주 군사강국이라고 생각하시는분(단지 핵을 가지고 있기에)들이 많은데, 현대에 들어서 중국이 전쟁해서 이겨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가까운 예로 중소 국경 분쟁에서는 중국 1개 사단이 소련 1개 대대의 화력앞에 거의 몰살에 가까운 참패를 기록하는 등, 항상 먼저 침공해서 엄청난 타격을 받고 물러 나오는 경우가 많았죠. 어제 아는 분과 중국 군사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막연히 중국은 군사 대국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서 여담으로 적어 봅니다.(물론 약소국은 아니죠)
중월전쟁은 1978년 초 베트남이 캄보디아와 국경 분쟁이 일어나고 베트남이 중국계 화교와 중국계 주민을 거의 다 추방 시켜버립니다. 이에 자극을 받은 중국은 1978년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고 국지전이 아닌 전면전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사실 이때 베트남의 경우 미국과의 전쟁에서 엄청난 국력을 소모했기에 중국한테 힘들지 않겠나 하는 의견도 적지 않았습니다. 한마디로 중국은 그냥 힘 빠진 베트남 먹을 기회라고 오판 했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전쟁은 1979년 2월달에 중국의 엄청난 준비로 전면적으로 베트남 국경을 침략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당시 상황입니다. 베트남이 캄보디아와 국경 분쟁하느라 사실 주력군 대부분은 캄보디아 국경에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적절한 시기를 노린 중국군의 기습적인 공격이었죠. 전쟁 초기 상황은 상당히 베트남군에게 불리했습니다. 주력군 자체도 없는데다가 기습적인 공격이었죠. 베트남 역시 북쪽 지역의 몇몇 전략적 요충지를 중국군에게 빼앗기고 고전을 합니다. 이때 침입해온 중국군은 5개 사단 약 9만에서 10만 정도로 보고 있습니다.(사단 병력외에 여단 규모의 병력도 실제 전쟁에 참여했다고 하네요)... 하지만 중국군은 베트남군 한테 엄청난 반격을 받기 시작합니다. 특히 중국군이 하노이 근처까지 밀고 내려오면서(거의 인해전술로), 사태는 더욱더 급박해집니다. 특히 이때 중국군은 63형 전차 수백대를 파견하였는데, 오히려 전쟁초기에 수십대를 그냥 사용해보지도 못하고 베트남군의 효과적인 전술에 파괴되고 말죠.
자 초기에 10만을 투입했던 중국군, 전쟁이 이상하게 질질 끌어지고 반격이 거세지자, 초기 10만에 다시 10만을 더 보태서 20만 대군을 파견합니다. 중국이 당황하기 시작한거죠. 특히 베트남군의 전략적 요충지인 돈단과 몽캉을 돌파하기는 하는데, 문제는 정말 이 작은 도시 하나 점령하느라 중국군 사망자만 2천명, 부상자는 수만명, 전차는 40대 이상이 완파됩니다. 이때 죽은 베트남군은 겨우 800여명입니다. 특히 중국군 비행기 역시 베트남군보다 3-4배는 많이 소실하죠.
자 이렇게 되자, 중국군은 6.25.전쟁때 투입하고, 중국 최정예 부래라는 325사단과 338사단까지 투입합니다. 한마디로 중국 역시 지금 이대로 퇴각하면 국제사회의 비웃음이 되는 처지라는 것이죠. 엄청난 인명 손실을 초래하면서 란소시를 점령하고 중국은 이 도시를 완전 파괴시키고, 겨우 중국 국경지역에서 베트남 30KM정도 들어온 지점에서 베트남에게 본때를 보여주었다고 철수를 선언하게 됩니다. 이때가 3월 15일이었죠. 겨우 한달동안 전면전 하면서, 위에도 이야기 드렸지만 베트남의 진짜 정예군들은 다 캄보디아 국경에 있는 시점에서 기습 침공을 했음에도 결국 중국은 실제적으로 엄청난 패퇴라 할 수 있는 모습으로 베트남에서 철군하게 됩니다.
자 이뿐만 아니라 이 전쟁을 계기로 현대화에 박차를 가했다고 하던 중국 1989년까지 베트남과 사소한 전투에서도 보통 3-4배의 피해를 입고 자기들 입으로는 이겼다는 발표를 계속하는데, 국제언론들은 상당히 비웃었죠.
이런 전투뿐만 아니라 중국과 소련, 러시아와의 국경 분쟁에서 전투 양상을 보면 러시아가 엄청난 군사 대국이란 걸 다시 느낄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 핵 사용하지 않고 러시아와 중국이 전쟁하면 중국은 사실 이기기가 거의 힘든 상태죠. 중국이 기습적으로 러시아 군을 습격했다가 오히려 1개 사단이 러시아 1개 대대의 화력앞에 몰살까지 갈 정도였으니 달리 말할 필요는 없는 상황이구요.
이렇다보니 사실 일부 사람들이 왜 중국이 대만을 침공 못하느냐 하는데, 지금 대만정도의 군비면 중국의 군사력 50% 정도는 바다에 수장 시킬 각오하고 가야 된다는게 군사 전문가들의 일반적인 평이기도 합니다.
중,월 전쟁의 결과
이 전쟁에 중국군은 20만명의 병력을, 베트남은 10만명을 동원하였다. 이 후 베트남은 중국군 41,705명 섬멸, 전차와 차량 421대 그리고 화포 66문을 파괴 또는 노획하였다고 발표한다. 이 전쟁에서 중국군은 징벌의 목적을 달성하였다고 성명을 발표하였지만, 피해는 예상외로 커서 중국 수뇌부에게 많은 충격을 주었다. 중국의 11개 사단이 괴멸적 또는 중대한 손실을 입는 예상외의 타격을 받은데에는 베트남군이 열세한 병력에도 불구하고 숫적 열세에 대한 두려움을 갖지 않았고, 미국제 M113장갑차와 소형무전기 같은 상대적 첨단 장비를 효과적으로 이용하였기 때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1979년 발행된 중국군의 보고서는 보병의 돌격에 의한 인해전술은 현대전에 적합하지 않은 과거의 전법이며, 중국군 역시 과거의 군대에 불과하다고 자체 평가를 하게 되며, 1982년 부터 중국군 현대화 작업에 들어가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