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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부담과 도피
최원준 시집 『북망』/2009. 12.10 신생, 92쪽.
강 영 환
1.
시를 흥미롭게 읽히게 하는 것은 완성도일 것이다. 미완의 시를 읽어낼 만큼 인내심이 풍부한 독자는 없을 것이다. 시집 앞쪽부터 몇 편 읽다보면 느끼게 되는 완성도에 따라서 전체를 읽느냐 아니면 몇 편 읽다가 던져두느냐가 결정된다. 물론 내가 보낸 시집들도 그런 대접을 당하지 말란 법은 없다. 시의 완성도는 즐거움이고 행복이다. 그것은 시적인 표현에 달려있고 상식적이거나 일상적이거나 하여 전혀 새로움을 담아내지 못한 시들은 완성도를 따질 수 없다. 완성도가 되었다싶은 시집을 읽어 가다보면 시인이 작품에서 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곰곰 따져본다. 그리고 그것을 찾았다면 작품집이 지닌 장점, 단점, 그리고 지향점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본다. 일반 독자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겠지만 시를 쓰는 한 사람으로서 다른 시인들의 작품집을 대할 때는 남다른 시선을 가지고 접근하는 게 직업의식처럼 되어버렸다.
시인은 왜 시를 쓰는가? 하루에도 전국적으로 수백 권의 시집이 출간된다고 하니 시가 사람들에게 좋은 작용을 하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팔리지도 않는 시집이 꾸준하게 출간될 수 있겠는가. 쌀값이 낮아도 농부가 벼농사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시인은 새로운 세계에 대한 욕구를 버릴 수가 없다. 지금껏 축적되어온 시가 가진 영역에 만족하지 않고 늘 새로운 영역을 찾아 나선다. 시인은 한 마디로 세상에 만족하지 않아야 한다. 현실에 만족한다면 그는 시인일 수 없다. 시인이라면 파괴를 일삼아 낡은 의미를 새로운 의미들로 바꿔치기 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에 시인은 보수주의자가 아니라 진보주의자여야 한다. 그러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시인 추방론을 들고 나왔던 것이 아닌가. 이것이 시정신의 치열함이라고 해도 된다. 시가 존재를 탐구한다고 볼 때 시인의 명명작업은 이것에 합당한 노동이며 시의 성취는 남다른 댓가로 주어지게 된다. 그래서 시인은 행복하고 그 맛에 시를 쓴다.
2.
1987년 무크지 ‘지평’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1995년 ‘심상’지 신인상을 수상하며 시단에 이름을 올린 최원준 시인이 『오늘도 헛도는 카세트테이프』, 『금빛미르나무숲』에 이어 세 번째 시집 『북망』을 상재했다.
시집 『북망』을 읽어 내는 데는 힘이 들었다. 자꾸만 <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따라 다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솔직히 시편들이 내게 흥미를 주지 못함이 이유였다. 물론 시가 흥미를 지녀야 한다는 것은 아니지만 읽을거리 중에서 시집을 선택하였을 때는 시가 가진 흥미성에는 별스런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시가 가진 창조성이며 시세계의 차별화며 스스로 내뿜는 신선함이다. 이런 등등의 이유로 표현될 수 있는 독자의 선택은 한마디로 참신함에서 찾는 흥미일 것이다. 이런 것이 시가 가진 흥미 또는 재미라고 할 때 『북망』이 지닌 지루함은 또 다른 이유에서 반역이 될 수 있다.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다루고 있는 주제의 무거움 뿐 아니라 표현들이 발 빠르지 못하고 끈적거리면서 자꾸만 뒤통수를 끌어 당겼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북망』에 사용된 언어가 예사롭지 않다는 의미도 포함될 것이다.
시집 전반부에 배치된 「북망」 연작은 길을 소재로 한 삶에 대한 강열한 욕구를 담고 있다. 그것은 평론가 구모룡씨도 해설에서 ‘전생과 후생의 경계인 “북망”은 부정이 아니라 긍정의 양식이다’고 설파한다. 저자도 서문에서 ‘우리가 이생에서 더욱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 미리 가보는 ‘길 떠남’ 임’을 밝히고 있는 것처럼 북망에 이르는 길이나, 북망이 삶에 드리워진 그늘이 퇴행적 사고를 끌어오기보다는 극복과 화해의 제스츄어를 담고 있다. 그러기에 북망은 죽음에 대한 해석과 의미를 새롭게 천착하려는 보고서라기보다는 죽음에 이르는 길에 대한 고찰에 합당하다. 그 고찰은 철학적 사고나 주제의 무거움으로 인해 접근이 용이하지가 않다. 삶의 영원한 주제 즉 삶의 목표, 생의 목적 탐구에 해당하는 두터운 장막이 쉽게 걷히지 않는 시편들이기에 쉽게 읽혀지지 않았다.
비는 첩첩산중.
잘 풀어놓은 산수풍경을
후드득 후드득
그어댑니다.
칼집 난 산허리쯤
푸른 물,
소용돌이로 휘감깁니다.
첩첩, 산의 무릎이 잠깁니다.
발목께의 급한 물살이
천길 나락입니다.
계속 슬어대는
첩첩 산중의 굵은 빗금
그 빗금 따라, 길이 납니다.
오호라!
물길 속에서 北邙이 보입니다.
「북망-첩첩산중」전문
최후에 물길 속에서 보이는 북망은 애초 빗줄기 속에 있었던 길이었다. 비가 내려서 내를 이루고 강을 이룬 뒤 호수나 큰 바다에 이르면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정형화된 길이다. 그러기에 물의 시작은 바로 끝이 예정되어 있는 물길로의 여행, 그것은 끝없는 반복이며 정형화된 삶의 은유일 것이다. 누가 그것을 돌려 놓는다해도 이미 획정되어진 물길의 끝은 소멸로 정해져 있다. 많은 시인들의 작품 속에 강물, 혹은 계곡물의 흐름을 삶에 비유하여 노래한 것이 많다. 인간의 삶과 죽음을 상징하는 것으로 차용한다는 의미다. 결국 최시인이 첩첩산중에 떨어진 빗방울 속에서 ‘북망’을 읽어내는 것은 이런 삶에 대한 성실한 성찰이 있었기 때문이라면 과장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북망으로의 연결은 독특한 발상이다. 특히 연작일 경우에는 더욱 흥미를 느낄 수밖에 없다.
시를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 시의 흥미를 보자. 수준을 높이지 않더라도 생각의 차이를 발견하고 싶은 것이다. 생각의 차이는 바로 개성있는 시적 표현을 말한다.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상식이거나 쉽게 말해 질 수 있는 생각의 차이는 바로 얼마나 개성있는 표현을 지니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상식이거나 쉽게 말해질 수 있는 표현이 아닌 것 때문에 시인을 숭배하며 많은 책 중에서 선택의 손을 시집에 가져가는 것이다. 최원준 시인에게서 찾는 개성이라면 끈적거리는 언어와 도발적인 발상을 말할 수 있겠다.
우리가 시를 쓸 때 흔히 차용하는 소재 즉 신화나 정형화된 인물, 사물들을 원형이라고 부른다. 다시 말하면 원형이란 어떤 사물이 가지고 있는 근원적인 양상을 이르는 말이다. 시에 사용하는 대상(사물)들은 모두가 보편적인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보는 이러한 견해는 물론 관념적이긴 하지만 시인에게는 소중한 의미를 제공해 주고 있다. 그것은 그 사물이 가진 의미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풍요하게 해 주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북망』에서 추구하는 것은 일상성에서 부닥치는 부담과 반성이다. 끈적거리는 언어와 도발적인 발상을 바탕으로 구축된 대표적인 시 한편을 살펴보자.
나뭇가지 위에 걸어둔 책상은 그대로 매달려있다
팽팽한 책상 속, 활시위를 당긴다.
투명한 음률로 화살은 태양을 향해 날아간다.
그곳에는 몸 활짝 열린 아내가 있다.
매번 화살은 아내에게 도달하지 못하고
책상은 태양으로 인해 절망한다.
흔들리는 금빛가지 위에서
끊임없는 책상의 허방
태양을 향하지 못한 활시위
아내를 품지 못하는 책상은
더 이상 책상이 아니다
나뭇가지 위에 걸려있는 책상은 그대로 매달려만 있다
「책상과 아내」 전문
이 시에 차용된 책상과 아내는 지극히 일상적인 소재다. 그것들에 표피적인 접근이 아니라 내면적 갈등 관계를 지향한다. 책상은 집필활동을 하는 시적화자를 상징하는 매개물이다. 그리고 아내는 태양 속에서 몸을 활짝 열고 있다. 아내를 향해 화살을 날리지만 결국 태양의 눈부심 때문에 책상은 아내를 품지 못한다. 도달하지 못하는 집이나 아내에 대한 포기할 수 없는 안타까움을 바탕에 깔고 있는 모티브, 즉 원형은 길, 숲, 황금, 자궁이라는 언어로 드러난다. 이런 원형들이 집착과 갈등을 유발하면서 상징적 상황을 연출하고 일상성을 훌쩍 넘어 책상과 아내는 다른 세계에 닿게 된다. 특히 집이나 길로도 변용되고 있는 아내가 상징하는 것은 무엇이며 거기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집착은 한 마디로 시적화자에게 아내에 대한 부담이 작용한 것은 아닐까.
시는 수단으로서의 언어가 아니라 사물로서 언어를 특질로 한다는 싸르트르에 의하면 시인이 사용한 언어는 특별한 생명력을 지녀야만 시 속에서 살아 있게 된다고 한다. 일상적 의미의 언어를 초월하여 시인만이 지닌 새로운 의미를 창조한다는 말이 된다. 『북망』에서 느낄 수 있는 점도 그것이지만 아내가 다른 의미를 품고 있고 그것은 어쩌면 아내에 대한 부담을 드러낸다고 볼 때 새로운 생명력을 지닌 아내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적 활동이 곧 언어로 화한다는 이론을 펼치고 있는 파겟은 <제스츄어 언어론>을 내세운다. 그에 의하면 사람이 무엇인가를 손으로 잡을 때는 혀, 목구멍의 근육조직은 그의 잡는 행위를 반영한다는 것이다. 이 때 입에서 나오는 한마디, 잡는 자세에 <소리>를 줄 때 우리는 그 소리를 언어로 수용하는 것이며, 어떠한 행위를 할 때에도 그것을 표현하고자하는 입의 근육에 의해 이미 상징은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에서 버크는 시인이 시를 쓰는 행위에 이 이론을 접목시키고 있다. 다시 말하면 시인은 그를 깊이 괴롭히는 세계 곧 <부담 burden>에 대해서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부담은 질병 같은 육체적 본질을 내포하며 재산을 모아 빚을 갚듯이 이 부담의 축적과 그 축적에 대한 통찰을 기초로 생에 대하여 승리하고자 한다. 곧 시인은 자기의 약점 속에 귀속적 이점을 갖게 됨으로써 승리한다는 것이 버크의 생각이다. 따라서 이러한 약점들, 고통들이 시인의 문체를 태어나게 하고 그 문체는 또한 시인의 육체적 질병과 은밀히 연관되는 것이다. 모든 상징적 행위의 주제는 이러한 부담, 육체적 질병을 지향하는 것입니다. 곧 <부담>은 문체를 상징하고 문체는 부담을 상징하는 것이 된다.
무덤 속 내 아이 보러 가듯 끊임없이 질척대는 그 자궁길 들어서면 가도가도 기약 없는 금빛미르나무숲 언덕. 내 두 손에서 뻗어 오르는 푸른 넝쿨 잎으로도 내 부끄러운 음부 가릴 수 없네.
「터널을 지나며」부분
『북망』에서 아내라는 모티브를 잡고 끈적거리는 이유가 바로 부담이라는 것이다. <책상과 아내> 연작에서 보이는 것처럼 아내와의 부조화는 이 시집의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된다. <내 서재는, 잠시 끼어든, 나비의 틈을, 좀처럼, 메우지 못하고 있습니다>(나비) <집사람이 시든 꽃다발을 들고/그녀의 고치 속으로 돌아가는 이유가…>(<고치 속의 아내) <아내라는 이름에는 가시가 있다… 아내의 치마폭으로 끌려들어 가고… 나는 꽃에 갇힌다> (꽃에 갇히다-책상과 아내․3)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아내는 시적 화자가 느끼는 가장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고 그 의미는 여성 전체로 확대되고 있음을 본다.
3.
최시인의 작품은 모더니즘적 발상에서 출발하여 서정시로 몰입해 가는 과정에 있는 듯이 보인다. 현대시가 명확히 선을 그을 수 있는 경계를 지닌 것은 아니지만 어떤 시든 서정성을 바탕으로 함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런 가운데에서 『북망』에 게재된 작품들은 서정성에 더 치중되어 있음을 본다. 그의 시의 변모는‘금빛 미르나무 숲’이라는 다소 애매모호한 이상 세계로부터 돌아왔다. 현실로 돌아와 먼저 맞닥뜨려진 것은 아내였고 현실인 아내로부터 느끼는 적극적인 인식 끝에 닿은 북망, 즉 죽음이라는 현실세계의 궁극을 떠올린 것으로 보여진다. 어쩌면 그는 금빛미르나무 숲으로 도피하고 싶었던 것도 줄기차게 피어오르는 부담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 도피가 현실을 극복하게 해주지 못하는 것을 깨닫고 다시 돌아온 곳이 북망이다. 북망은 현실과 이상 세계의 경계지점이다. 그렇다면 이제 그는 위로부터 아래로 내려서고 있는 과정에 들어섰다. 그리고 이윽고 닿은 현실 세계는 자연을 상징으로 앞세운 서정성에 눈을 뜬다.
거제 동부면 솔섬 앞에 눕다
바람이 대나무숲을 데려와
내 옆에서 곤히 잠들다
그믐달 하나, 여우 울음소리로
캥, 캥- 멀리 산을 넘고
섬 옆 늙은 어선 하나, 길게-
파도 꼬리 물고 내 꿈으로 귀향하다
여인 하나,
부드러운 살결로 내 빈 몸 덮쳐,
푸른밤 몇 밤 같이 보내다
동부면 솔섬 앞, 동박새-
정말 따뜻한 비를 맞으며
「동박새」전문
현장성을 동반한 서정적이다. 『북망』은 이미지 사이에 놓인 끈적거리는 공간이 시를 어렵게 읽히게 하였고 모더니즘적 사고의 경계에 놓이게 하였다. 구체성이라는 과제를 해결했을 때 선명한 이미지가 살아나고 있는 것을 본다.‘금빛미르나무 숲’이 주관적 세계였고 상호 교통하는 통로를 차단한 내적 이상세계였다. 그것은 결국 부담으로부터 도피라 본다. 그러나 『북망』은 현실성과 구체성으로 가는 과도기적 모습으로 보았다. 도피로부터 부담에 대한 도전과 응전으로 돌아오는 과정이다. 망설이는 모습이 군데군데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인다면 생경하고 심하게 튀는 이미지인 ‘뜨악한 표정’(세치 혀의 텃밭), ‘불콰해진 볼에 생기가 돌고’(똥꿈)들이 시집을 내려놓고 난 뒤에도 왜 그랬을까? 하는 의문이 가시지 않았다. 한마디의 말이 못이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을 힘들게 하는 부담을 탈피하여 새로운 응전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힘이 필요해 보인다.
시는 이념적 도구로써보다는 인간의 근원적 사고활동의 표상이다는 프라이의 말처럼 ‘화해의 형식’이라는데 그 진의가 놓인다. 시를 공부하는 우리는 그 점을 새삼스럽지만 단호하게 인식하자는 것이다. 시는 시 자체일 뿐 다른 그 무엇은 아니라고 말할 때 그 말 속에 스며있는 의미들은 무엇이겠는가? H.오든에 의하면‘예술은 인생이 아니며 또한 사회의 산파역도 될 수 없다. 시는 시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시를 시 자체로 살핀다는 것은 결국 시를 소재주의 혹은 주제주의적 측면에서 벗어나 하나의 객체로 본다는 말이며 그것을 우리는‘상호주관성의 세계’라고 부를 수 있다. 『북망』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면 관점의 지나친 주관성 때문일 것이다. 이해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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