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세기 이전까지의 중세 유럽 사회는 영주와 농민의 봉건사회였고, 정신적으로 초기 기독교 지배 하에 있었으나, 차츰 도시가 발달되면서 영주들이 몰락하게되고 농?상인들의 지위가 향상됨으로써, 신흥세력이 낡은 사상이나 문화를 개척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변화를 "르네상스"라고 하며, 사실상 "르네상스"란 Renaissance 즉, ‘어둠의 광명으로의 뜻’이 담긴 말이다. 기독교에 의해서 억압받고 통제 받았던 상은 14세기 이탈리아에서 시작한 르네상스에 의하여 반발화가 일어나서 성에 대한 솔직한 표현인 나체화 등의 유행과 함께 마법술이 성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남녀 각성에 각각 그 성에 해당하는 악마(Demon)가 존재한다고 믿고 마법사를 통하여 상상적인 악마와 성관계를 갖는 일이 생겨났을 뿐 아니라 동성애와 이성애가 다시 성행하였습니다. 이에 교황 인노센트3세(1485-1495)는 교황권을 발동하여 마법사와 그 신봉자들을 잡아들여 처단하였지만 악마의 신봉은 1650년대 최고조에 달하여 18세기 말 산업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수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당시 마법사들은 신자들의 성생활에까지 지대한 영행을 끼쳤기로 성의 불능, 기능부전, 불임, 임신, 유산, 사산 등에 관한 여러 문제들을 마법을 통해 해결하려 들었던 것이다.
이렇게 14세기 이탈리아에서부터 시작된 르네상스는 16세기 독일을 거쳐 18세기에는 프랑스에서 그 문화의 꽃을 피우게 된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는 와에서부터 성이 매우 개방적이고 호색적이어서 그 영향이 귀족이나 농민계층까지 전파되어 성이 매우 문란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와 같은 르네상스시대의 사회문화는 전통적인 윤리 도덕적 계율의 속박에서 벗어나서 자유분방한 문예 작품들을 보면 인간의 위선 종교의 박해 그리고 성의 문란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게 되었다. 결국 퇴폐나 외설이라고 할 정도의 상상하기 힘든 작품들이 많아서 근래까지 금서로 간행이 금지되었던 것이 많았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르네상스시대의 성문화를 보여주는 작품들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자.
1. 반아이크 “아담과 이브”: 인간의 건강과 자연스러움을 강조 하였다. 임신한 여성을 아름답게 본 작품.
2. 루카스 크리나흐 “청춘의 샘”
*결혼 피로연과 목욕탕 -연예인 동원한 목욕 풍속도
독일인들의 목욕습관은 고대 게르만 민족 시대부터였다. 독일인들은 목욕을 즐기는 민족으로서 스칸디나비아에서 시작한 사우나목욕 그리고 온수와 냉수욕은 건강을 위해 널리 서민 계급간에서 이용되어 오고 있었다.
보통 주 2회 정도로 목욕탕을 이용했었다. 대부분의 공중탕으로서 남녀가 함께 할 수 있는 혼욕이었다. 이것은 14세기 초 연방국가 시대부터였다.
E.훅스의 『그림으로 보는 풍속사』에 따르면 그 입욕풍습은 남녀 모두가 벌거숭이로 국부에 자그마한 천이나 수건을 가리고, 아니면 허리를 천으로 감쌀 정도일 뿐이었다. 하지만 일단 목욕탕에 들어가게 되면 그러한 가리개는 소용이 없게 되었다. 탕안에서 나올 때에는 널따란 나뭇잎으로 가리고 나왔었다. 여성들도 마찬가지로 수건으로 치부를 가리고 나왔다. 하지만 이러한 목욕습관은 건강이란 이름하에서였지만 성적인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세상 모든 것이 절제되지 못하고 동물적인 충동만이 거칠게 작용했던 중세에서 공중탕은 금방 음탕한 장소로 전환하고 말았다. 남성들의 대화는 외설스러웠으며, 끼리끼리 모여서 여성들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몸매를 평하는 품평회로 전락되었다.
E.훅스는 『신랑신부는 예식에 참석한 축하객들과 함께, 그리고 연예인들까지도 동원하여 결혼축하 피로연으로 목욕을 즐겼다고 한다. 그것은 몸을 깨끗하게 하기 위함이었으며, 물론 그것은 하나의 구실일 뿐이었다. 그것은 원시인 그대로의 아담과 이브의 상태로 돌아가 술을 마시고 노래하며 환화하며, 결혼식을 축하해 즐기는 일이었다.』라고 당시의 풍속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에로틱한 무례한들의 난장판이었으며, 난무 바로 그것이었다. 이러한 결혼 목욕의 향연은 당국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뮌헨 당국에서는 『신랑신부측에서 각 6명씩 합계 12명의 여자만이 동석할 수가 있다.』라고 하여 지나친 광란과 호색에 빠지는 것에 철퇴를 가했다. 이렇게 공중탕의 서행은 남녀의 사교장으로 변했으며 목욕탕 주인은 매춘부까지도 고용하여 일종의 공창으로까지 전락하게 되었다. 르네상스기에서는 그 번창함이 이루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극치를 이루었다.
↑ 청춘의 샘 작품을 더 확대하여 본 그림들.
그림자료출처: http://blog.naver.com/swwyang?Redirect=Log&logNo=100013397143
3. 중세의 매춘부들
매회 식사는 담등품으로서 수프, 육류, 순무만이었다.
육류를 먹지 않을때에는 정어리 한마리를 주었다. 만약 여인들이 임신하세 괴면 추방을 했고, 빚을 갚게 되면 여인들은 매춘생활을 그만두고 자유로운 몸이 되었다. 만약 취업중 병사라도 하게되면 반드시 쓰레기더미 속에 파묻었거나 아무렇게나 시체를 버렸다.
또한 매춘부가 될 자격은 독신이어야만 했고, 성병환자는 제외되었다.
보수도 아주 적었는데, 말하자면 유곽에서는 독일 화폐로 1마르크 이하였다. 이 1마르크는 계란 한개 값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얼마나 그녀들의 생활이 빈곤하며 비참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또한 값이 싸다고 하는 것을 봤을때 얼마나 매춘부가 많았는지 알 수 있다.
이탈리아나 독일의 매춘부들은 노란색 옷을 입게 하거나 어깨에 노랑 리본을 달아 일반여자들과 식별될 수 있게 했으며 필렌체에서는 모자에 작은 방울을 달게 했고, 라이프치히에서는 파란쓴이 달린 노란 방토를 입는 것이 의무화 되었다. 또한 금과 은은 물론이고 보석류의 장신구도 지니면 안되었고, 자수로 수놓은 옷도 입어서는 안되었다. 지정장소로부터의 외출이나 외박도 금지 되었으며, 영국에서는 교회의 미사나 예배도 거부되었다고 한다. 이렇게 매춘부들은 노예 이하의 생업일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