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이씨는 장양공파 본관이 아닌가요
함풍이씨와 함평이씨는 원래 같은 씨족이었다. 이것도 계유초보 까지였다. 계묘초보 서문을 작성한 장양공 이종생 7세손 이자(李滋)라는 분이 고려시대부터 내려온 함풍부원군의 후손들을 폄훼할 목적으로 함풍이씨라 명명한 본관을 지역의 관향으로 둔갑시켜 함평이씨로 만들었다. 이것은 세조13년에 최부라는 사람이 장양공 이종생 묘갈명에 이종생을 함평군이라 기록한데 그 근거가 있다. 이것이 이종생을 함평이씨 중시조로 만든 이유다. 족보상 이종생의 선조가 수두룩한데 왜 하필 이종생이 중시조인가? 여타 족손들은 들러리이기 때문이다. 장양공파들은 1957년도에 함평군파보를 편찬 국립도서관에 기증했다. 함평이씨 대종회 이계선씨는 2012년에도 함평이씨파에는 함평군파가 없다고 일갈했다. 그렇다면 실존하는 함평군파보는 무엇이란 말인가. 종통을 거머쥔 자들이 전횡하는 일 들을 들러리 다른 파종들에게 알릴 필요 없다는 논리다.
이는 한마디로 자(滋)씨가 선조인 이종생을 높이 올리고 미화시키기 위한 작업의 시작이었다. 이로 인해 이림의 장양공파와 함풍이씨 시조 이광봉 후손인 남산파 간의 악연이 시작된 것이다.
원래 자기조상 두둔하는 것이 효의 일부일지는 몰라도 경파(장양공파)와 향파간(남산파)의 동성동본의 씨족끼리 서로 다투는 양상이 그 정도를 넘어 참담하고 비극적이었다. 족보사실록의 저자 이사직 눌행재부군의 둘째아들 정규라는 분이 사산사에서 사실록을 유포한 죄목으로 치도곤(治盜棍:도적을 다스리던 곤장)이 혼쭐이 났고 장양공파 어영대장 창운이가 참판공파 억창이를 뒤주에서 죽였다는 말을 선조로부터 들었다는 이기범님의 주장이 이를 말해준다. 더욱이 함풍후손들은 족보를 해보려고 경파들에게 애걸복걸 맞아가며 족보수단을 경파보청에 들여놓고 쫓기듯 나와야만했다. 이 말은 지금도 전 총무 이재정님이 선조로부터 전해들은 이야기라고 들려주고 있다.
장양공파와 그 추종자들은 우리 성관을 말살하고 시조부군을 내친 철천지 원한의 종파이었다.
세도로 탄압하고 권세로 억압하더라도 본관과 시조부군을 내친 경우는 아마도 드물 것이다. 철종4년 광봉파와 같이 족보할까 두렵다는 경중통문이 바로 이런 경우다. 같은 자손이었다면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동족간의 다툼이다.
이를 미루어 장양공파는 함풍부원군의 후손이 아니고 철성부원군 이림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이유다.
함풍이씨 족손들은 400년 넘게 일개종파의 전횡에 조상을 잃고 선조를 모멸시키는 수모를 당해야만 했다. 장양공파와 그 추종자들이 씨족 역사를 말살하고 문헌을 조작한 증거들이 발견되고 있다. 함평이씨 족보에서 발견된 호구변의와 환부역조가 그것이고 장양공 이종생이 중시조라 지칭하는 것도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장양공파는 종손이며 양반이고 다른 후손들은 중인정도에 속한다는 인종적 열등감을 주고 함풍이씨의 존재를 말살하려는 잔인한 씨족간의 수난사였다. 부원군후손들은 철저히 장양공파의 희생양이었다.
경파들이 득세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물질을 대가로 전위대 역할로 일조 한 광봉조 후손들의 후안무치도 일목했고 또 종손의 자격으로 중인들과 무호적자들과 이완용 선조들을 붙이기로 족보에 기록해주며 우군을 양산했다. 이것은 당시 종통을 거머쥔 장양공파의 전횡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처럼 장양공파는 함풍이씨 족손들에게 지은 죄도 많지만 종통을 좌지우지하며 족보 없는 이들을 족보 편수로 얻은 경제적 이득도 상당하리라. 이는 자기들 죄과로 파생한 함풍후손의 고통에서 쾌락을 즐긴 꼴이다.
그러나 오늘날 과거 그들의 영민함과 기회포착의 영리함과 적절한 물질제공에 그런 힘을 발휘한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누구이든 자기가 자기에게 유리한 것을 챙기는 것은 나무랄 일이 아니다. 하지만 400년간 자격 없는 종통을 권세로 거머쥐고 적통 부원군후손들에게 조상을 잃게 하고 환부역조시키고 호구변의로 장유 항열을 도치시켜 짐승만도 못한 숙형제질의 질서를 뒤집어 놨다. 이런 점들에 대하여 그 과정에서 자기들이 함풍선조를 모멸하고 후손들에게 선계를 잃은 고통과 어려움을 준 것에 대하여 부인해서는 안 된다. 이런 것들을 죄스러워하고 그로인해 뿌리 잃은 후손들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배려할 줄 아는 예의와 양심은 있어야하는 것 아닌가. 수 백 년을 양반 오리지널로 행세한 자들이니 말이다.
함평이씨 전 부회장 이계선씨와 임원진들은 예의와 양심은커녕 이와는 정반대의 길로 달려왔다. 이계선씨는 족보의 잘못된 부분을 금석지문이라고 호도했다가 확실한 문헌이 나오자 인문조 기성군은 문헌에 따라 인검조의 후손이라고 인정했다. 기가 찰 노릇이다. 자기들이 위조할 수 없는 문헌이 나타나자 이계선씨는 단단한 방패 금석지문이란 사자성어를 망각해야했다. 함평이씨는 지금 정체성에 혼란을 느끼는 이상한 문중으로 가고 있다. 증세가 치매성인지 어제의 금석지문이 오늘은 변동지문으로 변했다. 이것이 장양공파와 그 추종자들의 현실이다.
이들이 지금 기존의 망측한 족보를 국역해서 발행한다고 한다. 반드시 편찬되기를 바란다. 그래야 10여만 함평이씨 후손들이 그 망측한 사실을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것이 아닌가. 그 후폭풍이 거셀 것이다.
그러하길 원하지 않는다면 지금이라도 양심선언을 해야 한다. 과거는 잘 몰랐다고 사죄해야한다. 이제는 사필귀정이다. 모든 정보가 들어나고 있다. 잘잘못은 백일하에 드러난다.
장양공파와 함평이씨측은 망측한 족보를 숭고히 받들지 말고 좀 더 연구하고 공부해서 조상에 대하여 개과천선하기를 바라마지않는다.
2014년 2월 28일
율 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