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아픔과 이 조국의 아픔!
그 소리없는 고통이 저 청춘들을 거두었다.
넋이여, 고이 잠드소서.
저 넓은 바다에 그대의 꿈 묻고, 고이 잠드소서.
백령도와 대청도는 해군현역 시절 숱하게 출동나갔던 곳이다. 백령도 얘기만 나와도 가슴이 미어지는 것은 24년전 경험했던, 아직도 아물지 않은 아픔 때문이다.
1986년 11월 초순! 언제나 새로운 느낌을 주는 백령도 출동이 그후 나에게 얼마나 엄청난 고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LST 00함은 미끄러지듯이 인천항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백령도에 도착하기까지는 거의 하루 정도가 소요되었다. 백령도의 남포항은 만조때 백사장에 비칭(beaching)하게 한 후 간조 때 군수물자를 내릴 수 있게 되어 있었다. LST는 수송함으로써 대단위의 병력이나 군수물자를 운반하는데 활용된다. 아침에 도착할 때만 하더라도 평소와 다름없는 날씨이지만 너울의 파장이 다소 크다는 느낌을 가졌을 정도였다. 함포지휘를 하는 포술장이었던 나는 입출항시에는 함미(艦未)를 책임지도록 되어 있었다. 물자를 반정도 하역한 후 오후가 되니까 바람이 거세지면서 풍향이 동쪽(확실하진 않지만)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 큰 배의 움직임이 홋줄로 고박이 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동네 촌로가 나타났다. 수십년동안 백령도에서 살고 있어 이맘 때 어떤 특이한 기상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는 것을 얘기하면서 특히 풍향이 동쪽(?)으로 바뀌었을 때에는 심상치 않기 때문에 배를 빼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러나 인천기상대는 특이한 기상현상이 없다는 회신을 했다.
함장이 결단을 내렸다. 홋줄과 와이어로 고박을 강화하여 그 자리에서 버티자고 했다. 그런데 지시하는 과정에서 혼란이 발생했고, 와이어가 한쪽 스크류에 감기고 말았다. 당시 SSU(수중잠수요원)가 동승하였지만 와이어 절단을 위하여 잠수하기에는 파도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했다. 누군가 지금이라도 한쪽 스크류로 배를 빼자고 했다.
함장은 자신의 결단을 굽히지 않았다. 함수(艦首)에 지름 15cm의 대형 홋줄로 보강하라고 지시했다.
저녁 7시경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휘오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해면에서 브릿지까지 약 7층정도 건물높이의 대형함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파도가 함교(bridge)를 덮었다. 한낱 종이배와 같았다. 함미쪽이 육지쪽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겹겹이 보강을 했던 홋줄이 금방 터질듯이 팽팽해지더니, 곧이어 육상의 2미터짜리 비트가 뽑혀져 나가고 폭음과 함께 홋줄이 터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터진 홋줄이 이러저리 춤을 추며 육상에서 보강작업을 하던 병사들을 무차별적으로 내리쳤다.
박모 병장, 00대 법대 4학년 휴학 후 제대 휴가 가라고 했음에도 마지막 추억 때문에 탑승한 착한 친구였는데, 홋줄에 배를 맞고 허리가 꺾이면서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김모 일병, 순진하고 항상 잘 웃던 녀석, 홋줄에 가슴을 맞고 갈비뼈가 모두 으스러지면서 현장에서 즉사했다. 양모 상병, 나하고는 고향이 같고 육체미 운동을 해서 신체가 건장한 녀석이다. 사격훈련 때 탄피 하나를 빼돌리려다 나한테 엄청 얻어 맞기도 하였지만 의리가 있어 나는 녀석을 좋아했다. 홋줄이 녀석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눈가가 부어오르면서 머리는 평소보다 2배로 커졌다. 뇌를 다친 것이다. 평생 불구로 살아야 하는 중상사고다.
배는 완전히 통제불능 상태로 되었다. 해변가에 수평으로 걸쳐져 파도가 칠 때마다 바닥을 꽝꽝 내리치면서 함미쪽 바닥이 찟겨지기 시작했다. 바닷물이 침수되면서 함미쪽에 탄약과 무기가 걱정되었다. 전원이 모두 차단되고 비상 발전기로 돌아가는 전구 몇 개에 의지하여 탄약고에 이상이 없나를 살펴 봤다. 아니나 다를까 탄약고에 파공이 생기며 바닷물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최고참 상사인 병기장에게 병사들과 함께 들어 갈 것을 명령했다. 그러나 명령은 거부당했다. 목숨이 더 중하다는 이유이다. 할 수 없다. 나 혼자라도 해야 한다. 옷을 벗었다. 영하의 날씨였지만 별로 춥다고 생각되지도 않았다. 요동치는 배안에서 긴줄을 늘어 뜨린 백열전구가 깨지면서 누전이 될 수 있고, 과연 물속에서 30kg이 넘는 탄약통 100여개를 어떻게 옮길 것인가 하는 걱정은 나중에 하기로 했다. 부하들의 그런 주검을 봐서 그런지 이상하리만치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물속은 이외로 따뜻했다. 탄약통도 훨씬 가벼웠다. 줄을 내리라고 했다. 탄약통에 줄을 묶고 당기기를 수차례, 하사 한명이 옷을 벗고 내려왔고, 그러자 주춤거리던 사병들이 줄줄이 옷을 벗어던지고 내려와 평소보다도 탄약 운반작업은 훨씬 수월하게 끝이 났다.
구조요청을 보낸지 이틀 후 기상이 호전되면서 00함이 왔다. 우선적으로 배를 해변으로부터 이탈시키는 데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 배가 자력으로 움직일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기 때문에 00함의 함미와 우리 우리 배의 함수가 예인 줄로 연결을 시켜줘야 함에도 그 작업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불행하게도 그 시간대에 조류는 북쪽으로 빠른 속도로 흐르고 있었고, 우리 배는 순식간에 파도를 따라 북방한계선에 이르렀다. 북에서 경비정을 보냈더라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가고 있었다. 비밀문건을 모두 파기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도 마쳤다.
어렵사리 00함의 예인줄이 우리 배에 걸려 더 이상 북으로 가지 않게 되었다. 사고가 난지 꼬박 일주일이 지나서야 인천항에 입항할 수 있었다. 그 일주일동안 세수도 못하고 건빵과 라면 등으로 연명하는 악몽같은 시간이었다. 물론 스스로 살아 있다는 것을 고마워 해야 되겠지만 말이다.
후에 나는 사고당시 탄약작업과 관련해서 진해에 복귀했을 때 여러 사람으로부터 칭찬하는 얘기를 듣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소용있겠는가? 부하들을 불귀의 객으로 보냈다는 자책감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군검찰은 이 사건을 천재지변으로 발생한 불가항력적 사고로 결론 지었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나 또한 이건 사고발생에 기여한 책임을 지겠다고 했다. 그런데 양모 대위가 한사코 말렸다. 아직 창창한 나이에 네 인생 길을 망칠 일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사고경위서를 쓰는 요령까지도 알려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게 또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라는 것을 왜 몰랐을까?
나는 김모 상사에게 백배사죄했다. 결국 김모 상사는 20여년의 군생활을 접고 얼마 후 전역해 버렸다.
그래서 함장에게 나만 징계를 받았으면 좋겠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피해가 돌아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징계위원회에서 나는 징계 중에서도 아주 가벼운 견책 3주를 받았다. 그것으로 끝이다. 그리고 스스로 나서서 징계받았다는 이유로 함장은 고향인 제주도에서 마지막 남은 군생활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사건이 발생했을 때 나이만큼의 시간이 또 한번 지나가고 있다. 휴전이라 해도 아직까지도 백령도 대청도 인근해역은 전쟁터다.
북한의 공격에 의하든 아니든 싸늘한 바닷물에 잠긴 PCC 천안함 대원들이 생명의 끈을 놓지 않고 살아있기를 간절하게 기도해본다.
<국무총리실 특별지시와 관련하여 회사출근하여 당직근무하면서 그 때의 일을 다시 정리해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