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의 체계 (1) _ 개요
수행이란
깨달음을 체득하기 위한 실천인데
깨달음은 어떻게 가능한 것이며,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수행의 원리는 무엇인가.
한마디로 그것은 본래 그러한 성품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다 알다시피
모든 중생은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수행이 가능한 것이고
성불이 가능한 것이다.
다른 말로,
일체 모든 것은 진여법성이 그대로 드러남이요,
법신 비로자나부처님의 현현이므로 다만 그것을 자각하기만 하면 곧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아무런 노력도 없이
그냥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무릇 계행이나 선정을 의지하면 마땅히 복이 되고,
경전이나 존상(尊像) 등을 짓거나 펴낸다면
반드시 뛰어난 공덕을 얻는 법,
자기에게 조그마한 현(賢)이 있는 것으로
짐짓 마음이 곧 부처라고 말하지 말라.
범부로부터 성위에 오르는 것이니 수행하지 않은 석가는 없었고,
거짓으로부터 진실에 드는 것이라 닦아 증득치 않은 달마는 없었다.
<만선동귀집 서>
달마대사나 부처님도 수행을 통해 가능하였고
모든 깨달은 분들이 수행하지 않고 증득한 이가 없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바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본성은 부처와 다르지 않지만
현재는 본성이 가리워져 있으므로
수행을 통해 본성이 드러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범부를 부처로 만드는 비법은 무엇인가.
자신의 본성을 드러나게 하는 원리를 찾아보자.
(2) _ 수행의 원리 _ 밖에서 안으로
우리는 흔히 우리의 몸과 마음이 '나'라거나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 몸과 마음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더군다나 세상일이야 내 맘대로 되는 일이 어디 있는가.
그렇지만 깨달음을 얻고 나면
무엇이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대자유가 생긴다.
왜냐하면 무엇을 하든 성품을 등지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물과 불의 성질을 잘 아는 사람은
이것을 이용하여 인간에게 이롭게 활용할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근본성품을 볼 수 있으며,
대자유인, 대 해탈인 이 될 수 있는가.
먼저, 그 동안 밖으로만 내달리던 모든 관심을 안으로 돌리는 것이 필요하다.
바깥의 대상을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만져보고, 생각하는 가운데
좋다, 싫다, 그저 그렇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그리고는 좋은 것은 붙들려고 하고, 싫은 것은 거부하며,
그저 그런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해진다.
여기에서 모든 번뇌와 집착과 무지는 시작된다.
모든 것은 이렇게 지각된 바탕 위에
감정과 생각과 논리와 판단이 따라 붙는다.
이렇게 만든 하나하나의 이미지들로 이 세계는 이루어져 있다.
그러니 그 세계는 당연히 나의 번뇌에 의해 세워진 환이며
물거품 같은 것이다.
따라서 이거다 저거다 정해놓고 쫓아가는 삶은
신기루를 쫓는 것과 같이 끊임없는 갈증만 증가 시킬 뿐
영원한 휴식과 편안함은 주지 못한다.
외부의 어떤 것에 얽매어 붙들고, 거부하고,
외면했던 삶을 안으로 돌려 붙들려고 하는 마음을 놓고
거부하려는 마음을 쉬고, 외면하는 마음을 알아차림으로써
그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고 깨어있을 수 있다.
외부로 향하던 관심을 안으로 돌려
안에서 일어나는 느낌이나 생각 등의 지어감을 알아차리고 깨어 있음으로써
이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수행의 첫 번째 원리이다.
(3) _ 수행의 원리 _ 있는 그대로 보기
이렇게 해서 마음이 쉬고 편안해지면
사물을 대할 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우리는 매일 물을 마신다.
그러나 과연 물맛을 재대로 느끼면서 마시는가.
아니면 그냥 마시는가.
물을 마실 때 있는 그대로 그 맛을 느껴보라.
소리가 들리면 그것이 욕하는 소리이건,
칭찬하는 소리이건 그냥 소리 그 자체로 들어라.
그리고 말하는 사람의 마음을 느껴보아라.
그리고 그 사람의 마음을 그대로 받아 주어라.
이것은 '욕'하고 분별하는 순간 듣기 싫은 마음이 솟아 오른다.
그러니 판단분별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느껴보아라.
있는 그대로 느끼는 것,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직관의 힘을 키운다.
분별이란 사물이나 현상의 한 측면만을 보고 판단하기 쉽다.
반면 직관은 그것을 전체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통찰력과도 같다.
물은 화학자에게는 H2O이기도 하고,
목마른 사람에게는 갈증을 달래주는 고마운 존재이기도 하고,
수해를 입은 사람에게는 두렵고 원망스러운 존재이기도 하다.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은 물을 한 측면만이 아닌 통체로 파악한다.
이러한 직관은
고정관념과 욕심과 경험 등의 장애 요소들이 사라지고
무심의 상태에서 그것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일 때 가능해 진다.
어떤 사물이나 감정이나 상황이 닥칠 때
일체의 판단분별을 떠난 무심의 상태에서 그대로 바라보면
그것이 되어서 그대로 느껴지기도 하고 진실이 알아지기도 하며,
모든 것을 대할 때 나와 대상이 분리되지 않고 곧
하나가 되어버림을 경험하게 된다.
이러한 직관력에 의해 고정관념으로부터 벗어나 진실과 만나게 된다.
우주와 나의 본성은 이러한 직관에 의해서 터득된다.
사람의 고통 가운데 많은 부분은 인간관계 속에서 생긴다.
또한 내 마음으로 그린 여러 가지 상(相)때문에 스스로 벽을 쌓고
나와 남을 갈라 놓는다.
이로 인해 서로가 서로를 소외시키며
서로 상처를 주고 받으니 은원(恩怨)이 끝이 없다.
이때 어떤 문제의 원인을 밖에서 찾지 않고 안으로 돌리며,
부분적 경험으로 판단분별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나와 너의 대립이 사라지고 모든 것은 조화가 이루어진다.
나를 세우지 않으면
결코 대립은 일어나지 않는다.
이 세상 모든 것이 하나의 조화로움임을 아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세계 모든 것이 귀하지 않은 것이 없고
감사하지 않은 것이 없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4) _ 수행의 원리 _ 알아차림
수행의 또 다른 원리는 알아차림이다.
현재 자신의 안과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아는 것이다.
알아차림이 깊어지면
그것이 일어남과 유지됨과 사라짐을 그대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집착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진실로 깨어있어야 한다.
깨어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들뜬 의식으로 대충 아는 것이 아니라
고요 속에서 여실히 아는 것이다.
우리는 한 순간도 숨을 쉬지 않고는 살 수 없다.
그런데 이 숨쉬기에 얼마나 깨어있는가.
숨쉬고 앉고 서고 걷고 말하고 듣고 생각하고 밥 먹고 자고
일하는 일상생활 속에서 몸 가는데 마음 가도록 하여야 한다.
따라서 부처님의 마지막 설법 중에 알아차림을 잃지 말라고 하셨다.
선지식을 구하고 선호조(善護助)를 구하는 것은
생각을 오롯하게 하여 알아차림이 지속되게 하는 것만 못하다.
만약 알아차리는 상태가 흩어지지 않고 지속하면
모든 번뇌의 도적이 능히 들어올 수 없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항상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는 염(念)을 거두어
마음이 일어나는 상태를 잘 살펴야 한다.
만일 알아차려 각찰(覺察)하는 힘을 잃어버리면
모든 공덕을 잃어버릴 것이며,
만일 알아차리는 힘이 굳고 강하면
비록 오욕의 도적 속에 들어가더라도 해침을 받지 않을 것이다.
비유컨대 갑옷으로 무장하고 적진에 나아가도
두려울 것이 없는 것과 같다. <유교경>
(5) _ 수행의 원리 _ 지금 여기
알아차림이 가능하게 하는 것은
지금 여기에 있음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버렸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오직 현재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현재라고 하는 것도 한 순간도 머무르는 바가 없으니
오직 지금 이순간에 집중해야 한다.
과거나 미래가 아닌 바로 지금 이순간 나는 여기에 있다.
따라서
마음이 다른 곳으로 달아나지 않도록
지금 여기에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마음을 모음으로써
언제나 깨어있을 수 있다.
상념과 온갖 환상에 속지않고
진실과 만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6) _ 수행의 원리 _ 일심으로
어떤 일이든 그냥 이루어지는 것은 없다.
수행도 마찬가지이다.
수행의 과를 증득하는 해법은 열심히 하는데 있다.
그것은 일심이 됐음을 의미한다.
일심으로 해서 안되는 일이 없다.
기도가 이루어지고 아미타불을 친견하고
화두를 타파하는 모든 것이
모두 일심이 되었느냐 아니냐에 달려있다.
일심이란
마음이 안정되고 고요하며
어떤 하나에 집중되어 다른 생각이 없음을 말한다.
즉,
염불이면 염불,
진언이면 진언,
화두면 화두에 일념이 되었다는 것은
그것과 하나가 되어 그것 자체가 되어버릴 때
무지가 자리를 비껴 나고 본성광명이 드러나는 것이다.
일심을 방해하는
탐심, 진심, 치심, 의심, 산심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다.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면 일심이 될 수 없다.
특히 진심은
마음을 격동 시키므로 수행하는 사람은 잘 경계해야 한다.
또한 내가 제대로 하고 있나?
나를 가르치는 사람은 진짜 깨달음을 얻었을까? 등의
의심, 수행을 해서 뭘 어떻게 해봐야 겠다거나
빨리 이루고자 한다거나 결과에 연연하는 것 등의
욕심(수면욕,식욕,성욕) 등의 습관적 욕구
(본능적 욕구에 가깝다고 할 수 있으나 실은
욕망이라는 습관적 의식작용이 결부될 때가 많음),
그리고 이런 저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로 일어나면서
일심을 방해한다.
이럴 때에는 적절하게 그것들에 대해 대처할 필요가 있다.
각각에 대해서는 참선 편에서 다시 다루도록 하겠다.
(7) _ 수행의 원리 _ 계.정.혜의 통일
계정혜 삼학은
불교수행자들이 갖추어야 할 수행의 세가지 측면이다.
먼저
계는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분별하여
수행자들이 마음에 안정을 유지하며 생활할 수 있는 지침이다.
일상생활에서 마음이 안정되면
선정을 통해 더욱 마음을 고요히 하고 맑게 한다.
그리고 고요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정진하면
자연스럽게 지혜가 드러난다.
이렇게 계는 정의 바탕이 되고 정은 혜의 바탕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단선적으로 끝나지 않고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혜가 생기면 어떤 것은 해야 하고
어떤 것은 하지 말아야 할 지 스스로 알게 된다.
또 정이 깊어지면 몸과 마음이 저절로 계를 지키게 된다.
또한 정과 혜는 통나무의 양끝과 같아서
어디서부터 어디 까지라고 가르기도 힘들고
어느 한쪽만 취하기도 어렵다. 늘 함께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 분들도 정혜쌍수라 하였다.
<익진기(翼眞記)>에 말하였다.
"선정과 지혜 두 말은 바로 삼학의 준말로서
갖추어 말하면 계율과 선정과 지혜다.
계율이란 잘못을 막고 악을 고친다는 뜻으로서
삼악도에 떨어짐을 면하게 하는 것이요,
선정이란
이치에 맞추어 산란한 마음을 거두어 잡는다는 뜻으로서
여섯 욕심을 뛰어넘게 하는 것이며,
지혜란 법을 가지고 공을 관한다는 뜻으로서
묘하게 생사를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번뇌가 없는 성인이 처음에 수행할 때에는
다 이것을 배웠기 때문에 삼학이라 하는 것이다.
또 삼학에는 상을 따르는 것과 성에 맞추는 것의 구별이 있다.
상을 따르는 것은 위에 말한 바와 같고,
성에 맞음이란 이른바 이치에 본래 <나>가 없는 것은
계율이요, 이치에 본래 어지러움이 없는 선정이며,
이치에 본래 헷갈림이 없는 것은 지혜다.
이 이치만 깨달으면 그것이 곧 진정한 삼학이다."
그러므로 조계스님이
"본마음에 잘못이 없는 것이 자성의 계율이요,
본 마음에 어지러움이 없는 것이 자성의 선정이며,
본 마음에 어리석음이 없는 것이 자성의 지혜다."한 것이
이것을 두고 한 말이다.
선정과 지혜의 그 이름은 다르나
요는 그 당자의 신심이 물러나지 않고 끝까지 해내는 데 있다.
<지도론>에
"세상의 보통 일에 있어서도 부지런히 노력하지 않으면
그 일을 이루지 못하겠거늘 하물며
위 없는 도를 배움에 있어서 선정과 지혜에 힘쓰지 않아서 되겠는가?"하고 그 게송에,
선정은 금강의 갑옷이라 능히 번뇌의 화살을 막고 선정은 지혜를 지키는 고장으로서
온갖 공덕의 복밭이라 분주한 티끌이 하늘 해를 덮으면
큰 비가 그것을 능히 씻고 망상의 바람이 마음을 흩으면 선정이 능히 그것을 없앤다.
고 하였다. (보조국사 <권수정혜결사문> 중에서)
(8) _ 수행자의 자세 _ 자기를 변화시킨다
수행자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를 변화시켜야 한다.
자기가 변화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훌륭한 가르침을 안다고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자기는 그 가르침대로 살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권한다한들 누가 그 말을 믿고 따르겠는가?
그러므로 먼저 자기를 이롭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이롭게 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무엇을 변화시켜야 하는가?
마음이다.
탐욕으로 물들고 성냄으로 물들고
어리석음으로 물들어 있는 마음을
본래의 청정심으로 회복해야 한다.
따라서 수행하는 사람은
더 이상 끝없는 욕망의 굴레에서 괴로워하지 말고
욕망과 불행의 실체를 똑똑히 인식하고
소욕과 지족의 생활로 바꾸어야 할 것이다.
이 세상에 삼보에 의지하는 것 말고
달리 믿고 의지할 만한 것이 있겠는가?
모든 것은 일시적이고 변하기 쉬운 존재이며
항상하거나 영원한 것은 없다.
그렇다고 염세주의자가 되어 아무 것도 하지 말고
허송세월을 보내라는 것은 아니다.
허무주의자가 되어 세상을 등지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 욕망의 뿌리를 알고
우리 고통의 근원을 알아서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해탈의 삶을 살아보라는 것이다.
그럴려면 먼저 바른 목표를 세워야 할 것이다.
혹시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는 것은 아닌지
헛된 욕망에 기초한 것은 아닌지를 살펴,
마음을 비우고
세상의 이익과 안락을 향한 목표를 세워야 할 것이다,
좋은 목표란 그 결과 뿐만아니라
과정도 좋은 것이니
결과에 대해서는 연연할 필요가 없다.
바른 목표와 최선을 다한 노력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자유로워운 삶을 산다면
범부의 삶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건데
욕망과 잘못된 집착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
그렇게 함으로써
삶은 행복과 기쁨으로 넘치며
활기와 밝음이 세상을 가득 채울 것이다.
그러한 삶을 위하여 수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수행자의 첫 번째 자세로서 가치관의 변화,
사고 방식의 전환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의 전환을 가져온 뒤에는
보다 구체적이고 세밀한 자기변화의 노력이 필요하다.
따라서
성격개조, 습관 고치기 등이
자기변화의 실제적인 내용이 된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중생업에 의해
여러 가지 습관이 몸과 마음에 베어있다.
그리고 그 습관대로 아무런 반성없이 살아간다.
모난 성격,
화를 잘 내는 성격,
급한 성격,
이기적인 성격 등은
원만한 대인관계를 해치게 되고,
보람있고 행복한 삶을 향한 인류의 보편적 희망을 등진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먼저 자기를 변화시키고자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언제나 자신에 대해 잘 살피고 있어야 한다.
그동안 우리의 관심은 늘 밖을 향하여 치달려 갔다.
이제는 안으로 돌려 자신을 살피고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수행자의 첫 번째 과제임을 명심해야 한다
(9) _ 수행자의 자세 _ 항상 도를 생각한다
언제나 보리심을 잃지 말고
무엇을 하던 어디에 있던 생각을 거기에 두는 것이다.
이를테면
화장실에서 용무를 보면서
비우고 버리는 공덕을 생각하며
이같이 언제나 비우고 버릴 것을 바라고,
세수를 할 때에는
번뇌의 때도 이같이 씻어지기를 바라며,
반듯한 길을 갈때에는
중생들이 마음이 곧고 발라
몸과 입에 조금도 굽음이 없으면 하고 바라고,
험한 길을 갈 때에는
중생들이 나쁜 길을 모두 버리고
그릇된 소견을 다 없앴으면 하고 바란다.
<화엄경 정행품>에서는
언제나 도를 생각함에
각 각의 때와 장소에서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지
잘 제시되어 있다.
이와같이 언제 어디서나 도를 생각해서 잊지 말아야 한다.
(10) _ 수행자의 자세 _ 사람 몸 받기 어렵다
<비유경>에 이르기를
"한 비구가 있었는데
다만 배부르게 먹고 방안에서 문을 걸고
몸의 편안함을 즐기며 잠만 자다가
그 뒤 7일 후에는 목숨이 마치려 하매
부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어 그 비구에게 나아가 말씀하셨다.
'돌아보니 그대는 유위불 때에 일찍이 출가는 하였으나
경계(經戒)는 염하지 않고
다만 배부르게 먹고 잠자기만 일삼더니
그 뒤 목숨이 마치매
혼신이 지네가 되어 5만 세를 지났고,
목숨이 다하여는 다시 물속의 고동 조개와
나뭇 속의 좀벌레 등이 되면서
각각 5만 세 동안씩을 지났었다.
이 네 종류의 벌레들은
어둠 속에 살면서 몸을 탐하고
즐거운 곳만 찾아 애착하나니,
오직 어두운 곳으로만 즐겨 찾아 집을 삼는지라
밝은 곳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한 번 잠들면 백 세가 되어야 겨우 한 번 잠을 깬다.
그래서 죄의 그물에 얽매여 있어도
벗어남을 구하지 않는 것이다.
그대는 이제야 비로소 죄업을 다 마치고
겨우 사람 몸을 받아 사문이 되었거늘
어찌 다시 잠만 자며 싫어할 줄 모르는가'
그 말씀을 들은 비구는
부끄럽고 두려워 스스로를 꾸짖으매
그로해서 오계가 곧 제거되고
드디어 아라한과를 이룬 것이다" 하였다.(<만선동귀집> 제3장)
이렇듯 사람 몸 받기 어려우니
부디 사람 몸 받았을 때 수행해야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번 생에는 이 정도만 하고
다음 생에 성불할 수 있게 공덕이나 쌓자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으로 태어나기 어렵고,
불법 만나기 어려우니
어떻게 다음생을 보장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번 생에 깨달아서 해탈하지 않으면
윤회로부터 벗어날 길은 요원한 것이다.
또한 이번 생에 반드시 부처가 되겠다는
자세로 할 때만 게으름과 무수한 장애를 극복하고
전일하게 수행해 나갈 수 있다.
(11) _ 수행자의 자세 _ 소욕과 지족
수행은 실제 생활의 문제이다.
실생활에서
더 평화롭고 더 자유롭고 더 자비롭고 더 기쁘게 산다면
수행을 성실히 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절제와 만족의 생활이 필요하다.
욕망은 결코 우리를 행복하게 할 수 없음을 알고
욕망의 굴레로부터 벗어나 참삶을 살아보자.
<유교경>에서
부처님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욕심이 많은 사람은
이익을 구하는 것이 많은 까닭으로 고뇌도 많거니와
욕심이 적은 사람은 구하고자 함이 없어
근심 걱정이 없음을 알아야 된다.
오로지 소욕(少欲)하기 위해서도
오히려 마땅히 닦아야 하거늘
하물며 소욕이 모든 공덕을 낳게 함에 있어서랴.
욕심이 적은 사람은 아첨으로써
남의 마음을 사려고 하지 않고,
모든 감관에 이끌리지 않는다.
소욕을 행하는 사람은
마음이 평안하여 아무 걱정이나 두려움이 없고,
하는 일에 여유가 있어 언제나 모자람이 없다.
이렇게 욕심이 적은 사람은
열반의 경지에 들게 되는데,
이것을 [욕심이 적음](少欲)이라 한다.
비구들이여
만약 모든 고뇌를 벗어나고자 한다면
마땅히 [만족할 줄 아는] 것에 대하여 관찰해 보라.
만족함을 아는 법은
부유하고 즐거우며 안온한 곳이다.
넉넉히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비록 맨땅 위에 누워 있을지라도 오히려 편안하고 즐겁다.
만족할 줄 모르는 사람은
비록 천당에 있을지라도
자기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만족할 줄 모르는 자는
비록 부유한듯하나 가난하거니와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비록 가난한듯 하나 부유하다.
만족을 모르는 자는
항상 오욕에 이끌려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이
불쌍하게 여기는 바가 된다.
이것을 만족할 줄 앎(知足)이라 한다.
(12) _ 수행자의 자세 _ 깨어 있는 생활
이어서 수행생활의 보다 구체적인 실천법들을
<유교경>을 인용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스승이 제자들을 위해
마지막 남긴 간절한 뜻을 깊이 헤아려 받들어 지키기 바란다.
방일을 다스리는 법 / 음식 먹는 법 / 게으름을 다스리는 법 /
성냄을 다스리는 법 / 아첨을 다스리는 법 / 적정원리 /
정진 / 선정 / 지혜 / 희론하지 않음
방일을 다스리는 법
마음을 방일시켜 오욕에 들어가지 않게 하라.
비유를 들자면 소치는 사람이 막대기를 쥐고 소를 주시하면서
날뛰는 소로 하여금 남의 곡식을 먹지 못하게 하는 것과 같다.
만일 오근(五根:눈, 귀, 코, 혀, 몸)을 제멋대로 놓아두면
오욕으로 뿐만 아니라 갈려고 하는 곳이 끝이 없어서 제어할 수 없다.
또한 사나운 말과 같아서
재갈을 채우지 않으면
장차 사람을 끌어다 흙구덩이에 쳐박히게 할 것이다.
도둑의 침해를 당하는 것은
그 괴로움이 일생(一生)에 그치지만 오근이라는 도적의 화는
그 재앙이 여러 생에 미치어, 그 피해가 심히 무겁다.
마땅히 삼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지혜 있는 이는 오근을 제어하여 따르지 않고,
그것을 잡아두기를 마치 도둑을 잡는 것과 같이하여 방일하지 않게 한다.
가령 방일하게 하더라도
모두 또한 오래지 않고 그것이 마멸(磨滅)함을 볼 것이다.
이 五根은 마음이 그 주인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마땅히 마음을 잘 제지해야 된다.
마음이 두렵기는 독사나 악수(惡獸), 원적(怨賊)보다 심해서
큰 불이 넘쳐 번지는 것과도 비교할 수 없다.
음식 먹는 법
모든 음식을 받을 때에는
마땅히 약을 먹는 듯이 하고,
좋고 나쁜 것에 대하여 마음을 더하고 덜하지 말며,
몸을 지탱하고, 주리고 목마름을 없애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
비유를 들자면
지혜 있는 자가 소의 힘이 감당할 수 있는 바가 많고 적음을 헤아려
소의 한계를 지나치게 하여
그 힘을 다 없애지 않게 하는 것과 같다.
게으름을 다스리는 법
낮에는 부지런한 마음으로 착한 법을 닦아 익혀서,
때(時期)를 잃지 않게 하며,
초저녁과 새벽에도 또한 공부를 폐하지 말며,
한 밤중에도 경전을 읽어서 스스로 소식이 있어야 한다.
수면을 인연하여 일생을 아무 소득없이 헛되이 보내지 말라.
마땅히 무상의 불이 모든 세간을 태우고 있음을 잊지 말고 생각하여
조속히 자기를 구제할 것이요,
부디 잠만 자지 말라.
모든 번뇌의 도적은
항상 사람을 엿보아 죽이는 것이 원수보다 심하다.
어찌 잠만 자고 스스로 경책하여 깨지 않을 수 있겠는가.
번뇌의 독사가 너의 마음에 잠자고 있으니,
비유하자면 검은 뱀이 너의 방에 잠자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마땅히 지계의 칼로 빨리 물리쳐 없애야 된다.
잠자는 뱀이 이미 나간 뒤에야
비로소 편안히 잠잘 수 있는 것과 같다.
독사가 나가지 않은 데도 잠자고 있는 이는
부끄러워 함이 없는 사람이니,
부끄럼의 옷은 모든 장엄 가운데 가장 최고이다.
부끄럼은 마치 철로 만든 갈고리와 같아서
능히 사람의 법답지 않는 것을 제어한다.
그러므로 항상 부끄러워할 줄 알아서 잠시라도 폐지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떠나면 모든 공덕을 잃어버린다.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착한 법이 있거니와
만약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은 모든 금수와 더불어 다를 바가 없다.
성냄을 다스리는 법
만일 어떤 사람이 와서 너의 사지 마디마디를 끊는다 해도,
스스로 마음을 거두어서 성을 내어 한을 품지 말라.
또 입을 보호하여 나쁜 말을 하지말라.
만약 성내는 마음을 제멋대로 놓아두면
스스로가 도를 장애하여 공덕의 이익을 잃고 만다.
참는 것이 덕이 되는 것은 계를 가지거나
고행하는 것으로도 능히 미칠 수가 없다.
능히 참음을 행하는 자는
곧 힘 있는 대인이라고 이름할 수 있다.
만약 더러운 꾸지람의 독을 참고 받아들이기를
마치 감로수를 마시듯이 기뻐하지 못하는 사람은
도에 들어간 지혜 있는 사람이라 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성냄의 해는 모든 선법을 파괴하며,
좋은 명성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금세와 후세의 사람들이 기쁘게 보지 않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성내는 마음은 맹렬히 타오르는 불보다 심하다.
항상 막고 보호하여 들어오지 못하게 해야 된다.
공덕을 겁탈하는 도적은 성냄보다 앞서가는 것이 없다.
아첨을 다스리는 법
아첨하는 마음은 도와 더불어 서로 어긋난다.
그러므로 마땅히 그 마음을 정직하고 질박하게 해야 된다.
아첨은 단지 속임수이니,
도에 들어간 사람에게는 올바르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마음을 단정히 하여 질박하고
정직함을 근본으로 해야 된다.
적정원리(寂靜遠離)
적정무위(寂靜無爲)의 안락을 구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안팎의 심란(心亂)과 시끄러움을 떠나
혼자서 한가한 곳에 있어야 한다.
세간 일에 얽매이고 집착하여
여러가지 괴로움에 빠지는 것은
마치 늙은 코끼리가 진흙 수렁에 빠져 스스로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것을 멀리 떠남(遠離)이라 한다.
정진
만일 부지런히 정진한다면
어려운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마땅히 부지런히 정진해야 한다.
비유컨대 작은 물방울도 쉬지 않고 떨어지면
돌을 뚫는 것과 같다.
만약 수행인의 마음이 게을러 정진을 쉬게 되면,
마치 나무를 비벼 불씨를 얻으려 할 때
나무가 뜨거워지기도 전에 그만두는 것과 같다.
비록 아무리 불씨를 얻으려고 하더라도 얻지 못할 것이다.
이것을 정진(精進)이라 한다.
선정
만일 마음을 거두면
마음은 곧 定의 상태를 이룰 것이다.
마음이 평정상태(定)로 있는 까닭에
세간의 생멸하는 존재 양상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항상 모든 선정을 부지런히 닦아 익혀야 한다.
만약 선정을 이루면 마음이 흩어지지 않는다.
비유하자면 물을 아끼는 집에서 둑이나 못을 잘 관리하는 것과 같이,
수행자도 또한 그러하여
지혜의 물을 잘 보존하기위해 선정(禪定)을 잘 닦고
그 물이 새지 않도록 한다.
이것을 [정(定)]이라고 한다.
지혜
지혜가 있으면 탐착이 없어지는 것이니,
항상 스스로 성찰하여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나의 법 중에서 능히 해탈을 얻게 하는 것이다.
만약 그러지 못하는 사람은
이미 수행자도 아니며,
또 재가신자도 아니므로 무엇이라 이름할 수 없는 것이다.
진실한 지혜는 곧 노병사(老病死)의 바다를 건너는 견고한 배이고,
무명의 어두움을 밝히는 크나큰 등불이며,
모든 병든 자의 좋은 약이고,
번뇌의 나무를 베는 예리한 도끼이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문.사.수(聞·思·修)의 세가지 지혜로써
자신을 더욱 증익(增益)해야 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지혜의 비춤을 가졌다면,
비록 그것이 육안이라도 그는 밝게 보는 사람이다.
이것을 [지혜]라고 한다.
희론하지 않음
여러가지로 무익한 희론(戱論)을 일삼는다면
그 마음은 산란해 진다.
만일 너희들이 적멸(寂滅)의 즐거움을 얻고자 한다면
오직 희론으로부터 오는 환난을 잘 멸해야 한다.
이것을 [희론하지 않음]이라고 한다.
모든 공덕에 항상 한 마음으로써
모든 방일을 버리기를 마치 원수인 도적을 여의듯해야 한다.
크게 자비로운 세존이 설하신 바의 이익은
모두 이미 극진한 것이니,
너희들은 오로지 부지런히 그것을 행하라.
혹 산간이나,
혹은 비어 있는 습하고 풀이 무성한 곳이나,
혹은 나무 밑에서나,
한가하고 고요한 방일지라도
받은 바의 법을 생각하여 잊어버리거나 잃어버리지 않아야 하며,
항상 스스로 부지런히 정진하여 닦아야 한다.
한 일도 없이 헛되이 죽으면 뒤에 후회함이 있을 것이다.
나는 마치 훌륭한 의사와 같이 병을 알아 약을 베푸나니,
복용하고 복용하지 않는 것은 의사의 허물이 아니다.
또 나는 잘 인도하는 길잡이와 같아서
사람들을 좋은 길로 인도하는 것과 같다.
그것을 듣고 행하지 않는 것은 인도하는 사람의 허물이 아니다.
(13) _ 기초 수행법 _ 예배
기초수행법은
수행자가 일상 속에서 늘 견지해야하는 수행법이면서
아직 본격적인 수행법을 익히기 전에
쉽게 배우고 익힐 수 있는 수행법이다.
즉,
부처님께 예배하고 공양하며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는 것,
공덕이 있는 곳에 함게 기뻐하며,
언제나 법을 청하여 듣고 일체중생을 위하여 발원하며
아무리 작은 선행이라도 그 공덕을 일체중생을 위해 돌리는 것 등이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예배 / 공양, 보시 / 수희 / 권청 / 참회 / 발원, 회향
① 예배
예배는 부처님께 절을 하는 것으로
삼보를 생각하며
직접 몸을 굽혀 존경과 감사의 뜻을 표하는 것이다.
예배를 즐겨하면,
그만큼 진리의 문이 가까이 있는 셈이고,
아만과 아집을 버리는 효과가 있다.
따라서 불자가 가장 먼저 익힐 것은 예배이다.
몸을 굽혀 가장 낮은 자세를 갖추고
부처님의 공덕을 생각하고 찬탄함으로써
예배는 몸과 마음과 뜻을 맑히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예배는 지극한 마음과 정성어린 동작이 함께 갖추어져야 한다.
불교의 예배법은
나라에 따라 조금씩 차이가 있어
어느 나라에서는 전신을 완전히 바닥에 대고 엎드리는 경우도 있으나
기본적으로는 오체투지로써
근본 정신은 자기를 낮추고 부처님을 받드는 것이다.
오체투지란 몸의 다섯 곳을 바닥에 닿게 하는 것으로
양팔꿈치와 양무릎 그리고 이마를 땅에 대는 것이다.
손은 합장하고 가슴에 모아 반듯이 선 자세에서
허리를 똑바로 한 채
무릎을 굽혀 앉은 뒤 왼손을 가슴에 가볍게 대고,
오른손을 먼저 바닥에 내리고 왼손을 내려 바닥에 닿게 하면서
고개와 허리를 자연스럽게 굽혀
이마가 땅에 닿을 때까지 숙인다.
이때 손바닥을 뒤집어 귀 높이로 올려
부처님을 떠받드는 모양을 한다.
다시 합장하고 천천히 일어선다.
이때 마음을 모아 몸이 흐트러지지 않게
천천히 정확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며 아무렇게나 하지 않도록 한다.
보통은 삼배를 하는데
108배, 1080배, 3천배 등 여러번 거듭하는 경우에도
빨리 하는 것보다는
집중해서 절하는 동작 하나하나에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 절에서는 엎드린 상태에서 합장한 손을 이마에 대고
다시 한번 간절한 마음을 표한다.
예배의 공덕은 하심과 공경에 있다.
삼보에게 예배했던 것과 똑같이
일체중생에게도 예배.공경할 수 있어야 한다.
(14) _ 기초 수행법 _ 공양, 보시
예배와 함께 일상적으로 해야 할 수행법이 공양이다.
공양은
삼보께 공경하는 마음으로 바치는 모든 것이다.
원래는 스님들이 수행하는 데 필요한
장소, 음식, 옷, 의약품 등을 제공하는 것이었는데,
대승불교에 이르러서는
삼보가 예배의 대상이 되고 신앙의 대상이 되면서
공양도 상징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다.
대표적인 것이 육법공양이다.
향공양 / 등공양 / 차공양 / 과일공양 / 꽃공양 / 쌀공양
향공양
향을 사름으로써 향기가 온 우주에 퍼져
성스러운 이 향기로 이 세상을 맑히고,
중생들의 악업이 소멸되어
해탈의 선정에 어서 올라지기를 기원한다.
가장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있으며 또한 가장 중요한 공양법이다.
향공양을 올리는 대표적인 예법이 5분향례이다.
오분향례란 다섯가지 마음의 향으로 부처님께 예배드림을 말한다.
다섯가지 마음의 향은
계향, 정향, 혜향, 해탈향, 해탈지견향이다.
즉
"악함과 그름없는 마음의 향,
어지러움 끊어진 마음의 향,
어리석음 사라진 마음의 향,
얽매임 벗겨주는 마음의 향,
참마음의 깨끗한 향으로
온 누리 광명구름 시방세계 두루하여 한량없는 삼보전에 공양합니다."하는 것이다.
등공양
등불이 어둠을 밝히듯
이 등잔이 온누리를 밝게 비춰
중생들의 어두운 마음에 빛이 되어 악업은 멸하고
반야의 지혜에 어서 올라지기를 기원한다.
차공양
깨끗한 차가 의식을 맑혀 주듯이
일체 중생이 꿈에서 깨어나
혼돈과 미혹을 씻어내어 깨달음을 얻기를 기원한다.
과일공양
향기롭고 맛있는 과일을 열매 맺는 나무처럼
위없는 공덕 내시는 부처님을 생각하며
그 덕과 지혜로 일체중생이 보리도를 이루기를 기원한다.
꽃공양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처럼
이와 같이 우리도 아름다운 성품을 꽃피우기를 기원한다.
쌀공양 부처님이 우유죽을 드시고 정각을 이루셨듯이
이 쌀로 시방세계가 선열의 큰 바다가 되기를 기원한다.
이와 같이 모든 공양은 마음을 다해 올려야 한다.
만일 물질만 있고 마음이 빠진 공양은
진정한 공양이라고 할 수 없다.
부처님이 물질을 바라시는 분이 아닐 진데
어찌 물질로써만 공양을 올린다고 하겠는가.
마땅히 번뇌없는 그 마음을 부처님께 바쳐야 한다.
즉 마음의 촛불을 켜고,
마음의 향을 사루며,
마음의 과일을 열매 맺고,
마음의 꽃을 피우고,
마음의 쌀로 수행의 열기를 다져야 할 것이다.
또한 공양을 올린 후에는
일체중생을 위해 그 공덕을 회향하여야 할 것이며
자신만을 위한 공덕을 바라고 공양 올리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아끼는 마음이나 내가 누구에게 바친다는 생각없이 바쳐야 한다.
이것이 깨끗한 공양으로 삼보의 정재(淨財)라 할 수 있다.
부처님을 결코 장사꾼이 되게 하는 누를 범하지 말라,
공양을 올릴 때
무엇을 바라고 거래를 시도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렇게 발원하고 공양 올리면
그 공덕은 떠나지 않고 저절로 자신을 감싸게 된다.
공양과 더불어 보시는
재가불자들의 실천행으로 꼽히는 일이다.
공양이 삼보전에 바치는 것이라면
보시는 삼보는 물론이거니와
일체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베품을 말한다.
보시는 베푸는 내용에 따라
재보시 법보시 무외시로 구분할 수 있다.
재보시란 물질을 가지고 베푸는 것으로
마찬가지로 상이 없이 베풀어야 한다.
금강경의 무주상보시는
불교의 보시의 의미를 가장 잘 표현한 말이다.
무주상보시는 보시를 하되 했다는 생각이 없으므로
세가지 상이 없으니,
준 사람도 없고,
받은 사람도 없고,
주고 받은 물건도 없다.
법보시는 진리를 베풀어 주는 것으로
꼭 법상에 앉아 법문하는 것만이 아니라
평소에 다른 이에게 도움이 되게 하는 것 역시 훌륭한 법보시이다.
무외시란 두려움이 없게 하는 것으로
고통받는 이들을 구해주는 것이다.
죽어가는 생명을 구하고,
추위나 더위로 인해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것이 무외시다.
또한 불안에 떠는 이웃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건네
위안을 찾아주는 것도 무외시다.
이렇게 중생을 이롭게 하는
모든 보살행이 보시며,
이익이나 대가를 바라지 않을 뿐만 아니라
했다는 생각조차 없이 하는 것이 진정한 보시이다.
(15) _ 기초 수행법 _ 수희
수희는 다른 사람의 공덕을 보고 함께 기뻐하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보시의 공덕을 설하면서
다른 사람이 보시하는 것을 보고 함께 기뻐하면
그 공덕이 더 크다고 하였다.
따라서 수희는 다른 어떤 수행방법보다
손쉽게 공덕을 쌓을 수 있는 수행법이지만 또한 쉽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이 공덕을 쌓는 것을 보면
질투하는 마음이 생기기 쉽고,
진심으로 그것을 기뻐해주는 마음을 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수희는
자기의 덕행을 수희하는 것과
남의 덕행에 대하여 수희하는 방법이 있다.
자신의 복덕에 대해 자만심을 갖지 않고
과거의 덕행 덕분임을 알고 수희하는 것이다.
남의 덕행에 대해서는
아무리 사소한 덕행일지라도 수희할 것이요,
원수일지라도
그의 덕행에 대해서는 수희해야 한다.
(16) _ 기초 수행법 _ 권청
불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목숨을 아끼지 않고 청해서 들어야 한다.
권청은 불법이 널리 퍼지게 하는 공덕이 있으며
자신은 불법을 듣게 되는 공덕이 있다.
법문을 청하지 않는 이유는
진리에 관심이 없거나 아니면
저 사람보다 내가 더 낫다는 자만심 때문이다.
나에게 깨달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나는 이미 알만큼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이러한 자만이 권청을 막는 것이다.
권청은 이러한 자만을 다스릴 수 있다.
법이 있는 곳에서는
즐겨 가서 들어야 하며
법이 있는 자를 보면 먼저 권청해야 한다.
(17) _ 기초 수행법 _ 참회
수행자는
첫째 자신을 바꾸려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하였다.
그 변화의 첫 신호가 무엇이겠는가.
바로 과거 자신이 저질러온 잘못에 대한 참회이다.
그리고 그대로 살아간다면
현재는 물론 앞으로도 계속해서 저질러질 잘못에 대한 참회이다.
참회란 잘못에 대해 크게 뉘우치고
그 잘못의 근본원인까지 알아서
다시는 그러한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참회에는 속죄하지 못할 죄가 없어서
앙굴리말라는 999명의 사람을 죽이고도
깊이 뉘우치고 참회했으므로 아라한이 될 수 있었다.
죄는 참회하면 사라지지만
감추면 더욱 커지므로
아무리 작은 잘못이라도 참회하여 그 뿌리를 끊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죄업이 모두 쌓여서 수행에 큰 장애가 된다.
참회를 어려워하지 말고
부처님 전에 엎드려 예배하고
진심으로 잘못을 고하고 잘못의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깊이 살펴서
다시는 그러한 잘못을 반복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자세한 방법은 기도편에 있다.
(18) _ 기초 수행법 _ 발원, 회향
발원은
보살이 상구보리하화중생을 위해
원을 세우는 것을 말하며
회향은
자신이 쌓은 수행공덕을
일체중생에게 돌리는 것이다.
즉,
모든 수행의 공덕을 자기에게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고
일체중생을 위해 발원하고 회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작은 소득은 있으나
큰 소득은 잃어 버리는 것이 되니
아무리 사소한 선행이라도 일체중생을 위해 회향한다면
그 공덕으로 무상보리를 얻을 것이다.
작은 소득이란 유루복을 말하고
큰 소득이란 무루복을 말한다.
부처가 되고 열반을 얻는 것은
무루복이요
세간의 복락을 얻는 것은 유루복이니
그 차이는 비교할 바가 못된다.
따라서 보살의 수행을 하는 자는
반드시 원과 회향을 생활화해야 한다.
<화엄경>에 이르기를
"보살이 축생에게 한 톨의 밥을 베풀지라도
반드시 원(願)을 짓되
'마땅히 이들이 축생도를 버리고 이익하고 안락하며
끝내는 해탈함을 얻어 길이 고해를 건너고
길이 온갖 고통이 멸하며,
길이 고온(苦蘊)을 제거하고
길이 고각(苦覺)과 고취(苦聚)와 고행,
고인(苦因), 고본(苦本) 및 모든 고처(苦處)를 끊어서
원컨대 저 중생들이 모두 이런한 것들로부터
영원히 벗어나 위 없는 깨달음을 이루어지이다'고 하여
이와 같이 그 마음을 오로지 해서 일체 중생을 계념(繫念)할 것이니,
반드시 저러한 선근을 머리로 하여
그들을 위해 일체종지(一體種智)에 회향할 것이다" 하였다.
(만선동귀집 제2장)
(19) _ 수행법간의 관계
근원에 돌아가면 둘이 없으나,
방편으로 여러 가지 문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각자 편리한 대로 배나 수레를 이용하는 것이다.
만약 배를 타고 가는 사람이 수레를 비웃거나,
수레를 타고 가는 사람이 배를 비웃는다면,
모두 희론이 될 뿐이다.(<죽창수필> 3집)
본성을 드러나게 하는 것이 수행인데 그 방법에는 여러가지 길이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스님들은
참선을 중심으로
율원과 강원에서 계율과 경전에 대한 공부가 이루어지고,
재가자들은
염불, 독경, 진언 등이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수행법이다.
그리고 일반적인 신행형태로는 법회와 기도가 있다.
법회에서는 스님을 통해
부처님의 말씀을 전해 듣고,
기도에서는 주로 개인적인 바람이 성취되기를 기원한다.
이렇게 다양한 수행법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조계종이 선종을 종지로 하고 있지만
한국불교의 전통을 모두 받아 지닌 종단이다보니
선종과 교종으로 대별되는 다양한 종파의 성격이 모두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나라는 중국과 일본과 달리
통불교적인 성격이 강하여 어느 것 하나만을 고집하지 않고
두루 갖추고 있는 특징이 나타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렇게 다양하게 수행법들이 공존하다 보니
서로 충돌하는 측면도 있고,
수행법들이 체계가 없이
단절적이어서 초심자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혼돈스럽다.
또한 참선의 경우 화두선만이 강조되어 다른 것은 무시된다거나,
기도의 경우 수행으로써의 의미를 갖추지 못하고
오히려 세속적 욕망을 부축이는 기복적인 측면만 남아 있기도 하고,
간경이나 염불, 진언의 경우
전체적인 의미도 모르고 입으로만 하는 경우도 있으며,
계율은 아예 무시되기 일쑤다.
따라서 이제부터 각각의 수행법들에 관한
정확한 이해와 지침에 따라 수행하기 바라며,
각각의 수행법들이 서로 유기적으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고
어리석게 하나만을 고집하고 다른 것을 그르다 하거나,
하나도 제대로 못하면서 이것저것 하느라고 우왕좌왕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염송하는 일이
선정에 방해스러움이 있지 않는가하고 의심하는 이들이 있는데,
선정이란 곧 사변과 육통의 근본이며
범부를 벗어나 성위에 드는 인(因)이 되는지라,
잠시의 미세한 상념까지도 다 거두므로 상선(上善)이라고도 일컫는다.
그러나 반드시 혼침과 도거(掉擧)가
모두 녹아 없어질 때를 밝혀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경에도 이르기를
"좌선이 혼매함에 빠지거든 반드시 떨치고 일어나
행도를 한다든가 또는 부처님을 염하며,
혹은 지극한 정성을 다하여 씻고 참회해서
두터운 업장을 제거하고 신심(身心)을 책발하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으니
참으로 한 가지의 수행문만을 집착해서 구경을 삼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또 자민삼장(慈愍三藏)이 이르기를
"성교(聖敎)에서 설하신 올바른 선정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을 한 곳에 제어해서 생각생각이 이어지게 하고
혼침과 산란을 떠나서 평등하게 마음을 지니는 것을 이른다.
그러나 만일 졸음이 덮여와 가리거든 곧
모름지기 부지런히 책발하라.
염불송경하고 예배행도하며
강경(講經) 설법하고 교화중생하는 등
만행을 폐하지 말아서 닦은 바 행업을
오직 왕생하는 발원으로 회향할 것이니,
이와 같이 선정을 닦아 익힌다면
이것이 곧 부처님의 선정이며 성교의 지취(旨趣)와 합하는 것이며
모든 부처님께서도 기꺼이 인가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일체의 불법이 평등하고 차별이 없어
모두가 일여(一如)로 승합(乘合)하며
나아가 끝내는 최정각을 이루게 되는 까닭이기 때문이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혹은 염불로 인하여
삼매를 증득하고
혹은 좌선으로 좇아 지혜문을 발하며
혹은 송경을 오로지 하여 법신을 보고
혹은 다만 행도로써 성인의 경지에 드는 것이
오직 득도하는데 그 뜻이 있는 지라
마침내 한 가지의 일정한 문만을 고집하여 취하지 말아야 한다.
반드시 뜻을 오로지
한 정성만을 의지할 것이요
허망한 말들을 믿고 좇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만선동귀집> 제2장)
각 수행법들은 모두 독특한 특징이 있어서
중생병을 고치는데 훌륭한 양약이 되므로
어느 것 하나만을 고집하지 말고 때에 따라 적합한 것을 행하라는 뜻이다.
그런데 어떻게 택법해야 하는가.
여기 사리불과 목건련의 예가 있다.
사리불 존자가 목건련한테 갔다.
그 때 마침 목건련의 제자 두 분이 목건련 앞에 와서 호소를 하였다.
"우리들은 도저히 공부가 안 됩니다.
우리들은 벌써 출가한지가 오래 되었는데도 도저히 공부가 익어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제자 두 분은 한 사람은 출가하기 전,
과거에 대장간에서 풀무질하는 일을 했고, 또 한 사람은 세탁업을 했다.
그런데 목건련이
그 사람의 개성을 잘 몰라서 풀무질하던 사람한테는
부정관을 시키고 세탁업하던 사람에게는 호흡관을 시켰던 것이다.
사리불이 이 사실을 알고
'아, 이것이 잘못 됐구나! 풀무질을 항시 했으니,
풀무질은 어느 정도 간격을 두고서 마치 호흡 모양으로 하는 것이니까,
그 사람한테는 마땅히 호흡관을 시켜야 하는 것이고,
또 빨래 세탁을 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더러운 것을 자꾸만 빠는 것이니까 그 사람한테는
부정관을 시켜야 할텐데 ... ' 그래서 목건련에게 말했다.
"아, 그대가 참 잘못되었네.
마땅히 풀무질하다 온 사람한테는 수식관(數息觀)을 시켜야 하는 것이고,
빨래를 하는 직업이던 사람한테 대해서는 부정관을 시켜야 될 것인데."
그래서 그렇게 개성에,
적성에 맞춰서 행법을 제시하니까 이윽고 얼마 안 가서
그냥 깨달아버렸다는 이야기이다.
사람은 살아 온 습관에 따라 익숙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자기에게 맞는 것, 자기가 잘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한가지라도 열심히 하다보면 구경에는 정각을 이룰 수 있다.
(20) _ 점검법 _ 기준 정하기
점검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점검하고자 하는 기준을 정해야 한다.
기준은 가능하면
항상 기억할 수 있도록
간단 명료하게 하고,
가지 수도 열 개를 넘지 않는 것이 좋다.
기준을 정할 때에는
수행의 관건이 되는 일반적인 사항
(예;①보리심이 있는가
②계율을 잘 지키고 있는가
③자비심이 증장되는가
④지금 여기에 있는가
⑤자유로운가
⑥평화로운가
⑦탐진치를 능히 조복받는가 등)을 정하는 것과,
습관이나 성격을 고치기 위해, 또는
단기적인 목표성을 위해 일정한 기간에 집중적인 점검사항
(①아침에 일찍 일어난다
②약속을 잘 지킨다
③수다떨지 않는다
④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듣는다
⑤주변사람에게 효순한다 등)을 정하는 것이 있다.
목적과 시기에 맞게 기준을 정하고 정기적으로 점검해야
수행을 잘 하고 있는지 혹은 잘못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판단할 수 있다.
서산스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대(四大)의 추한 이 몸이 순간순간 소진해 가는 줄 아는가.
사은(四恩)이 깊고 두터운 줄을 아는가,
사람의 목숨이 호흡 사이에 있는 것을 아는가.
편안한 생활을 할 때에 지옥의 고통을 생각하는가.
부처님과 조사를 만난 적이 있는가.
수도자 다운 절개를 지키는가,
주위사람이랑 부질없는 잡담이나 하진 않는가.
거리낌도 없이 시비나 부추기진 않는가,
이번 생에 기필코 부처님의 밝은 지혜를 이룰 수 있겠는가.
결단코 윤회를 벗어날 수 있겠는가.
여덟가지 세상풍파를 맞을 때 마음이 요동치진 않는가.
이렇게 하는 것은 수행하는 사람이 날마다 반성해야 할 일이다.
또한 점검하고 점검해야 한다.
(마무리로) _ 얻으려고 하지마라
수행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닦는 것'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이 말은 틀린 말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본성은 밝게 빛나고 있으며
진실은 이미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닦을 것도 얻을 것도 없다.
역설적이게도
수행은 얻는 것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에 속하는 것이다.
무엇을 얻었다고 생각하는 한
이미 수행과는 거리가 멀어져 버린다.
비우고 버리는 속에서 문득 본성광명이
그대로 밝게 비추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부처를 지니고 부처에게 절하지 말며
마음을 가지고 부처를 염하지 말라.
부처는 경을 읽지도 않으며,
부처는 계를 가지지도 않으며,
부처는 계를 범하지도 않으며,
부처는 지킴도 범함도 없으며, 선과 악을 짓지도 않는다.
만일 부처를 찾고자 한다면
반드시 성품을 보아야 곧 부처일 것이다.
성품을 보지 못한채 염불을 하거나
경을 읽거나 재계를 지키거나 계를 지킨다면 아무런 이익이 없다.
염불은 왕생의 인과를 얻고,
경을 읽으면 총명해지며,
계를 지키면 하늘에 태어나고
보시를 하면 복스런 과보를 받거니와 부처는 끝내 찾을 수 없느니라.
<달마혈맥론>
그러므로 수행을 하면서 이것을 한다는 생각이 붙으면 안된다.
그러면 곧 나는 수행한다는 상을 갖게 되고
너는 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붙어 교만해지기 쉽다.
또한 모든 것으로부터 해탈하고자 하는 것이 수행의 목적인데
다시 수행에 묶여 버리는 어리석음을 짓게 되게 된다.
성품의 참 모습은
본래 나와 너도 없고, 오고 감도 없으며,
늘어남과 줄어듬도 없으니,
먼저 성품을 보지 않고서는 무언가 얻으려는 생각,
쌓아 간다는 생각을 여의기 어렵기 때문이다.
성품을 보지 못한 수행은
모래로 밥을 짓는 것과 같아서 결코 도에 이를 수 없다.
어디에도 걸림없는 참성품을 보아야
무위의 행이 가능한 것이다.
그 전에는 모든 노력이
다 유위를 벗어나지 못하니
유위로써는 생사를 벗어날 수 없다.
대나무 그림자가 마당을 쓸어도 자취를 남기지 않는 것처럼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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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알겠습니다! 그믐녘의 새벽밤이 참 맑습니다._()_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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