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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지하 시인.ⓒ연합뉴스 |
‘남쪽의 샛별이 중조선의 원만을 얻어야 북쪽의 강물방향을 바꾼다‘(南辰圓滿北河回)
동학 창시자 수운 최제우 선생의 시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 이 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지금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통일’이다.
통일에는 조건이 필요하다. 필요한 조건이 충족되어야 이른바 ‘대박통일’이 가능한 법이다.
무엇이 그 조건인가?
‘원만(圓滿)’이다.
무엇이 ‘원만’인가? 적어도 ‘북진에 의한 흡수통일’은 아니다. 그리고 ‘NLL제거따위 햇볕통일’도 아니다. 그러면 무엇인가? ‘원만한 통일’ ‘대박통일’이란 무엇인가?
내가 이제부터 제기하는 '원만'이 충족되는 조건에서 이루어지는 통일을 말한다. 그것이 무엇인가?
우선 그것은 한반도의 중간, 이른바 '중조선'에서의 조건의 통일, 조건의 충족을 전제한다.
어디가 중조선인가? 내가 지금 말하고 있는 바로 이 자리, 이곳 '용인'이 중조선이다.
그 중조선의 무엇이 그 조건인가?
'문화'다. 문화의 조건충족, 즉 원만이 요구된다. 그 문화의 제1차적 조건은 또 무엇인가?
'문학'이다. 즉 시(詩)다.
그러면 어찌되는가? 통일대박에서 지금 요구되는 원만이란 이름의 조건충족이 무엇인가?
중조선 용인의 문학, 시를 중심한 원만한 문화다. 줄여 말한다. '용인문협'이 대박통일의 조건이다. 그것이 '원만'이고 원만한 조건이고 그 내용 역시 원만이다.
왜? 오늘 나는 그것을 말하고자 이 자리에 와 섰다. 무엇이 “용인문학의 원만”인가?
여주 이천은 원만한 땅이 아닌가? 여주 이천은 주공의 주나라 대철쇄제국이 선 이후지지 밟혀온 ‘여성, 애기들, 못난이들’ 즉 ‘물(大川)’을 건너야 획득되는 땅, '이섭대천'(利涉大川)이다. 그래서 왕건이 '물의 영향력'(水德)을 타고 ‘고려’라는 당시의 통일제국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병략은 지금 할 얘기가 아니다.
다만 ‘이조’ 5백년 내내 ‘화엄’과 ‘미륵’과 ‘해인’의 꿈을 불법으로 나마 꿈꾸게 만들었던 '땡초' 즉 '당취'(黨聚)라는 이름의 ‘민중불교’를 가기시킨 공민왕때의 대혁명가 신돈의 땅이 바로 이천이다. 그래서도 신돈은 북압이 심할 때 나라의 도읍을 충주 쪽으로 옮기자 했던 것이다.
또 있다. 동학의 해월 최시형 선생과 당취 금강산 두목 빈삼화상이 만나 화엄개벽을 여성 지도력 밑에 전개하려던 1895년 앵산(鶯山)의 수왕회(水王會) 사태는 이곳 이천 군 설성이다. 그리고 그 수왕회 회주 이수인(李水仁)이 포졸들에게 강간당해 죽은 자리 역시 이곳 양평이고 해월 동학의 마지막 여성 갑년(甲年)이가 죽은 자리도 이곳 두물머리다.
이런 이야기들이 잡다한 민중설화에 불과한 하잘 것 없는 쓰레기에 불과한 것들인가? 그렇게 떠드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런자들은 이 민족의 역사적 비밀이 '숨겨진 반채'임을 모르는 자들이요, 김범부(金凡父)선생의 '사징론'(四徵)을 읽어보지도 않은 무식한 자들이다.
또 아직도 여자와 아기들을 쓰레기로 취급하는 그 스스로 쓰레기같은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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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양주 수종사에서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를 조망한 전경.ⓒ문화재청/연합뉴스 |
두물머리 앞 신원리 맷골의 몽양 여운형은 누구인가? 무엇하려했던 사람인가? 지금 우리 현실에서 그의 중도론은 어떻게 평가되어야 할 것인가? 그 중도론이 세상에 알려진 것처럼 꼭 좌우익 사이에서만 의미있는 것이었던가? 기독교와 전통동양사상 사이의 중도론은 없었던가?
곤사암 주놋거리에서 부딪힌 해월 최시형의 동학과 옹기장수 요섭 사이의 '여성과 아기들의 요인이야기'는 어찌할 것인가?
고향인 경상도 경산에 묻히지 않고 동학당과 천주교 요섭에 의해서 유언대로 여주강변의 원적산 천덕동에 묻힌 우리나라의 동서학 역사의 기이한 시작은 어찌할 것인가? 왜 서양사상 기독교는 동양인 조선 땅의 변두리도 아닌 바로 중심지인 중조선부터 침투해 그 많은 희생자를 냈는가?
거기에 역사적 신비의 숨은 진리는 없는가? 이곳은 개신교와 천주교가 역사적 본부인가? 불교, 특히 화엄사상과의 구체적 관계, 유교와의 구체적 관계는 무엇인가? 마제의 다산 정약용, 특히 그의 '정전제' 경제 이론과 부평의 한백겸의 '기전제' 경제이론의 차이와 융합점은 오늘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가?
그 차이와 융합점들은 또 중조선의 영역을 강원도, 충청도로 확대할 때, 한반도 중심지리인 한강, 섬강, 단강의 三江合水處 인 부론의 '흥원창' 앞 '월봉'(月峰)과 그 강앞 앙성(仰城)의 다섯봉우리(산위에 물이 있는• 山上之有水) 고대 경제사회이론, 그리고 그 앞 법천사(法天寺)의 거대한 불교시장터의 '화엄장원리'들은 또 어떤 연관을 갖는가? 문막(文幕)에서의 왕건과 궁예의 27회에 걸친 피투성이 전쟁의 뜻은? 그 옆 손곡(蓀谷)과 '좀재'의 견훤의 야망은?
정산리와의 사이에 있는 '풍점고개'의 숨은 의미는? 선종사찰 居頓寺址와 法相宗 사찰 法天寺 사이의 그 고개에서 죽어간 13명의 승려들의 사상사적 고민의 뜻은? 충주인근의 무수한 고구려장수들의 무덤과 유적들, 하나도 역사에 의해 밝혀지지 않았다. 왜?
해방직후 귀국한 백범 김구선생의 한마디, ‘지금 우리나라에 가장 필요한 유링한 힘은 곧 문화력이다.’ 그리고 일제말 전북 익산에서 죽은 동편제 판소리 맹인 송흥록의 한마디 ‘민족문화의 핵은 판소리, 판소리의 비밀은 시김새, 시김새의 근원은 정선아리랑이다’ 이말은 우리 민족의 세계적 문화 파급력과 '아세안. 네오, 르네상스'에 어떻게 연관되는가?
정선아리랑과 영워. 정선의 동강의 관계, 강원도, 충북, 경기, 경북 산악과 정감록 등의 약초치유능력의 상관관계, 아아 우리는 戀浦와 골덕내와 백운산 나리소의 그 기이한 핵심 '弓弓冥'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무엇인가? 민족문화에서 그것은 무엇인가? 민족전통, 동학, 화엄불교, 문화 일반에서 그것은 무엇인가? 이것과 정선아리랑과 약초들과 詩와 문화와 사상은?
백봉령 밑 임계의 '백두대간 약초나라 아리아리 정선'이라는 치료마을, 제천의 명암로와 세 개의 순 조선전통병원들, 한방명의원...또 있다. 지금 용인문협 함동수 이사장에 의해 진행되고 있는 이쪽 지역의 독특한 가톨릭선교전통의 역사, 그중에도 절두산 순교자로서 유명한 김대건의 행적들의 숨은 비밀들은?
이것은 원주 치악산 너머 '배론'의 황사영 사건과 지학순 주교의 거대한 반(反)유신행동의 역사'와 '그의 고통과 죽음' 이것들은 중조선의 그 '원만'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인가?
'용인문학'과 어떻게 이어지는가? 그 문화, 詩와 어떻게 이어지는가? 그것은 박달제와 두타산과 제부도와 어떻게 연관되는가?
원주의 박경리 문화와는 어떻게? 또 신평론의 '임윤지당'의 기철학(氣哲學)과는 어떻게?
두물머리, 아우라지(정선아리랑의 시발점)와 원주 미륵산. 백운산 사이의 양안치와는?
이들이 모두 '이원융합(二元融合)의 원만' 그것이다.
두물머리(북한강-남한강), 아우라지(東川-北川), 양안치(귀래 미륵산-흥업 백운산) 상이의 융합! 자! 詩는 갈등과 대립으로부터 태어나는 사랑과 융합의 복승이다. 이것이 우리가 요구하는 '대박통일' 핵심요체인 '원만'그것이다.
DMZ, 인제 평화공원, 금강산, 생태학적중조선 평화계획, 다 좋다! 그러나 나는 지금 막 불붙기 시작한 이천, 여주, 그리고 원주의 '장터'! premium outlet에 주목한다.
그것은 롯데 등의 재벌이 손대고 있다. 그러나 그속에는 이미 옛 신시(神市)즉 나고(麻姑) '八呂四律'이, 고조선의 '단군과 왕검'이 손댔던 호혜시장의 현대적 전개가 아주 복잡한, 숲과 산과 물과 집과 벌판이 끼어든 새 형태로 징조를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5일장인 '정선장'의 '아리랑과 약초장사'에 그 상품 아이디어가 연결되고 있다. 지금은 '약간'이지만! 아주 중요한 사건이다! 주목해야할, 탐색해야할 진정한 문학, 詩, 참문화, '진짜경제'의 대목이다.
이것이 곧 원만이다. 우리민족, 이제 세계경제와 사회는 바뀐다. 이래서 오늘 나의 '용인문협'에서 詩는 곧 수운(水雲)의 詩다. '南辰圓滿北河回' (김지하)
지난 번 카이스트 동문회 강의에서는 강원도 정선군 동강의 ‘연포 거북이마을’ 이야기를 하였다.
오늘은 또 동강이다.
연포 거북이마을 바로 옆에 있는 ‘弓弓水(궁궁수)’인 ‘골덕내 제장마을 ’ 이야기다.
나는 이 ‘제장마을’에 관하여 한 외국인 생태학자의 소개를 듣고 크게 깨우친 바 있다.
작은 물줄기다.
그러나 이전에는 물줄기도 크고 오가는 배도 많았으며 그 배가 싣고 오는 물건도 많고 그 물건을 강가에서 팔고 사는 사람들도 많고 여러 종류이었다 한다. 그리고 여러 종류의 ‘장’이 섰다고 한다.
여러 종류의 장이 서고 여러 가지 사람들이 모여 여러 가지 물건을 팔고 사는 시장, 그래서 ‘제장마을’이라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하하, ‘사마르칸트’다.
이 궁벽한, 험준한 산바위들 사이에 바로 ‘실크로드’가 열렸다는 것이다.
나는 이미 지난 번 강의 때 ‘대륙과 바다의 창조경제의 지혜는 산에서 배워야 한다’고 했었다.
마찬가지 이야기다.
내가 지금 말하려고 하는 것은 그러나 ‘산과 바다사이의 기발한 창조 핵’ 이야기가 아니다.
다만 마치 바위와 바위사이, 그리고 거대한 체제와 체제의 차이 사이에 갇혀 있는 ‘시장’이란 이름의 삶, 그 삶이 이제 뚫기 시작하는 새로운 “창조경제”의 가능성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다.
‘민족통일’ 이야기다. 그리고 북한의 여성들이 개척하고 있는 새로운 시장인 ‘장마당’ 이야기인 것이다.
다 알 것이다.
‘장마당’은 김정일 화폐개혁 실패에 대한 반동으로 시작된 북한 여성들의 소비시장 유행이다. 처음엔 북한당국도 무척 곤혹스러워 계속 억압을 시도했고 또 현재의 김정은 정권도 거듭거듭 짓밟으려 노력했으나 소용없었다.
이제는 도리어 북한 정권의 그 ‘장마당’의 경제 사회적 효과에 의지하기 시작했다.
집, 이것을 어찌 볼 것인가?
‘장마당’은 '호혜시장', 인류의 최대의 꿈인 고대 아시아 '신시'(神市)의 그 아름다운 호혜시장의 '획기적 재분배'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인가?
획기적 재분배란 것은 19세기 유럽의 '신시'(神市)연구가인 독일 경제학자 칼 폴라니(Karl Polanyi)와 스탠포드 등 그의 후계체제들이 이른바 '대전환'에서 '호혜, 교환, 획기성과 재분배'라고 불러왔던 인류의 영원한 이상적 경제체제인 것이다.
모두 다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한반도의 통일은 아주 가까워지고 있다.
정치, 군사적 초점은 다 알고 있는 것이고 말하지 않겠다.
다만 경제체제는 어찌 할 것이냐?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로 정면 대립되어 있는 이극(二極)체재를 어찌 해결할 것인가?
나는 오래전부터 그 해결책이 바로 '신시'(神市)라고 믿어왔고 또 내내 그렇게 책에서도 주장해왔다.
칼 폴라니 대전환의 신시(神市) 핵심이 바로 '호혜, 교환, 획기성과 재분배'의 '제장마을'인 것이다.
‘사마르칸트’는 바로 신시(神市)의 한 형식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통일도 그 길로 갈 것인가?
대답을 찾아야 한다. 어떻게?
지금 북한에 퍼지고 있는 '장마당'은 문자 그대로 우리 민족의 옛 소비시장 이상을 넘지 못한다. 그것으로 무슨 민족 통일의 핵심인 경제체제 융합을 가져올 수 있을 것이냐?
그렇다면 '흡수통일'을 할 것이냐?
문제가 많다.
'북진통일'을 할 것이냐?
어찌할 것이냐?
찾아야 한다. 찾지 않으면 정치, 군사적으로 통일이 된다고 해도 긴 기간 혼란과 물살을 겪어야 한다.
더군다나 한반도는 북한이라는 극좌와 일본이라는 극우를 동시에 극복하지 않으면 참다운 의미의 '통일', 이른바 '대박통일'을 할 수가 없다.
극좌와 극우를 밀어버리고 중국과 미국사이에 '창조적 완충'(Creative Buffer)을 이루어 '동서양 융합의 전 인류 새 삶의 길'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타고난 사명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결코 대립된 두 음양(陰陽) 사이의 합(合)을 찾아서는 안된다. 그것은 망상이고 가논리(假論理)다.
우리는 오운육기론(五運六氣論)에서 주장하고 '복승'(複勝)의 길을 가야한다. 그것은 숨어있는 차원에서 문득 솟아오르는 근원적 우주 생명의 '솟음'이다. 마치 김봉한(金鳳漢)의 '산알'같은 것이다.
그것을 어찌 찾을 것이냐?
'장마당'을 다시 생각하자.
그리고 남조선에 퍼지고 있는 시골 5일장과 김포, 이천, 여주, 문막 등 중조선에 확대되고 있는 프리미엄 아울렛(premium outlet)을 생각하자.
이 양자가 결합된다면 어찌될까?
결합될 수가 있을까?
무엇이 문제일까?
그것은 결과적으로 전 세계적으로 동서양 양쪽에서 다같이 옛 신시(神市)처럼 이상적인 시장으로 환영받으며 퍼져나갈 수 있을 것인가?
힘들다.
매우 어렵다.
그러나 나는 오늘, 하나의 복승(複勝), 하나의 '산알'을 제시한다.
이미 시작되었다.
북과 남에서 이미 그 싹이 나타나고 있다.
장마당, 5일장, 프리미엄 아울렛에 다같이 그 산알이 복승을 시작한다.
바로 이것이 카알 폴라니 '대전환'의 씨앗, 스탠포드가 '창조적 축제'라고 들어올리는 바로 그것, '획기적 재분배' 그것이다.
획기성은 '자본주의의 핵심'이고 재분배는 공산주의, 사회주의의 씨알이다.
그런데 그 둘이 하나가 되는 '획기적 재분배'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은 지금 장마당, 오일장, 프리미엄 아울렛의 어디에 그 기능이 있을까?
있기나 있는가?
분명히 잘라 말한다.
있다!
그것은 바로 머지않은 날 온 세계와 온 인류에게 참으로 “기이하고도 상서로운 아름다움” 하나의 미학(美學)으로서 빛나며 다가올 것이다. 이 민족은 창조의 '성배'(聖杯)의 민족이 될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냐?
지금 5일장과 프리미엄 아울렛에서는 아직 모습이 확실히 안 나타났으나 분명 최근에 '장마당'에서는 나타났다.
'도르레'다.
'도르레'가 무엇이냐?
뱅글뱅글 돌아가면서 돈과 돈 사이에서가 아니라, 물건과 물건사이에서 여러 가지 형태, 여러 가지 경우, 여러 가지 종류로 상호 교환되는 것이 바로 도르레다.
그것은 옛 신시(神市)에서는 오늘.
頻回値(빈회치)
來頻(내빈)
회전목마 룸(Loom)
더 이상 나는 말하지 않겠다.
찾아보라!
어떻게!
찾는 것이 돈 버는 길!
창조경제다.
2015년 4월10일
원주 토지문화관에서
글/김지하 시인
동강산수문화원 개원 기념 강연 특강원고 (2015. 5. 15)
주제 : ‘산수문화는 우주생명학’
시인 김 지 하
우주기운의 지구침식이 매우 기이한 시절이다. 단순한 심층지각의 발작만이 아니다. 네팔의 에베레스트 지진, 캘리포니아의 거듭된 지진, 칠레와 일본 ‘하코네’ 산의 화산. 이들이 다 보통일이 아니다.
에베레스트, 즉 ‘곤륜’의 지진은 태평양 둘레의 ‘불의 고리(Ring of Fire)’의 발작과 함께 백두대간의 안위를 걱정하게 한다. 영월, 정선, 평창과 강원도의 ‘산수(山水)’, 특히 동강은 어찌될 것인가?
최근 정부는 수천억 예산을 들어 올리며 바로 이 걱정되는 강원도 ‘산수’에 <빅 데이터(Big Date)포털>을 결성하고 새로운 ‘산수산업’을 일으키려고 한다. 안심할 수 있는가?
나는 그동안 수없이 많은 기회에 강원도의 백두대간과 동강을 오르내리며 새 문명의 ‘새 나루터(새나루)’, 새 지구의 ‘선창마을(창말)’을 모색해왔다. 다시 말하면 우주의 새 기운의 아우라(Aura)를 찾아 <산수문화의 우주생명학>을 공부해왔다. 그것은 정부가 모색하는 바로 그 <빅 데이터>에 해당할 것인가? 그것은 디지털시대의 참다운 강원도 혁신산업의 근원이 될 것인가?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백두대간은 이 민족의 평화와 생명을 안전하게 할 참다운 <궁궁(弓弓)>, 정감록의 저 마지막 구절 “利在弓弓(이익은 궁궁에 있다)”의 터전이 될 수 있을 것인가?
지진과 화산과 쓰나미가 폭발한다면 정부가 희망하는 <21세기 번영의 새 원유(原油)>는 꿈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우선 ‘동아일보 2015년 5월 4일자’ 지구시스템과학 쪽의 제안인 <산수의 지질과 수질조사>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먼저 역사학지식에 속하는 ‘삼국사기의 지진기록’, ‘조선왕조실록의 1,900건의 지진사건’, 특히 이조 중종(中宗)때인 16세기, 1518년 5월15일 ‘유시(酉時)의 세 차례 지진’과 1623년에서 1910년까지 288년간의 <승정원일기>의 날씨기록 조사가 필요하다.
인문학자료의 자연과학활용은 매우 긴요한 현대적 과학필수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참으로 근본적이고 원천적이며, ‘우주기운의 지구침식이 매우 기이하고 기이한’ 바로 오늘날, <산수문화>를 통해서 ‘지진대비’와 ‘빅 데이터 포털’을 완수하며 그를 통한 그보다 더 근원적인 목적에 도달해야 한다.
“동강중심의 백두대간은 전지구의 우주 대개벽의 아우라다.”, 이 지역은 지난 100여년이후 지진·화산·쓰나미 등 자연재해가 일어날 수 없는, 이른바 불교풍수학에서 <明冥>이라 불리는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1,000여 년 전 자장(慈藏)스님을 통해 <대화엄경>의 비장처로 ‘화엄 멘토’인 문수(文殊)에 의해 지시되었고, 그렇게 때문에 기원전 200여 년 전 동진(東震)의 심치제인(審治濟因)에 의해 <동방의 새 세계>로서의 <여량(餘糧)>으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700년 전 강릉선비 김주호(金周虎)의해 다시금 확인되었다.
김주호는 그때 다음의 시를 남긴다. <西憫東一辰(서쪽은 어둑어둑한데 동쪽에 샛별 한 개가 떠오른다)>
당시로서는 ‘서쪽’이 몽골침입이었다.
오늘 그것은 무엇인가?
서양문명의 서서한 어둠이다. 그에 대비된 동방의 샛별이 바로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동강과 강원도의 백두대간 그리고 동해안”인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 지역을 그리도 열심히 오르내린 것이다. 그래서 동해안, 나진-선봉, 유라시아철도개통, 강원도 관광경기, 평창올림픽, 양양공항의 활기, 일본의 독도쟁탈욕심, 하나둘이 아니다.
내가 “동강의 산수문화”를 곧바로 새 시대의 역(易)을 뜻하는 <우주생명학> 자체라고 직언한 것은 바로 그런 뜻이다.
온 세상의 <선후천융합대개벽>은 어디서 오는가? 바로 이곳이다. 공자의 명언을 듣자.
<終万物 始万物 莫盛乎艮>
艮方은 조선이지만 더 구체적으로는 <산 많은 곳(艮方)>, 바로 “이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