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대한 우편 배달부 "페르디낭 슈발 (Ferdinand Cheval )". 1836-1924
프랑스의 오뜨 리브(Haute-rive)에는 환상의 성인 '빨레 이데알(Palais Ideal)'이라는 성이 있다. 이 성을 축조한 사람은 그 마을의 집배원이었던 페르디낭 슈발이라는 사람이었는데, 그는 33년 동안 이 성을 지었다.
그는 리용에서 40마일 가량 떨어진 오뜨 리브 마을에서 우체부로 일하고 있었다. 흔히 '우체부 슈발'이라고 불렸던 그는 자신이 살아온 43년 동안 이렇다 할 특별한 일을 해 놓은 게 없었다. 그러던 1879년 어느날 슈발은 그의 딸의 출생을 기념하기 위해 "삶의 원천'을 짓기 시작했다.
슈발은 여느 때와 같이 우편물을 배달하기 위해 길을 걷다가 그의 시선을 잡는 것에 이끌렸다. 그것은 매일같이 개울가의 돌밭을 밟고 지나가던 그가 단 한 번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돌더미였다. 이제껏 그가 눈 여겨 보아오지 않은 기이한 형체의 돌이 그의 시선을 끌었던 것이다. 그 돌은 길이가 4인치 정도되는 흙투성이의 석회석이었는데 슈발은 이 돌에 '탈출의 돌'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이 돌을 주머니에 간직한 채 집에 돌아온 슈발은, 그 때부터 이상하게 생긴 돌이나 벽돌, 굴껍질, 유리조각, 철사, 쇠붙이, 등등... 여러가지 잡동사니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자기집 정원에 터를 마련하여 벽쌓기 작업을 시작했다.
조개껍질로 된 연못과 조약돌로 만들어진 작은 동굴은 그가 매일 30Km를 돌아다녀야 하는 우편 배달 도중 오며 가며 우연히 모은 자갈들을 모아 붙여서 만든 것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건축은 결국 삼십여 년 만에, 신비한 모습의 기념비로서의 자태를 드러내게 된 것이다.
'똑같은 거리를 평생 돌아다녀야 하는 운명'에 넌더리가 났던 그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의 기분을 전환하기 위하여, 나는 나의 꿈 속에서 동화의 궁전을 짓고 있었다. 그것은 모든 상상력을 초월한 상태에서 평범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한 것이었다(작은 동굴, 정원, 탑, 성채, 박물관과 조각 등). 여기에서 나는 원시시대의 모든 건축물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고 싶었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의 만화경처럼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에 그 이미지는 최소한 10년 정도 나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꿈과 현실간의 격차는 몹시 심하였다. 그것은 내가 건축의 원리에 대해 완전히 무지했을 뿐만 아니라 미장이의 흙손조차 써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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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차를 끌고 우편배달을 나가기 시작한 슈발은 희귀한 돌을 보다 많이 모으게 되었다. 그는 돌을 수집하느라 잠을 설치면서도 밤에는 석유등에 의지한 채 수시로 돌을 쌓아 나갔다. 돌이 많아지자 그 돌에 조각을 새기기도 하고, 기둥을 쌓기도 했다. 그 때부터 그 돌은 쪼아지고 쌓아지면서 그의 꿈속에 깊이 잠들고 있었던 성곽이 구축되기 시작했다. 그는 성의 외벽을 건축하는데만 20년을 보냈다. 작은 조각에서 큰 조각으로, 조각이 기둥으로, 벽으로, 층계로 그리고 지붕으로, 마침내 기적의 성으로 솟아올랐다. 그 성의 이름은 '이상의 성(Palais Ideal)'이었다. '우체부의 꿈의 궁전'이라고도 불리는 이 조형물은 근 30년 동안 매일같이 반복된 수고의 결실이었다.
모든 사람들로부터 "돌을 줏어다 정원을 채워놓는 미친 사람"이라고 백치 취급 당했던 지칠줄 모르던 우편 배달부가 만들어 놓은 작품은 이렇게 하여 생겨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미친 사람은 아니었다. 이 시골의 하급 공무원은 자기 시대의 석학들과 개척자들에 대해 한없는 경외심을 품고 있었으며, 끊임없는 호기심으로 가득차 있던 사람일 뿐이었다.
우편 배달의 임무를 완수하는 동안 그는 꿈을 꾸었으며, 여가 시간에는 그의 꿈의 총결산이자 그가 "자연의 사원" 혹은 "무한한 휴식과 침묵의 묘"라고 부르는 이 세계를 지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 속에서 용이나 전설이 나오는 괴수, 페닉스, 거대한 여인상 또는 이집트에 있는 것보다 더 이상한 느낌을 주는 스핑크스 등과 마주치게 된다. 이것은 세계일주를 할 형편이 못 된 슈발이 화려한 그림 잡지와 같은 연감이나 사진 속에서 본 그림을 바탕으로 건설해 낸 자신만의 세계였다. 아즈텍 문명의 유적지, 앗시리아의 묘비, 앙코르와트 사원과 그 곳에 있는 칡뿌리, 꽃과 산호로 유명한 폴리네시아 등 그가 이 지구상에서 꿈꿔 왔고 상상해 왔던 그 모든 것들이 축약되고 집결되어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세워진 것이었다.
페르디낭 슈발은 여기에 자신의 비밀스런 일기를 적듯이 평소 그가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던 인생의 좌우명이나 격언을 새겨넣기도 했다.
높이 14m, 길이 25m, 넓이 14m에 3000m³의 돌이 사용된 이 궁궐을 짓기 위해, 건축가도 미장이도 아니었던 슈발은 많은 기술적 문제들을 혼자 해결해야만 했다. 가끔씩 친구의 도움을 받은 것이 전부였다.
그가 남긴 여러 권의 기록 수첩들 가운데 그는
"꿈과 현실 간의 거리는 정말 멀기만 하다. 미장이가 쓰는 흙손이나 끌, 대패 따위를 한번도 만져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건축의 제반 법칙이란 전혀 생소한 것이었다.
라고 적었다. 그러니 그가 이 "궁궐" 입구 정면 문 위에
"이 곳을 지나면서, 네가 보는 모든 것은 한 농부가 이루어 놓은 것이다. 나의 꿈으로부터 나는 이 세상의 여왕을 끌어낸 것이다."
라고 자랑스럽게 써놓을 만한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하겠다.
드디어 이 궁궐이 완성되자 비로소 마을 사람들은 더이상 그를 미친 사람처럼 취급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일종의 존경심을 표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성은 그렇게 쉽게 축조된 것이 아니었다. 가정을 돌보지 않고 성의 축조에 전념했던 그는 사랑하는 외아들과 아내를 잃게 된 것이다. 그제서야 그는 충격과 슬픔으로 아들과 아내를 위한 묘각(墓閣)을 짓기 시작했다. 돌로만 지어진 사랑과 슬픔의 유택(幽宅)은 이 지상에 존재하는 가장 아름다운 묘각이었다. 이를 완성하고서야 그는 다시금 성을 짓기 시작하였고 이 외로운 작업은 그의 나이 일흔이 넘어서야 끝을 맺었다.
슈발의 상상력은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형태로 발산됐다. 그가 지은 이상형 궁궐의 벽에 슈발은 다음과 같은 당당한 글귀를 적어 놓았다.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나, 내 자신 농부로 살아온 나는, 나와같은 계층의 사람들 중에도 천재성을 가진 사람, 힘찬 정열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살고 또 죽겠노라."
40년 동안 나는 파헤쳤네
이 동화의 궁전이
땅 속에서 솟아오르도록.
내 꿈의 이름으로, 나의 육신은 모든 것을 받아 들였다.
시간, 조롱, 세월.
인생은 한 마리의 재빠른 군마
그러나 내 꿈은 이 돌 위에서 영원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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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말했듯이 힘찬 정열이야말로 그에게 꼭 있어야 했던 것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이 '상상의 궁전'을 완성하는 데에는 1만여일(9만 3천 시간, 33년의 시련)이 그에게 소요됐기 때문이다.
1912년 이 작업을 마무리지으면서 슈발은 즉시 근처 묘지에 자신의 영묘를 짓는 일에 착수했다. 그는 자신만의 성곽인 '빨레 이데알'에 안치되고 싶어했지만, 프랑스 관할 지방당국의 반대에 부딪혔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영묘를 짓는데 또 8년을 보냈다. 페르디낭 슈발은 이 모든 건축을 끝낸 후 1924년 88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이런 연대적인 면을 고려해 볼 때, 달리를 비롯한 초현실주의자들이 슈발을 만날 수도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서로 만나지는 못했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언제 오뜨리브를 찾아갔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상상의 궁전'은 얼마있지 않아 초현실주의 운동에 있어서 가장 신성한 장소로 대접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에른스트는 '우체부 슈발'을 찬양하는 콜라주 작품을 만들었고 브르통은 그에 관한 시를 짓기도 했다. 그가 사망한 후 그의 명성이 더욱 높아갈 즈음, 초현실주의자들은 슈발을 그들 운동의 선구자의 한 사람으로 여기며 경의를 표했던 것이다.
이 '상상의 궁전'은 지금껏 어떤 건축가도 지은 적이 없었던 잠재의식이 표현된 궁전이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이 좋아했던 소박한 이 작가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소유한 시골 정원의 공간 속에 입체적 작품을 만든 사람이었다. 그것은 아마 19세기의 예술가들이 만든 '비전문적' 작품 가운데에서 가장 정교하고 가장 아름다우며 가장 신비로운 작품으로 꼽힐 것이다.
1896년부터 이 마을 어귀에는 다음과 같이 쓴 팻말이 붙어있다.
"우편배달부의 강인한 인내와 미적 감각이 잘 표현된 작품을 방문하지 않고서는 오뜨 리브를 지나칠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관광객이 그 곳을 방문하였고 또 그들은 이 "대작" 앞에서 우편배달부 복장을 한 건축가와 함께 사진을 찍고 싶어했다.
그는 문화의 성직자로 추대되었으며, 슈발의 "꿈의 궁궐"은 성탄일과 새해를 제외하고는 지금까지도 모든 사람들에게 열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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