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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靑松) 기행초(抄)(1)
Ⅰ
“왜정 때 조선은행에 댕길 적에 말이여…… 조선은행권의 현찰을 곳간차에 싣고 경원선을 달리는디……. 블라디보스톡까지 논스톱으로 달리는디말여ㆍㆍㆍ원산역을 지나면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어…… 천진역을 지나니께 정신없이 쏟아지고…나는 그런 눈을 첨 봣어…아아 그 눈! 그 눈!”
“오늘 같은 눈은 눈도 아녀, 이것이 눈인중 알어? …… 차가 두만강 철교를 건너가는디…… 오오 두만강…… 오오 두만강…… 내 눈에 뭐가 보였겠네? 눈! 그저 눈! 눈밖에 보이는 것이 읎었어.
그때 그 눈을 바라보는 내 마음이 워땟겠네? 내 심정이 워땠겠어? 나는 시고 뭣이고 읎었어. 눈이 시고 그 뭣이었어. 나는 그냥 울었어. 두만강 눈을 바라보믄서 한없이 그냥 울었어.”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 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 터만 다니며 붐비다
* 박용래,「저녁 눈」(1969) 현대시학상 수상작품
임강빈과 이문구가 찾아온 어느 겨울날은 밤새도록 이 술집, 저 술집 돌아다니며 박용래는 꺼이꺼이 울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임강빈이 출근한다고 나서자 이문구의 손을 잡고 말했다. "문구야, 딱 한잔만 마시고 헤어지자. 이 동네서 한 잔만 더 마시면 작별해도 될 게야."
박용래는 이문구의 손을 잡고 들어갔다. 아침 술을 마시던 지게꾼, 품팔이꾼, 거간꾼들이 그가 들어서는 것을 보고 일어서 인사를 했다. 주모도, 주모의 남편도 인사했다. 감격에 겨운 박용래는 첫 잔을 마시자 다시 울기시작했다.
어느 해는 금주선언을 한 적도 있었다. 친구들의 전화도 거절하고 교외로도 잘 나가지 않았다. 아이들은 기적이라며 달력에 하루, 이틀, 사흘, 나흘 동그라미를 쳐 갔고, 스무 개의 동그라미를 그리고 나자 스스로도 감격하였다. 그는 금주 20일 돌파 기념으로 소주병을 사다가 입에 부었다.
박용래의 집에는 술잔다운 술잔이 없었다. 술을 심하게 마신 다음 날에는 아내도, 그 자신도 술잔 비스름하게 생긴 것은 모두 담에 던져 박살내 버렸다. 유리잔이 박살나고 김치 보시기, 숭늉그릇도 사라졌다. 하루는 홍희표 시인이 찾아오자 고추장을 담았던 접시를 술잔으로 꺼내 왔다.
- <이문구의 문인기행>중에서
* 박용래(朴龍來/1920~1980) : 충남 부여출생. 강경상업을 수석졸업하고 한국은행에 취업하였으나, 그만두고 중고교 교사 등을 역임하였다. 1955년 시 《가을의 노래》, 1956년 《황토(黃土) 길》《땅》등이 《현대문학》에 추천되어 데뷔하였다. 향토적인 정서를 시적 여과를 통해 간결하고 섬세하게 표현함으로써 한국 현대시의 한 갈래를 형성하였다. 시집 《싸락눈》 《백발의 꽃대궁》과 공동시집 《청와집(靑蛙集)》, 시선집 《강아지풀》 등이 있다.
Ⅱ
늦가을비 나리고, 날씨가 차다. 이제 11월도 중순으로 접어들었니까, 첫눈이라도 내릴 것만도 같다. 그래서인지 눈물의 시인, 박용래의「저녁 눈」이 생각났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어딜가나, 모든 산하(山河)가 가을로 물들어 눈물나게도 아름답다. 가을겆이가 끝난 텅빈 들판, 겨울 철새들이 날아들고 발길은 또 어딜 가잔말인가.
서울에서 12:30분에 출발한 버스가 세시간 길을 달려, 예천에 있는 「삼강(三江) 주막」도착했다. 이 주막은 조선말기의 전통 주막으로, 따뜻한 정취가 남아 있는 이 시대 마지막 주막이라고 한다.
삼강(三江)이라고 하는 것은 강원도 황지에서 발원되는 낙동강과 봉화에서 내려오는 내성천, 문경에서 발원하는 금천이 이 곳 풍양면 삼강마을 앞에서 세 물줄기가 합류하기에 삼강이라 불린다고 한다.
「삼강주막」은 그 옛날 부산에서 안동까지 소금배가 오르는 길목이었고, 또한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가기 위해서도 이 나루를 지나야 하는 곳으로, 오가는 길손에게 배고픔을 해결 해주고 장사를 하는 사람들의 숙소도 제공하기도 했다고 한다.
<유옥련 할머니>
이 주막은 2006년 마지막 주모 유옥련 할머니가 89세로 세상을 떠난 뒤 방치되었으나, 2007년 예천군에서 1억 5천만 원의 비용을 들여 옛모습대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복원 당시 주막 주변에 보부상숙소, 사공숙소, 공동화장실 등도 함께 지었다.
낭만과 정취가 가득한 이 시대의 마지막 주막에 와서 어찌 막걸리 한잔하지 않고 떠날 수 있으랴. 이젠 사모님들이 당연하듯 안방차지를 하고, 남자들이 마당쇠가 되어 술안주상을 들고 다니는 모습이 씁쓰레해 보였다.
노루꼬리만큼이나 짧은 가을 날, 우리는 갈길이 멀어 아쉬움을 뒤로하고「회룡포(回龍浦)」로 떠났다. 회룡포는 태백산 능선의 산자락이 둘러싸고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 휘감아도는 육지속의 섬마을으로, 2005년 8월 국가지정 명승 제 16호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이 곳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계기는 '가을동화'란 드라마였다고 한다. 회룡포는 '가을동화'란 극중에서 어린 시절 은서와 준서가 자전거 타고 물장난 치며 애정을 꽃피우던 곳이었다.
회룡포의 전망을 보기 위해 가뿐숨을 쉬며 오르다 보면, 통일신라 시대때 세워진 천년 고찰 장안사(長安寺)을 만나게 된다. 팔각정자가 있고 음료수대가 있어 잠시 쉬어 가도 좋으리라. 여기서부터 비룡산 정상 회룡대(回龍臺)까지는 300m정도의 가파른 송림 오솔길 침목 계단길이 이어진다.
장안사에서 회룡포를 내려다 보면서 쉬엄 쉬엄 올라도 10여분 정도 오르면 깎아지른 절벽위에 팔각정의 전망대 회룡대가 눈앞에 나타난다. 전망대에 올라서면 발아래 내성천이 마치 거대한 뱀이 또아리를 틀듯 휘감아 돌고, 흐르는 강물이 만들어낸 드넓은 모래사장이 마을을 포근히 감싸고, 그 안에 갇혀 버린 서너 채의 가옥들이 주위 논밭과 어우러져 너무도 평화스러운 전원 풍경으로 다가온다. 회룡포는 한폭의 정갈한 동양화였다.
역시 가을 해는 노루꼬리만큼이나 짧은가 보다. 다시 이번에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소나무가 세금을 내고 있다는 마을로 버스가 달렸다.「석송령(石松靈)」이라 불리는 소나무가 있는 곳에 도착하니, 어둠이 내려 있었다. 이 나무는 천연기념물 제 294호로 수령은 6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 10m, 둘레 1.9m로서 우산과 같이 반원형을 이루고 있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약 600년전 풍기지방에 큰 홍수가 났을 때 석간천을 따라 떠내려 오던 소나무 한 그루를 지나가던 과객이 건져 이 곳에 심었고, 그뒤 이 마을에 살던 이수목(李秀睦)이란 사람이 이 나무를 영험이 깃들인 나무라는 뜻의「석송령(石松靈)」으로 이름짓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그의 소유토지 6,600m를 이 나무이름으로 상속등기해 주었고, 이때부터 이 나무는 재산을 소유하는 나무가 되었다. 현재 석송령의 소유토지를 경작하는 사람이 재산세를 해마다 납부하고 있다고 한다.
바쁜중에도 잠깐 나와 안내를 해준 예천군지부장이 "예천군청에 처음 부임한 신규 직원들은「석송령(石松靈)」이란 사람에게 세금고지서를 통보하여야 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 없어 애를 먹다가 나중에 소나무이름이란 사실을 알고 한숨을 쉬었다.”라는 거짓말같은 실화를 전해주었다.
황신환장군의 유년시절의 첫사랑과 꿈이 무르익었던 예천(醴泉)을 둘러보고, 버스는 경북의 가장 오지인 청송으로 향했다. 여름 날은 밤 8:00가 되어도 아직 밖은 환했으나, 요즘은 오후 6:00만 되면 곧 어두어 진다. 차장으로 밖을 보니 칠흑같은 어둠뿐이다. 이곳에서 청송까지는 한시간 반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삼강주막」에서 막걸리가 과하였던지, 잠이 왔다.
한잠을 자고나니 산중에 불빛이 요란했다. 청송읍내에 가까이 왔나보다. 읍내에서 버스가 다시 어둠을 속을 몇십분을 달리자, 달기온천에 도착했다. 멀리 경남, 전남, 강원도와 대구에서 먼저 온 동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들 진심으로 반가운 인사를 하고, 청송에서 유명한 달기 약수물로 조리한 닭백숙과 떡갈비 그리고 술을 나누며 회포를 풀었다. 대구동지들은 참으로 오랜만에 만나니, 더욱 기뻤다.
그 간의 회포를 풀고, 우리는 다시 산중에 위치한 자연휴양림 숙소로 이동했다. 80%이상이 산으로 된 청송이어서인지 밤공기가 달콤하고, 낙엽냄새도 향기로웠다. 10명은 산 아랫쪽에 위치한 작은 숙소에, 나머지 30여명은 산중턱에 있는 숙소에 짐을 풀었다.
아래쪽 숙소에 짐을 풀고 20여분을 걸어 위쪽숙소로 가니, 엄전무님이 보내온 하림삼결살로 야외 파티가 준비되었다. 하늘에는 열 엿세 둥근달이 몇낱의 별을 거느리고 떠 있었다. 우리는 천년만에 찾아 온다는 2011. 11. 11일 11시 11분 11초를 기해 축배를 들며, 모두 동심으로 돌아갔다.
나는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산책을 했다. 아! 어제밤 중천에 떠 있던 그 둥근달이 아직 지지않고, 달무리를 만들어 아침안개속에 희뿌옇게 떠 있었다. 소나무와 수십미터 직선으로 키가 자란 전나무숲이 새벽 염불을 올리는 선사(禪師)마냥 안개속에 경건히 서 있었다.
커피향기 물씬 풍기는 전나무숲을 천천히 걸어 산중턱에 위치한 숙소로 가 보았다. 숙소 마당에서 바라다 보는 달은 그지없이 밝게 비쳤다. 같은 산중인데도 밑에는 아침안개가 자욱하여 희미한 달무리를 이루고 있었지만, 산중턱에서 바라다보는 달은 저리도 휘영청 밝다니ㆍㆍ. 얼마만에 보는 달무리이던가.
Ⅲ
우리는 새벽 6시에 기상하여 청송 솔기온천장으로 향했다. 지난밤 위쪽숙소에 물이 공급되지 않아 약간의 불편이 있었지만, 일정에도 없었던 온천장으로 가는 호사를 누릴수 있다니 이런것을 두고 전화위북(轉禍爲福)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이십여분을 달려 청송 솔기(松氣)온천장에 도착했다. 온천장은 호텔과 붙어 있었다. 이런 산중에 이리고 정갈하고 좋은 온천장이 있다니 얼마나 놀라뿐 일인가. 온천물이 아주 미끌 미끌하고, 새벽이어서인지 물이 아주 깨끗하였다. 단체 일본관광객들도 보였다. 한 시간정도 온천목욕을 하고 나니, 간밤의 숙취도 사라지고 피부가 매끌 매끌한게 윤기가 돌았다.
목욕을 마치고 나오는 사모님들도 훨씬 젊고 예쁘 보였다. 온천장 바로 옆에 있는 산과 들판도 아침 안개속가 피어 오르고 있었다. 일교차가 크면 안개가 생긴다고 했는 데, 청송은 경북의 오지답게 산골인가 보다. 안개에 휩싸인 들판의 아름드리 배추가 싱싱하고, 가로수의 황갈색의 잎새들이 신비해 보였다. 이런 풍경이 투박한 소설가 김주영을 키웠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아침식사를 하고, 버스로 약 40여분을 달려 물안개 피어 오르는 주왕산 국립공원내에 있는 주산지(注山池)에 도착했다. 이른 아침녁인데 벌써 탐방객들이 많이도 왔다. 버스주차장에서 약 15분정도를 산길을 걷다보면 자그마한 저수지가 나타났다. 아침이슬 머금은 거미줄이 보석같았다.
주산지는 1720년 조선 경종원년에 농업용수확보를 위해 착공하여 이듬해 10월에 준공하였다고 한다. 길이 200m, 너비 100m, 수심 8m의 아담한 이 저수지는 준공이후 현재까지 아무리 오랜 가뭄에도 한번도 밑바닥을 드러낸 적이 없었단다.
현재 호수속에는 약 150년이나 묵은 왕버들 30여그루가 자생하고 있으며, 이 저수지가 이리도 유명하게 된 것은 김기덕 감독의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이란 영화의 배경이 되고 부터란다.
불타는 단풍이 거의 떨어지고 약간은 썰렁하였지만, 금강산이 천하명산이란 이름값을 하듯 ‘주산지’도 이름값에 전혀 손색이 없는 국내에서는 아주보기 힘든 한편의 서정시(抒情詩) 그 자체였다.
거울같은 맑고 고요한 물에 150년 묵은 왕버들이 몇 낱의 붉은 잎새를 달고 제 몸을 비추고 있는 저 아름다움을 어찌할 것인가. 봄ㆍ여름ㆍ가을ㆍ겨울, 물안개속에 빠진 저 황홀한 풍경은 신(神)의 걸작품이랄 수 밖에.
영화의 한 장면같은 풍경을 뒤로 하고, 다시 버스는 몇 개의 고개를 넘어 주왕산으로 향했다. 새벽에 일어나서인지, 청송군청에서 나온 문화해설사의 청송자랑에도 아랑곳 하지않고 모두들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한다.
문화해설사도 어쩔 수 없는지, 관심을 끌려고 영양고추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옛날에 영양 한마을에서 이웃하여 과부댁과 나이든 세 딸을 가진 홀아비가 살았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고추농사를 지어 살고 있었는데, 언제나 과부댁의 고추는 튼실하게 잘되어 수입이 짭짤하였다고 한다.
홀아비는 고추농사를 잘 짓는 과부댁의 비법이 궁금하여, 어느 날 저녁 그녀를 몰래 따라 가게 되었단다. 멀리서 훔쳐보니, 과부가 홑치마만 입고 밤새 고추밭을 설렁 설렁 돌아다니더란다. 그 광경을 지켜 보던 홀아비는 ‘바로 저것이구나’라고 감탄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저녁 홀아비는 과년한 딸 셋을 불러놓고 올해 고추농사를 잘지으면 시집을 보내줄테니, 이웃집 과부가 했던대로 고추밭에 가서 이리 이리하라고 일어주었다. 세 딸은 아버지가 시키는대로 홑치마만 입고 고추밭을 밤늦도록 훠~이 훠~이 돌아다녔다. 어찌된 일인지 그해 홀아비의 고추는 모두 터져 돈은 구경도 못하였고, 딸들도 시집을 갈수 없었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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