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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과할 수 없는 지역, 칠곡
서울 떠난지 11일 만에 대구광역시에서 밤을 보냈다.
북구 태전동의 찜질방 '우영팰리스'다.
종착지가 앞으로 3분의 1도 채 남지 않았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새벽같이 어제 중지한 칠곡군 동명면으로 되돌아 갔다.
그런데, 어제는 밤길이라 생각이 미치지 못했으나 밝은 아침에
확인된 것은 내가 옛 칠곡땅에서 1박했다는 사실이다.
금호강 이북의 칠곡읍은 칠곡군에도 소중한 지역임에도 대구가
직할시(현 광역시)로 승격하기 위해 빼앗아 갔으니까.
동명면 소재지인 금암2리는 우암창(牛巖倉:대동지지) 자리다.
우암창 우측에는 상주시 함창읍의 태봉산처럼 왕자의 태를 묻은
태봉산이 있다.
칠곡군에 따르면 이 태봉산의 큰 바위 밑에 있는 소(沼)가 소(牛)
로 바뀌어 우암(牛岩)이 되었단다.
이후 영남대로는 어제처럼 5번국도까지 동행하는 25번국도 따라
팔달교 한하고 갈 수밖에 없다.
옛길 찾겠다고 아파트 단지나 빌딩 숲을 헤맬 수는 없으니까.
동명터미널 이후 대구로 향하는 도로는 차량들로 붐볐다.
아마도 월요일 아침이라 더욱 그러리라.
광역시와 인접한 일반 지자체들의 생활권은 예외 없이 광역시가
되기 때문이다.
버드나무가 많아 유목정(柳木亭)이었다는 봉암, 하봉을 지나 옛
칠곡읍인 대구시로 진입했다.
비록 옛길을 걷는다는 명분에도 불구하고 주마간산하듯, 스치듯
지나쳐 버리기엔 아쉬움이 많은 칠곡이다.
팔거리현(八居里縣)~팔거현~칠곡(七谷~柒谷~현재는漆谷)으로
바뀌기 까지의 역사적 고찰은 논외로 하더라도 6. 25 동란이라는
민족 수난의 현대사에서 간과할 수 없는 지역이 아닌가.
대구광역시 읍내동 대구와 칠곡의 경계/대구로 가는 쪽은 만원인데
반해 칠곡행은 쓸쓸하다
파죽지세로 남하한 공산군의 전국토 적화가 경각에 달린 듯 했을
때 영천전투, 안강-포항전투와 더불어 왜관-다부동전투(칠곡)의
승리는 반격 및 승전(?)의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세계 전쟁사에서 전무의 융단 폭격이 감행되었으며 동란 최대의
격전지였고 최후의 보루였던 왜관-다부동 전투에서 패했더라면
대구는 초토화되고 말았을 것이다.
그랬다면 오늘의 대구도 없을 것이다.
"네로황제의 방화가 없었더라면 찬연한 로마도 없었을 것"이라는
가설을 대입한다면 몰라도.
안강-포항과 영천 전투지역은 낙동정맥 종주때 일부러 시간내어
살폈으며 다부동 지역도 거쳐왔으나 왜관 지역은 멀다는 이유로
빼먹고 말았다.
실은, 이중환도 "전 도에 성을 쌓아 지킬 만한 곳이 없으나 오로지
칠곡읍 성곽만이 만길이나 되는 산 위에 있어 남북 대로를 가로지
르는 크나큰 요해처(一道無可以城守者惟漆谷邑治城郭在萬仞山上
截臨南北大路爲要害巨防)" 라고 택리지(擇里志)에서 말했을 만큼
칠곡은 고래로 중요한 지역이다.
야속한 곳, 대구
혼동의 우려가 있을 것임에도 칠곡읍때의 명칭들을 대부분 유지
하고 있는 듯 해서 다행이다.
향교야 불변의 이름이겠지만 칠곡군을 의식하지 않고 옛 지명을
유지하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하니까.
임의적 행정구역 개편이 다반사인 것이 불만이거니와 그 때마다
단행되는 개명, 개칭에 더욱 부정적인 내가 아닌가.
1850년대에 전쟁해서 뺏은 광대한 멕시코땅의 지명들을 스펠링
한 자 바꾸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미국이 부러웠는데.
(상) 칠곡향교/대구광역시 북구에 있음에도 칠곡군 때의 옛 이름이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하) 대구의 상징 달성공원
팔거천 태전교와 금호강 팔달교를 건너 팔달시장에 들렀다.
대동지지가 금호강 도강수단으로 동교하선(冬橋夏船)이라 주(註)
를 단 것으로 보아 겨울엔 가교(假橋)를 설치했던 것 같다.
시장은 그 지역의 특색과 문화가 온존하며 가장 생동감있게 활동
하는 현장이다.
다소 지저분하나 시장 안의 식당도 접하기 쉬운 장소중 하나다.
오늘의 첫 식사를 시장 안에서 하고 달성공원(達城)으로 갔다.
'달성'은 옛 부족국 달구벌의 토성이다(사적62호)
우리 성곽역사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축성되었으며 달성공원의
이름 역시 토성에서 유래한단다.
분위기도 살피고 잠시일 지라도 휴식을 이왕이면 대구의 상징에
다름 아닌 달성공원에서 갖어보려 한 것이다.
경상 감영에도 들를 겸해서.
허언이 아님을 입증하려는 듯 남녀노소 많은 사람의 공간이기는
하나 여기 역시 노인들의 세계다.
가속이 붙은 노령인구의 증가야 말로 위정자에게는 묘수가 없는
심각한 현안이지만 임의로 행동해도 법과 도리에 어긋남이 없다
(從心所欲不踰矩)는 나이에 걸맞는 처신은 늙은이 각자의 몫이
거늘 어디 가나 왜 눈총 맞는 행실들이 일상화 되고 있을까.
그늘진 벤치에서 잠시 졸다가 불현듯이 일어난 생각에 소스라쳐
대구땅을 벗어나려 서둘렀다.
이조때의 사창(社倉:일정량의 곡식을 추렴해 저장했다가 흉년에
대여하는 지방 공동운영의 복지제도)이 최초로 시행되었던(세종
30년,1448년) 곳이며(구미의 사창 등), 경상도 감영이 이전되어
옴으로서(선조34년,1601년) 명실 공히 영남의 중심지가 된 지역
이며 현대에는 전국 제 3의 도시임에도 내게는 금북정맥의 충남
지역처럼 야속한 곳이다.
내가 마음 문을 열고 교분을 돈독히 해오던 사람들중 C, U, J, M,
등 대구와 관련된 이들은 모두 차마 지워버리지 못할, 결코 지워
지지 않을 사연들만 남겨놓고 내곁을 영영 떠나버렸으니까.
삼남대로 때 전주로 우회하였다가 전주천을 걸을 때의 느낌처럼
신천(新川) 둔치를 걷는 것도 그만이었다.
마침, 한 청년이 얼마간 길라잡이가 돼주어서 든든했다.
나의 탈(脫)대구 영남대로를 자상히 안내해 준 그는(조?제) 지금
시계 제로의(진로를 잃은) 무력감에 빠져 있단다.
술 때문에 이혼과 가정해체 등의 참담한 일을 겪었다는 그다.
젊은이가 얼마나 매셔댔으며 어떤 주사(酒邪)가 있기에?
늙은이의 대꾸에 주억거리고는 있으나 그의 어깨에는 천근보다
더한 무게가 실려 있는 듯 했다.
대중가요 노랫말처럼 너무 늦었나.
과이불개 시위과의(過而不改是謂過矣:論語衛靈公29章)라 했다.
망우보뢰(亡牛補牢)의 우행(愚行)이겠으나 다시 소를 기르려면
외양간 부터 고쳐놓아야 할 것 아닌가.
멀어져 가는 그의 뒷 모습을 향해 젊은 그가 가정생활의 재건에
성공해서 기를 펴고 활짝 웃게 될 날이 하루 속히 오길 빌었다.
불안한 찜질방의 운명
10월 하순에 접어드는데도 늦더위가 왜 이리 기승인지.
평일 낮에도 많은 사람이 제각각으로 시간을 즐기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신천 둔치도 분명히 대구시민의 사랑받는 명소인가 보다.
분위기를 고조시키는 상쾌한 분수에 도취되었나.
오늘 대구를 완전히 벗어나려던 생각을 접어야 했다.
막판에 부지런을 떨었건만 대봉교~희망교~중동교~상동교에서
멈출 수 밖에 없었다.
한동안 소요하듯 나태했던 결과라 할 수 있으나 달성군 가창면이
가시권에 있는데도 포기한 것은 거기엔 찜질방이 없어서 였다.
신천 둔치의 분수
그런데 새로 생긴 시름 하나가 날이 갈 수록 커가고 있다.
한 때는 날로 늘어날 뿐 아니라 도농 가릴 것 없이 호화로워 가는
찜질방이 로마를 연상케 해서,(사치스러운 목욕때문에 망했다는)
내게는 더 없이 고마운 장소임에도 걱정스러웠다.
주말이면 어린 애들까지 대동한 찜질나들이 가족을 포함해 만원
사례였는데 이즈음에는 주말도 평일처럼 한가롭다.
가속적인 양극화와 경제 위기의 장기화로 불요불급 지출에 서민
층의 지갑이 닫히고 그들의 출입이 뜸해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적자를 감당 못해 폐업이 속출하고 있다.
남구 봉덕동 '효성찜질방'도 그 수순을 밟아가고 있는 듯 했다.
헬스클럽을 겸하고는 있으나 그 곳인들 불황이 극복되겠는가.
찜질방의 활용이 불가능해지면 당장에 지출 부담이 커지거니와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몸관리 문제다.
온 종일 산과 길을 누빔으로서 생긴 경직된 근육의 이완 작업이
필요한데 찜질방을 대체할 만한 곳이 없으니까.
찜질방의 명운이 한 늙은 나그네의 행보와 직결되어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내게는 중요한 처소가 된 것이다.
적이 걱정하며 탕을 나오는 늙은이를 반긴 한 젊은이의 환대는
낙동정맥 서창과 호남정맥 보성의 재판이었다.(백두대간 52회,
61회 글 참조)
찜질방의 불황이 내 탓이 전혀 아닌데도 종종 주인측에 민망한
마음이곤 한다.
내게는 편안한 밤이 되지만 주인은 태산같은 걱정으로 잠을 못
이룰 것이니까.
효성찜질방을 나설 때도 그랬다.
상동교에서 다시 둔치로 내려가 용두교를 지나고, 이후 정비가
덜 되었으나 그대로 강행했다.
둔치 위의 30번국가지원지방도로를 걸어도 수성유원지와 파동
(巴洞)을 지나 달성군 가창면의 입구인 가창교에 닿게 된다.
생각나는 달성의 여인들
가창교를 건너도 여전히 대구시다.
달성군이 대구광역시에 편입되어버렸으니까.
역사적으로도 대구와 달성은 행정구역 개편때마다 이합(離合)을
반복해 왔다.
1981년에 대구는 직할시로 승격하기 위해 경산군 안심읍,칠곡군
칠곡읍과 함께 달성군의 월배, 성서, 공산 등 3면을 뺏어갔다.
그러더니 1995년에는 아예 달성군 전체를 통째로 삼켜버렸다.
행정구역 개편도 약육강식인가.
그러나 내 기억창에 남아있는 달성군은 단지 화원읍 하나다.
화원에 사는 4명의 젊은 여인들이다.
한 때 초대도 받았으나 이미 옛일이 돼버렸지만.
1983년 4월 5일, 식목일의 일이다.
지리산 칠불암을 거쳐 주능선상 토끼봉으로 오르려고 전날 밤에
하동군 화개면 쌍계사옆 민박집에 들었다.
운 좋게도 내가 마지막 남은 방을 차지했다는데 조금 후에 쥔이
와서 통사정을 했다.(당시에는 민박집이 두어집 밖에 없었다)
뒤늦게 찾아온 4명의 젊은 여인들 처지가 딱하다는 것.
그네에게 내 방을 양보하고 자기와 함께 지내면 안되겠냔다.
그 때도 내가 만만해 보였던가.
방을 내주고 주인방에 갔을 때 쥔네는 제사를 지내는 중이었다.
덕분에 음식도 얻어먹었으나 자정이 훨씬 넘어서 자리에 들었다.
새벽에 불일폭포에 다녀온 나는 칠불암으로 갔다.
전날, 봄비 치고는 많이 내렸기에 갠 날을 기대했으나 빗줄기는
시간이 갈 수록 더욱 굵고 세지더니 동이로 퍼붓는 듯 쏟아댔다.
올라가기를 포기하고 하산하려 했으나 꼼짝하지 말라는 건가.
목통골을 타고 내려가는 물길이 가공스러웠다.
다소 누그러지는 듯 해서 계곡을 건너보려 시도했다.
내 발을 받아줄 줄로 믿었던 바위의 배신인가.
힘을 주는 순간 미끄러져 좌충우돌하며 떠내려가지고 말았다.
역시 배낭이 라이프 재킷(life-jacket)이었나.
급류에 떠내려가다가 바위틈에 걸린 나무등걸에 배낭이 걸렸다.
부러지지도 깨지지도 터지지도 않았고 다음날 보니까 여기저기
멍만들었으니 그냥 기적이라고 해두자.
안경만 수장(水葬)하고 패잔병 꼴로 구례구역으로 갔다.
역 대합실에서 뜻밖에도 간밤의 그 젊은 여인들을 다시 만났다.
목적지가 달성군 화원인데 여비가 든 지갑을 잃어버렸다나.
내 도움을 바라는 표정인 그녀들에게 환생 기념(?)으로 대구행
열차표 4매를 사주었다.
풋내 물씬할 만큼 세상때 묻지 않은 발랄한 언행에 끌렸나.
칠칠치 못한 젊은이들이라고 힐난은 하면서도 딸 같은 귀염이
있어서 였을 것이다.
통장번호를 알려달라기에 적어는 주었으나 기대하지 않았다.
화원읍의 국민(현 초등)학교 교사와 우체국 직원들이라고 소개
받은 것으로 기억된다.
며칠 후 내 통장에 입금되었고 전화도 왔다.
초대도 받았고 연하장도 얼마간 왔다.
그러다가 끊기고 이름도 전화번호도 다 관리대상 밖이 되었다.
아마 50대에 들어섰을 그네가 아직도 달성땅에 있을까?
순수함은 지키되 칠칠치 못하다는 소리는 듣지 않고.
변질된 시골 풍경
영남대로는 가창면사무소(嘉昌) 앞을 지나고 팔조령을 넘는다.
대부분이 청도로 이어지는 30번도로에 포함되어 있다.
가창면은 1천m급 비슬산을 비롯하여 600m~800m대의 산들이
사방으로 에워싸고 있어 경지가 8.8%에 불과하다는 지역이다.
옛 영남대로 때는 오동원이 있었을 뿐인데 대형 회사 '대한중석'
의 후신인 '대구텍'(IMC그룹)이 면의 동력이 되고 있다.
테마파크 '허브힐즈'((龍溪里: herb 가든, zoozoo 랜드, 파충류
공원등)와 리조트 '스파밸리'((冷泉里: water park등)도 가창을
띄우고 있다 하겠다.
얼마 가지 않아 오동원(梧洞院: 대동지지)이다.
오원, 오원동으로도 불린다는 대일1리(大逸)의 자연 마을이다.
오동나무 숲이 많아서 오동원이라는데 옛 이름 그대로다.
얼마쯤 더 가서 팔조령(八助嶺) 터널 앞 마지막 마을인 삼산리(三
山)의 한 미니수퍼에 들어갔다.
냉막걸리 1병을 시켜놓고 아까 가창교를 넘을 때부터 누군가에게
물어보려 했던 질문을 꺼냈다.
팔조령을 넘으면 청도땅이므로 물을 기회를 잃고 마니까.
대구시민이 됨으로서 달성군민의 위상(位相)은 어떻게 변했을까.
궁금했는데 삼산리 가게 주인한테서 한 답을 들었다.
"위상은 무신 놈의 위상."
내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거칠고 볼멘 소리가 튀어나온 것은
그가 평소에 대단한 불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리라.
얼굴에 신경질이 덕지덕지 붙어있는 듯한 주인은 갑술생이란다.
내 연배니까 아직 활동할 법도 한데 교통사고로 거동이 자유롭지
못해 가게를 지키고 있다는 그다.
"저네 멋대로 대구에 붙여 놓고 세금만 많이 걷어가고 있으요."
군민때와 다른 가시적 혜택은 없고 피부로 느끼는 것은 이전보다
세금이 과도하게 부과되고 있다는 것.
변한 것이 어찌 없겠는가.
전군(全郡)이 대구시내버스의 운행권(圈)이 됨으로서 생활권이
광역시로 옮겨갔다.
모든 행정서비스의 질이 업그레이드(upgrade)됐을 것이다.
그러나 변화의 신(神)은 항상 야누스(Janus)적이다.
긍정적인 면과 바람직하지 않은 점의 양면이 있기 마련이다.
필연적인 지가(地價)의 상승은 상대적 상실감을 자극해 조용한
농산촌까지 양극화 현상을 심화시키고 있다.
상부 상조하던 순박한 인심은 증발해버렸고 예리한 이해 다툼은
송사도 서슴찮는 지경으로 변질된 것이 현금의 시골 풍경이다.
일체의 사물이 돈으로 보이는데 유무 상통이 가능하겠는가.
그 영감의 반문이 오히려 내 입을 막아버렸다.
변질된 시골 풍경을 볼 때마다 나는 초라하나마 광대한 정원을
거느리고 있어(옆정원 삼각산, 뒷정원 도봉산) 공기좋기로 소문
난 서울 내 집이 더욱 맘에 들어간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