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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장산을 다녀와서
기우현
새 해 벽두에 내장산을 다녀왔다. 1월 3일(일) -4일(월)의 1박 코스로 다녀왔다. 산행 참가자는 김대성, 구본황, 권용태, 김영철, 김석 선생님과 함께 한 6인이었다. 이렇게 산행하게 된 것은 당곡고라는 공통된 매개 고리 이외에도 그간 몇 년간에 걸쳐 산행의 우정을 쌓아 왔기 때문이다.
같은 학교에 근무하게 되면 산행 계획을 쉽게 세울 수 있지만 흩어져 있으면 아무래도 일정 조정 등 여러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산행 계획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뜻을 모아 산행하게 된 것은 김 석 선생님의 장인 상에 참여하면서부터다. 장례식장에 모인 우리는 산행을 재개하기로 약속했다.
그 출발점은 11월 17일(토)의 관악산 등산이었다. 이 날은 위 회원 외에도 김대성 선생님의 친구인 송파공고 류균상 선생님도 나오셨다. 서울대 입구에서 모여 산행한 후 과천으로 내려와 즐거운 저녁 식사를 함께 했고, 식사 후 권 선생님 동생분이 개업한 치킨 집에 찾아가서 입가심을 한 뒤 노래방까지 들렀다. 그러면서 전에 무등산 여행을 같이 한 경험을 바탕으로 다음 등산을 약속하는 공감대를 이루었다.
이내 김영철 선생님에게서 산행 계획이 메일로 왔다. 내장사와 백양사의 종주 계획이었다. 너무도 마음에 드는 제안이었다. 나는 구본황, 김석, 김대성, 권용태 선생님께도 연락을 취하고, 산행 날짜가 12월 11일(금) -12일(토)이 적당하다고 김 선생님께 알려 드렸다. 그리고 그 날을 기다렸다. 그런데 갑자기 교육청에서 간사학교를 중심으로 한 연구부장 회의를 그 날 에버랜드에서 개최한다는 공문이 내려왔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선생님들과 산행 날짜를 조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몇 차례의 조정 후 26일(토) -27일(일)에 산행하기로 하였다. 이번에는 토요일 아침에 출발하기에 이전 날짜보다는 여행할 시간도 산행할 시간도 가질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 모두 방학식을 24일에 치르는 관계로 홀가분한 기분으로 떠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산행하기 전에 저녁 모임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21일(월) 저녁에 ‘옛날 농장’에서 모임을 가지기로 했다. 회원 모두 참석했다. 그리고 날짜의 재조정이 이루어졌다. 그 이유는 12월 26일과 27일에 권용태 선생님의 따님이 원서동 창우극장에서 판소리 공연을 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중요한 행사를 두고 그 날 권 선생님이 산행할 수는 없었다. 날짜 재조정이 불가피했다.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날짜를 헤아려 보았는데 그날부터 1월 8일까지 다 사전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 중 손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나의 부장 근무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1월 4일(월)을 다른 날로 조정하기로 하고, 1월 3일과 4일에 산행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12월 27일(일)에는 권용태 선생님의 따님 공연을 관람했다. 이 날 임경유 선생님도 참여했고, 김대성 선생님의 사모님도 자리를 같이 했다. 오랜 만에 좋은 공연을 보았고, 시내에서 눈길을 걷는 정취를 느껴보았으며, 권 선생님의 푸짐한 저녁 식사 대접도 받았다.
내장산 산행 계획은 카페지기 김석 선생님이 카페에 게시했다. 우리도 이런 식으로 서로 연락을 계속해 나가면 앞으로의 산행 계획 추진도 훨씬 간편해지지 않을까 싶어 그 방법에 적극 지지하는 댓글을 달았다.
1월 3일이 되었다. 9시에 강남고속터미널에 모이기로 하였지만 출발은 10시에 하기에 느긋하게 집에서 출발했다. 아침 9시가 넘어 터미널에 도착하니 이미 김대성 선생님을 제외한 모든 분이 와 있었다. 김 선생님은 40분에 오신다고 했는데, 류 선생님은 같이 가시는지 궁금해서 전화했다. 류 선생님은 못 오신다고 한다. 그 이유는 나중에 오신 김대성 선생님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류 선생님이 5일과 6일에 김대성 선생님과 스키 약속이 되어 있는데, 스키에 초보인 류 선생님이 등산과 스키를 연이어 하는 것에 대한 부담을 느끼신 것이라고 하였다.
출발하기 전 회장 겸 총무는 김석 선생님이 하기로 정하였다. 김 석 선생님은 앞으로도 당곡고에서 계속 근무하시기에 산행 계획 및 추진은 대장 김영철 선생님과 회장 김석 선생님이 중심이 되어 추진하면 되었다.
10시에 출발했다. 자리는 많이 비어 있어서 편하게 여행할 수 있었다. 그간 일기에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다. 중부 지방에 눈 내린다는 예보는 있었으나 우리가 산행하는 지역에는 그런 예보가 없었다. 눈 내린다고 해도 눈이 그다지 많이 내릴 것 같지 않았다. 설사 눈이 내린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설악산 겨울 산행 경험도 있고, 또 우리가 가는 코스는 험한 산행도 아닐 것이라고 생각해서 아무 부담 없이 출발했다. 탄천에서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는데, 햇살이 밝게 비치니 훈훈한 봄기운마저 느낄 정도였다.
시간은 예정대로 3시간 걸려 1시에 정읍에 도착하였다. 정읍의 첫 인상은 어렸을 적 내가 군산시에 살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건물 규모도 그렇고 좁은 길에 초라한 옛집들. 시간을 마치 40년을 거스르는 듯했다.
내가 정읍을 온 것은 40여 년 전이다. 중학교 1학년 때(1965년) 가을 수학여행을 여기로 왔었다. 2박 3일의 수학여행이었는데 백양사와 내장사를 아우르는 코스였다. 첫날은 백양사에서 1박했다. 음식도 형편없었고, 한 방에 20 여 명씩 재워서 새우잠을 잘 수밖에 없었는데, 그 좁은 방안에 장난꾸러기들이 밤새 잠도 자지 않고 부산하게 돌아다니는 통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그러나 백양사 풍경은 그야말로 절경이어서 입을 제대로 다물 수 없었다. 그 당시 내가 눈으로 본 가장 아름다운 가을 단풍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나는 어디로 얼마나 가는지도 가늠을 못한 채 정읍 내장사로 왔다. 기억에 10시쯤 숙소에서 출발해서 오후 4시 - 5시쯤 정읍 내장사에 도착하였는데, 내장사 입구 숙소에 짐을 푼 뒤 내장사에 갔지만은 피곤하고 허기져서 내장사 일주문까지만 가보고 절 내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정읍에 온 이래 처음 이 곳에 오게 된 것이었다. 산행하면서 기억나는 것으로는 처음에는 어느 정도 대오를 지키면서 갔는데 산을 타고 넘어 올 때는 각기 능력껏 걷는 형태로 흩어졌고. 뛰어 내려오다가 넘어지지 않으려고 나뭇가지 붙잡으면서 내려왔던 기억이 난다.
터미널에서 하차한 후 우선 식사 장소를 먼저 정해야 했는데, 아무도 정읍 음식점에 대한 사전 조사는 없었던 듯하다. 그냥 걷다가 정해서 들어간 집은 정읍 식당이 아닌 전주 식당이었다. 정읍인데도 곳곳에 전주 식당이 있는 것을 보면 음식에 있어서는 전주 영향권 안에 들어 있는가 보다.
우리는 식당에 들어가서 동태와 조기 매운탕을 시켰다. 막걸리를 주문했으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집 주인이 사오고, 초간장도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전주 식당이라고 해서 전주의 맛깔스러운 맛도 느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정읍에 대해 물어보려고 해도 전주 사람이라고 하니 이곳에 대한 유용한 정보도 얻을 수 없었다. 원래 우리 계획상에는 자연 관찰로와 정읍사 공원 내를 걷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하지만 모처럼 역사문화도시에 왔고, 산행은 내일인 만큼 오늘은 문화체험을 하는 것이 적당할 듯 했다. 사전에 미리 검색하고 오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다. 다행스럽게 권용태 선생님이 이곳이 동학혁명이 일어난 곳으로 역사적 의의가 있는 곳이니 전봉준 고택을 방문하자는 안을 내었다. 우리는 동의를 하고 식사 후 그리 가는 방법을 논하기로 하였다.
우리는 택시를 이용하여 전봉준 고택지를 가기로 하였는데, 6명인 관계로 두 대를 잡아탔다. 택시 기사가 전봉준 고택에 가기 전에 황토현 유적지가 가깝다고 한다. 그래서 거기를 먼저 가기로 하였는데, 다른 차에 탄 구본황 선생님이 전봉준 고택을 먼저 가는 것이 좋겠다고 한다.
우리는 전봉준 고택에 먼저 내려 다음 행선지를 어떻게 할 것인지 기사를 기다리게 할 것인지 구 선생님께 전화했다. 그런데 구 선생님이 탄 차는 이미 보내버렸다는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우리도 택시 기사를 보내버렸다.
전봉준 선생 고택지(故宅址)는 이평면 장내리 조소(鳥巢)마을에 있었다. 이 집은 1878년(고종 15)에 세워진 집이다. 일자집에 방 세 칸의 남향집이었다. 동쪽부터 부엌, 큰방, 윗방, 끝방 순서로 되어 있다. 끝방은 곳간으로 사용되었으며 두 방 앞에 툇마루를 놓았다. 옛날 수수한 농가 그 모습 그대로였다. 우리는 툇마루 앞에 놓여 있는 방명록에 문화탐방이라고 서명하였다. 특이한 것은 널찍한 화장실이 집 앞에 있는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우리는 화장실을 뒷간이라고 하여 집 뒤에 세워 두기 마련인데, 그 배치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었다. 제대로 한 복원인지 의심이 갔다. 문화 답사객을 배려해서 만든 시설인지 알 수 없으나 들어가 보니 재래식 화장실이었다.
우리는 고택에서 나와서 우물을 보았다. 옛날에도 전봉준이 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 사용했을 것이다. 그리 생각하고 덮개를 열어 안을 들여다보니 우물 안이 깊지 않고 그 안에 맑은 물이 가득했다. 손쉽게 물을 길어 쓸 수 있는 시설이었다. 어렸을 적 군산에서 본 우물의 깊이와는 판연히 달랐다. 나중에 황토현에서 내장사로 오는 도중 기사에게 정읍이 우물 정자인 이유를 물어보았는데, 기사의 말로는 정읍은 어디를 파도 물이 풍부하게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물 정자를 쓴다는 것이다. 그 말이 쉽게 이해되었다. 권 선생님 말로는 백제의 삼천 궁녀 이야기도 승자인 신라가 패자인 백제를 음해하기 위해 꾸며낸 이야기인 것 같지만, 정읍의 너른 들판을 보면 그 이야기도 믿어진다고 한다. 너른 들판과 풍부한 물. 농업이 산업의 근간이었던 옛 시대에 정읍은 천혜의 지역이었을 것이다. 이런 땅을 기반으로 한 백제는 삼천 궁녀를 거느릴 만한 경제적 능력을 가졌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곳이 동학혁명의 진원지가 되다니. 이 얼마나 역설적인 우리나라의 정치적 모순이란 말인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우리는 전봉준 선생 고택지에서 걸어 나왔다.
이제는 기사도 없고 황토현까지 걸어가야 한다. 햇살 좋은 날 산책하는 기분으로 걸어 나오는데 전봉준 단소가 가까운 곳에 있다는 안내판이 있다. 안내판에는 200m라고 되어 있는데, 가리키는 쪽을 바라다보니 건너편 양지바른 곳에 여러 묘소가 보인다. 그런데 가다 보니 그 쪽이 아니고 가는 길 왼쪽의 소나무 숲에 전봉준 단소가 모셔져 있었다. ‘전봉준 장군 단소(壇所)’, 즉 전봉준 장군의 제단이 모셔져 있는 곳이다. 단소에는 장군의 허묘와 제단만이 아니라 여러 비가 세워져 있었다. 1954년 천안 전씨 문중에서 제단과 비석을 세우고 매년 이곳에서 제사를 지낸다고 하였다. 우리는 김석 선생님의 제안으로 귤을 제단에 놓고 고인에 대해 묵념을 하였다. 그리고 비에 새겨진 전봉준 장군의 시를 읽어 보았다.
이 시는 전봉준 장군이 처형을 당하면서 남긴 시다 .
時來天地皆同力(시래천지개동력) : 때를 만나니 천지도 내 편이더니
運去英雄不自謨(운거영웅부자모) : 운이 다하니 영웅도 어찌할 수 없구나.
愛民正義我無失(애민정의아무실) : 백성을 사랑한 정의 그 무슨 허물이더냐
愛國丹心誰有知(애국단심수유지) : 나라 위한 일편단심 그 누가 알아주리.
전봉준이 대원군과 대화를 나눌 때, ‘나는 오직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한번 죽고자 하는 마음뿐이다.’라고 일갈했다고 한다. 때를 만나지 못한 비운의 영웅의 면모가 고스란히 드러나 이 시를 읽으면서 한결 숙연해지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단소에 나와서 목적지인 황토현으로 향하였다. 고택지에서 황토현까지 5.2km. 한 시간 남짓 걸은 듯하다. 언덕 위에 우뚝 솟은 기념비가 저 언덕 높이 보인다. 구본황 선생님에게 현이 무슨 글자일까 라고 물으니 고개 현이라고 말하면서, 동학군이 관군을 만나 첫 승전을 올린 곳이라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당시 이곳은 동학군이 승전은 하였겠지만. 이 언덕은 수많은 민초와 관군의 시신으로 피가 넘쳐흐르던 비운의 땅인 것이다. 그 곳에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라는 기념탑을 건립한 것이다. 기념탑의 부조에 새겨진 뒤쪽 명문에는 정읍동학농민혁명계승사업회의 김상기 박사가 쓴 ‘제폭구민, 보국안민과 척왜를 기치로 ...’라는 말이 새겨져 있었다. 그 말 속에서 동학운동가의 기개와 정신을 잘 느낄 수가 있었다.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니 사당 같은 건물이 있었다. 나는 ‘동학농민혁명기념관’이라고 생각하고 내려갔다. 알고 보니 구 기념관이었다. 기념관이 마치 사당 건물 같은 형태로 지어진 건물이었다. 역사를 살펴보니 1963년에 ‘갑오동학혁명 기념탑’이 건립되었고, 1982년에 ‘황토현 전적지’가 사적 제295 호로 지정되었으며, 바로 이 ‘기념관, 보국문, 제세문, 제민당, 전봉준 장군 동상’은 1983년에서 1987년 사이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차례로 둘러보았다.
그리고 나왔다. 이제 내장사를 버스를 타고 가야할지 택시를 타고 가야할지 논의했다. 그러기 전에 우리는 보리밭을 밟고 건너 큰 길로 걸어 나와야 했다. 그리고 길 건너편의 건물이 무슨 건물인지 알아보려고 가는데, 김대성, 권용태, 김영철 선생님은 이제 충분히 알고 공부했다고 가보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구본황, 김석 선생님과 함께 새 건물에 들어갔다. 이곳이 새 기념관이었다. 입장료는 무료인데, 1층 현관에는 말목장터 감나무, 수많은 백열전구가 촘촘히 들어차 있는 상징조형물이 서 있고, 안으로 들어가니 오른편에는 ‘제국주의와 세계사의 혁명들’이 소개되어 있고, 왼편에는 ‘19세기 조선과 자각하는 농민들’이라고 ‘장태’(닭을 키우는 우리의 일종)가 전시되어 있고, 19세기 조선 장시의 모습이 입체모형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장태’는 일본군의 총탄을 막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었다고 하고, 시장을 옛날에는 장시라고 불렀다고 한다. 전시관 2층을 올라갔는데, ‘동학농민을 향하여’에서는 동경대전, 용담유사, 사발통문이, ‘고부에서 전주성까지’에서는 황토현 전투와 황룡촌 전투가, ‘무르익은 혁명의 희망’에서는 집강소, 대원군 효유문이, ‘일본군에 가로막힌 꿈’에서는 일본군이 사용한 ‘캐트링 기관총’, ‘우금치 전투 부조’가, ‘끝나지 않은 함성’에서는 ‘유회성책’과 ‘물침첩’이, ‘희망’에서는 심문 받는 전봉준 애니메트로틱스와 동학농민혁명의 의의와 전개 과정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아이오포인터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다. 차근차근 보려고 하는데 김대성 선생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택시를 불렀으니 어서 나오라고 채근하는 전화였다. 나는 두 선생님께 전화 내용을 알리고 먼저 팜플릿을 챙겨 가지고 나왔다. 한 곳을 더 간다면 가까운 벽골제를 가보면 좋았을 것이다. 이만하면 정읍에서의 역사 체험은 되었다. 내장사만 가면 다 된 것 같다.
잠시 기다리니 콜택시가 온다. 우리가 6명인 것을 감안해서 회사에서 그랜저를 보냈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뒷좌석에 5명이 타야 한다. 이번에도 김대성 선생님이 자리에서 어중간하게 떠서 가셨다. 이렇게 내장사까지 30- 40분 달렸으니 가는 내내 힘드셨을 것이다.
이제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먼저 숙소를 정해야 했다. 이에 대해서는 김영철 선생님이 미리 봐 둔 듯. 망설이지도 않고 쉐르빌 모텔에 투숙했다. 비성수기이어선지 한산하다. 들어가는 입구 벽면에 텔레비전에도 방영되었다는 호랑이 그림이 걸려 있었다. 어느 쪽으로 바라보아도 그 시선을 따라간다는 신비한 그림이었다. 처음에는 눈만 그런 줄 알았는데 주인이 그런다. 몸짓도 그러하다고. 그러고 보니 몸짓도 시선을 따라가는 듯하다. 분명 이 그림에는 사람을 착시하게 하는 비밀이 숨겨져 있는 듯하다. 모처럼 신기한 그림을 보았다.
방을 안내 받은 뒤 우리는 저녁 식사하러 호텔 밖으로 나와 바로 앞의 식당에 들어갔다. 막걸리를 서비스로 준다는 소개의 말을 듣고 우리는 주저함이 없이 들어갔다. 거기서 홍어탕과 오리매운탕을 시켜 막걸리와 함께 마셨다. 깔끔한 요리와 맛깔스런 반찬으로 해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정읍 시내의 전주집 식당에 대해 흉을 보았다. 식사를 마친 후 내일 아침 식사를 물어보니 8시에 개업한다고 한다. 좀 더 일찍 나가야한다고 하니 7시 30분까지 해장국을 준비해 주겠다고 한다. 우리는 그렇게 하기로 하고 바람도 쐴 겸 간식거리를 사러 나갔다. 마트에서 맥주, 마른안주, 쵸코파이, 물병, 종이컵을 사 가지고 돌아왔다.
원래 내일 계획상에는 6시에 기상해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침 식사가 늦어지면 자연 기상 시간도 늦어지게 마련이다. 이 긴 시간을 어찌할 것인가. 김영철, 김대성, 김석, 권용태 선생님이 남는 시간에 고스톱을 치기 시작했다. 나는 피곤하기도 해서 참여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화투 판세가 김영철 선생님 쪽으로 일방적으로 흘러갔다. 그래서 짧은 시간이나마 나중에 참여했다. 고스톱은 확실히 중독성이 있어서 한 번 붙들면 계속 하고 싶다. 인간의 심리를 뒤흔든다. 내일의 등산을 생각해서 그만하기로 하고 11시 15분에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진한 여운이 남아서인지 자기 전에도 그렇고, 아침에 깨어나서도 한동안 고스톱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다.
우리는 아침 7시에 기상하여 채비하고 식당으로 왔다. 식당은 약속대로 미리 준비해 두고 있었다. 우리는 입맛대로 콩나물 해장국, 시래기 해장국을 먹고 자리에 일어섰다. 아침 일찍 기상을 살펴 본 김영철 선생님은 눈이 내리지 않는다고 했는데, 지금은 가볍게 눈발이 날리고 있다. 권용태, 김석 선생님이 약간 늦은 상태에서 우리는 출발했다. 가는 도중 김대성 사모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서울은 폭설이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걱정이 되어서 하는 전화일 것이다. 나도 안사람에게서 전화를 받았는데, 여기는 눈이 내리지 않는다고 안심을 시켰다. 내장사 입구에서는 아가씨가 이른 아침인데도 입장료를 받고 있다.
주변에 산행하는 사람은 우리 말고 아무도 없어 한적하고, 걷는 길도 평탄해서 가벼운 마음으로 계속 걸어갔다. 가는 도중 김영철 선생님이 산행 지도 안내판을 가리키면서 오늘 행선지를 안내했다. 오늘은 내장사, 까치봉으로 해서 계곡을 지나 백양사로 가고, 백양사역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간다는 것이다. 시간은 5-6시간 걸릴 것이라고 했다. 신선봉이 내장산의 주봉이지만 오늘 코스는 까치봉만 넘는다고 했다. 우리는 대장의 말에 동의하고 계속 나아갔다.
이내 일주문을 지나 내장사에 도착했다. 김석 선생님은 아이젠을 한다고 뒤처지고. 나는 내장사는 전에 와 본 적이 없어 한번 들어가 보고 싶은 생각은 있었으나 오늘은 산행이 목적이니까 지나친다. 나는 여기서부터 산행이 시작되는 것이니 아이젠을 착용하자고 했다. 아이젠을 착용하고 출발하는데, 나는 약간 아쉬워서 절문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때 받은 인상은 내장사가 대규모 사찰은 아니나 갖출 것은 다 갖춘 절이라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 절보다 더 눈에 뜨인 것은 내장사 뒤편의 산세였다. 마치 내장사를 호위하는 장군처럼 떡 버티고 서 있는 모습이었고, 내장사는 그 안에서 고요히 수도에만 전념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다.
이제는 산행에 전념할 시간. 김영철, 구본황 선생님이 계속 앞장서고, 나와 김대성 선생님은 뒤를 좇아가는 모양새다. 그러자 권용태 선생님이 김석 선생님이 걱정된 듯. 김석 선생님과 같이 오겠다고 뒤로 돌아간다. 우리는 산행을 계속 했다. 얼마 안 가니 가게가 하나 문 닫은 채 있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니 나무다리가 세워져 있다. 이제부터 산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한참을 걸으니 이제부터 까치봉으로 오르는 계단이 가파르게 서 있다. 저 멀리 권용태, 김석 선생님이 오시는 것이 보인다. 이제 계단으로 시작해서 계단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길이다. 가끔 기다려주어서 같이 합류하기도 했지만 이제 구본황, 김영철 선생님은 멀찍이 앞장서고 나와 김대성 선생님이 뒤따라가는 형세였다. 차츰 열이 나고 땀이 나며 호흡이 가빠진다. 그러나 그간 산행한 경험으로 한 발짝의 위대함을 알고 있기에 한 발짝씩 내밀면서 산행을 계속했다. 눈은 내리고 안개가 끼어 조망은 그리 볼 만한 것이 안 되었다. 김 선생님이 안개 낀 것이 맞느냐고 나에게 묻는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지만 좀 더 다른 표현은 없을까 생각했다. 나중에 생각해 냈지만 는개가 적당한 표현이 아닌가 싶다. 가끔 김영철, 구본황 선생님이 야호! 하고 신호를 보냈다. 나는 이에 응대하기도 하고 하지 않기도 했다. 이따금 아래에서 권용태, 김석 선생님의 응대를 듣기도 했다.
이제는 까치봉 정상에 다 오른 듯 한데 바람에 쓸려서인지 앞서간 발자국이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편한 대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방향이 지그재그 형태가 되어서 앞으로 갈 길에서 까치봉으로 되돌아오는 모습이 되었다. 아무튼 내장산 제2봉인 까치봉 정상(717m)에 도달했다. 정상에서 맛볼 수 있는 전망은 안개 때문에 볼 수 없다. 바람도 세차다. 이내 김석, 권용태 선생님이 올라오신다. 우리는 기념 단체 사진을 찍었다. 시각은 10시 5분. 2시간 걸려서 올라온 것인데 일기 불순한 것치고는 그리 늦게 올라온 것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앞으로가 문제였다. 내려가는 길이 험하다. 돌 끝이 얼어있는데 길은 가파르다. 조심, 조심하면서 내려가다 보니 속도가 한 결 더뎌진다. 간혹 줄이 매달려 있기도 하였는데 이때는 일행이 다 내려가는 것을 기다려야 한다. 산행에서는 안전이 최우선이니 시간이 걸리더라도 하는 수 없다. 김영철, 구본황 선생님의 산행 속도는 여전한데 뒤를 따라잡으려면 열심히 가는 수밖에 없었다. 길은 예상과 달리 가파르고 심지어 칼바위 능선 같이 위험한 곳도 있었다. 일단 용기를 내서 건너뛰고 내려오는데, 김영철, 구본황 선생님이 갈림길에서 기다리면서 코스 변경을 해야겠다고 한다. 일기불순하고 산행 속도가 예상보다 더디어서 이대로 가다가는 점심때를 훨씬 지나 도착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신선봉으로 해서 대가마을로 하산하는 단축 코스를 택하자고 한다. 모두 대장 의견에 동의해서 신선봉으로 가는 길을 가기로 했다. 신선봉은 까치봉보다 높은 주봉이다. 우리는 더 올라가야 했는데, 이번에는 구본황 선생님이 앞장서서 팀을 이끈다. 나는 부지런히 구본황 선생님 뒤를 따라붙었다. 생각보다는 힘들었지만 신선봉까지 가면 이제는 하산 길이고, 하산 길은 상당히 거리가 짧다. 사실상 다 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드디어 우리는 11시 10분에 내장산 주봉인 신선봉(763m)에 도착했다. 우리는 정상에 도착한 기념으로 덕담을 하면서 서로 껴안았다. 그런데 여태까지 오면서 다른 사람 구경을 못했는데 제복을 입은 일련의 사람들이 식을 거행하고 있다. 신입 사원 오리엔테이션일 것이라고 김대성 선생님이 말했지만, 알고 보니 내장산 국립공원 직원의 시무식을 여기서 가진 것이었다. 우리는 서로 인사와 덕담을 나누었고, 커피와 생강차를 얻어 마셨다. 그리고 우리는 신선봉 기념 바위를 배경으로 단체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한 동안 거기서 머물렀다.
이제는 하산 길. 대가마을로 내려간다. 처음은 가팔랐지만 이내 눈길이다. 이번에도 구본황 선생님이 앞장서서 이끈다. 눈길이래도 나뭇잎 위에 쌓인 눈길이어서 넘어져도 안전한 흙길이다. 좌회전, 우회전을 수도 없이 하면서 하산했다. 내려오는 시간은 40분 남짓. 벌써 마을이 바로 눈앞에 내려다보인다. 마을에 들어가서 교통편을 알아보니, 버스를 타려면 4km 걸어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12시. 시장할 때도 되었다. 나는 간식으로 가져온 쵸코파이를 먹었다. 도로 위에서 바라본 신선봉의 모습이 우뚝하다. 언제 저 봉우리를 올라갔다 내려온 것인지 신기하다. 그렇지만 우리가 짧은 코스로 하산해서 그런지 도로 올라가라고 해도 올라갈 수 있을 만큼 기운은 남아 있었다.
쉬지 않고 걸었는데도 한 시간이 걸려 1시에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다. 예상대로 거리는 4km가 넘는 듯하다. 어제도 5km, 오늘도 5km 제법 걸은 셈이다. 이번에 도보 여행은 제대로 한 듯하다. 버스는 1시 30분에 온다고 한다. 나는 기다리면서 아이젠을 풀고 시장한 김에 쵸코파이와 빵을 먹었다. 그런데 김영철 선생님이 여기 식당에서 식사하고 3시 버스를 타고 가자고 한다. 그러면 2시간의 여유가 있다. 느긋하게 식사도 하면서 막걸리를 마시며 버스를 기다리면 된다. 우리는 정류장 인근의 식당에 들어섰다. 주문은 김대성 선생님이 이미 하신 듯. 꿩 탕과 돼지갈비다. 길을 올 때 추적추적 내리는 눈발에 옷은 사뭇 젖어 있다. 말리려고 방안 온도를 높이라고 했다. 시골 밥상인데도 반상 위에 올라오는 반찬들이 맛깔스럽다. 권 선생님의 말마따나 전라도 밥상인 듯하다. 권용태 선생님은 소주, 다른 분은 막걸리를 하면서 대화를 즐겼다. 그리고 시간이 되어서 나오려는데 버스 탑승 시간이 3시가 아니라 3시 반이라고 한다. 우리는 짬을 내서 고스톱을 잠시 하고 나왔다. 서울에는 기록적인 폭설이 내려서 출근길 교통의 대혼잡이 빚어졌다는 뉴스도 전해 들었다.
이제 식당에서 나와 버스를 기다리는데 버스 기사가 잠시 우리를 탑승시킬 것인가 고민한다. 웬일인가 했더니 이 버스는 임시 차이고 밤이 되면 길이 얼어붙어서 회차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미리 회차하라는 회사의 권고를 기사가 들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기사가 우리를 태운 것은 객지 손님이고 단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는 기사가 정읍에 가서 바로 회차하면 괜찮을 것이라고 조언하고 내릴 즈음 차비에 수고비조로 돈을 보태어 드렸다. 기사는 버스를 몰면서 팁을 받은 것은 처음이라면서도 자신의 선택에 흐뭇한 모습이었다.
버스 터미널에서 고속버스를 탈 것인가. 기차를 탈 것인가 김영철 선생님이 묻는데, 김대성, 권용태, 김석 선생님이 기차를 타야한다고 완강하게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기차역으로 향했다. 서울에서의 폭설로 서울로 상행하는 차는 월요일인데도 새마을기차 특실뿐이다. 우리는 비용 불구하고 그 기차를 타기로 하고 역 의자에 앉아 1시간 기다렸다. 시장하지 않은데 저녁 먹기도 그렇고, 서울에서 식사하면 늦을 것 같아 호빵을 사서 나누어 드렸다. 이래저래 추가된 비용이 2만원이 되어서 회원들은 김석 선생님께 2만원을 드렸다. 기차에 탑승하고 보니 맨 끝자리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버스를 타지 않고 기차를 이용해서 불편한 자리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9시 서울에 도착하면서 거리 모습을 보니 버스는 간간히 다니는데 자동차의 모습은 거의 볼 수 없다. 이따금 달리는 승용차의 위 천장에 쌓인 눈이 대략 10cm는 넘어 보인다. 하루 사이에 일어난 돌변이다. 우리는 그 역사적 현장에 잠깐 빗겨 서 있었던 것이다.
황토현 현장에서 구본황 선생님과 나눈 나의 말이 문득 생각났다. 내가 만일 그 시대 그 자리에 있었더라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는 피 흘리는 시신이 되어 그 산하를 물들였을 것이라고. 길거리에 쌓여 있는 눈을 바라보면서 나는 엉뚱하게도 시대와 영웅의 상관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았다.(2010. 1.5)
첫댓글 우리산악회의 정읍지역 역사문화 답사, 내장산 등산 여행 과정을 상세하게 다시 보여주여서 감사합니다.^^* 등산 여행이 이루어지게 된 과정을 자연스럽게 소개하고 있고, 역사문화 답사도 각종 자료를 풍부하게 첨부하여 알차게 묘사하였군요. 수고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글 쓰는 사람마다 다 생각이 다르고 시각도 다르기에 동일한 여행을 하면서도 다르게 글을 쓸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각자 글을 써서 올리는 것도 공감대 형성에 좋으리라 생각하며 이를 제안합니다.
글 쓰느라 애쓰셧습니다. 내장산 까치봉 신선봉 오르던 감회가 새롭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눈과 눈비와 비가 우리를 반겨주어 인상적이었습니다. 동학혁명군의 사기가 하늘을 감동하여 내장산을 비롯하여 서울에까지 눈이 오게 ㅏㄴ 것이 아닌가 합니다.
저도 산행 후 바로 다른 여행을 떠나 오늘에야 감회가 새로운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좋은 추억들이 많았고 그 순간들을 정감어린 글로 보내주셔서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