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볼일 없는 프로야구 중퇴생 노마크, 음악이 없으면 죽고 못 산다는 딴따라, 유식한 놈 싫어하는 뻬인트, ‘대한국인’이라는 몽둥이 하나면 겁날 게 없는 무데뽀, 이 네명의 되바라지고 한심한 청춘들이 어느날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다가 무작정 주유소를 습격한다. 이 유쾌하고 무의미한 청춘활극 <주유소 습격사건>을 보면서 나는 뻑 갔다. 그것은 진정 모든 면에서 ‘젊고 참신한’ 새로운 세대의 영화였다. 엄청난 숫자의 등장인물들, 만화적 상상력, MTV적 미장센, 발랄한 유희정신…. <주유소 습격사건>을 구성하고 있는 그 모든 요소들 앞에서 기존의 낡고 오래된 드라마투르기는 제몫의 위상을 찾을 수 없다. 플래시백의 형식으로 보여준 네 인물의 과거사가 오히려 사족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주유소 습격사건>은 이 전혀 새로운 영화에 어떤 잣대를 들이밀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던 평론가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젊은 세대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며 그해 최고의 흥행기록을 세웠다.
박정우의 영화이력은 신세대 충무로키드의 한 전형이다.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재수를 거쳐 외국어대 신문방송학과에 입학했으나 처음부터 학교수업에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대신 외대 영화동아리 ‘울림’ 활동에 열을 올렸던 그는 1학년 때 일찌감치 정지영의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연출부 막내로 들어감으로써 충무로생활을 시작한다. 이후 <너에게 나를 보낸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꼬리치는 남자> <체인지> 등에서 줄곧 연출부로 박박 기어 조감독까지 올라가는 전형적인 충무로키드로 살아왔으니 학창생활이 제대로 이뤄졌을 리 없다. 원칙대로 하자면 “제적이 되어야 마땅하지만” 그의 읍소작전에 교수들도 백기를 들고 말았는지 결국 9년 만에 대학졸업장을 타게 된다. 박정우는 연출부로 활동할 때부터 줄곧 시나리오에 매달려왔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감독으로 데뷔하는 가장 빠른 길이 시나리오작가가 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데뷔작인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을 보면 그의 이름이 두번 나온다, 하나는 각색자로 다른 하나는 연출부로.
황당무계한 만화적 상상력으로 빚어낸 코미디 <마지막 방위>와 신세대답지 않게 고전적인 로맨틱멜로 <키스할까요>는 흥행에서 부진한 성적를 거뒀다. 그러나 이 두편의 실패를 보상하고도 남을 만한 흥행성적을 올린 것이 <주유소 습격사건>이다. 이후 박정우는 충무로에서 가장 바쁘고 잘 나가는 작가가 돼버렸다. <산책>은 비록 관객의 외면을 받았지만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초고상태로만 놓고 보면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다. 전국 곳곳에 산재해 있는 아름다운 산책로들을 배경으로 저마다 상처받은 사람들이 서로를 치유하고 어울리는 과정을 그린 ‘어른스러운’ 영화다. 올해 개봉된 <선물>과 <신라의 달밤>은 모두 <주유소 습격사건>의 제작사였던 ‘좋은 영화’의 작품인데, 박정우가 제작사와 맺은 계약이 대단히 파격적이다. 제작사가 얻게 되는 전체 흥행수익의 일정 지분을 작가에게 귀속시킨 것이다. 다소 지루하다는 평을 받은 <선물>도 손익분기점을 훌쩍 넘어 그에게 ‘제법 큰 돈’을 안겼으니, 6월에 개봉한 이후 아직까지도 극장에 걸린 채 전국 500만명을 바라보고 있는 <신라의 달밤>은 도대체 얼마를 벌어줄까?
그렇다. 세상은 변해간다. 흥행대박을 가져온 좋은 시나리오 한편이면 ‘아파트 한채 값’ 정도는 너끈히 벌어들일 수 있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그런 시대의 전위병 역할을 하고 있는 박정우의 존재는 모든 차세대 시나리오작가 지망생들에게 하나의 전범이요 희망이다. 차기작은 <박봉곤 가출사건>의 시나리오작가로 유명한 장항준의 감독데뷔작 <라이타를 켜라>. 올 가을에 크랭크인하는데 “여지껏 쓴 것들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고 하니 기대가 크다. 박정우는 유쾌하고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한다. “내년쯤 직접 연출할 작품을 탈고중입니다. 하지만 감독 데뷔 이후에도 시나리오작가로서의 작업은 계속할 생각입니다.” 충무로의 앞날을 짊어질 신세대들이 대거 몰려오고 있다. 그들이 획책하는 ‘충무로 습격사건’이 여지껏의 모든 패러다임과 흥행기록을 멋지고 통쾌하게 뒤엎어버리기를!
심산| 시나리오 작가 besmart@netsg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