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게르 (Louis Jacques Mande Daguerre,1787~1851)
프랑스의 화가·사진 발명가. 디오라마(반투명한 천에 풍경화를 그리고, 이에 반사 광선이나 투명 광선을 써서 변화시키 면서 보여주는 것)의 원화 화가로서, 카메라 암상자를쓰던 때에, 그 화상을 기계적으로 정착 시키려는 의도에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1829년에같은 의도로 연구에 착수한 프랑스의 니에프스와 공동으로 연구하기로 10년의 계약 을 맺었고, 니에프스가 발명한 헬리오그래피를 다시 발전시켜, 1837년에 다게레오 타입(근판 사진)이라는 독자적인 사진 현상 방법을 발명하였다. 이것은 소금의 포화 용액에 의한현상법이며, 니에프스가 죽은 뒤에 발명된것이었다. 1 차대전을 치른 서구 유럽 사회는 가공스러운 살육과 파괴를 자행한 전쟁의 근본토대를 과 학기술의 남용과 자본주의 사회체제로 보았다. 이제 유럽인들은 그 전까지 찬양해 마지않았던 과학과 경제의 발전이 결국 자신들의 세계를 파괴하는 데 쓰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존 문화, 문명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반성을 가하기 시작했다. 미술계에서도 그 이전의 전위 미술 -표현주의까지도-전쟁을 일으키는데 일조를 한 운동이 라고 생각하고 이 모든 과거의 미술들은 전복되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 했다. 이 시기에 나타난
다다이즘
'다다이즘'은 양식이라기 보다도 일종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미술 한 부분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문학과 음악 등의 다른 예술 분야 에서도 동시에 시작되며, 모든 예술장르를 통해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표 현하는데 수단으로 삼았 다. 이로서 다다는 총체적 예술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다다이스트들의 목적은 단 하나, 기존 문화에 대한 철저한 부정, 더 나아가 파괴였는데, 합 리주의적이고 이성적인 아카데미 미술에 대한 거부로 이들은 '우연의 원리'를 선택했다. 소음주의 음악, 아프리카 부족의 토속어로 지어진 시, 언어가 아닌 음성으로만 만들어진 음 성시,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읊어 대는 동시시 등이 만들어지게 되고, 아무런 뜻도 알 수 없 는 연극과 퍼포먼스가 상연되기도 했다. 다다운동은 스위스, 미국, 독일, 프랑스 등지에서 일어났고 행위들은 공연이나 행사 자체가 미술이 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방법상의 다양성을 특징으로 그 영역을 빠르게 확산시켰다. 다다 미술가들의 공통점은 모더니즘의 전통을 이어받아 새롭고도 도전적인 자세를 취하며, 미술이란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기존관념에 도전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졌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다다이즘이 공통적으로 추구했던 '우연의 원리'는 예술의 합리성과 논리성은 삶 자체가 가 지고 있는 우연성을 표현해 내지 못하며, 따라서 예술과 삶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서는 예술 이 '우연의 원리'에 따라야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우연의 원리'에 의한 행위 예술은 기존 체제를 벗어나는 수단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술이란 품위가 있어야 한다거나 실제적인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규정을 벗어난 것이기도 했다. 다다운동의 시초인 쮜리히 다다는 유럽전역에서 부터 전쟁을 피해 중립국 스위스로 온 작가 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시인과 음악가, 화가들이 모여 시 낭송 모임, 연주회, 전람회, 평론 발표 등을 통해 서구 문화 전통을 신랄히 비판했다. 전쟁으로 인해 상처를 입은 이들은 매우 염세적이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쮜리히 다다의 세 가지 특징적 요소는 소음과 동시성, 그리고 우연성이었다. 음악에서의 소음, 문학에서의 동시성, 그리고 미술에서의 우연성은 각각 그 분야의 성질에 맞게 각색된 새로운 시도였다. 전쟁이 종반에 들어서면서 쮜리히 다다는 종말을 고하게 되고 마르셀 뒤샹과 피카비아가 뉴 욕으로 이주하면서 뉴욕 다다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다. 뉴욕 다다는 쮜리히 다다와 거의 같은 시기에 출연한 운동이지만 뒤샹의 활약으로 독특한 특성을 갖게 된다. 'ready made'나 반 미학사상이 그의 중요 특성이 되고 이런 활동은 뉴욕다다에 이어 나타 난 미국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독일 다다는 베를린을 중심으로 정치적 견해를 표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좌익의 성향을 노 골적으로 표방하는 정치선진의 활동과 결부하게 된다. 미술의 정치도구화가 여기서 발견된 다. 독일 다다의 기법적 특징으로 콜라주 사진기법이 있는데, 이것은 명확한 사실성을 가진 요 소들로 인하여 메시지를 선명하게 전달하려는 데 의도가 있었다. 이것은 입체파의 파피에 꼴레에서 영향받은 것으로 photo -montage라고 불리우게 된다. 다다운동의 마지막 정착지는 파리였는데, 파리 다다의 특징은 문학적인 데가 있다. 잡지를 만드는 것에서부터 시작된 이들의 운동은 선언문, 정기 간행물, 사건등으로 수입된 다다양식이 아닌 프랑스 문학을 토대로 일구어 낸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문학성이 강했던 이들의 운동은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1924년경 '초현실주의'라는 이름 아래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다다이즘(Dadaism) 미래주의에서 나타났던 과학과 과학기술에 대한 긍정적 태도와는 정반대의 부정적 입장을 위했으며, 이성과 합리에 대한 외의, 부정, 파괴, 즉 '반예술'의 태도로 우연에 의거한 제작 태도를 견지하였다. 특유의 유머가 있고 오브제를 사용하여 기성관념을 부정함으로써 현대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다다는 어린아이의 장난감 목마를 뜻하는 프랑스어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뜻으로 붙여진 것이다. 반전통. 반예술. 반체제적이었던 이 운동은 우스꽝스러움을 강조함으로써 대중의 생각에 충 격을 주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 제 1차 세계 대전 중, 스위스에 망명 온 작가들이 일으킨 반 문명, 반 합리주의 예술 운동 으로, 전쟁의 살육과 파괴에 대한 증오와 냉소를 기본 정신으로 하여, 모든 문화적 가치, 전 통적 가치, 이성에 대한 신뢰를 부정하며 예술 형식의 파괴와 부정을 주장했다. 1차대전을 치른 서구 유럽 사회는 가공스러운 살육과 파괴를 자행한 전쟁의 근본토대를 과학기술의 남 용과 자본주의 사회체제로 보았다. 이제 유럽인들은 그 전까지 찬양해 마지않았던 과학과 경제의 발전이 결국 자신들의 세계를 파괴하는 데 쓰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기존 문화, 문명 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반성을 가하기 시작했다. 미술계에서도 그 이전의 전위 미술- 표현 주의까지도-전쟁을 일으키는데 일조를한 운동이라고 생각하고 이 모든 과거의 미술들은 전 복되어야 할 대상으로 간주 했다. 다다운동은 스위스, 미국, 독일, 프랑스 등지에서 일어났고 행위들은 공연이나 행사 자체가 미술이 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방법상의 다양성을 특징으로 그 영역을 빠르게 확산시켰다. 다다 미술가들의 공통점은 모더니즘의 전통을 이어받아 새롭고도 도전적인자세를 취하며, 미술이란 어떤 것이어야 한다는 기존관념에 도전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졌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이 시기에 나타난 '다다이즘'은 양식이라기 보다도 일종의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미술 한 부분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문학과 음악 등의 다른 예술 분야 에서도 동시에 시작되며, 모든 예술장르를 통해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생각을 표현하는데 수단으로 삼았다. 이로서 다다는 총체적 예술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다다이스트들의 목적은 단 하나, 기존 문화에 대한 철저한 부정, 더 나아가 파괴였는데, 합 리주의적이고 이성적인 아카데미 미술에 대한 거부로 이들은 '우연의 원리'를 선택했다. 소 음주의 음악, 아프리카 부족의 토속어로 지어진 시, 언어가 아닌 음성으로만 만들어진 음성 시,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읊어 대는 동시시 등이 만들어지게 되고,아무런 뜻도 알 수 없는 연극과 퍼포먼스가 상연되기도 했다. 뒤샹, 아르프, 피카비아, 슈비터스 등이 조형예술 분야의 주요 작가이며, 그들의 작품은 환 상적, 상징적, 풍자적이어서 무정형 또는 기계 형태적인 구성을 취하였다. 차바퀴, 돌, 구두, 차표 등을 본래의 일상적인 용도에서 떼내어 보는 사람으로하여금 잠재 한 환상이나 욕망를 불러 일으키게 하는 상징적 기능를 마르셀 뒤샹의 작품 "자전거 바퀴" 에서 볼 수 있다. 이렇듯 오브제등의 자유로운 표현 형식을 창안하여 종종 무의미속의 해방 감을 맛보았던 것이다. 다다이즘이 공통적으로 추구했던 '우연의 원리'는 예술의 합리성과 논리성은 삶 자체가 가 지고 있는 우연성을 표현해 내지 못하며, 따라서 예술과 삶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서는 예술 이 '우연의원리'에 따라야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우연의 원리'에 의한 행위 예 술은 기존 체제를 벗어나는 수단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예술이란 품위가 있어야 한다거나 실제적인 의미가 있어야 한다는 규정을 벗어난 것이기도 했다. 다다운동의 시초인 쮜리히 다다는 유럽전역에서 부터 전쟁을 피해 중립국 스위스로 온 작 가들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시인과 음악가, 화가들이 모여 시 낭송 모임, 연주회, 전람회, 평론발표 등을 통해 서구 문화 전통을 신랄히 비판했다. 전쟁으로 인해 상처를 입은 이들은 매우 염세적이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쮜리히 다다의 세 가지 특징적 요소는 소음과 동시성, 그리고 우연성이었다. 음악에서의 소 음, 문학에서의 동시성, 그리고 미술에서의 우연성은 각각 그분야의 성질에 맞게 각색된 새 로운 시도였다. 전쟁이 종반에 들어서면서 쮜리히 다다는 종말을 고하게 되고 마르셀 뒤샹과 피카비아가 뉴 욕으로 이주하면서 뉴욕 다다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다. 뉴욕 다다는 쮜리히 다다와 거의 같은 시기에 출연한 운동이지만 뒤샹의 활약으로 독특한 특성을 갖게 된다. 'ready made'나 반 미학사상이 그의 중요 특성이 되고 이런 활동은 뉴욕다다에 이어 나타 난 미국 현대미술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독일 다다는 베를린을 중심으로 정치적 견해를 표명하기 위한 수단으로 좌익의성향을 노골 적으로 표방하는 정치선진의 활동과 결부하게 된다. 미술의정치도구화가 여기서 발견된다. 독일 다다의 기법적특징으로 콜라주 사진기법이 있는데, 이것은 명확한사실성을 가진 요소 들로 인하여 메시지를 선명하게 전달하려는 데 의도가있었다. 이것은 입체파의 파피에 꼴레 에서 영향받은 것으로 photo -montage라고 불리우게 된다. 다다운동의 마지막 정착지는 파리였는데, 파리 다다의 특징은 문학적인 데가 있다. 잡지를 만드는 것에서부터 시작된 이들의 운동은 선언문, 정기 간행물,사건등으로 수입된 다다양식 이 아닌 프랑스 문학을 토대로 일구어 낸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문학성이 강했던 이들의 운동은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1924년경 '초현실주의'라는 이름 아래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된다. 다다이즘(Dadaism) 1915∼22년경 스위스, 독일, 프랑스 등의 유럽과 미국에서 일어났던 반문명, 반합리적인 예 술운동. 제1차 세계대전을 낳게 했던 전통적인 문명을 부정하고 기성의 모든 사회적·도덕 적 속박에서 정신을 해방, 개인의 진정한 근원적 욕구에 충실하고자 했던 것이 이 운동의 근본 정신이었다. 다다라는 명칭은 1916년2월 스위스 취리히에서 결성된 국제적인 전위예술가 그룹에 그들의 회합 장소인 카페 볼테르에 증축한 화랑을 위해, 시인인 트리스탄 차라가 선택한 것이었다. 라루스 사전에서 우연히 끄집여낸 단어인 `다다'라는 말은 아이들의 장난감 목마를 뜻하는 프랑스 어로 임의적인 선택일 뿐 특별한 의미는 없다. 루마니아의 시인 차라, 독일의 작가 후고 발, 리하르트 휠센베크, 스위스의 화가 장 아르프 등이 선도자가 되었는데, 그 파괴적 인 주장은 기관지인 <다다>제3호에 시린 `다다 선언'에서 잘 엿볼 수 있ㄷ. 이 운동은 제1 차 세계대전 중 또는 전후에 세계로 급속히 확대되어 갔다. 전쟁의 참화와 파괴에 의한 가 치관의전도, 전통적인 유럽적 가치에 대한 일체의 불신이 그 배후의 정신 상황이었다는 것 은 말할 것도 없다. 독일에서는 바먾ㄴ운동과 코뮤니즘에 결합된 베를린 다다가 1919년에 결성되었다. 또 1919년 쾰른에서는 아르프, 에른스트, 요하네스 바르겔트에 의해 전람회가 개최되었으나 관에의해 폐쇄당했다. 하노버에서는 1919년에 쿠르트 슈비터스가 메르츠빌트 를 창안해 냈다. 피카비아는 또 바르셀로나에서 잡지<391>을 창안하여 취리하 다다와 이어 지고 있다. 파리에서는 같은해 앙드레 브르통, 루이 아라공 등에 의한 시 잡지인<리테라튀 르>가 창간되어 취리히 그룹의 거의 전원이 여기에 참가했다. 그리하여 1920년대 초기에는 다다 운동이 거의 전 유럽과 미국에까지 미쳐 1922년 파리에서 대규모의국제전이 개최되었 다. 그리고 24년 초현실주의가 발족되면서 발전적으로 해체되었다. 한편 미국에서는 유럽의다다 운동에는 직접 가담하지 않았으나, 1912년경부터 이미 다다적 인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던 프랑스의 화가 마르셀 뒤샹이 만 레이와 함꼐 뉴욕의 `219'화랑 에서 충격적인 전시회를 개최한 것을 계기로 뉴욕 다다라는 명칭이 붙게 되었다. 이들 작품 의 공통적인 경향으로서는 소위 레디메이드의 오브제 또는 움직이는 오브제, 콜라주 또는 앗상블라주로 통하는 메르츠 빌트 등이 시도되었던 점이다. 기계적, 성적인 이미지의 사용도 특색이다. 이들 수법은 다다의 강렬한 가치 부정적 관념과 함꼐 추상미술, 초현실주의 또는 제2차 세계대전 후 60년대의 예술 둥에도 강한 영향을 주었다.
다리파
독일 표현주의의 선구가 된 그룹을 가리킨다. 그들은 당시의 혁명적인 정신과 회화를 연걸 하는 `다리'가 되려 한 것이었다. 이 그룹의 창립자는 드레스덴의 고등 공업학교 학생이던 키르히너, 헤켈, 슈미트, 로틀루프 등 세사람. 1905년에 드레스덴에서 제1,제2회전을 열고, 리 베르만을 중심으로 한 분리파계의 인상주의와 대립하였다. 1906년에는 놀데, 페흐스타인, 1908년에는 반 동겐도 동인으로 참가했다. 그들의 데포르마숑과 원색은, 프랑스의 애수파에 대응되겠지만, 야수파의 그것이 주로 조형상의 과제였던 데 대해 다리파의 경우는 북방적 고뇌의 드라마를 전개시키는 수단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반 고호, 고갱, 뭉크에 심취 하고 흑인 조각에 이끌리어, 그 열광과 불안을 회화, 목조, 목판, 석판, 에칭, 포스터 등 갖가 지의 조형 수단을 구사하여 형상화 하였다. 1913년에 동인간의 불화가 원인이 되어 그룹은 해산되었고, 그후 멤버들은 각기 독자적인 길을 걷게 되었다.
다비드 Jacques Louis David (1748-1825/프랑스)
프랑스 고전주의 화가. 1748년 파리에서 출생. 조셉 마리 마리 비앵의 제자. 1755년 로마에서 유학하여 라파엘로 및 고대 미술을 연구한 뒤 1780년 귀국하였다. 또 유학 중에는 나폴리에 가서 폼베이의 유품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렇게 하여 그는 고대의 강 건하고도 장중한 작품 제작에 심취하여 마침내 1785년에는 대작 '호라티우스의 형제의 맹세 '를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고전주의 이상을 형식적 내용적으로 순수하게 실현한 최초의 회 화였다. 그는 또 자코방당 당원으로서 프랑스 혁명운동에도 적극 참가하였으며 '마라의 죽 음', '주 드 폼의 맹세' 등 혁명 사건에서 취재한 작품도 그렸다. 혁명 종료 후에는 나폴레 옹의 궁정 화가가 되어 '산 베르나산의 나폴레옹',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등 여웅을 찬탄 한 일련의 작품도 제작하였다. 나폴레옹이 실각하고 부르봉 왕조가 복고한 후부터는 프랑스 를 떠나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는 프랑스 고전주의의 창시자 및 지도자로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역사화는 훌륭 한 구도와 견고한 수법을 보여 준 반면 인물의 표정이 냉정하여 정감이 결여되어 있다. 주 요작으로는 상기한 작품 외에 '소크라테스의 죽음', '세리지 아가씨의 초상', '뤽상브르 공원 의 풍경' 등이다. 1825년 사망하였다. 다비드 Jacques Louis David (1748-1825/프랑스) 프랑스 고전주의 화가. 1748년 파리에서 출생. 조셉 마리 마리 비앵의 제자. 1755년 로마에서 유학하여 라파엘로 및 고대 미술을 연구한 뒤 1780년 귀국하였다. 또 유학 중에는 나폴리에 가서 폼베이의 유품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이렇게 하여 그는 고대의 강 건하고도 장중한 작품 제작에 심취하여 마침내 1785년에는 대작 '호라티우스의 형제의 맹세 '를 발표하였다. 이 작품은 고전주의 이상을 형식적 내용적으로 순수하게 실현한 최초의 회 화였다. 그는 또 자코방당 당원으로서 프랑스 혁명운동에도 적극 참가하였으며 '마라의 죽 음', '주 드 폼의 맹세' 등 혁명 사건에서 취재한 작품도 그렸다. 혁명 종료 후에는 나폴레 옹의 궁정 화가가 되어 '산 베르나산의 나폴레옹',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등 여웅을 찬탄 한 일련의 작품도 제작하였다. 나폴레옹이 실각하고 부르봉 왕조가 복고한 후부터는 프랑스 를 떠나 벨기에의 브뤼셀에서 여생을 보냈다. 그는 프랑스 고전주의의 창시자 및 지도자로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그의 역사화는 훌륭 한 구도와 견고한 수법을 보여 준 반면 인물의 표정이 냉정하여 정감이 결여되어 있다. 주 요작으로는 상기한 작품 외에 '소크라테스의 죽음', '세리지 아가씨의 초상', '뤽상브르 공원 의 풍경' 등이다. 1825년 사망하였다. 다비드 (Jacques Louis David,1748~1825) 프랑스의 화가. 파리에서 태어났다. 19세기초 프랑스 고전주의 미술의 대표자이다. 로마에 머무르면서 고전 미술을 연구하였다.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는 그의 고전 연구의 성과를 나타내는 명작으로, 당시 점차높아 지기 시작한 애국 사상의 뛰어난 표현으로 유명해졌다. 예술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미술계 최대의 권력자가 되어 화단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마라의죽음〉 〈사비니의 여인들〉 〈나폴레옹의대관〉 〈레카미에 부인상〉 등이 있다.
다원주의 Gallery
20세기 말의 미술.그리고 사회와 문화 전반에서 목격되는 일반적인 특성을 설명하는 데 있 어서 '다원주의(Pluralism)'라는 용어가 등장하게 되는데 이 다원주의의 궁극적인 가치개념을 부 정하며 수직적 위계질서보다는 수평적인 다양성을 중시하는 경향이 그것이다. 다원화 경향이 그 본질상 포함하고 있는 속성 중의 하나로 특히 주목되는 점은 전통복귀의 경향이다. 1980년대의 미술을 눈여겨보면 그 양식이나 주제는 거의 모든 것이 이전의 미술사에서 발견 되는 것들로서 별로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런데 이같이 별로 새로울 것도 없고 일관성도 없는 현상이 새로운 경향으로서 받아들여지 고 있다는 사실이 새로운 것이다. 그리하여 1980년대의 미술에서는 기존의 형상이나 방법을 차용하거나 전통적인 방법과 주제 로 돌아가는 것이 새로운 경향으로 간주된다는 역설적 현상을 발견하게 된다. 다원주의로의 변화는 1970년대 중반경부터 각 지역에서 각각의 명칭을 가지고 동시다발적으 로 등장한 다양한 미술경향들이 증언하고 있다. 최근의 미술에서 현저하게 드러나는 특징 중의 하나는 영역간의 수렴현상이다. 1960~70년대가 조각 또는 입체작품 위주로 미슬 운돌이 전개된 시기였다면 이제는 회화가 다시 관심의 대상으로서 부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회화가 미술의 주요영역으로서 강조된다기보다 회화와 조각이 통합되는,또는 그 구 분이 무효화되는 현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즉 회화에서는 오브제가 첨가되거나 화면 자체에 입체적 성격이 부여되고 조각에서는 표면 효과의 강조와 색채의 사용 등으로 2차원적 요소가 강조되고 있다. 또한 평면작품과 입체작업이 일관된 작품으로서 같은 공간에 설치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독일의 신표현주의(Neo-Expressionism:안셀름 키퍼,게오르크 바셀리츠, 외르크 임멘도르프, A.R.펭크,마르쿠스 뤼페르츠 등)와 이탈리아의 트랜스 아방가르드(Trans Avant-Ga-rde;산 드로 키아. 엔조 쿠키, 프란치스코 클레멘테 등)와 미국의 뉴 페인팅(New Painting;줄리앙 슈나벨, 데이비드 살리, 에릭 피슬, 키스 헤어링, 장 미셸 바스키아등),프랑스의 자유구상 (Figuration Libre:로메르 콩바스, 제라르 가루스트, 장 샤를르 블레 등)등이 그 예이다. 최근의 미술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현상으로서 흔히 거론되는 측면이 형상성의 부활이라는 측면이다. 그러나 이같은 사실은 구상회화가 우선시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기보다.구상과 추상이 동등 한 수준에서 인정이 되거나 이러한 구분을 초월하여 이들이 자유롭게 수용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구상과 추상이 한 화면에 공존하는 데이비드 살리와 같은 작가의 작품이 그 대표적인 예인 증후이다. 또한 최근에는 지극히 차가운 느낌의 신기하(neo-geo)경향이 등장하고 있는 것을 상기할 필 요가 있다. 형상성의 부활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명암법이나 원근법에 의해 3차원의 효과를 강조하는 고 전적인 기법이 부활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미술에 있어서 포스트 모던적 경향을 주도한 최근의 건축에서도 고전 양식을 포함한 잡다한 양식들이 하나의 건축물 속에 결합되고 있다. 산드로 키아(Sandro Chia)의 작품은 마치 피카소의 신고전주의 시기의 작품을 연상케 하는 육중한 인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의 화면은 또한 바로크적인 현란한 붓질과 야수파적인 색체들로 이루어져 있다. 부유하는 듯한 인물과 역동적인 분위기는 20세기 도기 이탈리아 미래주의의 전통이기도 하 다. 1980년대의 구상회화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발견되는 속성은 전통적인 사실묘사 회화와는 달 리 형태에 대한 시각적 경험에 근거한 직접적인 묘사가 아니라는 점에 있다. 이들 그림은 논리나 시각을 통해서가 아니라 감성 또는 직관에 의해서 이해되는 은유적 메 시지들로 이루어져 있다.이러한 의미에서 이들 그림은 상징주의 전총에 속한다고 할 수 있 다. 엔조 쿠키의 그림 속에는 그의 고향 풍경을 배경으로 종교적 상징들이나 개인의 경험과 관 련된 형상들 즉 산, 바다, 절벽, 묘지, 십자가, 해골, 중세의 건축물들이 등장하여 장엄하면서 어두운 계시록적인 분위기를 창출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클레멘테는 특히 자신의 이미지를 식물과 동물 혹은 여성의 형상과 결합된 것으 로 보여줌으로써 인간의 상황을 심리학적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들의 표현방법은 인간 공통의 의사소통의 한계를 넘어서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내적인 언 어이므로 우리는 은유적인 차원에서 이들 형샹에 접근하게 된다. 1980년대의 미술을 자서전적(autobiographic)미술이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감정이나 직관이 본질이 되는 미술의 등장을 증언하는 대표적인 증후로서 표현적인 붓질이 나 강렬한 원색의 부활을 들 수 있다. 특히 '격렬한 회화(Heftige Malerei)라고 명명되기도 하는 신표현주의 작품들에 나타나는 과 격한 붓자국은 독일의 사회적 상황에 대한, 또는 이제까지의 회화전통에 대한 젊은 예술가 들의 반항의 몸짓으로 볼 수 있다. 동시에 이들의 거친 붓질과 원색의 색조는 북방민족의 전통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게오르크 바셀리츠의 작품[드게스덴의 최후의 만찬]은 자신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계승하고 있는 것임을 알수 있다. 외르크 임멘도르프는 더욱 직접적인 방법으로 독일의 현대사를 집약하고 있다. 그의 [카페 도이칠란트]는 2차대전과 동서분단이라는 독일 사회의 역사적 상황을 카페의 정 경을 통하여 표현하고 있다. 1980년대의 미술도 매너리즘 미술과 같이 형식적인 면에서의 후퇴나 창조성의 결핍, 또는 통일성과 일관성의 결여라는 면에서 비판을 받을 여지가 있다. 그러나 동시대의 미술에서 목격되는 부조화와 불안정, 그리고 전통복식의 경향은 현실세계 에 대한 위기의식과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위기의식과 불확실한 미랭에 대한 좌절감의 상징 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같은 현상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이 역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다원화 현상 또는 해체주의적인 증후는 기존의 미술개념을 초월한 새로은 미술의 가능성을 제시하여 미술의 영역을 확장하며, 우리의 시대적 현실을 드러냄으로써 삶의 총체성에 접근 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이나미즘(dynamism)
역동주의라고 번역된다. 이탈이아의 미래주의 운동에서 주장된 것으로, 기계와 속도의 미에 서 파생된 조형 감각을 말한다. 근대 사회가 이룩한 기계 문명의 진보를 찬양하고 그러한 기계문명의 승리를 조형 표현상에서 확인하려는 사상에서 나온 미래파 운동의 중심 화제이 기도 하다. 역동감을 강조하려는 작품은, 프랑스의 입체파 운동과 공통되는 점도 있지만, 전 혀 별개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작가도 있었다. 그러나, 양자를 결합시키려고 노력한 작가도 있었다
다이아퍼(diapher)
서양 건축에 사용되는 장식의 일종. 반복되는 작은 단뒤들을 기초로 한 올-오버 문양. 이는 로마네스크나 고딕 건축의 평형한 벽면 위에 조각된 저부조나 스테인드 글래스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단조로운 금색 바탕에 대한 대안으로서 이요오디었는데 15세기에는 그림자 가 섞인 소용돌이 무늬가 있는 다양한 배경과 결합되어 사용되었다. 이것은 점차로 풍경화 의 배경으로 대체되었다.
단선점준
짧은 선이나 점의 형태를 띤 준으로, 가늘고 뾰족한 붓끝을 화면에 살짝 대어 약간 끌거나 대하듯 하여 집합적으로 나타낸다 . 산이나 언덕의 능선 부근 또는 바위의 표면에 촘촘히 가해져 질감과 괴량감의 효과를 내 며, 우리나라에서는 15세기 후반의 산수화에서 필획이 개별화되면서 발생하기 시작해서 16 세기 전반에 특히 유행하였다.
달리(Salvador Dali)-(1904~1989)
극사실적 표현 기법으로 편집광적 환각을 표현하였으며, 중복된 사물들이 서로 배경이 되고 형태가 되는 착각을 이용하여 초현실을 이끌어 냈다. 1904년 스페인의 피그라스 태생인 살바도르 달리는 마드리드의 미술 (Beaux-Art) 학교에 서 공부한 후 시카고로 가서 미래주의에 심취한다. 그 후에 그는 파리로 건너와 피카소를 만나고 미로에 의해 초현실주의자들에게 소개된 그는 편집광적 비평방법을 창안했고, 모든 수단과 기교의 솜씨를 발휘하여 환각에 싸인 세상을 묘사했다. 또 뷔뉘엘(Bunuel)과 함께 [안달루시아의 개](1928)라는 영화를 제작하기도 한 그는 시나리오작가이기도했다. 그런데 대중적인 과장 취향, 스캔들을 좋아하는 성향 때문에 초현실주의자들로부터 그룹에서 축출 당하는 등 많은 일화를 남겼다. 1931년에 그린 [기억의 습작]은 그의 초현실주의를 상징하는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기억의 고집'에서의 시계들은 무서운 운명을 당하고 있는 자기학대적 대상물이다. 시계들은 마치 넙치가 납작하게 엎드려 상어에게 먹힐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기계적 시 간이라는 상어들에게 삼켜지리라는 걸 알면서도 바닷가에서 기다리고 있다. 시간의 흐름 속에 축 늘어진 시계들과 새 모습과 사람의 눈까풀을 동시에 연상시키는 기이 한 형상들이 해변가에 놓여 있다. 달리는 꿈이라는 무의식 속에 나타난 의식의 잠재된 욕망 - 특히 성적 욕망-을 이런 상징적인 물체들로서 표현하고 있는데, 시간의 존재에 대한 인간 이 가지고 있는 신비로운 의식을 드러내는 것이다. 흐물흐물한 물체의 형상은 그의 많은 회 화 속에서 계속해서 등장한다. 1937년의 [수면]이라는 작품에서는 인간의 형상이 늘어져 있는 유동의 물체가 나타난다. 무 겁고 긴 머리가 몇 개의 가느다란 장대에 위태롭게 의지해 잡을 청하고 있다. 멀리 보이는 수평선 위의 배와 마을이 이 머리의 크기를 더욱 강조하고있다. 우리는 그의 이러한 그림들 을 보면서 언제인가 한번 꾸었던 꿈의 헌 장면을 들킨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프로 이드를 읽고 꿈과 무의식세계에 열광하기 시작 '편집광적 비평방식'을 개발하여 기존하는 형태에서부터 다른 형태들을 찾아냄으로써 자신의 강박관념과 환상등을 표현해낸다. 흐물렁거리는 형태, 두가지의미를 지닌 형태등이 등장하여 독특한 세계를 이루고 있다. 주요 작품 : 내란의 예감, 가을의 식인 풍습, 기억의 잔상 등 달리 (Salvador Dali,1904~1989) 에스파냐의 초현실주의 화가. 피게라스에서태어났다. 14세 때부터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의 미술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그러나 과격한 성격 때문에 1926년 퇴학당하였다. 어려서부터 추상화에 관심을 가졌으며, 프로이드의 영향을 받아서 환상의 세계를 그리기도 하였다. 1928년 파리로 가서 초현실주의 화가나 시인들과 가깝게 지냈다. 그러나, 1937년 이탈리아 여행을 계기로 르네상스의 고전주의에 흥미를 가져 초현실주의 화 가 모임에서 제명당하였다. 원자 과학이나 가톨릭의신비성을 상징하는 그림을 그렸다. 주요 작품으로는 〈기억의 고집〉 〈불 붙은 기린〉등이 있다. 그리고 〈안달루시아의 개〉〈황금 시대〉 등의 영화를 만들기도 하였다.
담징 - 曇徵 (579~631)
고구려의 승려·화가. 5경과 그림에 능하였다. 610년 백제를 거쳐 일본에 건너가 고행과 수도에 힘을 쏟았다. 일본의 승려 호조[法定]와 함께 생활하면서 불법을 가르치고그림 및 맷돌·종이·먹 등의 제조법을 전해주었다. 그가 일본 호류사[法隆寺]에 그린〈금당 벽화〉는 동양 3대 미술품의 하나로꼽혔는데, 1948 년에 불탔다. 1989년에는 같은호류사 5층탑 벽화의 덧그림 밑에서 그가 그린 화려한 〈관음보살상〉이 1300년 만에 발견, 컴퓨터로 재생되어 그의 솜씨를 다시 확인해 주었다.
당삼채 唐三彩 Tang sancai(중)
중국 당나라(618~906)때 만들어진 삼채 도자. 주로 장안(長安),낙양(洛陽)의 귀족들의 장례를 위해 만들어 부장(副葬)했다.도질(陶質)의 소 지(素地)에 화장을 하고 녹. 갈. 황. 백의 연유(鉛釉)로 화려하게 칠한다 기형은 용머리 항아리(龍頭臺), 접시, 바리 등과 여러 가지 모습의 남녀인물상, 신상, 진 묘수(鎭墓獸), 말, 낙타등 각종의 명기(明器)가 있다. 이것은 귀족의 취미 생활의 양상을 잘 보여주며 또한 당시 유행했던 서 아시아 양식의 의장과 복식 등을엿 볼 수 있다. 측천무후(側天武后,690~705 재위) 땐 후장(厚葬) 풍습으로 삼채가 유행했고 그 영향으로 발해삼채(渤海三彩), 요삼채(遼三彩), 송삼채,나라삼채(奈浪三彩) 등이 생기고 페르시아의 삼 채에도 그 영향을 끼쳤다.
대지 아트(大地藝術) Earth ART(영)
랜드 아트 경우에 따라서는 프로세스 아트라 불린다.1960년대 후반 영국,독일,특히 미국에 서 성했했던 미술 경향.이 경향의 대표적 작가로 스미드슨이 소설가 브라이언 앨디스의 동 명의 과학소설 제목에서 힌트를 얻어 전람회의 이름으로 붙임으로써 일반화된 용어이다. 대지예술은 미니멀 아트의 영향에서 '물질'로서 의 예술을 부정하려는 경향과 반문명적인 문화 현상이 뒤썩여서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상업주의적인 화랑,미술관,컬렉터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채 영구불변의 아름다움 을 목표로 삼는 종래의 미술 개념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한다. 그렇기에 작품의 기획이나 소 재 방법,경향도 각기 다르며 일반적인과는 색다른 것이다.한마디로 기상천외한 예술 세계인 것이다. 예로 사막이나 산악 ,해변,설원등을 소재로 그곳에 땅을 파거나 선을 긋거나 사진에 수록하 여 작품으로 하며,또는 소재인 흙,잔디 따위의 자연물을 그릇에 담거나 그것을 직접 화랑에 전시하기도 한다. 마이클 하이저 [현재는 유실] 9개의 네바다 함몰중 첫 번째.표면을 파내 1.5톤의 흙을 다른 곳으로 옮김.
대지예술(Earth Art)
랜드 아트(Land Art), 경우에 따라서는 프로세스 아트(process art)등으로도 불린다. 1960년 대 후반, 영국, 독일, 특히 미국에서 성행했던 미술 경향. 이 경향의 대표적인 작가 스미드슨 이 소설가 브라이언 앨디스의 동명의 과학소설 제모겡서 힌트를 얻어 전람회의 이름으로 붙 임으로써 일반화된 용어이다. 대지예술은 미니멀 아트의 영향에서 `물질'로서의 예술을 부정 하려는 경향과 반 문명적인 무화 현상이 뒤섞여서 생겨난 것이다. 따라서 상업주의적인 화 랑, 미술관, 컬렉터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한 채, 영구 불변의 아름다움을 목표로 삼는 종 래의 미술 개념에 대한 반발에서 출발한다. 그렇기 때문에 작품의 소재나 방법, 경향도 작가 마다 기상천외하다. 예를 들면 사막, 산악, 해변, 설원 등의 넓은 땅을 파거나 거기에 선을 새겨 넣은 후 사진에 수록하여 작품으로 하기도 하고 흙 또는 잔디 따위의 자연물을 그릇에 담거나 직접 화랑에 운반하여 전시하기도 한다. 또 밀밭의 밀을 X자형으로 베어내기도 하고 곡식을 그대로 화랑에 전시하기도 하는가 하면 아스팔트 길을 분쇄하기도 하며 해변가 절벽 을 밧줄로 묶기도 한다. 이러한 것은 모두 예술의 일시적 셩격, 머티어리얼로서의 자연의 재 인식, 자연 환경의 창조적 응용 등을 강조한 것이다. 대표 작가에는 로버트 스미드슨, 마이 클 하이저, 데니스 오펜하임, 피터 허친슨, 알렉산더 스타키 등이 있다
대칭(symmetry)
균제, 상칭이라고도 한다. 미술 용어로는 좌우 대칭, 좌우 균제 따위로 불린다. 좌우 또는 상 하로 동일한 형상의 상사형의 한 쪽이라는 뜻이다. 중심점 또는 중심측을 둘러싼 여러 단위, 여러 부분이 양쪽으로 대응하고 있는, 물체의 구조 또는 배치를 말한다. 인체, 동식물, 기구 등에 그러한 예가 많다. 대칭적인 미술은 보는 이에게 정지, 안정, 장중, 엄숙, 신비한 느낌 등을 주어 종교적인 목적, 효과를 위한 회화, 조각에 많이 이용된다. 대칭을 기계적으로 남 용하면 경직감을 낳고, 유기적인 생명감을 손상시킨다.
데스틸
네덜란드 데 스틸운동은 1917년 피에 몬드리안(1872-1944)과 테오 반 되스부르그 (1883-1931)에 의해 결성된 그룹이다. 데 스틸이라는 의미는 'The style' 즉 양식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입체주의와 미래주의, 러시아 구성주의를 접하게 됨으로서 기하추상과 유토피아적인 세계관을 형성하게 된다. 20세기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불리는 몬드리안이 데 스틸의 기하추상의 기반을 형성하였다 면, 적극적 활동가인 반 되스부르그는 그들의 이론을 현실의 일상에 직접적으로 접목시키려 했던 인물이다. 이들은 모두 데 스틸의 조형적 이론을 나름대로 정의 내리고자 했다. 반 되스부르그는 1917년 [회화에서의 새로운 움직임]이라는 책을 출간했고, 몬드리안은 [회 화에서의 신조형주의]라는 논물을 포함한 일련의 글들을 [데 스틸]지에 기고하였다. 이들은 '명확성, 확실성, 질서'를 회화의 기본적 구성원리로 추구했는데, 이 시기의 그들의 작품은 거의 동시에 빨간 색, 노란 색, 파란색들의 원색과 검은 색, 흰색, 회색들의 무채색으 로 단순화된 색채와 직선, 사각형, 정육면체 등을 통해서 위의 이론들을 화면 위에 구성하였 다. 데 스틸 화가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술가들의 공동작업이라는 개념이었으며, 그것 은 화가, 조각가, 건축가, 그래픽 디자이너, 산업 디자이너간의 공통된 관점을 발전시키는 것 을 목적으로 했다. 몬드리안보다 11살 연하의 반 되스부르그는 1917년 [데 스틸]이라는 잡지를 발간하면서, '전 통의 절대적인 가치절하 ........ 새로운 미술과 생활로서의 보편성'을 강조한다. 그는 몬드리안보다 먼저 그림에서의 직선(수평과 수직선)이 가지는 중요성을 인정하고, 심지 어 잡지 제목을 '직선'이라고 붙일 계획까지 했었다고 한다. 그는 1912년과 1914년 사이에 입체파, 미래파, 칸딘스키, 그리고 러시아 구성주의자들과 그 의 동료 몬드리안등의 이론과 기법을 연구했는데, 그의 회화세계는 1918년에 가서 완전한 추상에 다다르게 된다. 그러나 수직, 수평의 대조가 가지는 신비적이고 철학적인 의미를 깊이 탐구하기 시작한 몬 드리안은 '삶과 예술과의 결합'이라는 실제적인 영역보다는 순수예술세계로서의 기하추상을 추구해 나아간다. 1908년부터 1912년 사이에 그린 [나무연작]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어떻게 사실화에서 수직, 수평의 기하추상의 경로로 나아갔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화면을 가득 메우는 나뭇가지의 혼란함이 결국에 가서는 수직선과 수평선의 단순하고도 기 하적인 추상의 형태로 발전하는 것이다. 그는 계속하여 분석적 입체주의 회화와 비슷한 대상의 분석을 좀더 본질적으로 구체화하면 서 1914년 [타원 속의 색면들]이라는 작품을 거쳐, 1920년경에 다다르자 1921년 작인 [회화 1]과 같이 절대적인 수직, 수평의 기하추상으로 자리잡아가게 된다. 1924년경 반 되스부르 그는 자신이 '요소주의(elementalism)이라고 명명한 새로운 회화언어를 통해 직사각형들로 이루어지는 구성방식을 지속적으로 응용예술의 기초로 사용했다. 그리고 1925년작인 [부조화의 반구성]라는 작품에서 볼 수 있듯이, 수직과 수평으로 이루어 진 사각형들을 45도 각도로 기울여서 보다 직접적인 역동적 표현 형태를 고안해 내면서 몬 드리안의 절대적 수직, 수평이론에 변화를 가했다., 몬드리안은 이에 반발해 그룹에서 탈퇴 를 결정하고, 반 되스부르그가 그룹을 이끄는 수장으로 남게 된다. 반 되스부르그는 이러한 사선의 구성을 스트라스부르의 '로베트'라는 카페에 있는 그의 벽 화 - 이것은 아르프와 소피 토비 아르프가 합동으로 장식했다. - 에서 직접적으로 실내장식 으로 사용되고 있다. 그는 직사각형을 45도 각도로 대담하게 기울여 놓고 단일한 형태의 띠로 그 둘레를 둘렸다. 불완전한 직사각형들은 삼각형 혹은 불규칙적인 기하학적 형태로 보이게 되면서 그의 사선 의 네모들은 몬드리안의 닫혀진 회화에서 열려진 공간구성으로 나가게 된다. 반 되스부르그 지도하의 데 스틸 그룹은 '요소주의'를 건축에 이용하고, 평면작업보다 가구, 실내 디자인 등의 실제적인 부분에 적용을 시킨다. 그들은 회화와 건축의 통합을 구체적 목표로 주장하며, 이는 바우하우스와 비슷한 '총체적 건축'을 통한 유토피아니즘(이상주의)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미학에 있어서 기계가 차지하는 위상과 그것이 새로운 건축과 예술의 창조 에 작용하는 기능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이런 사실은 이태리의 미래주의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으나, 데 스틸의 건축가와 미술가들 은 미래주의자들의 기계에 대한 찬양이 아닌 충체적 예술로서의 건축을 위한 기계사용아라 는 점에서 그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J.J.P. 아우트의 [카페 드 유니]라는 건물은 몬드리안의 화화를 거의 그대로 건축적인 형상으 로 재현하고 있다. 여기에 산업 디자인식의 포스터와 문자 디자인을 삽압해 현대 건축물로서의 기능성을 예고 하고 있다. 이들은 색채를 사용하는데 있어 장식적이고 부수적인 의미의 색채가 아닌, 건축물의 형성에 본질적, 유기적 역할을 하는 색채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데 스틸의 건축은 기하학적 형태의 구축물로서 공간을 구획하는 면들로 이루어진 일종의 공 간의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열려진 공간으로서의 기능을 매우 중요시했다. 과학기술을 신뢰하는 낙관적 Utopianlsm으로서의 데 스틸 양식은 실내 디자인과 가구용품 디자인을 통괄하는 것으로 총 체예술을 지향했다. 데 스틸 원래는 네덜란드어로 `양식' 이라는 의미. 1917년 반 되스버그는 동명의 미술 잡지를 창간하 여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를 강력히 옹호하고, 새로운 조형예술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 에 참가한 사람은 위의 두 사람외에 , 화가 겸 조각가인 방통게를로, 화가 빌모스 후차르, 시인 안토니 코크, 건축가 오드, 바르트 반 데르 레크, 리트펠트, 영화감독 한스 리히터 등으 로, 미래파의 화가 지노 세베리니도 한 샔 동인이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데 스틸 운동은 단순히 회화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조각·건축·디자인 등 각 분야에 걸쳐 신조형주의의 원리를 넓히려 한 것으로, 네덜란드는 물론이고, 양 대전 사이에 유럽 예술 전체의 동향에 강한 영향을 주었다. 창간호 발간 후 11년만인 1928년에 잡지는 간행이 중지되었지만, 그후 1932년에 반 되스버그의 추호도가 1회에 더 간행되었다.
데드 마스크(death mask)
죽은 사람의 모습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 뜨는 안면상. 밀랍이나 석고, 혹은 현대에는 식물 아교 따위의 부드러운 재로를 얼굴에 붙여 만든다. 최초의 마스크가 언제, 왜 만들어졌는지 는 불확실하지만 기원전 2400년 초의 고대 이집트에서 행해졌고 아마르나(기원전 1400)시대 에는 초상화 모델 역할을 하였다. 데드 마스크는 에트루리아와 로마의 조상 숭배 및 가족 제례에서 주요한 역할을 하였고 15세기 피렌체에서도 존재하였으며, 아눈치아나교회는 유명 한 마스크들을 소장하고 있ㄷ. 그때 이후로 유명인들의 데드 마스크를 뜨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 되었다. 웨스터민스터 사원에 있는 엘리자베스I세와 다른 국왕들의 밀랍상은 모두 데 드 마스크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나폴레옹과 차이코프스키의 얼굴은 마스크를 통헤 우리들 에게 알려져 있다.
데이시스
기독교 미술 주제의 하나. 본래는 청원, 기원이라는 뜻의 그리스 어에서 나온 말이다. 제단 화나 비잔틴 모자이크에서 자주 보이는, 성모 마리아와 세례 요한을 좌우에 거느린 옥좌의 예수와 최후의 심판 장면을 묘사한 장면을 지칭한다. 전 인류의 사면을 예술에게 청원하는 중재자로서의 성모 마리아와 세례 요한은 고개를 수그리고 손을 내미는 형상으로 되어있다
데카당스
퇴폐라고 번역된다. 문화의 미적 퇴폐의 과정이나 그 결과 또는 난숙기의 예술적 활동이 그 정상적인 힘 또는 기능을 잃고, 형식적으로도 막다른 골목에 다달아 이상한 감수성, 자극적 향락 따위로 빠지는 경향. 종종 쇠퇴기에 있어서 사회 전반의 부패현상에 대응하는 탐미주 의나 악마주의의 형태가 되어 극단적인 전통 파괴, 배덕, 생에 대한 반역 등의 경향도 수반 한다. 그러나 데카당스 현상은 전시대문화의 붕괴를 촉진하여 새로운 발전능력을 낳는다고 하는 어느정도 긍정적인 뜻도 지니고 있다. 니체는 데카당스를 `힘에의 의지'의 감퇴 현상으 로 보았고, 지드는 데카당스의 문화를 `문화의 데카당스'와는 구별되는 것으로 문화발전에 있어서 긍정적인 의의가 인정된다고 보았다
데칼코마니
전사법이라고 번역된다. 원래는 도기나 유리, 기구 등의 그림 붙이기에 쓰인 수법으로, 명반 이나 알루미나를 접착제에 섞어 종이 위에 칠한 것을 원화지로 하고, 그 원화지 위에 그림 을 그리고 종이째 도기나 유리에 눌러붙여 그림만 상대쪽에 전사하는 방법을 뜻하였다. 그 러나 근대 미술에서는 그와같이 공예에만 국한하지 않고, 콜라주나 프로타주와 함게 회화 제작 자체의 한 가지 수단으로서 널리 사용한다. 많이 쓰이는 방법은 종이에 물감을 발라서 두 겹으로 접는 것인데 작가도 예측 못하는 대칭적인 우연한 영상을 얻게 된다. 데칼코마니를 최초로 이용한 작품은, 1935 년에 초현실주의의 화가 오스카 도밍게스가 제작 한 과슈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 뒤 제2차 세계대전 직전에 막스 에른스트가 이용한 후, 초 현실주의의 중요한 표현수단의 하나가 되었다. 도밍게스의 데칼코마니는 무엇인가 대상(오 브제)의 표현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과슈의 흐름으로부터 생기는 부정형의 영상을 그대로 제시하고 있을 뿐이지만, 에른스트에게는 그것이 특유한 환상세계의 출발점으로 이용되고 있다. 에른스트의 <우후의 유럽>(1940)등이 그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 나 어느 경우라도 다만 완성된 그림을 전사하는 것이 아니라, 전사의 과정에서 생기는 우연 한 얼구이나 어긋남의 효과를 이용하고 있는 점에서 ,예전의 그림붙이기에 사용되었던 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최근에는 로샤 테스트 등 심리학의 자료로 이용되기도 한다.
데콜라주
콜라주의 반대말로서 떼어내고 박탈한다는 의미. 일상적인 사물을 찢어내고 지우며 불태우 는 등의 파괴 행위에 의해 우연한 효과를 기대하는 기법. 그 목표는 물질의 소비 메커니즘 적인 기성관념을 강제적으로 타파하고 새로운 미적 현상의 가능성을 찾아내는 데 있다. 이 러한 발상은 1934년 초 현실주의 화가 레오 마레로부터 시작해서 1950년대에는 유럽에서 널 리 퍼졌다. 한편 플룩서스의 독일 대포자인 볼프 포스텔에 의해 데콜라주라는 용어는 단순한 장식상의 기법이 아닌 보다 의미깊은 것으로 전개되었다. 그는 1962년 <데콜라주>라는 기관지를 발 행하여 동명의 그룹을 조직했는데 이 그룹의 구성원은 발족 당시부터 마치우나스, 패터슨, 영 등 플룩서스의 멤버와 중복되어 있었다. 이 그룹은 유럽에 있어서 해프닝이나 이벤트의 메카가 되었다.
데콩포제
분해 또는 해체한다는 뜻. 보통 그림을 그린다고 하면 눈에비친 사물을 그대로 화면에 재상 하는 것이지만, 입체파 화가들은 보이지 않는 면까지를 우리가 볼 수 있는 화면에 끌어내어 사물의 진상을 밝히려고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연물을 그대로 그려서는 목적을 달 성할 수 없으므로 어느 면을 한 번 해체한 다음 다시 조립해야 한다. 그에 앞서서 해체하는 과정을 데콩포제라 한다.
데쿠닝 (Willem de Kooning,1904~)
미국의 화가.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에서 태어났다. ‘액션 페인팅’이라고 하는 일종의추상 표현주의 양식의 대표자이다. 12세 때건축 장식가에게, 뒤에 조형 아카데미에서공부하였으며, 1926년 미국으로 건너가 장 식과 삽화 그리는 일을 하였고, 대공황 중에는연방 미술 계획에 참여하였다. 1930년대에입체파식의 작품이 인정되어, 그 뒤로는 추상 표현주의 경향으로 기울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인체를 자유로운 선과 선명한색채로 대담하게 표현한 ‘여인’의 연 작으로 주목을 받았다. 베네치아·상파울루 등의국제전에서도 호평을 받아, 뉴욕파의 중심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데페이즈망
전치, 전위법등으로 번역된다. 번래는 `나라나 정든 고장을 떠나는 것'을 뜻하는 말로 초현 실주의에서는 어떤 물체를 본래 있던 곳에서 떼어내는 것을 가리킨다. 초현실주의의 선구자 인 로트레아몽의 시에 "재봉틀과 박쥐 우산이 해부대 의에서 뜻하지 않게 만나듯이 아름다 운" 이라는 유명한 구절이 있는데 이것이 데페이즈망에 대한 가장 적절한 표현이다. 즉 낯 익은 물체라도 그서이 놓여있는 본래의 일상적인 질서에서 떼내어 이처럼 뜻하지 않은 장소 에 놓여지게 되면 보는 사람에게 심리적 쇼크를 주게된다. 이를테젰 손목이 팔에서 떨어져 공중에 둥둥 떠있거나, 혹은 나무줄기에 붙어있는 것과 같은 장면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원리에 의해서 초현실주의자들은 경이와 신비에 가득찬, 꿈속에서만 볼 수 있는 화면을 구 성했는데, 초현실주의에 의하면 이런 그림이 보는 사람의 마음 속 깊이 잠재해 있는 무의식 의 세계를 해방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콜라주나 오브제도 일종의 전위라 할 수 있는 데 이런 방법들은 예술의 새로운 차원을 열어주는 데 크게 기여했다.
데포르마송
왜형 또는 변형이라 번역된다. 대상을 시각적 영상으로 충실히 재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그 대상을 고의로 왜곡시켜 그리는 법. 이러한 현상은 이미 원시시대의 회화에서 부터 나타나며 또한 역사상의 모든 시대에서 그 예를 지적할 수가 있지만, 근대에 이르러 사실주의가 부정됨에 따라 중요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소묘의 기술이 미숙하기 샔 문에 생기는 데포르마숑도 있을 수 있지만, 대상의 있는 그대로의 재현을 부정하는 것에서 부터 출발한 근대 이후의 미술에 있어서는, 작가의 주관이나 특별한 감정을 강조하기 위해 대상을 왜곡시킨다. 거의 모든 유파와 경향에서 의식적인 데포르마숑을 찾아볼 수있다. 예를 들면 고갱의 종합주의에는, 화면의평면성을 강조하기 위해 이것이 쓰였다. 또 나비파의 화면 에서는 장식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쓰였으며, 모딜리아니에 있어서는 유려한 선묘의 리듬을 유지학 위해 쓰였다. 한편 반 고호, 수틴, 키르히너, 놀대 등 표현주의적 경향이 강한 화가에 게는 데포르마송이 특히 기본적인 원리라고 말할 수 있다.
도미에 (Honore Victorin Daumier,1808~1879)
프랑스의 화가·판화가. 5세 때 유리 직공이며 시인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파리로 이주하였다. 어려서부터 공증인 사무실의 급사나서점 점원 일을 하며 고생하였으나, 화가를지망하여 석 판화 기술을 습득하였다. 1832년국왕 루이 필립을 공격하는 정치 풍자 만화를 그렸다가 옥에 갇히기도 하였으며, 그 뒤40년간 귀족과 자본가의 생태를 풍자하였다. 그의 석판화 제작량은 4000점에 이르고, 목판화 작품도 있다. 그의 유화나 수채화는 그가 죽을 때까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 죽기 1년 전인 1878년에야 첫 개인전을 열었으나 거의 주목을 끌지 못하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세탁하는 여인〉 〈3등 열차〉 〈관극〉 〈돈키호테〉 〈로베르 마케 르〉 등이있다.
도석화(道釋畵) Tao-ship-hua (중)
도교, 불교에 인물화의 총칭. 당(唐)대까지는 산수화보다 우선한는 주제이었고, 오도현(吳 道玄) 등이 주로 그린 화제. 이시대의 도석화의 양식은 후세에 모범적인 것으로 추앙을 받 았고, 옷무늬의 형식에서도 '조의출수', '오대당풍' 의 전형이 생겨났다. 한편 당말 오대에는 전통적인 묘선과 자연주의를 벗어난, 사의를 중시하는 수묵의 도석화가 그려지게 되었고, 감상화로서 커다란 변화와 풍부함을 갖게 되었다. 또 북송의 이공린(李公 麟)등에 의해서 당대의 백화(白畵)가 재현되었다. 그 후에 착색. 수묵. 백묘의 화법은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더욱 복잡하게 전개되었으 며, 특히 수묵 도석화는 선승(禪僧)의 여기(餘技)로 취급되어 작품화 되었다
독일표현주의
대략 1905년부터 1914년까지 활발한 창작 활동을 벌인 독일표현주의 그룹은 크게 디 브뤼 케, 즉 다리파 그룹과 청기사파 그룹으로 나뉜다. 표현주의자들은 예술가를 사회를 형성하는 일원으로 보고, 전체 사회속에서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획득하고 행동한다는 기본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들은 당시 독일 사회가 안고 있었던 여러 가지 도시적 병폐를 미술을 통해 고발하고 비판 하고자 하였다. 또한 회화를 통해 사회를 개선하여 새로운 유토피아를 구현해 나아가고자 하였다. 여기서 우선 20세기 초반에 등장한 독일표현주의 회화의 바탕이 되는 예술에 있어서의 [표 현주의]이념에 대하여 살펴보자. 미술사 학자 로버트 린튼은 표현주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인간의 모든 행위는 표현적이다. 제스츄어란 의도적인 표현행위이다. 모든 예술은 작가와 그 상황의 표현 이며, 그 중 특히 감정이나 정서적 메시지를 방출 또는 전달하는 시각적 제스츄어를 통하여 우리를 감동시키고자 하는 예술이 있는데, 바로 표현주 의 예술이 그것이다. 많은 20세기의 예술, 특히 중부 유럽에서는 이러한 계통의 미술이 '표현주의'라고 불리어 졌 다." 표현주의 미술의 원리는 크게 '비이성', '반전통', '반서구'적인 것을 의미한다. 서양 예술의 기저가 '이성주의'에 놓여 있다면, 표현주의는 '비이성'을 추구함으로서 '반서구'적인 태도 와 '반전통'적인 이념을 갖게 되는 것이다. 또한 표현주의는 그림의 내용 즉, '문학성'을 형태의 완성보다 중요시하는 내용주의 미학위 에 그 기초를 두고 감정과 이념을 자유롭게 표현하려는 것을 주목적으로 삼고 있다. 이 결과 조형적인 완성도는 이차적인 문제가 되면서 전달하려는 메시지나 작가의 내면세계 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을 더욱 중요시한다. 20세기뿐만 아니라 역사상으로 정신적인 불안 시대에는 항상 표현주의 적인 예술양식이 나 타났으며, 따라서 표현주의는 인류 미술역사에서 항구적인 한 경향이라고 볼 수 있다. 20세기 표현주의는 반 고호와 고갱을 그 선구자로 볼 수 있다. 이 중에 특히 반 고호는 이들에게 직접적인 기법의 특성을 형성하게 하는데, 비록 반 고호 가 스스로를 인상주의자로 칭하고 인상주의자의 밝은 색채를 이어받아 화폭에 선명한 원색 의 선들을 펼쳐놓기도 했지만, 그의 감성적, 상징적 특성은 색채를 단지 빛을 표현하는 것에 만 한정하지 않고 자신의 내면심리를 묘사하는 적극적인 매체로 이용하였다. 그는 자연을 의식적으로 '인간의 심각한 정열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이 색채를 감성묘사 적, 상징적 맥락으로 사용한 경우이며, 선 또한 같은 목적으로 사용하게 된다. 고호에게 있 서 생명감있는 선이야 말로 그의 마음을 고스란히 표현하는 매체가 되었다. 색채의 임의성과 상징성은 고갱의 경우에서 더욱 뚜렷이 나타난다. 고갱은 상징주의 계열의 화가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그의 그림을 단순화, 평면화시키면서 비 사실적인 색채로 그의 정신세계를 표현하였다. 그는 또한 비유럽적인 원시세계를 대상으로 삼음으로서 표현주의 화가들에게 같은 미지의 세계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데 일조한 다. 고호와 고갱에 이어 노르웨이 태생의 뭉크도 표현주의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화가이다. 그는 불안, 공포, 증오, 애정과 같은 인간의 가장 근본적이고 선명한 감정을 격렬한 색채와 왜곡된 선으로 표현해 표현주의자들의 새로운 조형언어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독일 표현주의의 기법은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나는데, 선적인 것, 얼룩진 것, 그리고 사실적 인 것 등이다. 이 중 선적인 그림이 주류를 이루게 되는데, 이는 특히 키르히너등의 다리파 그림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놀데의 종교적인 주제, 페히슈타인과 키르히너등의 유토피아적인 주제, 신 즉물주의의 딕스나 그로츠의 사회비판적인 주제, 벡크만과 마르크의 상징적인 주제, 코코 슈카의 비관적인 인간심리 주제등으로 구별할 수 있다. 1905년 독일 드레스덴에서 창립된 다리파는 키르히너, 헤켈, 놀데, 뮐러등이 핵심 멤버이다. 이들은 주로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한 학생으로서, 전통적인 미술교육을 거부하고 순수한 상 태로 그림을 그리려고 시도하였다. 이들은 또한 중세 길드 조직과 비슷하게 공동 작업을 중 요시 했는데, 각자의 개성을 중요시하기 보다는 한 그룹으로서 집단으로 작업하는 것을 선 호하였다. 특히 키르히너는 표현주의와 다리파의 예술관에 대한 많은 글들을 남기며, 그룹의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1905년에 목판화에 세긴 선언문을 통해 이들은 과거와 미래를 연결 짓는 다리 역할을 함으로서, 빈민계층에 대한 동정, 부르조아중심의 낡은 사회제도에 대한 비판, 사회정치적 현명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다리파 화가들의 공통적인 양식적 특성은 야수주의와 비슷한 강렬한 윈색사용과 고의적인 형태 변형을 들 수 있지만, 야수주의와 구별되는 점은 11-13세기 중세 고딕 조각과 스테인 드 글라스 등에서 전통을 이어받은 듯한 왜곡되면서도 호소력 있는 표현기법이다. 또한 윈 시미술의 영향과 프랑스 미술, 즉 신 인상주의나 후기 인상주의의 영향도 간과할 수 없다. 에른스트 루드비히 키르히너(1880-1938)의 초기 작품들은 1906년에 그린 [해바라기와 같이 있는 여인의 머리]에서 볼 수 있듯이, 같은 시기의 프랑스의 마티스가 보였던 야수파 수법 과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키르히너의 선은 야수파의 것보다 훨씬 투박하게 처리되 고 있다. 그러나 1911년에 베를린으로 활동무대를 옮기고 나서의 시기에 보이는 작품들은 표현주의 화풍을 완성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913년에 그린 [다섯명의 거리의 여인들]에서도 엿볼 수있듯이, 톱날같은 예리한 선과 포물 선 같은 곡선이 서로 대조되면서 동시에 결합하므로서 화면 가득히 특이한 긴장감과 움직 임이 살아나고 있다. 이러한 효과는 1915년에 그린 [군인으로 분한 자화상]에서도 느낄 수있다. 뒷편의 나부와 급한 경사로 이루어진 화가의 정면상은 현실적인 색채로 표현되어 있으면서 도, 동시에 비현실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날카로운 선과 강렬한 원색이 한데 어울어져 화면은 강한 호소력을 지니게 된다. 1913년 같은 해에 그린 [베를린의 거리풍경]에서는 [다섯명의 거리의 여인들]에서와 마찬가 지로 도시의 상막함과 고독한 군상들을 표현하고 있다. 당시 독일 사회는 급격한 산업과 도 시발달로 경제적 부를 축척하게 되지만, 빠른 경제성장에 비례하여 각종 도시문제가 산재해 있었다. 키르히너가 본 도시의 모습은 바로 이러한 혼돈과 무질서속에서 쾌락을 쫓는 인간 들의 몰개성적인 표정 그 자체인것이다. 에릭 헤켈(1883-1970) 은 온건하면서도 절제된 표현주의자였다. 그는 원시조각에 매료되어 문명에 찌들지 않은 원시세계를 화폭에 옮기고자 하였다. 그의 그림에서는 입체주의의 분할 된 윤곽선 처리와 원근의 다시점이 도입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909에 그린 [갈대밭의 목욕하는 사람들]에서는 6명의 누드 인물이 푸른 강을 뒤로하고 갈 대밭 속에 위치하고 있다. 이들은 거칠고 투박한 붓터치와 원색, 뚜렷하지 못한 윤곽선으로 성별을 구분하기 어렵지만, 자연과 하나로 동화되어 있는 순수한 원시성이 느껴진다. 그의 마른 인물들은 키르히너의 인물들이 보이는 내적 갈등과는 다른 효과를 지닌다. 즉 어떠한 문명의 법칙에도 강요받지 않는 자유로움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원시성은 1913년에 그린 [여인과 바다]에서도 나타난다. 날카롭게 각진 주변 풍경과 직선으로 표현된 빛의 분광 속에 홀로 우뚝 서 있는 누드의 여인은 서양 미술사에서는 볼 수 없었던 솔직함이 드러난다. 이런 점에서 그녀는 고갱의 타히티 여인들을 연상시킨다. 오토 뮐러(1874-1930)또한 자연과 원시성에 매혹되어 숲속의 누드를 많이 다루었다. 1911 년에 그린 [숲속의 세 나부]는 그의 표현주의적 특성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3명의 나부가 화면 전체를 꽉 채우며 자리 잡고 있다. 그들의 마르고 아이와 같은 신체는 비문명적이자 비서구적이다. 이들은 유럽의 여성들로 보여지기보다는 검은머리와 갈색의 피부로 인하여 동양여성을 생각나게 한다. 검은머리의 누드는 뮐러의 작품에 많이 등장하는 인물로서 주변 의 검푸른 초록 숲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있다. 뮐러의 이런 독특한 인물성은 1927년에 완성한 [해바라기와 집시들]에서도 계속해서 재현된다. 집시로 명명된 두 여인은 두터운 입 술과 뭉툭한 코, 짙은 갈색의 피부를 가진 흑인들로 묘사되고 있다. 그들의 어두운 피부색은 양옆의 해바라기와 옷, 두건에 의해 더욱 강조되고 있으며, 뒷 배경 에 위치한 집들의 형태 또한 아프리카 원주민 양식을 연상케 하는 토담집으로 나타나고 있 다. 다리파 작가들은 이상화되지 않고 솔직히 드러나는 자연속의 무리 지은 누드를 애호하 는 주제로 사용했는데, 그들은 그것을 그 당시 중산층 부르조아 계급의 위선적인 도덕관을 거부하며, 거기서부터 벗어나 진실한 인간 본연의 해방을 추구하는 방식이자 표현으로 삼은 것이다. 에밀 놀데(1867-1956)는 독일 표현주의의 중요한 작가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 그는 젊은 시절 목각공예를 습득하고, 한때 베를린에서 가구와 장식미술가로 일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1906년에 다리파에 가입해 그 다음해 탈퇴하여 자신만의 독자적인 길을 나아간다. 브뤼케 그룹 시절 얻은 목판화의 제작 방법은 그림에까지도 감정표현, 그것도 현실 사회를 넘어선 종교적 감정표현으로 이색적인 종교적 표현주의 회화를 구현해 나갔다. 놀데를 1913년에서 다음해에 걸쳐 오세아니아의 여러 섬을 순례하면서 원시 토속문화를 직 접 체험하게 된다. 1914년의 [무희 그림이 있는 정물]에 나오는 무희는 그 여행 때에 어디선가 원주민의 춤을 보고, 급하게 화구 상자에 스케치했던 것을 뒤에 다른 정물과 조화시키면서 다시 작품화한 것이다. 흡사 정신이상자로까지 보이는 이 열광적인 여인들은 붉은 머리와 반라의 옷차림에서 더욱 생생한 운동감이 느껴진다. 놀데의 작품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것은 1909년부터 제작되기 시작한 약 20여점이 넘는 종 교적인 주제의 작품이다. 그의 종교화는 전통적인 기독교 도상을 과감히 탈피해, 표현주의자다운 화면을 구성하게 된 다. 그는 사실적이면서도 무게 있는 그림으로 앙소르, 루오, 고갱과 더불어 현대회화사에서 손꼽히는 종교화가로 불리우게 된다. 1909년에 그린 [오순절]에서 그는 그리스도를 한 북부 독일의 건장한 농임과 같은 모습으로 재현하고 있다. 그를 둘러싼 사람들도 신앙의 깊은 체험을 함께 나누며 그 자리를 메우고 있다. 또한 사람들의 눈은 크고 선명히 그려지고 있다. 서구미슬에서 전통적으로 눈은 마음과 정신의 상징으로서 정신성을 강조할 때는 눈을 크게 그리는데, 이 방식이 여기에서도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911-1914년을 중심으로 활동한 청기사파는 화면의 조형적 효과를 무시하고 읺고 형태와 내용을 조화시키면서 화려한 원색의 장을 펼치고 있다. 뮌헨을 중심으로 활동한 이 그룹은 다리파 같이 독일 낭만주의에 근거하고 있으나, 집단적 인 공동작업이나 과격한 사회 비판적인 태도를 내세우지 않고, 여러 나라들의 미술가들이 함께 움직인 모임으로서 특히 프랑스 미술에 대해 좀더 개방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그룹의 가장 핵심적인 인물은 당시 독일에 거주하고 있었던 러시아인 바실리 칸딘스키 (1866-1944)였다. 칸딘스키가 추구한 것은 회화 그 자체이며 여기서 정신적인 세계를 즉흥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이 정신적인 세계는 '절대' 혹은 '추상'이라는 성격의 회화를 형성하게 된다.
뒤러 (Albrecht Durer,1471~1528)
독일의 화가·판화가·미술 이론가.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났다. 독일 르네상스 회화의완성자로, 1486∼1489년 볼게무트에게 목판기술을 배웠다. 이탈리아 여행 중에 그린 수채 풍경화는 독일 예술이 처음으로 도달한순수 풍경화라고 할 만하다. 1504년 최초로인체 비례를 적용하고 후기 고딕식의 원근법을 구사한 〈아담과 이브〉를 그 렸다. 또한,기술적으로 뛰어난 그의 에칭은 뒤에 렘브란트에게 영향을 주었고, 1515년부터 나라에 서연금을 받았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장미관의 성모〉 〈젊은 베네치아의 여인〉 〈만성도〉 〈기사·죽 음·악마〉 〈서재의 성히에로니무스〉 등이 있다.
뒤뷔페(Jean Dubuffet)-(1901~1985)
두꺼운 질감과 아동화 같은 순박한 인간사의 표현으로 표현의 자율성과 '아르 브뤼' 를 추 구하였다. 처음에는 르 아브르 미술학교를 다니다 1918년에 파리의 쥘리앙 아카데미에 들어간다. 그 러나 40세쯤 되어서 미술에 전념하기 시작한다. 1943년 마티에르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시도하여 '구상회화언어'을 특이하게 부흥한 시킴 으로써 격렬하고도 파괴적인 특성으로 그림을 그린다. 1947-51년 모래와 자갈덩어리가 섞인 두꺼운 물감덩어리안에 격렬하게 새겨 넣은 듯한 거 친 상태의 구상을 발표하던 시기에 뒤뷔페는 정신질환자들의 미술표현에 관심을 갖는다. 뒤뷔페의 아르 브 뤼트적인 표현방식에는 철학적 사고가 그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므로 이에 동일시할 수는 없는 것이지만 이러한 그의 태도는 문화가 갖고 있는 억압적 양상을 지 적하고자 하는 의도를 보이는 것이 었다. 또한 그는 회화에 타르, 석탄, 모래등 비회화적 물 질을 도입하여 땅의 움푹 들어간 기복을 그대로 드러내거나 기괴한 인물들로 채워진 보조와 같은 작품을 발표한다. 전후에 활발히 진행되었던 마티에르 미술의 대표적 작가로 약10년간 다양한 재료를 동원한 작품을 발표한다. 1960년대에 들면서 음악공부를 하고 난후, 1962년부터는 검은 테두리로 둘러쳐지고 빨강과 파랑의 줄무늬로 면을 채운 낯익은 인물과 모티프가 환상적 퍼즐처럼 얽혀있는 '우를루프' 연작에 착수한다. 1974년 까지 환경조성작업등에까지 확산되어 적용된다. 정형과 비정형, 형체와 마티에르등의 대립상태를 초월하는 뒤뷔페의 작품을 어느 한 카테고 리고 분리 하기는 불가능하다. 자유구상을 비롯한 후세대 미술에서 뒤뷔페의 자유로운 시험정신의 영향을 찾아볼 수있다. 주요 작품 : 라로슈 항, 피에타 등
뒤샹(Marcel Duchamp)-(1887~1955)
프랑스 출신의 미국의 화가. 대표적인 다다이스트로 전위적 작품으로 유명하다. 모나리자 얼굴에 수염을 그린 'L.H.O.O.Q.' 에서처럼 기존의 가치를 조롱하였고, 레이 메이드를 이용한 '샘'을 통하여 일 상품과 예술품, 그린다는 의미. 장소 등 여러 가지의 사변적 미술을 이끌어 냈다. 1913년 뉴욕 '아모리 쇼'에 출품했던 '계단을내려오는 나부' '로드.릴리프''레프리카'등이 있 으며, 자전거 바퀴를 의자위에 거꾸로 고정시켜 관객이 돌릴 수 있도록 고안한 작품은 후에 '키네틱 아트'에 영향을 주게 된다. 많은 작품을 남지기는 않았지만, 미술의 형태를 변화시키기보다는 미술에 대한 개념 자체 에 혁신을 가져온 뒤샹은 20세기 미술에 있어 피카소 만큼이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 다. 뒤샹의 형제들 모두 예술가가 되었다. 고등하교를 졸업하고 파리에 화 쥘이아 아카데미 에서 입학한다. 1907년에는 유머리스트 작가전에 참가하기도 하고 1910년까지 신인상주의, 나비파, 야수파의 영향을 받은 초상화와 풍경화를 그린다. 1908년작인 사과밭의 빨간 집, 검은 스타킹을 신은 나체의 여인, 등이 그예이다. 퓌토그룹 의 토론을 통해 입체주의 원칙을 받아들에게 되나, 1911년작인 체스를 두는 사람들에서 볼 수있듯이 입체주의 미학에 형태와 공간의 투명성을 첨가시키며, 1911년작 사과나무 위에 부 는 바람에서처럼 움빅임을 표현하는 데 역점응ㄹ 둔다. 1912년 살롱 데 엥데팡당에 출품한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로 뒤샹은 고심하고 있던 입체파. 미래파, 등당대의 미술경향에 결별을 고하게 되며 왕과 왕비, 쵸코렛 분쇄기 ,홈통, 등의 작품을 계속 발표한다. 1913년 뉴욕의 아머리 쇼에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를출품하여 큰 물의 를 빚었다. 같은 해 에 최초의 '레디 메이드'작품를 발표했는데 이는 자전거 바퀴를 등없는 작은 의자에 고정해 놓은 것으로 그는 이런 일상용품을 '예술 작품으로 제시하는 것이었다. 군대를 제대하고 1915년에 미국으로 건너간 뒤샹은 '샘'을 발표하여 또 한차례 물의를 일르킨다. 이때 붙어 채핵된 주석 조각을 유리판에 붙여 만든 유명한 박품'그녀의 총각들에 의해 벌 거벗겨진 신부, 바로 그것'의 구상에 착수했다. 1923년에 '미완성'인 상태로 이 작품은 완성 되었다. 미국에서 뒤샹은 피카비아와 함께 다다운동을 미국에 전파했으며 만 레이와 공동으 로 잡지'291'을 펴내기도 했다. 1918년에 그의 마지막 회화작품'너는 나를....'을 완성한 후 회화와 결별했다. 1920년대초에 움직임을 중시하는 광학적 잘 품을 발표하고 점차 모든 예술 활동과 손을 떼 기 시작한다. 그러나 초현실주의자들이 활동에 많이 협력하여 1938년 파리세거 셜린 국제초 현실주의 전시회의 주요기획자로 1200개의 석탄자루를 매달게 하기도 한다.
드 쿠닝(Willem de kooning)-(1904~)
고르키의 영향을 받았으며 심상적 인간상을 표현하였다. 네덜란드 태생의 미국화가이다. 1940년경까지 초기의 작품에서는 불분명한 공간에 반-추상적인 실루엣이 등장한다. 1946년부터 초현실주의적 자동기술법의 경험을 살려 유기체적 형태의 작품을 발표한다. 이 때의 작품에는 회색, 검정, 흰색등이 주로 사용된다. 1950년 대초에 이르러 남자대신 여자의 모습이 나타나고 그 형태는 더욱 평면적이며 일그러 진 모습을 띠기 시작한다. 이시기부터 분홍, 노랑에 가까운 황토색,파랑색등 드 쿠닝 특유의 색감이 자리잡기 시작한 다. 1950년 두껍게 물감을 짓이겨 채색하는 폭력적인 붓질 기법은 추상액션 페인팅에 그대로 다시 사용된다. 구성화 작업을 계속, 캔버스를 공격하는 데 있어 그는 다른 작가들과 동일한 격렬함과 공격 성을 보여주고 있다. 강력한 마티에르와 색깔을 사용한다. 주요 작품 : 여공, 경찰 신문, 강으로 통하는 문 등 드가 Edgar Degas (1834-1917/프랑스) 프랑스의 인상파 화가. 어린 시절부터 은행가이면서 미술 애호가인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으 며 1854년 이탈리아에 가서 앵그르의 고전파의 영향을 받고 파리에 돌아와 친구들의 초상과 역사적인 주제를 주로 그렸다. 3년 후 마네를 만나고 카페 게르보아를 출입하면서 인상파 화가들과 교류하게 되면서 '곡예 사', '세탁부', '무희', '말'과 같이 움직이는 소재를 뛰어난 데생에 의한 사실적인 표현을 하 였으며, 말년에는 눈의 상처로 촉각에 의한 조각 작품을 주로 제작하였다.
드가 (Edgar Degas,1834~1917)
프랑스의 화가. 파리에서 태어났다. 앵그르의제자 라모트에게 그림을 배웠고, 앵그르로부터도 직접 가르침을 받았다. 1856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르네상스 작품에 깊은 관심을 가졌고, 1865년 이후에는 자연 주의 문학이나 마네의 작품에 이끌려 역사화를 주로그렸다. 그는 정확한 소묘 능력 위에 신선하고 화려한 색채감이 넘치는 근대적 감각으로서민층의 사 람이나 풍속을 즐겨 그렸다. 파스텔이나 판화에도 많은 수작을 남겼을 뿐아니라 조각에서도 걸작을 만들어 냈다. 자의식이 강한 성격 때문에 독신으로 보냈고,명성이나 출세를 천하게 여겼으며, 청빈하고훌 륭한 예술가의 태도를 보였다. 주요 작품으로는 〈춤추는 소녀〉 〈경마장 풍경〉〈대야〉 등이 있다.
드랭(Andre Derain)-(1880~1954)
드랭은 블라맹크와 함께 활동한 작가로 야수주의의 진정한 예술을 완성시킨 주요작가 중에 한사람이다. 원색점을 이용한 화면구성을 하였다. 미술학교에서 기초적인 기술을 착실하게 배우고 있던 마티스등의 동지와 과거를 전혀 무시 하려는 블라맹크의 중간위치에 있었다. 드랭은 전통적인 것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전통적인 의미의 질서화되고 고전적인 회 화개념에 매료되어 있었다. 1907년 블라맹크와 거의 같은 무렵 세잔느의 작품에 큰 영향을 받은 그는 입체파에 가담하 면서 구성적인 화면을 시도하게 되어 점차 안정된 고전적인 화풍으로 복귀하게 된다. 모든 것에 호기심을 갖고 있던 그는 흑인 예술과 나이브파 그림세계를 발견한 최초의 인물이었 다. 블라맹크가 본능적인 직관만을 신봉했다면 드랭은 과거의 영향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심 사숙고하면서 그것에 대해 항상 회의하려 했던 이지적인 화가이다. 드랭은 야수주의에서 세잔느의 세계 및 입체파 수법으로 끊임없이 자신의 방법을 변화시킨 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방법을 꾸준히 연마하는 성실한 화가였다. 그 누구보다도 열정적인 자세로 야수주의적 화면을 완성해 내려고 했다. 드랭의 야수주의적인 회화는 대규모의 점묘주의에서 자유로운 붓터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야수주의의 선명한 색채의 작품에 있어서도, 고의로 불협화음을 내지않고 인상주의나 특히 신인상주의의 미학을 통하여 배운 색채의 조화를 화면에 살려서 훌륭한 색채의 서정성을 표 현하였다. 그의 예술은 격정과 지성의 결합으로 형성되고 있다. 1904년에 그린 <르 페크 부근의 세느강> 에서 볼 수 있듯이 소박하면서도 활기에 찬 색의 조화는 그의 예술세계가 지니고 있는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드랭의 야수주의는 격정의 분출이라기보다는 아름다운 원색들의 배열이라고 해도 좋을듯하 다. 야수주의 작가중에서 가장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던 화가중의 한명인 드랭은 색으로 구성 적 가치를 창출해 내며 동시에 감성적 방향을 표현해내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주요 작품 : 물위에 비친 햇빛 효과, 콜리유에의 정박 등
들라크루아 Ferdinand Victor Eugene Delacroix (1853-1890/네덜란드)
1798년 파리 근교의 샤랑튼에서 태어났다. 낭만주의의 대표적 화가로 게랑의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공부하고 제리코를 만나 친하게 지 냈다. 영국과 모로코 등을 여행한 후 일기, 서간집, 평론집 등 여러 방면의 책을 저술하였으며, 셰 브를의 색체 연구로 인상파에 영향을 주었다. 특히, 단테, 셰익스피어, 바이런, 괴테 등의 저서를 주로 읽었으며, 여기서 착상을 얻어 강렬 한 색체의 드라마틱한 구도를 즐겨 사용하였다. 대표적으로는 '단테의 작은 배', '키오스 섬 의 학살', '알지에의 여인들' 등이 있다. 들라크루아 (Ferdinand Victor Eugene Delacroix,1798~1863) 프랑스의 화가. 샤랑트 현 생 모리스에서 태어났다. 1816년 관립 미술 학교에 입학하였고, 루브르 미술관에 다니면서 그림을 배웠다. 그리하여, 1822년 최초의 낭만주의 회화인 〈단테의 작은 배〉를 발표하였다. 1824년에는 그리스의 독립 전쟁에서 취재한 〈키오스 섬의 학살〉을 발표하여 ‘회화의 학 살’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하였지만, 힘찬율동과 격정적 표현은 그의 낭만주의를 더욱확립 시켰다. 낭만주의 회화의 성숙기를 가져온 그는, 여행을 통해서 본 중동 지방의 강한 색채와 풍속에 서 깊은 감동을 받아 동양적인 풍속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그 밖의 작품으로는 〈사르다나파르의 죽음〉 〈민중을이끄는 자유의 여신〉 〈파우스트 석 판화집〉 〈햄릿 석판화집〉 등이 있다.
디자인(design)
계획, 설계, 의장 등을 뜻하는 말. 디자인이라는 용어는 `지시하다'`표현하다'`성취하다'의 뜻을 가지고 있는 라틴 어의 `데시그나레'에서 유래한다. 디자인은 주어진 어떤 목적을 달성 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의 조형 요서 가운데서 의도적으로 선택하여 그것을 합리적으로 구성 하여 유기적인 통일을 얻기 위한 창조 활동이며 그 결과이 실체가 곧 디자인인 것이다. 다 시 말해서 주어진 목적을 조형적으로 실체화 하는 것이 디자인이다. 오늘날 디자인은 광범 위한 의미에서, 실용적인 목적이든 전시를 위한 것이든 어떤 인공물들에 대한 모든 계획을 의미하낟. 좁은 의미에서의 디자인' 이란 특히 `산업 디자인'과 같은 분야에서, 시장성을 개 선하거나 혹은 실용성과 경제성에 부응하는 한도 내에서 당대의 유행과 조화를 이루어야한 다는 목적을 갖고 있다. `디자인'이 이러한 의미로 쓰이게 된 것은 19세기 중반에 정부의 후 원으로 세워진 디자인 학교에서부터이며 공예운동에서 다양한 영항력을 행사하기 시작하였 다. <디자인의 본질>에서 피이(David Pye)는 어떤 디자인도 만족시킬 수 있는 여섯가지 조 건을 상술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① 계획의 기본 원칙을 올바르게 구체화하여야 한다. ② 도 안의 구성 요소들은 독특한 결과에 적합한 것이면 무엇이든지 기하학적으로 연결되어야만 한다. ③구성 요소들은 의도된 결과가 요구하는 힘을 전달하고 지탱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해 야 한다. ④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제공되어야 한다. 여기에 쉽고도 경제적이어야만 한다는 것과 도안의 형태는 수용가능한 것이어야만 한다는 조건이 부가된다. 20세기 초 특히 건축과 산어쩧품 분야에서 유행하였던 기능주의는 실용성과 경제성에 대한 요구, 그 자체가 최적의 디자인을 결정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후에 이러한 요구들이 외 형의 기능을 규제하고 지시하는 역할은 하지만 최적의 형태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온건한 관점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오늘날까지 미의 공리성을 추구하는 방향과 미의 절대 성을 추구하는 가치체계로 분리되어 있으나 이러한 두 가지 가치체계를 오늘의 사회에서 균 형있게 공존할 수 있게 한다면 어느정도 현대 디자인의 성과를 달성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디자인의 종류는 대체로 다음과 같이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① 인간 생활에 필요한 종보 와 지식을 넓히고 보다 신속·정확하게 전달하기 위한 시각을 중심으로 하는 시각전달 디자인 (visual communication design) ② 인간 생활의 발전에 필요한 제품 및 도구를 보다 다 량으로, 보다 완전하게 생산하기 위한 제품 디자인(product design) ③ 인간 생활에 필요한 환경 및 공간을 보다 적합하게 하기 위한 환경 디자인(environment design)등이다.